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까?(눅8:26-39)
이끌려 사는 인생
누가복음 8:26-39
사람은 무엇엔가 이끌려 살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이끌려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삶이 결정됩니다.
오래 전, 미국 시카고 빈민가에서 세 살 밖에 안 된 여자아이가 죽었습니다.
아빠가 매일 술에 찌들어 사는 바람에 엄마가 집을 나갔고, 이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굶어죽은 것입니다.
장례식에서 모두가 기도하고 있었을 때 술 취한 남자 하나가 들어와 죽은 아이의 신발을 몰래 훔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신발을 35센트에 팔아 술을 사 마셨습니다.
이 사람이 다름 아닌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자식을 돌보지 않아 죽은 것도 기가 막힌데 어떻게 장례식에서 죽은 자식의 신발을 벗겨 그것으로 술을 사 마실 수가 있습니까?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20년 후 이것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시카고 제일 장로교회에서 수천 명의 성도들 앞에서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죽은 딸 장례식에서 신발을 훔쳐 술을 사 마신 파렴치한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부흥사 멜 트라더 목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은 무엇엔가 이끌려 살고 있고 어떤 것에 이끌려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마약 도박 같은 잘못된 것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은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에게 이끌림을 받으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주님께서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저녁때가 되어 호수에 들어가면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호수 맞은 편 거라사 땅을 찾으십니다.
가는 도중 광풍에 의해 위험한 일을 당하셨지만 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으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무사히 거라사 땅에 도착하셨습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 일행을 환영한 사람은 귀신에 들려 무덤사이에 살고 있던 광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 다음내용을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귀신에 이끌려 옷도 입지 않고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집을 뛰쳐나가 무덤사이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쇠사슬과 쇠고랑을 끊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밤중에 불쑥 나타났을 때 과연 옷은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그 몰골이 얼마나 흉측했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온 제자들은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했을까요?
그는 당연히 이 거라사 지방에 문제 덩어리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무엇엔가 이끌려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귀신에게 이끌려 살든지 아니면 예수님에게 이끌려 살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가치나 사상에 이끌려 살든지 인간은 무엇엔가 이끌려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이끌려 사느냐에 따라 인간은 귀신과 같은 삶을 살수도 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거라사 사람이 귀신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았을 때 그는 인간이하의 삶을 살았습니다.
옷도 입지 않은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두려움과 피해를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 예수님께 이끌림을 받았을 때 그는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며 주님을 증거하고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여러분들을 이끌어가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께 이끌림을 받으며 주님이 주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귀에게, 귀신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거라사의 유명한 광인이었던 사람에 대해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그는 오래 옷을 입지 않았고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였고 무덤사이에 거하면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이런 모습위에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했다고 했고 소리를 지르며 쇠사슬과 쇠고랑을 끊고 광야로 도망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그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전한 정신에 의해 살아간 것이 아니라 마귀에 의해 귀신에 이끌려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귀신에게 이끌려 사는 삶은 이렇게 불행하고 비참한 줄로 압니다.
아울러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 지역의 골치 덩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귀신들린 자로 인하여 거라사 지방은 공포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잘못된 것에 이끌려 살아갈 때 그 사람도 불행해지지만 그 사람뿐 아니라 공동체까지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명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이 술에 이끌려 술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되면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어떤 잘못된 것에 이끌려 통치를 하게 될 때 그 국가가 어려워지고 백성들은 고통 속에 살게 됩니다.
필리핀은 예전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사는 나라였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이 명예와 권력에 이끌려 오래 동안 독재정치를 한 결과 지금은 우리보다 훨씬 더 못사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공산주의 주체사상에 이끌려 3대에 걸쳐 세습통치를 한 결과 북한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수백만의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고 주민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배급받은 것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것에 이끌려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정말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것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겉으로는 주님을 믿고 주님에게 이끌려 살아간다고 하겠지만 실제적으로 혹시 다른 잘못된 것에 이끌려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나 귀신에 이끌려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귀신에게 이끌린다는 말을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옷을 입고 집에 거하니까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귀는 오늘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이끌어가고 있고 거기에 빠져 잘못된 것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최근에 어떤 연예인의 성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주일사이에 4명의 여인들이 그를 성폭력으로 고소하였습니다.
