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과 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과 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의 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과 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의 賦 -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의 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의 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와 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
< 제 일 화 > 血痕奇譚(혈흔기담)
寶娘과 靑湖
< 1 >
지금으로부터 한 백오십년전쯤 될까. 충청도 어느 조그만 고을이다.
산천경개도 아름다우려니와 어염시수(魚鹽柴水)도 많아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어느해 여름이다. 이곳에는 다른 과실도 많이나지마는 특히 참외가
맛이 있어서 이 고을 들판에는 참외밭이 많이 있고 그 참외밭을 지키는
원두막이 여기저기 서있어 풍경이 그럴듯 하였다. 이 고을에 장난꾸러기
소년 준구(俊九)와 또 재동으로 유명한 청호(靑湖) 둘이서 밤중에 참외
서리(도둑질)를 하러 갔다. 청호는 준구를 그리 좋아 하지 않으나 준구가
끌어서 심심풀이로 간 것이다. 준구는 공부는 잘 못하지마는 활 쏘기, 칼
쓰기는 잘 하였고 청호는 재동이니만치 선생이 혀를 내두를만치 잘
하였다. 준구의 집은 명문이요, 부자이지만 청호의 집은 생원댁이요,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어두운데 살살 기어서 참외밭으로
들어갔다. 원두막에는 늙은 영감이 지키고 있는데 잠이 든 모양이다. 그
사다리 밑에 오줌독을 갖다 놓았다. 참외 따다가 소리가 나서 영감이
깨어 내려오드라도 오줌독에 빠져서 쩔쩔 매는 통에 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구와 청호는 숨을 죽이고 참외를 따서 미리 가지고 온
망태에 넣었다. 그런데 웬걸
어떤 놈이냐?
소리치면서 영김이 사다리도 내려온다. 맨 끝에 사다리에서 땅으로
내려오는데 발이 풍덩하고 오줌독에 빠져서
아이쿠!
하고 부르짖으며 호통을 치는 사이에 준구와 청호는 도망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따가지고 온 참외를 글방에 가서 동무들과 큰 잔치를
하였다. 이랬으면 좋았을텐데 또 며칠후에 참외 생각이 나고 그래도
다른데 갔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 영감이 오줌독에 빠지는 꼴이 재미
있어서 바로 그 참외밭으로 갔다. 전례대로 오줌독을 사다리 밑에 놓고
참외를 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이놈들!
하고 소리치며 한손으로는 청호의 머리꼬리를 잡고 한손으로는 준구의
머리꼬리를 잡으려는 순간 준구는 날쌔게 도망해 버리었다. 그래서
청호만 붙잡히고 말아서 원두막까지 와서 불을 켜갖고 얼굴을 비추어
보더니
아니 요놈이 유생원 아들 청호로구나. 너 이놈 요전에도 왔지?
하고 단단히 혼을 낼 작정이다. 영감은 그 놈들이 또 올줄 알고 사다리
하나를 따로 만들어 두었다가 다른편으로 내려와서 잡은 것이다.
잘못했읍니다. 다시는 아니합죠
뭣이 어쩌구! 또 한 놈은 뉘집 자식이냐?
같이 오긴 했어도 몰라요
청호는 혼자 망신을 당할지언정 동무까지 끌고 들어가기는 싫었다.
너 그대신 내일 이 참외밭 주인 영감에게 가서 단단히 사과를 해라,
알겠지
주인 영감이 누구십니까?
아니 그것도 모르니! 바로 바로 맹감역댁이다
예!
맹감이라면 이 고을에서 뜨르르하는 집안이다. 세도도 대단하려니와
전답이 많고 큰 부자이었다. 그리고 그 성질이 괄괄해서 호랑이 라는
별명에다가 너무 인색해서 맹돼지 라는 칭호까지 겸하였다.
아차! 잘못 걸려 들었구나?
청호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그까짓 참외서리쯤 보통이라고 안심하였다.
하기는 옛날에는 참외서리, 콩서리, 밤서리, 호박서리, 조금 크면 닭서리,
돼지서리까지 있어도 그런 것을 훔쳐다가 먹는 것쯤 보통이요,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아이들 뿐아니라 어른까지 이것을 한 재미로 하는
풍습이었다. 요전에 영감이 오줌독에 빠지고 참외를 도둑 맞아서 분김에
주인 맹감역에게 말하니
꼭 그놈들을 잡아오게 내가 만나야겠네
하고 그 꾀를 가르쳐 준 것이다.
너 내일 꼭 가거라. 안가면 너희집으로 잡으러 갈테니-
청호는 겨우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오니 길에서 준구가 기다리고 섰다가
미안하다. 괜찮았니?
하고 물었다. 청호는 사연을 다 말하니
저런! 큰일 날뻔했다. 내 말을 제발 말아다구 그집 딸하고 나하고
지금 혼인말이 있단다
하고 죽을 상이다.
응- 네말은 아니할테니 걱정 말아라
그 은혜는 갚으마
청호는 이런 동무와 사귄 것을 후회하였다. 근묵자흑(近墨者黑)으로
나쁜 친구를 사귀면 나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 청호는
맹감역 집으로 찾아갔다. 전에는 몇번 만나서 서로 안면은 있는 처지다.
벌써 원두막지기 영감께서 연통이 있었는지
오- 네 놈 왔구나
하고 대뜸 호령이다.
이리 오너라
맹감역은 청호를 끌고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마당 담 밑에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거기다가 청호를 세워놓고 밧줄로 칭칭 얽어 맨 후에
미리 준비했던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하였다.
요- 발칙한 놈아- 그래 참외 도둑질도 나쁜데 영감을 오줌독에 빠지게
해서 다리를 다치게 하다니! 요놈 박살을 시키겠다
맹감역은 채찍으로 청호의 팔, 다리 할 것 없이 닥치는대로 때리었다.
그러나 청호는 울지 아니하였고, 그가 하는 짓이 사람같지 않고 우습게
보였다. 청호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칠칠 흘렀다.
아버님! 그만 두세요. 용서하세요!
계집아이가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청호가 힐끗 보니 자기보다 한두살
아래인 소녀인데 정말 드물게 보는 아리따운 처녀이었다.
오- 저 처녀가 준구와 혼인 말이 있다는 맹감역 딸이로구나?
청호는 순간 알아 맞추었다.
네 이년 들어가- 어딜 나와서 무슨 소리야! 남녀가 유별한데
그래도 그 도령을 놓아주지 않으면 안들어 가겠어요. 참외 좀
따먹었기로 그게 무슨 큰 죄라고 저렇게 때리셔요. 소녀는 못보겠어요
당연한 말이요, 또 규중처녀로서는 대담한 짓이다. 청호는 고맙다는 듯
쳐다보는데 서로 눈이 마주치고 이상한 정이 통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청호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머리를 숙이었다.
너하고 같이 간 놈을 대라. 그렇지 아니하면 더 때리고 여기다가
밤새껏 매 두겠다
그건 죽어도 말 못하겠읍니다
뭣이 뭐야! 요 앙큼한 놈 같으니
채찍이 또 휙- 하고 갈기어졌다.
아버님!
맹감역의 딸 보랑(寶娘)은 달려들어서 그 채찍을 붙잡았다.
아니 너 저리 못가겠니?
아버지는 호령한다.
이 채찍을 저를 주시고 저 밧줄을 풀기전에는 못가겠어요. 아버님
이건 너무 과한 망녕이셔요. 죄송하오나---
보랑은 울었다. 맹감역은 할 수 없이 채찍을 딸에게 뺏기고 밧줄을
풀어주며
오늘은 놔준다마는 다시 그따윗 짓을 하면 용서없다
하고 화등잔만한 눈알을 부라리었다.
< 2 >
가을이다.
어느날 매파가 유생원 집에 와서
맹감역 댁 규수가 아주 얌전하니 한번 통혼해 보십쇼
하고 권고하였다. 그것은 보랑이 어머니에게 은근히 청혼 이야기를 해서
그 어머니가 매파를 유생원 집으로 보낸 것이다.
글쎄. 우리같은 한미한 집과 혼인을 하겠소. 그건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렵소. 더구나 맹감역은 호랑이 같은데
산에 가야 범을 잡지요. 막 닥들여 보십쇼. 안에서는 좋게 생각하니
이래서 유생원은 떨떠름하지만 맹감역을 찾아 갔다. 맹감역은 아들이
잘못한 것을 사과하러 온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저- 황송하온 말씀이오나 제 자식놈이 뭐 변변치는 못하오나 이
고을에서 재동이라 하옵고 또 똑똑하옵니다. 그런데 어떤 매파가 와서
댁에 따님과 혼인하면 좋겠다고 해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고 겨우 말하였다.
뭐 뭣이 어쩌구 어째?
맹감역의 얼굴이 금방 빨개지면서
그런 아들은 셋을 뭉쳐 가지고 와도 내 딸과는 혼인할 수 없네.
언감생심에 그런 어림없는 말을 어디다가 하는 겐가. 자네가 미쳤네
그려!
하고 책망하였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읍니다만 매파가 하도 와서 조르기에 혹시나
하고 온 것이 올시다
그런건 꿈에도 생각지 말게- . 아니 그리고 자네 아들놈이 요전 우리
밭에서 참외를 훔쳐 갔다네- . 아니 내가 그래 참외도둑놈을 사위 삼을
줄 아나?
예? 아니 그런 일이 있었읍니까?
그놈 아비 한테는 말을 아니했군. 괘씸한 놈 같으니- 장가 보낼테면
참외도둑년이나 골라서 보내게
유생원은 극도의 모욕을 당하고 집으로 와서 청호를 불러 놓고 종아리를
때리었다.
맹감역이 안으로 들어가서 저녁을 먹는데 그 부인이
저- 유생원이라고 아시죠? 하고 물었다.
알구말구. 왜?
그리고 여름에 영감께서 참외 훔쳤다고 때려준 아이도 아시죠?
그야 알지, 왜 그래?
그런데 보랑이말요, 늘 그애 칭찬을 하면서- 암만해도 수상해요.
그리고 말유 준구하고 약혼하라고 하면 세길 네길 뛰면서 다른데는 시집
안가겠다고 하니 어쩌면 좋단 말유?
뭐 뭐야, 미친년 같으니- 아니 어디 하필 사내가 없어서
참외도둑놈한테 가겠다는거야? 준구란 놈은 활 잘 쏘고 칼 싸움 잘하고
씩씩한 사내 대장부인데 그런델 싫다고? 눈깔이 삐었군 그래?
영감 그 준구는 장래가 좋지 못할게래요. 또 여름에 참외도둑도
그애가 유생원 아들- 청호라든가를 꾀여서 갔대요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단 말요?
글방 동무들의 입에서 나온 말예요. 나도 보랑이도 그 글방 동무의
어머니에게서 들었어요. 보랑은 그 청호가 동무를 위해서 말을 아니한게
정말 사내답고 훌륭하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눈치가 그애를 퍽 사모하는
것같아서 매파를 유생원 댁에 보냈어요
응- 그래서 유생원이 왔군- 아니 그놈이 준구 말을 아니했다- 그건
기특한데
기특하고- 말구요. 웬만하면 제 발뺌이라도 할겸 말할게 아네요.
그렇게 채찍으로 맞으면서 죽어도 말 못하겠다는 것을 보셔요. 얼마나
의리있는 남아인가!
음- 하긴 그렇군- 그러나 그집은 문벌도 없고 밑이 째지게 가난하고
그런데와 창피해서 어떻게 혼인한단 말요. 그런 생각일랑 아예 하지마오
맹감역은 화가 나는 듯 재떨이에 담뱃대를 탁탁 친다.
그야 그 청호가 이담에 잘 되면 괜찮을게 아뇨?
그까짓 아이가 잘 되면 얼마나 잘 되겠소- 아 한다하는 명문 자제들이
많은데, 그리고 준구아버지와는 친하고 그집도 무관으로 이 고을에서는
쩡쩡 울리는 가문이요. 그런델 내버리고 아니 유생원- 하하하 쥐생원의
쥐새끼하고 혼인을 해? 그런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우
그래도 보랑이-
아니 그년은 버렸군. 아니 감히 그런 생각을 한담. 혼인이란 부모의
뜻대로 하는 법인데- 앙큼한년- 내 혼을 톡톡히 내 줘야지- 야- 보랑아
맹감역은 호령을 해서 딸을 불렀다.
보랑은 아버지 앞에 앉았다.
너- 이년 그래 어디 남자가 없어서 참외도둑놈하고 혼인을 하려고
하니? 응-
말씀드리긴 황송하오나 소녀와 혼인말이 있는 준구라는 사내는 참외
도둑대장이라고 하옵니다
이 말에는 맹감역도 어이가 없고 입이 꽉 막히었다.
이년 규중 처녀가 아비앞에 말을 또박 또박 건느는 법이 어디 있니?
입은 하느님이 말하라고 내신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입은 사내 입이나
아녀자 입이나 같은 것이라고 아뢰나이다
뭐 뭐뭐 아니 조런 건방진 계집애 좀 보아- 그래도 또박 또박 말
대답이야
그럼 소녀가 벙어리가 되었으면 아버님 마음에는 좋으시겠나이까?
아- 조런 말 따위 좀 보아!
맹감역은 기가 막히고 속으로는 우습고도 딸년이 맹랑하다고
감탄하였다. 계집애라고 얕잡아 볼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옹고집과 잘못을 약간 뉘우쳤다.
좌우간 아녀자라는건 얌전해야 하는 법이다. 너는 좀 조심해야 한다.
어디 아비 앞에서 무엄하게-
아버지와 딸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런데 어찌 해서
아버지에게 말을 못하고 병신처럼 얌전만 하라고 하나이까?
야! 조런 점점 하는 말따위 좀 봐- 아니 여보 마누라 어디서 저런 딸을
낳고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단말요?
저- 죄송하오나 저는 가만히 요새 생각하오니 아녀자는 너무 사람 값에
못가고 죽은 것 같았어요. 저도 영감과 단둘이 있을때는 뭐 어쩌구
저쩌구 무흠하게 지내면서 남보는데는 점잖을 빼고 여편네는 사내앞에
쥐구멍을 못 찾으니 그게 암만해도 어떻게 잘못된 것같아요
뭐 뭐 뭣이 어쩌구. 아니 세상이 뒤집힐라구 이러나. 그게 무슨
무도한 말요. 그래서 저년도 그러는군- 허- 뭐 집안이 망하겠꾼 예! 예!
맹감역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서 담뱃대를 흔들면서 나가 버리었다.
호호호호!
호호호호!
어머니와 딸은 마주 웃었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요. 완고한 시절이었지만 여자가 눈뜨고 새 시대 새
세상의 싹이 트려는 징조가 이런 규중에서는 가끔 발로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 여자라고 말 못하고 사내앞에 죽어 대령할 것이 무엇인가.
보랑은 일찍 깬 선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님 아무튼 저는 그 청호한테 시집 못 가면 죽겠어요
어디 규중처녀가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있니. 혼인이란 그저 부모가
골라서 하는 게란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건 아버지나 어머니가 시집 장가 가는게
아니고 제가 가는거예요, 그런데 왜 제가 고르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어요?
허- 그건 규중 여자로서는 말할 수없는 게다. 너는 마침 그 청호를
보았으니 말이지 어디 처녀와 총각이 첫날밤 전에야 볼 수 있니.
초례청에서도 눈에 밀로 봉해서 신랑을 못보게 하는 법이다
아이참 이상도 해라. 그래서 첫날밤에 맘에 안맞으면 어떡해요?
다 그럭저럭 되고 사는게다
그게 암만해도 틀린 것같아요
보랑은 고개를 끼웃거리며 생각해 본다. 이것도 역시 옛날에는
여자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보랑은 의아하였다.
참으로 영리한 소녀이었다.
그래 어머님도 아버님이 맘에 맞으세요?
예끼 그런말이 어디 있니. 맞고 안맞고가 어디 있니. 다 인연이요
배필이지
그러나 뭐 저도 다 알아요. 어머님도 아버님이 마땅치 않은 것을-
아니 조런! 호호호! 하기는 네말이 옳다. 아버지는 너무 성미가
괄괄하고 무뚝뚝하고 고집 불통이고
저것 봐요. 참 어머님은 무슨 재미로 한 세상을 사시는지 몰라요,
저는 그런 사내를 만날까 겁이 나요. 그런데 그 청호라는 도령은 참 크게
될 사람이고 재미있는 사내고 제게 꼭 맞을 것같아요. 이것도 인연이요,
배필이 아녜요?
글쎄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그러니 매파를 더 보내고 어머님이 아버님 맘을 동하게 하세요
호호호! 아니 네가 벌써 그런 앙큼한 말을 하다니, 그래 너 정말
시집가고 싶으냐?
아무때 가도 갈게 아녜요. 이왕이면 맘에 맞는 이 한테 속히 가야지
않아요?
호호호! 기가 막혀라- 오냐 내 힘써 보기는 하겠지만 원체 아버지가
저런 바윗덩이라---
너는 무남 독녀 외딸인데 시집을 잘가야 할텐데
거기만 틀림 없어요
어머니와 딸은 밤이 깊도록 이야기 하였다.
이집에는 주인 식구보다 하인들이 더 많았다.
< 3 >
그 이듬 해 봄이다. 갖은 꽃이 만발하였다. 보랑은 마당에 있는
복숭아 꽃이 활짝 피어 붉은꽃 분홍빛 흰빛이 섞인 복숭아꽃이 탐스럽게
되었는데 나비가 훨 훨 날아 들며 춤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복숭아나무 등걸이에 매여서 매를 맞던 청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때
눈에 마주친 것 사내답고 아름다운 풍채! 고것은 오매 불망이었다.
처녀로서 봄이 되니 더욱 임 그리는 정이 조발되었다.
그이도 나를 생각할까?
그것이 더욱 보랑을 안타깝게 하였다. 그이도 자기를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또 그럴 것같았다.
이 고을에서 인근읍 청소년들을 모아서 글을 지어 상을 주는 백일장이
열리었다.
원님(군수)이 있는 관청 동원 마당에는 차일을 치고 인근읍 청소년들
여러백명이 모이어 와글 와글 하였다. 이것은 정말 한양 서울에서 과거를
보는 흉내요, 연습이었다. 말하자면 요새말로 모의시험이었다. 대청에는
원님을 위시해서 육방 관속이 나열해 앉았고, 인금읍 명문 거족들이 앉아
있다. 그 밖에는 보통 백성들이 마당이 터지게 둘러섰다.
맹감역도 대청에 참례해서 앉아있다.
응시하는 무리중에는 준구도 청호도 섞이어 있었다.
글 짓는 운자가 나오고 청소년들은 지필묵을 꺼내서 글을 짓기
시작하였다.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끼웃거리며 글을 짜내느라고
야단이다.
글을 지어서 쓴 종이가 하나 둘씩 대청으로 올라갔다. 글을 꼬누는
관원이 둘러 앉아서 보기 시작하였다. 잘된 것은 관주를 주고 잘못된
것은 접어 넣었다. 관주에는 동그래미 하나 하는 것 둘하는 것 차차로 그
등급이 있었다. 많아야 두셋 관주이었다.
그런데 유청호의 글에는 알관주가 다섯이 되었다.
시험관 대표가 일어나서
장원 급제는 유청호요-
하고 청호를 나오라고 해서 상을 주고 그 글을 읊었다. 정말 명문
명시었다. 장내는 뒤끓고 마당에 섰는 유생원은 너무 기뻐서 울었다.
그중에 놀란 것은 맹감역이다. 참외도둑했다고 나무에다가 밧줄로
동여매고 채찍으로 때리던 아이가 일등이 된 것이다. 더구나 유생원이
청혼하는 것을 책망해 보내고 딸에게도 호령하게 한 바로 그놈이다.
맹감역은 기가 딱 막히고 얼굴이 붉어졌다.
맹감역은 집으로 와서 안에 들어가 저녁을 먹는데 아내와 딸이 옆에서
시중하면서
오늘 누가 장원급제를 했어요?
하고 물었다.
그까짓건 아녀자들이 알아서 뭘 해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다른 말을 아니하였다.
왜 우리도 글을 아는데 좀 듣고 싶군요
글쎄 그놈이 급제야
그놈이라니요?
아- 왜 저, 유생원 아들 청호말야
보랑이 움직 하면서
예? 아- 정말씀이세요. 아이그 어쩌문!
하고 소리쳤다.
아녀자는 얌전해야 하는 법야
그럼 기뻐도 죽은척 가만히 있어야 해요?
허- 또 그따윗말!
인제 그 청호를 용서하시겠지요?
그까짓 고을에서 급제한게 소용있니. 정말 한양 서울서 급제를 해서
한림학사가 돼야지
그렇게 되면 소녀를 그댁으로 보내시겠어요?
그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집에서 말을 들어 줄지- 그러나 웬걸 알성
급제를 하겠니?
저는 꼭 할 것같아요
글쎄 우리 고을에는 여러해동안 그런 인물이 나지 않았는데- 아니
그놈이 그렇게 재주가 있는줄은 몰랐다. 그놈 때린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맹감역도 그제서야 후회를 하는 모양이다.
그참 준구는 어떻게 되었어요?
보랑의 어머니가 물었다.
그건 뭐 말이 아냐. 그놈야 무관이니까
무관도 글은 알아야죠
그렇긴 해
< 4 >
가을이 다시 되었다.
한양 서울에서 과거를 보게 되었다.
전국에서 수재들이 다 모였다.
그런데 역시 유청호가 알성 급제로 장원을 해서 한림학사가 되었다.
임금님이 특히 불러서 보시고 이야기까지 하시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렵고 다시 없는 영광이다.
청호가 고향으로 오자 원님이 친히 나오고, 삼현육각으로 주악을 하면서
환영하였다. 이것은 한 고을의 큰 영광이기 때문이다. 구경하는
남녀노소가 구름 모이듯 하였다.
청호가 집으로 가는데까지 삼현육각을 잽히고 청호는 한림학사의 예복을
입고는 사린교를 타고 군노사령이 호위해서 행진하였다. (三絃六角 :
거문고, 가야금, 당비파의 세현악기와 북, 장구, 해금, 피리, 두개의
대평소로 된 기악편성 )
보랑도 그 어머니와 함께 사랑 대청에서 내려다 보았다. 맹감역은
어이가 없는 듯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그 청호에게 채찍을 맞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딸을 힐끗 보니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놈의 참외밭은 공연히 해가지고--- 내년엔 보리나 심어야지
맹감역은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며칠이 지나서이다. 맹감역은 유생원 집을 찾아왔다.
저-- 이거참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우리딸과 댁의 아드님과 백년가약을
맺는 것이 어떻소?
맹감역의 평소의 우렁찬 목소리는 어디로 가버리고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었다.
글쎄요. 댁의 따님 셋을 뭉쳐와도 내 아들과는 혼인할 수 없을걸요
그런 말씀 듣게 되었소. 그러나 과거지사는 일장춘몽으로 돌리고
어떻게 생각을 돌려 보시오
그러자 청호가 들어와서 절을 하고
가서 뵈옵는다는게 죄송합니다
참 이번 과거에서 급제한 것은 감추한 일이요, 큰 영광일세
다 고을 어르신네들의 덕택이옵지오
내가 그대를 때렸으니 대신 나를 때려주게. 정말 부끄럽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소생은 퍽 다행으로 생각하옵니다
아니 그럼 그것 용서하겠나?
소생은 그 즉시로 잊어버렸나이다. 그 대신 잊지 못할 것은 보랑
아가씨의 고운 마음씨입니다. 그 채찍과 그 마음씨로 저는 더 열심으로
공부해서 급제까지 아였나이다
응- 그럼 전화위복이 되었네 그려- 참 그 참외밭은 그만두고 보리를
심게 하였네
아니올시다. 그건 그대로 두십쇼. 그래서 가끔 그 원두막에 놀러
가서 그때 생각을 하게 해주십쇼. 소원입니다
아니 그럼 그 참외밭을 온통 자네에게 줌세
감사한 말씀입니다
한림학사가 되더니 아주 점잖고 어른이 되었는데--- 참 지금 춘부장과
이야기중일세마는 어째 내 우매한 딸이라도 데려 오겠나-
황송하옵니다. 그야 두 어르신네께서 작정하실 탓이지오
아니 이 댁 규수와 혼인 하겠다는 게냐?
황송하오나 소자는 벌써 보랑아가씨와 마음으로 약혼하였나이다
고맙네. 고마워-- 이런 기쁜 경사가 어디 있나. 사실은 거절 당하면
내딸에게 면목이 없어- 아 그년이 청호 아니면 시집을 아니 가겠다는군?
그 이듬해 봄에 이 고을에서는 전무후무한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그것은 유청호와 맹보랑의 혼인이었다. 원님과 사또까지 참석하였고,
한양에서 임금님 특사까지 내려왔다.
첫날밤 신랑이 신부옷을 벗기고 원앙금침에 누울때 보랑은
이것부터 보셔요
하고 내놓는 것은 피가 묻은 채찍이었다.
아! 이건 내가 맞던 그것
예- 저는 이걸 늘 간직하고 잘때면 품에안고 낭군 생각을 했어요. 이
피를 저는 만져 보고 입 맞추고-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고맙소 고마워. 이 채찍이 나를 급제하게 하고 그대와 혼인하게 한
것이요
그들은 밤깊도록 이야기하다가 한 이불속에 들어가서 봄꿈을 꾸었다.
다시 없는 인생의 행복을 그들은 독차지 한 것 같았다.
그후 유청호는 벼슬이 점점 높아가 승지 참판으로 판서까지 되고 나중엔
정승이 되었다. 거기에는 유청호의 재덕도 있었지마는 보랑의 숨은
공로가 더 컸다.
아들딸 오남매나 두고 고향에 가면 그 참외 원두막에는 반드시 찾아
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뒤에 알려진 것이지만 준구는 산적이 되어 가끔 고을에
출몰하다가 잡히어 옥에 갇힌 것을 청호가 꺼내 주어서 회개하고 무관으로
출세하였다는 것이다.
< 끝 >
<제 이 화 > 悲戀哀史(비련애사)
樂浪과 好童
왕자의 몸으로서 그 무슨 야릇한 운명이기에 그리운 고국과 궁성을
등지고 적국인 낙랑으로 망명을 해야 했으며 또 불구대천의 원수인 낙랑왕
최리(崔理)의 딸인 낙랑공주와 불의의 사랑을 맺게 되었던가! 이런
이면에는 필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곡절과 비련애사가 숨어
있으리니 이제 그 눈물겨운 이야기의 한토막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邪戀의 犧牲
한(漢)나라 오랑캐의 등을 믿고 고구려 국경을 침범한 낙랑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승전고를 울리면서 서울로 개선한 청년장군 왕자호동의 인기는
고구려 방방곡곡에 애국과 환희와 동경의 상징으로서 떨치게 되었다.
그가 궁정으로 개선한 후 승전의 기쁨이 넘치는 궁성에서는 낮이면 왕자의
승전기념으로 활쏘기와 말달리기가 벌어져 장차에 이룩할 낙랑국 통일의
기운을 더 한층 높이게 하였고, 밤이면 승전잔치가 벌어져 문무백관과
함께 고구려 명문의 어여쁜 딸들은 꽃단장 고이하고 절색호남인
호동왕자의 눈에 들기를 염불이나 하듯 갈망 하였다.
왕자를 하늘처럼 연모하는 수많은 여성중에서 그를 연모하고 달래어
보고 유인해 본 나머지 마침내는 무서운 간계로써 그를 궁성에서
추방하려는 요부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일세에 미모를 자랑하던 제이왕비
월선궁(月仙宮)이다.
왕비에게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두가지 비밀이 있었다.
하나는 궁녀의 소생인 서자(庶子) 왕자호동을 없애버리면 자기의 소생인
어린 왕자가 태자가 될수 있다는 왕위에 대한 욕망이고, 다른하나는 어린
왕자가 태자로 승진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왕자호동에 대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불타는 불의의 정욕이었다.
왕비와 왕자와의 치정, 생각만 하여도 하늘에서 금시 벼락이라도
떨어지고 만세에 웃음꺼리가 될 추하고 무서운 탈선이었건만 왕비에게
있어서는 어린 왕자의 태자 승진은 고사하고 온 천하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호동에 대한 도적 사랑인 것이다.
아! 내가 미쳤나 보다. 그는 어린 왕자의 적이 아닌가? 나는 원수로
미워해야 한다. 그를 궁성에서 추방만 하면 나의 어린것은 태자가 되고
마침내는 고구려의 왕위에 오를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왕비는 어느날 밤 대무신왕과 동침하는 자리에서 호동은
행실이 나빠서 자기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내는 것이 하도 수상하더니 필경
위기일발에 욕을 면하였으니 이대로 두었다가는 신성한 왕실의 오명은
고구려의 역사를 더럽힐 것이라고 속삭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눈알이 뒤집힐듯 놀라기는 했으나 호동에 대한
애국심과 송죽같은 절개를 믿는 그는 이런것은 필시 호동이가 태자가 됨을
시기하는 왕비의 참소로 돌리고 도리어 왕비의 실없는 이야기를 책하였던
것이다.
왕이 왕자호동을 믿고 사랑하는 반면 왕비에 대한 왕의 사랑은 오로지
그 육체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그는 왕에 대한 원망보다도
호동이가 더 한층 미워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왕자가 낙랑군을 무찌르고 개선한 후에는 호동의 무훈과
인기는 승전고 소리와 함께 온 천하에 퍼졌고 왕실에서는 호동왕자를
태자로 봉하자는 소리가 나날이 높아 갔다.
이런 소식 저런소식 모두가 왕비에게는 두통꺼리인데다가 요즈음 그의
귀에까지 날아 온 또 하나의 소식은 고구려 명문이며 정승인
막리지(莫離知)의 딸과의 혼담이다.
어느날 밤 왕비로 부터 호동의 행실에 대하여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꽃다운 청춘의 왕자의 심정을 잘 알았다는듯이 어여쁜 처녀와의
혼례로써 왕비와의 치정관계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아름다운 사랑의
전술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면 갈수록 왕비의 고민은 더욱 커갔고 그의
질투심과 복수심은 불길일듯 하였다.
이처럼 태자에 대한 계승문제와 호동에 대한 불의의
편사병(片思病:짝사랑병)으로 나날이 여위여 가는 왕비의 모습울 바라보는
왕은 고구려의 명의를 모두 불러 들여서 갖은 명약을 다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왕비의 미모와 어린 왕자를 극진히 사랑하는 노왕은 급기야 왕비의
소원대로 왕비궁에 별거를 시켜 정양케 하였다.
금과 옥으로 현란하게 장식한 별궁에서 어린왕자를 재워 놓은 왕비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누워보고 앉아보고 실내를 오락 가락 거닐어 보다가
마침내 그 심정이 폭발되어 시녀를 불러 호동에게 편지를 띄웠다.
긴급한 사연이 있으니 급히 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제야 때는 왔다.
사랑의 승리냐? 그렇지 않으면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마지막
승부이다.
이렇게 생각한 왕비는 설합을 열어 깊이 간직하여 두었던 비수를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품속에 넣고는 잠자는 어린 왕자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며
눈물에 젖은 손길로 쓸어보다가 무거운 걸음을 창곁으로 옮겼다.
꽃향기 무르익을 반월궁(半月宮)의 달밤은 어느듯 깊어 후원의
꽃동산에서는 새소리도 벌레소리도 끊어져 밤은 죽은듯이 고요하였다.
이때 아무런 곡절도 모르는 왕자 호동은 시녀의 전갈로써 연성 기침을
하며 터벅터벅 걸어 오자 조심스러이 왕비궁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실내는 캄캄하였다.
어마마마 저를 부르셨나이까?
쉬! 내가 불렀어
어이하여 불을 안키시나이까?
쉬! 대왕께서 옆방에 주무셔
어이하여 이 밤중에 저를 부르셨나이까?
그대가 보고 싶어서 불렀어 자! 이리와
왕비는 마치 어린 소녀 모양으로 달빛에 어린호동의 얼굴을 동경하듯
바라 보다가 호동의 손을 왈칵 잡아 당기며 자기의 침상으로 강제로
이끌고 가고야 말았다.
어머니 왜 이러십니까?
어머니? 나는 그대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십니까?
이거 왜 이래, 이러기야? 그대는 나의 심정을 알터이지. 잠시라도
그대 없이는 나는 못살 몸이야. 자! 나를--- 나를---
어머니! 어머니! 이몸은 어머니의 아들이 올시다
듣기싫어, 그대만 나를 생각하여 준다면 내 일생을 그대에게 바치겠어.
그대가 만일 원한다면 고구려를 탈출하여 어느곳이나 먼나라로
도망이라도 칠테야. 설사 죽어서 지옥에 가는 한이 있드래도 나는 그대의
사랑을 받고 싶어
왕비는 정욕에 허덕어리며 마치 나무에 서린 배암처럼 두팔을 왕자의
허리에 감고 쓰러지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였으나 억센 힘으로써 뿌리치는
찰라 호동의 옷에 매여 달린채 침상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이때였다.
모든것을 단념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왕비는 불현듯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기가 바쁘게
도적이야, 도적이야
하고 비명을 질렀다.
죽은듯이 고요한 밤중에 비명소리를 들은 무관과 시녀들은 모두가 불을
켜 들 사이도 없이 왕비궁으로 달려 들었다.
옆방에서 깊은 잠에 취한 왕도 비명소리에 깜짝놀라 등불을 켜 들고
뛰어 들기가 바쁘게 웬놈이냐고 뇌성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등불이 침상 앞으로 가까이 갈때에 그들의 시야에 나타나는 광경은 실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머리를 헝크리고 침상에 누워서 비수를 든 왕비와 왕비의 품안에서 빠져
나오는 사나이였다.
왕은 칼을 빼어 들고 단칼에 사나이의 목을 치려다가 문득 그 얼굴을
쳐다 볼때 눈이 뒤집힐듯 놀라며 八자 수염은 푸들푸들 떨기만 하다가
아니 이것이 웬말이냐? 네가 호동이가 아니냐!
오늘도 나의 침실로 숨어 들어 이몸에 욕을 보이려다가 나중에는
이칼로 저 어린 왕자까지, 아, 대왕마마! 이칼로 이몸을 죽여주사이다.
존귀한 왕실을 천추에 더럽히고 천륜을 배반한 저 왕자와, 그 어이 같은
하늘 아래서 사오리까, 자! 어서 이 칼로 이 몸을 죽여 주사이다. 저 어린
왕자도!
이것이 왕비의 요사스러운 흉계임을 모르는 여러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고 뜻하지 아니한 도적의 얼굴을 바라보자 제마다 눈을 부비며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한다.
일도(一刀)에 도적의 몸을 치려돈 왕은 씰룩거리며 도적의 얼굴을 쏘아
보다가 비명같은 욕설을 탄환처럼 대체 퍼부었다.
네 이놈! 이꼴이 대체 무엇이냐? 내 일찌기 네놈의 행실에 대하여
추잡한 소문을 들은바 있었으나 도리어 애꿎은 왕비를 책하였더니 그것이
필시 정말이고나. 미련한 놈! 못난 놈! 바야흐로 태자가 되어 천하의
절색가인과 혼례를 맺을 몸이 그래 넓은 천하에 하필 계집이 없어 네
어미를? 나의 안해를? 에이 왕실을 더럽히고 천륜을 배반한 놈! 내눈
앞에서 썩 사라져라!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 왕은 칼을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맥이
풀려 쓰러지고야 말았다.
왕비궁을 나선 호동의 앞길은 캄캄하였다.
일조일석에 왕자의 몸에서 역적 보다도 더 추한 누명을 쓴 호동은
천하가 넓다하나 하루밤의 잠자리를 의지할 곳조차 없었고, 사람을
만나기조차 무서워지는 몸이었다.
그의 발길은 저절로 연무장(演武場)으로 향하였다.
연무장은 높은 산상인데 아침해가 솟아날 때부터 서산에 해가 질 때까지
고구려의 젊은 무사들이 호동왕자의 지도로써 고구려 통일의 기치 밑에
말달리기와 칼쓰기 활쏘기를 훈련하는 곳이었다.
호동은 연무장의 바위옆에 섰는 고목에 보국통일(報國統一)이란 네
글자를 새겨놓고 고구려의 산야를 굽어 보며 합장한 후 급기야 원수의
나라인 낙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밤 사이에 국경으로 달리는 몸이
되었다.
낙랑하면 그 이름만 들어도 우선 신기(神器) 자명고(自鳴鼓)가 있다는
것과 또 천하의 절색이라는 최리왕의 무남독녀인 낙랑공주의 존재가
신화처럼 뭇 사람에게 동경심을 이르키는 나라이다.
公主와의 奇遇
연무장에서 사냥꾼으로 변복을 한 호동이가 고구려 국경을 넘어
낙랑땅의 어느 국경의 산악에 올랐을 때는 어느듯 먼동이 트고 아침해가
밝아오는 것이었다.
험상한 산골짝 길을 낙랑의 파수군사에게 기어 가며 간신히 피신해 온
호동은 지칠대로 지쳐 바위위에 쓰러진채로 한잠을 자고 나니 어느듯 해는
중천에 떠 올랐다.
문듯 옆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웅장한 절이 있고 절벽 아래를 굽어 보니
거기에는 진달래 핀 바위밑에 신선같은 샘물터가 있다.
호동의 눈앞에 율동하는 대자연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금시
하늘에서 선녀라도 내려올 듯한 선경이었다.
풍류를 종아하는 호동은 그가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피리를 끄내어
들고 온갖 새의 노래와 온갖 꽃의 향기에 화답하여 아름다운 곡조를 불기
시작 하였다.
이때 황홀한 피리소리에 귀를 쫑깃하고 절의 문을 열고 살금 살금
걸어나오는 꽃같은 처녀 한쌍이 있었으니 하나는 천하에 이름높은
낙랑공주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시녀 샛별이었다.
두 처녀는 절벽위에서 백학과도 같이 높이 앉아 피리를 부는 선인같은
모습을 우러러 보면서 절벽아래로 다달았을 때 호동은 무슨 인적소리에
소스라쳐 놀란듯 피리를 입에서 떼고 들펀들펀 사위를 살펴 본다.
공주와 시녀는 당황히 샘물터의 꽃속에 숨어 들어 호동의 일거일동을
엿보고만 있는 것이다.
호동은 활을 메고 일어서서 큰 기지게를 한후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 저 남쪽에 낙랑의 산야가 보이는구나. 저 산과 들을 넘고 넘어
천리길을 가면 낙랑의 왕검성(王儉城)이 있을 터이지---. 아! 원수의
자명고! 자명고만 찢으면 고구려가 통일될 것을---. 그렇지, 자명고실의
열쇠를 낙랑공주가 가지고 있다 하니 공주와 가까이 하면 좋은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하늘의 별따기지---. 아! 피로하다. 오늘은 저 절에
가서 하룻밤의 잠자리를 청하여 보리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절앞으로 간 호동은
스님 계십니까. 스님 계십니까
불러 보며 몇번이나 옷깃을 바로 잡는다. 안에서 목탁소리가 뚝 멎으며
백의를 걸친 승려가 당황이 나오더니 호동의 아래와 위의 행색을 흘겨보며
입에 손을 대고
쉬! 웬 사람이요?
소인은 지나가던 사냥꾼으로 하룻밤의 자리를 청하러 왔나이다
아니 될 말씀! 지금 우리 절엔 대왕님께서 행차하여 불공을 드리고
있소. 어서 다른 암자로나 가보시요
하고는 두말도 없이 안으로 사라진다.
대왕께서 행차라니 그러면 최리왕이 왔단 말인가?
그렇지 최리는 필시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국경의 진지를
순찰 나왔구나.
이런 생각이 돌자 호동은 금시 칼집에 손을 대며 이 기회에 원수를
갚으려고 문쪽을 노려다보다가 자명고를 찢기 위하여는 그에게 충성을
가장하고 공주에게는 사랑을 가장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는 생각이
머리위에 벙긋하자 그는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샘물터로 한걸음 두걸음
발걸음을 옮기었다.
호동은 바위위에 피리를 얹어 놓고 그리고 샘물을 뜨려하니 표주박이
없다.
앞뒤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는 하는 수없이 느티나무 잎사귀를 하나 따서
둘둘 말아 표주박을 만든 후 물을 떠서 마시려 하니 입까지 닿기전에 물이
주르르 흐른다.
이때 꽃속에서 간드라진 웃음소리가 난후 꽃같은 여인이 수집은듯
고개를 돌리고 표주박을 살며시 내여 미는 것이었다.
꽃속에서 나타나는 미지의 여인은 이땅에서 사는 여인이라는니보다 어느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선녀와도같이 황홀하였다.
표주박을 사이에 두고 주고 받는 떨리는 손과 손--- . 말없이 바라보는
눈과 눈에는 숨은 정열의 불꽃이 뛰었다.
호동은 공주를 바라 보다가 샘물을 마신후 표주박을 돌려 주고는 말없이
한걸음 두걸음 걸어 간다.
저--- , 저--- , 잠간만---
공주는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견디지 못하여 재빠르게 달려
가며 간신히 말을 건네었다.
무삼 일이오니까?
호동은 가는 길을 멈추어 뒤돌아 서며 다시 공주를 바라 본다.
저--- , 저--- , 그대는 누구시며 어느곳에 사시온지?
이몸은 사냥꾼의 몸집인데 어찌 정처가 있아오리까. 하늘에 떠 도는
구름과도 같이 오늘은 서쪽 내일은 동쪽 산이나 들이나 자는 곳이
사냥꾼의 집이로소이다
집이 없다고요? 오호호--- 어찌면---
안녕히 계십시오
저--- 저 그대의 이름은?
제 이름은--- 저--- 저--- 아슬라---
아슬라? 아슬라! 아슬라---
호동은 하룻밤의 잠자리를 얻고자 암자를 찾아 떠나 간다.
공주는 떠나가는 호동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혼자 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잘 생겼을까? 아무리 보아도 범상한 사나이는 아니야.
샛별아 너는 어떻게 보았니?
하는 것이었다. 시녀 샛별은 아양을 떨며
대장부다운 그 풍채와 어글어글한 그 눈 키가 후리후리 큰데다가 활을
멘 그 자태, 어찌보면 어느나라의 장군과도 같고 또 어찌보면 나이가 젊고
수줍은듯한 높은 인품이 어느 나라의 왕자와도 같은 기상인가 하옵니다
네 눈이 바로 보았다. 그이가 사냥꾼이 아니고 어느 나라의
왕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가--- . 어이하여 저렇게 잘난이가 이런 험상한
두멧골에 사냥꾼으로 태여 났을까? 천하에 인물이 잘났다는 고구려 왕자
호동도 저만치는 못 생겼을거야
공주님은 언제나 고구려 왕자 호동 호동--- 하시는양이 아무리 보아도
좀 이상해요. 오호호-- 공주님!
그런 철없는 소리 마러라. 호동은 우리 낙랑국의 원수이며 부왕의
원수가 아니냐. 호동왕자하면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
공주와 시녀는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샘물터로 가서 그옆 바위
위에 앉으려 할때 놀라운 것을 보았다.
그것은 호동왕자가 잊어버리고 간 피리였다.
공주는 무슨 보배를 다루듯이 조심 조심 들어서 품에 안아 보고 볼에
비벼보며
그 사나이는 이 피리를 놓고 갔으니 다시 올터이지. 샛별아 너는 잠간
비켜 주어, 나는 꽃속에 숨어서 그가 와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기로
할테야
하는 것이었다. 샛별은 방긋 웃으며 절안으로 들고 공주는 꽃속으로 살금
살금 들어 간다.
풍악을 좋아하여 가야금을 잘 하는 공주는 피리에도 능하여 호동이가
불던 그 곡조를 따라 부는 것이었다.
이때 피리를 찾으러 샘물터까지 터벅 터벅 온 호동은 꽃속에서 흘러오는
피리소리에 놀라운 표정으로 어리둥절하여 서 있을 때 꽃속에서 살며시
솟아나는 것은 미소를 띄운 공주의 활홀한 얼굴이었다.
공주는 꽃속에서 나와 피리를 내어 밀며
대장부의 피리에 소녀의 입술을 대였아오니 저 샘물로 깨끗이 씻어
드리리오리다
하고 샘물터로 사뿐 사뿐 걸어간다.
아--- 아--- 아니오이다. 그냥 주소서
왜 그럴까요?
글쎄 왜 그럴까요?
피리를 사이에 두고 긴사이 말없이 바라만 보는 왕자와 공주의 손은
파들 파들 떨고 있었고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들은 서로 수줍은 그 무엇을
애원하듯 불꽃만 뛰고 있었다.
이처럼 서로 누구인지도 모르게 알게 되고 급기야 정이 들고 사랑의
싻이 트게 된 공주는 부왕 최리에게 아슬라란 사나이를 등용할 것을
간청하니 완고한 왕도 금이야 옥이야 사랑하는 무남독녀인 공주의
소원인지라 한마디로 허락하여 궁성의 무관을 삼으니 공주와 호동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다음날 낙랑의 국경진지를 순찰하고 왕검성으로 돌아가는 최리왕 일행의
행렬에는 번들하게 낙랑의 무관복으로 마상에 앉은 늠름한 호동왕자가
유달리 보였고 그 옆에는 꽃수레를 탄 공주가 있었다.
이리하여 무슨 신화와도 같이 공주와 샘물터에서 인연을 맺게된
왕자호동은 자명고를 찢은 후 낙랑왕 최리를 없애버리고 고구려를
통일해야겠다는 무사다운 결심과 함께 눈앞에 보이는 아리따운 공주의
모습을 바라 보면서 왕검성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漢將의 짝사랑
최리왕 일행이 낙랑국경을 순찰하고 돌아온 왕검성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 준비와 호화로운 잔치로 떠들썩하였다.
낮이면 날마다 싸움터로 떠나는 군사들을 위하여 연무장에서 활쏘기와
칼쓰기가 벌어지고 밤이면 한(漢)나라에서 파견된 파달장군(巴達將軍)을
위하여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궁성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공주(公主)궁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오랑캐 장군 파달은 낙랑공주와 백년 가약을 맺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나라에서 원병이 오게되어 고구려를 정복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공주궁에서 시녀 샛별에게 이런 뜬 소문을 듣게 된 공주는 넋을 잃은듯
그 자리에 맥이 풀려 쓰러졌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얼굴! 파달장군!
잔인무도한 파달!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
목숨을 파리새끼 한놈보다도 쉽사리 없애어 버리는 파달이가 아니던가?
그가 이몸의 낭군(郞君)이 되다니?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 치는 노릇이다.
오랑캐의 아내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좋을 거야!
그는 품속에 간직한 비수에 손을 대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운 아슬라의 얼굴이 동동 떠오른다.
간밤에 저 창밖 접동새 우는 능금나무 아래서 말없이 바라보며 힘껏
포응해주던 아슬라의 그 얼굴!
늠름한 그 풍채! 어글어글한 그눈!
자명고(自鳴鼓)가 보고싶다던 그 북소리같이 궁굴은 그 음성! 그
진실한 마음! 순결한 사랑! 아! 아슬라! 아슬라! 나는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공주는 흩어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간신히 들고 샛별을 불렀다.
별실의 문이 열리며 샛별은 능금 하나를 들고 나왔다.
공주는 능금을 받아들고 칼로 구멍을 파서 종이쪽지 하나를 감쪽같이
숨겨 넣는다.
샛별아 이것을 오늘밤도---
공주님 아이 어쩌나--- 이 밤중에---
귀여운 샛별 나의 심정을 알터이지, 오늘밤도 이것을 아슬라의 방(房)
앞 능금나무에다 달아매고 오란 말이야, 눈에 뜨이지 않도록 조심해---
샛별!
공주님!
샛별!
공주님 제손을 꼭 잡아 주사이다. 그러면 무서움이 덜릴 것만 같아요
샛별
공주는 잡고 창을 열고 바래 준다.
으앗!
다음순간 비명을 지르며 공주와 샛별이 실내로 뛰어들 때 정원(庭園)의
나무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주와 샛별은 들창 안에서 머리칼을 하늘에 올린채 바르르 떨며
사라지는 그림자를 흘겨볼 뿐이다.
저놈이 필시 무엇을 감시하는 꼴이고나
필시 그런가 봐요. 어제밤도 저 나무 뒤에 어떤 그림자가 있었어요.
달빛속에 흐릿하지만 파달장군의 시종(侍從)일시 분명했어요
옳지! 그런 꼬락선이야--- 비겁한 자들---
공주님!
샛별! 인제 아니가도 좋아!
공주님! 저는 인제 무섭지 않아요. 저 밉살스러운 놈을 생각하니
웬일인지 제게 힘이 생겼어요
샛별! 샛별!
샛별은 공주의 부름에 댓구도 없이 창문을 뛰어나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공주는 창곁에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슬라의 얼굴을 그려본다.
밤하늘에 뜬 조각달은 아슬라의 눈섭같고 반짝이는 별들은 영채나는
그의 눈동자와도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샛별이 능금나무에 달아놓은 능금속 글월을 보고 잠시 후이면 달려올
아슬라를 생각하니 여태까지 흐렸던 마음은 가신듯이 사라지고 금시
꽃밭이 되었다.
공주의 가슴엔 한줄기 희망의 무지개가 뜨고 그 마음은 견우(牽牛)를
맞이한 직녀(織女)처럼 한없는 기쁨 속에 설레기 시작하였다.
그는 공손히 두 손을 모아 밤 하늘을 우러러 사랑의 축복을 빌었다.
허공에는 아슬라의 얼굴--- 그리고 억센 두 팔뚝--- 포근한 품속--- .
공주는 이러한 환상을 그려보다가 물결치는 숨결 속에서
석경(石鏡)앞으로 뛰어가 꽃 단장을 하기에 바빴다.
이때였다. 왈칵 문이 열리며 샛별이 뛰어 들어온다.
샛별! 어찌 되었니?
공주님--- 저--- 저---
어서 어서---
되었어요. 감쪽같이 능금나무위에 호호---
아이 좋아--- 이몸은 천하를 얻은것 같구나--- 아- 이밤이 어쩌면
이렇게 즐거울까?
공주는 어쩔줄을 모르고 둥실 둥실 학무(鶴舞)를 추기 시작한다.
이때에 문이 열리며 들어온 최리왕은 주연(酒宴)에서 얼근히 취한
눈으로 이 광경을 보자 뜻하지 않은 기쁨에 어쩔줄을 모르며
야- 아! 내 집에 경사로다.
낙랑왕실에 경사로다.
귀여운 내 딸이 춤을 추다니---
너는 그렇게도 이밤이 즐거우냐?
암! 그럴터이지---
공주는 비밀히 간직한 연서(戀書)라도 남의 눈에 뜨인 처녀처럼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자리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버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어느새 기쁜 소식
이 네 귀에까지 날아온 모양이지--- 하하하---
인제 네게 말하거니와 천하에 명장인 파달장군과 혼약을 맺을
것을 나는 쾌히 승낙했지--- . 왕실에 경사로다 애햄---
예? 아바마마!
인제 머지 않아 나는 왕중왕(王中王)이 될 몸이야--- . 글쎄
파달장군이 너와 혼례만 치르면 漢나라의 십만 대군을 보내
준다는 구나, 그렇게 되면 고구려 서울을 쳐들어가기 쯤이야
--- . 왕자 호동이란 놈이 제 아무리 영걸이라 하지만 어림
이 있을소냐 따라지 목숨이지--- 아하하----- 나는 공주 덕
분에 왕중왕이 되렸다 으하하하--- .
자! 고개를 들고 이것을---
황홀한 진주 목거리!
너를 극진히 위하는 파달장군이 한(漢)나라에까지 불원 천리
하고 사람을 보내어 마련해 온 보물이로구나.
자! 이것을 사양말고 받아라.
