누 족 (怒族) |
인 구
- 1995년 통계에 의하면 누(怒)족의 인구는 약 27,000명이다.
- 1997년 통계는 28,700명으로 되어있다.
- 이들은 누쑤(怒蘇)', '아누(阿怒)', '아롱(阿龍)', '라오로우(擾柔)'등 4개의 지계(支系)로 분류된다.
분 포
누(怒)족의 분포지는 윈난성 누(怒)강 리쑤(LiSu)족 자치주의 삐쟝(碧江), 푸꽁(福貢), 꽁샨(貢山)란핑(蘭坪) 3개 현이다.
주요 거주지는 해발 1500-2000미터의 누(怒)강 양변이다. 역사의 기록은 누족의 명칭을 따서 누(怒)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강은 누족언어로 '누미꽈(怒米掛)'로 불리우며, 그 뜻은 '검은 물' 이다.
이 강은 시장(西疆) 탕구라(唐古拉)산을 발원지로 하여, 해발 5천미터가 넘는 까오리꽁샨(高黎貢山)과 4천미터 이상되는 삐루어(碧羅)설산(雪山)사이로 거세게 흘러내린다. 누강은 깊고, 계곡과 봉우리와 차이는 4천미터에 달해, 심산 유곡의 대협곡을 이루고 있다. 누강에는 배를 띄울 수 없다. 물살이 거세고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꽁산북부에는 매우 맑고 잔잔하게 물이 흐르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 자칭 '아롱(阿龍)'이라고 하는 누족이 늘 나무배를 띄우고 강을 건넌다.
누강이 굽이 흐르는 곳에는 약간의 충적지가 생긴다. 심산유곡의 강 양변은 건조하고 더우며, 산 허리는 온난하다. 허나, 산맥의 한량한 기후는 누족으로 하여금 깊은 산 숲속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곳은 각종 약재와 동물들이 있어서, 누족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당연히 누족에게는 이러한 동식물과 연관된 신화와 무용, 음악 등이 있다.
명 칭
누(怒)족은 스스로를 '누쑤(怒蘇)', '아누(阿怒)', '누(怒)', '아롱(阿龍)', '쿠쿠(苦苦)' 라고 부른다. 누(怒)강의 리쑤(LiSu)족은 누족을 '누빠(怒Ba)', '누랑(怒讓)' '누스(怒拾)'라고 부른다.
역사기록은 '루만(路蠻)', '루루(廬鹿)', '누이(怒夷)', '누런(怒人)'로 되어있다.
중국건국 이후, 누족의 관습과 본 민족의 바램대로 명칭을 누(怒)족으로 정했다.
1950년대 이후에 수차례에 걸친 조사와 연구에 의하면, 꽁샨(貢山), 푸꽁(福貢)에 있는 자칭 '아누(兒怒)', '아롱(阿龍)'의 누족들은 두롱(獨龍)족과 가까운 혈연 친족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삐쟝(碧江)현의 자칭 '누쑤(怒蘇)'와 란핑(蘭坪)현의 자칭 '쿠쿠(苦苦)'는 언어, 습관, 관습 면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관계이다.
언 어
누(怒)족 언어는 한장어계(漢藏語系) 장면어족(藏緬語族)에 속한다.
하지만 '삐쟝(碧江)'현과 '푸꽁(福貢)현'의 누족어와 '꽁샨(貢山)'의 누족어는 거다란 차이가 있다. 문법의 부분에 있어서 '꽁샨' 누족어와 '푸꽁' 누족어는 모두 특수한 동사 변화가 있다, 하지만 '삐장' 누족어는 이러한 동사 변화가 없다. '꽁산' 누족어와 앞서 언급한 두지방의 누족어는 단지 10%의 단어가 상관관계에 있을 뿐이고, 언어에 어떠한 규칙도 연관되어 있지 않다.
문 자
누(怒)족에게 문자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옛날에 누족에게는 자신만의 문자가 있었다. 단 그 문자는 양가죽에 씌여있었다. 후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개들이 양가죽을 먹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부터 누족에게는 자신만의 문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고, 실제로는 누족에게는 자신만의 문자가 없다. 사람들이 중오한 일을 기록하거나 소송을 진행할 때는, 목각이나 매듭을 이용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썼다.
또다른 방법으로는 돌이나 대나무를 사용하는 것이다. 대,중,소 세가지를 사용해서 숫자를 만들어낸다. 가령 10개면 작은돌 열개, 11개면 중간돌 하나와 작은돌 열개 등으로 말이다.
민족 역사
누(怒)족 사회에 전해내려오는 신화와 전설을 통해, 누족의 초기 사회를 엿볼 수 있다. 여타의 민족과 마찬가지로 '홍수시대', '근친결혼' 그리고 모계사회를 거쳐왔다. 그 가운데 근친결혼으로 번성을 꾀하는 방법은 중국 '칭장(靑藏)'일대의 씨족과 관련이 깊다.
관련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누(怒)강이라는 이름은 '[만슈(蠻書)]'라는 책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러한 이유로, 누족은 당나라때 이미 누강 유역에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누(怒)족은 누강 양안과 '란창(瀾滄)'강 유역에서 살던 고대 주민이다.
이들의 본래 거주지는 리쟝(麗江)과 지엔촨(劍川) 일대였다. 후에 여러 이유로 쫓겨서, '란핑(蘭坪)'현에 있는 '란창'강 양안에서 살았고, 후에 누강 지역으로 들어왔다.
지금도 '리쟝'현에 있는 '지우허샹(九河鄕)', '지엔촨' 북부와 '란핑'일대에는 누족의 선민이 남긴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리쟝 지우허샹'의 '롱이(龍邑)', '따꺼라(大格拉)', '샤오꺼라(小格拉)', '지엔촨'현의 '탕량(堂郞)'촌, '란핑'현의 '미루어이(彌洛衣)', '언쟈오(恩照)'등이다. 이런 것들은 누족의 선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촌락의 이름이다.
또한 '꽁샨(貢山)' 북부의 누족은 천년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왔기에 인근에 있는 두롱(獨龍)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1960년대 이후에 누강 지역에 대한 집중 연구결과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이는 누족이 누강 양안에 제일 먼저 들어와 거주한 민족임을 말해준다.
16-17세기 때에 많은 리쑤(LiSu)족이 전쟁을 피해서 누강으로 이주하였다. 그 이후로 한족, 바이(白)족, 나시(納西)족등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쉬지않고 누강지역으로 들어왔다.
누강에서 누족처럼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이 없다. 이들은 누족 언어 외어, 바이(白)족, 리쑤(LiSu)족, 장(藏)족 언어를 할 줄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민족들과 같이 살며, 통혼하고, 생활의 여러부분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성격이 명랑 쾌활하고 문화가 다채롭다.
'푸꽁'누족과 리쑤족이 연관을 맺은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으나, 이들은 서로 통혼하며, 종교에 있어서도 리쑤족의 무당인 '니빠(尼Ba)'를 신봉한다. 이외에도 서로 짐승을 빌려주고, 품앗이를 하며, 건물을 짓는데 도와주는 등, 상부상조의 관계를 맺고 있다.
'꽁산'의 누족은 장족과 함께 살기 때문에, 의식주의 여러면에서 장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꽁산'의 누족이건 '푸꽁'의 누족이건 '여시조(女始祖)'를 신봉한다. 전자는 지혜의 여신인 '지아얼(卽阿Er)'여신을 믿고, 후자는 '마오잉츙(茂英充)'여신을 공양한다.
