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님 (눅 2:1-7)

열려라 에바다 2016. 12. 15. 08:09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님 (눅 2:1-7)|말씀………성탄절☆설교

新婦 | 조회 165 |추천 1 |2015.12.24. 21:12 http://cafe.daum.net/cgsbong/1xDL/620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님 (눅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고 말씀해 보세요. 예수님은 베들레헴 어디에 나셨을까요? 구유,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구유 모르신 분 계십니까? 구유는 말이나 소 먹이를 담아 주는 큰 구시통을 말합니다. 말이나 소 밥그릇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거기에 나셨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요셉이 로마 황제 가이사의 명령으로 호적하러 만삭된 마리아와 함께 고향 베들레헴에 왔다가 호적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여관방을 구할 수가 없어 남의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어요.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나신 것은


1. 소 밥처럼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6:47-48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만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오셨다고 생명양식 먹지 않을 사람 있을까요? 참 배부른 소리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오셨던 서양 선교사님 이야기가 있습니다. 100년도 더 지난 때 우리나라에 오신 어느 선교사님께서 이웃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색적인 서양 요리를 맛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특히 각자가 알아서 떠먹는 뷔폐식이라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밥상 가운데 놋쇠로 만든 둥근 큰 그릇이 여러 개 놓여 있는데 거기에는 하얀 쌀밥이 가득 가득 담겨 있는 것이었어요. 당시 쌀밥은 귀해서 쌀밥 먹는 것이 소원이었을 땐데 쌀밥이 큰 그릇에 담겨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선교사님은 “마음껏 드세요.”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둥근 그릇, 그 그릇이 문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그릇은 바로 요광이었습니다.


요광은 방에다 두고 앉아서 소변을 보는 그릇입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요광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거기다 대변도 봅니다. 그 요강에 밥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얀 쌀밥을 보고도 감히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요강입니다." 란 말을 듣고서야 사람들은 웃으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를 다녀간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 중에 상에다 음식과 수저와 함께 한 가운데 요강을 올려놓고 찍은 것을 보면 이 이야기가 지어낸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강에다 밥 드리면 드시겠습니까? 못 드시겠다고요? 배고프면 먹게 됩니다.


이처럼 살려면 예수 믿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 서기관들을 만났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신 줄 다 알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교만해서 낮게 오신 예수님을 맞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 헤롯왕은 그것을 믿었지만 영접은 커녕 자기 왕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대를 보내 예수님을 죽이려다 베들레헴 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참으로 악한 사람들입니다.


2. 구유에 나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말합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사절단이 다른 나라에 가려면 치열한 교섭 준비를 합니다. 우리를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 국빈방문인지, 공식방문인지, 실무방문인지, 사적방문인지, 어떤 방문이 가장 격조 높을까요? 국빈방문이 가장 격조 높은 방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장대의 팡파르는 물론 대통령이나 국왕이 나와서 영접할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최고의 예전과 예우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면서도 낮고 천하게 구유에 오셨습니다. 양치던 목자들의 찬송과 천사들의 찬양만 울려퍼졌지 국가의 팡파르는 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신 것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세 친구를 찾아와 소원을 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면 하나씩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사람은 “별처럼 빛나는 스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약속대로 스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나는 킹(왕)이 되고 싶습니다.” 천사는 약속대로 그 사람을 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두 친구 위에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둘 다 되고 싶습니다. 스타도 되고 싶고 킹도 되고 싶습니다” 한 가지만 말해야 하는데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고민하던 천사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무릎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됐다. 스타킹이 되어라.” 욕심 부리다가 스타킹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건 이야기지만 교만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영성 신학자인 필립 얀시 목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지셔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듣기 거북하지만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자라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만이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자만이 예수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기독교 문학가 C.S. 루이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겸손해지고자 한다면, 내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낮아지셨다면 우리는 구유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3. 구유에 나신 것은 희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할 인간을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벌을 받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히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그 무엇도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거나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늘 식사하시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쌀의 목숨이 희생되고 채소나 과일이나 고기나 동물이 희생되었을까?


그래서 미국의 설교자인 위어스비 목사는 “어떤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피 흘림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안심하고 사는 것도 이 시간에 나라를 지켜주는 군인 경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페르시아에 사이러스(Cyrus)왕이 전쟁 중에 적국 왕자와 그 가족을 생포해 죽이기 전에 물었습니다. “만일에 내가 왕자인 당신을 살려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아내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사이러스 왕은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 그들을 다 풀어주었습니다.


그 날 왕궁으로 돌아온 왕자는 살아서 돌아온 것이 기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비록 사이러스가 적국의 왕이지만 참 훌륭한 분이더군요. 내가 보니 정말 잘 생긴 미남이고 의젓하고 늠름하고 장수답고 사나이답더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그 아내는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고 늠름하게 말하는 한 남자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예수님의 희생은 이보다 억만 배나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마구간에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아기 예수로 구유에 오신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믿어 영접하고 오늘 성탄을 축하하면서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