폭력인지 아니면 서로 합의한 사항인지 사실관계는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하겠지만 얼마나 연예인에게 치명적인 일입니까?
제 생각으로는 신고하지 못한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니고 처음 만나서 술을 먹고 그리고 성폭력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만나서 술 마시고 술 취한 기운으로 몹쓸 짓을 하고 한 번 만남이 성관계까지 가는 이런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술이 지배하는 사회, 섹스가 지배하는 사회, 쾌락과 물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마귀는 어떤 사람에게는 돈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마약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술로 어떤 사람에게는 쾌락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와 권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이끌려 살아갈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라사인의 광인처럼 미친 짓을 하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유혹 많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 잘못된 것에 이끌려 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넘쳐나는 유혹을 조심하고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귀신에 이끌려 살아가게 될 때 우리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가족들과 공동체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쳐서 귀신에 이끌려 살지 않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귀에게 이끌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 이끌리는 삶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땅을 찾으신 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라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온전케 하시기 위해 일부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도 밤중에 갈릴리호수에 들어가면 물결이 심해서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위험을 무릎 쓰고 호수를 건너 거라사 땅에 가신 것은 그 귀신들린 자 한 사람을 고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초청을 받으신 것도 아니지만 주님은 그 한 사람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그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거라사 땅을 스스로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거라사의 광인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불쌍한 영혼입니까?
누가 그렇게 살고 싶겠습니까?
정상적인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겠습니까?
귀신에게 이끌려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받고 따돌림을 받고 무덤사이에 거하면서 인간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귀신들린 자를 찾아서 위험을 무릎 쓰고 갈릴리호수를 건너가셨습니다.
주님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먼저 귀신들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이 명령에 귀신들은 꼼짝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주님은 허락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는 비탈길을 내리달리다가 호수에 빠져서 몰사하였습니다.
혹자는 왜 이렇게 손해를 끼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이 사실을 통하여 한 영혼이 수천의 돼지보다 아니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으시자 그 사람이 온전해졌습니다.
35절에 보면 “귀신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했습니다.
그 사람을 이끌었던 귀신이 나가자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옷을 입었고 예수님의 이끌림을 받기 위해 예수의 발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귀신에게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주님에게 이끌리는 삶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귀신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주님을 나의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빈 마음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영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빈 집의 위험성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귀신이 나갔습니다.
귀신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거할 곳이 마땅하지 않자 다시 옛사람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이 깨끗하게 수리는 되었는데 빈집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더 많은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와 살게 되었고 이 사람의 형편이 예전보다 휠 씬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것을 청소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빈집으로 남아있으면 위험합니다.
그 청소된 마음에 무엇인가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들어오지 못하고 마귀에게 이끌림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마귀를 쫓아냈고 지금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쫓아내는 것을 만족하지 마시고 주님을 늘 인정하며 주님의 영으로 채우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귀신에게 이끌리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에게 이끌려야 합니다.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귀신에게서 멀어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며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사명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고쳐주셨을 때 그 사람은 당연히 주님과 함께 있기를 구하였습니다.
얼마나 주님과 함께 있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주님은 거라사인을 향하여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귀신에 이끌려 집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자로서 집으로 가서 생활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이 결혼을 했는지 자녀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이 되었던 아니면 남편이 되었던 아니면 자식이 되었던 그 역할을 잘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에게 맡겨준 사명이었습니다.
구원받고 예수님께 이끌려 사는 사람은 가정에 돌아가야 하고 가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거라사 땅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귀신을 쫓아내고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는 주님에게 그 지역을 떠나도록 부탁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이들은 물질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더 계시면 더 많은 물질의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예수님이 떠나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대로 생각해보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귀신을 쫓아내시는 주님이 못하실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병을 고친다든지 문제를 해결 받는다든지 그러면 너무나 좋았을 것인데 그들은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가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믿고 주님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명에 이끌려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사명이 주어진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명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맥추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0) | 2016.07.05 |
---|---|
하나님 음성 듣는 법 (0) | 2016.06.27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0) | 2016.05.23 |
말보다 기도로 싸우라 (0) | 2016.05.23 |
나를 지키는 집 (0) | 2016.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