주 거
까오리꽁샨(高黎貢山)과 삐루(碧羅)설산의 험준한 줄기, 심심유곡의 누강 양안에 있는 약간의 충적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양안은 절벽의 대협곡으로 되어있다. 이곳에서의 건축방식은 '치엔쟈오루어띠(千脚落地)'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집을 지을때 비탈의 경사면에 먼저 몇십개의 기둥을 박는다. 기둥의 사이에는 횡목을 걸치고 그 위에 널판으로 덮는다. 네 벽을 만든 다음 지붕은 풀이나 판자로 덮는다. 문 앞에는 작은 복도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방은 2-3개를 꾸미는데 바깥쪽은 손님을 위한 방이다. 매 방에는 훠탕(火塘)이 있고, 훠탕 위에는 삼각 받침대나 돌 세개를 놓는다. 이러한 구조는 나무를 구하거나, 이사를 할 때 용이하고, 배수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서 누쟝(怒江)의 기후에 적합하다.
꽁산의 가옥구조는 동일하지 않다. 그 지역흔 풍화암으로 인한 돌조각들이 많아서 벽을 흙으로 만든다. 상부는 나무로 하부는 흙으로 만드는데, 모든 방에는 흙벽이 있다. 방바닥은 석판이나 목판을 깐다. 마루는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서 위에는 사람이 살고, 아래는 일반적으로 가축을 키운다.
사람이 사는 층에는 두칸 이상의 방이 있는데, 매 방마다 훠탕이 있다. 하나는 객실로, 하나는 주인의 침실로 사용되는데, 주인의 방 안쪽에는 양식과 의복을 보관하고, 외부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누족의 초기 거주형태는 동굴 안에다 초가집을 짓는 것이었다. 생산력의 발전과 주변 타민족의 문화적 영향으로 이들의 주거 형태도 원래의 '치엔쟈오루어띠'형태 외에 몇가지를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속칭 '슈팡(竪房)'이라고 하는 가옥구조가 있다. 6개의 기둥으로 방한칸을, 9개로 두칸을, 12개로 3칸을 만들거나, 8개의 기둥으로 방한칸을 12개의 기둥으로 두칸을 만드는 형이 있다.
모두 3층으로 되었는데, 제일 윗층은 곡식을 보관하고 아랫층은 농사 도구를 놓아두며, 중간층에는 사람이산다. 방 내부에는 훠탕이 있고, 아래로 내려가는 복도와 계단이 있다. 이러한 '지엔팡'구조는 평지, 비탈길 어디서든지 짓기에 용이하고, 통풍이 잘되며 빛도 잘 들어온다.
또다른 하나는 '스토우팡(石頭房)'인데, 강변 일대에 사는 사람들의 가옥형태다. 일반적으로 2-3개의 방을 만들고, 각 방에는 문이 있으며 실내에는 사람이 산다. 대들보 위에는 양식을 놓는다. 다른 곳에 가축을 위한 구조가 있다. 이러한 가옥구조는 1980년 이후 점점늘고 있다.
누족의 촌락 70%는 '누쟝' 양안 해발 1500-200미터 정도의 산허리에 분포되어있다. 소수의 산촌이 강변을 따라서, 혹은 산 깊숙히 있다. 누족의 촌락은 '카'로 불리운다. 이 '카'는 2개 이상의 씨족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한 촌락에 보통 20-30호가 있으며, 많은 곳에는 50호, 작은 곳에는 10 정도가 있다. 이러한 촌락은 대부분 혈연 친족관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 다른 촌락형태는 누족과 리쑤족, 장족등의 잡거형태로 푸꽁(福貢)의 쯔루어(子羅), 과커(果課), 구취엔(固泉), 무구쟈(木古甲)등에 있다.
경 제
1949년 이전의 누족은 나시(納西)족과 장(藏)족은 봉건영주경제와 바이(白)족과 한(漢)족의 지주경제등의 영향을 받아서, 원시공유제, 봉건영주제, 지주경제등 여러가지 경제제도 형태를 보여왔다. 특히 토지제도는 각 농민의 사유, 원시공유가 혼재하였다.
촌락의 공유, 씨족공유, 가정 공유제도가 성행할 때, 토지의 매매, 세금, 저당, 압류등 지주경제의 현저한 특징이 나타났다. 조성된 토지의 매매원인은 사망, 결혼, 도박, 소송, 식량부족, 빚등이었고, 그중 초상이나 결혼시에 토지매매가 많이 이루어졌다. 한편 누족 사회에는 고용제도가 뚜렷하게 실시되었다.
누족 사회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결혼은 한대에 걸친 것이고, 토지는 백년에 걸친 것이다" 이는 누족사회발전중 토지가 차지하는 위치를 적절하게 나타낸 말이다.
중국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1953년 제1차 협동조합이 결성된 이래 총촌의 초기 농업생산협동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 이후 지구내의 토지분산, 흩어진 거주지의 특징적 형태로 인해 생산책임제를 도입하였고,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생산방식
누족의 거주지 및 누쟝(怒江) 양안의 협곡은 해발 4천여미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한대 온대 열대등 다양한 기후를 보이는데, 강변 계곡은 덥고 겨울이 짧다.
산중턱의 기후는 온화하고 겨울에 그다지 춥지 않으며 여름에는 건조하고 덥다. 산 위는 춥고 일년에 6개월 이상 눈으로 덮힌다.
이러한 입체적 기후는 풍부한 동식물 및 약재를 제공한다. 험준한 산세 가운데서 10무정도의 밭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많은 곳에 돌이 있으며, 풍화작용이 심해서 곳곳에 돌조각이 있다.
의복
누족의 남자들은 마로 된 중국식 두루마기, 짧은 바지를 입으며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을 기르거나 묶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성년이 된 남자는 항상 왼쪽 허리에 도끼를 차고, 오른쪽 어깨엔 석궁과 전통을 차고 다녀 용맹스럽고 민첩함을 나타낸다.
부녀들은 긴 치마를 하의로 입고 무늬있는 테두리를 좋아한다. 각지의 누족 부녀들은 모두 가는 등나무 고리를 머리에 감거나 허리에 감기를 좋아한다.혹은 발의 복사뼈 부근에 칭칭 감아서 장식을 한다. 이들은 남녀 모두 장신구를 좋아하는데 산호(珊瑚), 마노(瑪瑙)로된 머리장식과 가슴 장식을 화려하게 달고 다닌다.
사회관습, 모임, 계층구조
장례식을 중시 여김과 아울러 제사장소 부근의 나무들은 함부로 찍지 못하고 그 근처에서 사냥할 수도 없으며 신을 제사지낸 곳에서 대소변을 볼 수 없고 집안이나 밖에 있는 신주를 다치지 못한다.공산현의 무당 "나무사"는 해마다 있게되는 추수 이후의 마을 집단적 제사를 주최한다.
늙은 남자가 죽으면 참대 나팔을 부는데 그 나팔의 수효는 사망자의 신분과 나이에 따라 증가되었다.미혼자면 하나만 불고 자녀가 있으면 두 개를 불고 우두머리나 무당이면 6∼7개를 분다. 참대 나팔을 부는 것은 마을에 부고를 알리는 동시에 사망자의 혼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이다. 여자나 아이가 죽으면 나팔을 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들의 부형들이 앞에서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나팔소리를 들으면 씨족 전체 또는 마을 전체가 사흘 동안 밭에 나가 일하는 것을 중지하며 이유는 귀신을 만나 병들거나 곡식에 피해가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사람마다 술 한병을 들고 조상을 가서 사망자와 함께 이별주를 마신다.
무당이 술 가지고 온 사람의 술을 한잔 부어 사망자 앞에 흘려 놓음으로써 이별을 표시한다. 사망하여 이틀이나 사흘 후에 공동묘지에 가져가 묻는다. 발인시에 세로인이 칼을 휘두르며 앞에서 길을 인도한다. 묻은 뒤 무덤앞에 사망자가 생전에 쓰던 물건 들을 놓아둔다. 남자면 활과 화살총을, 여자면 음식 만드는데 쓰는 도구와 베짜는데 쓰던 도구들을 놓아둔다. 이것은 저승에 간 뒤에도 살았을 때처럼 생활하기에 이 물건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잘 사는 집들에서는 노인이 사망하면 공동묘지에 가져가지 않고 집 뒤 뜨락에 묻는다. 이것은 먼 옛날에 장례법으로서 사망자의 영혼이 집을 떠나가지 않게하고 집에 남아서 집 식구들을 보호하게 하는 것이다.