혼례의 예물로 보내온 것이로다
아바마마--- 저--- 저---
자! 저렇게 풍악소리가 들려온다. 파달장군이 별궁잔치에서 공주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어든--- . 자! 내가 친히 목거리를 걸어주겠노라!
아바마마--- 아바마마--- 아니오이다
공주는 걸어 준 목거리를 베끼려하나 효도(孝道)의 길에 벗어나 부왕의
분노를 살 것이 두려워 하는 수 없이 하라는 대로 맡겨둔다.
아! 고울시고 고울시고 하늘나라 선녀인가 꽃동산의 공작인가!
앞맵시 보아도 고울시고 뒷맵시도 고울시고--- 자--- 나의 손에 의지하여
사뿐사뿐 걸어가자---
아바마마--- 그러하오나---
그러하오나 부끄럽단말이지? 으하하
아직도 성례를 이루지 않은 몸으로서 그 위에 뭇 사내들의
주연(酒宴)에 얼굴을 들고 나서겠아오리까?
으- 응 그러고 보니 그말도 지당하도다.
왕실에서 예의범절로 다스린 몸인지라 기특한 말이로다.
내가 취중에 막말을 한지고---
그러면 밤이 깊었으니 태몽(胎夢)할 꿈이나 꾸면서 잘 자도록
해라 아하하하---
공주의 안타까운 심정을 알 리없는 왕은 너털웃음을 연상 터치며 활개를
치며 문을 나간다.
다음 순간 공주는 찢어지고 터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허둥지둥 창 곁으로
간다.
조금까지도 별이 반짝이던 하늘은 금시 변하여 우르렁거리며 부실부실
비를 뿌려주기 시작한다.
이 빗방울 속에서 어둠길을 헤치고 아슬라가 올터이지--- .
아! 이 안타까운 심정!
땅을 쳐야 시원할까? 통곡을 해야 시원할까?
오랑캐와 혼인을 아슬라가 안다면 그 얼마나 낙심할 것인가!
아니 그것은 아니될 말이야--- .
아니 나는 죽어도 싫어 싫어---.
단 하루라도 아슬라의 곁을 떠나서는 못살 몸이야.
그러자니 어이하면 좋단 말인가?
그렇지--- 그렇지--- 아슬라가 오면 그를 달래어 이궁실을
빠져 나갈까?
평민으로 가장하여 어떻거나 그를 따라 인적이 없는 산중으로
---
이렇게 중얼거리며 허공을 바라 볼때 문을 두다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아슬라가 왔구나---
이 비를 맞으면서---
혹시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그렇지 불을 꺼야지---
문을 두다리는 소리에 불현듯 설레는 기쁨속에 달려가 문의 빗장을 끌려
놓고는 등불을 꺼버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서서히 문이 열리며 캄캄한 어둠속에 사나이 그림자가 나타난다.
공주는 애타는 그리움에 팔을 벌리며
기다렸어요. 무척 기다렸어요.
달도 뜨지않은 비오는 밤이오이다.
등불도 이렇게 꺼버렸사와요.
자! 이리로 가까이--- 어서--- 어서---
오! 그리운 님이여!
나를 그처럼 기다렸다구?
날더러 가까이 오라구?
그럴터이지 이히히--- 공주! 공주!
아니 그대가 누구란 말이오니까? 아니 아니--- 이손을 놓아요---
으아!
나야--- 나야---
아니--- 아니---
나야--- 나--- 그대의 낭군인 파달이야---
으아 파달장군--- 이 밤중에 어이하여 오셨나이까?
쉬! 쉬! 큰소리를 내지말어---
공주! 그대는--- 나의 아내가--- 아냐?
나는 이렇게 그대를 미칠듯이---
어서 이손을 놓아 주사이다.
어서 돌아가 주사이다
나는 못가! 못가! 비 내리는 이 한밤을 그대와 함께---
소리를 칠 테야요---
무어? 소리를 친다구?
너무 하오. 너무 하오--- .
공주! 공주!
그럼 내가 싫단 말이요?
그렇다면 어이하여 등불을 꺼버렸소?
그렇다면 누구를 기다렸단 말이요?
그 놈이 누구란 말이요?
에-잇---
듣기 싫어요. 어서 돌아가 주사이다
그대의 정부가 누구란 말이야?
당장에 이 칼로--- 그놈을---
장군은 남의 일에 상관치 말아요
상관치 말라구?
나는 대왕께서 허락한 미래의 남편이야. 어째서
상관이 없단 말이요?
미래는 모르오나 현재는 혼례를 하지 않은 몸!
어서 돌아가 주사이다
공주! 이러기야? 정말 이러기야?
이 손을 놓아요. 싫어요. 싫어요
소리를 칠테야요
나는 미칠듯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으아! 샛별! 샛별!
파달은 질겁을 하여 손을 놓고 공주를 노려본다.
공주는 이 기회를 타 파달의 손에서 뛰쳐 나와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친다.
샛별은 자는듯 아무런 해답이 없다.
파달은 죽은듯이 고요한 캄캄한 방안에서 인적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망두석 처럼 서 있다.
침묵이 흐흔다. 샛별은 나오지 않는다. 파달의 눈에는 불이 켜졌다.
육체는 고기를 앞에 놓은 짐 처럼 공주를 향하여 떨고 있다.
다음 순간 그는 다시금 애욕의 악마로 변하여 공주를 향하여 간다.
샛별--- 샛별---
공주는 샛별을 부르며 등에 불을 켠다.
파달은 달려와 불을 죽이고 공주의 허리에 두팔을 감는다.
이 순간 공주의 손에는 허공에 매어달린 설렁줄<처마 끝에 달아 놓고
사람을 부를 적에 흔들어 소리를 내는 종이나 방울을 울리도록 잡아
당기는 줄.(招人鐘)>이 잡혀진다.
육중한 파달의 품속에 들어 쓰러지는 찰나 설렁(줄)은 소란한 소리로
왈가당 절가당 밤의 적막을 뒤흔들었다.
샛별! 샛별---
공주는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파달은 손바닥으로 공주의 입을 막으며 짐승같은 야욕을 채우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설렁줄소리에 달려든 공주궁(公主宮)의 호위호반(護衛虎班)들은 예리한
창을 들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었다.
공주님! 공주님! 어이한 일이오니이까?
호반들은 연성 떠들석 하였다.
호반들은 떠들지 마라 파달장군께서 부르신 것이야. 상감마마와
더불어 행차하셨다가 별안간 몸이 편치 않으셔서--- 잠시--- 이렇게---
그렇지-- 그렇지--- 에헴--- 아야야야--- 아이 두(頭)야 아이
통(痛)이야--- . 아야 내--- 저--- 호위병을 불렀도다. 애헴---
한(漢)나라에서 오신 존귀한 국빈이시니 조심히 모시고 가라
예-이- 에-
설렁줄의 초인종소리와 호위병의 등장에 개망신을 하게 된 파달은
눈알이 뒤집힐듯 질겁을 하여 간(肝)이 콩알만하며 마치
병인(病人)모양으로 얼굴을 땅바닥에 파묻고 엎어져 있었으나 뜻밖에도
공주의 말이 이런식으로 나오게 되니 그는 도리어 호통을 하며 되살아
일어나는 것이었다.
공주님! 자고 가라는 말씀은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오나 우리가 혼례를 치를 때까지는 에헤
헤헤--- 저--- 저---
예의 법도를 지켜야 하오.
에헴--- 그러면 안녕히---
이놈들아 자! 가자!
그러면 안녕히 가사이다. 호반들은 장군을 조심히 모시라
파달은 위기일발로 개망신을 면하고 여러 호위병에게 부축되어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꽃피는 첫사랑
왕실에서 예의 범절과 교양이 높은 공주는 원수에 대하여도 하늘같은
넓은 아량으로 꽃핀 정원에까지 부슬비를 맞으며 바래어 주었다.
공주는 그제사 수건을 내여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았다.
이때에 고목(古木)뒤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나타난다.
아아! 공주는 질겁을 하며 달아나려 할때
나요! 나! 능금을 들고 왔소이다
아! 아슬라! 아슬라! 무척 그리웠사와요, 무척 기다렸사와요
공주는 사랑앞에는 예의도 수줍음도 없다는듯 아슬라의 품속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너무 좋아서 흑흑 느끼며 우는 것이었다.
고목위에서는 능청맞게 접동새가 울어 주었다.
공주는 아슬라의 손을 이끌고 공주궁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캄캄하였다.
공주는 불을 켜려고도 하지 않고 창 곁으로 가서 안타까운 심정을
애소하듯 두팔을 벌렸다.
호동은 수심에 잠긴 사람인양 멍하니 공주의 얼굴만 바라보고 섰는
것이 아닌가.
어이하여 말도없이 바라만 보는가요. 어둠속에 어리는 그대가 그리워.
헤매는 이손을 어루만져 주소서. 흘러간 그 옛날 진달래 핀 샘물터에서
샘물을 떠서 주던 손이오이다. 첫사랑을 바치려는 손이오이다. 아슬라!
아슬라!
공주! 공주! 나는 출진령(出陣令)을 받은 몸이요
예? 출진령?
그렇소. 내일이나 모래는 싸움터로 나가야 할 몸이라오
아! 아슬라! 아슬라!
내가 자명고 파수(自鳴鼓 把守)로 남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것도 다 허사였어요.
소녀가 부왕에게 사뢰어 자명고 파수로 간청을 하였지만
그것은 한(漢)나라 사람이 아니고는 안된다는 분부였사와요.
아슬라를 싸움터로 내어 보내려는 것도 필시
파달장군의 장난일꺼야--- .
우리 두사람 사이를 시기하는 파달은
아슬라를 출진케하고는 소녀와 혼례를 하자는거야요.
아! 아슬라 어이하면 좋단말야?
오! 하늘이여 어이 하오리까?
공주! 나는 싸움터로 나가선 안될 몸이야.
나는 그대의 곁을 떠나고 싶지않어 공주!
공주! 무슨 방도가 없을까?
오호라--- 아슬라--- 좋은 수가 있어요
좋은수가 있다고요?
예! 아슬라는 소녀를 위하여 싸움터로 나가 주어요
예? 싸움터로? 그러면 나가서 죽으란 말이요?
아니--- 아니--- 싸움터에서 큰 공을 이루고 이기고 돌아오
란 말이야요. 만일에 고구려를 무찌르고 전승 장군으로 개선
할 때에 소녀가 혼인을 손을 모아 애원한다면 완고하신 부왕
께서도 그때엔 허락해 줄 것이야요. 아슬라! 아슬라! 소녀
를 위하여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고구려를 무찌르고 돌아와
주어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을 뭇찔러 주어요! 아슬라! 아
슬라!
공주! 공주---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가 그렇게도 원수요!
그렇게도 밉소?
미워요. 원수야요. 아슬라 이칼로 어서 그놈의 목을 치고 돌
아와 주어요. 그때까지 소녀는 순결한 몸으로 죽자하고 기다
릴테야요. 어서 출진하여 승전장군이 되어 주어요. 어서 이
칼로 왕자 호동의 목을!
호동의 목을 ? 이칼로 아! 공주! 공주!
아슬라는 공주를 힘껏 껴안으며 야릇한 운명에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창밖에서는 어느듯 닭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의 시간이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너무나도 짧았다.
하고자 했던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을 트이는 동천 하늘은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슬픈 아침인가! 비정의 아침은 왔다.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반월궁(半月宮) 공주의 침실에서
원앙침(鴛鴦枕)에 검은 머리를 풀어 놓고 아슬라와 첫사랑의 꽃을 피운
밤은 그네들로 하여금 촛불없는 화촉(花燭)의 첫날밤이었다.
꽃이 나비를 맞이한 기쁨!
나비가 꽃속에 든 기쁨!
생명를ㄹ 걸고 사랑하는 그들의 기쁨이 그 얼마나 아리따운 것이언만
그러나 어이하랴.
날이 밝으면 그들앞에는 무서운 운명이 그리고 무서운 얼굴들이
미친개(狂犬)처럼 짖고 물어뜯을 것이 아닌가?
꽃수놓은 비단요에 고스란히 누워 허공만 우러러보는 눈과 눈에는
기구한 운명을 탄식하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내리는 것이었다.
간밤에 공주의 내실로 어떤 야심을 품고 왔다가 쑥스럽게도 소박을 맞고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던 파달--- .
게다가 아슬라와의 비밀을 알고 질투와 정욕의 불덩어리로 미친듯이
날뛰던 파달은 필시 그길로 부왕(父王)을 찾아 갔을 것이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그는 부왕앞에서 뭐라고 아뢰었을 것인가?
공주는 정부(情夫) 아슬라하고---
필시 이 게 귀에 담지도 못할 무서운 말을 징그러운 그입으로 뿜어
버리는 그순간 이말을 들은 부왕은 얼마나 놀랐을 것이며 얼마나 분노에
치를 떨고 있을 것인가?
날이 밝으면 팔자(八字) 수염을 푸들거리며 공주의 내실로 달려들
부왕의 무서운 그 얼굴!
무서운 두 눈!
무서운 그 말!
낙랑의 왕실을 더럽히고 외간 남자와 간통을 한 년이라고 뇌성벽력이
떨어지며 장검(長劍)을 빼어 올린 그 무서운 부왕의 모습이 눈에 훤하니
보이는 것이다.
부왕이냐? 사랑이냐?
사랑하는 아슬라에게 순결한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버린 이제 와서
파달장군과의 혼인이란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아슬라와의 사랑이 그리고 꽃다운 그의 일생이 짓밟히기 않기 위하여는
오직 한길이 있을 뿐이다.
탈출! 궁성 탈출!
황홀한 은별관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금이야 옥이야 고이 고이 키워준
양친마저 버리고 아슬라를 따라 기다리는 사람도 없이--- 정처도 없이---
그리고 기약도 없이 떠나는 오직 탈출--- 한 길이 있을 뿐이다.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너무도 무서운 일이었다.
이생각 저생각에 느껴울던 공주는 아슬라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고야
말았다.
공주! 공주! 우지마오!
아슬라! 이몸은 갈길을 택하였사와요
갈길을? 어떻게?
낭군을 따라 궁성을 떠날 것을---
낭군을 따라 그러면 나를 따라 궁성을 떠난다고요?
공주! 공주!
아슬라는 애처러운 공주의 비장한 결심에 눈물겨운 마음으로 공주의
흩어진 머리를 고이 쓰다듬어 주며 백옥 같이 흰 얼굴에서 구슬같은
눈물방울을 씻어주니 공주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보드라운 손가락에서
쌍가락지 한짝을 빼어 아슬라의 새끼 손가락에 말없이 끼워준다.
백년가약의 맹세로 하는 것이었다.
이때 죽은듯이 고요한 침묵을 깨뜨리고 문앞에서 강아지가 콩콩짖는
소리가 허공을 물어 뜯는다.
두사람은 불길한 예감에 벌컥 일어나 흩어진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약속이나 한듯이 창문으로 당황하게 달려가 왈칵 문을 열어제치고 창밖을
더듬어 보나 아무도 눈에 뜨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강아지만은 분명히 무엇을 본듯 한그루 고목(古木) 있는 쪽으로
향하여 콩콩 짖으며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날이 밝기도 전에 놈들은 왔구나! 이러한 예감이 든 아슬라는 의관을
정제하기에 바빴고 공주는 아무 말도 없이 불이야 불이야(부랴 부랴)
침실문을 열어제치고 내실로 재빠르게 나가버린다.
죽느냐? 사느냐?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최후의 막다른 시간은 이제 눈앞에까지
닥아(다가) 온 것이다.
危機一髮
시시각각으로 닥아오는(다가오는) 운명앞에서 탈출을 결심한 아슬라는
무관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허리에 장검을 차고나자 그는 창곁에서
고구려의 하늘을 우러러 보며 경건하게 조국통일의 합장을 올리는
것이었다.
어느 절에서 은은히 울려오는 쇠북소리!
분명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쇠북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는 아슬라는 날뛰는 표범마냥 창밖으로
뛰어나가기가 바쁘게 자명고실 가까운 거리에 우뚝 솟은 고루(高樓)로
뛰어 올랐다.
먼동이 트는 하늘아래 훤하게 밝아오는 허공에는 어느듯 가랑비도
자취를 감추고 지금까지 어둠속에 자태를 감추었던 모든 것들이
복병(伏兵)했던 군사인양 머리를 들고 알숭 달숭(알쏭 달쏭)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루(高樓)에서 굽어보면 서(西)쪽에 울창한 고목들--- .
고목 옆에 가파른 바위절벽--- .
바위절벽 위에 웅장한 자명고실--- .
자명고실 밑에는 감옥(監獄)--- .
절벽밑으로 흘러가는 대동강(大同江)--- 동쪽에 모란꽃 핀 모란봉--- .
강변에 닻줄을 내린 나룻배 몇척--- .
시시각각으로 분명한 자태로 나타나는 이러한 풍경을 눈에 불을 켜고
쏘아보는 아슬라의 머리속에는 바야흐로 결행해야 할 무서운 계교가
번개질을 하자 그는 칼집에 손을 대며 스스로 소리없이 외치는 것이었다.
이제 자명고를 찢어 버리고 공주와 함께 저 배를 타고 황해(黃海)바다로
빠져 나가야 할 운명의 시간은 왔다.
지금 고구려 군사들은 낙랑과의 국경에 집중하여 신기 자명고를
두려워하며 왕검성으로 진군할 계략을 세우고 있을 터이지--- .
내가 이제 자명고를 찢어버리고 낙랑을 탈출하여 진군(進軍)을 앞둔
우리 고구려군사 앞에 불쑥 나타나면 그들은 얼마나 반가워 날뛸 것이냐?
그들의 사기는 얼마나 떨칠 것이냐? 그때에 이몸은 마상(馬上)에 몸을
날려 선봉장(先鋒將)으로 비호같이 이 왕검성으로 달려들면 찢어진
자명고에 사기(士氣)를 잃은 낙랑군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무너질
것이 아닌가?
그때는 고구려가 통일되는 날--- .
오랑캐는 한나라의 속국으로 삼백년이나 종살이로 신음하던 우리 불쌍한
겨레인 낙랑사람들은 통일과 평화를 찾은 기쁨속에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
그렇지--- 통이리 되는 그날에는 이몸도 승전의 장군으로 그리운
궁성으로 다시 돌아가 어엿한 고구려 왕자로 탈을 벗고 공주앞에
나타난다면 그는 얼마나 놀라며 반겨줄 것이냐?
그리고 이몸을 잘못알고 흘겨보던 부왕도 그리고 최리왕도 그때에는---
.
아! 나에게 힘이 솟아난다. 그러나 저 자명고를 무슨 재주로 찢는단
말이냐?
아슬라는 이러한 공상으로 가슴을 설레며 공주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
울창한 나무밑에서 손짓을 하는 여성이 있다.
허름한 옷에 죽장(竹杖)을 짚은 여인--- .
눈이 뚫어지도록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바로 기다리는 공주인 것이다.
아! 공주---
그순간 아슬라의 눈에는 불꽃이 뛰며 단숨에 고루의 층층다리를
뛰어내려 울창하게 하늘을 덮은 고목 아래로 달려갔다.
아슬라! 아슬라! 어서 저 배를 타고 도망을 치사이다
공주!1 잠깐만---
어서 이길로 떠나야 해요. 어서--- 어서---
이제 파달장군이 이리로 달려올 것이야요.
지금 파달장군은 이몸을 찾고 있어요.
뒷문으로 간신히 빠져 이렇게 평민으로 변복을 하고 나오는
길이오이다.
자! 어서 어서---
공주! 잠간만--- 잠간만
어인 일이오니까? 아슬라! 아슬라!
공주! 이몸은 한가지 청이---
예? 청이? 무삼 청이오니이까?
자! 보사이다! 이 보자기!
이렇게 우리가 일생을 먹고살 수 있는
금은 보화를 지니고 나왔사와요
아니 그런 청이 아니오이다
그렇다면 무삼 청이오니까?
공실도 부왕도 버리고 따라가는 아슬라의 청이라면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올 몸! 자! 어서--- 아뢰어 주사이다.
공주! 진정 이몸을 생각한다면--- . 진정 이몸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면 저기 솟아오르는 햇님에게
손을 들고 맹세할 수 있겠나이까?
이말에 공주는 햇님을 우러러 눈을 스르르 감고 한손을 살며시 올린다.
공주! 놀라지 말고 들어주오. 고구려와 낙랑은 에로부터 한
나라 한겨레--- . 지금 우리 고구려의 국토 낙랑은 오랑캐
한나라의 앞잡이로 황송하오나 그대의 부왕 최리왕이 무고한
낙랑 백성을 노예로 삼고--- .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 우는
데 왕실만이--- 그리고 한나라에 아첨하는 만조백관만이 주
지육림(酒池肉林)에 풍악을 갖추고---
그만--- 그만--- 아슬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쩌란 말씀이오니이까?
그러니까 만백성이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는 두나라가 옛날같
이 하나로 통일 되어야 할 것이며--- . 두나라가 통일되기
위하여는 --- 저--- 저---
그러니까 어쩌란 말씀이오니이까?
모란꽃같이 새뽀얀 공주의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하여져 상기한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아슬라의 얼굴만 애소(哀訴)하듯 그리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어떠한 불길한 선고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공주!
그러니까 어쩌란 말씀이오니까?
그러니까 공주! 자-- 자--- 자명고를---
이말이 떨어지자 무슨 불길한 예감이 떠오른듯 한걸음 두걸음
아슬라에게서 뒷걸음을 한다.
아슬라는 공주에게 애소나 하는 듯이 한걸음 두걸음 따라가 오들 오들
떨고 있는 공주를 힘껏 포옹하여 버린다.
이때 불쑥 울창한 나무밑으로 살금 살금 걸어오던 파달장군 일행이 이
놀라운 광경에 흠칠 놀라며 고양이 새끼같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살금
살금 걸어와 고목뒤에 숨는다.
이런 눈치를 채지못한 아슬라는 마침내 무서운 말을 뿜고야 말았다.
공주! 자명고만 없다면 나라는 통일되오
그러니 어쩌란 말씀이오니까?
자명고를 이칼로---
아슬라는 허리에 찬 칼집에서 쑥 비수를 빼니 예리한 칼날이 번끗한다.
예? 아슬라! 이 무삼 짓이요? 이몸더러 자명고를 찢으란
분부이시오니이까?
그렇소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며는---
낙랑의 신기 자명고를? 아슬라---
그대의 사랑이 진정이라면--- 공주님---
낙랑의 국보인 자명고를?
공주가 고구려의 궁성에서 고구려의 왕자와 어엿한 백년가약
을 바라신다면---
예? 아슬라! 그러면 그대가 고구려의 왕자란 말이요. 그러
면 그대가 불구대천의 원수--- . 왕자--- 호--- 호--- 호동
이란 말씀이오니이까?
그렇소, 이몸은 틀림없는 고구려 왕자호동! 공주! 공주! 이
몸을 용서하오
공주는 눈알이 뒤집힐듯 무서운 눈으로 아슬라를 노려보며 뒷걸음을
한다.
아슬라는 두팔을 벌리고 뒤따라간다.
아슬라! 나에게로 가까이 오지마오. 소리를 지르겠소. 원수!
원수! 왕자호동!
공주! 공주!
에잇 고약한자! 거짓 사랑으로 이몸을 농락하고--- 이몸으로 하여금
자명고를 찢게 한 후엔 이몸을 헌 신짝처럼 짓밟아 버리고 그리고는
혼자만 홀몸으로 도망을 치려는 자!
공주! 공주! 아니오이다
이몸을 거짓 사랑으로---
공주! 공주! 이옴은 진정으로 공주를 사랑하오
뻔뻔한 거짓말---
어서 이칼로 자명고를 찢어주오
이몸에게 가까이 오지마오. 나의 원수! 소리를 지르겠소.
이손을 놓아주오. 사람을 부르겠소
공주! 자명고를 찢고나서 이길로 배를 같이 타고 고구려로
떠나갑시다
거짓말--- 거짓말---
고구려 궁성에서 어엿한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뻔뻔한 거짓말---
이몸의 부왕은 반겨줄 것이오이다
거짓말--- 거짓말---
공주! 하늘을 두고 맹세하오. 저 해를 두고 맹세하오. 이몸은
진정으로 그대를---
아! 아슬라! 아슬라!
목숨보다도 그대를 더 사랑하오. 공주!
아! 아슬라! 왕-- 왕-- 왕자님--- . 그것이 진정이오니
까?
무서운 원수를 노려보며 한걸음 두걸음 뒷걸음을 하며 분노와 증오심에
불타는 눈동자는 어느덧 애처러운 눈동자로 변하여 버리고 그눈에는
구슬같은 눈물이 방울 방울 흐르며 아슬라의 품속에 그 얼굴을 파묻고
느껴우는 것이었다.
아슬라는 마치 산고(産苦)을 치른 산모(産母)인양 진땀을 흘리며 가슴이
터지도록 힘껏 공주를 껴안는 찰라--- .
이놈아 꼼짝말고 섰거라. 고구려왕자 호동!
청천벽력같은 고함소리가 터지는 순간 벌떼같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
파달장군의 일당은 왕자 호동의 가슴에 포승을 지우고야 말았다. 이렇게
불의에 기습을 당하고 보니 천하에 검술을 떨치는 호동이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칼집에서 칼을 빼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그는 아람드리 고목에
강아지새끼처럼 비끌어 매여달리는 것이다.
호동을 바라보는 공주!
공주를 바라보는 호동!
놈들은 다음 순간 호랑이나 사로잡은 사냥꾼처럼 미칠듯이 날뛰며
제마다 목구멍이 터지도록 악담을 퍼부며 곤장으로 미친 개 치듯 후려
갈기기 내기상을 하였다.
저놈을 죽여라
저놈의 눈알을 빼어라
아하하하--- 그 맛이 어떠냐? 공주님 울지말고 저놈의 저꼴을 좀
보사이다. 아하하하--- 통쾌한지고--- . 자 우리의 원수 고구려 왕자
호동! 신기 자명고를 찢으러 온 자! 공주님을 농락한 뻔뻔한 놈!
저놈의 살더미를 오리 오리 오려내고 저놈의 앞가슴에 열두구멍을 뚫어라
아니되오. 아니되오. 그대들은 물러나오
파달에게 이러한 명령이 떨어지자 공주의 애소는 들은체 만체 놈들은
피묻은 곤장을 팽개치고 창검으로 호동의 가슴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하여 눈물만 머금고 있던 공주는 이순간 고목으로 달려가
호동의 앞에 당황히 팔을 벌리고 창칼을 제지하는 것이었다.
아니되오. 아니되오. 아슬라는 이몸의 낭군이로소이다. 차라리
그칼로 이몸의 가슴을--- 자---
공주님 비켜나 주사이다
잔인 무도한 처사! 천벌을 무서워 하오소서.
상감마마에게 사뢰지도 않고 이 무삼 짓이오니이까?
파달장군님--- 장군님---
저놈은 오늘밤 잔치에 술안주감이로소이다.
이몸은 오늘밤 공주와 혼례를 할 몸
예? 파달장군 그 무삼 말씀이오니이까?
상감마마께서 --- 아하하하--- 그러니 자- 비켜나 주사이다
아니되오, 아니되오. 장군님---
오늘밤의 즐거운 사랑 잔치에 저놈의 피를 축배로 하고 이몸
의 가슴이 후련할 것을--- . 그때에 상감마마에게 사뢰기로
하리다
장군! 소원이로소이다. 아슬라의 생명을 살려 주오소서. 저
렇게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째리지 마소서
공주님! 진정 그러시다면 이몸에게도 소원이--- 먼저 소장의
소원을 저놈이 보는 앞에서 풀어주시겠나이까?
아슬라를 살려 주오신다면---
소장의 소원을 풀어 주오신다면---
예--- 예--- 장군--- 장군---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염불이나 하듯 손을 모고(모우고) 파달에게
애걸하는 것이다.
공주--- 그러시다면 저놈에게 이렇게 말하여 주오. 공주는
오늘밤 파달장군과 백년가약을 맺고 한평생을 낭군에게 바칠
것을 하늘을 우러러 합장하시며--- 시원한 소리로 저놈의 귀
에도 이몸의 귀에도 분명히 들리도록 공주님 소장의 소원이로
소이다. 저놈 앞에 가까이 가서 저놈의 귀에 들리도록---
공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소름이 끼쳤다.
순결한 마음과 몸을 스스로 바친 사랑하는 낭군 앞에서--- 이부를
섬긴다는 그 말을--- 하늘이 알면 금시 천벌이 내릴 말을--- 내 어이
내입으로 한단 말인가?
공주는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고개를 들어 호동을 바라보았다.
선지피 방울이 흐르는 그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말없이 공주를 바라보는
호동은 터지는 아픔과 분노속에서도 고목처럼 태연하였다.
이신보국(以身報國)을 천추에 자랑하는 고구려 무사도(武士道)의 정신을
한몸의 추태로 인하여 더럽힐 것을 생각하는 비장한 결심에서 였으리라.
실상 소리를 지르며 추한 발악을 한것은 모진 매를 맞는 호동이가
아니라 비겁한 기습으로 호동을 박승지우고 추잡한 욕설과 야수적인
만행으로 승리를 자청(자처)하고 날뛰는 파달일행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파달장군의 만행은 공주로 하여금 더욱 악감과 증오감을
일으켰건만 그러나 어이하랴!
호동을 살리기 위하여는 표리가 부동하건만 파달이 시키는대로
아니하고는 못 백일(못 배길) 공주이기도 하였다.
호동의 앞에까지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놓은 공주는 품속에서 수건을
끄내어(꺼내어) 들고 다시한번 호동의 얼굴을 우러러 보았다.
그렇게도 풍채좋던 그의 얼굴에는 선지피가 흐르고--- 머리칼이 얼굴에
흩어지고--- 옷이 갈래 갈래 찢어지고--- 이 광경을 사랑어린 눈동자로
어보는 공주는 복바치는 설음(설움)에 흐느껴 울면서
왕자님! 야릇한 운명의 장난이오이다. 이몸은 그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몸! 이몸은 임(님)을 위하여--- 지아비
를 구하기 위하여--- 저 파달장군에 시--- 시--- 시집은---
공주! 이몸은 고구려의 어엿한 무사! 공주는 백년가약을 맺
은 나의 아내어늘 죽으나 사나 지어미와 지아비는 한마음 한
몸됨이--- 천( )이어늘--- 고구려 왕자 호동이가 지어미를
팔아 구차히 목숨을 건졌다는 오명을--- 그리고--- 그리고
--- 낙랑의 공주가 이부를 섬겼다는 그 오명을--- 천추에 남
길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후세의 웃음꺼리가 될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공주!
피를 씻고 머리를 가다듬어 주었다.
공주님! 무엇을 하나이까? 어서 그논에게 선고를---
호동를 연모하는 공주의 태도에 질투심에 불타는 파달장군은 칼집에
손을 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소리에 고개를 돌린 공주는 오만한 그 태도에 발칵 증오와 분노심이
복바쳐 그를 노려 보았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예사 일 같으면 부왕에게 사뢰 천하에 대사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공주의 숨은 힘도 있건만--- 그러나 이 일만은 부왕이 아무리 공주를
금이야 옥이야 위한다기로 어쩔 방도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된 공주는 파달을 흘겨보는 눈으로 살며시 웃음까지 억지로
지어보이면서 호동에게로 다시 돌아선 것이다.
이몸을 옥같이 부서지게 하소서
공주! 이승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 저승에서나 맺어보사이다.
자! 이놈들아! 나를 죽여라. 나의 고기를 먹어라. 나의 피
를 마셔라. 네놈들 오랑캐가 낙랑 삼백년에 국토를 먹고 무
고한 내나라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는것처럼--- . 자! 나를
씹어 먹어라. 자! 나를 어서 죽여라
이것이 세상을 하직하는 왕자의 소리다. 이것이 세상에 남겨 두는
고루려 무사의 넋이기도 하였다.
옆에서 八字 수염을 실룩거리며 치를 떨고 파달장군은 급기야 분노가
폭발되자 칼을 왈칵 빼여올리고 호동의 목을 치려는 것이다.
공주는 불현듯 파달의 손에 매어 잘리며 옥신각신하더니 간악(奸惡)한
힘에 노곤하게 지치어 공주는 애처럽게도 땅에 쓰러지고야 만다.
자! 원수 호동아! 이제 네 소원을 풀어주마. 이승에서 다
하지 못한 그 사랑은 내가 네놈을 대신하여 이어줄 것이니 공
주는 내게 맡기고 마음놓고 가거라
이렇게 악담을 배앝고(뱉고) 다시금 칼을 올리때 어디선가 요란한
경종(警鍾)소리가 천지를 뒤흔든다. 다음순간 북문(北門)쪽으로 말을
달려 오는 병부사(兵符使)가 고함을 지르며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찢어진 自鳴鼓
이 소리에 깜짝 놀라며 그 쪽을 바라보는 파달은 당황히 칼을 멈칫하고
섰다.
화살 같이 말을 달려온 병부사는 말에서 내려 서며 고구려 군사의
내습을 아뢰는 것이었다.
병부요--- 병부! 고구려 군사가 왕검성으로 진격을 하고 있
소, 어서 자명고실 문을 열어제치오
뜻하지 않은 병보에 눈알이 뒤집힌 파달장군은 홍두깨처럼 뛰는 가슴을
헐덕거리며 마상에 높이 앉은 병부사를 향하여 소리쳤다.
병부사! 그것이 정말인가? 고구려 군사가 왕검성으로 몰려
온다고?
그렇소! 우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이다. 왕검성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 저 군사들은 무얼하고 있는거요? 저 자명고는
어찌된 것이요
병부사의 뜻하지 않은 말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눈초리로 병부사의
얼굴만 쏘아 보던 파달장군은,
그런데 그대는 누구란 말인가?
이몸은 얄루성에서 온 병부사! 그런데 저놈은 누구란 말이오니까? 저
고목에 포승을 진 놈이---
저놈이 바로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요
야! 뻔뻔한놈! 그러면 어째서 저놈을 아직까지도 저렇게 살려 두었단
말씀이오니이까?
그래서 소장이 저놈의 목을 막--- 치려던 길에---
파달은 다시금 잊어버렸던 호동을 노려보며 칼을 번쩍 올린다.
경종소리가 점점 소란하게 울린다.
잡아라. 잡아라
성문쪽에서 고함치며 달려오는 군사들의 소리인양하다.
아! 저소리 어느듯 고구려 군사가?
그렇소 우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요. 저놈은 이몸이 단칼에
처리할터이오니 장군께서는 어서 자명고 문을--- . 그리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잠시 존귀하신 몸을 한(漢)나라로 피하소서
으--- 응---
이렇게 대답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파달장군은 바위언덕으로
당황히 뛰어 올라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이 병신놈들아--- 고구려군사가 저렇게 달려드는데 게서 무얼하고
육갑을 하는 것냐? 어서 이길로 성문으로 달려 가라. 성문을 지키라,
성문을 성문을---
자명고실 파수와 고목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군사들은 겁을 집어 먹으며
성문쪽으로 흩어져 간다.
낙랑의 신기로 감추어 있던 자명고문이 파달의 열쇠로 인하여 찌르릉
찌르릉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린다.
그때에 나타나는 자명고의 위용(偉容)--- 으리으리한 자명고--- .
불상같이 말없이 앉은 자명고--- .
낙랑국의 수호(守護)로 하늘이 주었다는 전설과 미신을 가진 이
자명고는 과연 적군이 국토를 침범할 때엔 뇌성벽력같이 저절로 울릴만한
어딘가 범하지 못랄 위용이 어린 북이 아닌가.
숨결 가쁜 시간이었다.
귀중한 생명이 좌우되는 아슬아슬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호동은 금시 목이 떨어지려는 순간에 비로소 숙원이든 자명고를 박승을
지고 바라보게되는 이 야릇한 운명!
공주는 바야흐로 황턴갈 호동의 품에 매여 달려 울고 병부사는 창을
호동의 가슴에 겨누고 파달장군의 행동만 바라본다.
파달은 호동을 바라보며 높다란 바위언덕을 한걸음 두걸음 내려온다.
이때였다.
호동의 가슴에 창을 겨누고 섰던 병부사는 별안간 칼로 박승을 선듯
베어버리고 호동의 무릎앞에 꿇어 엎드리고 고개를 든다.
왕자님--- 이몸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아! 그대가 누구란 말인가? 사다한! 사다한---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상감마마의 어명을 받들고 밀사로 온 몸! 왕자님을 모시고
환국(還國)하라는 어명--- 왕자님을 구하려고, 자명고를 찢으려고--- .
이렇게 변장을 하옵고---
이말을 들은 공주의 뜻하지 않은 기쁨은 호동의 놀라움보다도 컸다.
공주! 이기회에 저 저--- 자명고를---
예--- 예--- 자명고는 소녀의 손으로
공주는 품속에 지닌 비수에 손을 대어 본다.
병부사는 창을 들고 파달을 기다리며 섰다.
공주를 껴안은 호동!
호동을 껴안은 공주!
이광경에 놀라 날뛰는 표범처럼 달려온 파달은 눈에 불을 켜고 소리를
질렀다.
네 놈이 웬 놈이냐? 이게 무삼 짓이냐? 에잇---
아하하하--- 못난놈--- 소장은 오랑캐의 고기를 먹으러 왔다. 이몸은
파달장군의 피를 마시러 왔다
파달의 칼날이 허공에 번쩍이는 순간 그의 가슴에는 호동의 예리한
갈이--- . 그리고 공주의 비수는 자명고의 한 복판에 박히는 것이었다.
쓰러지는 파달!
찢어지는 자명고!
잡아라, 잡아라, 고구려의 염탐을 잡아라
이렇게 소리치며 낙랑의 군사들은 이제사 여기저기 흩어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위기일발의 아슬 아슬한 탈출을 앞두고
공주는 자명고를 찢고는 그만 맥이 풀려 그아래 쓰러진것이 아닌가?
이광경을 본 호동이가 그리로 달려가려하나 때는 벌써 늦다.
그곳에는 수많은 낙랑의 군사들이 벌떼처럼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왕자님! 어서 저말을 타고 강변으로 빠져나가소서. 그리고 배를
타고---
그대는? 그리고 저 공주를--- . 어이한단 말이냐?
공주는 이몸에게 맡기소서
잡아라, 잡아라, 죽여라 죽여라---
어서 어서--- 왕자님---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으로 공주를 남긴채 호동은 다가오는
사지(死地)에서 말을 강변에 달리어 다달아 나룻배에 뛰어올랐다.
화살이 날아오고 강변으로 군사가 달려든다.
호동은 그리운 공주와 사다한을 남긴채 본의아닌 배를 혼자 타고 노를
저으며 대동강 물결을 차고 떠나는 것이었다.
왕검성을 멀리 떨어진 강상(江上)에서 바라보니 자명고실 옆에서 수많은
군사를 상대로 용감하게 칼싸움을 하던 장사(壯士) 사다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사! 분명히 --- . 전사한 것이다. 사다한은 생명을 건져주고 대신
만족하게 죽은 것이 아닌가? 고구려의 용감한 무사의 주검이여!
그는 이렇게 중얼거릴 때 문듯 자명고실 옆 절벽위에 섰는 한 여인을
찾아 내었다.
손을 젖고 섰는 여인!
모란꽃을 뿌리며 홀로 섰는 여인!
그여인이야말로 그의 그리운 낭군인 왕자 호동의 앞길을 축원하는
낙랑공주의 애처러운 이별의 모습인 것이었다.
국경 산악의 밤은 깊어만 간다.
바로 맞은 편에 낙랑의 산악을 바라보는 고구려 국경의 산상에 집결한
고구려 대군은 낙랑 진격의 영만을 기다리며 오늘도 불안속에 하룻밤을
꼬박 새는 것이었다.
산골짝마다 고목(古木)아래마다 날이 밝으면 판가리 싸움터로 생명을
걸고 나설 수많은 군사들과 군마(軍馬)들이 창검을 옆에 세워 놓고
결전전야(決戰前夜)의 잠을 부르는 것이다.
허나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생명을 기약할 수조차
없는 그들이 말없이 돌베개에 누워--- 조국의 땅에 누워
이사통일(以死統一)을 맹세하는 비장한 눈과 눈에는 제마다 색다른
환상들이 별나비처럼 오고 가는 것이다.
고향에 두고온 그리운 처자!
낙랑의 신기 자명고!
호동장군의 실종(失踪)!
한번 칼을 들면 고구려 호반 이란 그 이름만 들어도 적군의 간장을
서늘케 한다는 용감무쌍한 고구려 군사였건만 이번 싸움에서만은 어느
싸움에서나 선봉장이었던 호동장군이 자취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낙랑에
자명고 있다는 소리에 제마다 마음 한구석에 불길한 예감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이렇게 불안한 마음에서 어느 호반들은 승전의 축배로써 마련된 큼직한
술독에서 연성 바가지 술잔을 들이키고는 그냥 큰 절이나 하듯
꼬꾸라지는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여인의 머리채를 가슴에 얹고 눈물이
글성 글성한 호반도 있는 것이다.
전쟁 전야에 있어서 이러한 불안과 불길한 예감이란 일찌기 연전연승의
전통을 자랑하는 고구려 군사에게선 그 그림자조차 엿볼 수 없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전의 전야에 군사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보니 군사들보다도 불안감에서 눈에 불을 켜게 된 것은 그들을
인솔할 장군들인 것이다.
어느 절벽위 정각에선 맥빠진 군사들의 이러한 광경을 굽어 보던 몇
장군들이 작전계획을 둘러싸고 두가지 의견이 대립이 제마다 큰 입에서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군사의 사기란 천군만마보다도 강한 힘이라고 병서(兵書)에도 하였으니
좀 더 때를 기다림이 지당한 줄로 아뢰오
지당하오나 부당한 말씀--- . 사다한이 낙랑궁성으로 떠나간지 어느덧
달포에 가까우니 우리 어찌 왕자님의 생환을 기약하리요. 듣자하니
오랑캐 파달이가 한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야망을
귀공(貴公)도 아신다면 그 어찌 진격의 지연을 고집한단 말이요?
아니되오. 장군! 승산이 없는 싸움은 망국의 싸움!
무엇이? 그대는 고구려 사람인가? 오랑캐의 앞잡이냐?
나라를 망치려는 당신이야말로 천추에 고구려 무사도를 더럽힐 망국의
장군임을 알으라
이렇게 옥신각신 싸움을 하는 동안에 결전의 음산한 밤이 훤하게 밝게
되자 급기야 낙랑통일의 진격을 준비하라는 전고(戰鼓) 소리와 소라 나팔
소리는 널려진 고구려 군사에게 무서운 긴장과 흥분을 뿌리며 방방곡곡에
전파되었다.
하늘을 덮은 예리한 창검!
전고에 날뛰는 군마와 군기
결전을 맞으려는 눈동자--- 눈동자---
진격령이 떨어지려는 찰라의 침묵---
이제 낙랑통일의 진격령을 입에 담고 마상(馬上)에 몸을 실은 한 장군이
고구려 흥망의 운명을 지니고 대군앞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허공에 창을 올리며 외쳤다.
용감한 고구려 군사여 보라! 여기를 보라! 항상 원수와의 싸움에서
선봉장이시던--- . 고귀한 왕자님의 몸으로 선봉장이시던--- .
호동장군은 오늘 싸움에 아니 계시다. 우리는 호동장군의 뒤를 따라야
한다
이때였다. 막 진격령이 내리려하는 찰라! 앞산 산마루를 넘어
쏜살같이 말을 달려오는 낙랑의 무사 한사람이 있다.
이 광경을 본 고구려 군사들은 일제히 활을 겨누고 눈에 불을 켰다.
긴장과 흥분의 시선속에서 고구려군사의 진지에까지 달려온 낙랑의
무사는 손을 저으며 선봉장(先鋒將)의 기치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모든 군사는 연장을 겨냥한채 넋을 잃고 바라만 볼 뿐이다.
선봉장 한사람이 창을 세우고 말을 몰아 달려가기가 바쁘게 낙랑 무사의
가슴패기에 창을 찌르고야 말았다.
와!
하고 진지에서는 목구멍이 터지듯이 고함소리가 터진다.
위기일발의 찰나였다.
마상에서 날쌔게 몸을 피해 선봉장의 창을 빼앗은 낙랑군사는 허공에
창을 휘두르며 외치는 것이다.
용감한 고구려 병사여! 나를 자세히 쳐다 보라! 이몸은 고구려
군사의 선봉자! 왕자 호동이다!
이 놀라운 말이 떨어지자 칼을 빼여들고 달려들던 몇 장군은 뜻하지
않은 호동장군의 출현에 얼을 잃고 서로 바라만 볼 뿐이다.
눈과 눈--- .
얼굴과 얼굴--- .
침묵과 환희.
솟아나는 눈물--- .
어느 장군은 마상에서 호동의 무릎에 엎드려져 복바치는 기쁨에 목놓아
울었고 어느 장군은 말에서 뛰어내려 머리를 땅에 떨어뜨리고 경배를 하고
나선 미친 사람마냥 땅을 치며 좋아서 날뛰었다.
감격과 눈물과 침묵속에 흐르는 긴장한 시간은 급기야 천지를 뒤흔드는
환호와 만세소리로 발칵 뒤집히고야 말았다.
만세! 만세!
호동장군 만세!
왕자님 만세!
낙랑의 군복으로 변장한 무사가 호동장군임을 알게된 고구려대군은 기쁨과
놀라움에 복바치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이 터져라 하고 만세를 불렀고
창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 기쁨은 저승에서 어버이가 살아온 기쁨보다도 더 하였다.
그 힘이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힘보다도 더 하였다.
빛나는 승전에는 반드시 용감한 군사가 있고 용감한 군사 앞에는 반드시
애국의 명장이 있어야 한다.
간밤의 불안은 어둠과 함께 사라지고 먼동이 튼 동녘 하늘에는 비죽히
아침 해가 솟아난다.
호동장군의 실종으로 인하여 땅에 떨어졌던 군사의 사기는 호동장군의
출현으로 인하여 금시 적군을 훌떡 집어 삼킬듯이 펄펄 뛰는 것이다.
이 광경을 말없이 마상에서 바라보던 호동장군은 허공에 손을 저었다.
소란한 진지에는 금시 죽은듯한 침묵이 흐른다.
날개 돋은 용마(龍馬)를 타듯한 명장 호동은 불타는 가슴과 입에서
말마다 불을 뿜고 눈물을 뿜었다.
승전의 북소리와도 같고 사자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용감한 고구려 병사여 들으라. 오랑캐 한나라에서 빼앗긴 고구려의
국토 낙랑을 이제야 통일할 날은 왔도다. 오랑캐의 종살이로 삼백년이나
갖은 학대를 받고 울던 그리운 낙랑의 동포와 얼싸안고 만나볼 날은
이제사 왔도다. 그대들은 아는가? 밀사로 간 사다한이가 왕검성에서
세운 천추에 빛나는 공로를! 이 낙랑의 신기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이말을 들은 고구려 군사들의 눈알은 기쁨에 발까닥(발칵) 뒤집히고
진격의 첫 발자국을 떼려는 그들의 어깨에는 날개가 돋히는듯 가뿐하였다.
만세! 만세!
자! 가자! 오랑캐를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러 가자! 우리의 후손들이
천추만대로 찬양할 고구려 통일의 역사를 만들러 가자! 자! 말고삐를
쥐어라.
창검을 억세게 쥐어라.
진격이다 북을 울려라.
우리는 벌써 이겼도다 자! 가자!
진격령이 떨어지자 사기 충천한 고구려군은 천지를 뒤흔드는 전고소리와
함께
호동장군은 선봉으로 낙랑의 국경산야를 넘어 일사천리로 왕검성으로
쏜살같이 달리는 것이었다.
슬픈 사랑
병부사(兵符使)로 가장한 사다한의 연극에 속아넘어간 낙랑의 왕실은
말벌이 둥지를 터친 것처럼 원한과 불안속에 떠들석하였다.
고목아래 쓰러진 파달의 주검!
갈래 갈래 칼부림을 맞은 자명고!
게다가 호동의 탈출?
이 얼마나 놀라운 사변인가?
삽시간에 청천벽력 같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 사변은 낙랑 삼백년의
보물을 한꺼번에 거느리고 간 셈이다.
이 광경을 본 낙랑의 문무 백관은 너무 어이가 없고 맥이 풀려 서로
입을 딱 벌리고 바라만 볼 뿐이었고 이 흉보(凶報)를 들은 전방의 무장한
낙랑의 군사들의 사기(士氣)는 더할 나위없이 땅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워낙 성미가 콩볶듯 하는 최리왕은 머리털 끝까지
왈칵 분노가 치밀어 자명고를 찢고 왕자호동을 도망시킨 죄로 그날로 당장
공주를 옥(獄)에 가두고 사형선고를 내리고야 말았다.
자명고가 찢어지고 보니 고구려를 정복하려던 불타는 영웅심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왕검성 밖의 백성들은 왕실을 원망하는 소리가 나날이 높아
갔다.
게다가 하늘같이 믿고 있는 파달장군마자 하룻밤 사이에 황천의 객이
되고 보니 무슨 낯작(낯짝)으로 한(漢)나라에 고구려 정벌의 원병을
청한단 말인가?
왕은 앞날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왕검성을 탈출한 왕자 호동은--- 그리고 호동을 맞아 의기충천한 고구려
군사는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그대로 있을 것만 같지 않다.
왕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검성을 뛰어 넘는 고구려 군사들 그리고 왕자 호동의 늠름한 무서운
얼굴이 불쑥불쑥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할 수록 원망스럽고 얄미운 것은 공주이다.
부왕을 배반한 공주!
낙랑을 배반한 공주!
원수와 불의의 정을 맺은 공주!
호동을 탈출케 한 공주!
옥중에서 울면서도 호동을 그리는 공주!
공주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당장 목을 두토막으로 내어도
시원치 않을 무서운 죄상이었건만 그래도 공주의 사형을 결행하지 못하고
하루 하루 날을 물림이 왕의 쓰라린 심정이었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공주의 사형을 왕이 친히 자기 칼로 결행할 것을
선포한 날이 아닌가?
낙랑 삼백년의 영화를 자랑하는 왕검성의 밤은 상가집마냥 죽은 듯이
고요하다.
왕은 잠자리를 걷어차고 미친듯이 창밖으로 뛰어 나왔다.
울창한 고목들이 오늘따라 무시무시하게 활개를 벌리고 자기를 흘겨
보는 것만 같았다.
흘러간 몇날전만 하여도 그 녹음 아래서 꽃같은 궁녀들과 풍악을 갖추고
꽃놀이의 술잔을 들던 이 울창한 고목들이건만 오늘밤은 그 가지마다 그
잎사귀마다 원한많은 낙랑백성들의 억센 주먹으로 변하여 성난 눈으로
변하여 흘겨만 보는 것같았다.
왕은 달빛에 어둠길을 더듬어 가며 자명고실 밑에 자리잡은 옥으로
가까이 갔다.
날이 밝으면 황천으로 갈 공주의 얼굴이나마 마지막으로 한번 보리라는
어버이의 눈물겨운 마음에서였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살금 살금 옥문 앞에까지 가까이 갔다.
고목에서는 접동새가 접동--- 접동--- 하고 그리운 임을 찾는듯 슬피
울어준다.
옥안을 살펴 보니 캄캄하다.
문듯(문득) 한구석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달빛속에 흐릿하게 나타나는 한
여인의 모습!
밤하늘의 뭇 별을 바라보며 합장(合掌)하는 거룩한 모습이 아닌가.
왕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날이 밝으면 저승으로 갈 몸이 저렇게 이승에서 저지른 죄를
천지신명에게 뉘우치는 것이 아닌가?
왕의 어두운 마음에는 한줄기 광명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몸은 비록 국법에 의하여 이승을 떠날지라도 저승에나마 좋은 곳으로
가리라는 신앙에서였다.
