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모래바람을 씻어줄 늦은 오후의 맥주 한잔이나 여행으로 지친 심신을 가뿐하게 해줄 느긋한 마사지. 안락한 호텔 발코니에서 여유롭게 석양을 즐기며 와인 잔을 기울이거나, 화려한 공연 같은 걸 상상한다면 발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길 권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이란에선 접하기 어려운 ‘호사’다. 가족 여행이라도 갔다간 두고두고 핀잔을 듣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락한 관광’보다 ‘거친 탐험’을 바라는 여행자라면 이란의 썩 괜찮은 곳이다.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발바닥이 아프도록 돌아다니고 싶은 ‘탐험 유전자’가 꿈틀거린다면 이란을 적극 추천한다. 대자연과 동·서양 문명이 함께 빚어낸 걸작, 낯선 아름다움이 전해주는 야릇한 쾌감은 검게 그을린 피부, 여정(旅程) 내내 쏟아낸 땀을 충분하게 보상해 준다.
실크로드의 ‘거점’ 타브리즈
동·서양을 아울렀던 대제국 페르시아의 발상지인 이란 땅을 밟으려면 긴 비행과 지루한 공항 대기시간을 견뎌야 한다. 아직 직항 노선이 없어 유럽의 문턱인 터키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천 공항에서 이란 북서쪽 거점 도시 타브리즈의 호텔 방문을 열기까지 걸린 시간은 22시간이었다.
여독과 시차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면 실크로드의 핵심 도시였던 타브리즈의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게 좋다. 5, 6월 이란은 혹서기는 아니다. 습도가 높지 않아 그늘은 시원한 편이다. 타브리즈는 실크로드를 수놓은 도시 중 하나답게 바자(Bazaar·상점가)가 유명하다. 단층짜리 거대한 백화점이라고 생각하면 딱 들어맞는다. 단단한 느낌의 벽돌 건물로 들어서면 미로 같은 구불구불한 길 양쪽으로 상점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쇼핑객들과 어깨를 부딪치는 걸 불쾌해 하지 않는다면 하루를 꼬박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곳이다.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답게 각종 향신료와 이국적인 식재료들이 오감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양탄자 단지다. 정교한 양탄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페르시아 제국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곳곳에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장인들이 양탄자를 짜느라 여념이 없다. 양탄자 더미에서 잠깐 쉬고 있는 나이 지긋한 장인을 본다면 사진을 찍자고 부탁해 보라. 귀찮아하지 않고 받아준다.
칸도반 석굴 마을
고깔모자 형태의 기암괴석 수백개가 늘어선 칸도반 석굴 마을은 타브리즈에서 50㎞ 정도 떨어져 있다. 인디언텐트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600여명이 굴속에서 살고 있다. 고작 50㎞ 거리라고 해서 얕보면 큰코다친다. 구불구불한 산길,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2시간 넘게 달려야 칸도반에 도착할 수 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때문에 가는 길이 불편하지만은 않다. 수직으로 솟은 절벽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르고,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수백마리 양떼가 풀을 찾아 무리지어 움직이는 모습을 카메라에 마음껏 담을 수 있다.
이렇게 도착한 칸도반 마을은 그야말로 ‘동화 속 풍경’이다. 해발 3707m 사한드산이 화산활동으로 쏟아낸 화산재가 굳은 뒤 지각변동과 풍화작용으로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졌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700여년 전이라고 전해진다. 몽골족의 침략을 피하려고 동굴을 파고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칸도반 마을의 초입은 카페와 호텔로 단장돼 있다. 동굴에 만든 집을 개조한 호텔 안은 별다른 냉방장치 없어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 겨울에도 거의 난방비가 들지 않는 친환경 주택이다. 동굴 특유의 눅눅한 느낌만 참을 수 있다면 하룻밤 묵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칸도반 마을의 진짜 모습은 안쪽에 있다. 호텔과 커피숍은 관광객 지갑을 열기 위한 코스이고 조금 더 산 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주민들과 만날 수 있다. 밖에서 보면 웅장한 마을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우리의 1980년대 달동네를 닮았다. 겹겹이 늘어져 있는 빨랫줄에는 낡은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지친 표정으로 밥을 먹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다.
