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김경식 <2> 기어서 다닌 초등학교… 친구들 놀림에 통곡

열려라 에바다 2017. 7. 4. 08:46

[역경의 열매] 김경식 <2> 기어서 다닌 초등학교… 친구들 놀림에 통곡

숲 길서 동물로 오인 총격 받기도… 기도의 힘으로 목발 짚고 일어서

 

[역경의 열매] 김경식 <2> 기어서 다닌 초등학교… 친구들 놀림에 통곡 기사의 사진
김경식 목사(앞줄 가운데)가 최근 서울 송파구 양산로 임마누엘집 앞에서 직원 및 장애인 입소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임마누엘집 제공

나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황해도 장연 출신이었다. 6·25전쟁 때 피란 나와 진도에 터를 잡은 실향민이었다. 광산 김씨였던 아버지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신봉했다. 집안에서 어머니만 유일하게 예수를 믿었다.

어머니는 시집을 와서 딸만 다섯을 연거푸 낳자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괄시를 받았다. 출산 후에도 몸조리를 제대로 못했다. 아이를 낳고도 이틀 만에 몸을 추슬러 부엌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나를 낳자 할머니와 아버지는 온 동네를 다니며 자랑했다. 어머니도 한 달간 몸조리를 하며 처음으로 소고기 미역국을 드셨다.

금이야 옥이야 사랑만 받던 나는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른들이 일으켜주면 주저앉아 버렸고 또 일으켜 놓으면 주저앉았다. 진도의 유명한 한의원과 침술원은 모두 다녀봤지만 허사였다. 어쩔 수 없이 두 팔과 두 다리로 엎드려 기어다녀야만 했다.

2년 후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나를 끔찍이 사랑했던 누님들도 핍박했다. 누나들은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면 “이놈아 그냥 죽어라.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어머니만은 달랐다. 생선 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머리에 이고 다니던 대야를 마당에 던져놓고 내 이름부터 부르셨다. “경식아, 큰놈아.”

나를 꼭 안아주시고는 당신 무릎에 앉혀놓고 기도를 드린 뒤 말씀하셨다. “경식아,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단다. 연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단다. 큰 꿈을 가져라. 주님은 너와 함께하신다. 너는 분명히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나는 또래들보다 늦은 아홉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손과 발에 신을 신고 무릎에 가죽을 대고 2㎞나 되는 먼 길을 기어서 다녔다. 친구들은 원숭이, 어미소라 놀리며 등에 올라타고 다리를 잡아 흔들며 장난을 쳤다. 그런 날은 학교 운동장에서 통곡을 했다. 누님들 말마따나 죽는 게 나아보였다.

그때마다 “왜 비겁하게 우느냐, 소망을 갖고 살아야지” 하시던 어머니 말이 생각났고 다시 먼 길을 기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겨울에는 어머니에게 업혀서 학교에 다녔다. 등굣길이 빙판이어서 누군가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심한 몸살이 나는 바람에 혼자 등굣길에 올랐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책보따리를 허리에 단단히 매고 손과 발에 신을 신고 눈길을 기어갔다. 추위와 상관없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숲이 울창한 눈길을 기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다시 얼마를 움직이자 또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사냥꾼이 나를 향해 총을 들고 있었다. 나를 동물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 숲엔 노루가 출몰하곤 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소리 질렀다. “저 사람이에요. 노루 아니에요.”

그러나 사냥꾼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세 번째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 중에 음성이 들렸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내 소원은 목발을 짚고 걷는 것이었다.

이후 어머니와 나는 기도했다. 의사는 목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주님만 의지했다. 기도한 지 6개월,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힘이 들어갔다. 나무로 목발을 만들어 연습했다. 수백번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