왕은 서러운 마음을 가다듬어 큰 기침을 하고는 침을 배앝듯 투박하게
말을 부쳤다.
이년아! 인제사 네 잘못을 뉘우치는가?
아바마마--- 불효한 이 딸을 용서하오소서
네 년은 나의 딸이 아니야. 나에게 일찌기 딸은 없었노라
아바마마--- 날이 밝으면 영영 헤어질 이몸--- 제발 비옵나
니 한마디 말을--- . 이몸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시고 이몸을
아가--- 라고 이몸을 딸이라고 한마디만 불러주어소서
아가라고? 내 딸이라고? 아하하하--- 이제 때는 늦었노라.
내 그대에게 물어 보노니 무슨 남길 말은 없는가? 무슨 하고 싶은
말이나 없는고?
아바마마--- 한가지 소원이---
어서 말해 보라. 왕천으로 가는자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무엇
이나 이루어 주겠노라
아바마마--- 불효 소녀는 호동왕자님과 백년가약을 맺은 몸
무엇이? 백년가약? 그래서---
이몸이 죽사오면 무덤의 비석에 고구려왕자 호동지처(好童之
妻)라는 이름 이름 넉자를 색여(새겨) 주오소서
에이--- 고약한 년! 요사스러운 계집--- , 황천가는 순간에
나마 이승에서 저지른 죄를 천지신명에게 뉘우치는 줄만 알았
더니 에- 잇--- 호동지처라고?
이 천벌을 받을 계집아---
원수 호동이가 이 애비보다 중하더냐?
불의의 사랑이 저 자명고보다 중하더냐?
자! 이제 날이 밝았다.
네년이 죽을 때가 이제 왔도다. 그리고 이 아침에 낙랑군에
출진령을 내려 고구려군을 전멸시킬 것이다.
그리고 네년의 지아비라는 왕자호동의 목을-- .
이칼로 네년의 목을 치듯이--- .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왕이 칼집에서 칼을 빼여들고 미친듯이 날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자명고실쪽에서 무관 한사람이
예- 이
하며 뛰어나오기가 바쁘게 땅에 코를 박고 왕앞에 엎드린다.
이길로 문무백관을 이리로 오게하라.
국적인 낙랑공주를 이칼로 친히 목을 치고 짐이 선봉으로 고
구려 정벌의 길에 나서겠노라
놀라운 왕의 말에 간장이 콩알만해진 무관은 자명고실 앞에
느러진(늘어진) 설렁줄(招人鐘)을 흔드니 요란한 방울소리가 왕검성을
뒤흔드는 것이다.
공주는 머리를 단정히 가다듬고 다시 하늘을 우러러 합장을 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죄 많은 이 계집아이를 자비하옵신 품안에
받아주오소서
이몸의 지아비 호동님을 위험한 자리에서 언제나 건져주오시
고. 소녀와 이승에서 다 하지 못한 인연 저승에서나 맺어지
게 하오소서---
나라에 대사가 있을 때마다 울려오는 방울소리에 불길한 예감을 가진
문무백관들은 자명고실 앞뜰에 모여들어 서로 왕의 눈치를 엿보고 옥중의
공주를 번갈아 보았다.
왕은 칼집에서 칼을 번쩍 빼여(빼어)들고 뇌성벽력으로 호령을 하였다.
옥안에서 공주를 끌어내라
옥사장은 공주를 앞세우고 조심 조심 왕의 앞에까지 나왔다.
공주를 흘겨보는 최리왕!
왕을 눈물로 바라보는 공주!
그러나 공주는 태연하였다.
아무런 불안도 공포도 없는 모습이었다.
짐은 이제 국적의 목을 치고 이길로 고구려 정복의 영을 내리
기로 하노라.
낙랑의 운명은 경들의 두 어깨에 지워졌나니 이제 한목숨 나
라에 바치고 낙랑군의 선봉에 설 장군은 이 앞에 나설지어다
문무백관들은 고개를 떨어뜨린채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 말이 없다.
어이 하여 말이 없는고? 추라장군은 어떠한고?
저--- 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몸은 이미 늙은 몸이오라---
늙었다고? 못난자! 그러면 백호장군은 젊었으니 짐을 위해 전공을
세울터이지
예--- 예--- 아뢰옵기 왕공하오나 저렇게 자명고가--- 자명
고가---
자명고가 찢어져 승산이 없단 말인가? 에잇--- 그러면 용마
장군은?
예--- 예--- 저--- 저--- 소장은 불타는 충성지심(忠誠之心)
금할길 없나이다
그렇지 그럴터이지--- 과연 그대가 충신이로고--- .
그러면 그대가 이번 싸움에 선봉장으로 고구려군을 전멸할지
어다
상감마마--- . 그러하오나 이 몸에게는 늙은 어버이와 처자
가 달린 몸이오라---
무엇이? 처자가 달렸다고? 에잇 버러지 같은 것들--- 간사
한 것들--- 이것이 짐에 대한 충(忠)이란 말인고?
이때였다.
왕검성 밖에서는 낯설은 전고(戰鼓)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것이 아닌가?
전고소리는 점점 커지며 하늘을 진동하는 요한한 북소리로 변한다.
터지는 만세소리--- .
고구려 통일 만세!
아우성 소리를 지르며 여기 저기서 도망을 치는 군사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수라장을 이루기 시작이다.
왕은 도망을 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공주를 베인 칼로 자신도 낙랑 삼백년의 운명과 함께 하려는 비참한
결심이 눈앞에 벙끗하자 공주를 노려보며 칼을 번쩍 올렸다.
이때에 어디선가 낯익은 소리--- .
공주! 공주!
말발굽소리와 함께 터지는 숨결가쁜 소리였다. 칼을 받으려는 찰나
이소리를 들은 공주는 생명의 수호신(守護神)을 만난듯 부왕의 칼을
뿌리치고 소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아슬라! 아슬라! 왕자님! 왕자님!
공주! 공주! 어디 있소. 공주!
공주를 찾는 호동!
호동을 찾는 공주!
그러나 얄 은 운명이었다.
공주를 뒤따라온 최리왕은 공주의 가슴에 칼을 꽂고 자기도 그 칼로
자결하고야 만 것이다.
고구려의 통일과 함께 낙랑 삼백년의 운명과 함께 쓰러진 최리왕과
공주의 주검이었다.
호동은 절벽 밑으로 걸어가다가 소스라쳐 놀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절벽밑에 쓰러진 가엾은 여인!
공주! 공주! 내가 왔소. 공주! 왜 말이 없소?
호동은 공주의 시체를 흔들어 보고 안아보고 하다가 허공에 손을 저으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에이 소란하여라. 저 북소리 만세소리--- 모두가 나에겐 통곡소리
같구나.
아침해여 뜨지마라 온갖 새여 노래마라, 아! 사랑의 선물로 꺽은
이꽃은 황천으로 가는 길에 제물이런가?
그렇지--- 이몸도 갈 때가 왔다!
고구려는 이제사 통일이 되어 만백성은 저렇게 좋아서 행복에 날뛰게
되었나니 이몸이 이제 구차히 살아서 무엇하랴. 호동은 예리한 칼로
가슴을 찌르고는 공주의 피흐르는 가슴위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끝>
<제 삼 화> 抱腹絶倒 (포복절도)
楊書房의 致富
大監의 凶計를 물리친 이야기
옛날 평안도(平安道) 어느 조그만 고을에 정대헌(鄭大憲)이라는
토반(土班)이 살고 있었는데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제법 적지않고
더욱이 글귀나 알아 보는 터이어서 이웃 사람들이 이 사람을 가리켜
정대감(鄭大監)이라고 불러 왔었다. 이 정대감댁 머슴으로
양극대(楊克大)라는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근본이 없는 상놈의 집에서
태어나 무식은 할망정 영리하기가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정대감이 다 늙어빠진 처지에 점잖게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였더라면
별일이 없었을 것을 먹을 녹량이 충분하고 몸이 편하고보니 자연 생각나는
것이 부질없는 생각 뿐이라, 이 고을에 얼굴이 반반한 여자라면
논마지기나, 얼마간 떼어주고는 사오다시피 하여 데려다 소실을 만든
여자가 자그만치 열명이나 되었건만, 예나 지금이나 욕심은 한이 없는
모양이어서 하필 자기집 머슴 양서방의 처 옥분(玉粉)을 빼앗아 볼 욕심을
품게 된 것이 결과로는 해괴망측한 꼴을 보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옥분은 얼굴이 유달리 아름다웠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몸 맵시가 과연
여자다워서 조석으로 눈에 뜨일 째마다 끓어 오르는 욕정을 참을 길이
없어 주야로 생각하는 것이 옥분을 손아귀에 널(넣을) 궁리였다.
함박눈이 내려붓고 모질게 추운 어떤날 이른 새벽 정대감은
기침하시기가 무섭게 머슴 양서방을 불러 들였다.
다른것이 아니라 내나이 육순(六旬)에 몸이 점점 허약해지는 것 같아서
보약을 좀 다려 먹어야 하겠으니 자네는 오늘 깊은 산중에 찾아 들어가서
딸기 서말서되(三斗三升)를 따와야 하겠네
네
머슴 양서방의 공손한 대답이다.
다행히 자네가 딸기 서말서되를 따오면 내 재산 절반을 자네에게 넘겨
줄 것이고 만약 따오지 못할 지경이면 자네것을 무엇이든지 나에게
줘야하네
네
그래 만약 말일세, 따오지 못할 지경이면 자네 처라도 내가 원한다면
내놔야하네
엉큼한 정대감이 다짐을 주는 말이다.
네, 분부대로 하오리다
정대감은 기뻤다. 자기의 꾀에 양서방이 넘어가는 것이 고소하고
고분고분 들어주는 것이 여간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아서 미리 생색이라도
내 볼 심정으로 노자에 쓰라고 돈 스무량(二十兩)을 선듯 내놓았다.
양서방은 무엇을 생각하였던지 별로 근심스러운 빛도 없이 돈을
받아가지고 나오다기 가기처 옥분에게 귓속말로 몇마디 일러주고는 험한
눈길을 떠났다.
며칠이 지났다.
산으로 딸기를 따러 간 양서방이 이른 새벽에 돌아 왔다.
대감님 지금 돌아왔사옵니다
오냐 딸기는 따왔느냐?
딸기를 따려고 깊은 산중을 헤매었사옵더니 한 곳에 이르러 많은
딸기가 있는것을 보았기에 막 따려고 하오니 뱀(毒蛇)이 어떻게나 그리
많던지 하마터면 물려 죽을번(뻔) 하였사옵니다
뭣이? 이놈아! 동지 섣달 눈오는 겨울에 뱀이라니 웬 뱀이란 말이냐?
그러하오면 동지 섣달에 딸기는 웬 딸기이오니까?
음
정대감의 신음소리다. 해서는 안될 말을 자기가 먼저 끄집어 내었던
것이 큰 잘못이다. 또 사실이 그러하니 별수없는 노릇이다. 다만
오랫동안을 두고 머리를 짜서 꾸며낸 자기의 꾀가 허사로 돌아 간것이
분하였다. 돈 스무량도 새삼스러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해서
이것으로 단념할 정대감은 물론 아니었다.
죽음을 면하고 집을 얻은 이야기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돌아 왔다. 정대감의 맏아들 현상(賢相)이
서울로 과거(科擧)를 보러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나귀에다가 책과 돈을
싣고, 양서방이 도련님을 모시고 서울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아들 현상이
막 떠나려고 할 때에 정대감은 아들을 조용히 불러 이렇게 타일렀다.
양서방이 아무리 생각해도, 내 비위에 거슬려 한 집에같이 살 수
없으니 네가 양서방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 가다가 큰 물에 넣어서
없애버려라. 그래야 내가 마음을 놓고 살겠다
아버님 말씀대로 하오리다
이렇게 부자지간에 앙큼한 언약이 이루어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양서방은 오래동안 마누라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 것은 고사하고
화려하고 찬란한 서울을 구경하게 되는 것이 기뻐서 마누라 옥분의
눈물어린 작별인사도 받는둥 마는둥 총총히 길을 떠났다.
서울길은 과연 멀었다. 정대감의 아들 현상의 머리에는 과거를 보는 것
보다 아버지의 분부대로 어떻게 하면 양서방을 죽여 없앨 것인가가 큰
고통거리여서 같이 며칠을 두고 걷는 동안에도 말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서방은 눈에 보이는 산천 정경이 하나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어서 여간 마음이 상쾌하지가 않았다.
이윽고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 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 안주
읍내에 들어가서 주막(旅館)을 정하더라도 해가 서산을 넘지 않을것을
주인대감 아들 현상은 경치가 좋으니 어쩌니 하고, 굳이 강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자는 것이다. 아직 봄이라고 하나 야반에는 몸에
스며드는 찬 바람을 참기 어려울 것인데 현상이 굳이 고집하는데는
양서방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저녁 요기도 하지 못하여서 시장하기가 한이 없었으나 푸른 물이 세차게
흐르는 언덕에서 하늘에 총총히 뜬 별들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지내는 것도
뜻 깊은 일인 것같아서 양서방은 별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상도련님은 나귀를 언덕위 버드나무에 매어놓고 책과 돈을 언덕위에다
놓게 하고 자기는 머리를 책과 돈이 있는 쪽에 두고, 발을 물흐르는 쪽에
향하여 세로 누운후에 양서방은 도련님의 발밑에서 자되 물흐르는 방향과
같이 가로 누워 자라는 것이다. 양서방이 가만히 생각하니 이것이 무슨
곡절이 있는듯 해서 도련님이 시키는대로 누워서 곤히 잠드는 척 하였다.
얼마를 지난 후에 양서방은 조용히 일어나서 도련님의 머리위에 놓여 있는
책과 돈꾸러미를 자기가 누워자던 도련님 발밑에 바싹
다겨놓고(당겨놓고), 자기는 도련님 머리위에 가만히 드러 눕고 동정을
살피고 있노라니까 아니나 다를가(다를까) 코를 골며 자던 도련님은
음!
하고 기지개를 하는 척 하면서 자기 발밑에 있는 것을 두발로 힘껏
차버렸다.
첨벙!
무엇이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다. 다시 조용해지고 고요치 못한 밤이
흘러가 버렸다. 아침이 되었다.
눈을 부시시 뜨고 일어난 도련님은 있어야 할 책과 돈이 없어진 것에
놀랐고, 의당 죽어 없어야 할 양서방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에 놀랐다.
그래 황급히 양서방을 깨워 일으키는 것이다.
여보게, 양서방, 일어나게.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응?
무었이오니까?
잠꼬대같은 양서방의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돈과 책 말일세. 돈과 책이 없단 말일세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양서방은
간밤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귀중한 책과 돈을 언덕위에 놓아 두면
도둑을 맞을 염려가 있기에 도련님 발밑에 갖다 놓았었는데, 도련님이
잠결에 그만 물속에 차넣은 모양인가 봅니다
분한 일이다. 책이 없으면 과거를 보기 전에 무엇으로 공부할 것이며
서울이 아직 수백리이니 돈없이 어찌 갈 것이냐. 한심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양서방을 나무랠 수는 없어서 현상은 나귀를 타고 안주읍내로 힘없이
들어갔다.
간 밤에도 요기를 못하였으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허깃증을 참기
어려웠다. 현상이 가만히 생각하니 주머니에 든 돈이 몇푼 안되는데
양서방과 같이 아침 요기를 할 수도 없고, 또 귀중한 책과 돈을
잃게하여서 미운생각으로 라도 밥을 먹여주고 싶지도 않아서 주막집이
건너다 보이는 어느 골목에서 문득 발을 멈추고 양서방에게 하는 말이
여보게 내 지금 읍내 어느 친구를 잠시 만나고 올 것이니 자네는
이곳에서 나귀 고삐를 꼭 붙들고 기다리고 있되 눈을 꼭 감고 있어라
눈을 꼭 감고 있으라는 것은 선비된 처지에 혼자만 밥을 사먹는 것이
계면쩍어서 이렇게 한 것이다.
네
양서방은 나귀 고삐를 한손에 꼭 붙들고 눈을 꼭 감았다. 현상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주막집을 향해 걸어갔다.
양서방이 눈을 살그머니 떠 보니, 도련님이 혼자서 주막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옳지 됐다. 나도 생각이 있다
고삐를 붙들고 사방을 휘돌아보고 있노라니까 마침 점잖은 노인 한분이
지나가는 것이다.
여보슈 노인장!
왜 그러슈?
노인은 의아스러운 눈치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는 평안도 사람으로 서울에 가는 도중에 노자가 떨어져 할 수없이 이
나귀를 파는 것이니 아주 싼값으로 사가시오
얼마에 팔겠소?
열량(十兩)만 주시오
노인은 생각하니 그 나귀가 아무리 해도 스무량짜리는 되는 것인데,
아주 반값으로 팔겠다고 하니 에라 좋아라 하고 선듯 내놓았다.
그런데 노인장 이 나귀의 고삐를 한뼘만큼만 짤라 주시오
그건 무엇에 쓰시려우?
팔기가 아까워서 그럽네다
과연 애석한 것같았다. 그러나 고삐쯤이야 짧으면 새것으로 매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노인은 허리춤에서 참칼을 꺼내어 나귀 고삐를
한뼘만큼만 짤라서 양서방을 주고는 나귀를 끌고 가버렸다. 양서방은 돈
열량을 허리춤에 간직하고는 한뼘되는 나귀 고삐를 손에 쥐고 아까
모양으로 눈을 감고 서 있노라니까 과연 도련님은 홍조가 된 얼굴로
주막집을 나와 이쪽으로 향해 걸어 오는 것이었다.
아니, 여보게 나귀?
여기 있읍니다
양서방은 눈을 감은채 고삐를 쥔 손을 내밀었다.
아니 나귀가 없단말이야!
여기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고삐를 쥔 손을 내흔드는 것이다.
눈을 뜨고 똑똑히 봐!
소리를 왈칵 질렀다. 그제야 눈을 뜬 양서방은 자못 놀라는듯이
제길할 어떤 못된 놈이 고삐만 짜르고 나귀를 훔쳐 갔군요. 도련님이
공연히 눈을 감고 있으라니까 이렇게 된 것이지--- . 그것 참!
현상은 생각하니 기가 막히었다. 분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건만 당장
죽여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서울까지 동행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같이 있다가는 또 무슨 화를 당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내기로 하였다.
네 이놈--- 당장 물고를 내 버릴 것이로되 초로같은 인생을 가엾이
여겨 이대로 돌려 보내는 것이니, 너는 이길로 곧 집으로 내려가거라
그러나 도련님 혼자서 어찌 서울로 가시렵니까?
내 걱정은 말아라
현상은, 양서방을 먼저 돌려 보내게 된 사연을 적어 부친께 전하려고
지필을 꺼내 쓰려다 문득 생각하니, 양서방이 이것을 가지고 무슨 조작을
할지 알수 없으므로 잠시 생각한 끝에
네 이놈! 저고리를 벗고 뒤로 돌아 서거라
에
양서방은 저고리를 벗고 돌아 섰다. 현상은 붓에 먹을 찍어 양서방의
등에 이렇게 썼다.
전략
이놈으로 인해서 잃지 않을 책과 돈을 잃고, 잃지 않을 나귀를
잃었사오니 집에 돌아가는 즉시로 죽여 버리시옵소서---
그리고는
집에 돌아가거든 곧 대감을 뵈옵고 네 등에 쓴 이 글을 보여드려라.
알겠느냐---
염려 마십시요
이리하여 현상은 서울길로 떠나고 양서방은 집을 향하여 떠났다. 서울
구경을 못한 것이 원통하였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기 등에 쓴 글이 궁금하였다. 자기를 칭찬하는 글이
아님은 뻔한 노릇이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는 안되겠기에 글이나
알아보는 사람이 혹 행인중에 있지 않을가 하고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고
있노라니까 저편 쪽으로부터 대사(僧) 한분이 걸어 오는 것이 보였다.
대사님. 청이 하나 있읍니다
무슨 청인지 말씀하시지요
이것 좀 봐주십시오
양서방은 웃저고리를 벗고 등을 보였다.
여사 여사(如此 如此) 하옵니다
그러면 돈 닷냥(五兩)을 부처님께 바칠 것이니 그 글을 지우시고, 제가
부르는 대로 고쳐 써 주십시오
그리 하옵지요
대사가 먹과 붓을 준비하니, 양서방은
전략 양서방으로 인해서 잃을 책과 돈을 얻었으며 잃을 나귀를
얻었으니 집에 돌아가는 즉시로, 기와집 한채와, 논밭을 주어 잘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써 주십시오
그렇게 쓰겠읍니다
양서방은 돈 닷량을 대사에게 주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대감님 이것 좀 보십시오
다짜고짜로, 저고리를 벗고 등을 내밀었다.
아니 네가, 왜 먼저 돌아와서 이게 무슨 짓을--- 등에 글을 썼군!
뭣이? 잃을 책과 돈을 얻고, 나귀를 얻고 응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다. 의당 죽었으리라고 믿어서 일간 옥분을 소실로
맞아들이려는 터에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 공이
적지 않으니 아들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양서방은 큰 기와집에서 받은 논밭을 가지고 알뜰하게 살게
되었던 것이다.
大監父子에게 復讐한 이야기
이해 여름에 서울 갔던 현상은 낙방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길옆에
큰 기와집이 생겼는데 내용을 알아본즉 이리저리 하다는 것이다. 더 참을
수 없었음인지 부친께 여쭙고, 힘깨나 쓰는, 하인을 시켜 양서방을
잡아다가 오라줄로 꽁꽁 묶고 세겹으로 된 무명자루(袋)에다가 넣고, 다시
그 주둥이를 힘껏 묶어 꼼짝 못하게 한 후에, 앞산 밑 큰연못에 내버리게
하였다.
양서방은 꼼짝할 수없이 죽을 판이었다. 앞산밑 연못가에 이르러
양서방을 넌(넣은) 자루를 내려놓고 하인 한사람이 자기 동료에게 하는
말이
여보게 사실 말이지, 양서방이야 무슨 죄가 있나, 다 이것이 대감님의
부질없는 장난이지 뭔가. 대감님댁 도련님이 시키는 일이니 거역할 수
없이 이곳까지 메고 왔네마는 참아(차마) 물속에 던질수야 있나? 그러니
저 버드나무에 매어 달아놓고 가세
자네 말이 옳네, 그렇게 하세
두 하인이 자루를 연못가 버드나무가지에 매달았다.
고맙네
양서방의 말이다. 그러나 살아 나갈 길이 막연하였다. 마누라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양볼을 적시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서든지 살아나가야
하겠다고, 이렇게 저렇게, 골돌히(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웬 사람하나가
버드나무 밑으로 지나가는데 지팡이 소리가 나고, 발자국 소리가 고르지
못한 것이 필시 장님인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되는 것이 있어 큰
목소리로
네눈 깜깜, 내눈 번뜩
네눈 깜깜, 내눈 번뜩
이렇게 염불 외우듯 외이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장님이 가만히
생각하니
(네눈 깜깜이고, 내눈 번뜩이라, 이게 무슨 소리인고? 가만있자,
하여간 물어보리라)
여보시오
장님이 소리쳤다. 양서방은 사뭇 귀찮다는 듯이
왜 그러시오?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
눈뜨고 있소
댁에서도 장님이요?
그렇소
나도 좀 눈뜨게 해주시오
안되오, 초가삼간을 팔아서 이것을 사가지고 이 속에 들어앉아 이
주문(呪文)을 외우는 것이 벌써 아흐레째가 되어 이제는 눈이 다 떠서
앞을 환히 보게쯤 되게 된 터에 댁이 누구시라고 눈을 뜨게 해드리겠소.
원 미친놈 다 봤군!
네눈 깜깜, 내눈 번뜩
양서방이 예기했던 바와 같았다. 그래 신바람이 나서 더 큰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한편 장님은 몸이 달았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인 것이다.
여보슈, 보아하니, 젊은 친구같은데 당신의 눈이 다 뜨거든 그 보물을
나에게 팔 수 없소? 쉰량(五十兩)을 드리리다
그렇게 하슈. 나도 눈이 뜨면 이것이 소용없소
양서방은 장님의 힘을 빌어 나무가지에서 자기가 든 자루를 풀어 땅에
내려놓게 하고, 다시 주둥이를 풀고, 자기 몸에 묶인 오라줄을 풀게 하여
자유스럽게 된 후 불쌍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장님을 묶고 자루에 넣어 그
이상한 주문을 외우게 한 후 다시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달고는
여보 장님. 쉰량은 이 다음에 주시오
고맙소이다
다시없는 적선인 것같이 말하고는 양서방은 이웃 고을 주막으로
향하였다.
며칠후의 일이다. 죽은 줄로 알았던 양서방이 정대감 앞에 나와서 큰
절을 세번 하고는
대감님의 높으신 은헤는 소인 백골 난망이옵니다. 대감님께서
염려하신 덕분으로 용궁(龍宮)에서 많은 대접을 받고 왔사옵니다
아니 그것이 사실이란 말이냐?
사실이옵니다
그러면 어째서 벌써 돌아왔느냐?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이 대감님의 높으신 은혜를 입어온 위에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용궁을 구경하고 또 많은 궁인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기에는 너무 죄송스러워서 대감님과 도련님을 모셔가려고 왔읍니다
기특하다. 언제 용궁에 가는 것이 좋겠나?
내일 묘시에 가기로 궁인과 약속 했사옵니다
그래라
그러나 다시없는, 기회이오니 온 가족을 다 모시고 가고자 하옵니다
그러지 그래
용궁에 가본즉 이 세상에 없는 물건이 없사온데, 다만 맷돌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맷돌을 많이 마련하시어서 식구 하나가 한짝씩
지고 가심이 좋을듯 하옵니다
그러지 어디 빈 손으로 찾아갈 수 있겠나?
정대감은 모든 하인을 시켜, 이날 안으로 어른 아이들은 막론하고
한짝씩 지고 갈 수 있도록 크고 작은 것을 만들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일찌기 정대감댁 가족과 양서방 내외는 각기 맷돌 한짝씩을
지고 묘시에 늦지않도록 열을 지어 앞산 밑 연못가에 이르렀다.
도련님께서 먼저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뒤따라 오십시오
첨벙 하고 현상이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등에 돌로 만든 맷돌을
지었으니, 물 속에 뛰어 들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저것 보십시오. 하도 좋으시니까 도련님께서 뛰어가시지 않습니까
그런가보다
어서 들어 가십시오
대감님이 맷돌을 진채 물속에 뛰어 들었다. 며느리, 손자, 손녀 할것
없이 모조리 뛰어들었다.
모두 물귀신이 된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중에
양서방의 처 옥분의 차례다. 옥분이 막 뛰어들려고 하니
여보 당신 정신있소, 없소?
하고 붙잡았다. 옥분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 양서방은 정대감 소실에게
각기 얼마씩을 주어서 제집에 돌려보내고 자기자신이 이집 주인 대감이
되어서 일생을 아무 군색없이 살았다 한다.
<끝>
<제 사 화> 節佳妓話(절가기화:절개있는 아름다운 기생이야기)
風流監司
평안감사 김시중(平安監司 金時仲)은 풍월(風月)을 몹시 즐기는
사람으로 그 당시에는 참으로 유명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풍류감사(風流監司)라고 불렀다. 그만치 그는 그당시에 감사라고 하는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독보적(獨步的)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채(異彩)로운 존재였다.
그당시 사람들은 쥐꼬리만큼한 벼슬만 하나 차지하기만 하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하는 것이 먹고 하는 일이었고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도로 이용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김시중은 자기의 벼슬을 한번도 뽐내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되지못한 벼슬아치들이 그 쥐꼬리만큼한 벼슬을 자랑하고 뽐내고 하는
것을 보면 코웃음을 치며 오히려 그들을 경멸하고 멸시하였다.
그는 딱딱한 관리도(官吏道)보다도 그윽한 인생의 향기(香氣)를
좋아하였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필묵(筆墨)과 종이를 준비하였다가 좋은 시를
지어서 이것을 혼자 소리내어 읊는 것을 유일의 낙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가 조정(朝廷)과 국사(國事)에 대하여서 그 맡은
일을 게을리하거나 하면 또한 그렇지는 않았다. 자기의 취미는 취미대로
살리면서 또한 그가 맡은 일에 대하여서는 지극히 충실하였다.
윗사람을 섬기되 결코 아첨하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되 결코
무리하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되 오히려 공생부사(共生父師?)하는
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누구 하나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김시중이 성천(成川)땅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지사(道知事)나 내무장관(內務長官)의 초도순시(初度巡視)의
길을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성천고을 원님 조경인(趙敬仁)을 선두로 온- 고을 사람들은 감사를
환영하기 위하여 성문 밖까지 나와서 서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를 환영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시골서는
감사라는 말만 들었지 감사의 얼굴을 실제로 구경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먼 시골까지 소문에 높은
풍류감사 김시중의 얼굴을 어디 한번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하여보자 하는 생각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수만 군중의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아가며 감사 김시중은 성천 고을에
도착하였다.
이날밤 이 고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이 고을이 생긴이래 처음보는 큰 잔치가 이 풍류감사 김시중을 위하여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자리에는 이고을에서 제법 내노라고 하는 일류기생들이 총동원하여
모여 들었다. 여니때(여느 때) 같으면 내가 제일 잘났노라고 뽐내고 빼고
건방지게 굴던 기생들도 이자리에서만은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다 제각기 있는 재주를 다하여서 혹은 노랫가락으로, 혹은 춤으로
혹은, 담소(談笑)로써 이 풍류감사의 흥을 돋구어 주려고 모두들 극성을
다 하였다.
기생들이 이렇게 극성을 다 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기생들의
출세는 벼슬 높은 사람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다투어 가면서 벼슬아치를 골라 잡아서 그의 총애를 받기 위하여
심혈을 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자리에 모시게 된 이 김시중이야 말로 그들이 일생을
통하여서 다시 한번 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진짜 벼슬높은
사람이다.
거기다가 인물이 잘났고 또한 풍류를 이해하고 좋아 한다는 점에 더욱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벼슬이 높겠다. 인물이 잘 났겠다. 또한 거기다가 풍류를 좋아하니
김시중이야말로 사나이가 가질수 있는 모든 좋은 조건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골에 살던 기생들이 서로 다투어 가면서 있는 재주,
없는 재주, 갖은 아양을 다 떨어가면서 김시중의 환심을 사보려고 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온갖 유명한 노랫가락소리가
들려오고 거문고와 장구 소리가 그 장단을 맞추어 주건만 이 풍류감사는
그 멋들어진 음악소리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
또한 내노라고 뽐내던 일류 무희(舞姬)들이 비장(秘藏)하였던 온갖 춤을
추면서 감사의 환심을 사보려고 노력하여 보았으나 그는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 좋은 노래와 춤이 그의 흥을 돋구어 주고 그의 환심을 사기에는
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많은 가수(歌手)들, 무희(舞姬)들은
이제 완전히 사기를 잃고 말았다.
( 흥! 허수아비 노래에다가 허수아비 춤! 그런 유치스러운 것을
가지고 나의 귀를 속이고 나의 눈을 속이려구? 어림도 없는 노릇이지 )
김시중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실 김시중의 예술적 양심으로 이
여인들이 노는 꼴을 보고는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이 여인들의
예술에는 전혀 뼈가 없고 감정이 결여(缺如)되어 그냥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看破)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등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시간은 부질없이 흘러가고 밤은 점점 깊어가건만 김시중의 얼굴에는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검은 구름만 돌고 있는 것이다.
흥이 났을 때 이것을 감추기도 어려웁거니와 흥이 나지 않는데 억지로
흥을 낸다는 것도 또한 어려운 노릇이다.
여기서 제일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것은 이 고을 원님 조경인이였다.
그는 이따금 김시중의 얼굴을 쳐다 보았으나 아무 흥미없어하는 그의 얼굴
표정을 볼 때마다 참으로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적으나마 이고을 성주의 입장으로서 자기의 직접 상사요 평안남북도를
도맡아 다스리고 계신 평안 감사라는 높고 귀하신 어른을 초대한 이
마당에서 그의 흥을 돋구어 주지 못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어 드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곤란한 문제였다. 관리로
볼때에는 치명상(致命傷)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틈에 산골 같은데로 좌천이 되어 갈지도 모르는 문제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지금 바늘 방석에 앉은거나 다름없는 옹졸한 기분이니
( 이 오라질 계집년들! 그래 여태껏 먹고서 배운 재주가 노래와 춤인데
그래 우리 김시중 대감의 비위 하날 맞추어 드리지 못해? )
조경인은 이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지금 이자리에서 실력이 부족한 기생들을 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한 설사 책하였다 해서 없는 실력이 솟아 나올리도 만무할
일이었다. 그는 지금 울고 싶은 심정에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연상
감사의 눈치만 보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 감사의 표정이 초저녁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눈섭하나 가딱하지 않고 앉아 있는 김시중은 지금 자기가 이 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몸은 비록 이자리에 있으되 정신은 지금 딴
세계이 가서 있는게 분명하다.
( 무슨 기적이나 나타나기 전에는 도리가 없어 무슨 기적이나 나타나
주었으면! 하나 내 어찌 기적을 바랄 수 있을까--- )
조경인은 이제 완전히 실심낙담(失心落膽)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여
버리고 흡사 실신(失神)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
바로 이때였다. 저만치 먼 끄트머리 자리에서 나(나이) 어린 기생
하나가 어슬렁 어슬렁 이쪽으로 걸어 오는 것이다.
가까이 오자 그가 부용(芙蓉)이라는 기생인 것을 원님은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부용이는 이 성천골 태생으로 일찌기 아버지를 여이고(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불쌍한 소녀였다. 부용이는 기생으로 들어온
그날부터 열심히 창(唱)과 무(舞)를 공부하였다.
이 여자는 태생이 겸손한지라 이때까지 결코 내가 내노라고 뽐내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노래와 춤을 공부하는 한편 또한 시를 좋아하여 시
짓는 것에 취미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시작(詩作)에는 타고난 특별한
천재적 소질(天才的 素質)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의 예술을 이 시골 성천에서는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고을 원님도 부용이를 이류(二流)나 삼류(三流)
기생정도만으로도 취급하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용이는 이곳 시골에서는 비록 자기 재주를 몰라주되 반드시
때가 오면 사람을 만나서 자기 재주를 인정받을 때가 오거니 하면서
꾸준히 공부하여 왔던 것이다.
부용이는 오늘 저녁 이 잔치가 처음 시작하는 때부터 여러 기생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고 하는 꼴을 다 보고 있었다. 또한 이 소위
명기(名妓)들이 짖고 까불고 하는 꼴을 보고 저 유명한 풍류감사
김시중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 하는 것도 이때까지 낱낱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옳지! 이분이야말로 정말 풍류를 아시는 어른이매(어른임에) 틀림없이
나의 예술을 심사(審査)하고 평가(評價)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이
어른이로구나! 이때야말로 나의 값어치를 재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부용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원님 조경인의
앞으로 가까이 걸어 갔던 것이다.
소첩이 하잘 것 없는 춤으로 대감의 객고를 조금이라도 풀어 드릴 수
있다면 다행일가(다행일까) 하나이다
부용이는 원님에게 정중하게 큰 절을 한번 하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 뜻대로 하여라
원님 조경인은 내어 뱉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다.
( 날고 뛴다는 일류(一流) 기생들의 별 재주를 다 부려도 눈섭하나
가딱하시지 않던 대감께서 너 까짓거 춤을 춘다구 거들떠 보기나
하실라구--- )
조경인은 기실 부용이의 춤에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았다.
무용(舞踊) 예술에 대한 아무런 소양도 지식도 없는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네 인물이 절색(絶色)이니 혹시 너의 인물에 혹(惑)하신다면
몰라도--- )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되어 가는 대로 맡기기로 하였다.
부용의 춤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감사의 눈동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채 그의 시선은 딴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까지 여러차례
춤 추는 것을 초저녁부터 보아 왔으나 별로 신통한 것을 못 보았던지라
이번에도 그꼴이 그꼴이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부용은 춤을 추다 말고 감사가 앉아 있는 자리 가까이 와서는 한손으로
고름을 접더니만 고름을 바로 감사의 눈동자를 스칠 듯이 한번 휘둘르는
것이다. 그것은 감사의 주목을 끌기 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바람에 감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을 이 여인에게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옳지! 되었다! )
생각하며 부용은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서 이제 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극히 섬세하고 느린 율동(律動)으로 부터 시작되어 그 율동이
점점 굵은 것으로 또한 빠른 것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 흠! )
감사는 한손으로 턱을 고이며 이 여인의 춤을 점점 흥미있게 보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몸이 회전한 때마다 감사의 눈동자도 같이
회전(廻轉)하는 것이요 율동이 속도를 가하게 되면 그의 눈동자도 같이
급속도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회전이 느리게 되면 그의 눈동자도 같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다.
( 동작속에 생명이 있고 감정이 살아 있구나! )
감사는 하마터면 이렇게 중얼거릴번 하였다. 그는 이 여인의 춤을 보고
정말 놀랬다. 감사가 놀라는 것을 보고 또한 놀란 것은 원님이었다.
같이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 놀라는 내용은 피차 전혀 달랐던 것이다.
감사는 이 여인의 춤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여기에 반하여
원님은 이 보잘 것 없는 춤을 보고 감탄하는 감사의 모양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부용의 춤이 끝나자 감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이때까지 우울해 앉아 있던 감사가 몸을 일으키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바람에 원님을 비롯하여 모였던 청중도 일제히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이때까지는 정말 침울하고 어두웠던 이 잔치가 순식간에 정말 명랑하고
밝은 잔치가 되어 버렸다.
감사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부용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네 이름이 무어냐
부용이라 아뢰옵나이다
음! 부용이 이름이 좋구나, 네 춤속에는 생명이 살아 있고 감정이
용솟음을 친단 말야, 내 일찌기 수색 수천의 춤을 구경하였으되 오늘
훌륭한 춤은 처음 보았어! 오늘저녁 수십명 되는 명기들이 왈 춤이라는
걸 췄으되 그건 춤이 아니라 허수아비의 기계적인 재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나 너의 춤이야 말로 내가 이때까지 마음속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야, 참으로 반갑고 장하도다. 네 재주 자- 어디 또 한번 네 재주를
구경시켜 줄 수는 없을까?
황송하오이다. 보잘 것없는 소녀의 서투른 재주를 그처럼 칭찬해
주시고 또한 다시 한번 보시고자 원 하신다 하오니 영광스럽고 즐거움
마음 금할 길이 없나이다
부용의 춤은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감사는 한가지가 끝나면 또 다른 것을 재청하는 것이다. 다른 것이
나올 때마다 감사의 감격과 흥분은 점점 더 새로워지고
격렬(激烈)하여지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부용의 태도 또한 심상치 않다. 이때까지는 그렇게 새침하고
조용하던 부용이가 오늘따라 어쩌면 그렇게도 용감하고 활발스러운지
모르겠다. 부용은 감사가 청하면 청하는 대로 연상 계속하여 새로운
춤으로 응수(應酬)하는 것이다.
하나가 끝나면 또 재청을 하는 것이요 재청을 하게 되면 또한 새로운
춤을 더욱 멋들어지게 추는 것이다.
부용이가 처음 춤을 추기 시작할 때에는 모였던 기생들이 부용을
멸시(蔑視)와 질투(嫉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연상
계속하여 새로운 춤을 신나게 추는 것을 보자 모든 기생들은 이제 그
뛰어난 재주에 도취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가지 한가지 끝날 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를 던지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밤이 새고 새벽이 되어도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잔치가 끝났다.
오늘저녁 잔치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잔치였다. 초저녁의 삼엄하던
공기는 이제 완전히 부드러워졌다. 연회가 대 성황리에 끝나게 되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것은 원님 조경인이었다. 부용이만 만일 없었더라면
그는 대단히 곤란한 입장에 있을 뻔 하였다. 평상시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부용이가 오늘 저녁따라 그에게는 큰 구세주(救世主)만 같았다.
오늘밤처럼 부용이가 고맙게 생각되는 때는 없었다.
부용아
잔치가 끝나자 감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네
네 춤은 과연 일가(一家)를 이루었도다. 너의 춤을 내일 새벽까지
보아도 시원치 않겠다만 그럴 수가 없는게 천추의 한이로다
보잘 것 없는 소녀의 춤을 그처럼 과분하게 칭찬하여 주시니 오히려
부끄럽사옵나이다
아니다, 내 그냥 혀끝에서 나오는 칭찬이 아니라 너의 재주에는 내
진심으로 놀랬다. 그런데 부용아!
네
네가 말하는 음성을 들어 보니 쟁반에다가 구슬을 굴리는 것 같구나
고분한 말씀
아니야, 네가 춤도 잘 추려니와 소리도 잘 할거야
대수롭지 않은 소리인가 하나이다
아니야 내 귀는 속이지 못하느니라. 내 욕심이 과한것 같은지는
모르나 너의 소리를 한번 들어 보고 싶구나. 어때? 이왕 내친 걸음이니
이밤이 새기전에 너의 그 꾀꼬리같은 목소리를 한번 들어 볼 수가
없겠느네?
대감께서 소원이시라면 그까짓 것 어려울 것 없나이다
음! 고마워 헌데 여기 딴 사람들은 피곤할테니 돌아가 자게 하고 너와
둘이 나의 숙소에 가서 한곡조 들려줌이 어떠할꼬?
좋을 대로 하사이다
그날밤 부용은 감사를 따라서 그의 숙소까지 동행하였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에서 부용은 거문고에 맞추어 구슬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하는데
감사는 목침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듣고 있는 것이다.
( 과연 명창이로구나 춤만 잘 추는 줄 알았더니 소리도 잘 하는구나,
이런 시골에 두어두기는 참으로 아까운 인재로다 )
감사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곡조가 끝나면 또 한곡조, 그것이 끝나면
또 한곡조, 이렇게 청하는 대로 부르다 보니 열곡조도 더 불렀다.
이러는 동안에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대감!
어지간히 음악이 끝났을 때 갑자기 부용은 감사를 부르는 것이다.
음
소녀가 춤과 노래를 좋아 하는 이외에 또 한가지 좋아하는 것이
있나이다
음, 그게 무엇인데?
듣자 하니 대감께서는 시를 좋아 하시와 풍류대감이라는 별호까지 듣고
계시다 하오니 소녀도 시를 무척 좋아 하나이다
흥! 그것 참 기특한 일이로군
김시중은 이 여자에게서 또 하나의 뛰어난 재주를 발견하고 다시 한번
놀랬다. 춤을 잘 추고 소리도 잘 하려니와 이 여자의 작시(作詩)재주에는
무릎을 치면서 놀랬다.
그날 밤이 새도록 그들은 피차 서로 운자(韻字)를 주고 받고 하면서
자연(自然)이며 풍물(風物)이며 동물(動物)등등에 걸쳐서 여러가지 시를
짓고 읊으며 하는 동안에 날이 새는 줄을 몰랐다.
피차 약속한 것도 아니나 취미와 감정이 서로 맞다가 보니 자연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끔 되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저녁때만 되면 부용은 감사의 부름을 받아
그의 숙소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여기서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서로 시를 짓고 읊고 하면서 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닷새째 되는 날 저녁에 그들은 금슬(琴瑟)을 같이 하였다.
부용이 감사에게 몸을 바치게 된 것은 결코 보통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부귀영화나 혹은 벼슬에 혹하여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부용은 그러한 헛된 부귀나 영화나 또는 벼슬같은 것은 멸시하였던
것이다.
그보다도 이 분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그윽한 향기와 풍류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벼슬을 하게 되면 더욱 더 높은 벼슬을 차지하려는
것이 범인들의 통념(通念)이거늘 이 벼슬을 초개(草介)와 같이 여기고
인생의 그윽한 향기를 찾고 있는 그의 드높은 정신에 부용은 감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후 며칠이 지났다.
부용아!
네
재주가 많은 사람은 그 재주에 넘어 가기가 쉬우니라. 네 인물이
절색이고 노래를 잘 하고 춤을 잘 추고 시를 잘 짓고 하는 등 온갖 재주가
비범하고 보니 네 주위에서 뭇 사나이들로부터 많은 유혹의 손길이 뻗치게
될지도 모르니 여자는 이런 때 자기 몸 단속을 잘 하여야 하느니라
알아 모시겠나이다. 소첩이 그날 저녁 백년해로 하기로 굳게 맹서하던
그때 그 일을 어찌 잠시라도 잊겠나이까. 백번 죽사와도 소녀는 대감의
소첩(小妾)이로소이다
음! 장하도다. 내 너를 믿고 떠나니 갔다 돌아올 동안에 부디 몸성히
잘 있거라
대감 그럼 속히 돌아오실 날 손꼽아 기다리겠나이다
감사가 이웃 고을로 떠나는 날 부용은 그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는 것이다.
감사는 이웃고을에 볼일이 있어 지금 가는 길이다. 거기서 며칠동안
볼일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성천 땅에 다시 들려서 부용과 함께
평양까지 같이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금슬을 같이 한지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이만큼한
여자라면 족히 백년을 해로하여도 무방하다고 그는 생각 하였다. 부용이
또한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며칠 후에 이웃 고을에서 볼일을 마치고 감사는 부리나케 성천땅으로
돌아 왔다. 그는 이제 부용을 데리고 평양 땅으로 가서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하여 보려는 꿈을 가득히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뜻하지 않던 큰 일이 생겼다.
그가 철석같이 믿었던 부용이는 그가 며칠동안 이웃 마을에 가있는
동안에 어느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나서 매일밤 그 사람을 자기 방에다가
재우고서는 새벽녘에야 그 사람을 돌려 보낸다는 소문이 온 성천 고을에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실로 청천에 벽력같은 소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 부용이가 내가 철석같이 믿었던 부용이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세상에 뜬 소문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
그는 이렇게 선의로 해석하면서 사실을 부정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가장 믿을만한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이 추잡스러운 소문이 계속하여 자주
들려 오는데는 도무지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계집을 냉큼 묶어 오너라! 더러운 계집같으니라구
드디어 김시중의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용의
입을 통하여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만일에 정부(情夫)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계집도 죽여 버리고 자기도 죽어버릴 각오였다.
이윽고 부용은 노끈에 꽁꽁 묶여서 김시중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혀졌다. 한때는 그와 같이 원앙금침속에서 화려한 꿈을 같이 꾸던
부용이가 이제 한때 서방님이었던 김시중이 발앞에 꽁꽁 묶여서 꿇어
앉혀져 있는 꼴이란 참으로 처량하기 짝이 없다.
부용아!
네
네 그래 내 없는 동안에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고 그를 밤마다 네
집에다 재워 보내었다는데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네, 사실이옵나이다
뭣이?
이순간까지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또한 사실이드라도
부용이 입에서 사실이 아니라는 말만 들어도 시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 장본인의 입으로부터 모든 일이 사실이라는 자백을 들은
이상 이제는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에기 이 망한 계집 같으니라구! 너도 역시 한개의 미천한 화류계의
천기(賤妓)에 지나지 않았구나! 너같이 더러운 계집을 내가 철석같이
믿기가 잘못이었지!
------
이년을 당장 냉큼 들어다가 한 칼에 처참하여 버려라!
평상시에는 그렇게도 부드럽고 온순하던 김시중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실로 사자의 소리와 같이 크고 거칠었다.
대감!
사령들이 막 두팔을 붙잡어 들고서 나가려는 순간 부용은 이때까지
수그렸던 머리를 쳐들면서 나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소첩이 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사오나 죽기 전에 한가지 청이 있사오니
죽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래! 무슨 청이냐? 어디 말해 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나 한수 짓고 죽었으면 원한이 없겠나이다
좋다. 산사람의 소원도 풀어 주겠거늘 죽는 사람의 소원이야 못들어
주겠느냐, 자 여기 필묵과 종이를 가져 오너라
이윽고 부용의 앞에는 붓과 벼루와 종이 한장이 놓였다.
운자(韻字)는 대감께서 적어주기 바라나이다
좋다
김시중도 역시 풍류객인지라 직각 그 자리에서 붓을 잡더니 종이
위에다가 능(能)이라는 한자를 운자(韻字)로 커다랗게 써 놓는 것이다.
김시중이 종이에다가 운자를 쓰기가 바쁘게 그의 붓을 받아 쥔 부용은
쏜살같은 속도로 다음과 같이 이십팔자(二十八字)의 시를 순식간에 지어서
적어 놓는 것이다.
成川芙蓉 何所能 (성천부용 하소능)
能歌能舞 又詩能 (능가능무 우시능)
能之能中 又一能 (능지능중 우일능)
月明夜半 換夫能 (월명야반 환부능)
성천 부용이 무엇을 잘 하는 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고
또한 시를 잘 짓더라
잘하고 잘하는 중에 또하나 잘하는게 있으니
달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바꾸기를 또한 잘 하도다.
부용이 지은 시를 읽어보자 김시중의 입 언저리에서는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다.
동시에 땅에 꿇어 업디려 있는 부용을 말없이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너의 소행(所行)을 보아서는 갈기 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겠다.
하나 과연 너야말로 인생의 향기를 아는 멋있는 계집이로다. 너의
육신(肉身)은 미우되 너의 재주가 아깝구나. 너까짓것 하나 죽이면
무엇할고, 자 그 노끈을 풀어주어라
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람에 사령들은
어쩔줄을 모르면서 비끌어 매었던 노끈을 풀어 주었다.
꽁꽁 묶이었다가 자유로운 몸이 되자 부용은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고
김시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다. 그 눈동자는 샛별처럼
반짝이는데 눈 가장자리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환희(歡喜)와 만족의
눈물이었다.
대감!
음!
소첩의 지나친 연극을 과히 책하지 말아 주소서
------
이때까짓 것은 모두가 소첩이 꾸며 만든 연극이었나이다
뭣이? 연극이라니?
이세상 사나이들이란 하두 믿을 수가 없사옵기에 소첩의 예술에 대한
대감의 이해와 또한 소첩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어느만큼 한지를 시험하여
보기 위하여 꾸며 낸 연극이었나이다
------
대감을 두고 소첩이 어찌 외간 남자를 내집에 발을 들여 놓도록
하겠나이까. 소첩은 몇몇 아는 사람과 짜고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나서
간통을 한 것처럼 헛소문을 터뜨렸나이다
------
이렇게 헛소문을 터뜨려 놓고서는 대감께서 어느 정도로
분노(忿怒)하시냐 하는 것을 한번 시험하여 보았나이다. 그랬더니 과연
대감께서는 극도로 분노하시어 소첩을 묶어다가 죽여버리라 명령을
하셨나이다. 그처럼 분노하심은 소첩에게 대한 애정이 그만큼 뜨겁고
열렬하기 때문인줄 알아 그 순간 소첩은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나이다
------
소첩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소첩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나이다
------
다음은 소첩의 마지막 소원으로 시를 짓겠다 말씀 드렸을 때
대감께서는 서슴치 않고 그 청을 들어 주셨으며 그 다음 소첩이 지은 시를
읽어 보시고 나자 마자 소녀를 죽여 버리시려던 그 마음 다시 돌이키시고
비끌어 매었던 노끈을 풀어 주라 하셨나이다. 그것을 보고 소녀는
대감이야 말로 실로 풍류를 이해하고 인생의 멋을 아는 지아비인줄 또
한번 느꼈나이다
------
실은 대감께서 과연 소녀의 지아비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 것을
소녀가 시험하여 본 것이고 이제 대감께서는 그 시험에 합격한
셈이로소이다
부용의 말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시중은 그만 달려 내려와서
왈칵 부용을 껴안고 말았다.
부용아!
------
너야 말로 정말 멋을 아는 계집이로다
부용은 김시중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사르르- 눈을 감는 것이다.
