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하라

열려라 에바다 2017. 4. 5. 08:07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하라

                                                                                        (레16:6-10)

 

<도 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몇 년 만에 한인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니 친정에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반갑고 기쁩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 2017년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중이며,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약시대까지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장막절 3대 절기철저히 잘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탄절, 감사절, 부활절 3대 현대적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3대 절기 중 성탄절과 감사절의 행사는 단회적으로 끝납니다. 그렇지만 부활절 행사는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사순절-종려주일-난주간 계속 이어지면서 부활절(주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부활주일의 중요성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동참하자는 것입니다(31-415). 약에 모세의 40일 고난의 금식, 신약에는 예수님의 40일 고난의 금식을 근거로 믿음의 조상들이 착안하여 만든 것인데, 단순 행사 수준이 아니라 감사절, 부활절과 같은 절기 수준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이전부터 40일을 말하는데 주일을 뺀 40일이기 때문에 2017년은 31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어 진행중입니다. 사순절의 핵심은 고난이 없는 부활은 무의하기 때문에 부활주일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1365일은 아니라도 40일 정도는 동참하여 십자가 복음을 계승하지는 취지입니다.


종려주일은 부활주일 한 주전 주일입니다(49).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는 날입니다. 요한은 3년 공생애 동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세 번 예루살렘 방문한 것으로 말합니다(2, 6, 12).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종려주일은 공생애 3년째, 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죄와 구원을 위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기 위한 방문이기 때문에 여느 때 예루살렘 방문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종려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은 부활주일 전 한 주간입니다(410-15) 고난주간은 유월절 규례에5일 준비기간에서 유래된 것으로 월-금까지 예수님의 5일간 고난의 사역을 말합니다.

 

부활주일은 굳이 이야기 안 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416).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성경대로 또한 자신이 가르친 대로 3일 만에 부활한 날입니다.

현대 교회의 3대 절기 중에 성탄절과 부활주일이 핵심입니다. 성탄절은 시작이며, 뿌리는 씨상징이라면, 부활절은 고난 속에서 피는 꽃이며, 열매입니다. 생명의 완성, 영원한 안식의 상니다. 이리하여 달력으로는 3-4월에 있는 부활절이 우선이지만 영적으로는 12월에 있는 성탄절이 우선인 것입니다. 씨 뿌림이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조국 대한민국 정치적, 경제적 정황과 한중 관계 때문에 이곳에서 사업하기가 여느 때보쉽지 않았다는 것은 매스컴을 통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피부로 실감하고 있습니. 이럴 때 위로가 되는 설교를 해서 힘들어 하는 여러분에게 평안을 심어 주어야 하는데, 신앙적으로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사순절, 종려주일, 고난주간을 바라보아야 하는 때인 만큼 고난의 대한 설교, 십자가 복음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어쩌면 직접인 위로를 위한 위로의 설교보다 고난의 설교가 더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설교, 자가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비행기로 4시간 날아왔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 한국에 가려1시간 30분이갑니다. 그런데 4시간 왔으니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로로 위로하는 것보다 역으로 고난으로 위로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고난의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두 마리 염소를 준비하라입니다.

 

그렇다면 두 마리 염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 두 관계를 밝히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안점입니다.

 

 

<본 문>

 

레위기 16/ 속죄일 규례입니다.

속죄일은 속죄와 다른 제사입니다. 레위기는 5대 제사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번제일 제사, 화목제일 제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속죄일 제사만 별도로 16장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속죄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속죄하날입니다. 반면에 속죄란 대신 죄를 갚아준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죄 문제와 구원을 위해 자기 독생자 예수를 희생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값을 당당하게 치루고 죄로부터 자유토록 하겠다는 것이 속죄의 의미입니다.

 

번제일, 소제일, 화목제일, 속건제일 제사는 없어도 속죄일 제사가 별도로 있다는 것은 속죄제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 준 것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속죄일 규례 중에서 제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당시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제일 제사를 위해 두 마리 염소를 준비하도록 명하십니다. (16:1-2)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 저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몇 가지 의문, 질문, 궁금증이 생깁니다. 아마 여러분은 믿음이 좋아 이런 의문은 보이지 않고 아예 없을 것 같습니다.

 

첫째, 한 마리의 염소가 아니라 두 마리의 염소일까? 이 질문은 질문이 아닌 것 같습니. 나 우리는 궁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의문은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제사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질문 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속죄 제물에서 새 종류들은 두 마리이지만 짐승은 대부분 한 마리이기 때문입니. 심지어는 속죄 제사도 짐승은 한 마리입니다.