이슬람 한 복판 ‘기독교 흔적’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에서 기독교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도 흥미로울 수 있다. 이란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독교 교회가 있다. 최초의 순교자로 유명한 성 스테파노를 기리는 ‘성 스테파노 교회’(St. Stephanos Armenian Monastery)가 바로 그곳이다. 성 스테파노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인이다.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서임된 7명의 사제 가운데 한사람으로 유대인들에 의해 기원후 36년 돌에 맞아 순교했다.
교회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하다. 타브리즈에서 북서쪽으로 들어가면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접한 작은 국경도시 졸파가 나온다. 성 스테파노 교회는 졸파에서 북서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을 가르는 알렉스강을 따라 험준한 협곡을 차로 50분 가량 달려야 나온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절벽이 아찔하기도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종교 분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라 더욱 긴장감이 감돈다. 한 무리의 무장 군인들이 버스를 수색하고는 긴장한 관광객보다 더 긴장한 얼굴로 사라졌다.
교회는 차에서 내려서도 산길을 한참 더 걸어야 한다. 20분쯤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교회 앞에는 ‘찾아오느라 고생했다’는 듯 맑은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목을 축이고 바라본 교회는 이슬람 지역이라는 걸 잊은 듯 당당하다.
성 스테파노 교회는 7세기 무렵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교회 내부는 이들이 기울인 갖은 정성으로 가득했다. 벽면은 정성스럽게 조각된 많은 문장들로 장식돼 있다. 예배당 안은 프레스코 벽화로 꾸며졌다. 정면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그림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본당을 나오면 장미로 단장된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그 안에서 이란 사람들이 다리를 뻗고 쉬고 있었다. 책을 보는 사람, 사진을 찍어대느라 정신없는 젊은 연인, 뛰노는 어린 아이들.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땅에서 교회의 따뜻한 품에 안긴 이란인들의 모습은 색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필수 성지순례 코스를 모두 다녀왔다면 한번쯤 다녀와도 괜찮은 곳이다.
여행메모
일반적 신용·체크카드 못써… 유로화, 리얄화로 환전해야
이란에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 유로화로 환전한 뒤 다시 이란 화폐인 리얄화로 바꿔야 한다. 양탄자처럼 비싼 물건을 살 계획이 없다면 적당량만 환전해야 한다. 리얄화는 유로화나 미국 달러화로 환전해주는 곳을 찾기 어렵다. 화폐가치가 크게 떨어져 있어 우리 돈으로 15만원 가량을 리얄화로 바꿔도 지갑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지폐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만약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귀국한다면 이스탄불 시내 환전소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여성이라면 반드시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를 준비해야 한다. 이란에서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다니는 여성은 없다. 술은 반입금지 품목이다. 관광객이 머무는 호텔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무알콜 음료나 양질의 홍차를 싼 가격에 즐길 수 있다.
타브리즈(이란)=글·사진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침략 피하려 판 동굴집, ‘동화 같은 마을’을 빚다
‘페르시아 문명’ 발상지 이란을 가다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햇빛을 받은 기암괴석 수백개가 웅장한 자태를 뿜어내고 있다. 인디언텐트촌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이란 칸도반 석굴 마을이다. 해발 3707m의 사한드산이 쏟아낸 화산재가 굳은 뒤 지각변동과 풍화작용으로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졌다. 칸도반은 이란 북서쪽 거점도시 타브리즈에서 50㎞ 정도 떨어져 있다. 석굴 마을에는 아직 600여명이 동굴 주택을 보금자리 삼아 살고 있다. 동굴은 냉·난방비가 들지 않는 천연 친환경 주택이다. 호텔과 카페로 개조된 곳도 있어 체험도 가능하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를 기리는 ‘성 스테파노 교회’의 모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7세기 무렵 아르메니아인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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