곁에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 없이 그들은 오래 오래 서로 껴 안은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지금 대동강 건너편에 아담스럽게 생긴 기와집 한채가 있다. 이집이
바로 그 당시 김시중이 부용에게 사주어 같이 살던 집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끝>
<제 오 화> 靑春悲戀(청춘비련)
哀戀話
< 1 >
백제(百濟)와의 국경지대가 다시 시끌시끌해 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신라(新羅)의 백성들이 연중가절(年中佳節)인 한가위를 그냥 무의미하게
넘겨 버리지는 아니하였다. 내일은 싸움에 나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지언정, 오늘만은 흥겨웁게 보내지 않으 수 없다는 듯,
고을마다 추석놀이가 성대히 행하여 지는 것이었다.
노룻골이라고 해서 예외(例外)일 수는 없었다.
신명나는 풍물소리가 골 안에 듣기 좋게 메아리지는 가운데,
아침나절부터 동구 앞 모래사장에는 씨름판이 벌어졌고, 마을 뒤 참나무
숲에서는 추천(그네)놀이가 열리었다.
이 날의 씨름판에서 첫째를 차지한 사람은 이듬해 추석까지 젊은 축의
두령격이 될 뿐 아니라, 총각일 경우에는 동네 처녀들의 무한한 사모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처녀들의 추천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으뜸을 차지한 처녀에게는
총각들의 은근한 시선이 두고 두고 던져 지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이
날의 씨름판과 추천놀이는 연중 어느 가절의 놀이보다도 볼만하였다.
씨름판이 끝나면, 젊은이들은 첫째를 차지한 새로운 두령을 중심으로
크게 자리를 벌려 달이 중천에 올 무렵까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드디어는 둥실둥실 춤까지 추며 즐기는 것이었다.
추천놀이 를 마친 처녀들은 남자들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지는
아니하였으나, 그네들은 그네들대로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달밤에는
다시 참나무 숲에 모여 이번에는 숨박꼭질이었다. 그러는 것이 예년의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숨박꼭질이라곤 하지만 오늘날 아이들이 하는 그런 소규모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인원을 두 패로 나누어서 한 편은 숨고 한편은 찾으러 다니는
것이다. 모조리 찾아 내면 교대를 하게 된다. 그러니만치 숨는 쪽은
뿔뿔이 흩어져서 꽁꽁 재주껏 숨어야 했고, 찾는 쪽은 또 이 구석 저
구석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 숲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은 안되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 2 >
뒷산 봉우리 위로 불그레한 빛이 피어 오르더니 보름달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저녁 성찬을 마친 처녀들은 막 돋아 오르는 달을 바라보면서 즐거이
참나무 숲으로 몰려 나갔고, 오늘 씨름판에서 첫째를 차지한 바위쇠네 집
마당에 자리를 벌린 젊은이들은 손에 술잔을 들고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였다.
명년 한가위까지 마을 젊은 축의 두령이 된 바위쇠는 넓은 이마에 담뿍
달빛을 받으면서, 잔을 높이 들어 벌떡벌떡 잘도 마신다. 그 곁에
도사리고 앉은 검달이도 한 잔을 단숨에 비워 냈고, 좌중의 모든
젊은이들도 앞을 다투어 호음(豪飮)을 하였다.
한 잔, 또 한 잔, 술이 거듭됨에 따라 판은 점점 흥그러워 갔다.
그네 뛰기선 누가 첫째라노?
검달이가 이런 소리를 꺼내자, 좌중은 신이 나는 듯 한층 더 떠들어
댔다.
복사녀지 누구까봐
복사녀가 언제부터 그네 잘 뛰노?
뱃속에서부터 란다 와?
에잇 지랄!
하하하---
호호호---
웃음소리가 고요한 밤 공기를 흔들며 뒷산 골짜구니에 가서 은은히
메아리진다. 이 쪽 웃음소리를 따라라도 웃는듯 멀리 참나무 숲 속에서도
처녀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 온다.
달은 어느덧 산봉우리 위에서 성큼 솟구쳐 올랐다.
젊은이들의 처녀들에 대한 시시닥거리는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누구는 어떻다느니 아무개는 어떻느니- 떠들어 대고는 킥킥킥 괴상한
소리로 웃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위쇠만은 두령다운 위신을 지키면서
이따금 껄껄껄 호기있게 목줄기를 울릴 따름이었다.
좌중의 화제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역시 오늘의 추천놀이에서
으뜸을 차지한 복사녀(복숭아 여자)였다. 그네의 복스러운 얼굴과 박속
같이 하이얀 살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젊은이들은 몸을 비비 꼬며
으으응!
혹은
아유우!
하고 , 괜히 못 견디는 것이었다. 그럴적마다 바위쇠는 일부러 못들은
척하고, 잔을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키기만 하였다.
마당에 깔렸던 집 그늘이 말끔 걷히어 가고, 온 뜰안에 달빛이 환하게
쏟아져 내릴 무렵에는 술들도 어지간히 된 듯 구성진 노랫가락이 연신
쏟아져 나왔고, 마침내 벌떡 일어나서 둥실둥실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위쇠는 술기가 얼근(얼큰)하게 오르자 가슴에 뿌듯이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쩌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을 그냥 노래나 춤만으로
넘겨서는 안될 것 같았다. 슬그머니 자리를 일어서고 말았다.
벌써 몇 해 전부터인지 모른다. 두고두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일념(一念). 씨름판에서 첫째를 차지하기만 하며는--- 하고, 바로 이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애태우며 기다려 왔던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오늘
이 밤을 헛되이 넘겨 버려서는 안된다.
노래와 춤으로 신명나게 어울려진 일동들을 그냥 남겨 놓고, 슬며시
집을 빠져 나가는 바위쇠의 머리 속에는, 보름달보다도 더 뚜렸한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오늘의 처녀들의 주인공인
복사녀의 얼굴이었다.
참나무 숲으로 통하는 비탈길을 막바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기운이 장사고 담대한 바위쇠일망정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지는
못하였다. 꼭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남의 눈에 띄일까 봐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지름길로 해서 언덕마루로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언덕마루에 올라
타박솔(물기가 마른 소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눈아래 퍼져 있는 참나무
숲을 유심히 내려다 보았다. 나무가 섬금성금 서 있는 숲 안으로 밝은
달빛이 좌악 흘러 들고 있었다.
숨박꼭질은 지금 막 새 판이 시작된 듯 한 편은 그냥 그자리에 까아맣게
모여 섰고, 다른 편은 이리저리 거미새끼처럼 흩어지는 것이었다.
바위쇠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 중의 어느것이 복사녀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타박솔을 움켜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려
나가는 듯하였다.
달은 어느새 중천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숨박꼭질도 이번으로 마지막일는지 모를 일이다. 추석날
밤이란 일년 중에 다시없는 좋은 기회인데, 이 기회를 그냥 헛탕쳐
버린다면 생각할수록 온 몸에 조바심이 잦아 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있을 때였다.
까아만 그림자 두 개가 나무 그늘에 가렸다가 나타났다가 하면서 이
쪽을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어디 그럴듯한 곳을 찾아서 숨으러 오는
모양이었다. 한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오던 두 개의 그림자는 제각기
방향을 달리하여 왼쪽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오른쪽으로 미끄러진 그림자는 어느 덤불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렸으나,
반대 방향으로 갈라진 그림자는 쉬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달빛이 너무 밝은 탓만은 아니리라. 거리가 꽤 가까워진 탓만은
아니리라. 바위쇠의 두 눈은 크게 번쩍 뜨였고, 얼굴에는 화끈 피가 모여
들었다. 물론 달빛이 밝은 탓도 있겠고, 거리가 가가워진 까닭도
있겠지마는 그것은 틀림없는 영감(靈感)의 작용이었다. 달리고 있는
그림자가 바로 복사녀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이었는 것은--- .
우연이라면 이렇게 고마운 우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네와의
사이에는 아름다운 인연이 숙명적으로 맺어져 있는지도 모르지---
바위쇠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겨를(겨룰)도 없이 똑바로 복사녀가
달리고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복사녀와의 거리가 불과 얼마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을때 그네는
인기척에 놀란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
쪽을 조심스러이 살폈다. 그네가 놀랄까봐 바위쇠도 얼른 멈추어 섰다.
우뚝 멈추어 서서 마주 바라보는 바위쇠와 복사녀. 한 쪽은 젊은이들의
두령, 한 쪽은 처녀들의 주인공. 휘영청 밝은 달빛이 두 사람 위로 곱게
내리고 있었다.
복사녀!
바위쇠의 입에서 뛰어 나온 첫 마디였다. 뜨거운 목소리였다.
------
복사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옷고름을 만지작 거릴 따름이다.
복사녀! 나 바위쇠여
하고, 복사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는 바위쇠의 가슴 속은 그지없이
더웠으나 아까처럼 울렁거리지는 아니하였다.
바위쇠가 다가오자 복사녀는 살쁘시 돌아 섰다. 치렁치렁 땋아 내린
머릿채 끝에는 댕기가 약산 나풀거린다.
복사녀 곁으로 다가 간 바위쇠가
복사녈 내가 얼마나---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또 한 사람 찾았네!
누구 누구 남았노오---
하는 고함소리가 저 쪽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있었는 듯 얼른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어느새 그랬는지
바위쇠는 복사녀의 두 어깨를 잡고 있었다.
어깨에 바위쇠의 손이 와 있는 것을 안 복사녀는 귀밑이 얼마나
화닥거리는지 견딜 수가 없어 허리를 약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바위쇠는 도리어 바싹 다가들어 그네의 가슴을 왈칵 안아버리고 말았다.
복사녀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좀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결코 바위쇠의
가슴에서 빠져 나갈려고 몸부림을 치지는 아니하였다. 바위쇠는 복사녀를
안은 한 쪽 손을 풀어서 그네의 얼굴을 이 쪽으로 돌렸다. 복사녀의
얼굴은 순순히 바위쇠의 얼굴 앞으로 돌아 왔다.
달빛을 받아 한결 더 탐스럽고 어여쁘게 보이는 복사녀의 얼굴. 그
입술--- 바위쇠의 입술이 복사녀의 그것을 가서 지긋이 누를려고 했을 때
---아직 아직 멀었다!
복사녀도 남았다!
하는 고함소리가 꽤 가까이에서 늘려왔던 것이다. 복사녀는 놀란
토끼처럼 바위쇠의 품안에서 빠져 나가며
딴 데로 갑시다
하였다. 정말 그러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바위쇠는 그네의 손목을 잡고
그늘진 곳으로 해서 숲을 빠져 나가 언덕마루마저 넘어 서 버렸다.
언덕마루를 넘어 골짜구니를 타고 얼마를 갈라치면 거기에
애기소(沼)라는 못이 있었다. 조그마한 못이기는 했지만 거기에 고여
있는 물은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을만큼 깊은 것이었다.
바위쇠와 복사녀는 말 없는 가운데 합의라도 된 듯 바로 이
애기소에까지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암석이 병풍처럼 둘려 있는 아래에 깊이를 모르는 물이 주름살 하나
없이 담겨 있고, 물 위에는 달이 한 개 소리도 없이 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둘레를 싸고 있기 때문에 벌레 우는 소리가 가냘피 들려 올
뿐 사방은 고요할대로 고요하였다.
바위쇠는 펑퍼짐한 반석에 가서 걸터앉았고, 복사녀는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곁으로 다가섰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이 물
위에 ㄸ더있는 달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나 바위쇠의 귀에는
복사녀의 조심스러운 숨소리가 들렸고, 복사녀 역시 바위쇠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마만이었을까? 가슴 속이 다시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바위쇠는
뜨거운 목소리로 사방의 적막을 깨고야 말았다.
복사녀!
그녀를 바라보는 바위쇠의 두 눈은 달빛 아래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복사녀도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어쩌지 못하여 황홀한
시선으로 바위쇠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리웠던 얼굴인지
모른다. 남 몰래 마음속에 고이고이 간직해 온 오직 하나의 님. 그 님의
얼굴이 바로 여기 눈앞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지 않느냐.
복사녀는 바위쇠의 이글거리는 시선 앞에 오래도록 몸을 가누고 있을
수가 없어 그만 그의 가슴 속으로 무너지듯 달려 들고 말았다.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서로 말을 못해 온 바위쇠와 복사녀. 그러나 이미
말 같은 것은 소용이 없었다. 입술이 입술을 찾았고, 가슴이 가슴을
안았다. 이제는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저 노자근한(매우
노곤한) 공기만이 두 사람을 싸고 돌 뿐이었다.
얼마 후에 바위쇠는 복사녀을 안은 채 반석 위에 나가 쓰러지며, 그네의
몸뚱아리를 손으로 더듬어 내려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 예, 아으으--- 결혼하고나서어---
복사녀는 바위쇠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팔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것은 반항도 아니었고,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경우에 취해지는 여자들의 무의식적 태도라고나 할까.
아으으으---
발이 비잉 돌아 가는듯 하였다.
복사녀는 온몸에 바위쇠의 뜨거운 무게를 느끼며 두 눈을 지긋이 감아
버렸다.
< 3 >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바위쇠와 복사녀는 남들의 눈을 피하여 여러
차례 그 애기소에서 만났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밤이 깊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온몸에
이슬이 내리는 것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단꿈을
언제까지나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아니하였다.
시끌시끌하던 백제와의 국경지대가 본격적인 큰 싸움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노룻골의 젊은이들에게도 징모(徵募)의 국령은 내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바위쇠는 물론 검달이도 출정(出征)하게 되었고 그밖에 스무살 안팎의
몇몇 장정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내일이면 마을을 떠나는 날 밤, 바위쇠와 복사녀는 마지막으로 애기소를
찾아 올라 갔다. 못가의 잠든 반석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가슴속이
자꾸 얼어 붙는 듯 덜덜덜 떨리기만 하였다. 밤공기가 제법 선뜩해진
탓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그들 두 사람의 운명위에 검은 그림자가 와서
덮이는 듯한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복사녀! 너무 근심하지 말어---
바위쇠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처량하게 앉아 있는 복사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움터에 나간다고 어디 다 죽는가, 걱정없어, 나 곧 돌아 올테여
------
백젯놈들한테 죽을까 봐? 문제 없어, 까짓놈들 막 쳐없애고, 나 꼭
돌아올께
바위쇠의 얼굴만을 하염없이 우러러 보고 있던 복사녀는 그만
흑흑---
느껴 울며, 바위쇠의 가슴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져서 서럽게
서럽게 흐느껴 우는 복사녀의 들먹거리는 어깨를 내려다 보며 바위쇠는
울긴 왜 울어, 응?
하였으나, 자기도 코허리가 시큰해 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바위쇠의 품안에서 한참 느껴 울고 난 복사녀는 눈물을 씻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듯 입을 발끈
다물며 품 속으로 손을 넣는 것이었다. 품속에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조그마한 손거울이 한 개 쥐어져 있었다. 보름달처럼 동글한
석경(石鏡)을 바위쇠 앞으로 내밀며
이것 받아 주세요
하였다. 바위쇠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으나 그것을 넙쩍 받아
들었다.
그것 볼 때마다 저를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부디 몸조심 해요, 응
바위쇠의 얼굴을 우러러 보는 복사녀의 두 눈에는 다시 서러운 이슬이
맺혔다.
바위쇠는 가슴에 넘치는 뜨거운 기운을 어쩌지 못하여 왈칵 복사녀을
쓰러 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온몸에 느끼면서 바위쇠는 은근한
목소리로
고마워, 그런데 나는 뭣을 주면 될까?
하였다.
나야 아무것도 안 작고 있어도 괜찮아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기다리겠어요, 부디 몸 성히 돌아오시기나 해요, 응
그럼 돌아오고 말고, 꼭 돌아올테니 아무 걱정 말어
서리라도 내릴듯 밤 공기가 여간 선득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이제
조금도 그런 줄을 몰랐다.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출정하는 일행이 마을을 떠난 것은 이튿날 아침 나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 노소 할것없이 온통 모두 나서서 전송을 하였다.
바위쇠는 동구 앞에 모인 사람의 무데기 속에서 복사녀를 찾을려고
두리번거렸으나 끝내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가슴 한쪽이
흔들리는 듯 무너지는 듯 하였으나 어쩌는 수가 없었다.
복사녀는 아무도 몰래 혼자서 뒷산 언덕마루로 올라 갔던 것이다. 거기
타박솔 뒤에 몸을 숨기고 서서 출정하는 일행을 살피고 있었다. 바위쇠가
동구 앞에 모인 사람들 쪽을 두리번거릴 때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곤 하였다. 어느덧 그녀의 탐스러운 볼에는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이 동구 앞을 떠나 벼가 누우렇게 물결치는 들녘으로 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침내 저 건너편 언덕 모롱이를 돌아 사라져 버리자 복사녀는
그만 그자리에 풀석 엎으러지는 것이었다. 엎으러져서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서럽게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었다.
< 4 >
어느덧 가을도 저물어 가고, 온 들녘을 매운 바람이 휘몰아 치는 무렵
싸움터에 나갔던 젊은이들 중에서 단 한사람 검달이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큰 사건이라도 일어난듯 검달이네 집으로 모여
들었다. 검달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싸움터에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몸서리나는 경험담을 들려 주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여러 사람들은 숨을 크게 쉬지 못하였다.
바위쇠네 부모를 위시해서 출정한 젊은이들의 가족들은 얼굴 빛이
무섭도록 험악해 갔다. 집 모서리에 모여 서서 검달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처녀들 중에는 복사녀도 섞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조금도 없었다. 아랫입술이 경련을 일으킨 듯 이따금 가느다랗게
떨리기도 하였다.
검달이의 이야기에 의하면---
바위쇠랑 검달이들이 끼어 있는 신라의 신졸(新卒) 일대(一隊)가
백제군의 본거지를 기습하기 위해서 진(陣)을 떠난 것은 달이 휘영청 밝은
깊은 밤중이었다. 기침소리 하나없이 산등성이를 타고 적진의 배후를
향해 가는 군졸의 대열(隊列)은 정연(整然)하였다.
어느 산봉우리에 이르렀을 때 산줄기는 두 쪽으로 갈려져 나가고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오른쪽 줄기가 가가 뻗칠곳에도 불빛들이 빤짝
거리고 있었고, 멀리 왼 쪽 산맥이 뻗칠 곳에도 한떼의 불빛들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오늘 낮의 척후병(斥候兵)의 보고에 의하면 결코
그럴 까닭이 없는 데 이상한 일이었다.
대열은 멈추어 졌고 병졸들은 모두 긴장하였다. 공론 끝에 결국 오른쪽
편에 산재해 있는 불빛들이 적의 본거지의 불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거기를 습격하기로 결정이 내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미심쩍은 것은
왼쪽으로 바라보이는 불빛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오래기처럼 한줄로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행군하고 있는
대열인 듯 싶었다. 그것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의문을 남긴 채 대열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산등성이에서
비탈을 타고 내려 적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는 달도 어느덧 서천으로
기울어지고, 멀리 일렬로 움직이고 있떤 불빛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 한시도 머뭇거릴 겨룰이 없었다. 돌격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우렁찬 함성이 고요한 밤 하늘을 마구 흔들어 댔다. 풀속에서 뛰어 나온
군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의기충천하여 잠자고 있는 백제군의
진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적막한 들판이 금새
일대수라장(一大修羅場)으로 화하고 말았다.
바위쇠는 물론 검달이들도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삽시간에 적의 진지는
쑤셔놓은 벌집처럼 억망진창(엉망진창)이었다. 기습을 받은 백제의
군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거미새끼들 처럼 뺑소니를 치기에 바빴고, 놀란
말들은 껌충껑충 뛰어 오르면서 하늘을 향해 코를 마구 불었다.
기습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무수한 적을 무찌르고 유유히 귀영(歸營)의 길에 오른 병졸들은 마음껏
떠들어 댔다. 한바탕의 신명나는 싸움때문에 흥분될대로 흥분된 그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고 웃기도 하였고, 휘휘 휘파함을 불기도 하였다. 나는
몇놈의 목을 날렸다느니 나는 어떤치의 사타구니께를 칼로 쳐버리기도
했다느니--- 제각기 무공담(武功談)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렇게 떠들어 대며 어느 산기슭을 돌아 가고 있을 때였다.
산등성이에서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화살이 빗발처럼
마구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역습(逆襲)이었다.
아까 산등성이에서 멀리 바라보이던 실오래기 같은 불빛의 군졸들에
틀림 없었다. 너무나도 방심(放心)을 하였기 때문에 대열은 무너져
버리고 제가끔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것이었다.
더러는 바위에나 나무등걸 같은데에 은신하고 활시위에 화살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고 하였다.
바위쇠가 그런 무사(武士) 중의 한사람이었다. 빗발치는 적의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불 속에 은신하여 활시위를 힘껏 잡아 당기곤 하였다.
그럴 때 마다 화살이 무서운 힘으로 산등성이를 향해 날라가는 것이었다.
검달이가 바위쇠 곁으로 기어 갔을 때는 산등성이에서 활을 쏘기만 하던
백제군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산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무서운 기세였다.
신라군은 끝끝내 맥을 추지 못하였다. 패주 또 패주였다. 바위쇠와
검달이도 죽어라 하고 달렸다.
어떤 개울 가에 이르렀을 때 바위쇠의 안주머니에서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물건이 있었다. 석경이었다. 달빛에 번쩍이는 석경.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고 달리는 판인데 석경 하나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바위쇠는 뜀박질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바위쇠가 그것을 줏으러 가는 사이에
검달이는 벌써 얼마나 뛰었는지 몰랐다.
검달이가 본진(本陣)으로 돌아간 것은 희끄므레 하게 새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살아서 먼져 돌아와 있는 동료들의 수효는 불과 십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 검달이보다 늦게 생환(生還)하는 병졸들이 더러 있긴
했으나 끝내 바위쇠를 비롯해서 노룻골의 친구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검달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일시에 큰 숨들을 내쉬었다.
출정한 젊은이들의 가족들은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하였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우울한 얼굴로 곧장 장탄식(長歎息)이었다.
복사녀는 검달이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거기서서 듣고 있질 못하였다.
바위쇠가 떨어진 석경을 줏기위해서 뜀박질을 멈추고 돌아섰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눈 앞이 노오래지며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비잉
돌아가는 듯하여 비실비실 그 자리를 뜨고 말았던 것이다.
검달이네 집을 나온 복사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언덕마루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 이가 그 이가 정말 죽었단 말인가? 아아- 그 석경때문에 죽게
되었단 말인가? 그게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그 이를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늘도 하늘도 무심하다. 너무하다. 그 이를
죽이다니, 죽이다니---
복사녀의 오장육부는 마구 찢어지는 듯 하였다. 언덕마루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른다. 멀리 동구앞 길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피보다도 진한 눈물이 아프게 아프게 맺히는 것이었다.
동짓달 사나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날리며 불어 갔다.
저 길로 멀어져 가더니, 저 언덕모통이를 돌아 사라져 가더니--- 흐흑
마침내 복사녀는 그 자리에 힘없이 엎으러지고 말았다.
< 5 >
바위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 복사녀는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통 말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찬바람에 섞여 희뜩희뜩
눈이 나리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마을안 골목까지
호랑이가 내려와 쏘다녔다는 이야기가 동네를 시끌하게 했을 때도, 그저
그렇거니쯤 여기는 것이었다.
밤이면 잠을 자지 않았고, 낮에도 집안일을 거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노상 실신한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따금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모르게 방바닥에 엎으러져 오래오래
흐느껴 울기도 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무슨 곡절이 있거니쯤 짐작은
했지만, 일을 어떻게 수습했으면 좋을지 몰라 퍽으나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그럴 무렵에 생겨난 것이 검달이와 복사녀와의 혼담이었다. 여러
모로(여러모로) 걱정이 되던 복사녀의 부모는 그렇게라도 얼른 처리해
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검달이가 복사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였고, 검달이네 부모들도 복사녀라면 마을에서 제일 가는 처녀인지라,
여간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복사녀의 부모들도 찬성을 하였으니
혼인은 이미 결정적이었다. 남은 것은 다만 절차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이 들려도 복사녀는 이렇다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상만사가
무의미하였고, 귀찮을 따름이었다.
그 해 겨울은 여니해보다 눈이 많이 쏟아져 내렸다. 마을의 집집들은
물론 뒷산도 언덕마루도 온통 눈이 덮여 백금의 무더기인 듯 번쩍거렸고,
동구앞 들에도 백설은 은세계를 이루어 놓았다.
섣달도 지나가고 새해의 정월도 저물어 갈 무렵 복사녀와 검달이의
혼인식은 거행되기로 결정이 되었다.
마을 총각들이 모두 싸움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검달이가 복사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보면
검달이는 여간한 행운아가 아니었다.
내일이면 복사녀는 검달이의 아내가 되는 날 밤이었다. 자정이 훨씬
넘었을 무렵까지 집에서는 음식 준비에 바빠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곤하게 잠들어 버리고 난 뒤, 복사녀는 이불 속에서
소리도 없이 빠져 나와, 방문을 살며시 밀고, 바깥으로 나갔다. 마루
밑에서 신을 찾아 신은 그녀는 눈이 깔려 있는 마당을 조심조심 걸어서
사립을 밀고 집을 나서 버리는 것이었다.
자정이 훨씬 넘은 겨울 밤의 공기는 귀와 코를 도려내는 듯 하였으나,
그녀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마을을 빠져 나가, 뒷산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었다.
내가 검달이의 아내가 되다니--- 말도 아닌 소리다. 검달이? 흥!
복사녀는 연신 자기의 운명을 비웃어 댔다.
눈이 무릎을 묻는 골짜구니를 자꾸 기어 올라, 그녀는 마침내
애기소에까지 오고 말았다. 애기소. 아- 바위쇠와의 아름답던 사랑의
보금자리. 그 정답던 반석도 지금은 눈 속에 묻혀 보이지가 않는다.
깊이를 모르는 애기소의 물만이 이 추위에도 얼어 붙질 않고, 찰랑찰랑
넘치고 있다.
복사녀는 아무렇게나 그 물 가에 퍼지고 앉았다. 이미 추위를 느낄
그런 감각은 온몸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속에 다만 한 가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불길은 지금 그녀의 목숨을 조금씩
조금씩 불사르고 있는 것이다.
검달이에게로 시집을 가느니보다는 차라리 이 물 속으로 뛰어 들자.
이미 죽어서 저승에 가 있는 그 이를 따라 나도 가자. 가서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소원을 저승에서라도 이루어야지
찰랑찰랑 넘치는 물을 노려보는 복사녀의 두 눈은 무섭도록 싸늘하였다.
눈물 같은 것은 벌써 의미를 상실한지가 오래였다. 마지막 한번의
피나는 의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녀가 죽음을 각오한 것은 검달이가 돌아온 바로 그 날
언덕마루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듯 오늘까지
단행(斷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단행을 하지 못한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도 바위쇠가 혹시 살아서 돌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실같은 한가닥의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내일이면 마음에도, 꿈에도 없는 검달이의 품에
안겨야 할 굴욕의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살아서 뭘 하겠는가?
그녀는 어금니를 빠드득 깨물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치맛폭으로
머리를 뒤집어 썼다. 눈 앞이 갑자기 깡깜(깜깜)해 졌다. 눈을 감았다.
깡깜하던 눈 앞에 보름달처럼 떠오른는 것이 있었다. 바위쇠의
얼굴이었다.
아아 얼마나 얼마나 애태우며 기다리던 얼굴이냐. 이 얼굴 때문에
긴긴 겨울 밤을 얼마나 안타까운 몸부림으로 새웠더냐--- 아아 이 얼굴!
이 얼굴!
복사녀는 아랫도리에 열이 벌겋게 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한
바탕 단꿈을 꾸고 난 뒤처럼 머리 속도 어지럽고 노자근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이 때, 마을 쪽에서 두번째의 닭이 홰를 치며 울었다.
날이 밝는다, 날이 밝으면 아아- 날이 밝으면---
복사녀의 온몸에서 미친 듯이 솟구쳐 오르는 기운이 있었다.
순간! 간장을 끊는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툼벙!
애기소의 잔잔한 물결이 깨어지고, 커다란 파문이 자꾸만 번져 나갔다.
그리고는 밤은 다시 무섭도록 고요해 졌다.
슬픈 일이 많았던 노룻골의 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산에서 눈 녹는
물이 쫄쫄쫄 흐르기 시작하였다. 산비탈 양지쪽에는 벌써 할미꽃이랄지
진달래가 봉오리를 맺었고 들녘에도 파릇파릇 새순들이 보기 좋게 솟아
올랐다.
그런 어느 날.
멀리 언덕 모둥이를 돌아 동구앞 길을 찔룩찔룩 걸어오는 웬 병신 같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밭갈이를 하고 있던 검달이는 저게 웬 사람이까 하고 그 수상쩍은
내객(來客)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게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지나가는 나그네인 모양이었다. 그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는 검달이에로 가까이 오더니
아 이 사람아!
하고, 알은 체를 하는 것이었다. 검달이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나 바위쇠여
응! 바위쇠?
참으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바위쇠가
살아서 이렇게 돌아오다니--- .
마을은 발칵 뒤집혀졌고, 울음소리가 다시 쏟아졌다.
절룸발이(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온 그를 맞이하여,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바위쇠네 집안 사람들의 눈물. 혹시 우리 아무게도 살아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눈물들. 그리고 공연히 딸생각이 나서 쏟아지는
복사녀의 부모의 원통한 눈물.
봄이 돌아왔건만 노룻골의 슬픔은 좀해서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신라의 기습군이 역습을 당하던 그 날 밤, 바위쇠는 떨어진 거울을 집어
들다가 적군의 화살에 넙쩍다리를 맞았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하여 뛴
보람이 있어 적군의 눈을 피하게 되었고, 어느 깊은 산중의 이름도
국적(國籍)도 없는 마을에서 화살에 맞은 다리를 치료하며 겨울을 났던
것이다.
천명으로 살아서 고향에 돌아온 바위쇠는 무엇보다도 복사녀의 소식이
궁금하였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이튿날 검달이를 찾아 갓다.
이 사람아 검달이! 복사녀도 잘 있겠지?
-----
검달이는 대답이 없을 뿐 아니라, 이상스러운 빛이 두 눈에 떠올랐다.
일종의 질투와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사람 왜 말이 없나?
흥! 복사녀, 죽은지가 언제라고
뭣이! 복사녀가 죽어! 응!
물에 빠져 뒤진지가 언제라고, 애기소에 빠져 뒤졌어! 뒤져!
에익!
어느새 바위쇠의 주먹은 검달이의 뺨을 가서 보기 좋게 갈겨 놓았다.
으악!
하고, 나가 쓰러지는 검달이의 몸뚱아리를 바위쇠는 되는대로 마구 차
넘겼다.
이놈 자식아! 니가 죽였지 니가, 니가 복사녈 못살게 했지! 응! 응!
바위쇠의 목줄기에는 시퍼런 핏대가 몇 개나 몇개나 붉어져 올랐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마구 떨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여움의
화신(化身)인 듯 하였다.
봄은 무르익어 가고 있건만 노룻골에는 앞으로 또 어떤 종류의 슬픔이
생겨날는지 모를 일이었다.
< 끝 >
야담
野談 : 민간에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야사의 구수한 이야기.
[unofficial historical story ]
<제 육 화> 復讐奇譚(복수기담)
異花 雪竹梅
1.
이조 중엽(李朝中葉)에서 조금 지난 시절이었다. 임금이란 이는 정사는
모르고 대궐 깊숙이 들어앉아서 주색에 침몰하고 날마다 풍류와 잔치를
일삼고 궁녀들의 춤과 노래속에 파묻히어 있었다. 간신적자는 정권을
잡고 흔들며 파당을 지어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세도를 잡아서 그 일문이 모두 벼슬을 하는데
청수(靑水)라는 사람은 장안의 건달로 유명하였으나 역시 명문의 자손이라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충청 어떤고을의 원님이 되었다.
이 고을은 산수가 명미하고 경치도 훌륭하려니와 어염시수가 좋고
들에는 오곡이 풍등하고 산에는 백과(百果)가 있어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여기 사는 백성은 대개 잘 지내고 부자가 많았다.
그중에도 임원(林原)이란 사람은 이 고을에서도 유수한 부호인데 그 때
부호라는 것은 대개 세도를 부려서 서민의 재물을 뺏거나 부정한 행정을
해서 부자가 되기 일수인데 임원만은 정당하게 벌은 재상이었다. 또
부자라는건 대개(걔?) 인색한 법인데 임원은 그렇지 아니해서 인심을
얻었다. 그래서 거지란 거지는 이집에 단골로 다니고 또 지나가는
나그네도 임원의 소문을 듣고 와서 며칠씩 식객노릇을 하다가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집에는 손님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다만 임원은 양반이 아니요 평민이라고 해서 이 고을양반들에게 늘
학대를 받고 지내는 것이었다. 양반이 아니면 성명이 없고 그 자손도 글
공부를 해야 벼슬도 못하고 아무리 똑똑한 이재라도 써먹을 수가 없는
억울한 세상이었다.
임원에게는 딸과 아들남매가 있었다.
딸은 열일곱이라는 꽃다운 아이로 얼굴이 달덩이처럼 동탕(動蕩)하여
미인으로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 혼처가 물밀듯하지마는 이리 삐긋 저리
삐긋 혼인이 잘 되지 아니하였다. 양반의 집과는 혼인을 할 수 없고
상놈집 자식으로는 인물이 없고해서 고르고 고르는 중이었다.
미랑(美娘)이를 어서 시집보내야 할텐데
그러기 말야, 그러나 어디 똑똑한 사내자식이 있어야지
미랑의 아버지 어머니는 늘 걱정을 하였다.
중호(重浩)도 장가를 들여야지, 벌써 열 다섯살이 되었구려, 늦었지
뭐요
늦었구말구, 나이 열다섯이면 호패를 찰텐데
그때는 대걔 사나이가 열두 서너살이면 장가를 들고 계집애는
열서너덧살이면 의례히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으니 그들 남매 미랑과
중호의 혼기가 늦었다는 것도 당연한 말이다. 이람도 예쁘려니와 그동생
중호도 누이와 같이 아름답게 생기었다. 언듯보면 중호도 미랑과 같이
여자 비슷하게 생기고 살결이 희고 예뻣다. 그리고 재주도 있고 똑똑해서
글방에서 사서 삼경을 다 배웠지마는 양반이 아니라 과거를 볼 수도
없었다.
아버님, 저는 왜 글공부를 했어도 과거를 못봅니까?
양반의 자손이 아니라서 그렇단다
같은 사람인데 양반이라야 벼슬을 하고 그도다 더 잘난 인물이다로
상놈이면 썩어 버리니 그런법이 어디 있어요
그러기 나라가 이렇게 망하는게 아니냐, 이번 새로 도임한 원님도
팔난봉이지만 양반의 집 자식이라고 원님이 되었단다
정말 원통하고 분해요. 그럼 저는 뭘해야 좋을까요?
농사나 장사나 했지 별 수 있니
중호는 울었다 높은 학문을 배웠으나 써 먹을데가 없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였다.
양반의 집으로 양자를 가면 어떻게 속일 수가 있고 과거를 볼 수가
있는데- 가난한 양반에게 땅이라고 떼주면 될 수는 있지마는...
임원도 한탄스러워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싫어요. 남의집에 가서 벼슬을 하느니 이집에서 농사를 짓는게
나어요
글쎄 네가 외아들이니 양자를 보낼수도 없고
딴 고을에 가서 양반노릇은 할 수 없나요?
그것도 할 수 없단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양반이 되지 못했나요
우리 선조도 고려때는 양반이었더란다. 그런데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되는데 이조에게 붙는 사람은 양반이 되고 이조를 반대하는 집은 다
평민이 되었단다
그럼 지금 양반은 다 나쁜 사람들이로군요. 우리도 조상은 좋군요
그럼- 사람이야 다 매일반이지 양반이니 상인이니 하고 가르는 것이
잘못이지
아무리 못났어도 양반이면 상인에게 해라나 하게를 하고 수틀리면
잡아다가 때리고 돈이나 곡식을 욹어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양반같지
아니한 토반(土班)의 행패는 더욱 심해서 평민들은 그 등살에 살 수가
없었다.
임원도 원님이나 양반들에게 뜻기는 것이 굉장히 많았고 억울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마는 호소할 데가 없었다.
청수는 이고을에 부임하자 위선 가장 비위에 맞는 이방(원님밑에서
일하는 아전) 하나와 친하였다. 악한 임금은 간신과 가까워지는 법이요
악한 상관은 악한 하관과 배가 맞는법이다. 탐관오리가 번창해서 나라를
어지럽게하는 세상이었다. 청수는 이방을 불러서 위선 이 고을의 명기를
수청들이게하고 또 한편 돈을 긁어 모을 방도를 의논하는 것이었다. 그저
토색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고을 상놈중에서 누가 부자냐?
네이- 임원이란 놈이 상인이지만 큰 부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먹을 수 없니?
네이- 그저 트집을 잡아서 끌어다가 때리고 족치면 됩니다
트집을 어떻게 잡는단 말이냐?
다 하는 수가 있읍니다
이방은 원님의 귀에다가 대고 간사스럽게 뭐라고 속살속살한다.
으응- 그렇게 예쁜 딸이 있다- 그거 꿩먹고 알먹는 격이로구나- 응-
하루라도 빨리!
청수는 희색이 만면이다.
며칠후이다.
이방이 사령을 데리고 임원의 집으로 왔다.
웬일이시오?
임원은 이방에게 말하였다.
원님께서 따님을 보시자고해서-
같은 평민이건만 하대를 한다.
왜요?
글쎄 그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원님께서 미랑의 소문을 듣고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아아 어디 중신(혼인소개)를 하시려는 모양입디다
원님이 무슨 혼인주매란말요. 소용업다고 말씀하시오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역한단말요. 순순히 말할때 보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잡아 갈테니
아니 그런 법이 어디있단 말요. 아무리 원님이기로서니 규중처녀를
함부로 잡아간단 말요
임원은 의심이 덜컥나서 하는 말이다. 원님이 미랑을 보자는데는 딴
배포가 있는 것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잔소리 말고 어서! 그렇잖으면 재미 적을테니
떠드는 소리에 중호가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원님이 미랑을 보시자고 한다
왜요?
그걸 알 까닭이 있나?
그건 할 수 없소
뭣이?
이방은 중호의 뺨을 후려갈기고
들어가서 계집애를 끌어내라
하고 사령에게 명형하였다.
벙거지를 쓰고 육모방망이를 옆구리에 찬 사령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가서 미랑을 잡아내었다. 미랑은 거꾸러지며 울며 불며 야단이었으나
여럿이 팔과 다리를 붙잡고 떠메어서 가마속에 집어넣었다.
미랑의 아버지 어머니 중호가 모두 울며 덤비는 것을 다른사령이
방망이로 때리고 밀치는 통에 미랑을 태운 가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임원과 중호 부자는 관가로 달려갔으나 역시 군노 사령들에게 매만 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2.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마는 호소할데가 없고 동네사람들은 동정을
하지마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기생도 아니요 규중처녀를 수청들이는 법이 어디 있노!
이번 원님은 아주 호색가래
아마 소첩을 삼으려는 게지
그런 무지한 일이 어디 있담. 양반과 벼슬아치들 때문에 못살겠어
돈과 땅을 바쳐야 미랑을 꺼내올꺼야
이렇게 수군거리었으나 드러내놓고 크게 말도 할 수 없었다.
임원은 아전을 통해서 돈과 땅문서를 바치었으나 미랑은 나오지
못하였다.
미랑은 왠 영문인지 모르고 관가에 잡혀 들어갔는데 원님 청수가 가까이
보더니
응- 과시 천하일색이로구나!
하고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방년이 몇인고?
하고 묻는다.
열 일곱살에요
흥 아주 한참피는 꽃이로구나, 오늘밤 내게 수청을 들어라
옛? 저는 기생이 아닙니다
알아! 그러니까 내 소첩노릇을 하란말야. 우리집 사람은 아직 한양에
머물러있고 나혼자 왔으니 뭐 이 관가의 안주인노릇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있단말야
저는 죽어도 싫습니다
허- 고집부려야 소용없어, 여기 한번 들어온 이상은 내 물건이니까
원님은 백성을 다스리라는 것이지 규중처녀를 강간함은 옳지 못하다고
아뢰오
호- 얼굴도 예쁘려니와 말도 잘 하는군
밤이 되어 청수는 술상을 차려 오라고 해서 먹은 다음 토인이
이부자리를 깔고 문을 꼭꼭 잠근후에 옷을 벗고 미랑의 옷도 벗기면서
자- 첫날밤을 치루자고, 아직 사내맛은 모르겠지!
하고 능글맞게 덤벼들었다. 미랑은 반항하고 소리쳐 울면서
이게 무슨 짓예요. 정히 그렇다면 육례를 갖추어서 저를 데려오시든지
하지 이런 무례한 일이 어디 있어요
하고 발악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응 그런 예법은 차차 할셈치고, 오늘밤은 그대로 즐기자. 상놈에게
출가하는 것 보다 이런 원님에게 몸을 바치는게 영광이 아니냐
손목을 턱 잡고 끼어 안으면서 은근하게 말하였다. 미랑은 뿌리치고
싫어요 난 죽어도 싫어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청수는 힘으로 미랑의 옷을 벗기고야 말았다.
미랑은 발버둥을 치고 손으로 원님의 얼굴과 가슴을 밀었으나 결국 약한
여자라 강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청수가 정신없이 미랑을 능욕하고 있는데 미랑의 몸이 점점
차디찬 것을 느끼었다.
그리고 꼼짝하지않고 있어서 아마 미랑도 이제는 단념학 좋아서 가만히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의 몸이 굳어진 것을 알고 입에
입을 대보니 숨소리가 없다. 그는 깜짝 놀래서 미랑을 흔들었으나 눈을
감은채 아무 반응이 없다.
기절한 것인가 하고 주무르고 야단이었으나 소용이 없다.
토인과 아전을 불러서 응급 치료를 해보나 깨어나지 않고
숨이 끊어졌읍니다!
하고 아전이 말하였다. 옷을 벗은 미랑의 시체는 처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청수는 그동안 모르고 시체와 관계하고 있었다. 이것을
생각하니 찬물을 끼얹는 듯 몸서리가 났다. 그는 비로소 가기가 너무
과도하게 했다는 후회의 가책을 받았고 처녀하나를 죽인것이 무서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새벽에 그 집으로 시체를 옮기게 해라. 자결을 했다든지 기절을
했다든지 좋도록 말해라
그 이튼날 새벽에 임원의 집에는 미랑의 시체가 운반되었다. 이런
기맥힌 일이 어디 있을것인가. 청천의 력력도 분수가 있지 어제까지
멀쩡한 딸이 죽어서 송장이 되어 오다니 원통절통한 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중호는 시체를 안고 통곡하였다.
대관절 왜 죽었단말요?
사령에게 물으니
글쎄 원님께서 귀애하시는데 밤중에 자결을 했는지 기절을 했는지
모릅니다
고 대답하였다.
그럴 리가 없다. 필유곡절이다
임원은 미친듯 관가에 들어갔다. 군노사령이 막고 때리는 것도
무릅쓰고 들어가서
이놈아! 내딸을 왜 죽였는지 말해라!
하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나 원님은 나오지도 않고 들은척 하지도 아니하고 임원은 쫓겨
나오고 말았다.
사흘후 미랑의 상여는 동네를 지나서 북망산으로 향하였다. 고을
사람들도 동정해서 눈물을 흘리었다.
원님이 수청들라고 하는걸 듣지 않아서 인거야
강간하는데 기절한거래
자결을 했다고도 하던데
아무튼 억울한 죽음이지 뭐야
이번 원님은 아주 고약하대
민심은 요란하였다.
장례를 치루고 임원은 날마다 관가에 들어가 미친듯 호통을 치고
원놈 나오너라 내딸을 왜 죽였는지 알자!
하고 소리쳤다.
청수는 임원이 날마다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굴어서 소요스럽기도
하려니와 이렇게 하면 나쁜 소문이 더 퍼지는 것이 두려워서
네 그놈을 잡아 가두어라
하고 명령하여서 임원은 마침내 잡혀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놈아 왜 나를 가두는거냐?
옥중에서도 미친듯 날뛰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의 비통은 더 말할것이 없었다. 미랑이 참혹하게
죽은데다가 그 아버지까지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될때 분하고 원통하나
호소할데가 없었다. 그야말로 사또나 임금님이나 그 위에 가서
말해야겠는데 그런 길도 없으려니와 말한댓자 원님 편을 들것이요 소용이
없을것이 뻔히 아는 노릇이다. 백성의 억울한 것을 호소할데가 도무지
없었다.
옥에서 나오게 하느라고 뒤로 아전들에게 운동한는데 돈과 전답이 많이
없어졌으나 아전들도 그럴듯이 말하면서 먹기만 하고 임원을 내주지
아니하였다.
임원은 분통이 터져서 음식도 못먹고 잠도 자지 못해서 그만 병이 덜컥
나고 말았다.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임원이란 놈이 다 죽어가는데 어찌 하오리까
이방이 원님에게 물었다.
음- 그럼 내보내야지, 또 여기서 그놈마저 죽으면 말썽이 많을테니
3.
임원은 떠메여 옥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그는 맥이 없고 다 죽어가는
것이었다. 중호는 애가 타서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가서 좋다는 약을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로 점점 병은 침중해졌다.
어느 비오는날 밤중이었다. 임원은 아내와 아들이 옆에 있는데 눈을
감고 죽은듯이 있다가 겨우 눈을 떠서
중호야 원수를 갚아라
하는 말을 겨우 남기고 운명하고 말았다.
중호와 그 어머니는 시체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울고 울어도 원한이
풀리지 아니하였다. 한집안의 귀한 두 목숨이 생으로 억울하게 죽었으니
그럴 수 밖에.
그들고 가까운 서민들은 동정을 하고 장례식에 참례했지만 원님의
불평을 노골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말을 해도 잡혀가서 볼기를 맞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관리들의 비행으로 갖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하고싶은
말이많지마는 말도 자유로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 쳐다보고 한숨만
쉬는 것이었다. 과연 불쌍한 백성들이었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중호와 그의 어머니는 맥이 탁 풀리고 텅빈 집에서
울기만 하였다. 그 어머니는 심화가 나서 누워버리고 말았다. 중호는
아버지가
원수를 갚아라
하는 유언을 날마다 속으로 되풀이하였다.
그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주야로 궁리해 보았다 원님에게 가서 그를 푹
찔러죽이는 것이 제일인데 칼을 품고 몇번 가 보았으나 얼씬도 못하게
경계가 삼엄하였다. 자칫하면 또 잡히어 갇히는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몇달후에 갑자기 원님 청수는 여기를 떠나서 한양으로 갔다는
소문이 들리었다. 원님이 떨어진줄 알았는데 웬걸 내직으로 영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도도 있지만 여기와서 백성에게서 착취한 재물로
상관에게 뇌물을 주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간 것이었다. 이렇게 악독한
관리라 권세를 잡아서 나라는 어지러워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어
허덕이는 것이었다.
중호는 원님 청수가 서울 한양으로 갔다는데 실망을 하였다. 그래도
여기 있어야 어떻게든지 원수를 갚을 기회가 있을터인데 먼데로
가버리었으니 기가 막히었다.
그러나 어찌했든 그놈을 따라가서 어떻게든지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양에 가기로 결심하였으나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기가 차마 어려웠다. 그렇다고 집에 그대로 엎드려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 얼마동안 제가 한양에 갔다가 오겠읍니다
한양에는 왜?
그 원님놈을 만나서 원수를 갚고 오겠읍니다
아니 나이 어린 네가 어떻게? 도리어 위험하지 않으냐?
염려 없읍니다. 다 생각이 있읍니다. 다만 어머님을 혼자 두고
떠나기가 차마 죄송하고 불효 막심이오나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유언도
있고요, 지하에 있는 누이를 생각해서도 기어이 원수는 갚아야겠읍니다
오냐 그렇기는 하다마는.... 가면 몇달이나 걸리겠니?
몇달 가지고는 안될 것입니다. 몇해가 걸릴지- 적어도 일년은 넘을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죽지나 아니할지-
맘을 튼튼히 잡수시고 제가 원수를 갚고 올때까지 꼭 살아 계셔야
합니다
오냐, 그럼 내 걱정은 말고 갔다가 오너라
중호는 땅을 팔아서 노자를 두둑히 만들었다.
괴나리봇짐을 해서 등에 짊어지고 열여섯살된 소년은 집을 떠나게되었다.
어머니는 간신히 일어나서 대문 밖까지 나와서 아들이 가는 것을
작별하였다.
모자는 붙잡고 한참동안 울었다. 이웃집 수동이 어머니에게 집일을
신신당부하였다.
웬만하면 어머니도 한양으로 모셔가도록 하겠으나 얼마동안만 참으소서
중호는 그리운 집과 고향을 떠나서 들길 산길을 걸어갈 때 눈물이
발자국마다 고이는 것 같았다.
오냐 맘을 독하게 먹자!
한양길을 향해서 날마다 걸었다. 가다가는 주막에서 자고 산설고
물설은 타향의 길을 가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하늘께 빌었다. 서울 근처에
가서는 어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입었던 옷을 다 내버리고 누이 미랑의
옷을 가지고 온 것을 바꾸어 입었다.
머리는 칭칭 따아서 자주 댕기를 드리고나니 한다하는 처녀가 되었다.
중호는 이제부터 여자 행세를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야 원님 청수에게
가까이 갈 수가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중호는 미랑을 닮아서 얼굴이 예쁘고 살결도 곱고 목청도 아름다워서
누가보나 사내로 생각할 수 없을만치 가쪽같았다. 한양성으로 들어오니
만호 장안은 어마어마하였다.
음- 여기가 임금이 계시고 모든 정승들이 사는 곳이로구나, 우리
나라를 다스리는 수도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보다도 여기는
내 철천지 원수, 불공대천지 원수가 있는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반갑고 피가 전신에서 끓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늙은이 내외가 사는 정갈한 집에 사처방을 얻어서
돈을 후히 주고 숙식을 하도록 하였다.
처녀는 어째서 혼자 한양엘 왔노?
저- 시골서 지내기가 갑갑하고 여기와서 발천(發闡)을 하려고요 뭘
했으면 좋을까요?
글쎄 무슨 재주가 있는지.....
저는 가무(歌舞)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생이 될까 합니다
응- 처녀같은 얼굴이면 훌륭하지
그때 기생이란 지조가 있고 가무만 숭상해서 천대를 받지 아니하였다.
중호는 노파를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
어머니처럼 대접하니 노파도 딸처럼 귀여워하였다. 그 노파와 수소문해서
가무를 가르치는 선생을 찾았다. 남자선생, 여자선생, 두 사람에게
노래와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재주도 비상하지마는 일편단심 지성으로
배우니 그의 가무는 출중하게 날마다 장족의 진보를 하였다.
참 우리가 많이 가르쳐 봤다마는 너같이 빨리 능숙해지기는 처음이다.
정말 천재로구나
이렇게 배운지 일년이 되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성껏 배웠다.
봄날이나 가을달밤 같은 때는고향에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이만하면 인제 기생으로서 나설 수 있다. 장안에서는 뽑히는 기생이
될 것이다
중호는 조그만 집을 하나 장만해서 독립의 생활을 하기로 하였다.
그때는 기생이 무슨 요릿집이나 그런데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손님이
찾아오고 대가의 연회에나 대궐에 간혹 불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중호는 집을 구하되 원님 청수의 집 근처로 하였다. 청수의 집은
소슬대문에 굉장하였고 조사한 결과 내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으며 역시
풍류남아로 기생집 출입이 잦다고 하였다.