 

둘째,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어떤 의미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아사셀을 위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의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여러분에게도 이제 의문이 갈 것입니다.

 

, 한 마리의 염소는 왜 광야로 보냈을까? 두 마리 염소 중 하나님께 속제 제물로 드려진 한 마리의 염소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광야로 보낸 다른 한 마리의 염소는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생긴 의문입니다.

 

넷째, 속죄 제물을 왜 염소라고 지목했을까? 보편적으로 염소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양과 염소는 분명한 두 구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처럼 염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생긴 의문이 아니라 소, 양도 있는데 염소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섯째, 두 마리 염소는 예수님의 고난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나님의 어린양은 들어 보았어도 아마 하나님의 어린 염소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이라면 쉽게 예수님의 고과 연관되어 그림까지 그려낼 수 있으나 염소이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 생긴 의문입니다.

 

믿음의 좋으신 여러분!

믿음이 좋은 척 만하지 않는다면 이제 저의 의문에 공감이 퍽 갈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바로 다섯 가의문, 궁금증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것입니. 이 해답이 서론 말미에서 말한 두 마리 염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를 밝힐 수 있습니다

 

이때 당시 대제사장은 아론입니다. 속죄일 제사는 아론이 먼자기와 가족의 속죄제를 드린 후에 이스라엘 온 민족을 위한 속죄제를 드립니다(4:3, 16:1/10:1).

 

 

1. 한 마리의 염소가 아니라 두 마리의 염소일까?

첫 번째 의문사항입니다. 속죄 제사의 제물도 한 마리인데 속죄일 제사에 왜 두 마리 염소를 하나님은 필요로 하여 요구하고 있을까? 여기서도 다양한 해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일? 수의 초림과 재림을 상징하고 있지는 않을까? 심지어는 수와 그리스도는 아닐?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러나 두 마리의 염소는 이러한 대조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제사는 한 마리 짐승입니다. 물론 값이 싼 비둘기는 두 마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일 제사는 두 마리의 짐승이 아니라 한 마리입니다. 그런데 속죄일 제사는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의 염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의문, 궁금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드려지는 속죄 제물은 한 마리입니다(번제, 화목제, 속건제 등). 여기서는 염소 두 마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 사역의 이중성을 예표하고 있습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께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사실을 예표 합니다(3:24-26).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쫓겨납니다. 이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할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가 필요했고, 하나님은 두 마리 염소를 준비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두 마리의 염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난과 죽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하라는 요구를 이제 조금 이해하시겠습니까?

 

2.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어떤 의미일까?

두 번째 의문사항입니다. 이 질문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입니다. 가장 궁금해 하기 때문에 아마 장 많이 질문할 것입니다. 두 마리의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기를 합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성전 제사로 드리는 예물이 되며, 다른 한 마리는 광야로 보내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됩니다.

 

아사셀은 성경 석의 난해 구절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류의 속죄와 예수님의 고난,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속죄일 제사에 아사셀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정말 알고 싶은 의문입니다.

 

아사셀을 위하여 아사셀은 16장에 단 세 번만 나옵니다(16:8, 10, 26). 그래서 아사셀은 16장에 나온 단어와 속죄(문장)적 의미로 그나마 해석이 가능합니다. 아사셀을 위한다는 말을 알기 위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어 가보면 히브리어 언어분석과 ()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아사셀은 히브리어 '아자젤'의 음역으로, '염소'란 뜻의 '에즈''가버리다', '사라지다'란 뜻의 '아잘'의 합성어로서, '속죄의 염소' 또는 내보냄을 받은 염소'를 뜻입니다. 만약 제물이 양이라면 내보냄을 받은 양'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2)아사셀은 '쫓겨난 악령', '귀신'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잘젤'이 유음화(流音化)된 것으로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사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사셀을 위하여'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 짐을 진 염소를 죄의 장본인인 아사셀이 사는 광야로 다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아사셀은 히브리어 '아자젤'의 음역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아자젤''제거하다', '없애다'라는 뜻의 아랍어 동사 '아잘'의 강조형으로 그 의미는 '완전한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나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이 멀리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이 옳은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종합적으로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레위기 16:21-22, 26절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보충설명)

여기서 염소는 크게 세 가지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염소는 이스라엘 모든 불의를 지고 멀리 떠나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염소가 좋은 곳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고통(고난)의 상징인 광야로 떠난다는 것이며, 셋째는 염소는 속죄의 짐을 져야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의미를 속죄일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킨다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결)할 있습니.