절기에는 "약권"과 "여위"등이 있다. 시기는 다른데 원단 전후와 구정 전후의 두가지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선녀절"을 지내지 않는다. 누족은 선녀를 신봉하는데 모계 씨족이 여성을 존중하는 풍습의 하나이다. 현재 선녀절을 지낼 때 함께 물자를 교류하는 큰 모임을 열고, 방직, 문예, 연출, 영화상영도 함께 한다. 또한 조정경기와 활쏘기 대회 등의 체육행사도 한다.
누족들은 오랫동안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혼인을 결정하였고 결혼하려면 소 몇마리를 여자집에 예물로 바쳐야 했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이 결혼을 포기하기도 했으나 기독교에 가입한 뒤부터는 달라졌고 현재는 청년 남녀가 결혼전에 비교적 교제하는데 비교적 자유가 있고 서로 팔지, 목걸이등을 정표로 교환하고 다시 남자쪽 집에서 매파를 통해 혼담을 꺼낸다.
누족의 작명법은 독특하다. 남자의 경우 일생동안 3가지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아들이 태어나면 아버지 또는 백부나 할아버 지가 아명을 지어주는데 이것이 최초의 이름이다. 아명은 부르기 좋은 글자를 골라 지어준다. 두 번째는 14∼15세가 되어 자유로이 공방(公房:젊은이들이 모여 노는곳)을 드나들면서 이성을 접촉하여도 좋을 시기가 되면 새 이름을 지어준다. 단 이 성인명은 어른들 앞에서 절대 말하면 안된다. 세 번째는 결혼기에 접어들어 짓는 이름으로 이 이름이 평생동안 지녀야할 공식 이름이다. 이 이름은 첫 번째의 아명에다 아버지 이름의 끝 글자를 전치시(前置)시키는 부자 연명제 형태이다. 이들에게는 일정한 성(姓)이 없고 부자연명제를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키는 이유는 부계 혈통을 보존한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편 여자는 아명과 성인명의 두가지이고 성인명은 남자보다 한 살 빠르게 아버지가 지어주는데 이유는 여자가 사춘기가 남자보다 빠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의 이름은 꽃이름에서 따서 붙이기 일쑤다.
누족은 남자가 죽으면 손발을 펴서 위쪽으로 향하도록 눕히고 여자는 손발을 구부려 옆쪽으로 휜 자세로 매장하는데, 주로 합장이다. 이것은 생전에 부권(父權)이 상위에 있고 아내는 남편에 종속되어 있다는 남존여비 사상에서 비롯된 봉건적인 인습의 잔재이다.
축제, 오락, 예술양식
누족은 각종 동물의 생활 습관에 대해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어서 동물의 행동을 본뜬 많은 춤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렵, 채집 생산활동과 생활습관을 표현하는 춤이 있는데 수렵무, 대잎 모으는 춤, 수확춤, 혼례춤, 세탁춤, 비파춤 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 누족인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춤을 통해서 진솔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춤의 동작은 활달하고 민첩하며 춤추는 자태는 웅건하고 호방하며 리듬이 경쾌하며 활력이 있다. 그리고 형상은 생동감이 있고 마치 진짜와 같으며, 향토적 냄새가 매우 풍부해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악기로는 "다비야"(비파), 구현, 피리, 호호생이 있고 그 중에 다비야가 가장 널리 쓰이며, 많은 남자들이 거의 연주 할줄 안다. "다비야"는 비파같이 생겼고 타원형과 삼각형의 두 종류가 있으며 먼곳으로의 여행, 사냥, 생산활동, 혼사 , 절기 때는 물론이고 소녀에게 구애할 때 모두 "다비야"는 청년의 친숙한 동반자이다. 누족소녀가 직접만든 구현을 연주할 때, 입 모양과 손가락 튕기는 것을 통해 종종 말로하는 것보다 더 자신의 깊은 내면의 깊이를 표현하곤 한다.
문화의 특성
ㆍ씨족 사회이다. ㆍ작명법은 남자의 경우 일생동안 3가지의 이름을 가진다. ㆍ부자 연명제이며 남자의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의 끝을 전치(前置)시킨다. ㆍ장례를 중시 여기나 조상을 대상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ㆍ토템이즘으로 종교심이 깊다. ㆍ누족은 씨족사회의 집합으로 씨족마다 각각 다르다. ㆍ일부 일처제 이지만 부자는 여러명의 처를 거느릴수 있다. ㆍ촌락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10가구∼50가구까지 다양하다. ㆍ모든 촌락의 가족구성원은 혈연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ㆍ남자는 결혼후 부모가 살고있는 지역 근처에 별도의 신방을 짓고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는다. ㆍ부모는 막내와 함께 살수 있고 재산은 그에게 승계된다.
종교분야
누족의 신앙은 원시종교, 천주교, 기독교, 라마교 등 4가지 형태이고 누족의 고유 종교는 애니미즘이다. 자연 만물에 신이 있다고 믿으며 일부 누족들은 장족(藏族)의 영향을 받아 라마교를 신봉하고 있다.
그런데 누족들이 사는 지역이 서로 다름에 따라 그 자연, 사회적 환경도 차이를 보이기에 그 신앙 대상들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ㆍ벽강지역의 누족
그들이 신봉하는 귀신은 13가지 이며 씨족신, 자연신, 재앙신, 민족신의 네가지로 나눌수 있다. "먼둬(門多) "나 "줘미치"는 민족 전체와 마을들에서 공동으로 제사지내는 신이다. "먼둬"는 하늘귀신인 동시에 부락신이기도 하다. 그는 누족의 "더우훠"씨족들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러기에 더우훠 씨족에 속하는 마을들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먼저 귀신에게 제사지내어 마을의 평안을 빈다.
"줘미치"는 복을 내리고 재앙을 제거하는 신으로서 "더우훠"씨족과 "다훠"씨족이 공동으로 모시는 귀신이다. 해마다 두 씨족의 모든 성원들이 함께 모여 제사 지내는데 두 씨족의 우두머리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제사에는 한 집에서 살찐 돼지머리를 내고 그 나머지 집들에서는 강냉이 한 되씩 거두어서 돼지 머리를 낸 집에 가져다 준다. 이것으로 돼지머리는 공동이 부담한 것이 되며 두 씨족의 남성들은 모두 제사에 참여하여 술마시고 고기를 먹지만 여자들은 참가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누족에게는 농업과 수렵을 관장하는 귀신이 있는데 산귀신인 "미구위"와 물귀신 "두요위"등이 있다. 누족들은 생상과 각종 질병의 모든 불상사를 귀신의 조화로 여기며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으로는 "요위", "이위 ", "팬쿵위", "메이아이" 등이 있다. 사람이 병걸리는 것은 이런 귀신이 사람의 혼을 잡아갔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때 무당을 청해 하는 굿이나 점으로 귀신의 장난인가 알아낸 뒤 짐승을 잡아 그 귀신에게 제사지내면 병자가 나을 수 있다고 믿는다.
누족은 역사적 억압과 수탈 속에서 누족에게는 민족귀신이 생기는데 "머위"는 리수족 귀신, 바이족 귀신이다. 그래서 민족싸움이 벌어질때마다 진정시키게 해달라고 머위 귀신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ㆍ복공, 공산 북쪽과 벽강에 사는 누족
그들이 신봉하는 귀신은 다른데 복공지역의 귀신은 산귀신 "콴쯔", 천지귀신 "둥니", 전쟁귀신 "마이니", 온역귀신 "니주", 충돌귀신 "추라" 등 십여종의 귀신을 신앙한다. 또한 리수족의 영향 밑에 리수족 귀신, "니우"를 신봉한다. 이 귀신이 리수족에게 속한 귀신인데 누족도 신봉하는 것이다.
