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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진숙 <13> 여성 홈리스들에 속옷 지급… ‘속옷 교회’로 이름나

열려라 에바다 2017. 6. 14. 09:39

[역경의 열매] 김진숙 <13> 여성 홈리스들에 속옷 지급… ‘속옷 교회’로 이름나

女 홈리스 섬기는 교회 세워 7년 사역… 기사화되면서 백화점서 지원해 숨통

 

[역경의 열매] 김진숙 <13> 여성 홈리스들에 속옷 지급… ‘속옷 교회’로 이름나 기사의 사진
1993년 5월 시애틀 지역신문 ‘인터내셔널 이그제미너’에서 시상하는 ‘지역사회 목소리상’을 받는 모습.

미련한 나는 계시의 의미가 홈리스와 여성 목회를 하라는 비전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십자가를 심는 사역이란 교회 벽에 나무 십자가를 걸어만 두는 게 아니라 생동하는 십자가를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심으라는 뜻이었다. 여성 홈리스를 섬기는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결심을 하고 교회를 세우기까지 3년을 고민하고 기도했다. 1990년 5월 시애틀의 여성지도자들을 내가 사역 중인 대학으로 불렀다. 그리고 여성 홈리스를 위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을 얘기했다. 이름은 막달라마리아교회로 지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에 들렸다가 치유를 받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의 증인이 된 여성이다. 교회의 주제가 되는 성경 말씀으로 “나는 주를 보았다”(요 20:18)를 선택했다. 홈리스 여성들이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능력으로 갖가지 자신들의 문제로부터 치유를 받고 새 삶을 찾기를 원했다.

90년 늦가을 미국 제일감리교회 히어홀처 목사를 만났다. 91년 1월 19일까지 방 하나만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1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방을 얻었다. 찬양대가 옷을 걸어두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쉼터는 홈리스들을 새벽에 내보냈다. 우리는 춥고 배고프고 화가 난 여성 홈리스들을 맞이하기 위해 따끈한 커피와 아침을 준비하고 오전 7시에 문을 열었다.

첫 예배는 그렇게 시작됐다. 즉흥적이었지만 하나님은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첫날에는 다섯 명의 자매가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이 좁아졌다. 다시 건물 지하로 예배당을 옮겼다. 지하실도 곧 비좁아져 다시 큰 홀을 사용했다. 막달라마리아교회에서 난 ‘속옷 사역’을 벌였다. 홈리스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3개월마다 새 속옷을 한 벌씩 배급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속옷 사역을 한다고 하니 미국 교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남이 입던 속옷을 입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을 이해 못한다. 시애틀타임즈의 칼럼니스트인 진 가든이 ‘속옷 교회(Lingerie Church)’란 제목으로 우리 교회를 소개했다. 칼럼을 읽고 한 백화점에서 속옷을 지원하겠다고 해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였다.

95년 미국장로교총회 직원 수련회가 시애틀에서 열렸다. 수련회 주일 아침예배를 준비하던 데니스 휴즈 목사가 내게 설교를 부탁했다. 수련회 주제는 ‘화합’이었다. 난 새벽에 시내로 나가 홈리스 여성들을 모았다. 8명을 밴에 태우고 행사장인 메리어트호텔로 갔다. 호텔 화장실에서 홈리스 자매들을 씻기고 예배 장소로 데려갔다. 내 설교 차례가 됐다. 나는 “오늘 아침 시애틀 시내에서 혼란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화합을 이루어 여러분 앞에 섰다”고 했다. 설교 마이크를 홈리스 자매에게 내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설교를 했다. 설교장에 있던 많은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 설교로 미국장로교에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됐다.

97년 6월 미국장로교총회에서 ‘믿음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아팠다. 이듬해 2월 막달라마리아교회에서 은퇴했다. 길바닥에서 홈리스 사역을 한 지 7년, 내 몸이 견디지 못했다. 홈리스 여성들이 앓는 모든 병을 같이 앓았다. 지병인 천식이 심해졌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날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