1)이 염소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지고 멀리 떠나갔다는 점입니다. 죄의 자유를 상징합니.

2)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에서 집니. 그래서 성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3)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죄를 진 사람은 감옥을 가든 돈으로 합를 보든 죄 값을 치러야 자유 합니다. 하나님도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죄 값을 치룰 수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런 일이 어진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죄를 짓도록 유도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죄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주인은 아담을 유혹한 사단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세상에서 주인 노릇하며 죄의 근본적인 주인으로 상징되고 있는 사단입니다. 다같이 레위기 16:21-22, 26절을 다시 봅니다. 에서 보충설명을 했듯이 이 세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해줍니다.

 

아사셀을 위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위한다는 말처럼 좋은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사셀은 세상, 불의(), 사단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좋은 말은 아닙니다. 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셀을 위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한 하나님의 놀운 섭리, 은혜, 사랑, 속죄, 구속 등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편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거나, 십자가의 공로자라고 할 수 없듯이 아사셀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곧 대속의 역할을 앞으로 할 것이지만 대속의 공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아사셀을 위한다는 의미를 이해하겠습니까?

 

 

3. 한 마리의 염소는 왜 광야로 보낼까?

세 번째 의문사항입니다. 염소는 두 마리가 준비됩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구별하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라고 쓴 제비를 만들어 항아리에 넣습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들어 제비를 뽑아 염소 머리에 각각 올려놓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는 염소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집니다. 그러아사셀을 위하여라는 염소는 광야로 내 봅니다. 이처럼 여기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래서 규례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리 염소는 성전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됩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염소를 광야로 보낸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사셀이 성전에 있지 않고 세상에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 상징되는 광야로 염소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잘 들어야 합니다. 아사셀이 광야에 있기 때문에 광야에 보낸 것은 사실이나 한 마리 염소를 광야로 보낸 것은 또 다른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염소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낸 것은 한 마리의 염소가 아니고 왜 두 마리일까?’에서 일차적으로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총명한 사람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두 마리 염소는 신약과 구약, 예수와 그리스도와 같은 대조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야의 특징을 먼저 알아야 한 마리 염소를 광야로 보낸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광야는 물과 풀이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물과 풀이 있다면 이것은 광야가 아니라 초원입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고난의 표본이며 고난의 상징이 광야입니다.

이러한 광야로 염소를 내보냈습니다. 사람은 광야에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살려고 노력을 니다. 메말라 있는 풀뿌리라도 뽑아 씹으면 약간의 수분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아니 땅을 파서라도 물을 공급받을 수 있으며, 오아시스를 빨리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 곧 염소는 그런 지능 자체가 없습니다. 염소는 땅을 파면서까지 생수를 공급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이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먹이가 없으면 굶습니다. 목이 마르면 마른 것입니다. 10cm도 아닌 5-3cm 땅 밑에 물이 있어도 염소는 감지하지 못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염소는 광야로 나간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며 고난의 연속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목마르다라고 애타게 부르짖었던 음성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목마름은 바로 광야에서 염소가 목말라 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무겁고 무서운 고난 후에 부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그저 자연스럽게 온 것이 아닙니다. 물을 마음껏 마시면서 평안한 가운데 찾아온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속죄일 제사에 두 마리의 염소, 고난과 속죄(십자가와 죽음)가 필요로 하여 대제사장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 마디로 잔인한 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기 바랍니다. 람이 말 못하는 짐승을 물과 먹이도 없는 광야로 내 보낸다는 것은 잔인성외에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애지중지 키우던 애완용 강아지를 특별한 이유도 없이 먹이와 물도 마실 수 없는 메말라 있는 광야로 보낼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한 마리의 염소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받을 예수를 예표하고 있습니. 광야로 내보냈던 이 염소는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입니.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했던 염소는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그토록 부르짖었던 예수님입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광야로 간 염소의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잔인성라는 표현을 했습니.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할 말이 많습니다.

1)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인간을 구원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인간의 죄를 도말시키려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말로만 세상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행동으로 보이신 사랑입니다. <보충설명>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아도 할 말이 많습니다.

1)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입니다.