계집애 하인을 하나 두었다. 중호보다 한두살아래인 처녀인데 먼저
주인집 노파의 조카딸이었다. 집안이 간구해서 시집보내기전 시중을 하게
하였는데 다른집 같으면 보내지 않겠지마는 여기만은 전부터 잘알고
친한고로 보낸 것이다.
중호의 예명은 설죽매(雪竹梅)라고 지었다. 눈속에 청청한 대나무와
눈바람 속에서도 피어나는 매화의 어기찬 지조를 상징하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다. 설죽매는 원체 유식한지라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쓰고 그동안
그림도 배웠다.
설죽매같은 기생은 장안에 없다!
이런 소문이 차차 퍼졌다. 거문고 가야금도 일등 기생만 못지
아나하였다.
살림하는 계집애 이름은 국희(菊姬)라고 하였다.
퍽 얌전하고 예쁜 처녀이었다.
4.
설죽매와 국희는 딴방을 쓰고 따로 잤다. 그러나 조석상대를 하고
지내니 자연 정이 들고 말았다. 국희는 설죽매가 남자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치 못하였다.
설죽매의 소문이 나자 장안 풍류남아와 화랑들이 꿀종지에 개미 모이듯
하였다. 그들은 설죽매에게 반해서 어찌할줄을 몰랐다. 재색이 겸비한
기생은 드문데 설죽매는 가무니 서화니 음률이니 뭐나 다 잘하였다.
설죽매! 설죽매!
장안에는 설죽매로 소문이 파다하고 기생계에 꽃이요 뿔이 되었다.
중호인 설죽매는 그렇게 유명해지는 것이 그다지 반가울 것도 없고
귀찮기만 하였으나 다만 청수를 만나자는 그것 뿐이었다. 오는 손님은
설죽매를 건드려 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패물이니 초피니
수달피같은 선사도 하고 돈을 물쓰듯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안의 부호가
자제도 있고 높은 벼슬아치도 있는데 대개는 훌륭한 남자이었다.
설죽매는 그들을 속이는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여보 설죽매- 나하구 같이 삽시다. 살림은 그대가 원하는대로 차려
줄테니
이렇게 말하는 사내가 한둘이 아니었다.
단 하루밤만 자면 소청대로 뭐든지 들어 줄테요
이렇게 몸이 닳아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달이 지나도 청수는 오지
아니하였다. 그야 누구를 중간에 넣어서 오도록 할 수는 있지마는 그
보다는 제발로 걸어 들어오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끈기있게
기다리었다. 그도 풍류남아요 더구나 자기집 근처니 아니올 리가
만무하다.
아씨는 어쩌문 그렇게 사내들한테 환심을 세세요, 정말 부러워요
국희가 어느날 밤 설죽매가 누워있는데 옆에 와서 말하였다.
그런데 부러울 것 없다. 나도 얼마하다가는 그만 둘 작정이다.
여인이란 그저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살림하는게 제일이니라
국희는 이야기하다가 쓰러져 누워서 잠이 들었다. 색색자는 처녀의
얼굴은 한층 더 아름다웠다.
국희는 잠결에 중호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중호는 무의식중에 국희를
꼭 끼어않았다. 잠이 깬 국희는
난 시집안가고 언제나 아씨와 같이 살테야요
하고 정답게 말하였다. 그들은 서로 이상한 애욕이 통하는 것이었다.
응- 우리 둘이서 살자
아씨가 혼인하면 어떻게 해요?
응 그럴 리가 없다
포옹하는 그들은 서로 이상한 감촉을 받았다.
어서 네방에 가서 자거라
싫어요. 난 여기서 잘테야요
국희는 그의 품으로 버썩 버썩 달려 들었다. 중호도 이제는 열일곱살-
한참때의 사내로 아리따운 처녀를 품에 안고 있으니 정욕이 발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국희도 설죽매가 여자인줄 알면서도 이상하게 끌리는
것이었다.
중호는 국희를 밀치면 또 덤벼들고 해서 밤새껏 잠을 못자고
고민하였다.
여름 어느 날이었다.
종내 청수가 설죽매의 집에 왔다. 같은 벼슬아치인 사람과 둘이서
놀러왔다.
수인사가 끝난 후 청수는 설죽매를 한참 바라보더니
어디서 많이 본듯이 낯이 익숙한데
하고 무슨 기억을 더듬는둣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전에 강간한 처녀
미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중호는 마침내 주야장천 생각하고 기다리던 원수를 만나니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울렁거리었다. 더구나 그가 유심히 처다 보는데는 그럴 리가
없지마는 혹시 본색을 눈치챌까하는 염려도 없지 아니하였다.
술상이 들어온후 그들은 술을 마시고 나중에 설죽매의 가무와 음률을
보고 들은후에 청수는 호색적인 눈을 번쩍이며
아- 이런 명기가 장안에 있는 줄을 몰랐군!
하고 감탄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장안에 저다지 고귀하신 화랑이 계신줄은
몰랐읍니다
설죽매은 청수에게 추파를 건네며 아양을 떨었다. 사내를 녹이는
애교이었다. 밤 늦게까지 놀다가 갔다.
그다음은 청수 혼자서 왔다. 나란히 붙어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는데
설죽매는 이 놈이 자기집 재산을 다 빼앗고 누이와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는 것을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으나 참고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그후 청수는 몸이 닳아서 며칠에 한번씩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답게 어떤 때는 쌀쌀하게 하여서 몸이 바싹 달게되었다.
청수는 죽을둥 살둥 모르고 덤비는데 중호는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지마는
좀더 애를 태우고 뺏긴 재산도 찾고 또 탄로가 안되도록 계획적으로
교묘하게 하려고 조급한 것을 참고 참았다.
중호는 몰래 날쌘 칼을 갈고 갈아두었다. 그리고 청수가 은금패물이니
돈이니 많이 가져오도록 하였다. 장차 몸을 허락하고 소첩으로 살림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청수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갖다가 바치었다.
그만해도 중호는 자기집 재산을 찾고도 남았다.
대관절 어느날이나 첫날 밤을 치룬단 말요
예 좋은날을 택해서 오시게 하죠. 며칠만 기다리시오
이거야 어디 사람 피가 마를 노릇이로군
그래서 결국 날자를 정하고 말았다.
그동안 이집은 팔고 중요한 물건은 국희의 집으로 옮기고
모든것을 비밀로 하라고 하였다.
그날밤이 되었다.
국희는 어디갔소?
집에 보냈어요. 오늘밤은 우리 둘이서 싫것 맘놓고 지냅시다요
응- 잘 생각했어. 과년한 처녀가 바람나면 안 될테니까
중호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단둘이서 주안상을 차려놓고 마시고
먹었다.
오늘은 전에없이 예쁜데
화장을 농후하게 한 설죽매는 요염하게 예뻤다.
그런데 얼굴에 바른분이 푸르게 뵈니 웬일요?
사실 중호의 얼굴에는 살기가 등등해서 푸른 빛이 났다.
암만해도 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야, 생각은 나지 않지만.....
세상엔 비슷한 얼굴도 많겠죠
자- 거문고나 한번 타오
예-
설죽매는 거문고를 놓고 섬섬옥수로 타기 시작하였다. 애틋한
봉황곡(鳳凰曲), 비곡인 제류곡(堤柳曲), 원한이 사무친 황죽곡(黃竹曲)
등을 타고 맨 나중에 충천곡(衝天曲)을 타는데 이것은 장엄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맨나중에 설죽매는 힘껏 줄을 타다가 하나를 홱 끊어
버리었다.
아- 왜 그러우
너무 힘껏 타다가 그랬어요
청수는 웬일인지 가슴이 뜨끔하고 어떤 불길한 예감과 공포와 불안이
치밀었다.
자- 그만 잡시다
예-
그럼 옷을 벗읍시다
금침을 깔고 청수는 옷을 벗고 설죽매도 겉옷을 벗고 속옷만 입었다.
품속에는 갈고 갈았던 칼이 들어있다.
그들은 나란히 누웠다. 촛불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흔들하고
있다. 밤은 깊고 고요하다.
5.
청수는 설죽매를 끼어안고 입을 맞추고 야단이다.
좋아서 어찌할줄을 몰랐다.
설죽매는 가만히 떠밀면서
한가지 부끄러운 소청이 있읍니다. 다른게 아니라 저희집에 대대로
내려오는 업원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첫날밤에 남자가 여자위에 올라 와서
상관하면 반드시 그 사내가 복상시(腹上屍=배위에서 죽는것)가 됩니다.
그래서 첫날 밤만은 여자가 남자 배위로 올라가서 관계하는 전례의 풍습이
있읍니다. 오늘도 그렇게 해주세요
하고 말했다.
허- 이상한 미신도 다 있군,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청수는 이 아리따운 여인과 속히 육체의 관계를 하고 싶은 욕심뿐이라
그런것 저런것 분별한 새가 없었다.
설죽매는 청수에게 올라가서 그 배를 타고 앉자마자 난데없이 뻔쩍이는
칼을 대며
네 이놈아! 나를 몰라보겠니?
하고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중호는 인제 호랑이가 개를 삼키려고 타고
앉아서 으르렁 대는 것같은 쾌감을 느끼었다.
아! 이게 무슨짓야, 아니 장난인가?
청수는 놀래면서 반신반의 하였다.
네가 **고을 원으로 왔을 때 미랑이라는 처녀를 강간해서 죽였지--- 또
그 아버지 임원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가 죽였지--- 이놈 나는 그 미랑의
사내 동생이요, 임원의 아들이다. 너를 만나서 오늘 이런 원수를
갚으려고 여복을 하고 공부를 해서 기생이 되었다. 이놈 알겠니, 너는
내손에 죽어야한다!
아! 아! 네가 바로!
청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렇다- 너를 죽여 오장육부를 씹어도 시원치 않다!
사 사 살려다구, 그럼 네 청이면 뭐나 다 들어주고 우리집 재산을 다
주마
듣기싫다! 나는 다른것보다 네 피를 보고싶다!
저 저 정말이냐?
하면서 갑자기 설죽매를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설죽매가
뒤로 둥그러지자 이번엔 청수가 그의 배를 타고 올라앉아서 손에 쥔 칼을
빼앗으려고 하며
흥! 네놈한테 내가 죽을줄 알고!
하면서 호통을 친다. 칼만 빼앗기면 도리어 중호가 죽을 판이었다. 그는
다시 힘을 내어 청수를 박차버리고 일어섰다. 청수는 일어섰다.
용호상박이라더니 두 사람은 마주서서 으르렁대고 노려 보는데
이놈아 네가 죽인 누이와 아버지의 혼령이 지금 나를 도우신다! 너는
내 칼을 받아라!
하고 칼로 찌르려는 무서운 기세다. 청수는 술도 취했거니와 너무도
뜻밖의 일에 부딛혀 흥분이 되고 또 양심의 가책도 있어서 공포에 떨면서
그 칼을 피하려고 비슬 비슬 하였다.
이놈 네가 나를 죽이려다가는 네가 죽을테니 그 칼을 놓고
이야기하자.....
청수가 위협하는듯 애원하는듯 부르짖었다.
뭣이 이놈아! 그래도 네죄를 생각지않고 살려고 하느냐? 나는 너를
죽이고 그 피를 마셔서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살기찬 눈으로 쏘아보는 설죽매의 얼굴은 무슨 귀신같이 무섭게 보였다.
여인의 머리와 옷은 흩으러지고 이를 가는 입이 무슨 요귀나 마녀같이
독하게 보였다. 청수는 소름이 끼쳐 전신을 떨었다. 그 설죽매가 바로
자기가 강간하다가 죽은 미랑의 그 무서운 얼굴과 똑 같았다.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갔으나 대문이 잠기어 마당으로 후원으로
도망하는데 설죽매는 유유히 그를 쫓아다니며 칼을 겨누었다. 호랑이게게
쫓기는 개나 뱀에게 쫓기는 개고리나 고양이에게 노림을 받는 쥐와
같았다. 청수는 숨이 차서
야 야! 사람 살려라, 나를 살려다구!
하고 소리쳤으나 이집은 이웃에 들리지 않는 안윽한 집이었다.
오냐 죽어서 저승에 가서 우리 누이와 아버지를 만나보아라! 거기가서
한번 더 혼이 나야한다
중호는 비호처럼 달려 들어서 칼로 그 배를 찔렀다.
아이쿠!
중호는 다시 그 배를 타고 앉아서
이놈아! 이 원수놈아!
하고 칼로 그 목을 찌르고 그 가슴을 찌르고 난도질을 하였다.
청수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눈은 뒤집어졌다.
조금후에 아주 죽고 말았다.
응-
하고 중호는 일어나면서 죽은 원수를 볼때 어깨의 무거운 짐이 벗어지는
것같고 시원하였다. 그리고 누이와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누나! 원수를 갚았읍니다!
하고 울면서 소리쳤다.
닭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었다. 중호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소매를
걷고는 청수의 시체를 끌어서 미리 뒤 울안에 깊이 파두었던 땅속에 넣고
그 옷이니 신이니 갓이니 전부 함께 파묻어 버리었다. 누가 보던지
이속에 송장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도록 감쪽같이 하였다.
중호는 이제 할일을 다하였다는 듯 설거지를 하였다. 피묻은 데를 씻고
아무 표적이 없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는 간수해 두었던 남복을 갈아 입고 머리도 총각머리를 땋아서
검은 갑사댕기를 드리었다. 설죽매라는 여자가 금방 중호라는 남자로
변해 버리었다.
새벽이 되어 동이 트자 이집에서 나갔다. 중호는 국희의 집으로 갔다.
국희는 뛰어나오면서
아니 왜 남복을 하셨어요?
하고 눈이 둥그레진다.
지금까지 국희를 속여 왔지만 나는 남자요 나중에 가서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할테니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말고 우리 살던 집에도 가지 말우,
그리고 내가 올때까지 시집가지 마시오. 어쩌면 나하구 백년가약을
맺을지 모르니...
중호의 말에 국희는 반가운듯 부끄러운듯 붉어지는 얼굴을 푹 숙이었다.
그날로 중호는 고향으로 와서 집을 팔고 땅을 팔고 모든 것을 정리해서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집과 터를 장만하고 국희와
혼인해서 행복스럽게 살았다.
<끝>
<제 칠 화> 名將逸話(명장일화)
將軍과 義盜
山中奇人
고려(高麗) 말년 공민와(恭愍王) 초년이었다.
최형(崔瀅,최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 이십오세였는데 인물이
뛰어나게 잘났다. 육척이 넘는 키에 힘이 장사이며 기개가 호협하고
국량이 웅대하여 기울어지는 나라의 형세를 한몸으로 지탱하겠다는 장한
뜻을 품고 모든 선비들의 문약(文弱)에 흘러 시(詩)니 부(賦)니 음풍
농월하는 꼴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으므로 붓을 던지고 칼을 잡기를
결심하였다. 칼과 활을 벗삼아 죽총(竹叢:작은 대나무 숲)을 치달려 버들
푸른 정자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눈쌓인 높은 산에서 사슴을 쏘아잡고
휘파람 한소리로 호연한 기개를 뽐내는 것이 젊은 남아의 통쾌한
노릇이라는 호담한 생각으로 사냥 다니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로 삼았다.
어느 늦은 가을, 활과 전동(전통-箭筒:화살통)을 메고 사냥을 나섰다.
송악산에서 여러날 돌아 다니다가 차차 뻗어져 삼각산까지 왔다. 그러나
좀체로 짐승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오랬동안 돌아다녀도 토끼 한마리
못만나니 초조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해서 낙엽 쌓여있는 바위 위에 앉아
쉬노라니까 마침 언덕밑 냇물가에 큰 사슴 한마리가 물을 먹고 있다.
새정신이 번쩍 난 최청년은 급히 활을 다려 겨냥을 바로 잡아 깎지손을
떼었다. 번개같이 나는 살이 사슴의 뒷다리를 맞혔다. 사슴이
고꾸라지더니 다시 일어나서 상한 다리를 질질끌며 달아난다. 그러나 그
닫는 걸음이 어떻게 빠른지 전동에서 화살을 뽑아 내는 사이에 벌써
사정(射程)밖에 벗어져 있다. 최청년은 급히 뛰어 사슴의 뒤를 쫓으며
둘 살을 쏘았다. 사슴의 배를 꿰뚫었다. 사슴은 거꾸러졌다.
발버둥질을 하며 딩굴다가(뒹굴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졌다.
최청년이 달려가서 사슴이 떨어진데를 내려다보니 양편 절벽이 몇백길이나
되는 깊은 구렁 밑에 가서 사슴은 네 발을 하늘을 가리켜고 쳐박혀있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발을 부쳐 내려갈 수가 없다. 멀리 아래로
내려가서 골짜기를 따라 올라오기 전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자니
십리 길이나 실히 될 것같이 멀다. 도저히 남은 해로는 어둡기 전에 저
사슴 있는데를 대어갈 것같지 않다. 최청년은 어떻게 하나하고 서서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에 건너편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한 청년이 있었다.
어- 오늘 내 식복이 터졌나부다. 사슴의 피와 고기를 실컨 먹을 일이
생겼군
하더니 꽁무니에 차고있던 긴 줄 사다리를 꺼내어서 한편 끝을 석벽위에
서있는 나무에다 감아 매고는 한편 끝을 골짜기 밑으로 내리고 그것을
타고 경각간에 골 바닥으로 내려간다. 그러더니 사슴을 타고 앉아
허리에서 칼을 빼어서 사슴의 염통자리를 찔러 피를 나게하고는 품에서
표주박을 꺼내어 사슴의 심혈을 그뜩 받아 죽 마시고 또 받아 먹더니
최청년을 치어다 보며
사슴의 피를 잘 먹도록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최청년은 그 광경을 보니 너무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과 같이 내려갈 도리가 없다. 괘씸하고 분한 마음이
치밀지마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만 내려다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놈아 보아하니 너도 산에 많이 다니는 놈인데 그래 남이 잡은 사슴의
피를 너 혼자만 먹는단 말이냐?
그 사람이
허허허 아무리 당신이 잡았다고 해도 당신이 조처할 수가 없어
내어버리는 사슴의 피를 내가 좀 먹었기로 어떻단 말이요. 당신이 여기
내려오신다면 내가 두말없이 물러나겠소. 그러나 당신이 나처럼 줄
사다리를 가지지 못한 바에는 저 아래로 내려가서 골을 따라 예까지
올라올 수 밖에 없지 않소. 그러자면 오늘해로는 못오실 것이 아니요.
이대로 버려두면 밤에 호랑이나 늑대가 와서 먹어 버릴 것이니 어차피
내버리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된 터에 내가 좀 먹는다고 무슨 잘못이
되겠소
늠실 늠실 조롱을 한다. 그러더니 사슴의 다리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썩
베어내더니 날것으로 뭉텅 뭉텅 배어서 먹는다. 이일을 당한 최영청년은
당대에 호걸로 자처하여 누구에게든지 조롱이나 업신여김을 받아 본 일이
없던 한량으로 오늘 이와같은 모욕을 당하니 분한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놈 고얀놈 같으니 뉘 앞에서 감히 되지못한 아가리를 놀리느냐
너같은 놈은 할 수 없이 버릇을 가르쳐야 하겠다
하고 활에다가 살을 멕였다. 이것을 본 그 사람은 더욱 놀리는 말로
여봅쇼. 너무 그렇게 뽐내지 맙시오. 내가 이 사슴처럼 당신 화살에
겁낼 줄 아시오? 어림도 없소. 어디 화살 있는대로 연발을 해서 내몸에
스치기라도 하면 내가 이 사슴을 져다 바치고 백배 항복을 하겠소
하는 것이었다. 최청년은 분이 더욱 돋구어져서 시위에 얹힌 살을
쏘았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 사람은 슬쩍 비켜서고 화살은 사슴의
머리에 가 박힌다. 최청년은 당황했다. 활을 배운 이후에 처음 당한
일이었다. 이러한 재주있는 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대로 말
수도 없다.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대를 쏘았다. 이번에는 그 자가
몸을 훌쩍 솟구치더니 나는 살을 덤썩(덮썩) 쥔다.
어- 무서운 활이다. 하마터면 내 가슴을 뚫을뻔 하였는데
하며 화살을 쳐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최영은 그만 맥이 탁 풀린다. 이
사람에게는 활로는 한낱 장난거리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멍하니 섰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본 그 사람이
이만하면 재주도 서로 알만 하니 우리 그만 사화(私和:나쁜감정을
풀어버림)합시다. 내가 이 사슴을 가져다 드리지요
하더니 그 줄사다리를 홱 잡아 젖히니까 나무에 매었던 것이 풀려진다.
그리더니 그 줄을 서름서름해서 최청년이 있는 편으로 훌쩍 치뜨리니까 그
줄 끝에 달려있는 쇠로 만든 낚시처럼 꼬부린 갈쿠리가 돌뿌리에 컥하며
박혀서 얽혀진다. 그것을 팽팽히 당겨보더니 사슴을 칡넝쿨로 짐빵을
해서 짊어지고 성큼성큼 올라온다. 최청년은 마음으로 굉장한 힘과
재주를 탄복하며 멀거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柳春乭
잠간사이에 다 올라온 그 사람은 사슴을 내려놓고 넙적 절을 하며
소인은 유춘돌이라는 도둑질로 생업을 삼는 놈이올시다. 그러하오나
몇해를 두고 쇠약해진 이 나라를 바로잡아 일으켜서 저 무도한 원나라의
압박을 물리치고 자주독립된 나라을 만들수 있을만한 호걸을 만나기를
원했더니 오늘이야 서방님을 뵈오니 소인의 소원이 이루어졌읍니다
하는 것이었다. 최영은 모든 일이 뜻밖의 일이라 자연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상한 일을 당할 때 신경이 집중한 무인의 눈이란
가장 예민한 법이라 먼저 그 자의 인물됨과 기색을 날카롭게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긴장된 얼굴과 서릿발이 치는 눈으로 그 자의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키는 조그마하고 얼굴은 또렷하게 생긴 미남자이다. 어디 한곳
그와같은 절륜한 호용이 있어 보임직한 점도 없다. 그저 사근사근해서
다정스러운 인상을 준다. 나이로 보아서는 이십 전후밖에 더 보이지
않는다. 어느모로 보더라도 아무 적의가 없고 안상하다. 그것을 살핀
최형도 기색이 저윽이 부드러워져서
네가 도둑질로 생업을 삼는다고 하니 도둑놈으로서 이 산중에 무슨
일이 있어 왔으며 보아하니 네 용맹과 무술이 뛰어난 재주인데 왜 하필
도둑질을 한단 말이냐?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하오나 소인은 지극히 천한 백정의
자식이옵니다. 백정의 자식으로 무술을 안들 무엇하오며 효용이 있은들
어디다 쓰겠사옵니까? 오직 소나 잡고 키나 얽어서 생업을 삼기에는 싫은
생각으로 배운 것이 도둑질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소인이 도둑질을 해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한푼의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저 원나라 되놈의
것이나 왜놈의 재물을 훔쳐다 살아가옵지요. 그리하옵고 세상 사람들의
너무나 심한 천대를 받기 싫어서 이너머 산골에다 초막을 지어서 이
세상과 격리해서 자유로 살고 있사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바른 일을 해야 하지않느냐, 비록 타국
사람의 물건이라도 평상시에 도둑하는 것이 옳지못한 일이란 말이다.
적대시해서 전쟁이라도 일어날 때에는 혹 살수도 있는 일이지마는
예- 지금 서방님께서 말씀하신 그점을 소인이 깊이 생각한 바이옵니다.
소인이 먼저도 말씀 여쭈었읍니다 마는 세상사람의 지독한 천대가 싫어서
심산궁곡에 외따로 살면서도 그래도 동족에게는 그 천대의 보곡을 해서는
안될 것을 깊이 명심합니다. 소인의 천대받는 것은 소인의
개인문제이옵지요마는 거기에도 불평이 있사온데 온나라가 되놈에게
짓밟혀서 상감님께서도 되놈의 손속에 꼼짝을 못하시고 그놈이 하라는
대로 하셔야 되오니 이 분풀이를 털끝만치라도 하고자 하는데에서 소인의
뜻을 정했던 것이옵니다. 더구나 되놈의 사신이라고 하는 놈들이 오기만
하면 갖은 토색을 다해서 우리나라의 좋은 물건만 뺏어가지 않사옵니까.
소인은 그 놈이 우리나라 땅을 떠나서 압록강만 건너 오면 뺏어가는
물품중에 가장 귀중한 것만을 훔쳐옵니다. 요만것으로 무슨 보복이라고
하오리까 마는 그래도 가장 작은 일이라도 소인이 혼자 힘으로 해왔던
것이옵니다
이와같은 문답을 하는 동안에 짧은 가을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있다.
춘돌이가
서방님께 여쭙기 황송하옵니다 마는 벌써 날이 저물어 가오니 산밑
인가까지 내려 가시기가 어려울듯 하옵니다. 소인의 집이 저 등너머
있사옵니다. 누추하오나 하룻밤 주무시고 가십소서
최청년은 그래도 도둑놈의 집에 갈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니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 날 저무는 것쯤이야 그리 걱정할 것
있느냐. 나는 염려말고 네나 가거라. 그리고 저 사슴은 네가 가져다
먹어라
하고 거절하였다. 춘돌이는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죄송하온 분부이옵니다. 소인은 어느때든지 서방님이 필요하실 때에,
대령하겠사옵니다
하고 다시 하직 절을 하고 사슴을 지고 내려간다. 최영청년도 걸음을
빨리 하여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을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두워진다. 앞에 산등이 가로 막혀진다. 그 등을 넘지 않고는
갈 수 없으므로 길이 넘는 샛대를 헤치고 막 산마루에 올라섰을때 별안간
먹장같은 구름이 희미한 초생달빛을 가리면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우르륵
천동을 한다.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같다.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그러나 잠시도 지체할 수는 없다. 발을 자주 놀려 내려오는데 우- 하면서
소나기가 막 쏟아진다. 위선 급하니까 큰 참나무 밑에 들어섰다. 바람이
몹시 몰아친다. 비맞은 나무잎이 전신에 휩싸 덮인다. 뼈가 저리게
춥다.
(어- 내가 너무 고집을 부리다가 이 소조를 당하는군. 그자가 간청할
때 따라가서 하룻밤 지날 것을)
하는 후회도 났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난데없는 불빛이 바로 마주
보이는 곳에서 반짝하고 없어진다. 절처봉생이었다.
(여기 인가가 있는 것을 몰랐구나)
입안의 말로 뇌까리며 그 방향으로 더듬어 걸어갔다. 큰 바위를 등지고
인가인 듯한 것이 있다. 그러나 아까 반짝하던 빛도 다시는 없으니
어느것이 바위인지 집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자 또 번개가
번쩍한다. 그 번개빛에 눈에 띄는 것이 튼튼히 해놓은 울타리와
사립문이었다. 굳게 닫혀 있는 사립앞에 다가서서
여보!
하고 불렀다. 그러나 비바람소리가 세차게 나는 때라 잘 들릴 리 없다.
두세번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다. 사립문을 밀어 흔들면서 다시
한번 크게 불렀다. 무슨 방장인지 문에 가려있던 것이 걷히더니 불빛이
환해진다. 그러더니 방문을 열고
거기 누가 오셨읍니까?
명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난다.
예 산에서 길을 읽고 향방을 몰라 하룻밤 드새우고 가려고 찾아
왔습니다
아이 가엾서라. 이렇게 풍우가 심한데....
하면서 달려나와 사립을 열어준다. 최청년은 전후 체면을 돌볼 여가가
없어 들어서면서 건너다 보니 십칠,팔세나 되어보이는 선녀같이 예쁜
처녀가
어서 마루로 올라오십시오. 옷을 저렇게 적시셨으니 오즉
추우시겠어요
예 고맙소. 뜰에서라도 비만 피하면 좋겠으니 염려마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니까. 아니오셨으면 모르겠으나 이 밤중에
더구나 이 심한 비바람에 뜰에 계시겠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 말씀입니까.
어서 올라 오십시오. 저희는 내외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손이라도 잡아 끌듯이 말한다. 최영도 하는수 없이 마루에 올라섰다.
흠빡젖은 옷에서는 물이 자꾸 뚝뚝 떨어진다.
山賊의 누이
처녀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새로 꾸며둔 듯한 바지 저고리를 내놓으며
우선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빨아 꾸민 것이라 더럽지는
않습니다..... 젖은 옷을 벗으셔야 추위가 놓이시지요
마치 친척이나 만난 듯이 친절히 말하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어찌되든
사양할 형편이 못된다.
지나가는 사람이 하룻밤 비나 피하고 가도 고마운 일인데 이같이
친절히 해주니 무엇이라 감사할 말이 없소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주인된 도리에 의당히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최청년은 얼른 옷을 바꾸어 입었다. 방안에서 옷 갈아 입기를 기다렸던
처녀는
어서 들어오십시오. 방이 누추합니다마는 추위를 진정하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하고 문을 열어 놓고 인도한다. 최청년은 속담에 절에 간 색시가
중시키는대로 한다는 격으로 별도리가 없다. 방에 들어서면서 방안을
살펴보니 놀라울만치 화려한 방치장이다. 분벽 사창으로 새로 보배를
하고 의장과 문갑도 고귀한 것들을 제자리에 깨끗이 놔두고 가장 구하기
어려운 서화로 꾸민 병풍이라든지 놋 촛대에 굵은 청심초를 켜놓아 낮같이
밝다. 처녀가 나가서 조금 있다가 밥상을 들고 들어와 손앞에 놓으며
마침 제 오라비가 나가서 안 돌아왔는데..... 차려두었던 밥입니다.
과히 식지는 않았읍니다. 시장하실 터인데 위선 요기나 하십시오
하고 술까지 따뜻한 것을 잔에 가뜩 부어 놓는다. 최영은 너무도 의외의
친절한 대접을 받게되니 도리어 이상스러운 생각이 든다.
대체 색시는 어떠한 사람이요? 이 첩첩 산중에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으니.....
어서 진지나 잡수십시오. 이야기는 나중에 드릴터이니
하고 또 술을 따라 놓는다. 여거푸 오, 륙배의 술에다가 밥을 달게 먹고
상을 물렸다. 아직 풍우는 그치지 않는다. 상을 물리고 나서 처녀가
공손히 앉더니
물으시던 말씀을 이제 대강 말씀하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
천한 무리 올시다. 그런데다가 부모가 구몰하게 되오니 남의 천대가 더욱
심하여 차마 배겨낼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제 오라비와 의논하고
차라리 사람 안사는 곳에서 비록 심한 고독을 받드라도 자유롭게 살겠다고
하여 여기 와서 남매가 의지해서 이렇게 지내고 있은지도 벌써 삼년이
되었읍니다. 제 성은 유가이옵고 이름은 추향(秋香)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빠되는 이는 어디를 가서 이렇게 늦도록 안돌아 오오?
마침 무엇을 좀 사오겠다고 갔는데 오래지않아 올 것입니다
풍우가 이렇게 심한데 오기 어렵지 않겠소
늘 다니시어 익숙하니까 풍우쯤 몰아친다고 해서 오마한 것을 어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이방은 색시가 쓰는 방같은데 다른 방은 없소?
예 이방은 제가 거처하고 건너방은 오라비가 씁니다. 언제든지
오라비가 나갈 때면 문을 잠그기 때문에 부득이 제방으로 모셔들였읍니다
그 영리하고 명쾌한 언어와 옷입은 맵시라든지 앉은 태도가 도시에서
세련을 많이 받은 얌전한 규수에도 지지 않을만하다. 영롱한 눈과
아름다운 입술이 가위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다. 최청년은 마치 무슨
꿈이나 꾸는듯한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체면을 돌보아 마음을 꾹
누르고 여러가지로 캐어 물어본다.
나이는 몇살이나 되었소?
열일곱살입니다
그전에는 어디서 살았소?
서울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무슨 생업으로 이렇게 살아가오?
오라비가 벌이를 해오니까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수작하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문 열라는 소리도
없었는데 누가 뜰에서 마루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추향처녀가 일어서면서
최청년에게
아마 오라비가 돌아오나 봅니다
하면서 문을 열고 나서서
오빠 지금 오셔요. 그런데 옷을 저렇게 적셔서 어떻게 해요
오냐. 이 웃옷은 젖어도 관계찮다. 물방울이 굴러 떨어지고 스며들지
않는 우장옷이니까. 오늘 처음 얻어 입었는데 유삼에 대일 것이 아니다
하면서 웃옷을 벗어서 물을 홱 뿌리더니 추향에게 주며
어디서 손님이 오셨느냐? 네방에 누가 계신 모양 같으니
예 길을 잃으시고 우중에 찾아 오신 손님이 계셔서 오빠방은 문이
잠겼고 해서 부득이 제 방으로 모셔 들였어요
하는 추향이 대답에
잘 했다. 이 풍우중에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으신 손님이면 오죽
고생을 하셨겠니. 그래 진지라도 차려드리지 않고.....
예 오빠 저녁진지를 드렸어요. 오빠는 오시면 다시 짓더라도
그래야지 참 잘했다. 너도 인제는 한집안 주부노릇 할만치 자랐구나.
내 걱정이 덜려진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깜짝 놀라며
아! 서방님이 행차를 하셨습니다 그려. 그 험한 날씨와 어두운데
고생이 오죽 하셨겠습니까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낮에 사슴으로 해서 여러가지 사건이
있던 유춘돌이었다. 최청년도 밖에서 그들 남매가 얘기할때 어디서 듣던
음성이라고 생각하여 다소 의혹을 가졌던 바이었다.
어- 이것이 바로 네 집이었더냐. 참 세상 일이란 기묘하게도 되는구나
낮에 소인이 모시고 오려고 말씀을 드려도 거절하시게 날은 저물고 또
맹수들이 요사이 많이 나와 장난한다 하여 염려했읍지요마는 서방님께서야
설마 어떠시랴 하였었읍지요. 그러나 날씨가 폭풍우로 변하여서
근심하였습니다
길을 잃고 폭풍우를 만나눈코를 못뜨고 지척을 분별할 수 없어 이뒤
산등에서 나무밑에 섰으려니까 네말 안들은 것이 후회도 너더라. 그래
결국 너의 집에 와 이처럼 신세를 지게되니 이것이 심상한 인연이
아닐까부다
춘돌이가 추향을 돌아보며
이애! 내가 늘 네가 어떻게하든지 우리의 주인되실 양반을 구해서 몸을
의탁하고 살아가보자고 이야기를하면서 찾던 호걸을 오늘이야 뵙게도어서
더할 기쁨이 없다고 내가 사슴지고와서 말하던 서방님이 바로 이
최서방님이시다. 네 다시 절하고 뵈어라
절은 새삼스레 무슨 절이야 인제와서
추향이는 조금도 수줍어 하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오라비가 평생을 주인으로 모시려고 결심하였으면 저에게도 정성껏
받들어야하올 주인이시온데 어떻게 아무런 예가 없겠사옵니까
하더니 공손히 절을 한다. 최영도 앉아 받기가 안되어서 허리를 꾸부려
답례하였다. 춘돌이가
이에 우리 남매가 이 세상에 나온 후 오늘처럼 기쁜 날이 없지않으냐.
네 재주껏 음식을 좀 차려라. 그래서 우리가 두고두고 원하던 주인을
모신 첫날을 기념하자
추향이가 장문을 열더니 새로 지어두었던 의복일습을 내어 놓으면서
서방님 이것은 제가 배운 솜씨로 지어두었던 것인데 치수도 어디다
표준할 수 없어 함부로 제생각 나는데로 마른 것이라 맞으실지 모르오나
제가 처음 뵈옵는 정성입니다. 잎어보심이 어떠하올지?
하는 것이었다. 춘돌이가
참, 잘 생각한 일이다. 그러나 여자의 유념이란 남자로는 상상도
못하게 꼼꼼한 것이로구나. 어느틈에 이런것을 다 준비해 두었더란
말이냐
하고
서방님 옷을 갈아 입으십시오. 제 정성이 이만한 것을 통촉해
주십시오
오냐 입고말고 너희 남매만의 기쁜날이 아니다. 나에게도 다시 없는
즐거운 날이다
추향이는 최영청년의 말이 끝나자 부엌으로 내려가고 최영은 새 옷을
갈아 입었다.
義盜의 寶物
춘돌이가
술상 보아올 동안에 소인이 거처하는 방을 좀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소간 모아 둔 것이 있습니다
그래 참 너 거처하는 방을 보고 싶었던 터이다
유춘돌의 인도를 받아 최영청년은 건너방으로 갔다. 이 방이야 말로
당대의 비장품의 전당이었다. 방이 크기가 네칸이나 되임직한데 고려
국내에서는 얻어보기는 고사하고 들어도 못본 진기한 보물이 질서있게
벌려있다. 금은으로 아로새긴 교의에 호피(虎皮)를 깔아서 정면에
놓여있고 바른편에 옛 고구려의 지도가 걸려있다. 위선 춘돌이가
최청년을 정면 호피교의에 앉기를 권해서 좌정하였다. 다른 것보다
무인의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이 무기였다. 맞은편 벽에 걸린 집을
영롱하게 꾸민 칼에 눈이 멈추고있으니 춘돌이가 얼른 그 칼을 벗겨다
최영에게 드리면서
이것이 원나라 숭상르로 있는 탈탈(脫脫)이 지극히 사랑해 오던 보검인
이름난 칠성검(七星劍)이 올시다. 작년에 탈탈이가 요동을 순시할 때에
소인의 손으로 옮아온 것이옵니다
듣기에도 놀라운 일을 예사롭게 말하고 있는 춘돌의 얼굴을 다시 한번
건너다 보지 않을 수 없다. 칼을 받아보니 칼집에는 금은으로 아로새긴
두마리의 용의 머리와 입에 진주로 박아 북두칠성의 형체를 이루워 있다.
금으로 만든 환(環)을 지그시 누르며 칼을 뽑으니 검광이 무지개빛같이
찬란해 지며 눈을 현황케 한다. 최영은 칼을 들어 공중을 한번 죽
그어보니
휙
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지나간다.
어! 참 보검이로다!
하는 탄사를 아니 발할 수 없다. 다시 칼날을 불빛에 자세히 비쳐보니
금으로 칠성검이라고 새겨있다. 칼을 꽂아 춘돌에게 맡기고나서 많이
진렬해놓은 여러 무기를 살펴보니 모두 명물 아닌 것이 없다. 큰 궤도
여러개 있는데 모두 단단히 잠겨있다. 그중에 한 궤짝을 춘돌이가 열더니
서방님 이 궤속에 있는 것은 중국에서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도둑들이 도둑질할 때에 쓰는 기구와 그 방법을 설명해 놓은 비밀한
문헌들 입니다. 이것이 도척(盜拓)이 뒤에 내려오는 도둑의 종통을
전해온 것인데 인제와서 소인이 서방님을 모시게된 이후에는 필요가 없게
되었은 즉 돌려보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주 없애 버리면 좋지않겠느냐
안됩니다 도둑의 세상에도 의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통을 매우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더니 고구려 지도를 가리키며
서방님께서는 이 나라를 더는 몰라도 우리 선조가 이룩했던 고구려의
옛강토를 찾아서 자유 독립된 국가를 이룩하시는 대임을 이루실 큰 사업에
주인이 되시기만 원합니다
최영은 처음 만났을때 도둑놈이라는 말에 괘씸한 마음으로 대하던
마음이 일소해질뿐 아니라 그 애국지심과 넓고 큰 뜻에 감복하였다. 이
때에 추향이가
오빠-
하고 부른다.
오- 그동안 다 준비하였니
하고 두사람은 안방으로 돌아왔다. 정결하고 풍부한 만찬이 식탁에 그득
벌려 놓여있다. 자리에 앉은후 추향이가 술을 잔에 가득 따라 최청년에게
올린다. 최영이 잔을 받으며
이 술이 예사 손 대접하는 술은 아니겠지. 이름을 지어 먹어야 하겠다
추향이가 눈을 내리뜨고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을 못한다. 춘돌이가
왜 대답을 못 여쭈느냐. 서방님께서 네 심지를 들어 보시려고 하신
말씀인데
추향이가 겨우 고개를 들고
서방님을 제 일생동안 받들려는 첫번 맹세하옵는 잔이옵니다
어 고맙다. 이 인연은 예사의 연분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시하신
연분이다. 길이길이 굳게굳게 지키자
하고 죽 술잔을 비우고 자기가 병을 달래서 찬잔을 부어 추향에게 주며
네가 맹세하는 잔을 내게 주었으니 나도 그저 있을 수야 있겠니! 이
잔은 오늘날 너의 깊은 온정의 뜻을 가슴에 새겨 변함이 없기를 결심하는
표시이다. 사양말고 남김없이 마셔라
아무리 못먹는다 하온들 이 잔을 사양하올 법이 있사오리까
하는 추향이는 더욱 경건한 태도로 다 마신다. 이것을 본 최영은 더욱
유쾌하여 추향더러
네 오라비에게도 감사의 뜻으로 한잔 권하여라. 그리고 우리 삼인이
공동으로 오늘을 축복하는 잔을 들자
이와같이 쾌락한 주석을 가을밤이 거의 샐 때에야 끝났다. 춘돌이는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제방으로 건너갔다. 새금침을 내어펴고 서방님께 자리에 눕기를
청하는 추향의 민첩하고 영리한 모든 행동과 원래 아름다운 얼굴에 약간
주훈이 돌아 그 아리따운 태도는 일대 호걸인 최영청년의 풍정있는 신경을
흔들대로 흔들었다. 추향의 손을 끌어당겨 자리에 들어가니 그 다음 일은
두사람만이 알 일이다.
崔瀅의 兩參謀
변덕스러운 가을 날씨는 어제밤에 무슨 비바람이 있었더냐는 듯이 구름
한점없이 활짝개였다. 따스한 아침해가 높다랗게 올라온 뒤에 최영청년도
잠이 깨어서 일어났다. 추향의 정성스레 차린 아침밥을 마치고 난 뒤에
춘돌이가
서방님 오늘은 좀 쉬십시오. 소인은 무슨 조치 할 일이 있어 좀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한다. 최청년이
이애, 그 서방님이니 소인이니 하는 말은 인제는 고쳐라. 네 누이를
내가 비록 소실이지마는 데려온터에 그런 말들은 아예 하지마라
황송하온 말씀이옵니다. 차차 서방님께서 영귀하시오면 칭호도 자연
고쳐질 것이오니 아직은 저의 하는대로 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추향더러
내가 가면 모레 일찌기 돌아올 터이니 그리알고 조심해서 서방님
모시고 기다려라. 그리고 내방문 열쇠를 너에게 맡기니 혹 심심하시거든
모아둔 귀중품이나 보시게 하여라
하고 열쇠꾸러미를 내어주고 나가버린다. 최영은 일어나 뜰아래 내려서서
주위를 살펴보니 석벽밑에 의지해서 굵은 통나무로 우리를 짜서 지은 집에
굴참나무 껍질을 기와처럼 이어놓아서 가까이 와서 보지 않고는 사람사는
집이라고 알아볼 수 없다. 추향이에게
참 숨어살기는 십상 좋게 되었구나. 누가 이산중에 올 수도 없을뿐
아니라 설령 온다해도 멀리서야 어디 사람사는 집같이 보이겠느냐
예 과연 그런가 보아요. 여기 와서 있은지 삼년이나 되어도 서방님
오신 것이 처음이야요
하는 추향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더욱 화사하게 고와져서 사내의 마음을
충동한다. 최영은 추향의 허리를 덥석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애, 너와 이렇게 마주앉아 있으니 세상사가 다 꿈속 같구나. 그까짓
공명이니 사업이니 다 팽개치고 이곳에서 너와 일생을 이렇게 쾌락하게
지냈으면 무엇보다 행복된 생활이겠다. 너는 어떠냐?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저는 그말씀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서방님께서 용속한 범부로 허송생활하시는 저의 주인이
되시게는 목숨을 바치어서라도 아니할 것입니다. 저는 본래 지극한
천인의 자식으로 아무것도 배운 것은 없습니다마는 오라비가 여러 해를
두고 일대 영웅을 모셔서 이 나라를 중흥시키는 큰 사업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저에게도 의리에 사는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오라비의 그 높은 뜻을 저는 꼭 배워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저의
심혈에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추향의 이와같은 비분강개한 말을 들은 최영은 두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진다. 한낱 나이어린 천민의 딸로 이와같은 굳센의지를 가진
절세미인이 자기의 애첩이 되어서 격려하는 것은 몇사람의 동지를 사귄
것보다도 강렬한 의지와 힘을 도와주는듯하다.
어 네가 방가위지(方可謂之:진실로 그렇다고 이를 만하게) 최장군의
애첩될만한 여자이다. 나의 목숨이 있는데까지 중흥대업을 성취하고 말
것이다. 네 오라비와 한가지로 너는 나의 참모가 되어다오
이와 같이 즐거운 하루 해를 보내고 밤에는 춘돌의 방에서 각색진귀한
보물들을 고루 구경하였다. 이튿날은 추향의 청으로 사냥을 나가서 큰
곰을 한마리 잡았는데 추향의 신출귀몰한 표창술은 놀라운 것이었다.
추향은 시문에 대한 공부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 여러 방면으로 토론하는
아취가 진진하였다. 제 삼일 되던 날 식전에 춘돌이가 돌아왔다.
최영에게 문안을 드리고 추향에게
이해, 오늘은 이사를 해야 하겠으니 아침은 일찍 치우도록 하고 짐을
꾸려야 하겠다
하고 최영청년에게
오래 전부터 서울 채하동에 집을 하나 사 두었습니다. 인제 서방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 산골에서 잠시인들 더 있을 까닭이 없사오므로 제가
가서 대개 정돈해놓고 왔습니다. 추향이가 삼년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애처롭기도 하옵고 서방님께서 큰댁내왕하시는 데도 편리하실 듯 하옵니다
식후에 짐을 묶어 서울서 온 짐군과 교군으로 떠나서 서울(松都)
채하동으로 옮겨왔다.
추향의 일거일동은 빈틈없는 영웅 최영의 입에 혀와 같은 애첩이었다
이사 온 이튿날 춘돌이가
서방님 저는 항시로 모시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어느 때든지 대령하겠습니다. 이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은 서방님께
드립니다. 마음대로 쓰십시오
추향에게도 서방님 잘 받들라는 부탁을 하고, 나가버렸다.
그후 최영은 더욱 춘돌이의 모아둔 병서에 잠심 연구하여 무과에
장원하고 출사하여 점점 지위를 얻게 되었다.
오직 굳게 먹은 마음은 원나라의 기반을 벗고 자주독립하는 길로
기울였다.
그래서 원나라와 관계되는 홍두적(紅頭賊:紅巾賊) 난리와 최유(崔濡)와
김용(金鏞)의 원나라를 배경으로한 반역시(興王寺의 變)에,
납합출(納哈出)의 침입했을때와 같은 여러번 큰 사건에 어느 때나 기민한
유춘돌의 정보 보고로 남먼저 사변의 기미를 알아서 처리해 나가는데 늘
빛난 성공을 하였던 것이다.
<끝>
< 제 팔 화 >
불력기담(佛力奇譚)
煩惱僧
산고개턱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촌에서는 저녁짓는 연기가 가볍게
덮였다.
아까부터 산고개 마루에 구름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석양진 서쪽하늘을
마주 대하고 우뚝선 마을, 마을이래야 십여호가 띠엄띠엄 널려있는 산촌을
내려다 보고있는 승의(僧衣) 차림을 한 사내가 있었다.
얼굴은 하루종일 산길을 걸어서인지 피곤한 빛이 가시지 않으나
눈동자는 새빨간 노을을 담은채 영롱히 빛났다.
퇴색한 장삼을 걸친 등어리에 배낭을 메고 손에는 염주(念珠)를 든
중(僧)은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마을을 뚫어져라 내려다 본다.
(바로 이곳, 내가 여태껏 찾던 곳이 이곳임에 틀림없다)
조용하기는 하나 중의 의미모를 이 말 한마디는 어떤 감격에 벅차서
떨려나오는 말소리만 같았다.
아까보다 더욱 저녁연기가 안개처럼 차분히 산골에 가라앉고 사위는
인제 어둑어둑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자 중은 마을을 내려가는 길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서 얼마 거리를 둔 곳에 아담한 초옥이 한채 있었다.
해가 진후 싸리로 엮은 울타리 밖으로 축 늘어진 해바라기가 몇송이
눈에 보인다.
가까이 가면 안개처럼 주위에 펼쳐진 국화의 향기가 낭랑히 안에서
들려오는 글읽는 소리와 함께 사뭇 아름답다.
굴뚝에서 실같은 저녁 연기가 피어오를 때쯤 산을 내려온 중은 집앞으로
걸어갔다.
소승 문안드리오
싸릿문 앞에 다가간 중은 집안을 향해 사람을 불렀다.
여자가 부엌에서 밥짓던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줄잡아야 서른, 그러나 숫처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다.
여인이 싸릿문을 열자 중은 고개숙여 합장하고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였다.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들어 오십사와요
여자는 먼저 앞장 서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빗자루로 깨끗이 쓴 마당귀퉁이에 국화가 더욱 향기를 발한다.
여보, 스님 한분이 밤 지낼 곳을 찾아 오셨어요
여인은 글읽는 소리가 낭랑히 울리는 방안으로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글읽는 소리가 뚝 그치며 방문을 열고 젊은 주인 남자가 나왔다.
사내를 마주대하는 중의 얼굴에 일순간 형용 못할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중은 곧 마음을 진정하여 합장하며
소승, 해는 져서 갈 곳이 없으므로 무례하게 이댁의 문을 두드렸나이다
하고 공손히 말하였다.
승려의 처지로는 너무 겸손한 말이었다.
어서 올라오십시오. 스님을 모시기에는 너무 집안이 누추하옵니다
사내와 중은 방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깨끗한 방 구석의 조그마한
선반위엔 몇권의 책이 놓여 있을 뿐 별다른 세간도 없는 것 같았다.
식사후, 중은 피곤함을 핑계로 일찌감치 아랫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은하수(銀河水)가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중은
어둠속에 몸을 일으켰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마당에 가득 넘쳐 흐른다.
일어나 앉은 중은 어둠속에서 장삼을 입고 장지문을 열었다.
달빛이 물결처럼 왁- 방안으로 밀렸다. 중은 염주를 든 채 달빛을 향해
꿇어앉았다.
눈을 감고 염주를 하나하나 헤이며 중은 입을 가볍게 움직이며 들릴듯
말듯 이상한 주문을 외이기 시작했다. 달빛이 중의 얼굴에 부닥쳐
서기(瑞氣)를 발하는 것처럼 감돈다.
중이 일어나서 주문을 외이는 바로 그시간, 일각을 틀리지 않고
웃방에서 남자와 같이 잠든 여자는 깊은 잠속에서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통 이 세상에선 볼 수 없던 이상한 광경이었다.
흙과 바위는 유황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불구덩이에서 새빨간 불꽃이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나 여자는 자기 발밑이 펄펄 끓는 유황염초의 용액인데도 주위에
불꽃들이 옷깃을 매만지며 쓰다듬고 얼굴을 뒤덮는데도 그리고 연기가
자욱히 앞을 못보게 하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불꽃이 얼굴을
휩쓰는데도 뜨거움을 깨닫지 못했다.
끓어 오르는 유황염초에 발이 푹푹 잠겨도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대로 여자는 그 자리를 서성서성 헤매이었다. 자욱한 연기속에서
따글따글 쇠사슬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발자국소리와 함께 쇠사슬소리는 점점 가까워 왔다.
얼마 앞의 자욱한 연기와 불길속에서 네개의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쇠사슬에 엉킨채 눈에 띄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림자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여인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앞서서 쇠사슬에 묶인 채 걸어오는 사내, 바로 남편이었다.
살은 너덜너덜 피와 엉켜서는 벌겋게 타있었다.