ㆍ공산지역의 누족
그들이 숭배하는 귀신들로는 물귀신 "앙부라", 산귀신 "무리부라", 길귀신 "무후부 라", 나무귀신 "츙나디부" 등 십여종이 있다. 이들은 모두 악귀로 해마다 마을 전체적으로 두 번 제사지낸다. 첫 번째는 질병을 물리치기 위해 하는데 닭과 돼지를 희생으로 한다.
두 번째는 풍작을 거두기 위하여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데 달걀을 제물로 한다. 제사는 무당이 주최하고 마을사람 모두가 참가한다. 그리고 각 씨족을 관리한다는 귀신 "챵부라"도 있다. 해마다 대개 씨족들이 제각기 서로 다른 시간에 제 씨족들 만 모여 제사지낸다.
중화 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에 누족 가정은 일부 일처제를 실시하였는데 가정이 누족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였다.그러나 원시시대의 씨족제와 부락 공동체가 여전히 정도부동하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씨족과 부락공동체의 상징으로 토템숭배의 잔재도 보존하고 있다.
ㆍ벽강 지역에 사는 누족
그들은 씨족들마다 토템이 있어 그것을 다른 씨족들과 구별되는 표징으로 삼는다. 벽강의 구촌에는 "베아치"와 "라윈치"라 부르는 씨족들이 있는데 이 두 씨족의 토템은 벌과 범이다. 벽강현 보동(普東), 로 모등(老母登) 등지에 사는 누족들 가운데는 "미헤이화"라 부르는 말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씨족, "미버화"라 부르는 고라니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 "야죠화"라는 뱀을 토템으로 하는 씨족 등이 있다.
씨족들의 토템 유래에 대해서는 씨족마다 서로 다른 전설이 있다. 범씨족과 벌씨족은 자기들의 최초의 여시조가 "머잉충 "이었다 한다. "머잉충"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이다. 범씨족의 전설에 의하면 머잉충이 하늘에서 내려와 검은범과 혼인하여 자식을 두게 되었는데 그 후손들을 "라윈치" 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족 말에서 "라"는 범이란 말이며 "윈치"는 씨족이란 말로 "라윈치 "는 "범씨족"이란 말이다.
뱀씨족도 토템 전설이 매우 많은데 그 내용은 비슷하다.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 한 처녀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큰 뱀을 만나 혼인하여 생겨난 후손들이 뱀씨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누족들은 벌치기에 능하였는데 특히 벌씨족들은 벌을 잘 키우고 밀랍도 잘 만든다. 그리하여 벌은 그들의 샐활자료의 주요한 원천으로 되었다. 그래서 벌이 토템으로 된 것이고 옛날 누족이 살던 곳에서는 범과 뱀이 자주 나타나서 사람들을 위협했고 이러한 동물들에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그것들을 신으로 받들게 되어 범, 뱀을 토템으로 한 것이다.
누족들 가운데서 종교 행사를 주최하는 사람은 무당이며 무당은 귀신쫏는 일 외에 의원을 겸하여 병치료도 한다. 무당은 누족사회의 지식층으로 자기 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익숙히 알고 자기 가족과 씨족의 역대 조상들의 계보도 잘 알고 있기에 민족의 역사와 지식을 사회에 전수하는 사람들이다. 지위가 높은 무당은 씨족이나 마을의 우두머리를 겸하며 이들은 농업생산에서 이탈되지 않으며 종교 활동에서 받게되는 보수도 매우 적다.
복공지역의 무당은 어느정도 소임을 분공에 따라 맡고 있다. "니마"는 육안으로 병자를 해치는 귀신을 볼수 있고 저승세계도 볼수 있기에 병자를 치료할뿐만 아니라 병자를 대신하여 저승에 가서 떠나간 혼을 데리고 올수도 있다 한다.그는 사람의 혼을 거두어 들여 죽게 할수도 있고 이리하여 니마는 규모가 큰 종교행사를 주최하면서 병치료에서도 많은 보수를 받게 되었다. "다스"각종 주문을 익숙히 알고 있고 점치는 것과 집귀신 제사, 산신제사등을 맡아본다. 그러나 니마와 다스는 서로 예속되는 관계가 아니며 노동에도 다같이 참가한다.
ㆍ장족들과 이웃하고 있는 공산 북쪽지역의 누족
그들은 라마교 "홍교"파에서 세운 "보화사(普化寺)"의 영향으로 하여 적지않은 누족들이 라마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라마교 절간의 지배 밑에 있던 농노들과 소작농들이 경제적으로 가혹한 수탈을 당하는 한편 인신 자유도 절간 우두머리에게 그속당한다. 일부 누족들은 절에서 라마 노릇을 하면서 극도로 빈궁한 생활을 겪는다. 기타 라마교를 믿는 민중들도 해마다 절간에 향불 올리는 돈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어렵게 살아간다.
기독교 상황
청나라 말엽 중화민국 초기에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천주교와 기독교가 선후로 누강 지역에 들어온다.
1885년 프랑스 국적의 천주교 선교사 사탁임안수(司鐸任安收)가 신부 여러사람을 데리고 덕흠(德欽), 중전(中甸), 유서 등지를 거쳐 공산 북쪽에 있는 데이하뤄, 차라, 빙중뤄 등 부락들에 찾아온다. 이곳의 장족 누족 리수족 등은 모두 라마교를 신봉한다 . 천주교 선교사들은 저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장족, 누족 들이 라마교를 믿는 것을 금지시키고 토지를 강점하여 교회당을 세우며 작은 은혜를 베푸는 수단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교회에 들게 한다. 그러면서 민족 모순도 도발시킨다. 이런 행위는 장 족, 누족들의 분노를 자아낸다. 아울러 라마교에 대한 배척도 라마교 절간의 불만을 자아낸다.