2) 자기 몸을 온전하게 드리는 희생 제물, 곧 속죄 제물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예수의 행동인 것입니다<보충설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나간 염소까지 이해하시겠습니까?

 

 

4. 속죄 제물을 왜 염소라고 지목했을까?.

네 번째 의문사항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여러 가지 제물이 있습니다. , , 염소, 비둘기, (곡물) 등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정직하게 선택해서 드립니다. 자기 믿음의 따라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다른 제사는 이처럼 세 가지 짐승 중에서 자기가 선택하여 드리면 되는데 속죄일 제사는 염소일까? 여기 지목했다는 말은 대제사장인 아론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래서 심각하게 의문을 가질 사항인 것입니다.

 

속죄 제물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요구한 것입니다. 백성이나 제사장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론애개 속죄일 제사의 제물로 양보다는 염소를 지목하며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양은 순하고 염소는 강인한 것으로 상징됩니다. 최소한 5일 간은 버티며 아사셀이 있는 곳까도달해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광야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죽어버릴 수 있습니다. 염소는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는 강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보다 염소를 지목한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진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지 않고 십자가를 쉽게 지고 갔다면 아마 시몬이 대신 그것도 강제로 지지 않았을 것입니. 아니 대신 질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에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조치하지 않았다면 아마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도 지기 전에 노상에서 쓰려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면 유대 종교자들의 목표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속죄일 제사에서도 순한 양을 광야로 내보냈다면 아사셀에게 죄 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중간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염소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관여하시며 세밀한 계획을 세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속은 죄인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오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픔을 통해 죄 값을 지불하시고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해 이처럼 세밀한 부분까지 관여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하면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조국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이 우연히, 뜬금없이 일어난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관여하고 계신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감지해야 합니다. 턱대고 촛불이나 태극기를 흔들어 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소, 염소, 양 중에 염소를 지목한 것은 이처럼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염소 때문이 아닙니다. 역으로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의 사명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성할 있도록 약한 양보다 강한 염소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죄일 제사 제물에 양이 아닌 염소를 특별히 지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5. 두 마리의 염소는 예수님의 고난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사항입니다. 이 주제는 앞에 있는 주제들을 설명하면서 이미 설명되습니다. 두 마리의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인 속죄제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두 마염소 중 한 마리희생제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있습니다. 다른 마리는 예수님이 중간에 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고 나가야 할 고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 염소는 이처럼 완벽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 론>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하라

 

다섯 가지의 의문, 궁금증, 질문으로 제시하고 답한 형식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1) 한 마리의 염소가 아니라 두 마리의 염소일까?

2)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어떤 의미일까?

3) 한 마리의 염소는 왜 광야로 보냈을까?

4) 속죄제물이 양이 아니라 염소일까?

5) 두 마리의 염소와 예수님의 고난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제 이 모두를 알 수 있습니까? 아니 느낌이라도 옵니까? 다른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서두에서 말씀드린 두 마리 염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어떤 상관관계라는 것쯤은 알겠지요. 알고 이해했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이해하며 결단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결론 중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6년까지는 고난주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이 말씀을 듣고도 세상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옛 습관대로 고난주간을 보낸다면 한 마리 염소는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분명니다. 그렇다고 사업을 팽개치고 금식과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 제가 결단을 요구한 것은 여러분의 환경에서 충분히 두 마리 염소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예년에는 엄두도 못냈겠지만 2017년은 여러분이 처한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도전해 보면 준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론 말미에서 요즘 조국 대한민국 정치적, 경제적 정황과 한중 관계 때문에 이곳에 사업하기여느 때보쉽지 않기 때문에 처음 만난 여러분에게 위로의 설교를 하여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고난의 대한 설교를 하겠다면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어쩌면 직접적인 로를 위한 위로의 설교보다 역으로 고난의 설교가 더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이 설교가 시작하기 전 서두에서 들었던 것과 이제 설교가 끝날 무렵에 들은 것과 어떤 차이점을 느낍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하나님은 한국의 상황과 여러분의 상황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가 끊임없는 묵상과 변화를 유발한다면 이 상황을 멋있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두 마리 염소를 준비하든 한 마리 염소를 준비하든 그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 다만 저는 여러분이 2017년은 한 마리 염소가 아닌 두 마리를 염소잘 준비하였다가 새롭게 체험하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뿐입니다.

 

다 같이 오늘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 묵상은 설교의 연장선상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설교자와 여러분의 시간이 아니라 여러분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묵상 후에 제가 마무리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