어리카락은 길게 자라 앙상한 어깨까지 덮이고 손발은 육주안 쇠사슬에
묶인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서리 쳐지는 금속성(金屬聲)을 울렸다.
과거보러 떠난 분이.....
여인은 미칠 것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세명의 원귀(怨鬼) 역시 쇠사슬에 묶였으나 여자의
남편을 앞세워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허공을 향해 핏발 돋힌 흰자위가 무기미하게 고기비늘처럼 미물거리는
사내, 뒤따라 가는 세명의 원귀의 피묻은 뼈가 드러나 보이는 얼굴에는
증오와 원심의 표정이 무섭게 드러나 있다.
여보.....
여인은 자기 앞으로 다가온 남편을 향하여 힘껏 외쳤다.
그러나 그 말 역시 입속에서 우물거리는 것에 불과 했을뿐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여보, 당신이 웬 일이요?
다시 외쳤으나 그것도 울음먹은 훌쩍거림과 함께 입속에서 굳어 버렸다.
발바닥마저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남편은 여인의 앞을 흰자위만 드러낸 동공을 허공에 내동당이 친채
그대로 앞을 나갔다.
그뒤를 역시 세명의 귀신이 뒤 따를고, 아까 나타날 때처럼 그들은
무기미한 쇠사슬소리를 울리며 뭉클뭉클 피어 오르는 연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여인의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흐르며 손이 허공을 몇번 휘젓다가 잠이
깨었다.
(나무아미타불)
아랫방 중의 주문도 끝났다.
잠이 깨자 여자는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건너다 보았다.
과거를 보려고 늘 글만 읽어 수척해진 남자의 얼굴이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났다.
후-
여자의 잎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다시 자리에 눕는
여자의 얼굴에는 의미모를 심상치 않은 의혹(疑惑)이 깃들어 있었다.
주문을 다 외운 중은 그대로 앉은채 들릴듯 말듯하게 엷은 한숨을
토로했다. 어느덧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중의 현몽(現夢)으로 여자에게 어떤 끔찍한 예감을 갖게했다. 끔찍한
예감을.... 중은 방구석에 있는 배낭을 주섬주섬 찾아들고 열어논
문밖으로 조용히 나갔다.
마당은 달빛이 교교히 넘쳐 흘렀다.
중은 짧은 달그림자를 끌며 웃방에 대하여 합장하고 조용히 집밖을
나갔다. 문밖에서 중은 그대로 선채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님
어느새 기미를 알았는지 여자가 싸릿문 밖으로 따라나왔다.
어?
중은 놀라 멈칫하며 뒤로 돌아섰다.
달빛을 마주봐서 그런지 여자의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
스님, 새벽부터 떠나시나이까?
내 길을 멀고 해서 일찌감치 떠나 봐야겠읍니다. 주인님 곤히
주무시는데 깨울 수도 없고하니....
그래두..... 아직 첫닭도 울지 않았는데....
여인은 중의 얼굴에서 무었을 찾으려는지 한참 중을 쳐다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중의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저- 스님 황송하지만 소녀가 꾼 조금전의 꿈을 좀 풀어 주십사와요
중은 물끄러미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채 여자를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승은 한낱 미천한 돌중이요, 돌중이 어찌 해몽(解夢)을 하겠소, 그런
해몽일랑 유명한 대사님들이나 할 수 있소
그러하오나.....
해몽은 할 수 없어요, 단 한마디 여쭐 말씀이 있소. 내 관상을 좀
볼줄 알아, 주인님 얼굴을 보니 올해 액운(厄運)이 있소. 올해 집을
등지고 멀리 가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중은 내배앝듯이 말하고는 획 돌아서서 발걸음을 휘적휘적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兄弟의 運
이십여년을 뒤로 거슬러 올라 봄기운이 농후한 송도(松都)근처의
촌락이었다.
마을 타작마당으로 쓰는 빈터에 쌓여 있는 북더기 위에서 두명의 어린
소년이 놀고 있엇다.
열살쯤 되어 뵈는 소년과 동생인지 얼굴이 닮은 다섯살쯤 되어뵈는 애가
짚더미 위에서 따뜻이 햇빛을 받으며 희희거린다.
한명의 중이 논둑길을 걸어 오다가 다리가 아픈지 타작마당으로 와서
저쪽 짚더미 밑으로 가 앉았다.
중은 두 아이가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허-
하고 의미 모를 장탄식을 늘어 놓았다.
얘들아 이리오너라
중은 두명의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우르르 중 앞으로 달려 왔다.
중은 두 아이의 얼굴을 한참 번갈아 내려 보다가 큰 아이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냐?
혜륵(惠勒)이요
혜륵? 좋은 이름이구나. 너는 무엇이라고 부르느냐?
중은 또 작은 아이에게 물었다.
혜성(惠星)
그것도 좋은 이름이다
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은 쉬지않고 두 아이의 얼굴위를 스쳤다.
너희 집이 어디냐?
중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물었다.
우리집은 저기요
큰 아이가 빤히 중을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오냐, 너희의 집으로 가자
중은 아이들을 앞세우고 걸어갔다.
아이들은 별 이상한 중도 다 봤다 하면서도 서로 번갈아 쭐레쭐레 앞장
서며 집안으로 향하였다.
문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아이들은 방안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스님이 오셨어, 스님.....
문이 열리며 부모 늙은이가 방문 밖으로 나왔다.
스님 어서올라오십시오, 누추합니다만.....
마루에 앉아 다리를 쉰 중은 곧장 자리를 일어났다.
스님 벌써 가시렵니까? 하룻밤이라도 묵고 가시지.....
그만 가봐야겠소이다. 그런데.....
중은 잠시 주저했으나 다시 말을 이었다.
저 큰 아이를 소승이 절에 데려가서 맡아 중으로 만들겠으니 소승에게
맡기실 수 없사옵니까?
노인부부는 잠시 놀라더니 곧 기뻐 응낙하였다.
(당시 고려(高麗)는 중이 최상층 계급에 속하므로 중이 된다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았으며 또한 누구나 바라고 있었다)
그날로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절에 들어갔다.
춘하추동이 번갈아 바뀌기를 몇번을 거듭했다.
절에 들어간 혜륵은 나이 열아홉살이 되었다.
스님은 어느날 불경을 읽고 있는 혜륵을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방안에 들어와서 끓어앉은 혜륵을 묵묵히 건너다 보는 스님의 얼굴이
사뭇 경건(敬虔)했다.
혜륵아 인제 나에게는 네가 더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내일 길을
떠나 원나라로 가거라. 원경(元京)에 마침 나와 서면(書面)이 있는
인도승(印度僧) 지공(指空)이라는 분이 계시니 가서 더욱 배워라
너무도 뜻밖의 말에 혜륵은 할말을 찾지 못하고 스님 앞에 엎드려
버렸다.
혜륵아 원대한 불도 앞에서는 한낱 인간의 사소한 정리는 버려야
하느니라. 내일 당장 길을 떠나거라. 떠나기전에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몇년동안 오늘을 위해서 나혼자만이 알고 있던 것이다
스님은 잠시 말을 뚝 그쳤다. 눈자위가 푸르르 떨렸다.
혜륵아 잘 들어라.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느냐? 너의
집앞 짚더미에서 네 형제가 같이 놀고 있었다. 그때 내가 너의 관상을
보니 너는 반드시 중이 될 상이었다. 그 다음 내가 네 아우를 봤을 때
너의 어린 아우의 머리에 살기가 감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네 아우의 머리에는 세마리의 원귀가 붙어다닐 상이었다. 혜륵아
놀라지 말아라. 그것은 네 아우가 살인을 할 상이다
네?
혜륵은 고개를 들어 경악의 눈초리로 스님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아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다. 네가 그 살인을 막는 것이 문제가 된다. 네
아우는 지금부터 이십육년이 지나면 세사람의 인명을 빼앗고 지옥으로
빠질 것이니라. 너는 그때까지 원에 건너가서 불도를 정성껏 닦고
배워라. 그래서 네 불력(佛力)으로 그 살인을 막아야 하느니라. 만일
네가 그 사실을 막지 못한다면 불도는 너에게서 너무나 멀다. 살인을
막지 못하면 설혹 녜게 다른 신통력(神通力)이 있었다 치더라도 너는 아직
중생(衆生)을 면치 못한 탓이니라. 네 불력의 강도(强度)에 따라 한
인간이 중생의 죄를 지고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
그 다음날 혜륵은 스님을 이별하고 원(元)으로 향하는 길을 떠났다.
남편이 과거를 보러가는 날이 며칠안으로 박두하자 여인은 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불안속에서 떨고 있었다.
산으로 들어가 어느 동굴속에 있는 중이 새벽녘 달빛을 받아가며 주문을
외일 때마다 그 시간 여인은 늘 꼭 같은 꿈을 꿔야만 했다.
여자는 중이 떠날때 한 말대로 남편이 과거보러 가는 것을 한사코
막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과거보러 가는 것을 사흘 앞둔 날, 밤늦게까지 글을 읽는 남편의 옆에
여자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보 글을 그만 읽고 어서 주무세요, 그따위 글은 읽어서 뭘해.....
임자는 그게 무슨 말이라고 하나?
사내는 뒤돌아 보며 말하였다.
그렇죠. 뭘 과거봐서 낙방될 것 같으면 글은 해서 뭘해요 농사나
짓지.....
뭐? 임자는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요새 세상은 보통 백성은 아무리 과거를 봐도 급제가 안된다고들
하더이다. 대가(大家)집 자식 쯤 돼야 과거 볼 맛두 나지.....
닥쳐! 왜 재수없게 과거보러 가는 날이 가까웠는데.....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사내의 얼굴이 붉게 충혈(充血)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조금 더 심하면 사내의 병이 발작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흥분하면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과거보러 남편이 떠나는 날까지 남편의 마음을 돌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과거보러 간다는 날 새벽 여자가 잠을 깼을때 남편은
자리에 없는채 이부자리는 싸느랗게 식어 있었다. 여자는 미친듯이
송도(松都)로 향한 산길을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며 기어 올라 갔으나
아침햇발이 막 드리우는 산골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하고 외쳤으나 그 소리는 산울림이 되어 파도처럼 출렁거릴 뿐 남편은
돌아오질 않았다.
여자의 휘청거리는 다리가 산길을 내려오다가 여자는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 끝내 자기말을 듣지 않는 사내를 원망하듯 손은 허공을 향해
굳어진 채 죽어 버렸다.
駭怪한 應報
과거날이 되자 송도는 시골서 올라온 선비들로 한창 흥청거렸다.
과거날 아침 선비들은 일찍부터 경방궁(慶方宮) 문전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초헌(車召 軒 = 종이품<從二品>이상이 타는 높은
외바퀴수레)을 탄 어느 대감집 아들이 거드럭거리면서 거만히 사면을 휘휘
둘러보며 들어왔다.
어느덧 경방궁 앞뜰은 선비들로 가득차고 북소리가 울린후 왕이 친히
은은한 음악소리에 맞춰 마당앞의 누각위에 올랐다.
다시 북이 울리자 운자(韻字)가 내려지고 선비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종이위에 열심히 붓끝을 날리기 시작했다.
선비들의 정성에 찬 글발이 단상위에 차곡 차곡 쌓였다.
얼마후 장원급제를 한 선비의 이름과 장원시를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중속에서 이때
아?
하는 놀란 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바로 그 사내, 여자가 아무리 가지말라고 애원을 해도 뿌리치고 송도에
온 바로 그 사내였다.
장원급제된 선비의 이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 장원시는
조금전에 자기가 지어올린 시가 아닌가?
사내는 눈앞이 아찔했다.
어느덧 우르르 사람들은 궁밖으로 몰려 나갔다. 사내는 그들 틈에 밀려
나가면서 가슴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두방망이질을 쳤다.
요새 세상은 아무리 과거를 봐도 우리같은 평민들은 되지도 않는다고
하더이다. 대가집 자식쯤 해야 무슨 수로든지 급제가 되지.....
아내의 목소리가 꿈속처럼 귀를 간지렀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군중에서 점점 뒤로 처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혼자 궁밖에 남아 숨어서 급제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불같은 증오심이 그의 가슴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해가 궁궐의 높은 지붕너머로 넘어갈 때쯤 해서 궐문으로 호화롭게
단장한 말을 탄 사내가 나왔다. 뒤에는 수십명의 기병(騎兵)이 오위한 채
그들은 궐문을 빠져나와 고루거각이 즐비한 동촌(東村)으로 달렸다.
사내는 말을 탄 남자를 보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 할만큼 놀랐다.
바로 아침에 거드럭거리며 초헌(車召 軒)을 탄 채 과거장으로 들어온
남자가 아닌가?
음.....
사내의 입에서 분노를 억제치 못하는 신음소리가 빠져 나왔다.
동촌으로 향해 달리는 일행을 사내는 몰래 뒤따랐다. 일행은 어느
궁궐같은 개와(기와)집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담밑에서 샅샅이 바라본 사내는 이를 뿌드득 갈며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날밤 밤이 이슥해지자 사내는 날이 새파란 비수를 준비하여 품에
감추고 으슥한 뒤곁의 담을 뛰어 넘었다.
꿈속처럼 모든 것이 몽롱한 가운데 증오심만이 사내의 가슴속에
가득찼다.
사내는 남자가 자고 있을듯한 방문을 찾아 어둠속을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대청마루 건너편 방으로 다가갔다.
집안은 등불마저 꺼지고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방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간 사내는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장지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보니 잠자는 사람의 얼굴은 확실히 낯이
익었다.
사내는 손마디마디가 후들후들 떨렸다.
비수가 번쩍 쳐들렸다.
달빛이 비수에 비쳐 번쩍하고 몸서리 쳐지는 빛을 발하였다.
(..........)
두개의 숨소리가 조용히 들릴뿐.
휘이익
으으윽
칼이 잠자는 남자의 가슴에 가서 푹 꽂혔다.
남자는 가슴에 꽂힌 칼을 빼낼려는 듯이 손으로 두어번 어둠을 위젓더니
눈을 까뒤집고 손가락이 방바닥을 긁어쥔채 점점 굳어갔다.
가슴에는 시커먼 피가 달빛에 미물거리며 흘러내렸다. 피가 뭉클뭉클
흐를 때마다 칼이 가슴에 꽂힌채 서너번 끄떡끄떡 하였다.
방바닥을 흘러 내려가던 피가 실신한 것처럼 숨을 헐덕거리며 우뚝
서있는 사내의 발을 휘감아 문있는 쪽으로 흘러가며 시커멓게 응결해
갔다.
남자는 잠시후 입에서 귀신의 머리카락같은 실같은 핏줄기를 깨문 채
영영 굳어 버렸다.
사내는 이제는 완전히 미친 사람모양 그자리에 우뚝 선채 초점잃은
동공(瞳孔)을 싸늘한 고기덩어리에 던지고 있을뿐 희뜩 사내의 비뚤어진
입술이 악마같은 웃음을 그렸다.
그 단정한 용모에서 그런 악마같은 잔인한 미소가 그려지리라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마치 수십년 동안 긔의 가슴 한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나락의 마귀가 잠을 깬듯 사내는 온몸을 악마적인 희열에 불사른 채
잠시 그리고 서 있다가 열어논 문밖으로 나가서 조용히 담을 뛰어 넘었다.
그길로 사내는 송도의 성문을 빠져나가 미친듯이 새벽길을 비틀거리며
도망해 갔다.
밤이 되자 사내는 피곤한 몸을 이끌며 산속에 있는 초가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낄만큼 그의 정신이 정상적이
아니었다.
집안에는 희미한 심지불이 켜져 있다. 마당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나며
호롱불을 든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밤이 늦어 죄송하오만 하룻밤신셀 질까해서.....
여자는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얼굴에 스치며 옆으로 비켜 섰다.
사내는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있던 주인남자가 문을 반쯤 열고 역시 못마땅한 듯이 어
보다가
들어 오슈
하고 퉁명스레 내뱉고는 방문을 닫아 버렸다.
사내는 주인 내외가 거처하는 옆방에서 감자죽으로 배를 메꾸고 자리에
들었다. 잔뜩 피곤한 몸인데도 사내는 잠이 들지 않았다.
잠을 자는지 깨어 있는지 분간못할 지경에서 사내는 웬일인지 몸에 땀이
쉴새 없이 흘러 옷을 척척 들어붙게 했다. 마치 무거운 돌더미 밑에 눌린
것처럼 몸이 느줄근이 아파왔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을까 사내는 또 무엇에 놀란듯 퍼뜩 잠이 깨었다.
밤이 한창 깊었는가 보다.
사내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옆방에서 소근대는 소리가 벽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내는 번쩍 벽에다가 몸을 붙이고 전 신경을
벽 건너방으로 쏟았다.
.....그러지 말고 잠든 후에 오랏줄로 묶어 버리면 되는거야.
삼천냥이 한꺼번에 굴러든단 말야. 저방은 튼튼하니까 정 안되면 밖으로
문을 잠궈 버리면 돼
그건 안돼요. 젊은 놈이 발악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러지 말고 새벽안으로 관가에 내려가서 나졸 몇을 데려오세요. 몸이
피곤하니까 새벽까지 깨지 않을 테니까요, 내말대로 하세요
허어 글쎄.....
사내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었다.
또다시 그의 머리는 혼란해지며 악마의 화신처럼 마음이 뒤틀려 왔다.
사내는 조용히 문밖으로 나왔다. 뒷뜰로 돌아가서 도끼를 찾아 들고는
짚더미 뒤에서 주인 남자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남자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사내가 자던 방의 문고리를
살며시 잡아 당겼다.
사내는 조용히 뒤로 다가갔다.
주인 남자가 막 문을 열고 오랏줄을 든 채 한발 앞으로 들어갈려고 할
때였다. 휙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가 머리위에 바로 떨어졌다.
악---
주인남자는 짧은 비명과 함께 나무등걸처럼 앞으로 탁 꺼꾸러 졌다.
머리통이 무참히도 박살된 채 피가 사내의 옷에 튀어왔다.
주인남자는 꼼짝없이 깨어진 머리에서 피를 콸콸 쏟으며 죽어버렸다.
아악
남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여자가 뛰어 나왔다.
사내는 휙 돌아서며 거침없이 도끼로 여자의 허리를 후려쳤다.
피가 소낙비처럼 얼굴에 뜨거운 감촉을 주며 뿌려졌다.
사내는 도끼를 땅에 떨어뜨리고 힘없이 서 있었다.
온 전신에 묻은 검붉은 피가 지옥의 완장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내의 귀가 멍멍해졌다.
고향에 두고온 아내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나 그것도 잠간 뿐
사내는 몰려드는 피로를 억제할 수 없어 도로 방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갔다.
바다밑처럼 가슴이 가라앉았다.
안개처럼 잠이 몰려들었다.
마을서 송도로 가는 산길위에 중이 석상(石像)처럼 우뚝 섰다.
뉘엿뉘엿 하는 햇빛이 중의 그림자를 꾸불꾸불 길게 끌었다.
중은 그대로 송도로 향한 산골길을 빛나는 눈동자로 주시하고 있다.
저쪽 고개를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인 듯한 그림자가 기어올라 오는 것이
보였다. 둥근 눈을 감았다.
시커먼 그림자는 점점 크게 다가왔다. 사내였다. 옷은 피가 뭏은
그대로였다. 머리는 산발된 채 눈은 이제 막 첫별이 나타난 하늘을
향했는지 고기 눈알 처럼 핏발이 돋혔다. 다리는 휘청휘청하며 짚신마저
벗겨진 발은 피가 엉켜 있었다.
중은 그대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눈시울이 씰룩거렸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내는 이윽고 중의 앞에까지 다가와서는 딱 하고 걸음을 멈췄다.
사내의 숨소리가 중의 얼굴앞에서 헐떡거렸다. 사내는 마치 바위에라도
막힌듯이 우뚝 선 채 어떻게 된 셈인지 한발도 꼼짝할 수 없었다.
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번쩍하고 빛나는 눈동자가 바로 사내의 얼굴을 뚫고 나가는 것 같았다.
중은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내의 얼굴이 점점 핏기를 잃고
핼쑥해졌다. 무릎이 와들와들 떨렸다. 가슴이 뻐개지듯 숨이 찼다.
그러기를 얼마동안 중의 주문이 끝나고 다시 눈동자가 사내를 노려보자
사내는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잠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스르르 쓰러져 드디어 죽어버렸다.
자기의 뒤를 저주성(詛呪聲)을 지르며 따라다니는 세 원귀와 함께
사내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중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서서 그대로 마을로 내려가 버렸다.
아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사내마저 지옥의 불구덩이에 굴러
떨어져 죽어버린 집은 인제 텅텅비어 귀기(鬼氣)만 자아낼 뿐이다.
중은 그 집마저 불을 질러 버렸다.
화광이 충천하였다.
불꽃은 혀를 날름거리는 집을 송두리채 삼켜 들이켰다.
충천하는 불길속에 중이 홀연히 서 있는 것 같았다.
아! 불도(佛道)란 내게 멀기만 하다. 눈앞에 무궁 무진한 길이 트인다
중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일찌기 자기를 길러 주신 스승님, 자기가 원으로 떠나기전에 하신
말씀이 귀에 울렸다.
설혹 네게 다른 신통력(神通力)이 있었다 치더라도 너는 아직 중생을
면치 못한 것이니라
불꽃은 집을 덮었다.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기에는 내 불력이 너무나
사소하구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라도 한낱 중생을 면치못한 내게
무엇을 주실까?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없고 그도다 더한 불도를 닦기
위해서 몸을 더욱 깊은 부처님의 품안으로 던지노라
(대자연의 섭리를 깨달을 때까지 다시 불도를 닦자. 설령 그것이
영원한 길일지라도.....)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올랐다.
혜륵과 혜성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었다.
<끝>
<제 구 화>
百濟哀話(백제애화)
悲愴의 賦
第一章 誅劒
부소산 거창한 군창(軍倉)들이 탄다.
十五만호를 자랑하는 사비성(泗비城) 화려한 도성이 송두리채
타는듯하다.
영원히 꺼지지않는 연옥(煉獄)의 겁화처럼 검은 연기가 기둥이 되어
반공에 피어 오른다.
그것은 七백년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는 장송(葬送)의 향연(香煙)인듯도
싶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二십년 秋七월 보름.
신라와 당나라의 군병들은 사비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사비성중은 그대로 수라(修羅)의 지옥으로 변하였다.
적병의 무자비한 칼과 창과 화산에 백성들은 무참하게 죽었다.
사비성 백성들은 갈바를 몰랐다.
여인들의 비단을 찢는듯한 부르짖음이 죽어가는 사나이들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참혹한 조화를 이룬다.
피의 냇물!
시체의 산!
인간이 할 수 있는 한의 잔인한 행동은 모조리 벌어졌다.
거기에다 불까지 곁들였다.
불이 타는 열풍(熱風)은 사비성 전체의 공간을 불어 혔다.
더운 기운은 사람의 넋을 빼앗았다.
찌는듯한 노염(老炎)에 병화(兵火)로 인한 뜨거운 불이 곁들였으니
사람들은 몸을 사릴 겨룰도 없이 타 죽었다.
백제 전부가 그대로 불타고 있는듯 했다.
왕은 이미 사흘전인 십이일 웅진(熊津=現 公州)으로 몽진(蒙塵)하셨다.
왕으로부터 지켜 싸우라는 명령을 받은 왕자 태(泰)는 스스로 왕이라
일컬었다.
태와 더불어 사비성에 남아 있던 태자 효(孝)의 아들 문사(文思)는
숙(叔)의 칭왕(稱王)을 마땅치않게 여기고 성을 나가니 성중의 백송과
군병이 많이 문사를 따라 나갔다. 백성과 군병이 태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태는 드디어 성문을 열고 나당(羅唐) 양국의 군문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누구의 지휘를 받는 것도 아니었으나 백성들이 일어섰다.
맨주먹에 가까운 백성들은 성중으로 몰려드는 적병을 맞아 싸웠다.
지붕뒤에서 기왓장을 던졌다.
흙을 파는 광이(괭이?) 쇠스랑으로 칼과 창에 대결했다.
정규의 훈련을 쌓은 적병들도 백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항전에는 겁을
먹고 한때의 난전을 면치 못했다.
그 백성들에는 백제의 패잔병까지 합세했다.
그러나 인구 백만을 헤아리는 큰 도성 사비의 최후는 가가왔다.
금화(錦花)! 금화
대궐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나 도성이 타는 연기가 대궐안에
크나큰 적각들의 지붕을 덮고 있었다.
금화는 어디 있소! 금화
텅 빈 후궁을 관복 소맷자락으로 코에 스미는 연기를 헤치면서 이렇게
소리치며 바쁘게 헤매는 사나이가 있었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허리에 자주빛 띠를 두른 것으로 보아
일품(一品) 재상의 지위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금화
몇개의 전각(殿閣)을 찾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가 후원의 마지막 제일 깊은 곳에 있는 전각의 분합문을 열었을 때
오! 금화!
그는 반가운듯이 이렇게 소리쳤다.
금화, 내 목소리를 못들었소? 왜 대답이 없었소?
아, 임자(任子)대감!
전각안 중앙에 단정히 앉았던 여인 한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나이를 보고 자칫 놀란다.
여인은 성장(盛裝)을 하고 있었다.
세저(細苧) 웃옷에 비단 아래옷.
머리엔 역시 화관을 쓰고 몸에는 한껏 치장한 찬란한 패물들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그렇소. 좌평(佐平) 임자외다
어찌하여 오셨소?
달, 꽃, 아니면 무엇이라 비유해야 할지 모를만치 아름다운 금화의
얼굴이 이렇게 묻는다.
어찌하여라니? 금화는 모르오? 성중에는 벌써 나당 두나라의 군병이
들어 왔소. 이나라는 이제 망한 것이요. 자 어서 신라의 진문으로
갑시다. 이나라가 망한 것은 다름아닌 금화와 나의 공이요. 우리
두사람을 지휘하여 오던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장군이 기다리고
있을것이요
금화의 기품있는 가늘은 눈이 임자를 흘겨 보았다. 그 눈에는
경멸(輕蔑)의 빛이 있었다.
대감! 대감은 백제의 사람이 아니요?
응? 금화! 그것은 무슨 말? 내야 분명 백제사람이지! 금화는
신라사람이고---
대감. 잘 아시었소
금화. 대체 무슨 말이요. 이렇게 있다가 아직 성중에 남아있는
백제의 패잔병이라도 만나면 큰 일이요. 우리 두사람에 대한 백제 백성과
군병들의 원망이 크오. 어서 가오. 자 나와 함께 신라의 진중으로
가게하고. 나는 금화를 사모하오. 금화에게 왕의 총애가 하도 크시어서
감히 이 마음을 금화에게 말하지 못했을 뿐이요. 우리는 이제 터놓고
함께 살수 있지 않소. 나의 이 마음은 금화도 이미 오래전에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요
나는 백제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소
금화의 말은 가을날 서릿발처럼 싸늘 했다.
금화 그것이 무슨 말이요? 내나 금화가 백제에게 한 일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있겠단 말이요?
백제 상감의 마음을 사로잡아---
음!
백제의 충신들을 모조리 죽이시게 하고---
그렇소!
임자는 비명처럼 몸을 떨었다.
상감의 마음을 홀리어혐악한 지덕(知德)을 진압(鎭壓)한다 하고 백제
나라안의 쇠(鐵)라는 쇠는 모조리 걷어들여 큰 못(釘)과 쇠기둥을
만들어서 각처 명산(名山)에 박고 강물에 가라앉혀 병기를 만들 쇠를 없애
놓았소
이제 새삼스러이--- 그 무슨---
아니요, 또 있소. 상감께 큰 역사(役事)를 일으키시게하여
왕흥사(王興寺)와 태자궁(太子宮) 망해정(望海亭) 그 밖에 큰 집들과
지당(池塘)을 꾸미게 하여 백제의 국재를 말리어 버렸소
-----
그리고 독한 술과 이 금화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 외의 수 많은
아름다운 계집으로 하여금 상감의 몸과 마음을 아주 폐인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소
그것이 다 김유신장군의 지휘를 받아 이 임자가 그대를 상감께
천거하여 나는 밖으로 그대는 안에서 백제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요?
그러니 우리는 신라에 큰 공을 세운것이요. 자 어서 부질없는 말은 그만
하고 이 자리를 떠나오
그러나 금화는 그 자리를 떠나려 들지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무당(巫)년 노릇을 하여 사(邪)스러운 술법과 이 몸으로
상감을--- 그 어지시고 바른 마음을 가지신 상감을 속이고 백제를 이꼴로
만든 이 계집이 스스로 원수 같소
아니 금화 그러면 지금 와서 후회를 하는 것이요?
금화는 임자를 노려 보았다.
여보 대감! 당신은 피도 없고 눈물이 없소? 저 도성에 들려오는 하늘에
사모치는 죽음의 비명을 당신은 못듣는단 말이요
-----?
나라가 망하는--- 죄없는 백성들이 죽어가는 저 소리를 나는 진정
못듣겠소
임자는 애원의 빛을 얼굴에 띄우고 금화의 앞으로 다가 섰다.
금화, 그러니 십년이요. 내가 그대를 처음 보던 때가 이제 십년이
되었소. 나는 그대를 상감께 천거하여 놓고 얼마나 그대가 주야로
그리웠는지..... 금화, 인제는 내마음도 알아주오. 이몸도 일국의
재상으로 정말 허다한 계집들을 품어 보았으나 그대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소. 내가 내나라를 배반한 것도 그대
때문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요! 자 금화
듣기 싫소!
금화는 꾸짖듯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백제의 대감이라는 당신이나 신라에 가서 싫도록 부귀를 누리시오
금화 그럼 금화는 가지 않겠단 말이요
그렇소. 금화는 이곳에서 백제의 백성을 만나려 하오! 몰려드는
적군에게 욕을 당할까 두려워 대궐 뒷문으로 피하여 달아난 무수한
비빈들과 궁녀들의 틈에 끼이지 않은 것도 이몸을 백제의 원한 품은
백성들에게 내어 주기 위함이었소. 아- 정말 적은 내 재주를 믿고 이러한
소임을 맡고 신라를 떠나오던 십년전 일이 원망스럽소
금화는 그 고운 얼굴의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앉아서 스스로의 지나간 날의 죄의 심판을 받으려는 무당
금화의 얼굴은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금화! 그래 진정 안가겠소?
-----
금화 마지막 부탁이요. 이 임자와 함께가주오
-----
임자는 금화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임자는 정말 금화의 앞을 떠나기 어려운듯했다.
멀리 대궐밖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려왔다.
임자는 왈칵 겁을 먹고,
금화! 할 수 없니 내 홀로 가오
하고 전각밖으로 나오려는데-----.
그렇게 쉽게 가지는 못한다!
말의 주인공이 적각의 앞문을 막는다.
?
겁결에 임자가 바라보니 거기에는 갑옷 입은 한 사람의 백제의 장수가
피묻은 큰 칼을 짚고 서 있었다.
신라로가 아니라----- 지옥으로 보내줄까?
젊은 백제 장수의 원한 맺힌 눈이 임자를 노리고 있었다.
너는 누구?
너 간신 임자를 지옥으로 인도할 사자다!
임자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엄하다. 나는 백제의 상좌평(上佐平=首相)이다!
그러나 최후의 발악으로 한번 소리쳐 보는 임자였다.
나라를 팔아먹고 상감마마께 요녀를 천거하고 충신을 모함하여
성충(成忠)대감, 윤충(允忠)대감을 돌아가시게 하고 흥수(興首)대감을
무고히 귀양가게 한 너. 상좌평? 이 칼이 너같은 상좌평의 피를 마시고
싶어한지 이미 오래다
말을 마친 장수는 그 피묻은 칼을 비스듬히 어깨위로 들었다.
그리고 한걸음 두걸음 전각으로 올라왔다.
음! 상감을 매혹한 요녀 금화도 함께 있구나. 아 하늘이 나를 도와
너희들의 십년 쌓은 죄를-- 죄악의 형발을 받게 하는구나
장수는 이미 적각안으로 들어왔다.
임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화관을 쓴 임자의 이마에서 수슬땀이 흐르고 있다.
임자의 눈은 겁에 질려 뒤집혔다.
금화가 눈을 떴다. 그러나 곧 다시 그 눈을 감았다.
대체 너는 누구냐?
임자가 물었다.
장수는 천천히 임자의 앞으로 다가 가며
오냐 너에게 마지막 선물로 이 얼굴을 자세히 보여주마. 지옥에
가거든 백제의 지체낮은 십삼품 흰띠 띠는 호반인 무독(武督) 지위밖에
안되는 계창(季昌)이가 너를 지옥으로 인도 하더라 일러라!
하고 머리에 썼던 투구를 벗어 젖혔다.
오 너는 계창!
그래 계창이다
살려다오. 날 살려주는 값은 무엇이고 네 소원대로 하마
계창은 더 바싹바싹 다가갔다.
인제 임자의 등뒤가 바로 벽이다.
절대절명!
계창아. 날 살려다오. 뭐든지 다 주마
계창은 좀더 높이 칼을 들었다.
무엇을 주겠느냐?
살려다오. 뭐든지---
내가 꼭 네게서 받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네 목숨
살려--- 악!
비스듬히 내려친 계창의 칼이 깊숙히 임자의 목과 어깨를 곁들여
찍었다.
칼을 잡아 채니 쭉 뻗치는 임자의 피가 계창의 갑옷으로 튀어와 묻는다.
임자의 손이 힘껏 벽을 쥐어뜯고 몸은 거꾸러졌다.
임자를 두번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이킨 계창은 단정히 앉아 눈감고
있는 금화의 앞으로 왔다.
금화
대답없이 얼굴을 드는 금화.
후광(後光)이 비칠듯 아름다운 금화의 얼굴은 한가닥의 거리낌도 없는
맑은 얼굴이었다.
너의 죄의 빚을 갚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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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다!
계창이 지금 임자를 죽인 큰칼을 금화의 앞에 내던졌다.
계집을 내손으로 치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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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가 계창을 쳐다 본다.
눈!
금화의 눈은 계창에게 깊은 존경의 빛을 띄우고 있다.
금화가 칼을 집어 들었다.
눈은 계창을 바라보는 그대로였다.
금화는 빚을 갚겠소
비로소 말문을 여는 금화였다.
-----
이번에는 계창이 말이 없다.
백제에 몹쓸 짓을 많이한 빚을 지금 금화는 갚으리다
금화가 피묻은 칼날을 넓은 소매자락으로 쭉 어 씻었다.
순간!
금화는 칼끝을 입에 물고 앞으로 고꾸라 졌다.
금화의 목에서 뭉클뭉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몸을 뒤틀던 금화의 숨이 끊어졌을때 계창은 금화의 목에서 칼을
뽑았다.
내세(來世)에선 바르게들 살아라!
내던지듯 말하고 계창은 전각 밖으로 나갔다.
스무살이 얼마 넘지 않았을 젊은 장수였다.
누님 분하외다
여기는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간도(間道).
지름길 언덕이다. 서남쪽 사비성 하늘에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충천한다.
말하는 사람은 어제의 모습대로 갑옷을 입고 있는 계창이었다.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구나!
사비성쪽 하늘을 바라보는 계창의 눈에는 비분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대답하는 사람은 계창의 단 하나뿐인 누이 천절(千節)이다.
천절은 한숨을 쉬었다.
서른안쪽 나이 밖에 안될 천절의 곱다란 아미(蛾眉)에도 비분을
머금었다.
역적과 요녀는 이 손으로 베이고 왔으나--- 보오 저 불더미를--- 누님
그 아름다운 도성이---
화려한 궁전과 허다한 집들 다 불더미 속에 들었나 보오!
계창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천절도 소맷자락으로 눈을 매만진다.
당나라의 힘을 빌어 겨레의 나라를 치는 신라가 밉구나!
신라도 밉고--- 당도 밉소. 그러나 그 보다도 더 미운 것은 나라를
신라에 팔아버린 이 나라의 간신(奸臣)의 무리들이요. 그리고 어진
신하를 멀리하시고 눈앞의 즐거움과 편안함만 바라시어 간신의 무리를
용납하신 상감마마께도 원망의 마음 누를 길 없소
계창(季昌)! 너는 그 무슨 말이냐? 무엄하다 너는 어느나라 백성이며
어느 상감의 신하이기에 감히 그런 말을---
누이는 내색하여 오랍동생 계창을 꾸짖는듯 말했다.
-----
너, 이미 글을 배웠고 무술(武術)을 닦아 범상한 시정의 무리가
아니거늘 그 무슨 무엄한 말을 입에 올리느냐? 내 상감마마의 은혜를
입었고, 너 또한 말직(末職)일지언정 백제의 호반으로 상감마마의
신하아니란 말이냐?
너무 분하여서--- 누님
지금 너와 내가 저 불타는 사비성을 빠져나와 웅진에 파천(播遷)하신
상감마마를 따라가는 이 길은 무엇때문이냐?
누님!
상감마마를 원망하다니---
아니 누님. 계창이 하도 비분하여 말을 삼가지 못했소
사비성은 이미 적에게 빼았겼다. 그러나 백제는 아직도 북쪽의
여러성과 남쪽의 고을들이 남아있다. 아직도 백성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변방에는 남아있는 충신이 있을 것이다. 웅진으로 파천하신 상감마마를
따라가 섬기어 빼앗긴 사비성을 다시 찾는 날을 보려고 너와 내가 굳게
맹세하고 가는 이 길이 아니냐
삼십에 이르려면 아직도 이, 삼년은 더 있어야 할 천절의 나이에 비하여
애띤 얼굴은 엄숙했다.
누님, 계창의 허물이요. 다시는 않으오리다
예절을 숭상하는 백제의 백성들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음에도 빨랐다.
준절한 누이의 꾸짖음에 그대로 잘못했음을 승복하는 젊은 백제의
무인이었다.
저 연기를 보아라! 저 연기 속에는 백제의 원한이 피어 오르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저 원한을 그냥보고 있을 수는 없다. 누이는 저 원한의
불구덩이에서 살아나온 이 목숨을 상감마마 섬기기에 바치려 한다
천절의 말소리는 부드러워졌다. 그대신 그 맑은 얼굴엔 새로운 결심의
빛이 나타났다.
누님 알았소. 계창 더욱 깨닫겠소
고맙다!
누님
두 사람의 오누이는 새삼스럽게 두 손을 맞잡았다.
듯과 피가 두 손을 통하여 흐르는 듯 했다.
그 피는, 그 뜻은, 백제에 삶을 타고 날때 백제의 할아버지와 백제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백제의 피였고 백제의 뜻이었다.
비분과 적개심을 가진 오누이의 눈들이 서로 말없이 거듭 맹세했다.
상감마마께서슨내가 알고 있거니와 지극히 어지신 분이시다.
선대왕이신 무왕(武王)께 효도가 지극하시어 고구려와 신라에는
물론이려니와 멀리 당나라에까지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는 말씀을
들으신 분이다. 중년에 곤전마마 승하(昇遐)하시어 적적하신 성념을
틈타서 간사한 무리들이 그만 성총(聖聰)을 가리워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십년전만해도 그러니까 누이가 궁중에 있을때만 해도 밝은
다스리심과 충실한 국력으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과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등 사십여성을 쳐서 차지하여 크게 나라의 위엄을
빛내신 분이다
계창도 잘 아오
내가 성은을 입고 궁중을 떠나 집에서 나와 있은지 어언 십년. 누이는
한시도 상감마마를 잊은적 없었다. 그냥 그립고 그냥 어렵고 그냥
고마워서---. 누이가 대궐쪽 하늘을 바라보고 상감마마를 받들어
사모하옵던 봄 가을철이 지금 꿈만 싶구나
천절은 가냘프게 한숨을 쉬고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는 눈물---.
그것은 왕을 사모하여--- 다만 홀로 사모하여 온 여인의 애정의
결정(結晶)이었다.
왕을, 그 어지시고 총명하고 용감하시던 십년전의 의자왕(義慈王)을---
그리고 지금 나라의 도성을 적군에게 잃고 변방의 옛서울 웅진성에
몽진(蒙塵)하신 지극히 기력이 쇠모 하시어 성격조차 달라지셨다는
의자왕을 못잊는 한 여성으로서의 변할줄 모르는 연모(戀慕)의 표적이기도
하다.
누님! 계창은 누님이 불쌍하시어 못견디겠소. 누님이 홀로
상감마마를 사모하시며 보내신 십년의 세월이 슬프오
계창의 말엔 오누이간의 지극한 정을 머금고 있었다.
오누이간의 정이란 참 맑고 깨끗한 것이다.
아무 바람이 없는 높은 사랑이 오누이간의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계창은 그 높고 맑고 깨끗한 오누이간의 육친의 정으로 누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상감마마를 사모하는 누이는--- 생각하면 참 분수에 지나치는 하늘
무서운 일이 아니겠니, 그러나 누이가 세상에 나서 아직 상감마마처럼
뛰어나신 남정네를 만나보지 못했다. 누이는 계집사람이어서--- 별수
없는 한 계집사람이어서 상감마마가 그립고나. 평생을 이대로 상감마마가
그리운 채로 살다가 말지언정 상감마마를 받들어 생각하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을--- 누이는!
어느덧 여인의 말소리는 그대로 하소연이었다. 푸념이랄까?
푸념이라면 참 아쉬운 푸념이다.
오라비이기에 터놓고 말하는 하소연이며 푸념이다.
남의 앞이라면 어찌 왕을 사모하고 왕을 못잊는다 감히 말할 수 있으랴?
물환성이(物換星移) 십년을--- 이룰 가망없는 왕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혼인의 기회조차 저버리고 그대로 세월을 보낸 여인의 호소였다.
누님. 십년만에 이제 상감마마를 뵈오면 누님을 알아 보실줄 아오?
계창이 누이의 애처로운 가슴을 짐작하여 보려는듯이 물었다.
나는 십년전 궁중에서의 그날밤 일을 눈에 선하게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상감마마의 부드러우신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도 귓가에
그대로 되살아 난다. 보산(寶算)이 오순(五旬)이 넘으셔서--- 그리고
간신과 요녀의 무리들이 총명을 가리워 주야로 행락(行樂)하심에 옥체
많이 손모(소모)되시어 신기 흐리셨다 듣자웠다. 누이를 알아보시든
못알아보시든지 누이는 그것을 가리지 않는다. 그냥 한번 용안을 우러러
뵈었으면 누이에겐 한이 없겠다. 옆에 두어두시면 더욱 고마웁겠다.
그것만으로 누이는 더 바랄것이 없다
천절은 가벼운 그러나 깊이 서린 회포를 못이기는듯 또 한숨을 쉬었다.
누이의 말이 너무 애처로운듯 들리어서 계창도 따라서 슬퍼졌다.
누님 해가 벌써 높소. 이제 가지 않으려오?
들을 덮어골짜기를 메꾸어 달려드는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나당 두나라의
군병이 포위하고 있는 사비성을 어젯밤에 탈출하여 중도에서 밤을
드새고---.
지금은 늦은 아침.
오 그래. 뜻밖에 말이 길었구나
오누이는 일어섰다.
다시 돌아다보니 사비성의 검은 연기는 더욱 굵게 피어올라 구름처럼
하늘을 덮고 있다.
그 연기의 기둥과 그 연기의 구름을 바라보니 다시 용솟음 치는 분노와
비감이 두 사람의 가슴 속을 물결치는 것을 느낀다.
계창아!
네?
이몸은 계집사람이어서 내손으로 이 원한을 갚지 못하는 것이 진정
한스럽구나. 너는 사나이--- 백제의 물을 마시고 자란 사나이가 아니냐?
지금 저 원한의 연기를 바라보고 누이의 몫까지 이 원한을 꼭 갚아야 한다
누님! 이를 말씀이요? 누님의 그 말씀 계창은 뼈에 새겨 들으오
저 연기 아래에서 양같이 온화하고 댓쪽처럼 바르고 인심후한 죄없는
백제의 백성들이 무자비한 적병의 칼날아래 무수히 죽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오! 누님
가자
오누이는 걸음을 옮겼다.
원한의 사비성을 뒤로 두고 상감이 계신 웅진성 쪽 지름길 내리막을
걸어간다.
第二章 聖 代
십년 전!
의자왕 九년 봄.
사비성 화려한 궁전에 봄이 드니 후원(後苑)의 기화이초(寄花異草)는
철을 맞아 다투어 아름답게 꽃 피었다.
의자왕 5년 이후 해마다 백제의 강토는 넓어져 왔다.
달솔(達率) 의직(義直)과 달솔 은상(殷相)이 거느린 백제의 군병은 정말
무적(無敵)의 상승군이었다.
그야말로 치면 뺏고 나가면 무찔러 버리는 막강(莫强)의 군병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백제는 상무의 나라였고 국민개병(國民皆兵)의
나라였으니 위으로(위로) 어질고 밝으신 의자왕이 계셨고, 재상이하
관원은 사(私)에 치우치지 않고 공(公)에 힘을 써서 강기가 엄정하고
상벌이 분명하니 그 나라의 군병이 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졸이 죽기를 영광으로 알게 용감했으니 지나간 5년동안에 신라의 서쪽
요충(要衝) 대야성 이하 40여 성을 뱄고 신라를 위협하여 백제의 위세를
천하에 떨쳤으며 한토(韓土)엔 말할 것 없고 동으로 일본을 비롯하여 남쪽
유구 탐라는 물론이요, 멀리 서해 건너 당나라까지 겉으로는 천자(天子)의
나라이라 허세를 부렸으나 은연히 백제를 두려워 했다.
그 봄에---.
남쪽 바다의 섬나라인 탐라나라에서 방물(方物)을 진헌하는 사신으로
도내(都內)가 사비성에 이르렀다.
도내는 탐라나라의 왕제였다.
도내에 대한 백제 조정의 대우는 극히 융숭했다. 상국(上國)으로
자처하는 백제였기 때문이었다.
음식거처는 물론이려니와 침실에는 궁인을 골라 천침까지 시키는 극진한
대우였다.
도내가 왕을 알현(謁見)하는 날의 의식은 장려(壯麗)를 극했다.
대궐 정전앞에는 계품을 따라 상좌평(上佐平)이하 6부 좌평과
좌장우보(左將右輔)의 문무 백관이 갈라섰다.
사도부(司徒部=禮部)의 악사들이 아뢰는 웅장하고 청아한 궁악(宮樂)이
흐르는 중에 왕은 도내의 정중한 하례를 받으시고 도내에게 술을 내리시어
먼길의 수고를 위로 하시었다.
이렇게 도내를 융숭히 접대함은 백제와 신라와의 국교가 멀어지매
탐라를 신라에 멀게하고 백제와 더욱 화친케 하려는 백제의 외교적인
정책의 일부이기도 했다.
탐라뿐이 아니었다.
백제는 북쪽 고구려와도 맹약을 맺어 서로 위급할때에 원군으로
돕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왕이 밝으시고 조정엔 어진 충신들이 많았으니 백제는 안으로
밖으로나라를 크게 빛냈던 것이었다.
그날밤.
백제에는 또 한번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장군 은상의 거느린 백제의 군병이 동쪽 신라의 석토성 이외의
일곱성(城)을 차지하였다는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대궐에서 이 소식이 들려나오자 사비성 백성들은 집집이 초롱을 내걸고
명절처럼 즐겁게 축하했다.
사비성중의 어느 거리 어느 골목에도 쏟아져 나온 백성들의 행렬로
가득찼다.
누가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은 대궐 앞 넓은 공터로 모이었다.
만세!
상감마마 만세!
백성들이 감격에 벅차서 저절로 목이 터지라고 부르는 환호성은
사비성중에 드높아 대궐에 울렸다.
그때 왕은 편전에서 아름답고 기품이 높으신 왕비마마와 더불어 멀리
들려오는 백성들의 환호성을 들으시고 극히 만족하시었다.
곤전마마. 저 백성들의 흔희작약하는 소리 들으시오?
왕의 말씀에--- 옥배에 술을 따르던 왕비마마께서는 고개를 드시었다.
성은에 화답하는 백성의 뜻이라 듣자왔소
지나친 말씀인가? 짐은 생각하오. 그러나 짐은 아직 조종의 성업을
더럼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며 아래로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바를 더불어
즐길 뿐이요. 곤전마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지금 저 백성들의
환호성이 그 어느 비할 바 없는 좋은 음률을 듣는 것 보다 짐에게는 더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요
신첩도 기쁘외다
왕은 술잔을 드시었다. 단숨에 술을 마시고 나신 왕은 술잔을 상위에
내려놓으시고 그윽히 왕비마마를 바라보셨다.
평소에 만기(萬機)를 몸소 살피시어 겨를 없는 날들을 보내시는
왕이시매 한가롭게 술잔을 드시는 일이 참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내나라 건아들의 빛나는 전과를 들으시고 이날 그대로 넘기실 수
없었다.
육부(肉部=御膳部)에 명하시어 간소한 주안을 들이어라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왕비마마와 다만 두 내외분이 호젓하신 청아한 대작을 하시는
것이었다.
성왕(聖王)의 간소하신 자축(自祝)이었다.
민(民)은 천(天)이라 짐은 항상 백성을 보기 하늘같이 하였소. 하늘을
어기고 왕업이 있을리 없는 것이요. 그러기에 짐은 주야로
동동속속(洞洞屬屬)하여 스스로 편할 날이 없었소. 거기에는 곤전마마의
어지신 내조(內助)가 없으셨던들 어찌 오늘의 기쁨이 있었겠소.
곤전마마, 짐은 마마께 하례하오
왕이 한껏 애정을 머금으신 눈으로 왕비마마를 바라보시니 왕비마마는
자못 수태(羞態)를 지으셨다.
신첩이 무엇을 아오며 무엇을 상감마마께 도움이 되었다 하오리까?
다만 어의(御意)를 받자와 지나친 허물이 없었음은 다 성덕(聖德)의
소치인줄 아뢰나이다
막 40고개를 넘으신 왕은 취흥과 애정을 이기지 못하시어 왕비마마의
옥인양 흰손을 덥석 잡으셨다.
곤전마마! 곤전마마가 있으시어 짐은 살고있는 보람을 느끼오
왕비마마는 살며시 왕의 손에서 스스로의 손을 뽑아 내셨다.
상감마마! 이목을 삼가소서
왕비마마의 말씀소리는 엄숙하시었으나 왕비마마의 아름다우신 눈은
지극히 행복의 빛을 띄우고 왕을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그날 밤이 좀더 깊어.
아마 술시(戌時)가 지났을 무렵이라 할까?
모처럼만에 취흥을 얻으신 왕은 그 즐거운 봄밤을 그냥 보내시기
섭섭하신 생각이 드셨다.
왕비마마를 침전에 들게 하시고 이내 후원에 홀로 납시었다.
봄밤은 부는 바람조차 향그러웠다.
곁들여 달빛이 은은하니 후원은 유수한 선경같이 그윽했다.
지당가엔 어디서 풍기는지 아련한 화향.
?
왕이 걸음을 연못가의 정자아래로 옮겨 오셨을 때. 왕은 문득 고이한
소리를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시었다.
그것은 은은히 슬프게 흐느껴우는 소리였다. 누가 들을세라 숨죽여
우는 울음소리였다.
왕은 넌지시 정자안을 살펴보셨다.
거기 울음의 주인공이 있었다.
달빛이 그늘져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왕이 정자위에 오르셨다.
그러나 울음의 주인공은 왕이 정자에 올라 오셨음을 깨닫지 못하고 왕의
앞에 등을 둔채 아직도 흐느끼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울음의 주인공은 한사람의 여인이었다.
모습으로 보아 젊은 여인이었다.
?
그러나 곧 왕은
에헴
낮은 기침을 하셨다.
앗!
여인이 울음을 그치고 얕은 비명과 함께 소스라쳐 몸을 돌렸다.
누구냐? 너는---
왕은 역시 낮은 목소리로 물으셨다.
