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열려라 에바다 2017. 4. 5. 08:12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53:1-6)

 

 

<도 입>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에 대해서는 작년에 자세히 말씀드렸고, 고난간 강의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3공생애 사역은 주로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으며, 남쪽 유다지역은 절기 때 이동하여 사역을 했기 때문에 3년 동안 일곱 번 상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방문은 마지막 방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여러분의 죄와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방문을 했기 때문더 큰 의미가 있는 방문입니다. 또한 부활까지 연관되어 있어서 승리의 입성이기도 합니다.

 

개선장군은 백말을 타고 입성하는데, 예수님은 말은 고사하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고 환영을 했습니다. 이 현장을 배경으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종려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 이런 의미에서 종려주일은 고난과 부활이 동시에 함축된 의미입니다. 부활은 반드시 고난 이후에 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이 그저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생을 해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죄와 구속을 이루는 일이 쉽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그 대, 곧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본 문>

 

이사야는 예수님보다 700년 전에 사람으로서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당대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70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선지자의 예언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언은 당대에 일어날 것을 말해야 성취 여부에 따라 흥미가 있으며, 또한 예언가의 대한 평가를 진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700년까지 살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그의 예언은 후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가 관건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긴 세월(700)을 의식했는지 53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

 

1절은 두 의문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자는 믿음의 관한 것이고, 후자는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자에게 능력이 임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700후에 있을 일을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죽고 난 후에 있을 일을 사람들이 얼마나 신뢰할 있겠느냐?

 

선지자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700년이지 당시는 70년이 될지, 500, 1000년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으나 당대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일자가 명시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막연예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은 것누가 믿겠느냐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 여기 들은 것은 모세 오경부터 들어온 하나의 말씀을 말합니다만, 자기의 예언도 의미가 있으니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절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를 치루기 위한 고난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기 주 앞에는 고난을 받을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합니.

 

고난의 주는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는 연한 순같다는 것입니다. 여기 연한 순은 파종 이후에 밀알(씨앗)이 썩어져(죽어) 생명으로 승화되었을 때만이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다시 말해서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님,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예표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그런 문화가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제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만해도 시장서 양 잡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염소 같으면 칼을 목에 되려고 해도 리로 들이 박을 정도로 당장 거부 반응을 보일 터인데, 양은 칼로 자기 목을 찔러도 울기는커녕 몸부림도 치지 않고, 한 마디로 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어린양을 실감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둘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다는 것입니다. 마른 땅은 줄기가 힘차게 뻗어나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줄기가 힘차게 뻗어나가면 여기는 마른 땅이라고 할 수 없니다. 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부활)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선지자는 11:1절에서 줄기에 대해 미 말한 바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특히 '마른 땅'은 메시야가 이 땅에 도래할 때 처한 비천한 상황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자기 땅에 오매 영접치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고난의 주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실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해 정치나 군대에 입문할 수 있었으나 단호하거절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정치나 군대에 야망을 품었다면 멋있게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을 것입니다.

넷째,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것은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이지만, 실상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늘날 연예인들의 인기 몰이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기 몰이하기 위해 이 세상이 오실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며,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 것을 당부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외부적으로는 아무 보잘 것이 없으나 반면에 고난 받을 주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3절부터는 주님을 받을 고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 받을 종의 비하(卑下)’를 좀 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멸시를 받아서라는 말은 배척과 무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으며, 이스라엘 군중들에게는 예루살렘 입성 때는 구원해 달라는 의미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5일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것은 배척한 것입니다. 결코 호산나를 성취하라는 의미로 못을 박으라고 소리 질렸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반면에 멸시당한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침을 뱉으며, 욕하고, 속옷을 가지고 희롱한 것들은 모두 멸시한 행동들이며,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되었다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예수님의 얼굴이 가리운 것도 아니었습니. 뻔히 보는 가운데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멸시의 척도가 훨씬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우리는 자기 백성 유대인(지도)들만이 니라 특히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큰 소리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붙잡히자 모두 도망간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질고를 아는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병을 잘 아는'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육체적인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은사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근거입니다. 선지자는 로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육체적 질병을 비유로 해서 유다의 죄악 상태를 드러낸 바 있습니(1:5,6). 질고로부터 성취될 것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이 분명합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의 질고를 지고질고를 아는 사람이 질고를 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종어진 질고와 수난은 자기 것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것입니다. 것이 바로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 대표성의 원리이듯 의로운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이 가득한 자들을 대신하여 졌지만, 우리가 대신하여 죄로부터 자유하고 구원 곧 영생을 얻은 것은 바로 대표성원리 때문입니다. 죄 값은 예수님이 지불했지만 그 보상은 우리 죄인들이 고스란히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구속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아마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한 것을 의식하며 하는 말일 것입니다(23:21).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더라도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 보편적으로 하나님저주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고난의 종이 나무에 매달린 것은 외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절은 고난의 종은 나무(십자가)에 매달려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의 종이 고난 받을 참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찔림은 외면적으로 가시 면류관이나 채찍을 말하나 실상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최종적으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옆구리를 찔렀던 창을 말합니다. 그래서 찔림은 상처 정도가 아닌 죽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찔림)은 한마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여기 '허물'은 단순한 윤리적인 도리나 세상 실정법에 대한 위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어긴 위법을 말합.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는 (죄인)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사람이 지불할 죽음이란 죄 값을 대신에 난의 종에게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찔림'은 단순한 상처나 총살형처럼 다소 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

그리고 평화는 고난의 종이 찔림을 당한 결과로써 단지 외적인 평안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 곧 막힌 담이 허물진 것까지를 말합니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6절은 양과 목자의 비유입니다. 먼저 여기 2절에 연한 순과 대조(对照) 니다. 우리가 다 양 같다.’는 말은 목자의 인도함을 받지 아니한 양은 각자의 길갔다는 말이며,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다.’는 말은 사람은 자기 맘대로 행동하여 누구나 죄가 가득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는 전적 부패를 말하고 있습니. 그래서 구원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의 종으로 이 세상에 보내게 될 이유와 그가 찔림을 당할 정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00년 후 부활하기 일주일 전에 이 일(고난사역)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결 론>

 

부활절은 성탄절과 달리 4개 절기가 맞물려 있다고 했습니. 첫 번째 사순절은 2. 18일 이미 시작되었고, 두 번째인 종려주일은 3. 29일 오늘입니다. 세 번째 난주간은 3. 30- 4. 4일까지 한 주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활주일은 다음 주4. 5일입니다. 이 일정들은 절기이면서 절기가 아닌 십자가의 신앙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중요하며, 좋은 기회입니다.

 

여기 교두보(桥头堡)’은 군사적인 용어로써,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강이나 호수나 바다 등의 지역에 설치하는 공격 거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절을 외한 사순절(四旬节), 종려주일(棕榈主日), 고난주간(苦难)은 영적 싸움을 말합니.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의 종으로 오실 것과 고난의 종으로서 할 일대해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다소 길기는 하였지만, 70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비록 700년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지만, 마치 며칠 안에 이루어질 것처럼, 또는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은 미래적이지, 시제는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괄호 안은 예언적 미래시제)

그는 멸시를 받아서(받을 것이다)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될 것이며)간고를 많이 겪었으며(겪을 것이며) 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당할 것이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아니 하실 것이다).” <보충설명>

이것은 선지자 자기 예언 같으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2000년 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5일 만에 싫은바 되어 배척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배척하는 신앙만 아니라도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서 배척, 배신하지 않는 신앙을 제대로 배워 승화해 나갑시다.

 

<묵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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