1906년 한 프랑스 신부가 장족 라마를 구타한 사건이 장족, 누족, 리수족들의 격분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천주교 교회당을 불사르고 프랑스 신직자 5명을 죽인다. 사탁임안수만이 외양간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구한다. 이것이 유명한 공산 지역의 반천주교 사건이다. 이 소식에 접하자 청나라 정부에서는 운남 귀주 총독에게 명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를 보호한다는 명의로 민중들을 탄압하게 한다. 그 뒤 청나라 정부에서는 프랑스 천주교에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경비로 은 15만량을 바친다. 그리고 임안수를 3품 관리로 봉하고 이때부터 임안수는 제 마음대로 행세하면서 땅을 넓게 차지하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이하뤄, 차라, 빙중뤄 등지에 교회당을 세 개나 세운다. 그 중에서 바이하뤄 교회당이 제일 컷는데 예배당을 600명을 수용할수 있게 지었다. 이 교회당은 천주교 서강(西康), 강정(康定)교회 기구의 지도를 받는다. 1948년까지 500여명에 달하는 여러 민족 민중들이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는데 그중에 누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1913년 천주교의 대를 이어 기독교도 노강 지역에 들어온다. 1921년 미국 목사 양사혜(楊思惠)가 로수로부터 벽강에 와서 포교 활동을 벌인다. 1932년 기독교는 복공까지 퍼지며 1932년 카나다 사람 마도명(馬道明)이 복공에 와서 교회 조직을 세운다. 중화 인민공화국 성립 이전까지 벽강, 복공에는 5,000명에 달하는 누족 신도들이 있었는데 이는 이 지역 누족 총 인구의 61%를 차지한다. 그중 벽강 구촌(九村)의 169가구 668명 가운데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126가구 444명에 달하여 신도가 마을 총 인구의 66.4 %를 차지한다. 복공 무구쟈(木古甲)촌에는 누족이 30가구, 135명 이었는데 그중 기독교 신자가 22가구, 87명에 달하여 마을 총 인구의 64%를 차지한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수입은 누족 사회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온다.일부 기독교를 신봉하는 씨족들은 그 우두머리가 교회의 선교사로 되거나 집사로 되었다. 이리하여 세로운 정교 합일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원시종교의 영향밑에 사람들이 병나거나 불상사가 생기면 대량적으로 짐승을 잡아 귀신에게 제사지내며 막대한 낭비를 초래하던데로부터 기독교를 믿게되면서 외국 목사에 의하여 위생 지식을 알게 되고 병들면 약먹고 주사를 맞아 발병률과 사망률이 감소되었다. 그리고 누족 남자가 장가들려면 여자 짐에 소 몇마리를 바쳐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이 기독교에 가입한 뒤 교회에서 혼인 자유를 주장하고 예물도 소 한 마리로 규정하였기에 청년 남녀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교회의 이런 처사는 객관적으로 누족들의 낙후한 습관 들을 개변시켰고 유혹도 컷기에 적지않은 누족들이 천주교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외국 선교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종교를 일종 침략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누족들을 억압한다. 그들은 사사로이 법정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건에 간섭하며 민족 모순도 도발하고 민족 문화도 파괴한다. 그들은 비밀리에 무전기와 무기를 감추어 두고 간첩 활동에도 종사하고 누족들을 조국을 배반하도록 선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행위들은 저들의 간악한 본질을 드러내여 누족들의 반대를 받는다. 누족들은 다른 민족들과 단합하여 외국 침략세력과 맞서서 조국의 통일을 수호하였다. |
더앙족 (德昻族) |
인 구
중국 더앙족의 인구는, 1995년 통계에 의하면 16,500명이다. 1964년에 7,000명이었는데, 1982년 12,275명에 달해 69.33%가 증가하였다. 매년 2.97%의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1990년 인구는 15,399명이어서 1982년과 비교할 때, 25.45%가 증가하였고, 년 평균 증가율이 2.87%이다. 미얀마의 뻥롱(崩龍)족(;더앙족)은 24만여명 정도다
자연환경
중국의 더앙족은 모두 윈난성 내에 분포하고 있다. 주요 거주지는 윈난성 더홍(德宏)따이(Dai)족-징포(景頗)족 자치주의 루시(潞西), 루이리(瑞麗), 량허(梁河), 롱촨(Long川)등의 현(縣)지역과 바오산(保山)지구의 바오산현, 기타 린챵(臨滄)지역의 젼캉(鎭康), 껑마(耿馬), 용더(永德)등의 현지역, 그리고 쓰마오(思矛)지역의 란창(瀾滄)현에 살고 있다. 모두 윈난성의 서남부 변경 일대다. 대부분의 마을은 산악 지역에 있으며, 징포(景頗)족, 한(漢)족, 리쑤(LiSu)족, 와(Wa)족 등의 주거지와 곂쳐있다. 일부 구릉지역에 사는 더앙족은 따이(Dai)족 마을과 섞여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까오리(高黎)꽁샨(貢山)과 누샨(怒山)산맥의 자락인데,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그리고 란챵(瀾滄)강, 누(怒)강, 따잉(大盈)강 유역은 많은 산과 계곡, 분지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양 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알맞다. 구릉지역의 연평균 온도는 22℃이고, 산지역은 19.5℃이다. 년 평균 강수량은 1,500mm 가량이며, 18%의 비가 5-10월에 내린다. 특히 7-8월에 집중된다. 기후는 건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여름에는 덥지 않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거나 얼음이 얼지 않는다. 이 지역은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따라서 양질의 각종 목재와 약재가 많이 나며, 동식물 자원이 무척 많다.
명 칭
더앙족은 자칭 '더앙(德昻)', 타칭 '뻥롱(崩龍)'로 불리운다. 청대 이후에 기록된 윈난지방지 가운데에는 '뻥롱(崩龍)', '뻥즈(崩子)', '뻥즈(繃子)'로 기록되어있다. 현재의 중국이 세워 진 초기에는 '뻥롱(崩龍)'이라는 명칭도 같이 씌여지다가, 1985년 9월 중국 국무원의 비준하에 '더앙족(德昻族)'족으로 공식화되었다.
'더앙(德昻)'은 더앙족속의 말이다. '昻'은 '산의 바위', '산의 동굴'이라는 뜻이고 '德'는 존칭어이다. 따라서, 더앙족의 조상은 산의 동굴에서 살았으며, '德昻'이란 조상의 이러한 생활역사를 기려 지어진 것이라 하겠다.
지 계
더앙족의 지계는 비교적 많다. 루마이(汝買),루앙(汝昻), 루커(汝科), 루왕(汝旺), 루궈(汝果), 루뽀(汝波), 루진(汝進), 루어(汝峨), 루뻔(汝本), 루비에야(汝別牙), 루라(汝臘), 루왕(汝王), 루비에리에(汝別列), 루더비 에리에(汝得別列), 루멍띵(汝孟丁), 루뿌똥(汝布冬), 루뿌어(汝不峨), 루멍더띵(汝孟得丁), 루꺼뤄(汝各若)등 20여개 이다. 그 가운데 루진(汝進), 루커(汝科), 루마이(汝買)등 7개의 지계는 중국에 분포하고, 나머지는 미얀마에서 거주하고 있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윈난의 더앙족을 루마이(汝買), 뿌레이(布雷),량싼(梁三)등 3개 지계로 보고있다. 부녀자들의 치마무늬를 근거로 하여, 한족들은 "헤이더앙(黑德昻)","홍더앙(紅得昻)", "화더앙(花得昻)"으로 나누고 있다.
언어와 문자
더앙족은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남아어계(南亞語系) 멍까오미엔(孟高棉)어족 와더( 德)어지에 속한다. 이것이 "루마이(汝買)", "뿌레이(布雷)", "루진(汝進)", "따앙(達昻)"등 4개 방언으로 나뉘어진다. 따앙(達昻)방언은 젼캉(鎭康), 껑마(耿馬)지구의 더앙족이 사용하고 있고, 루마이(汝買)등의 방언은 흩어져 있다. 더앙족의 언어는 장단, 파열음, 파찰음등이 분명하며, 비음이 청과 탁으로 구분되어있다. 복자음이 비교적 풍부하며, 성조가 없다. 인칭대명사가 단수 복수, 쌍수로 구분되며, 언어의 순서는 주어-동사-목적어로 되어 있어, 한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
중국의 더앙족은 민족글자가 없어서 한자를 차용하여 쓰고 있으며, 일부는 따이(Dai)어를 이해한다. 과거에는 따이문자을 이용하여 자신의 민족어 자모를 발음하였으나 그 사용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미얀마의 더앙족도 원래는 문자가 없었다. 후대에 미얀마어등의 문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더앙문자를 만들었다. 이를 이용하여 수십년에 걸쳐 문자를 다듬었으며, 이미 민족문학작품 및 역사, 전설등을 기록하였다.
기 원
더앙(德昻)족과 남아어계(南亞語系) 멍까오미엔(孟高棉)어족의 와(Wa)족, 뿌랑(布朗)족, 커무(克木)인등은 고대의 "바이푸(百Pu)" 족에서 나왔다. 이들은 운남 남부와 미얀마 중부지역에서 살던 토착민이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 남중지(南中志)』가운데 용챵(永昌)군에 '민푸(MinPu)', '루어푸(裸Pu)'라는 이름의 족속이 살았다는 흔적이 있다.