용서하소서. 소녀는 하도 일이 급하옵기에 몸을 피하여 무단히 이곳에
들어왔나이다
목소리가 심히 애띠다.
후원에 들어감은 법도에 금하는 바이다.
비록 궁중의 관원일지라도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금원(禁苑)이다.
아마 왕을 후원을 지키는 관원으로 알았던지 여인은 우선 용서를 빌고
있다.
이리 오너라
왕은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옮겨서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여인은 할 일없이 왕의 분부대로 고개를 숙인채 밝은 곳으로 나왔다.
한번만 용서하소서
얼굴을 들어라
여인은 비로소 얼굴을 들었다.
앗! 상감마마
여인은 그제서야 앞에 섰는 사람이 왕인줄을 깨닫고 바쁘게 몸을
부복하고 전신을 벌벌 떨었다.
아! 상감마마
여인의 애띤 목소리가 그윽한 한탄을 머금고 또 한번 달빛속으로
흘렀다.
두렵고--- 황송하고--- 무엇이라 형언할 수 있는 감격이 섞인
목소리였다.
너는 누구냐?
이몸, 후궁부(後宮部)의 침선녀(針繕女) 천절(千節)로 아뢰나이다
여인의 목소리는 무엇에 힘을 얻었는지? 다소 낭랑한바 있었다.
왕의 인자하신 천성을 아는 탓일까?
천절! 고개를 들어라
천절은 달빛속에 고개를 들었다.
그림처럼 고운 얼굴이었다.
왕이 취하신 중이어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던 기막히게 예쁜 얼굴이었다.
몇살이냐?
열일곱살로 아뢰나이다
열일곱
네
어느 때 궁중에 들어왔더냐?
열다섯살에 들어 왔나이다
그러면? 3년이 된다. 왕이 여색에 담백하시어 명색 후궁부가 있어서
유마행시의 아름다운 궁인들이 후궁에서 이때나 저때나 왕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왕은 그것을 거들떠 보시지 않으시니 자연히 후궁의
소식을 아실 까닭이 없다.
여기는 어찌해서 들어 왔느냐?
몸을 사려 피해서 들어 왔나이다
무슨 연고로 피했더냐?
왕이 거듭 물으셨다. 그러나 천절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무슨 연고로 피했더냐?
그제서야 천절은 입을 열었다.
소녀에게 탐라국의 사신이 머무시는 객관에서 사신께 천침을 들라는
외사부(外舍部=外交部)의 영이 있사옵기로 피했더이다
천침이란 침석에 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천침? 천침의 영을 어찌해서 피했느냐?
이몸 아직 숫계집이여이다
참 당돌한 말이었다.
속계집이어서 어떻다는 말이냐?
왕은 천절의 대답하는 말에 기이한 흥미를 느끼시며 또 물으셨다.
이몸, 계집은 절개를 무겁게 알라 배웠더이다
누구에게 그렇게 배웠느냐
이미 죽은 아비에게 배웠더이다
음!
왕은 깊이 마음으로 탄복 하시었다.
그래서 울고 있었느냐?
왕은 마음에 지금 어전에서 당돌하게 계집은 절개를 소중히 알도록
배웠다는 처녀 천절에게 저윽히 한 사나이로서의 어떠한 욕정이
움직이시는 것을 느끼셨다.
아무도 없는 후원.
봄이요, 밤이었다.
황차 왕은 취하고 계셨다.
네
너 사모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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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모하는 사람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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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서인가? 대답이 없다.
어찌하여 대답이 없느냐?
황송하여이다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왕을 속이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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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말못하는 천절.
있다는 말이냐?
있나이다!
꺼질듯 얕은 목소리로 천절이 대답했다. 그러나 분명한 말이었다.
절개를 안다는 숙계집이 사나이를 사모한단 말이냐?
마음으로 사모하옵는 것은 죄가 아닌가 하나이다. 그 마음을 위하여
계집은 절개를 지키는 것이라 믿었나이다
열일곱살이라는 천절의 대답은 사리에 당연했다.
왕은 더욱 아찔한 흥분을 느끼시었다.
누구냐? 네가 사모한다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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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지그시 흥분을 누르시고 물으셨다.
누구냐?
-----
또 대답이 없다.
달빛속에 엎드려 있는 천절의 어깨가 가쁘게 들리고 있다. 천절의
가슴에 오고가는 상념의 괴로움을 나타내는듯 하다.
누구란 말이냐
그것은 아뢰옵지 못하겠나이다
무엇? 말을 못하겠다?
짐짓 노해 보이시는 왕의 목소리였다.
천절의 죄 만사무석인가 하나이다
천절이 말소리는 떨리었다.
이렇게 총명하고 숙성한 처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사나이는 과연
누구일까? 왕은 그것이 알고 싶으셨다.
말을 해보아라!
왕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지셨다.
황공하여이다. 말씀 여짜옵기 진정 황공하여이다
너와 짐 이외에는 아무도 업사. 어서 말을 해보아라
여짜옵기 진정 두려워 하나이다
무슨 말이든 가릴바 아니다. 짐이 너를 기특히 알고 있는 것이다
천절은 손을 땅에 짚고 약간 몸을 들었다.
왕을 쳐다보는 천절의 눈.
낮이라면 그 눈이 지극히 사모의 정을 머금고 왕을 쳐다보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상감마마!
천절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정말 하늘이 무서워서 이 말씀 못 며쭙겠나이다
하늘이 무섭다니?
진정 하늘이 무섭소이다
어째서 사람이 사람을 사모하는데 하늘이 무섭단 말이냐?
천절은 이나라의 한분밖에 안계신--- 지극히 높으신 분--- 그 분을
사모하여 왔더이다
한분밖에 없는 분이라면--- 그것은?
상감마마! 천절을 죽여 주옵소서
아 나라에 한분밖에 없는 분이라면---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면
왕을 일컬음일까?
그것은 누구? 짐! 여기있는 짐이란 말이냐?
왕은 숨가쁘게 물으시면서도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감마마! 진정 천절의 마음은 천절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더이다.
상감마마! 천절은 죽을 죄를 졌나이다. 천절을 죽이시옵소서. 하늘이
무섭소이다
가여운 한송이의 꽃봉오리!
그 꽃봉오리가 머금고 있는 아직 피어나지 않은 향기.
왕은 천절에게서 그러한 느낌을 받으셨다.
지금 눈앞에서 그 꽃봉오리가 속임없는--- 열일곱살 풋정을 호소하고
있다.
왕의 격정은 정말 폭발하려는 직전에 있었다.
왕비마마 이외의 계집사람을 모르시던 왕이시었다.
그런데 웬일이냐? 지금 한번도 가져보시지 못했던 마음의 크나큰
흔들림은 진정 웬 일이냐?
40이 넘으신 왕은 그 40평생에 처음 당해보시는 격렬한 마음의 충격을
누르고 있으시기에 숨이 가쁘셨다.
천절을 굽어보시는 왕.
왕을 쳐다보는 천절.
달빛속이어서 눈을--- 눈동자를 서로 뚜렷하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
마음이 오고 갔다.
상감마마! 천절에게 죄를 주소서. 처음 진실로 처음에 상감마마를 먼
빛으로 뵙던 그 시각부터 천절의 마음엔 상감마마의 거룩하신 모습으로
가득 찼더이다. 외람하온 천절에게 죄를 주소서
천절!
술의 힘이랄까? 왕의 마음이랄까? 왕은 더 참으실 수 없어서 몸을
굽히시어 보기에도 가냘픈 천절의 몸을 힘껏 끌어안으려 하실 때---.
(인기척)
돌연한 인기척을 느끼시고 왕은 몸을 바로 가누셨다.
서너사람의 갑옷입은 병졸이 정자아래로 다가왔다.
거 누구?
병졸들의 날카로운 수하의 호령.
위사좌평(衛士佐平=宿衛大臣)의 거느리는바 숙위의 군병임이 분명하다.
짐! 짐이다
썩 밝은 곳으로 나서신 왕을 보고---.
네이!
병졸들은 황망히 땅위에 부복했다.
웬일들이냐?
위사좌평의 명령을 받들어 후궁부 궁인 천절을 나포하려고 기찰중으로
아뢰오
궁인 천절을?
네이 천절은 관부의 명령을 어기고 후궁부를 무단히 탈출하여
도주중으로 아오나 궁금(宮禁)단속이 엄중하매 아직 궁성중에 있으리라
추측하오. 혹시 이 금원(禁苑)에 잠입해 있지 않나 하여이다
그러냐! 천절은 지금 짐의 앞에 있다
네에?
부복해 있던 병졸들은 비로소 왕과 더불어 함께 있는 천절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존의 어전이니 감히 어찌 손을 대랴? 잠시 생각하신 왕은
천절이 관부의 명하는 바를 어기었으면 마땅히 법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것이다. 천절을 이끌어 가거라!
엄숙히 말씀하시고 다시 천절을 돌아보시며---.
천절아 너 가거라!
강잉히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는 왕의 가슴에 서린 만단상화를 머금고 있었다.
상감마마! 천절 가겠나이다
천절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어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고래를 돌려 왕을 바라보며 내려갔다.
천절이 정자 아래로 내려오니 병졸들은 몸을 일으키어 허리에 달았던
오라를 끌러 천절을 묶으려 했다.
묶지말고 데려가게 하여라. 죄인이 가냘프다
네이
천절을 묶으려던 병졸이 왕명을 듣고 오라를 걷었다.
천절! 앞서라
병졸의 호령을 듣고 천절은 앞서서 걸어간다.
병졸들이 그 뒤를 따른다.
잠간만(잠깐만)!
왕이 말씀하셨다.
네이
위사좌평에게 일러라. 짐의 별명(別命)이 있을 때까지 천절을
치죄(治罪)하지 말고 별실에 보호하라 하여라
네이
병졸들은 다시 천절을 앞세우고 걸어 간다.
왕은 달빛속을 애처롭게 걸어가는 흰옷입은 천절의 모습을 한껏
바라보셨다. 당돌하게도 왕에게 사모의 정을 고백한 열일곱살 처녀의
뒷모습을---.
이튿날 아침.
조회가 끝난후. 왕은 친히 위사좌평을 가까이 부르시어 특지를 내려
천절의 형별을 면하게 하시고 따로 후한 상록(賞祿)을 주어 사가(私家)로
내어 보내셨다.
천절에게는---.
왕이시기 보다 그리운 분이었다.
그 그리운 분의 너그러우신 처분에 천절은 얼마나 감읍(感泣)했는지
열일곱살 가슴에 더욱 왕의 모습이 굳게 아로색여(새겨) 졌던 것이었다.
사가에는 천절이 대궐에 있을 동안 남의 손을 빌려 키워오던 어린 동생
계창이 있었다.
부모없는 남매는 서로 한집에 모여사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천절은 밤이나 낮이나 겨를을 얻으면 샘물처럼 끊임없이 왕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사모의 정을 못이겨 괴로웠다. 그런 마음이 죄라
싶기까지 했다.
40이 넘으신 왕은 나이로만 따지면 어버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그분이 그리운 것을 어찌하랴!
분수에 넘치는 그릇된 마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천절의 사모의 정은 더해갔다.
마땅히 혼처가 여러번 나섰다.
그러나 천절은 처녀인 그대로 살았다.
천절은 계창과 더불어 호젓이 살아갔다.
침선을 생계로 하여 아우 계창을 가르치니 백제에 이름 높은 큰 선비로
좌평벼슬을 지나신바 있는 여자신(餘自信)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였고
겨를에 사기(射騎), 창검의 술법을 익히게 했다.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대궐쪽 하늘을 바라보며 애끊는 사모의 정을 지니고 있는 천절의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왕은 천절의 일을 아주 잊으셨는지 세월이 그렇게 길게 흘렀건만 천절의
외로운 그리움만 부질없이 그 세월과 더불어 애절하였을 뿐이었다.
상감마마!
허공에 불러보았다.
철을 따라 꽃은 피고 지고 했다.
그러나 천절의 가슴속엔 영영 꽃피지 못하는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第三章 昏 政
달은 차면 이즈러지고 물은 차면 넘쳐 흐르는 법이다.
이것이 무상(無常)한 인생세계의 변치않는 법측(법칙?)일는지도 모른다.
빛은 백제에만 비치란 법이 없었던지 의자왕 십년 이후에는 백제에
그늘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왕비마마가 승하 하신 것이다.
왕비마마는 본시 포류의 기질이신데다가 미녕(未寧)하시매 왕의
지극하신 약석(藥石)의 보살피심도 모르시는듯 가셨던 것이었다.
왕의 슬픔은 크시었다.
슬프시면 술을 드시었다.
술을 드시면 밤을 새우시고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으셨다.
간신이 그틈을 엿보고 왕의 마음을 맞추어 왕으로 하여금 주색에
빠지시게 하니 이는 좌평 임자, 충상(忠常) 등의 무리였다.
후궁에서는 그칠줄 모르는 장야(長夜)의 연락(宴樂)이 벌어졌다.
따르는 술은 감로(甘露) 같은 방순(芳醇).
옥반에는 그대로 산해의 진미.
단순(丹脣)에서 흐르는 곱다란 노래소리는 구궁(九宮)에 흘렀다.
왕의 총희(寵姬)로 금화(錦花)가 있었다.
금화는 신라의 계집이었다.
백제의 미녀로는 은고(恩古)가 있었다.
은고도 왕의 총애가 깊었다.
금화와 은고와 그밖에 무수한 미녀들은 왕의 앞에 그 아름다움을
다투었다.
왕은 취하시면 금화나 은고를 이끌고 침전에 드셨다.
무르녹는 육체의 향기속에 왕은 세월을 잊으셨다.
어 태평이로다
어 천하는 짐을 위해 있나니---
날이 새면 다시 끝없는 호화로운 잔치가 벌어졌다.
금화는 신라의 무당이었다.
신라 손급(飡級)의 지위로 천산(天山) 고을의 영(令)이었던
조미곤(租未坤)이란 자가 진격하던 백제 군병에 포로가 되어 좌평 임자의
집 종이 되어 있었다.
조미곤이 틈을 보아 신라로 달아났다가 신라의 지장(智將)
김유신(金庾信)의 영을 받고 다시 백제로 돌아와 이(利)로써 임자를
꼬이어 임자로 하여금 신라 김유신과 태통을 하도록 해 놓고 임자에게
금화를 왕에게 바치게 하였다.
금화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이한 술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용모
또한 경국절대(傾國絶代)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즉시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김유신이 금화를 백제로 보낸 것은 금화로 하여금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백제의 국력을 소모케 하고자 함이었다.
김유신은 뒤에서 금화와 임자를 지휘했다.
임자는 밖에서 금화는 안에서 백제를 좀먹어 들어갔다.
좌평 성충은 왕의 행락을 직간하다가 옥에서 죽고 윤충(允忠)은 나라의
글러감을 보고 분사(憤死)했다.
좌평 흥수는 고마미지(古馬彌知=長興)로 귀양을 갔다.
어진자는 물러가고 간사한 무리들이 조정을 휩쓸었다.
이렇게 십년을 지나서 백제에는 그 옛날 융성했던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백성은 주리고 헐벗었다.
군병들은 싸움에 쓸만한 병기를 갖지 못했다.
이때.
십삼만의 당병(唐兵)과 오만의 신라군이 동쪽 서쪽에서 일시에 백제로
쳐들어 왔다.
신라군을 막던 계백(階伯) 장군은 황산벌(黃山原?)에서 패하여 죽었다.
당병을 맞아 싸우던 의직(義直) 장군은 사비수(泗比?水) 물가에서
뭍(陸)으로 오르려는 적군과 격전 후에 전사했다.
의자왕 이십년 칠월 십이일.
왕은 십년 행락하시던 아름다운 사비를 버리시고 황망히 북쪽
웅진성으로 파천하시니 그 모습은 진정 참혹하시었다.
공포에 떨며 목을 놓아 우시었다.
교자도 차릴 겨를이 없으시어 말을 몰으셨다.
왕을 따른 두어사람의 궁녀와 태자 효(孝)와 왕자 연(演)이 왕을
모시었을 뿐이었다. <-???
진정 숨가쁜 도피행(逃避行)이었다.
왕이 웅진으로 파천하시던 날 밤.
왕은 마음이 떨리시어 신기(神氣)를 수습하지 못하셨다.
옛 궁궐이엇던 관아(官衙)를 이궁(離宮)으로 삼아 들으셨다.
모시어 받드는 내관도 없고 낯익은 신하도 없다.
사비에서 따라온 태자 효(孝)와 왕자 연(演)이외엔 두어사람의
궁녀(宮女)가 지근(至近)에 모실 뿐이었다.
십년행락에 몸과 마음이 다 쇠모하신 왕은 그 옛날 천하를 떨치시던
패기의 편린(片鱗) 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초라하신 모습이시었다.
웅진의 수성대장(守城大將)이 받드는 저녁 수라를 받으셨으나 별로
드시지 않은채 낯설은 침전에 드셨던 것이다.
아바마마 존체를 돌아보시어 편히 쉬사이다
태자가 꿇어 앉아 왕에게 고하였다.
태자의 옆엔 왕자 연이 역시 꿇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수많은 비빈과 후궁의 궁녀를 거느리시던 왕이어서 태자 이외의 왕자가
사십여인이나 있었다.
사십여인의 왕자들 중에서 지금 왕의 앞에 있는 아드님은 태자 효와
왕자 연 뿐이다.
오냐! 자자. 그러나 잠이 오겠느냐? 마음과 몸이 온통
못견디겠구나!
아바마마 신등이 불충하온 죄로소이다
태자가 눈물을 지었다.
왕의 등뒤에 시립한 두사람의 궁녀들은 벌써부터 눈물을 지으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희들 물러가 자거라
왕은 슬픔을 덜기 위하여 태자와 왕자를 물러가라 하시었다.
네이
태자와 왕자는 왕이 잠들게 하기 위하여 마악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던
때.
아뢰오
밖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태자가 몸소 침전의 분합을 열었다.
밖에는 십여사람의 군병을 거느린 웅진성 수성대장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태자가 물었다.
상감께 주달할 말씀이 있소!
수성대장의 말소리가 귀의 탓인지 무엄하게 들렸다.
지금 옥체가 다소 미녕하시어 누우시려 하신다. 지급한 일이 아니거든
밝는 날 여쭈어라
아니오. 태자마마가 관여하실 바 아니오. 상감 어전에 바로 주달할
일이요. 이미 성중의 장졸들과 의합(意合)된 바를 주달하려 하오
확실히 무엄한 말투였다.
강박(强迫)과 같은 말싸다.
왕이 몸을 움직여 분합문 앞으로 나오셨다.
무슨 말이냐. 말해라!
힘 없으신 왕의 목소리다.
수성대장이 국궁했다.
상감마마 대세가 이미 기울어 도성이 적병에게 함락되고 이 웅진의
적은 군병으로는 적병을 대적할 길이 없소. 상감마마께서 이곳에
주련(駐輦)하시면 조만간 적병이 이 웅진으로 달려들 것이 분명한 일인가
하오. 사세가 거기에 이르면 화(禍)가 바로 상감마마께 미칠까 신은
염려외다
그러면--- 짐에게 어찌하란 말이냐?
신은 이미 수하의 장졸과 의견이 일치되어 밝는 날 사자(使者)를
사비의 나당 양군의 군문에 보내어 항복할 뜻으로 있사옵기 부질없이
승산없는 항전(抗戰)을 단념하시고 상감마마께서도 항복을 하사---
수성대장의 말끝이 채 마치기 전에
무엄하다! 어느 앞이라 네가 감히 항복을 말하느냐?
태자가 목소리를 돋구어 꾸짖었다.
태자마마는 말씀을 마오. 지금 소장은 상감께 주달하고 있소
너는 가만 있거라! 말을 듣고 보자
왕이 힘 없으신 말씀으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거듭 아뢰거니와 상감마마께서 친히 항서(降書)를 쓰시와 신에게
주시오면 신이 적진에 보낼까 하오--- 만일---
수성대장은 말끝을 흐리었다.
만일--- 어떻다는 것이냐?
만일 신의 주달을 듣지 않으시면--- 할 수 없이 신은 상감마마를
위하여 본의는 아니오나 적진으로--- 상감마마를 모실 뿐이요
수성대장은 말을 마치고 왕의 기색을 살폈다.
이놈! 네가 상감마마를 적진에 팔아버리고 적국에 공을 세울
작정이냐--- 이놈 너는 아마 간신 임자의 무리가 아니냐?
태자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렇소. 나는 임자대감의 천거로 이 웅진성 대장이 된 것이요.
그러나 소리만 높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오--- 상감마마 신의 의견에
확답을 내리시옵기 바라오
네놈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태자가 또 소리쳤다.
왕은 몸을 와들와들 떨고 계시었다.
분기를 참으시기에 떨리는 것이었다.
네가 누구의 신하이냐?
왕은 일부러 부드럽게 물으셨다.
상감마마의 신하인줄 아뢰오
그런데 짐에게 항복을 말하느냐?
사세가 그렇소
짐이 듣지 않으면---
황송하오나 부득이 구집(拘執)하여 유폐해 모시고 적진으로 갈 뿐이요
태자가 소리쳤다.
죽일 놈!
태자는 벌떡 일어나서 벽에 걸었던 패검을 내려 뽑아 들었다.
그것을 보자 수성대장도 칼을 뽑았다.
분명한 반역이엇다.
무엇을 하느냐? 너희들은!--- 상감을 별실(別室)에 가두어라
수성대장은 뒤에 섰는 군병들에게 소리치고 전각으로 뛰어 올랐다.
태자의 칼과 수성대장의 칼이 맞부딪쳤다.
칼과 칼이 부딪쳐 불똥이 튄다.
병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왕을 끌고 전각 밖으로 나가려 한다.
왕자 연이 빈손으로 병졸들에게 덤볐다.
왕을 모시던 궁녀들은 목을 놓아 울며 헤맬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분기를 못참아 먼저 칼을 뽑은 태자였으나 검술에 있어서 수성대장의
적수(敵手)가 아니었다. 태자는 칼을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칼이 바야흐로 태자를 해하려는 때.
솟아 오른 것 처럼 전각안으로 달려들은 한사람의 장한(壯漢)은--- .
보기 좋게 수성대장의 목을 쳐서--- 그 목은--- .
천정(天井)에 매달려 있는 밝은 등롱 불빛을 뚫는 핏줄기와 함께 전각
바닥에 굴렀다.
이어서 장한은 왕을 잡아 이끄는 병졸들을 닿는대로 베었다.
악
으악
외마디 소리. 비명과 함께 병졸들이 짚단 쓰러지듯이 자빠졌다.
혈연(血煙)이 뻗친다.
모두 짧은 순간의 일들이었다.
태자와 궁녀들--- 그리고 왕과 왕자 연은 넋을 잃고 장한의 솜씨있는
날랜 활약을 바라볼 뿐이었다.
병졸들이 손한번 써볼 겨를없이 다 쓰러뜨린 장한은 이내 피묻은 칼을
버리고 묵연히 서 있으시는 왕의 앞에 부복했다.
서부(西部) 변경을 지키던 신 달솔(達率) 흑치상지(黑齒常之)로
아뢰오. 신 상지 망극하와 여쭈울 말씀을 모르오
흑치상지는 가쁜 숨결에서도 그의 눈에서는 더욱 눈물이 떨어졌다.
오, 네가 흑치상지! 짐은 너의 입시(入侍)를 가상히 안다
왕은 긴장이 풀리셔서 그대로 자리위에 털석 주저 앉으셨다.
신은 도성이 위급하다는 급한 파발을 받잡고 수병(手兵)을 거느려
사비로 가옵던 길 이미 상감마마 웅진으로 파천하셨다 하와 다시 이곳에
당도하온즉 수문(守門)의 군병이 신의 입시를 막기로 신은 의아하와 우선
수문의 군병을 베이고 들어와 이에 이르렀소. 신 외람되이 어전에
용무(用武)하옴은 만사무지로 아뢰오
흑치상지는 칠척이 넘는 거구의 소유자였다. 그 칠척 장신이 비분에
떨며 말했다.
그는 백제에 이름 높은 용장이었다.
짐은 너로 인하여 욕을 면했다
흑치상지의 손을 잡고 왕은 느끼어 우시었다.
신이 끌어온 군병이 아직 천명이 다 못되오나 우선 반역에 가담한 이
성의 군병을 처치하고 상감마마를 받들어 모시기에는 충분하오니 만만
신념을 편하게 하소서
왕의 울음은 통곡이 되었다.
어느새 들어 왔는지 침전 뜰가엔 흑치상지의 수병들이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조종(祖宗)의 성업(聖業)을 이 지경을 만들고 짐이 무슨 낯으로 지하에
들어가 열성(列聖)께 뵈인단 말이냐?
왕은 목메어 우시며 태자의 옆으로 가셨다.
순간!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태자가 떨어뜨렸던 태자의 패검을 집어 드시고
이내 그 칼로 스스로의 목을 찌르셨다.
앗! 상감마마
아바마마
태자와 왕자 그리고 흑치상지 궁녀들이 함께 왕에게로 달려들었다.
놓아라! 짐은 죽어야 하느니--- 십년행락하여 나라를 이꼴로 만든
짐은 죽어야 마땅하니라!
여러사람의 동작이 민첩하여 왕이 입으신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워낙
주색에 손모하신 몸이시어 숨결이 몹시 가쁘시다.
누가 없느냐?
흑치상지가 뜰을 향하여 소리쳤다.
네이
병졸의 몇사람이 청령하고 나선다.
바삐 성중의 의원(醫員)을 불러라!
네이
병졸들이 달려 나갔다.
놓아라! 짐은 죽는다
왕은 칼을 더 깊이 찌르시려 하셨다.
그러나 칼을 태자에게 뺏기셨다.
기막혀 우는 울음소리가 전각을 울렸다.
뜰안에 무리지어 섰는 흑치상지의 군병들도 소리 없이 흐느꼈다.
第四章 悲愴
이튿날 부터.
한두사람 북부(北部) 군현(郡縣)의 성주(城主)들이 약간씩의 휘하의
병마(兵馬)를 이끌고 웅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백제의 모든 고을의 성주들에는 간신 임자의 무리가 많았다.
임자가 국권(國權)을 농단할 때 임자에게 가까운 자들을 많이 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멀리했던 까닭이다.
지금 임자에게 가깝던 자들은 도성이 두려 빠지고 왕이 참혹한 몽진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세의 돌아감을 관망하하여 태도를 결정하고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 왕에 대한 충성심을 그대로 갖고 있는 성주들만이 모였다
할 것이다.
그들이 거느린 군병의 수효는 적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기는 만만치 않아 만일 나당의 군병이 이르면 생사를
걸고 한번 싸울 결의가 굳었다.
흑치상지는 모여 온 성주들을 통솔하여 군병을 조련하고 넉넉지 못한
병기를 다시 정비하여 다가오는 싸움에 대비했다.
왕의--- . 상처는 경미했다.
응급히 불려온 의원의 치료는 효력을 발생하여 다소의 출혈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왕의 입으신 상처에 있지않고 왕의 몸과 더불어 극도로 약해지신
마음에 있었다.
짐은 왕재(王材)가 아니로다. 짐은 조종의 유업(遺業)을 망쳤도다.
짐은 죽어야 하느니라
왕의 눈에 눈물이 마르실 때가 없었다.
짐은 적신(賊臣)의 칼아래 죽어야 마땅한 것을---
차라리 죽어서 짐의 허물로 인하여 목숨을 끊은 성충 이하 여러
신하에게 짐의 허물을 사과해야겠다
이렇게 슬픈 말씀만 하시었다.
흑치상지 이하 성주들은 차례를 정하여 번을 들었다.
거듭 왕이 자살을 도모하실까 하여서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짐을 지키고 있느냐?
왕은 숙위(宿衛)의 성주를 꾸짖으셨다.
상감마마. 어의(御意)를 진정하소서. 신등은 상감마마를 우러러
모시고 나라를 다시 회복하려 하나이다. 부디 자애(自愛) 하시와 신등의
충정을 살피소서
싫다. 물러가거라. 짐은 홀로 있고 싶다. 물러 가거라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지신 왕은 사람을 두려워 하시었다.
십년 정사를 돌보시지 않고 무수한 후궁의 아름다운 궁녀들의 풍만한
육체에 파묻혀 끝없는 욕정의 파도속에서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시던
왕이 일조에 적국의 군병으로 인하여 도성을 버리시고 또 믿고있던
스스로의 수성대장의 모반으로 인하여 거듭 놀라심이 컸으니 왕의 마음엔
일종의 강박관념과 같은 심각한 회의의 감정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작은 음향에도 깜짝깜짝 놀라셨다.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셨다.
상감마마 신념을 진정하소서
숙위의 성주는 그냥 왕의 앞에 부복하고 너무도 참혹하게 변하신 왕을
우러러 볼 뿐이었다.
자진(自盡)하시려던 이후에는 태자와 왕자에게 까지 사납게 대하시고
어전에 태자나 왕자가 나타나면 역시 공연한 꾸지람을 하셨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
사흘이 지나 십육일 아침 사비에서 웅진으로 피해온 왕손 문사(文思)와
문사를 따라온 군병과 백성들의 보고는 왕을 더욱 실의(失意)의
나락(奈落)으로 몰아 넣었다.
그것은 왕이 도성을 맡겼던 왕자 태가 스스로 왕을 일컬으다가 드디어
적진에 항복했다는 것이요--- 또 수많은 궁녀와 비빈들이
대왕포(大王浦)로 달아나 암석위에서 백마강(白馬江) 푸른 물결에 차례로
몸을 던져 죽고 도성은 그대로 불바다가 되었다는 비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슬프고나! 진정 슬프고나! 짐은 모든것이 귀치않다. 부귀는
무엇이며 향락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이냐? 왕업은 무엇이란 말이냐?
만사가 다 구름이다. 물거품이다. 하잘 것없는 공허로다. 짐은 차라리
모반했던 수성대장의 뜻을 용납하여 신라의 춘추(春秋=太宗武烈王)와
당나라 이치(李治=唐高宗)의 군문에 항복하여 번거롭지 않은 마지막
가련한 생명을 이어 가련다
흑치상지 이하로 성주들은 서로 마주보고 비분할 뿐 왕에게 대꾸할 말이
없었다.
누구나 짐의 길을 막지말라! 짐은 적군의 진문앞에 항복하러 가련다.
춘추와 이치가 짐을 죽이면 죽을 뿐 살려주면 살 뿐이다. 이 괴로움과
슬픔보다는 그편이 차라리 얼마나 짐에게 편할는지 모르리로다. 누구나
나의 길을 막지 말라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어 그대로 계석아래로 내려 오셨다.
왕의 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성주들은 묵연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감마마!
흑치상지가 몸을 일으키어 바삐 왕을 따라 계하에 내려가 걸음을
옮기시는 왕의 용포 소맷자락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상감마마! 신 흑치상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 상감마마는 아직도
백제의 하늘이시고 백제의 빛이시외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자고로
위급한 지경을 당한 나라가 하나 둘이 아니오며 도성을 빼앗겼던 군왕이
또한 하나 둘 뿐이 아니외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고 비로소 하늘의
도움을 기다릴 수 있다고 신은 생각하오. 신등 지금 일신의 존망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백제의 회복을 뜻하옴은 오직 상감마마께서 위에
임어(臨御)하여 계시기 때문이외다. 지금 상감마마 신등의 미충(微忠)을
버리시고 적의 군문에 항복하시면 신등은 뜻을 어디에 모아 적을
대항하오리까? 상감마마께서 지금 가시오면 신등에겐 하늘이 없어지고
빛을 잃은것과 다름없는 줄 아뢰오. 통촉하옵소서
흑치상지의 말소리는 불을 뿜는 것 같이 들렸다.
태자와 왕자 그리고 궁녀들도 마당에 내려와서 왕의 기색을 살핀다.
성주들도 추연한 빛을 띄우고 흑치상지의 등뒤로 모였다.
흑치상지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왕이 계시므로써 비로소 그들의 적병에 대한 항전 의욕을 발휘할 수
있었고 단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왕에 대한 충성심이 곧 그들의 항전할 의욕을 갖게 하였고 그들을
단결케 한 것이다.
왕이 계시므로써 그들은 승패이둔(勝敗利鈍)을 가리지 않고 한몸의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수효적은 군병을 이끌고 이 웅진에 모인 것이
아니냐?
만일 왕이 적진에 항복하면 그들은 대들보없는 서까래처럼 흩어져 버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아니다. 짐은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못믿는다. 믿고 있었던 맹약의
나라 고구려에서도 소식이 없다. 고구려가 짐을 저버린 것이다. 짐은
아들에게 배반을 당했다. 사비성을 맡긴 짐의 아들 태는 짐이 없는
동안에 스스로 왕을 일컬었더ㅏ. 충신인줄 믿었던 임자는 간신이었고
짐이 총애하던 금화는 짐을 망치지 않았느냐? 짐은 외롭다. 무섭다.
짐은 왕이라는 자리가 싫어졌다. 짐은 춘추와 이치에게 이 목숨을 맡겨야
겠다. 그들에게 자비를 구하련다
왕은 소매를 뿌리치고 걸음을 옮기셨다.
쇠약한 왕의 걸음은 비틀비틀 몸을 잘 가누지 못하셨다.
그러나 누구하나 왕의 앞을 가로 막는 자는 없었다. 모든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왕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상감마마!
누가 비통하게 불렀으나 왕은 돌아다 보시지도 않았다.
왕이 이궁(離宮)의 삼문밖을 나서시매
상감마마 신등도 가오리다! 모시고 가오리다.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거마(車馬)를 차리오리다!
왕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알자 흑치상지는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누가 없느냐? 거마의 차비를 해라!
명령하는 흑치상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라와 신하를 버리고 적진에 항복하려는 왕에게 오히려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는 무부의 더운 눈물 이었다.
흑치상지뿐이 아니라 성주들, 그리고 그들의 군병들도 다 눈물을
머금었다.
태자 효(孝) 그리고 연, 궁녀들도 목놓아 울고 있었다.
비참한 기운이 웅진성중을 덮고 있는 듯 했다.
아침해는 동쪽 하늘에 높건만 그 해는 이미 백제의 해가 아니요 적국의
해다.
그 햇살은 옛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건만--- .
계창과 천절이 지름길 내리막을 내려와 큰길로 나서서 멀리 웅진성이
바라보일때---
웅진성문으로 부터 두사람을 향하고 나오는 긴 행렬을을 바라보고
의아한 마음을 갖는 계창과 천절이었다.
계창아! 저 무슨 행렬일까?
묻는 누이에게
누님! 반드시 사비로 진격하려는 우리 군병의 행렬인가 보오.
상감마마가 몽진하신지 이미 오륙일이니 북부의 여러 고을의의 군병을
모아 다시 적군에게 빼앗긴 사비로 진군하는 행렬이 분명하오
항복이란 계창의 마음엔 털끝만치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그렇구나!
누님 됐소. 당병에게 패하여 쫓겨온 계창이 죽지않은 보람이 있소.
이번에야 말로 계창은 군병의 행렬에 가담하여 마음껏 싸워 보겠소!
오냐! 누이도 정성을 다하여 상감마마를 섬기겠다
오누이는 끓어 오르는 흥분을 참을 길 없이 서로 바라보았다.
어서 가오! 누님
바삐 가자
새로운 희망을 느낀 두사람은 걸음을 재촉했다.
행렬은 점점 가까워졌다.
계창과 천절은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천절의 얼굴이 상기가 되어 아름답다.
계창의 얼굴엔 비분의 빛이 스러지고 환하게 밝다.
행렬의 선두는 말을 탄 장군이었다.
계창이 바라보니 틀림없는 흑치상지의 의연(毅然)한 모습이었다.
흑치장군의 뒤를 보니 행렬의 중간쯤 말위에 누런 용포를 입으신 왕.
계창은 흑치장군의 말앞에 무릎 꿇었다.
장군! 무독 계창이요
기쁨에 넘쳐 말하고 쳐다보니 흑치장군의 얼굴이 지극히 어둡다.
?
생각하는데
오 계창
흑치상지의 말소리는 힘이 없었다.
일찌기 서로 알던 사이였다.
천절도 왕의 모습을 먼빛에 보고 길가 풀섶에 무릎꿇고 두손을 땅에
짚었다.
장군! 계창은 싸움에 패하고 왔소. 그러나 이 손으로 간신 임자와
요녀 금화를 베이고 왔소. 사비로 진격하시는 행군이라 보오니 계창은
기쁘외다
-----
흑치상지는 외면을 하였다.
흑치상지의 탄말이 멈추니 행렬은 스스로 멈추어 졌다.
장군. 계창도 다시 싸우겠소. 계창으로 하여금 선봉에 서게 하여
주오
계창!
비로소 흑치상지가 말문을 열었다.
네이
진격이 아닐세!
그러면?
항복의 길일세
네이?
계창은 귀를 의심했다.
백제의 보반이 항복을 말하는 것을 듣지못한 계창이었기 때문이다.
항차 흑치상지의 입에서랴?
천절도 의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항복이요?
묻지말게--- 항복은 어의일세
진정 기막히는 말이었다.
아찔한 실망을 느끼고--- .
항복이요?
더 묻지 말게. 괴로워서 말을 못하겠네. 내 신하가 되어 상감마마를
모시고 갈 뿐일세
이때 뒤에서 전갈이 왔다.
어찌하여 길을 멈추느냐는 상감마마의 전갈이요
도성을 탈출한 군교로 인하여 잠시 멈추었으나 곧 떠나겠다 여쭈어라!
흑치상지가 전갈의 군병을 보내고 계창에게 빠른 말로 말했다.
상감마마의 상심하심은 말하기 어렵다. 스스로 자문(自刎)하시려
하시기까지 하시어 경미하지만 상처를 입고 계시다. 웅진에는 충성된
성주들이 군병을 이끌고 모여와서 적군과 일전의 준비도 되었으나
상감마마께서 항복을 고집하시니 내 인신의 몸으로 어찌할 수 없이 지금
상감마마를 모시고 적진으로 가거니와 만일 적국에서 상감마마를 대우함이
무례할 때엔 나는 적진을 탈출하여 재기를 도모할 작정이다. 웅진에
모였던 성주들 중엔 항복하신다는 상감마마의 말씀을 듣고 병졸을 이끌어
지금 임존(任存)성에 계신 은솔(恩率) 부여복신(扶餘福信)장군의 아래로
달아난 몇사람이 있다 또 오산(烏山=禮山)에는 전(前) 좌평
자진(自進=道深)대감이 계시어 복신 장군과 반드시 합세하실 것이니
그대로 지금 항복하시려는 상감마마를 따를 생각은 말고 임존성으로 가게,
임존성은 우리백제의 북쪽요새로 비록 백만의 적병이 온들 난공불락할
험지일세. 할말이 많으이. 그러나 상감마마 또 꾸중이 계실까하여 그냥
가네
흑치상지는 고삐를 당기어 말을 몰았다.
행렬이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왕이 타신 말이 계창과 천절의 앞을 지나 간다.
천절!
흑치상지와 계창의 말을 다 들은 천절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했다.
십년을 그리우다가 지금 길섶에서 뵈옵는 왕의 참담하게 초췌하신
모습을 우러러 바라보는 천절!
상감마마 십년전 대궐 후원에서 은혜를 입자온 천절이오이다
천절이 고개만 들고 외쳤다.
그러나 왕은 묵묵히 말이 없으시고--- 그대로 말을 몰아 지나가셨다.
천절은 몸을 일으키어 왕을 따르려 했다.
열일곱이 되기전에 어린애 천절 가슴에 아로색여졌던 왕에 대한 사랑의
회포를 갖고 십년 숨어 흐르는 지하수처럼 간직해 변치않던 사랑이 이제
혹발하는 분수처럼 터져 쏟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왕을 따르려던 천절은 소매자락을 잡는 계창으로 인하여
멈추어졌다.
계창아 왜잡느냐? 이몸은 상감마마를 따르련다. 놓아라. 물이든
산이든 북이든 지옥이든 상감마마가 계신 곳이면 나는 따라가야 한다
누님!
놓아라!
누님! 상감마마는 항복의 길을 가시고 있소! 계창은 항복을 버리고
싸움을 택했소. 계창은 임존으로 가려오
항복의 행렬은 아직도 지나가고 있다.
나는 상감마마를 따르련다
누님! 상감마마는 적진으로 가시는 것이요. 계창도 상감마마를
모시고 가고 싶소. 그러나 상감마마를 모시는 충성보다 계창은 적군과
싸워서 잃은 나라를 찾는 싸움으로 충성을 하려하오
누이는 상감마마가 계신 곳으로 가련다. 신라든 당나라든 상감마마
가시는 곳으로---
뿌리치는 천절!
놓치 않으려는 계창!
누님! 계창과 함께 가시오
계창아. 너는 임존으로 가거라. 상감마마는 누이를 잊으셨는지
모르나 누이의 가슴엔 날이 갈수록 더욱 더욱 그리움이 더한 것을
어찌하느냐? 누이는 상감마마를 모시는 충성을 하련다
행렬은 다 지나갔다.
길 위엔 하얗게 먼지가 인다.
계창은 누님을 적진에 보내기는 차마 못하겠소
나도 너를 떨어져 있기 어려울줄 안다. 그러나 이 가슴을 이 마음을
어찌하느냐. 평생 상감마마의 돌보심을 못받을 지언정 누이는 상감마마의
옆에 있고 싶다. 누이는 계집사람이어서---
천절의 흥분이 좀 가라앉았다.
오누이는 길가 풀섶에 앉아 서로 바라보았다.
누님. 진정 가시려오
저 참혹하게 형모가 초췌하신 상감마마를 꼭 따라가야겠다
진정?
상감마마가 불쌍하시다
계창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의가 떠 올랐다.
누님. 가시오
계창아!
가라는 말엔 천절이 다시 계창을 바라본다.
오누이!
한 어버이에 태어나 한 젖을 빨고 자라 의지하고 살아온 오누이!
너! 누이는 가야겠다. 몸조심해라
천절은 몸을 일으켰다.
누님 계창은 임존으로 가겠소
나는 사비로--- . 상감마마를 따라---
누님 몸조심 하시오
오던 길은 함께 왔건만 지금 헤어져야 하는 오누이들의 가슴에는 만단
회포 구비 구비 서린다.
어서 가시오. 이것이 생전의 이별이올는지---
네가 먼저 가거라!
막상 이별이라 하니 유연(油然)히 샘솟는 오누이의 정을 느끼는
천절이었다.
누님이 먼저 가시오
네가---
두사람의 눈에는 다 눈물이 흘렀다.
계창이 돌아섰다.
누님! 잘 가시오
계창은 달음박질로 걸었다.
눈물이 어려 아무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돌아다 보지 않았다.
길이 산기슭을 구비돈다.
거기서 계창이 고개를 돌렸다.
천절이 아직도 헤어진 자리에 그냥 서있고 멀리 고개를 넘는 왕의
항복의 행렬이 보인다.
누님!
계창은 입속으로 불러 보았다.
몇걸음만 산기슭을 돌면 다시 누이의 모습을 못보리라.
강잉히 계창이 걸음을 걸었다.
서너걸음!
인제 계창의 시야(視野)에 천절의 모습이나 왕의 행렬이 보이지 않는다.
계창은 몸을 돌려 누이가 보이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누이 천절이 돌아서서 왕의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누이도 울며 가리라!
생각하니 눈물이 막 쏟아져 나온다.
잘 가시오
노까려 보고 계창은 돌아섰다.
먼 하늘에 구름송이가 흘러간다.
저 구름송이! 저 구름송이가 한번 바람결에 흩어 지면 다시 언제
모일까?
계창은 이렇게 생각하고 얼굴에 흘러 내리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계창의 눈에는 돌아서서 왕의 행렬을 따라가는 누이의 가여운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듯 했다.
계창은 또 불러 보았다.
누님!
< 끝 >
( 1996년 5월 21일 22시 25분. ...)
<제 십 화>
韓末逸話(한말일화)
金議官 叔侄
1
하필 동대문 밖 동적전(東籍田)에서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친경(親耕)이
설행(設行)되는 날과 일본의 소위 원훈(元勳)이라는 늙은 이리같은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서울에 도착하는 날과 겹질러서
마주쳤다. 하필이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지마는 아무리 국운(國運)은
이미 기울었다 하여도 엄연한 일국의 지존(至尊)인데 국본(國本)인 농업을
장려하려고 군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농사를 짓는 국가적 성의(盛儀)를
거행하는 날자를 어제 오늘에 불시로 정하였을 리 없고 또 한편
이등박문의 내조(來朝)로 말할지면 호시탐탐, 이웃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저희 나라의 국책을 띄우고 움직이는 국가의 대표이거늘, 이 역시 그
오고가는 것을 하루 이틀에 정하였을 리 없으니, 반드시 미리 양국 간에
연락이 있었을 터이라. 그런데 무엇때문에 꼭 이날을 택하여 황제의
친경과 이천만 국민의 뼈에 맺힌 원한을 품고 적시(敵視)하는
일사(일본사신)을 한날에 맞아 들이도록 일을 꾸몄는가 말이다. 여기에는
필연코 곡절이 있어, 일부러 꾸민 노릇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적전은 장소가 비좁아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으니, 각학교의 각반에서 반장, 부반장, 둘씩만 내보내라는 지시요,
이등이가 들어오는 정거장에는 동적전에 보내는 몇십명 학생 외의
전교생이 다 나가서 출영을 하라는 것이었다. 지금같은 시절이 아니라,
서울안의 학교가 그리 많지 않다 하더라도,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까지
전교생이 동원 된다면 지금의 서울역--- 그때의 남대문역에서부터
이등이가 들어갈 왜성대(倭城臺)의 사처까지 좌우도열(左右堵列)로 사람의
성을 쌓게 될 것이니 굉장한 위의(威儀)를 보이자는 것이다. 임금의
거동이나 국가적 의례(儀禮)는 아주 초라하게 해서 집어 치우고, 나라를
뺏으려고 도끼 눈을 뜨고 손톱 날을 날카롭게 하여 가지고 오는
외국사신을 환영하는데에는 세계의 이목을 속이려는 얕은 계책도
있겠지마는, 첫째는 민심이 응하나 아니하나 어디 보자는 것이요, 둘째는
민중을 위압하는 틀을 세우자는 정책이었던 것은 다시 말할 것 없다.
이때의 한국정부라는 것은 허울만 남아 있었지, 샅샅이 파고 들어서
실권을 쥐고 있던 일본놈에게 좌지 우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왜 오늘 집에만 들어 앉었구, 동적전에두, 남대문 역에두 안나갔니?
금방 정거장에서 들어온 김의관(金議官)은, 저녁밥 되기를 기다리면서,
땅거미가 짙어가는 사랑마당을 빙빙 돌고 있던 조카 진하더러 못마땅한
눈치로 말을 걸었다.
동적전에두 못나갔는데, 무슨 정성에 그깐놈을 맞으러 나가겠에요?
작은 아버지께서 우리집 대표로 나가셨다 오셨으면 고만이죠. 김씨집
살일 났습니까
진하는 잘못하면 코웃음을 칠뻔하였다.
인제야 소학교 사학년인 열네살짜리로서는 엄청나게 숙성한 소리요,
어른으로서 들을 수 없는 괘씸한 말버릇이었다.
김의관은 하도 기가 막혀서 당돌히 눈을 말뚱말뚱히 뜨고 마주섰는 어린
조카 자식을 눈길로 나무래며 한참 바라보다가
(대가리의 피도 안마른 놈이 무엇을 안다고--- 썩썩 나가거라)라고
호통을 치려다가, 마음을 쑥 눌러서
그런거 아냐. 네깐 놈이 뭘 안다구 중뿔나게 그러는거냐? 남하는대로
따라가야지
이렇게 한마디만, 거칠어 나오려던 숨소리를 죽이며, 타 일러 놓고 획!
돌쳐 마루로 올라갔다.
진하도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고 대문 밖으로 휙 나와서 어두어 가는
먼산만 바라보고 섰다.
진하는 지금 어린 마음에 난생 처음으로 커다란 일을 하나 해내었거니
하는 으쓱한 마음에 잠겨 호기를 봄내고 싶었던 것이다. 정거장에 아니
나갔다는 것은 조그만 일이지마는, 이등박문이를 무시하였다는 일이, 즉
일본에 대항하였다는 것이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흥! 작은 아버지두 한때는 지사(志士)였지마는--- )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고, 민충정공(閔忠正公)이
순절(殉節)하였을 때는 하룻밤을 통곡으로 새우던 그 작은 아버지는 간데
없고, 그것두 말씀이라고 하시는거야? 하며 진하는 어린 가슴을 바르르
떨며 분개하는 것이었다.
하기는, 지금도 김의관은 고성낙일(孤城落日)에 마지막판인
정우회(政友會)를 사수하고 있는 것은 자기 뿐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정우회는 적어도 전날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정신과
투지(鬪志)를, 대한협회보다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으로서,
일진회(一進會)화 싸우는 굳은 결의와 지조(志操)는 결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내세우는 김의관이었다. 이런 것이 진하에게도
은근히 자랑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던 작은 아버지가, 통감 이등박문이를 마중 나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마는, 그것은 회를 대표해서 마지 못해 그랬다 치더라도 진하가
정거장에 안 나갔다고 해서 그렇게 얼굴빛까지 달라지며 무엇이 잘났다고
쥐뿔같게, 남 하는대로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나무란 것은 기막히고 분한
일이다.
항일투쟁은 어른에게 맡기고 너는 공부나 잘해라. 어린 것이 지금부터
그러한데 머리를 쓰고 속을 썩이게 되면, 공부도 제대로 하기 어렵고
일생을 두고 고생일 것이라고, 여기지름(여겨짐?)으로 그렇게 눌러버리는
것이라면, 또 다시 생각할 점도 있기는 한 일이다. 그러나 삼촌이
그렇게까지 조카자식의 장래를 염려하고 아껴 준다고 할 수 있을까?
김의관은 자식도 없지마는, 아들이 없어 하는 사람도 아니요, 조카자식을
맡았다해도 그저 와 있나 할뿐이지, 원체 가사에도 그렇지만 아랑곳을
하는 삼촌도 아니었다.
(에이, 시끄러운 세상! 이런 꼴 안보구, 시골에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도리어 좋았는걸!)
숙성한 진하는, 어른처럼 시국을 비분강개하고 삼촌에게도 반항하는
분심만이 치밀어 올랐다.
2
이제야 말이지, 월전에 송병준이가 나를 좀 만나자기에 가 보았더니,
그, 그러지말구, 이용구(李容九)를 한번 찾아가 보라더구먼. 온(원?)
말이나 되는 말이어야지
저녁때면 사랑에 모여드는 축들을 앞에 놓고, 김의관은 의기 양양해서
자랑삼아 하는 말이었다.
추파송정(秋波送情)도 있을법한 일이지만, 그래 조건은 뭐랍디까?
그 누군가가 말을 받는다.
