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볜과기대는 북한에 가기 위한 중간 거점이었다. 다음 단계는 당연히 북한에 과학기술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김진경 총장의 뜻을 따라 나 역시 같은 목표를 가졌다.
옌볜과기대를 개교한 그다음 해인 1993년 기회가 왔다. 김일성 주석이 김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김 주석은 북한에 옌볜과기대 같은 대학을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고 김 총장은 나진·선봉 지역이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두만강 하류에 있는 나진항 북쪽 산지에 ‘나진과학기술대학’을 세우는 것으로 계획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던 김영삼정부도 북한과 합의했다. 소망교회 집사였던 정몽준 의원은 곽선희(소망교회 원로) 목사의 지원 요청에 따라 불도저 포크레인 등 20억원 넘는 건설장비를 울산에서 나진으로 실어 보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94년 7월 김 주석이 사망하며 수포로 돌아갔다. 북한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느라 대외 관계를 중단했다. 큰 흉년이 들면서 북한 주민들이 기아로 대거 사망한 것도 바로 이 기간이었다. 95년부터 탈북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북한에 풀뿌리 시장경제가 자라서 장마당을 선보였다.
김 총장은 삼년상이 끝난 97년 여름 나진과기대 설립을 다시 시작하려고 드나들다가 북한 정부에 억류됐다. 42일간 고초를 겪은 후 중국에 추방하는 형식으로 석방됐다. 그 뒤로 2년8개월간 북한에 들어가지 못했다.
2001년 1월 중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상하이 푸둥 지구를 보고 경천동지로 변모한 중국 모습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중국 공산당 장더장 당시 상무위원은 김 위원장 일행에게 김 총장이 옌볜과기대를 세워 중국 정부에 협조했던 것을 들면서 “김 총장을 활용하라”고 건의했다. 장더장은 옌볜과기대 개교식 때 지린성 당서기로 참석한 인물로, 시진핑 집권 1기 때 시진핑과 리커창에 이어 서열 3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김일성종합대를 나와 한국말도 잘한다.
김 위원장은 바로 다음 달 사절단을 보내 김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사절단으로 온 사람은 김 총장을 42일간 조사하고 고문한 바로 그 당사자였으니 북한이 김 총장에게 사과한 셈이다.
그해 3월 김 총장이 곽 목사와 함께 평양에 들어갔더니 교육상이 영접을 나왔다. 교육상의 안내로 김 위원장을 만났다. 북한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제관계가 좋아야 하니 이를 위해 국제화 인력을 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 주석 시절 추진했던 대학 설립 계획을 다시 살려 줄 것과 함께 나진에서 평양으로 위치를 변경토록 승인하고 양해각서를 체결해줬다.
우리는 발 빠르게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김 총장은 통일부에 가서 남북교류협력사업 승인을 신청했고 나는 이민화 당시 메디슨 회장 소개로 최덕인 카이스트 원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평양과학기술대(PUST)는 카이스트의 커리큘럼을 바탕으로 학사 및 석·박사 과정을 만들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지식산업복합체로 육성할 방침이었다.
교학 부문(순수학문 분야)과 실용산학협력 부문(지식산업복합체)이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민족 동질성이라는 서까래와 한민족 문화 융성이라는 지붕을 올리면 이보다 더 훌륭한 대학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학정신의 기초에 대해서는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물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jaehojeong@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승율 <14> 북한에도 과기대 설립… 카이스트 모델로 추진
김일성 요청으로 처음엔 나진에 계획… 이후 김정일 평양으로 위치 변경 승인
이승율 회장(뒷줄 가운데) 등 남북한 관계자들이 2001년 7월 평양과학기술대 건립을 위한 기본 설계를 협의하고 있다. 전극만 북한 교육부상(이 회장 앞)과 김진경 총장(뒷줄 오른쪽)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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