진한 시대에 용챵군의 범위는 지금의 바오샨지구, 더홍(德宏)지구, 린창(臨滄)지구, 쓰마오(思矛)지구, 시쐉반나(西雙版納)를 포함하였다. 이렇게 커다란 지역에 바이푸(百Pu)족의 부락이 분포되어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생산된 큰 대나무가 유명하여 '푸주(Pu竹)'라 불리웠다.
당나라때, 원래의 '민푸(MinPu)'지역에 '푸즈만(撲子蠻)'족이 등장한 기록이 있다. 『운남지(云南志)』제4권에 보면, "푸즈만(撲子蠻)은 용감, 민첩하고 , 바지를 입는다......카이난(開南),인셩(銀生),용챵(永昌), 쉰촨(尋傳) 네지역에 산다. 란창(瀾滄)강 서북쪽에 철다리를 설치해 놓은 부락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푸즈만(撲子蠻)의 분포상황은 진한시대의 '민푸(MinPu)'와 지역적으로 일치하며, '撲'와 'Pu'가 발음상 동음인 것을 미루어 볼 때, 앞의 두 명칭은 같은 민족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와 명나라때, 푸즈만(撲子蠻)은 '푸런(蒲人)' 혹은 '푸만(蒲蠻)'으로 불리웠다. 『운남지략(云南志略)』은, "푸만(蒲蠻), 일명 푸즈만(撲子蠻)이라는 족속이 란창(瀾滄)강 서쪽에 살고 있다"고 적고 있으며, 『백이전(百夷傳)』은, "윈난서남쪽 수천리 되는 곳에 바이이(百夷)가 사는데, 넓이가 만리나 된다.... 따바이이(大百夷),샤오바이이(小百夷),퍄오런(漂人),구츠(古刺), 하츠(哈刺), 미엔런(緬人),지에시에(結些), 인두(吟杜), 누런(弩人), 푸만(蒲蠻), 아챵(阿昌)이라는 이름으로도 쓰인다"라고 기록하고있다. 『백이전(百夷傳)』은 당시 더홍(德宏)에서 미얀마 경계이 달하는 따이(Dai)족과 기타 민족의 상황도 적고 있다. '푸만(蒲蠻)'은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명나라말 청나라 초기에, 더앙족은 '푸런(蒲人)'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한 개의 독립된 민족을 이룬다. 이때부터 더앙(德昻;崩龍)족이라는 이름을 '뽀롱(波龍)','뽀롱(波籠)'으로 기재하여, '푸이(Pu夷)'와 구별하기 시작했다. '뽀롱(波龍)'은 더앙어로 '뻥롱(崩龍)'과 발음이 같다.
'뻥롱(崩龍)'이 곧 '더앙(德昻)'을 말함은 이미 언급하였다.
전설 및 유적
미얀마에 거주하는 뻥롱(崩龍)족의 전설에 의하면,그들과 와(Wa)족, 커무(克木)인은 모두 루이리(瑞麗)강 유역에서 기원하였으며, 참차 비옥한 토지를 향해 이동하였다고 한다. 중국 더앙족은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지역을 두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그들의 발원지가 더홍(德宏)주의 망(芒)시 일대이고, 다른 하나는 미얀마의 따샨(大山)이다.
이러한 주장이 모순되지 않는 것은 두군데 모두 루이리(瑞麗)강 유역에 있어서 같이 이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이주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다른 족속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더홍(德宏)주에 있는 따이(Dai)족, 징포(景頗)족은 더앙족이 이곳에 비교적 초기에 거주하였으며 넓은 지역에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현재에도 따이(Dai)족, 징포(景頗)족에는 아직도 더앙어의 지역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더홍(德宏)주 내의 각 현에는 지금 더앙족의 거주지가 없다. 하지만 뻥롱샨(崩龍山), 뻥롱칭(崩龍Qing), 뻥롱싸이(崩龍塞)등의 지역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 분명 더앙족의 조상들이 거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더홍(德宏)일대에는 더앙족 및 그 선조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촌의 흔적, 돌판으로 만든 길, 돌다리,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돌문, 탑 기초, 차 마시는 곳 등이다.
더홍(德宏)주 롱촨(Long川)현에서 북쪽으로 약 5키로정도 가면 빵와빠따(邦瓦巴達)향이 있다. 그 동편에 "나샨꽁(納Shan供)"이라는 뻥롱(崩龍)왕성이 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성 안에는 주거지 유적이 있다. 부근에는 군대가 주둔한 흔적, 우물등이 있다. 징포(景頗)족 주민들은 "나샨꽁(納Shan供)은 전설가운데 있는 뻥롱(崩龍)족 왕자의 이름이다. 비록 이지역에서 더앙족이 주요 민족이 아니지만, 이 일대에서 최초에 거주했던 민족"이라고 소개한다. 상술한 유적지와 유물은 더앙족의 선조들이 돌을 잘 다음었으며, 차 재배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이 아직도 더앙족내에 남아있다.
이 주
앞서 말했듯, 더앙(德昻)족은 윈난 서남 변경지역의 토착민이다. 지금의 더홍(德宏)주 등지는 고대 더앙족의 주요 거주지였다. 더앙족의 대부분은 지금 미얀마에 살고 있고, 일부만 중국에 분포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는 역사상 몇 차례에 걸쳐 민족이 이주한 결과다.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보건대, 뻥롱(崩龍)족의 조상이 대규모로 미얀마로 이동한 시기는 원나라 때 이후이다. 이주의 과정은 대략 세 시기로 나뉜다.
1) 원나라 중기
1348년 경 지금의 롱촨(Long川)에 쓰(思)씨로 불리우는 세력이 일어나 전쟁을 벌였다. 이로인해 더홍지구의 통치세력으로 따이족이 등장하였고, 이 와중에 더앙족의 조상은 원래의 거주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지금의 더앙족에게, 조상들이 산이나 미얀마로 쫓겨가는 내용의 전설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2) 명나라 때
더앙족의 조상이 다시금 윈난 남부지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이 지방의 푸런(蒲人)에게 압박을 가하여, 푸런(蒲人)이 저항하였기 때문이고, 계속된 전쟁으로 일부는 미얀마 북부로, 일부는 윈난의 북부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3) 청나라 때
1814년, 강압적 통치로 인해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가혹한 탄압을 받는다. 더앙족은 사방으로 흩어져, 누(怒)강 동부, 미얀마로 도망간다. 이 이후로 더홍(德宏) 일대에서 더앙족을 찾기 힘들게 된다.
토지 제도
더앙족의 경작지는 논과 밭으로 나뉜다. 토지개혁 이전에는 더앙족의 논은 모두 개인 소유였고, 매매나 저당이 가능했다. 소라든지 각종 농구도 모두 사유재산이었다. 현 중국이 수립되기 전에, 더앙족은 정치적으로 권리가 없었고, 경제적으로 몹시 낙후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토지의 대부분은 한(漢)족이나 따이(Dai)족의 부유층에 의해 저당잡혀있는 상태였다. 이들이 토지를 저당잡히는 주요 원인은 집안의 관혼상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논의 경우, 토지가 저당잡히게 되면 수확량의 50-60%를 저당비용으로 채주에게 주어야하며, 기한이 만료되어 저당액을 상환해야만 토지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밭의 경우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밭은 촌락의 소유로, 개인은 점유권과 사용권이 있을뿐 소유권은 없었다. 촌락 구성원은 촌락 거주 범위 내의 토지와 삼림에 대해 개간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를 '쥐엔쟌(圈占)'이라고 하는데, 더앙족은 '빵만(邦曼)'이라고 한다. '쥐엔쟌(圈占)'의 방법은 토지의 주위에 표시를 해놓는 형식이다. 하나는 초지에다 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에다가 십자형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만약 토지를 개간하고 나면, 그것을 이용하든지 하지 않든지 개인이 점유권과 사용권을 누리게 된다. 그의 가족 구성원은 누구든지 경작할 수 있고, 임대도 가능하지만, 매매는 불가능하다.
