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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선도 <22> “채플린 킴, 미국으로 유학 올 생각 없습니까”

열려라 에바다 2018. 9. 4. 08:09

[역경의 열매] 김선도 <22> “채플린 킴, 미국으로 유학 올 생각 없습니까”

한국 방문한 웨슬리신학대학장 제안… 美공군 “언제든 군용기 태워라” 명령

 

[역경의 열매] 김선도 <22> “채플린 킴, 미국으로 유학 올 생각 없습니까” 기사의 사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1967년 6월 김포공항을 통해 유학길에 오른다. 60년대 당시 김포공항 전경. 국가기록원 제공

6개월 공사 끝에 1966년 봄 영천감리교회 예배당이 완공됐다. 26㎡(약 8평)짜리 예배당은 5배나 커졌다. 그러나 내겐 영양실조와 급성 간염이 왔다. 눈이 노랗게 변했고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정석 정운 정신 3남매도 영양실조가 왔다.

보다 못한 주인집 할머니가 아내에게 말했다. “새댁, 그러다가 애꿎은 사람 하나 잡겠어. 간에는 보신탕이 최고야.” 다급해진 아내는 막내딸 정신이를 업고 버스비 70원을 아끼기 위해 대전 목척교까지 6㎞길을 걸었다. 그리고 개머리 하나를 사서 시멘트 봉지에 담아왔다. 아내는 20촉 전구를 켜고 개머리를 면도칼로 다듬었다. 그리고 큰 솥에 넣어 밤새도록 고았다. “하나님, 우리 남편을 살려주세요. 하나님 일 하다가 이렇게 가면 안 되잖아요.” 아내 덕에 몸이 완쾌됐고 3남매도 영양실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에겐 치유신학과 영어공부의 꿈이 있었다. 2가지 꿈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유학이었다. 그러나 60년대 한국 상황에서 유학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당시 나는 목원대를 설립한 찰스 스톡스(도익서) 박사와 친분관계가 있었다. 어느 날 스톡스 박사가 안식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헤롤드 디울프 미국 웨슬리신학대 학장을 모시고 왔다. 부대와 예배당을 둘러본 디울프 학장에게 교육기술단장이 입을 열었다.

“한국 공군 군목 중 이상한 분이 있습니다.” “오우, 어떤 분인지요.” “여기 김선도 군목입니다. 이분은 전도를 하겠다며 사병과 구보를 함께하고 영창까지 들어갑니다. 훈련병이 교회에 안 오면 내무반까지 찾아갑니다. 새벽엔 지프차를 타고 초병을 찾아가 위로합니다. 주일 예배당에 800명이 몰려듭니다. 하여간 별난 분입니다.”

얼굴이 빨개진 내게 디울프 학장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채플린 킴, 혹시 당신 미국으로 유학 올 생각 없습니까.” 어안이 벙벙했다. “예, 가고 싶습니다. 미국에 가서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스톡스 선교사 댁에서 인터뷰 좀 하지요.”

2개월 뒤 웨슬리신학대에서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당신이 학교에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했습니다. 단 비행기표는 당신이 끊어야 합니다.’ 너무도 반가웠지만 30만원이나 하는 비행기 삯이 문제였다. 30만원이면 당시 내 월급의 4개월 치였다.

스톡스 박사와 미 군사원조기금에 알아봤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말했다. “여보, 여기서 길이 막힐 거였다면 애초 유학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사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사인이에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때부터 아내와 나는 뒷동산 공동묘지에 올라가 밤새도록 부르짖었다. 뜻하지 않던 기회는 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공군 무관을 통해 열렸다. 그는 내 사연을 전해 듣고 미국 펜타곤 공군본부에 알렸다. 공군장관은 주한 미 공군에 특별명령을 내렸다. ‘김선도 한국 공군 군목, Space Available(언제든 사용 가능). 미국 펜타곤에서 쓰는 비행기이면 무료로 탑승하게 하라.’ 이건 미국 장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한국 공군에선 난리가 났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1967년 6월 김포에서 미국행 군용비행기를 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