토지권이 있는 자가 이사를 갈 경우, 토지는 부락의 소유로 귀속되며 지도자의 관리와 조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새로 촌락으로 이주해오거나 새로이 가정을 만든 자에게 나누어준다.
경작 방식
더앙족이 밭을 경작하는 방법은 '고정지'와 '휴경지' 등 두가지 방법이 있다. 고정 경작지는 강가의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 있은 토지로, 주로 옥수수를 재배한다. 올해 옥수수를 심었으면 내년에는 콩류를 심는 방법으로 지력을 보존하고 생산량을 유지한다. 고정경작지는 전체 경작지의 20%좌우이며, 나머지는 계곡 부근에 있는 휴경지다. 더앙족의 전통 및 경험에 의하면, 한 곳에서 3년을 경작하면 15년을 휴경한다. 이러므로 한 토지는 한 세대에 3번 정도를 경작하게 된다. 이 지역은 덥고 비가 많이 내려 수목이 빨리 자란다. 10년 정도가 지나면 예전의 밭에 수목이 어느 정도 자라므로 이곳에 불을 놓아 지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장기간의 화경에 의존하는 민족은, 나무들이 생존을 이어주는 중요한 자연조건일 수밖에 없다. 더앙족의 전설 『천왕지모(天王地母)』에 의하면, "옛날 옛적, 세상에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오직 꽃, 풀, 나무 등만이 있었다. 갑자기 커다란 돌풍이 불더니, 102개의 나뭇잎들이 떨어져 사람으로 변해 부부가 되었고, 이들이 인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더앙족은 수목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원시 농업시대의 깊은 흔적이 남아있다.
예전의 각 더앙족 부락에는 함께 짐승들을 기르는 공동목장이 있었고, 그 장소는 휴경하는 산지를 이용하였다. 더앙족은 이를 '꺼쟝마(格江瑪)'라고 부른다. 매년 한 군데의 산지를 목장으로 쓰며, 한 목장은 계속하여 2-3년을 사용한다. 어떤 촌락들은 집단방목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루시(潞西)현 싼타이(三台)산 빵와이(邦外)촌의 경우,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2틀동안 책임지고 방목을 한다. 매일 아침 방목할 시간이 되면 책임자가 고함을 치는 형식으로 각 가정의 소를 일정 지점에 모이게 하고, 밤에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각 자정이 소를 데리고 돌아가게 한다.
현 중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더앙족의 농업에는 엄격한 분업이 있었다. 남자들은 논밭을 갈고, 경지를 정리한다. 부녀자들은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며, 재배에 종사한다. 그래서인지 더앙족 가운데에는 "남자는 밭을 매지 않고, 여자는 밭을 갈지 않네"라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연로한 남자들은 일에 참여하지 않지만, 부녀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농업에 종사한다. 때로 농사에 바쁘거나 기타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서로 품앗이를 하였다. 후에 이것이 발전하여 소로 사람의 힘을 바꾸고, 사람의 힘을 식량으로 바꾸게 되어, 더앙족 내에 고용관계가 생기게 되고 빈부의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현 중국이 세워진 이후, 더앙족의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고, 거주지가 분산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더앙족 자체내의 경제조직이 세워져 있지 않으므로, 중국 정부는 토지 개혁 및 본토인 위주의 토지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상 업
옛날, 더앙족의 거래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고, 단지 한족, 따이족의 장날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내다 파는 물품은 마대, 배낭, 돼지, 닭, 오이, 파인애플, 차잎, 옥수수 등이고, 거래 대상물품은 곡괭이, 소금, 화약, 옷감 등이다. 한족과 따이족 및 미얀마 상인들과의 접촉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어떤 더앙족가운데 반농반상이 있는데, 농사일이 바쁠때는 농업을, 농한기 때는 상업에 종사한다. 미얀마로 들어가서 옷감이나 의복류를 가지고 와서 판다.
어로와 수렵도 더앙족의 경제 생활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어로는 부녀가, 수렵은 남자가 하는 것으로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 채집은 계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대부분은 우기에 진행된다. 채집의 종류는 박하 등의 수생식물, 밤, 백로화등의 야생식물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야생버섯과 죽순도 채집하는데, 자체적으로 소비하기도 하지만 가공하여 시장에 내다팔기도 한다.
더앙족이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어항, 그물, 물빼기 등인데, 간혹 폭약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앙족은 소승불교를 믿고 있어서, 살생을 즐기지 않는다. 따라서 수렵의 목적 들짐승들이 농작물을 해치는 것을 막는 정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농한기때는 무리를 이루어서 산에 올라 노루와 사슴등의 동물을 잡는데 대부분 총과 활을 사용한다. 더앙족의 수공업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편이다. 대부분의 품목은 집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고, 소수만이 시장에서 팔거나 교환한다. 지금까지 더앙족의 가내수공업은 대부분 원시적 상태인데, 죽기, 방직, 제지, 도자기, 화약제조, 차 제조 등에 머물고 있다. 그 가운데 방직 및 차 제조는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부 업
최근들어, 더앙족 지구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비료사용 및 화학제초 방법기술이 보급되어, 곡물 생산량이 늘고 있다. 이와 함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차, 고무등의 경제작물과 오이, 바나나, 버섯, 파인애플, 배, 석류, 망과등의 각종 과일을 재배하고 있다.
이 가운데 차잎 재배는 더앙족의 경제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더앙족의 성인 남녀들은 짙은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더앙족은 자신의 집 주위에 차 재배지를 만드는 습관이 있다. 더홍(德宏)주 잉쟝(盈江)현의 쑤디엔(蘇典)향, 루시(潞西)현 등지의 더앙족 유적지에는 지금도 수백년전의 차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더앙족 선조들이 남겨놓을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더앙족의 차잎은 마른 차와 습한 차 두종쥬가 있다. 습한 차는 '쏸차(酸茶)'라고 불리우는데 문헌에는 '구(谷)'차로 기록되어 있다. 제작방법은 신선한 차앞을 대나무 통에 놓어 밀봉한 다움, 당분이 생겨난 다음 사용한다. 더앙족은 자체적으로 만든 차를 자신이 소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시장에 내다 판다. 따이(Dai)족은 이 차 잎을 파는 더앙족 부녀들을 '미에닝(Mie寧)'이라고 하는데, '차잎 엄마'라는 뜻이다. 이러한 고유명사가 오늘날까지 더홍지구의 따이족 언어가운데 남아있다. 더앙족은 이렇게 차 나무를 재배하고,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시는데 익숙하다는 명성이 나서, 윈난 소수민족중 '고대의 차 재배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민족 관계
더앙족은 찬란한 역사를 거쳐왔다. 당시 그들은 운남지역의 계곡과 평원지역에 살았으며, 서로 다른 혈연관계 속에서 촌락을 이루고 외부세계와 교통하여왔다. 따이(Dai)족 투쓰(土司)제도의 영향을 받기 전에, 더앙족은 원시적 '촌락공동 의사결정체'의 사회조직형태를 띄었다. 더앙족에게는 자신의 '따이토우런(帶頭人;지도자, 한자의 王子를 차용)'이 있었다.
약 200여년전에는 헤이더앙(黑德昻)족에게는 아직 망(芒)시에 사는 따이(Dai)족 투쓰(土司)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지금의 루시(潞西) 싼타이(三台)산에는 5명의 '따이토우런(帶頭人)'이 있었다. 이들은 망야(芒牙)등 5개 마을을 분할하여 관리하였다. 이들은 마을의 우두머리로서, 마을 내부의 종교, 생산, 민사소송등의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전 마을을 대표하였고, 전쟁이 발생했을때는 사령관으로서 일했다.
당시 따이(Dai)족 투쓰(土司)는 이미 망(芒)시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으나, 더앙족의 '따이토우런(帶頭人)'은 여전히 부족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 때 이후, 더홍(德宏), 린창(臨滄), 바오샨(保山) 지역의 더앙족은 차츰 따이(Dai)족 투쓰(土司)의 속민이 되어갔고, 따이(Dai)족의 봉건영주제도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따이(Dai)족 투쓰(土司)는 더앙족의 우두머리를 관리로 파견하여 더앙족을 다스리는 형식을 취하면서, 더앙족으로부터 공물이나 세금을 받아갔다.
이때 더앙족의 우두머리를 '따깡(達崗)'이라 불렀으며, 젼캉(鎭康)지역의 한족은 이를 '종훠토우(總huo頭)'라고 불렀다. 이들은 마을내의 각종 사무를 처리하였다. 더앙족은 정치적으로 따이(Dai)족 투쓰(土司)의 통치를 받았고, 은, 담배, 죽순, 수공예품등 매년 일정량의 부담이 주어졌다.
그 외에도 더홍 일부지역의 더앙족은 징포(景頗)족의 영향 아래 있기도 했다. 징포(景頗)족은 더앙족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보호세를 징수했으며, 대부분은 곡물로 납부하게 했다. 명절 때, 따이(Dai)족, 징포(景頗)족의 우두머리가 집을 짓거나 관혼상제가 있을 때, 더앙족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한편, 술과 고기, 금전, 차잎등의 선물을 바쳐야 했다.
사회 조직
현 중국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더앙족의 우두머리인 '따깡(達崗)'은 대부분 세습되었으며, 투쓰(土司)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았다. 젼캉(鎭康), 껑마(耿馬)의 더앙족 기본 사회조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따깡(達崗)'은 각 마을의 우두머리인 '따지깡(達吉崗)'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임무는 투쓰(土司)와의 연락, 국민당정부의 법령집행 등이었다. '따지깡(達吉崗)'은 '따깡(達崗)'의 하급자로, 각 마을을 관리하고, 군인을 선발하며, 촌락토지의 분배, 세금등을 관할하였다.
'따푸롱(大朴隆)'은 '따깡(達崗)'을 도와서 재정을 관리하며, 촌락에서 거행되는 혼인등을 돌아보았다. '따지꺼(大基格)'는 구체적인 민사소송을 맡았는데, 절도, 토지 분규등이 이에 해당된다. 위에서 언급한 각종 지도자들 가운데 '따깡(達崗)'의 지위가 가장 높으며, '따지꺼(大基格)'가 가장 낮았다. 마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따지꺼(大基格)'가 해결을 시도하며 계속하여 위로 보고되어진다. 만약 '따깡(達崗)'조차 해결하지 못할 경우 각 촌의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후 결정한다.
더홍지역이 젼캉(鎭康), 껑마(耿馬)와 다른 점은, 지도자들이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군중이 선발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도자가 민심을 얻지 못할 경우, 군중은 그 직무를 해임할 수 있다. 오직 '따깡(達崗)'만은 각 촌의 지도자들이 선발하여 투쓰(土司)에게 보고한다. 현 중국정부가 세워진 이후로 이와같은 제도는 없어졌다.
관습법
더앙족은 고유의 성문법이 없고, 오직 관습법이 있다. 이는 촌락구성원간의 약속에 의해 보존된 좋은 전통이라 하겠다.
이들의 주요 관습법은 다음과 같다.
1. 촌락 공유지에서 주민들은 농사를 지울 수 있고, 벌목을 할 수 있다. 단 촌락지도자의 허가가 있어야한다. 만약 개인의 나무를 사용할 경우 사전에 주인의 동의를 얻거나 돈으로 구매해야한다.
2. 죽은 사람은 반드시 마을 공동묘지에 매장해야한다. 임의 매장은 불허한다.
3. 분가할 경우, 장자와 차자는 새로운 집을 짓도록 한다. 막내는 부모와 함께 살며 재산 승계권이 있다. 단 막내가 새로운 집을 지을 수도 있다. 재산 처리에 있어서 형과 동생이 따로 살 경우 각 가정의 형편에 따라 나누며 본가에도 일부를 남긴다.
4. 도둑질을 한 사람은 조사를 받고 손해를 배상해야한다. 만약 그러한 혐의가 있는 사람은 '신의 판단(神判)'을 받도록하는데, 끓는 물에서 동전을 건져내는 방법으로 판정을 한다. 만약 혐의가 있는 사람의 손이 끓는 물에 의해 상처를 입으면 도둑질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배상을 하게 한다. 후에 '神判'이 변해 군중이 함께 판단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마을 주민이 혐의가 있는 자의 일상생활 및 품행에 의거하여 판결한다. 만약 절도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되면 반드시 배상해야하며, 배상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가중하고, 심지어 마을에서 쫓아내기도 한다.
5. 남편이 있는 여인이 간음을 하면, 간부와 함께 처리하며 대부분 벌금을 물게 한다. 만약 남편이 외도를 하면 아내는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갈 수 있고, 전 남편은 재물로 배상해야한다.
6. 여인이 혼인 전에 임신을 할 경우, 남녀 쌍방의 동의하에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마을을 정결케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촌락 가운데 노인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다.
자연환경
중국의 더앙족은 모두 윈난성 내에 분포하고 있다. 주요 거주지는 윈난성 더홍(德宏)따이(Dai)족-징포(景頗)족 자치주의 루시(潞西), 루이리(瑞麗), 량허(梁河), 롱촨(Long川)등의 현(縣)지역과 바오산(保山)지구의 바오산현, 기타 린챵(臨滄)지역의 젼캉(鎭康), 껑마(耿馬), 용더(永德)등의 현지역, 그리고 쓰마오(思矛)지역의 란창(瀾滄)현에 살고 있다. 모두 윈난성의 서남부 변경 일대다.
대부분의 마을은 산악 지역에 있으며, 징포(景頗)족, 한(漢)족, 리쑤(LiSu)족, 와(Wa)족 등의 주거지와 곂쳐있다. 일부 구릉지역에 사는 더앙족은 따이(Dai)족 마을과 섞여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까오리(高黎)꽁샨(貢山)과 누샨(怒山)산맥의 자락인데,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그리고 란챵(瀾滄)강, 누(怒)강, 따잉(大盈)강 유역은 많은 산과 계곡, 분지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양 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알맞다.
구릉지역의 연평균 온도는 22℃이고, 산지역은 19.5℃이다. 년 평균 강수량은 1,500mm 가량이며, 18%의 비가 5-10월에 내린다. 특히 7-8월에 집중된다. 기후는 건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여름에는 덥지 않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거나 얼음이 얼지 않는다. 이 지역은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따라서 양질의 각종 목재와 약재가 많이 나며, 동식물 자원이 무척 많다.
여성복식 긴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짧고 몸에 꼭 맞는 상의와 긴 스커트를 착용. 紅德昻族 - 스커트는 붉은색 가로줄 무늬가 있고, 花德昻族은 적색과 흑 색 또는 적색과 청색의 줄무늬가 직조되어 있음 黑德昻族 - 주로 검정색 바탕에 적색, 혹은 백색의 가는 줄무늬가 직조되 어 있음.
남성복식 대개 靑 혹은 赤茶色의 상의와 짧고 헐렁한 바지 착용. 白布를 머리에 감고 한쪽으로 내려뜨려 비로드로 만든 여러가지 색상의 장식을 달았음. 銀장식은 黑德昻族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식이며, 남녀 모두 호랑이, 사슴, 새, 꽃, 풀등의 동식물을 도안한 액세서리를 좋아함.
그림69 더앙족 여성 |
두건을 쓰고 짧고 꼭맞는 상의와 스커트를 착용 中國諸民族服飾圖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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