조건이 무어거나 도대체 말 같아야 말이 되지
하며 주인은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영감의 개결(介潔)한 성품으론 그럴지 몰라도, 외곬으로만
생각할게 아닐듯한 것 같은데--- . 아무래도 점점 대세는 기울어져 가는
이 판국에, 누울 자리를 보구 다리를 뻗으랬다구, 미구에 닥쳐올 사태를
고려해 봐야지 않겠소. 한사람의 손으로 막아낼 대세(大勢)가 아니고
보니, 고집만 부릴게 아니라, 앞날의 보신지책이라는 것도---
옆에 앉았는 김의관과 연상약한 중늙은이가 천천히 말을 하다가 뒤를
흐려버리고 만다. 좌중은 침통한 낯빛으로 모두 덤덤히 앉았다. 그
침통한 빛이라는 것은 시국을 비분해서라느니 보다는
(무어 뻔한 일인데--- )
하고 더 앙버티어 보았댔자 별 수 없지 않느냐는 절망적이요
타산적이면서도, 체면상 그런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런 낯빛들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그야 내 자리는 벌써 마련되어 있으니, 염려말고, 이용구만
만나보라는거지마는---
김의관의 안색에는 그리 침울한 빛도 없고, 걱정이 된다는 검은
그림자도 없이, 가볍게 도리어 자랑 삼아 하는 말이었다. 그 눈치로
보아서는, 아까, 말이 안되니까 거론(擧論)할 것도 없다 고 쾌쾌히
큰소리를 치던 것과는 다르다. 송병준이가 일진회에 포섭하겠다는 것을
거절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라는대로 가도 좋지마는 어떻게 혼자만
가겠느냐? 몇 안되는 식구지마는, 부하와 동료들을 적당한 자리에 앉히게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라면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있다?)는 말 같다.
하여간 무슨말이 나오나 만나나 보시구려
또 누구의 입에선지 이렇게 권고하는 소리가 창밖으로 새어 나왔다.
사랑이래야 일자로 두간방 하나와, 장지를 격해서 달린 됫박같은 이편
끝방에는, 진하가 상노겸으로 대령하고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숙설거리거나 떠들어대는 소리가, 늘 그게 그 소리 같아서 별로
신통한 것도 없고 들어야 잘 터득이 되는 것도 아니니, 귀담아 듣자는
것도 아니나, 송병준이니 이용구니 하는 이름이 귀에 스치니 자연 그리로
정신이 쏠리는 것이었다.
자강회를 당시의 내무대신 송병준이가 해산시킬 때 펄펄뛰던 작은
아버지다.
그것은 고사하고 송병준이나, 이용구라면 삼척동자라도 모르는 애가
없다. 그 송병준이가 만나자는데 쭐레쭐레 가는 삼촌이 알 수가 없는
양반이요, 게다가 만나보고 온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다니? 아니, 그것
때문에 저렇게모여앉아서 숙덕공론을 하는 것인 모양이지마는, 이용구도
만나보라고 권고하는데에 작은 아버지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나 하고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었으나 작은 아버지는 거기에는 아무 대꾸가 없다. 의례
허세로라도 펄쩍 뛸줄 알았더니,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솔깃해 하는
모양이다.
진하는 입을 비쭉하였다.
송과 만나게 된 것은, 누가 중간에 나선건 아니요?
아니!
하고 보면 송병준이와 어느새에 친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송에게 진정해서
그런 운동을 하고 다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들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등이가 동경에 다녀온 뒤로는 좀 눈치가 다르대
또 누구의 목소린지 한마디 화두를 돌렸다.
왜?
좌중은 눈들이 커다래졌다.
이젠, 저는 차차 물러서려는 준비를 하는 눈치같더래
이러한 중대한 정보를 알아내서 제공한다는데에 큰 자랑을 느끼는 말
소리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성공자 거(成功者 去)니까
시국에 무슨 중대한 사태가 또 벌어지지나 않을까 해서 긴장하였던
좌중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에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날이 긴박해 가는 시국을 들여다 보면 기막힌 일이지마는, 저희로서는,
더구나 이등이로서는 성공자인 것이다. 하여간 이등박문이같은 거물이 이
강산에서 자취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뒤에 누가 오나 마찬가지라 하여도
다행한 일이었다.
후임에는 누가 올텐구?
그야, 증니(曾 示+爾)가 올라 앉겠지
부통감 증니황조(副統監 曾니荒助) 말이다.
과연 이 정보는 적중(的中)해서, 그해 육월에 이등박문이는 갈리고
증니가 통감이 되었다. 증니야 이등이보다 인물이 수층 떨어지지마는 다
파먹고 빈 껍질만 남은 --- 네 기둥만 남은 집 한채 쓰러뜨리기에 증니
아니라 증니의 손자인들 못하겠는가.
그것은 고사하고, 정작 송병준이가, 이용구를 시켜서
한일합방(韓日合邦)을 부르짖게 하고, 저도 이등이한테 긴하게 보이려고
앞질러 서두르다 도리어 이등이의 눈밖에 나서 내무대신을 내놓고
동경으로 가버렸으니, 김의관이 송병준이를 만난 것은 물론 그전의
일이겠지마는, 끈떨어진 망석중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요지막(요즈음)은 이용구를 만나고 어찌고(어쩌고)하는 문제도
식어버리고, 누구하나 그 문제를 다시 꺼내는 사람도 없이 잠잠하여졌다.
그러는 동안에 일제는 한국의 경제권(經濟權), 사법권(司法權)까지를
마지막으로 뱄어갔지마는, 한편으로는 다행히도 이 해(隆熙三年,
西紀1909年) 시월 이십 육일에 동청철도(東淸鐵道) 할빈(哈爾賓:합이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이가 우리의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에게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다행이란 말은, 우리의 적년(積年)의 원수를 갚었으니
말이요, 그보다도 또 하나의 큰 도둑 구명을 찾아서 장차 그 소위
대륙정책(大陸政策)이라는 만주침략(滿洲侵略)을 그 첫걸음에서 막아서
동양평화(東洋平和)를 위하여 그 공헌(貢獻)을 우리의 민족의 손으로
성취하였으니 말이다. 쉽게 해서 동양을 뒤흔들고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려는 강도의 우두머리를 잡은 셈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때를 놓쳐서 뺏길대로 다 뺏겼지마는, 문전에서 기웃거리는 그 강도를
뒤쫓아 간 우리의 안의사의 손으로 넘어뜨려서, 우선은 4억만 중국 백성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잘 수 있게 되었으니 다른 어느 동양사람보다 먼저
중국사람들이 고마워 해야 할 것이다.
하여간에 이등이가 죽자, 학교에서 이 소식을 들은 지하는, 입가에
웃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감추기에 애를 쓰면서도 속으로는
(그거 봐라!)
하고 곧 입에서 만세라도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비틀어진 정우회의
문패를 문전에 붙이고, 그 조고만 사랑방 속에 들어앉았던 김의관은, 이
소식에,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차츰 차츰 얼굴빛이 반 죽게가 되었다.
이등이가 죽었다고 무슨 뼈저릴 일이야 없겠지마는, 일진회에 들어가려다
만것이 뉘우쳐지면서, 통감부의 벼락같은 탄압이 자기에게도 휩쓸려 올까
보아서 지레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었다.
3
그후 반년 남짓 넘어 이듬해(庚戌年 - 1910年) 초여름 어느날이었다.
그동안에 진하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년생이 되었을 때다.
학교에서 파해 나와서, 삼촌 집에를 마악 들어 서려니까, 새파랗게 얼굴이
죽은 작은 어머니가 문간으로 마주 나오며, 오들오들 떠는 목소리로
얘, 작은 아버지 못봤니? 지금 금방나가셨는데---
하고 말도 잘 어무르지 못한다.(더듬거린다?)
아뇨. 왜 그러세요?
진하는 심상치 않은 기색에 눈이 둥그레졌다. 소식적부터 아이가
없다는 것이 핑계로 싸움도 잦았고, 첩을 몇씩이나 갈아 들어가며,
근년에는 영 본집은 모른척 하다가, 남은 땅데기나마 다 없애고야, 인제는
할 수 없어 작은 어머니한테로 기어들어서 고개를 못들고 사는 처지라, 또
늙은 이 내외의 싸움이 벌어졌고나고, 진하는 예사로히 생각하면서도 하두
서두는 품에 놀랬다. 그러나 작은 어머니는 울음 섞인 목메인 소리로
얘, 헌병대(憲兵隊)에서 모셔 갔단다!
하는 한마디에 진하는 눈이 번쩍 띈듯이, 손에 들었던 검정책보를 작은
어머니한테 내던지듯이 주고 곤두박질을 해서 문밖으로 나섰다. 진하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다만 한가지, 작은 아버지가 헌병대에 잡혀 갔다니
친일파(親日派)는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얘, 너 헌병대 아니? 바루, 요리 나가셨단다. 남산 밑이란다
삼촌댁은 허겁지겁 따라나오면서 전찻길로 빠지는 길을 가리켜 주었다.
진하는 듣는둥 마는둥 뒤도 안돌아다보고 달음질을 쳤다.
아무리 삼촌이라도 육친의 애정이나 정리로 문제가 아니다. 이 시절에
헌병대라면 목숨을 내걸고 끌려가는 생지옥이다. 한번 끌려가면 다시
살아 나올 가망은 없는데다. 거기를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가 끌려갔다면
생주검이 되어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러한테로(이런 곳으로) 잡혀가니
작은 아버지는 진짜 항일과, 배일파이었던, 역시 애국지사이었고나! 하는
생각에, 진하는 감격 하였다. 그런 것은 모르고 이때껏 오해를 하고
미워하였던 것이 뉘우치고 죄송스러웠다.
헐레벌떡 전찻길로 빠져 나가서 큰 길을 건너 사람이 복작대는 틈을
비집고 거슬러 올라가며 남산쪽으로 가는 길을, 좌우로 눈을 휘휘 돌려
찾으며 뜀박질을 하였다. 회색 학생복을 입은 조고만 소년은, 얼굴이
샛빨개지고 모자 차양밑에서는 땀방울이 비 오듯 하였다. 숨이 턱에 닿고
다리의 힘이 차차 풀리었다.
그러다가 어쩐둥 왜성대(남산) 쪽으로 휘는 길 모퉁에서 작은 아버지의
뒷모양을 눈길 끝으로붙들었다. 진하는 마음이 덜컥하고 급작시리
가라앉으며 기운이 확 풀려서 뛰어 가던 발길을 느꾸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이만한 거리면, 원광으로 놓치지 않고 뒤를 달키에 알맞았다.
무엇보다도 작은 아버지가 수갑을 차지 않은 것이 다행하고, 데리고 가는
사람도 군모(軍帽)에 검정테를 두루고 육중한 환도를 차고 붉은 장화를
신은 정복한 헌병이 아니라, 평복을 입은 것이 좋았다.
호젓한 관청거리인지, 사택 거리인지 일본사람의 거류지를 휘돌아서
두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데는 보초가 섰는 대일본 제국 육군
헌병사령부이었다. 두 그림자를 놓친 소년은 그 보초가 무서워서
문전까지 가지도 못하고, 멀거니 바라만 보다가 그대로 돌쳐서고 말았다.
그때의 진하의 꼴은, 지나가는 인적 하나 없는 헤넓은거리를 혼자 어깨를
쳐뜨리고 비쓸비쓸거리는 초상집 개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김의관의 같혀 있는데를 안 것만 다행해서 이튿날부터
하루 세끼 밥을 해 가기에 없는 하인을 불시로 얻어들이고 돈 구처를
하러다니고 하기에 작은 어머니는 밤잠도 못자고 얼굴이 반쪽만해졌다.
그러나 대관절 무엇때문에 붙들려 들어 갔는지, 언제나 끝이 날 일인지
알아야 말이지, 간신간신히 조석을 이어나가는 집안에서 초조하기란 짝이
없고 기가 막혔다.
그러던 김의관이 일주일쯤되더니 풀려 나왔다. 집안에서는
반가우면서도 도리어 깜짝 놀랬다. 진하도 어리둥절하였다. 진하로서는
반갑다기 보다도 잔뜩 삼촌을 존경하는 새로운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쉽사리 풀려 나온 것이 이상하게도 큰 기대에 어그러진듯이 서운한
것이었다.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하고 물으면 김의관은 그저 가벼이 웃으면서
응, 아무일 없었어. 저희가 설마 날 어쩔라구
하며 혼연히 대꾸하는 것이었다. 저희가 설마 나를 어쩔라구 하는 말은,
자기의 지체, 위신, 배경 등을 자랑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곧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의아하면서도 헌병대 라는데가
어떤덴데! 하고 가만히 눈치들만 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차츰차츰 생활이 늘어가는 것이 눈에 띄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어디서 돈이 새어나오나 이상하게들 생각하였다.
소위 정우회라는 간판을 문전에 붙여 놓고도, 겨울이면 화롯불 하나없이
입을 혹혹 불고 앉아서 그럴듯한 고담준론(高談峻論)만 서로 경쟁적으로
터뜨리고 있었고, 여름이면 부채 한자루 없이 땀을 질질 흘려가며 바둑
장기로 배를 골려가며 세월을 보내던 그들인데 김의관이 그 무서운
헌병대를 다녀 나오더니, 살림이 늘어간다는 말에 누구나 눈을 다시 한번
떴다. 진하는 힘이 빠진다기 보다도 풀이 없어졌다.
그런지 한달이 못되어서 김의관은 수표교다리 집을 내놓고
와룡동(臥龍洞)으로 새집을 사서 옮아 앉았다. 와룡동집으로 떠나왔을
때는 세간속에 정우회라고 큼직히 쓴 현판이 끼워왔기는 왔으나 광속에서
딩굴(뒹굴?) 뿐이요, 다시는 대문간에 내어 붙이지는 않았다. 아무도
거들 떠 보지도 않았고 그러한 문패가 있었던가를 생각하여 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영리한 진하만은,
(흠, 이건, 정우회 문패를 팔아가지고 이 집 사왔나?)
하고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눈치만 보아 왔다.
그동안에 김의관은 별로 출입하는 일도 없이 한가로운 그날 그날을
보내고, 예전같이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집도 전보다는 여간 커진
것이 아니고, 사랑채가 웬만한 살림살이를 할만큼 방이 셋이나 되건마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이 쓸쓸하였다. 그러자 김의관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집 개성집이 스르르 달려 들더니, 사랑에서 몇밤 지낸 뒤에 이내
세간까지 옮겨 들이고 딴 살림을 채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하기방학이 되어 저의 집 양주(楊州)에 나려갔다가 다니러 잠간 올라온
진하는, 점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보다 살림이 늘어서 안채에도 늙은
식모를 하나를 두었기 때문에 삼촌, 식모는 그래도 의지가 되겠거니
싶었지마는, 작은 아버지가 헌병대에 붙들려 갈 때 얼굴이 파랗게 죽어서
혀끝이 얼어 붙어가는듯 하던 그 기막히던 형편을 생각하면, 집안
덩그런히 컸을 뿐이지, 우중충한 그 안채에 혼자 내버려 둔 작은 어머니가
가엾기(가엽기?) 짝이 없고, 작은 아버지가 또 다시 미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나왔나? 남의 셋집을 내놓고, 이 와룡동 집을
사 오고, 개성 집을 다시 불러 들이고 한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양주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해도
그 누가 아니, 둘째 집이 잘 됐다니 좋지 않으냐
하시며 웃으실 뿐이요, 아버지는 그대로 눈만 껌벅껌벅 하시고 앉으셨을
뿐이었다.
4
개학 밑이 되어 진하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바루(바로)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늦은 아침에 동무집에 놀러 가려고 동구안(돈화문 앞) 큰길
거리로 나서 보니, 어쩐지 다른 때보다 길이 쓸쓸하면서도 어수선한
공기였다. 어린애의 육감으로 이상하다 생각하였다. 조금 나서 걷자니
벽에 붙은 무슨 커다란 종이 조각 앞에 허연 사람 그림자가 웅게
중게(옹기종기?) 몰켜서서 무언지 열심히 읽고 있다.
마치 언제 난리가 날지 모른다는 듯한 어수선한 세상인 것은 벌써부터
짐작하던 진하인지라, 깜짝 놀라서 쫓아가 보았다.
대문짝 반만한 커다란 양지장(洋紙張=서양종이)이 나란히 붙어 있는
앞에 사람이 삼지위겹을 해 섰으니 글자는 커닿건마는 자세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중에 더 큼직한 제목인 조서(詔書)니 칙유(勅諭)이니
하는 두가지 광고문 같은 것이 나란히 벽에 붙어 있었다. 하나는 일본
천황의 한일 합방의 선포요 하나는 가엾게도 여기에 따라가는 한국 융희
황제의 눈물어린 포고문이었다.
어른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비집고 나간 진하는 어려운 한자문자로
씌었으나 글방공부를 한만큼 그것쯤을 끝까지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진하는 일변 읽으면서 일변 울분에 터져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한숨 쭉 읽고 난 진하는 비집고 들어갈때와 같이 급급히 빠져나오는
길로 미아리 쪽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발길을 옮겨 놓았다. 삼촌집에 들릴
새도 없었다. 집에서 눈만 끔벅거리며 세상이 어떻게 되나? 하고 반가운
소식도 아닌 무슨 소식을 조마조마 기다리며 앉았는 늙은 아버지에게부터
알려드리고 싶었다. 아버지가 듣는댔자 백발 노인이 목청을 놓고 통곡을
할 것 밖에 없는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린가슴에서
시원할 것만 같았다. 아버지를 맞붙들고 한번 시원히 울고나 싶었다.
그바로 직후이었다. 세상이 한참 수선거리는 판인데, 작은 아버지 집은
소리없이 양주 큰 형님집 곁으로 떠나 내려왔다. 새집을 사 들었건마는
어쩐지 세상이 뒤숭숭하니 농촌으로 돌아 온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만주니 해삼위니 상해방면으로 망명을 하고 법석인데 일대의 정치가 가
아니라도 당대의 지사 로 자처하던 김의관이 여전히 소리없이
귀농생활(歸農生活)을 한다는 것도 쓸쓸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 세상이래야 고작 양주 일경이나 읍내 바닥에 지나지
않지마는 - 김씨집 중시조(重始祖)가 났다고 떠들던 김의관이 합병이 되자
다 없앴던 땅데기를 다시 마련해 놓고 처첩을 데리고 내려온 것을 보고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겉으로야 우리골에 큰손님을 새로
맞아들이는 것 같다고서 서로 칭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김의관이 금시발복한 것은 아니겠고 어디서 돈이
나와서 벼락부자가 되었는가고 장 거리나 주막에 모여 앉아서 김의관
이야기가 나오면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길을 아는 사람만 알 노릇이었다. 어쩌면 김의관이
헌병대에 붙들려 갔다가 일주일이 못 되어서 무사히 풀려 나와서는
아무일 없었어 하고 싱글벙글 하다가는 차차 돈을 풀어 쓰기 시작하던 그
앞뒤 경위를 잘 아는 진하가 더 잘 짐작할지 모르겠다.
김의관과 주축이 잦던 사람들은, 사촌이 땅을 산 것 보다도 더 배가
아픈듯이
대관절 얼마씩이나 먹었을구?
하고 말을 꺼낼라치면
고작해야 몇천원씩으루 입을 씻겼겠지, 일본놈의 그 바튼 솜씨에!
하고 이사람들도 많이 따져보려 들기에는 인색하였다.
그래도 설마. 몇만원씩야 차례가 갔겠지. 사람대접을 하기루
이사람아, 사람 대접두 사람나름이요, 저희(日人)들 눈에는 다 등급이
있거던, 하여간 헌병대 구치감 구경을 한 덕택에 집간이라도 지니게
되고, 땅 마지기를 작만해 놓고 배를 문지르고 살게 됐다면 상팔자 아니고
뭔가! 허허허
대개 이런 따위수작이었다. 김의관은 그 상팔자에 한몫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 놈 합방(合邦) 덕 본놈! 하고
으르렁대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고향에서 세교(世交)가 있던
집안에서들도 그러한 비난을 하고 덤비니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실상은 합방 덕을 본 김의관이기도 하였다. 애초에 일진회와 반대파인
정우회를 끌고 나갔기 때문에 합방을 단행하는 직전에, 요샛말로 하면
예비금속(豫備禁束)같이 불평분자를 붙들어 들여다 놓고 일편 위협을 하고
일편 회유(懷柔)를 하는 판에 견디다 못해서가 아니라, 첫마디에 네네하고
손을 들었는지 손도장을 찍었는지, 그런 소식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마는,
하여간 그바람에 집이 나오고 개성집이 다시 현신을 하게되고 땅데기라도
장만하게 된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김의관이 자기의 고향에서도 이태(2년?)를 부지를 못하였다.
시골에 들어앉아서 할일은 없고 그래도 활동력과 명예욕은 남아 있어서
하기 쉬운 노릇으로 교육사업에나 전력을 하여볼까 하였었다. 또 사실
그때 시절에는 삼면(三面) 일교(一校)制로 세면에 보통학교를 하나 밖에
세우지 못하도록 왜놈의 총독부(總督府)가 교육과 지식까지를 극도로
제한하던 때이고 본즉 민간의 힘을 동원하여 보통학교 - 즉 지금의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사립(私立)으로 세워보려고 무한 애를 썼어야
촌민들이 들어먹지를 않았다.
다른 이유도 많지마는, 첫째 이유가 김의관더러 솔선해서 기부금을 많이
내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거저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덕택으로 누거만(屢巨萬)의 졸부가
된거 아니요. 아니 당신 단독으론들 학교하나쯤 못 세우겠소. 그래야 그
죄 땜도 될 것이 아니겠소
하고 노골적으로 덤비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김의관에게 그런 돈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만일 학교가 된다면 김의관의 여생을 학교에서
돌보아 주어야 할 형편이었을지 모른다. 일본 천황의 사금(賜金)이랍시고
입 틀어막기 위하여 준 돈이라야 고작 오천원인데 이것으로 빚갚고 서울서
집 장만하고 개성집 데려오는데 빚 갚아 주고 어쩌고 하여 흐지부지
쓰다가 시알다곱쯤 남은 것으로 땅 마지기나사두었던 것인데, 딱 합방이
되고 나니 서울에 처져 있기도 창피스러워서 집마자 팔아가지고
고향이랍시고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처첩과 거기에 딸린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와서 예전에 쓰던
솜씨로 씀씀이는 과하고, 촌민이나 군청이며 일본 경찰들에게 잘 보이자니
교제비가 들고, 또 더구나 학교 설립운동 한다고 운동비를 들여가며, 한
이태동안 한푼 버는 것은 없이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이 쓰고 나니,
더 어떻게 지탱을 해 나갈 수 없는 곤경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다 못하여, 자 인제는 서울로 다시 올라가서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나 운동해 보자하고 집과 남은 돈마지기를 팔아
들고, 큰마누라는 형님집에 떨어뜨려 두고 개성집과 서울로 다시
기어들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염체불고하고 매일 같이 송병준이 집 사랑에 댁대령을 하여
살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송병준인들 한일 합방을 하기 위하여 한때
이용하고 부려먹기에 알맞은 인물이지, 꾀있는 토끼가 죽은 다음에야
사냥개가 소용이 무엇이랴 총독부인들 이제와서야 송병준이의 말쯤 무어
그리 대수롭다고 일일히 들어줄 리 만무하려니와 애당초에 송가부터
김의관따위의 청을 들어서 어수룩하게 총독부에 운동을 하여 줄 까닭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김의관은
내가 중추원 참의만 되는 날이면---
하고 중추원 참의만 되는 날이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것 같고
돈벼락이라도 맞을 것 같이 큰 소리만 땅땅 치면서 근 일년 무사 분주히
돌아다니고 나니, 전셋집 한 채나마 올라가고, 남의 집 현포(?)의 셋방
구석으로 기어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셋방으로 옮아 들던 날 개성집은
하두 기가 막히고 울화가 터져서
여보, 영감! 날(나)같은 주변성 없는 년이나 그래두 의관영감으루
모시지, 누가 이 세상에 일본말 한마디 할줄 모르는 당신을 중추원
참의를(로) 모셔간답디까? 아직두 정신 덜 차리셨구려. 어서 보따리
싸요. 시골서 마나님 기다리지 않소
하고 퐁퐁 쏘아대었다.
진하는 그동안에 아주 몰라보게 자라서 제법 어른골이 백여갔다.
삼촌집에는 한달에 한번 들릴가 말가? 개성집은 귀여워하는 편이었으나
삼촌밑에 있기가 싫어서 여전히 하숙생활을 하여가면서, 발길이 점점
멀어져 갔다.
학교는 원채 제동이라, 이학년에서 월반(越班)을 하여 사학년이
되어가지고, 이봄에 벌써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을 하면 동경 유학을
갈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될지 지금 망서리고 있는 판이다.
< 끝 >
1996년 5월 23일 10시 43분 !
<제 11 화>
海戰悲話(해전비화)
李星信의 最後 <제목,끝부분*>
산, 산, 또, 산---
산은 지금 향연이라도 벌리듯, 등어리가 으쓱하도록 단풍이 요란게게 타
오르고 있었다. 군봉(群峰)이 아득히 흐려간 너머 하늘로는 때마침
현란한 황혼이 무르익어 삼라(森羅)는 붉은 일색으로 휩싸인 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눈을 부비고 보아야 간신히 뜨이는 오솔길 옆, 보드랍게 마른 잔디위에
마치 돌인 양, 움직일 줄 모르는 채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체구가
날렵하게 크고 건장하면서도 안색이 매우 초췌한 그 청년은 초점을 잃은
시선을 들어 산, 아니 그 위 석양의 하늘, 보다도 그 너머 어떤 뼈저린
슬픔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청년은 천천히 둘레를 살피더니, 무겁게 몸을 일으키었다. 잠시
더 주위를 둘러 보다가 청년은 무릎을 간지럽히는 마른 풀을 헤치면서
골짜기로 내려 섰다. 잠시후 그에게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다. 반기듯
청년은 그 곳으로 가더니 덤썩 엎드린 채 벌컥거리며 물을 마시는 품이
몹시도 시장한 눈치였다. 입언저리를 닦으며 일어선 청년은 다시 산길로
되돌아 와서는 이번에는 좀 걸음을 빨리 하였다. 둘레거리는 품이 마을을
찾는 눈치였다. 길섶에, 바위틈에 철늦은 머루따위가 지척으로 뜨이건만
청년은 통이 모르는 눈치인 것이 우선 그의 복장, 여느 귀족으로서도 입지
못할 호화스러운 당사(唐絲?)였다. 문득 청년은 깨달은 듯 허리를
굽혔으나 손에 주어 든 것은 머루가 아닌 도토리 몇톨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개를 입에 넣는다. 씹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뱉아
버린다.
손에 있던 것조차 힘없이 풀섶에 던져버린다.
청년의 안면에는 어떤 적막한 설움과 함께 비로소 초조이 기색이 짙어
왔다. 고개마루를 돌았을 때 그러니까 그가 멀잖은 곳에인가 무엇을
발견했을 때는 창을 통해 흐르는 불빛을 보아야 했을만치 사위가 어둡고
있었다.
청년은 얼굴에 밝은 환희를 보이며 달리듯 가물거리는 불빛있는 곳을
향했다. 불빛이 새어 흐르는 한 집앞에 당도하자 청년은
여보시오, 여보시오!
자못 다급하게 부르며 문고리를 흔들고 나서야 흠칫 자신의 음성이
지나치게 격했음을 깨닫는다. 방안에서는 의연히 기척이 없다.
여보시오, 계십니까?
그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나즈막히 다시 불러본다.
누구요?
그제야 방안에서 기척이 일며 이어 문이 열린다. 청년은 빠르게 방안을
어 보았다. 놀란 눈으로 내다 보는 노인과 방안에는 역시 시선을
밖으로 준 채 쪼그리고 앉은 노인의 아내인 듯한 노파--- 방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뉘시오?
저 지나가던 사람인데 밤이 되고 해서---
아 그러시오, 들어오우
청년은 성큼 방안에 들어섰다. 메주 냄새가 역하게, 그의 코를 찔렀다.
청년이 좀 가라앉은 심정으로 다시 시장끼를 느끼려는 때, 밖으로 나갔던
노파가 바가지에 감자를 소복히 담아서 가져왔다.
원, 산중이라 드릴게 있어야지---
연상 청년의 비록 때가 묻었으나 윤이 흐르는 비단옷에 시선을 주면서
노파는 변명하듯이 말을 되풀이 하였다.
고맙습니다
근 반 바가지를 비우고 나서야 청년은 감자가 매우 아리다는 것을
느끼며 물그릇을 들었다.
자 이젠 이리 편히 앉으시지
고맙습니다. 잘 먹었읍니다
청년이 노인의 말대로 한 곁으로 물러 앉자 이어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전신을 휘감아 올렸다. 청년의 고개가 자꾸 앞으로 수그러짐을
보다가 노인 내외는 그를 조심히 눕혀 주었다.
깊은 잠에 빠졌던 청년은 선뜩 불길한 예감에 눈을 떳다. 문쪽에
인기척이 일었다. 매우도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이내 무언지 스며드는
영자가 뜨였다.
(아?)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터질번(터칠뻔?) 했다.
(공주다, 분명 공주가--- )
청년이 마비된 듯 온 몸을 주체 못할 때 잠시 방안을 둘러 보던 여인---
온 몸을, 그리고 머리 위까지 두터운 천으로 가리운 여인의 시선이 몸에
미치자
아!
역시 낮으나 매우 격한 감탄성이 터질 듯이 빨간 입술을 들쳤다.
태자마마!
수잇!
그는 일번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한손으로 달려 들려는 공주의 몸을
막아 밀쳤다.
태자마마!
공주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전신을 그에게로 던지며 쌔근히 숨이 찼다.
소녀는, 소녀는 기어코 찾고 말았군요. 이제 그러니 얼마만이던가,
태자마마께서 울며 불며 놓지 않는 소녀를 차디차게 뿌리치고 떠나신 이래
두삭--- 소녀가 얼마나 찾아 헤매었던지 아실는지---
청년은 경황중에도 방안을 둘러 보았다. 다행히 노인 내외는 어디로
갔는지 방안에는 둘 뿐이다.
비로소 그의 가슴에, 전신에 누를 수 없는 정열이 화끈히 달아 오른다.
그는 두팔을 들어 힘차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는다--- 아니 순간 그의
전신에 어떤 전률이 찌르르 역류함을 느끼며 허리를 움켜 안으려던 팔은
거칠게 공주의 몸을 밀어내고 말았다. 청년은 어떻다 지향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아아, 태자마마
공주는 놀람으로 전신을 떨며 마치 두달전 그가 떠나 올 때처럼 달려
들어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이제 갈려면 날 죽여 주어요
그때의 말고 똑 같은 말.
공주--- 왜 이러오, 놓으시오
안되어요. 차라리 죽이시든지---
-----
사뭇 거세게 등이 떨며 발앞에 쓰러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청년의 가슴에
어떤 벅찬, 뼈아픈 애욕과 함께 뜨겁게 밀려드는 회상이 있었다.
저물어 가는 신라국(新羅國)의 태자 김충(金忠)과 그리고 동녘을
불사르며 용용히 피어 오르는 신흥 고려(高麗)의 낙랑공주(樂浪公主)가
그처럼도 애틋하게 달깃하게 빠져들었던 언젠가 흘러 가버린 먼 장면들---
공주는 어여뻤다. 부드러웠다. 그는 공주를 결연히 밀치고 나선 이래
그처럼도 오랫동안 겪어 보았던 가슴이 뚫여버린 듯한 공허감과 적막감
그리고 아픈 고독감을, 그 참을 수 없던 애욕의 번민을 문득 기억한다.
청년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공주에게로 몸을 쓰러뜨리고 만다. 그는
공주의 전신이 찌릿이 피가 끓어 오르매 점점 고운 허리를 끌어 안는다.
그러다가 청년은 문득 문밖으로 귀를 모았다. 분명 어떤 기척이,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인으로서의 체험이 그에게 그의 전신을 휩싸 오는
어떤 살기를 번개같이 계시해 주었다. 순간 그의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굳어 왔다.
(속았구나 공주의 간계에)
그는 재빨리 공주의 몸을 밀치며 일어섰다.
아, 왜 이리?
놔라, 요망한 것!
노기 찬 호령이 터지는 순간, 그의 발길이 문을 박찼다.
와아---
기다렸다는 듯이, 마당으로 내려 선 그의 주위에서 함성이 일었다.
음---
그의 손이 날렵히 허리의 칼에 닿았다.
음?
웬 일인가. 그는 전신이 얼어드는듯 함을 느끼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는 그의 머리위로 아찔히 바람을 끊으며 흐르는 섬광---
악---
눈을 부릅뜬 채, 청년--- 아니, 가버린 신라의 태자 김충은 혼곤히 땀에
젖어버린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며 눈을 떴다. 충은 잠시 아리숭한 의식의
분기점에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고요하다. 함성도 가라 앉았다. 아픈
곳이 없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쓰러져 있어야 할 곳은 찬 마당이어야
할터인데 이곳은 분명 아까 누웠던 방 한구석이다.
응---?
비로소 한겹 의식의 <베일>이 벗겨지며 그는 좀 더 선명한 시선을
돌린다. 고즈넉한 적요--- 밤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요란한 밖과 달라
아늑히 다사로운 방에는 아무도 없고 다만 아까 그대로 그 노인 내외의
순박하고 따스한 그리고 놀람에 찬 시선 넷이 그의 행동거지가 매우도
이상하고, 두려운 듯이 지켜 보고 있을 뿐이다.
충의 입에서 기약없이 한숨이 새어 흐른다.
제가 무어 잠꼬대라도 했는가요?
웬 일이시오?
분명 무슨, 잠꼬대속에 실언(失言)이라도 있었던가? 순간 충의 가슴이
섬뜩히 내려 앉는다.
제가 무어라고 했읍니까?
아니, 알아 듣질 통 못했구려----- 자꾸 소리를 지릅데다---
충이 점차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자 노인은 몇번을 주저하던 질문을
했다.
대체, 젊은 분이, 아마도 귀하신 신분인 모양인데. 도둑이 들끓는 이
산중엘 뭘하러 가시우?
충은 저도 모르게 고소를 지었다.
노인께선 어떻게 이 산중에 사십니까?
의외로, 그 말에 노인내외는 어떤 충격을 받는 듯했다.
젊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오만--- 이 곳도 얼마전까진 그래두
이십여호가 어울린, 제법 마을다운 마을이었다우. 그런 것이 도둑들의
본거지가 이곳에 생기면서 동넨 망해 버렸구---
참, 노인께선 장하십니다. 이렇게 남아 계시니---
아니오---
노인은 잠시를 더 주저하더니
놀라지 마오. 우리 역시 말하자면 도둑의 무리인 것이라오. 아들놈
둘이 모두 산으로 가 버렸구려--- 우린 그 서슬에 떠나지도 못하고,
이꼴이구려
충이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말 저말이 오가는 사이에 어느덧 깊은 산중에도 여명이 걷혀오고
있었다. 노인은 무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문득
생각컨대 젊은이는 신라의 귀족이 아닐까 보는데--- 고민이 많아서
가는 길이라면 바로 집 뒤로 솟은 흰눈 고개 너머에 계신
백로선사(白老禪師)를 찾아 보심이 어떻소?
네 그 백로선사께서 이곳 가까이 계십니까?
그렇지요, 아시오?
(아아--- )
충은 눈을 감은 채, 환희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을 씹었다.
그실 충이 이처럼 고생스리 찾는 것이 바로 백로선사가 아니던가? 그느
ㄴ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듯 어느덧 시한(時限)을 건너 뛰어 과거의
사람이 되고 있었다.
저 곳이 백로선사께서 산다는 집인가?
예, 그러 하옵니다
* * *
저 곳이 백로선사께서 산다는 집인가?
예, 그러 하옵니다
충은 천천히 발을 들어 백로선사가 산다는 초막으로 다가 갔다. 그것은
몇개의 기둥과 가마니로 엮어진 지극히도 엉성스런 초막이었다.
계십니까
그는 흔들면 쓰러질까 보아 조심히 싸리담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다.
(아무도 없는겐가)
그는 기웃이 봉당을 넘겨다 본다. 그곳에는 낡은 미투리
한켜레(켤레?)가 놓여 있다.
(있나 본데-)
계십니까?--- 여보시오
역시 부답.
여보시오!
거 뉘시오?
스며드는 듯한 음성이 의외로 충의 등 뒤에서 났다. 충은 당황히
고개를 돌렸다. 백발이 윤기있게 길고 키가 짧달막한 도사 하나이
동자에게 짐을 들린 채, 충의 뒤에 서 있었다.
백로선생이시오니까?
충이 황망히 허리를 굽히자 도사는 빙긋이 웃음을 띄웠다.
아니오, 선사께선 지금 안에 계시오
예에?---
충은 도사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외양보다 달리 깨끗하게
밝았고 무엇보다 의외로 느낀 것은 백로선사의 풍채였다. 윤기가 흐르는
긴 백발은 도사와 별 다름이 없었으나 그 체격이 장대한게 어느 모로나
천군만마를 능히 호령할 장수의 상모였다.
충은 무언지 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공손히 앉았다. 백로선사는
잠시 충을 건너 보다가 다시금 눈을 감아 버렸다.
이처럼 찾아 뵙는 까닭은 이몸이 고민이 있어 꼭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옵니다
-----
부디 높으신 말씀을 내려 주십옵시오
그대는 뉘시오?
묻는 건 선사가 아닌 도사였다.
예, 신라의 한 청년일 뿐이옵니다
결국 물으실 말이 뭔데---
역시 도사의 말이었다.
실은--- 내외로 변란이 많고 상하군민의 기강이 해이하여 신라의
장래가 보기 자못 흉흉하옵기 좀, 시원하게 알고라도 싶은 초조감과
울분심에서---
잠간 침묵이 왔다. 충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백로선사의 마치 장님이
되어버린 듯이 잠겨진 채 뜨일줄 모르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침묵을 깬 것은 도사였다.
아마 선사님의 말씀을 듣기는 어려울거요. 내 일상 선사님의 말씀을
들은바 있는데이거라도 들어 주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대화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선사님 말씀이 신라는 비유컨대 <사위는 달>이라고 몇번 말씀이
계셨지요
그것은 오랫동안 체념되어 왔던 충으로서의 체관(諦觀)이기도 했으면서
그러나 그의 가슴에 쿵하고 떨어지는 거석처럼 전신이 아뜩했다. 충은
잠시 입을 벌리지 못했다.
그러 하오면---
결국, 문제는 젊은이의 의문이란, 뒤를 이을 천하가 무엇이냐는 것이
아니겠소?
도사는 냉소하는 기색으로 충을 건너다 본다.
아니오, 아니오!
충은 어떤 분노와 모독감에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악
문을 박차려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백로선사의 눈과 입이 열린 것은.
태자, 그대는 오느 후일 다시 나를 찾을 날이 있을 것이요---
그러나 그 말은 충이 먼 후일 간신히 기억해 낸 구절이었다.
백로선사의 초막을 나왔을 때는 알 수 없는 울분으로 산길을
들짐승처럼굴르듯 내려 왔을 뿐이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충은 고려의 왕과 함께 신라 땅을 밟은 왕의 장녀
낙랑공주를 만났고, 그런 후 얼마되지 못하여 다시금 그 백로선사의
초막을 찾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저물어가는 조락의 조국--- 보다도 충 개인에게 밀려드는 고뇌의 싹들.
그러니까 충이 다시금 초막을 찾은 것은 마침내 충이 불나비처럼 달려드는
공주를 안아 버린 환희와 회한의 밤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초막은 빈 집이 되어 있었다.
원래 백로선사의 거처가 봉래산(蓬萊山)이라는 말이 있다는
초동(草童)의 믿기 어려운 말을 들었을 뿐 실망과 공허를 안은 채 밤길을
달려 궁으로 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충이 동궁(東宮)에 이른 것은
이미 그믐달이 돋아 올 무렵이었다.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중문으로 들어서자 그는 훤한 초롱불이 마당
한쪽에 있음을 보았다. 찌르르 어떤 환희와 그리고 번민이 휩쓸어
올랐다.
(공주가 또 왔구나)
순간 전신을 엄습하는 어떤 거센 분노와 함께 말방울 소리에 황급히
다가오는 초롱을 뒤로 한채 말을 몰아 되돌아 서고 만 것이었다. 막연히
북을 바란 채(북을 향하여) 그는 말을 몰았다. 언뜻 봉래산은 이미
궁예의 땅이라는 깨달음에서 발길을 다시 돌려 궁으로 돌아 왔을 때는
이튿날도 밤이 이슥해서였다.
* * *
흰눈고개는 강파르고도 높았다. 고개를 다 기어 올랐을때는 이미 한
낮이 기운 때였다. 충은 땀이 배인 몸뚱이를 길섶 바위에 던진 채, 붉게
타오르는 눈아래 군봉의 절묘한 자태들을 멍하니 굽어 보았다. 어떻게
보면 아드윽히 멀고, 또 어찌보면 다가 들듯 가까운 봉우리들- 그것은
어느덧 몇몇 그리운 영자로 변한 채 군봉을 따라 눈앞에 부침명멸하는
것이었다.
서라벌을 나선 이래 들어 보았던 그 수다한 자신에의 소문들--- 그리고
자기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맨다던 공주의 이야기, 또 고려왕이 남몰래
사람을 퍼뜨려 자기의 행방을 찾는다는 것--- 자기가 떠난 이래,
찾아나섰다던 지기(知己) 김승규(金昇奎)와 석영재(惜榮宰)와 또, 누구의
소식들---
공주, 공주 공주, 고려왕, 자기를 찾아 필시 해를 가하려 헤매일 왕건의
부하들, 그리고 보고픈 승규 무리들.
(왕건 제가 내 재주와 공주를 사랑함에서 날 찾는다지만, 제 필시 내가
구국운동의 유일한 지도자가 될까 해서 두려워서겠지---)
이윽고 충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험한 산길을 헤매기 다시 한식경이
돼서야 충은, 백로선사의 거처라는 초막을 찾을 수 있었다. 전에,
서라벌에서 보던 그 초막과 별 다름이 없는 초막이었다. 충이 뛰노는
가슴을 붙안은채 울타리 근처로 접근했을 때, 마당에 멍석을 깔고 따스한
양지에서 졸고 있는 낯익은 노인이 있었다.
백로선사였다.
충은 우선 반가웠다. 백로선사만 찾으면 뭔지 구국의 비방을, 그 힘을
얻을 수가 있을 듯만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충은 깨우기가 송구해서 백로선사의 그 힘과 어떤 위엄이 흐르는
모습을 건너 보고 있었다.
왜, 안들어 오는 건가?
조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백로선사는 눈을 여전 감은 채 손을 들어
충을 가리켰다.
안주무셨읍니까?
백로선사의 오만한(태자에 대한 전에도 그랬지만) 태도에 비하여 충은
한층 겸손해 가는 자신을 어쩌지 못했다.
비로소 백로선사는 눈을 떴다.
결국은 왔군
백로선사는 빙긋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선사님, 저는---
아, 자네, 자네 심정--- 허나 너무 어려, 어려---
백로선사는 고개를 흔든다. 충은 말없이 그를 건너다 보는 수 밖엔
없었다.
자넨, 지금 무지개같은 꿈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네. 꿈, 저 산을
태우는 (그는 그때 속으로 아래를 가리키며)단풍과도 같은 정열일세.
그러나 이걸 알게
백로선사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찌르듯 충을 건너보며
신라가 망한 것이 무어 고구려나 백제의 고사(古事)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해. 말하자면 신라를 망하게 한 것은 어느 외적이 아닌, 순연한
신라자신이란 말일세, 모두가 제 모가지를 잘랐지--- 흐---
백로선사는 잠간 웃는 듯 했다.
신라의 백성들이 신라를 버렸고, 신라의 왕과 대신들이 신라를
꺾었네--- 알았나? 자네의 그 심정, 고구려, 백제의 왕성한 기운으로도
광복운동은 실패로 돌아 갔었네. 항차 이 신라야--- 이걸 알게, 신라는
이미 사위는 달이 아닐세. 이미, 서산을 넘어 선, 이미 이젠 신라는 없네
선사님!
아니야, 안된다니깐. 이제 신라는 존재치 않네. 태자, 아니 이젠
김충이지, 자네에게는 이제 또 다른 삶이 오는거야. 그걸 가르쳐 줌세.
나는 자네같은 사람이 고민을 안고 날 찾아 올 날을 기다린지 오래네
선사님
자, 이젠 더 입을 벌리지 말게. 자넨 이제부터 한낱 금강산의 춘, 하,
추, 동--- 이 무궁한 진리속에 파묻힌 미물이야 알겠나?
충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백로선사의 지팡이가 그의 어깨를 세게
때리고 있었다. 눈에는 화끈 빛이 일었다.
에익!
분노와 절망에 뻐개지는 가슴을 안은 채 충은 분연히 되돌아 서고
말았다. 눈물--- 왈칵, 까닭 모를 더운 눈물이 순간 태자의 볼로
줄기지어 타내렸다.
뒤에서 백로선사의 꼬장꼬장한 음성이 귀를 쑤시고 들었다.
흠, 너는 더 고초를 맛보아야겠다. 좋다, 좀 더 고생을 겪어라.
마침내 느끼는 때거 오거든 너는 다시 내게로 오리라. 그 간지러운 옷도
벗을게고. 낙엽이 지고, 흰눈이 고요히 온 산과 산을 덮느니라
* * *
배가 아파서 눈이 뜨였다. 해가 미처 자태를 내밀지 못한 사위는 이미
산새들의 뭔지 비창한 울음으로 향연을 이루었다.
충은 힘없이 일어나 앉아, 잠시 배를 주무르다가 세수를 하러 냇가로
내려갔다. 세수를 하려다가 그는 잠시 맑고 잔잔한 물을 들여다 보았다.
말할 수 없이 초췌한 얼굴, 더럽히고 여기 저기 비참히도 찢기운 옷매,
희망도 없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어쩌자는 자세도 없는 이 꼴--- 패배자
패배자.
왈칵 눈시울을 뜨겁히는 충격을 간신히 누르며 충은 몸을 일으키었다.
(나는 죽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죽을 결단조차 없는가---)
잘 보지도 못하던 이름모를 산열매로 배를 채우면서 어언 이렌가
여드렌가. 충은 어떤 의식의 혼미속에서 끝모를 수풀을 걷고 있었다.
멀리서 가까이서 애틋하게 또는 영롱하게 울려오는 산새들의 협주곡을
벗삼으며 걷다가 문득 좀더 이채로운 산새소리를 듣는다.
(저건 좀 못듣던 소린데---?)
왠지 한층 처량한 소리라고 느끼며 찰나, 그는 허리를 스치는 마른
풀사이로 몸을 던져 눕혔다. 엎드린 위로 시윗소리가 흐르며, 머리에서
두어간 떨어진 나무에 쩡, 화살이 박힌다. 충은 풀사이로 기어 재빨리
나무뒤로 몸을 숨기며 어느덧 손이 품속에 간직해 오는 단검(短劍)으로
간다.
그럴 필요 없어, 이눔아, 으하하하
그 소리는 충의 등 바로 뒤에서 났다. 그는 순간 자신이 여러 수상한
적에게 포위를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공포와 그리고 증오감이
경황의 폭풍속에 피어 오른다. 풀포기를 헤치며 그에게로 접근해 오는
무리들은 때가 찌든 두툼한 누비옷을 입었고 길고 날카로운 칼들을 제가끔
사려들었다. 간 간 활을 멘 놈도 뜨인다. 머리는 모두 검은 두건으로
질끈히 동이었다.
맥이 풀린다. 충은 반항을 버렸다.
(내 필시 자객들에게 잡혔구나)
어떤 괴로운 체념이 왔다. 두건들은 저희끼리 잠시 무어라 수군대더니
그래, 끌고 가지
그의 차림을 새삼 어보면서 상의가 끝났는가 싶더니 칼끝으로 충을
앞세운 채, 숲을 더듬기 시작했다.
(날 어쩌려는 걸까? 왕건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나 아닐까?)
어느덧 그들은 강파른 벼랑을 낀 산협 소로를 지나고 있었다. 벼랑
아래로는 아뜩, 깊은 골짜기로 자욱한 안개가 감도는 밑에서 물소리가
가늘게 들려 왔다.
(떨어지면 죽는다. 발만 삐긋하면---)
두건들은 충의 차림이며 안색이 몹시도 초췌하고 피로해 있음을 보아
별로이 경계하는 기색이 없이, 저희끼리 농을 지껄이며 산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바로 그때였다. 앞서 걷던 충이 문득 몸을 돌리는가 싶은
순간, 이어 벼랑밑으로 비명이 짜릿하게 멀어가며, 어느덧 충의 손에 칼이
잡혀 있었다. 잠시는 어수선한 긴장이 흘렀다. 비로소 자기들패의
하나이 죽었음을 깨달은 두건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몸을 도사려 충을
에워싸는 한편 예의 산새소리를 쳤다. 메아리가 아닌 응답이 왔다. 충은
빠르게 몸을 날려 앞길을 막아 선 놈을 찌르는 듯, 놈이 놀라 몸을 비키는
순간 몸을 빼쳐 산길을 달렸다. 어느덧 다시금 잔풀이 무성한 오솔길이
드러났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신호의 산새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충은
순간 돌뿌리에 채이듯 앞으로 넘어졌다. 일어 서려는 때 그는 자신이
올개미에 얽혀 있음을 알았다. 다시금 그는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그들이 충을 끌고 이른 곳은 예상과는 달리 도적들의 산채였다.
충이 선 주위에 이,삼십명 험상궂은 두건들이 둘러 섰고 통나무에 걸터
앉은 몸집이 장대한 꼿꼿한 수염이 검고 짧다란 사내는 바로 도적의
괴수인 듯했다. 그의 살기찬 눈초리는 어떤 분노에 타오르고 있었다.
네 놈이 내 부하를 죽였다지?
-----
넌 뭣하는 놈이지?
-----
뭣하는 놈이냐? 보아하니 농민은 아니구나
충은 여전 입을 열 줄 몰랐다.
넌 뭐냐 말이다. 말 못하느냐?
괴수는 낯빛이 붉어 오며 주먹을 들어 충을 가리켰다.
너는 이 무리의 괴수냐?
어? 이놈, 이놈 말버릇 봐라
죽이려면, 무사답게 죽여라
무어? 이놈, 못할 말이 없구나. 너--- 이놈, 관군의 밀정이지?
-----?
충에게는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살리는 건가? 비밀을 캐려구?
어서 대지 못할까?
그래도 충은 좀처럼 무어라 상념의 갈피가 떠오르지 않았다. 괴수의
옆에 섰던 키가 크고, 복장도 좀 말쑥한 놈이 그의 귀에 무어라 말을
흘려넣자 괴수의 표정은 잠시 누그러지는 듯 했다.
이거 봐라. 바른대로 말하면 네 목숨을 붙여주마. 넌, 관군의
밀정이지?
귀에 한 말이 이 말인 듯 했다.
아니다
그럼 뭐냐 말이다
충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가슴에 치미는 일생을 통해 처음
겪는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정-말 않겠느냐?
-----
음 그럼 소원대로 죽여 주마
괴수는 눈짓으로 한 놈을 불렀다. 잽싸게 생긴 두건 하나이(가) 긴
칼을 빼어 사리며 충의 앞으로 다가 나섰다. 둥그렇게 섰던 패들은
재미있는 구경이 났다는 듯이 이 모양을 바라 보았다. 어디선지 칼
한자루가 충의 앞에 던져졌다. 충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칼을
겨눈채 다가드는 놈을 바라보았다. 칼을 들 필요가 없을 듯 했다. 놈은
꽤 칼을 써 본 놈인 듯 했으나 정도(正道)를 닦지 못한 듯했다. 놈은
가만히 서서 칼을 들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충이 칼을 집어 들자 주위는
의연히 고요가 흘렀다.
야---압
놈이 달려 드는 순간 충은 가볍게 몸을 틀며 칼을 휘둘러 손쉽게 놈의
칼을 멀리 휘날려 버렸다. 순간 주위에서 어떤 긴장된 경악의 신음이
흘러 나왔다.
옛다
충은 들고 있던 제칼을 던져 주었다. 두 눈에 살기가 돋은 채 몸을
일으킨 놈은 충에게서 받은 칼을 겨누며 거세게 다가 들었다. 충은 빈
손.
어, 멈추어라
괴수의 소리와, 놈이 번개같이 달려든 것은 그리고 충의 몸이 약간 뒤로
젖혀지며, 놈이 배를 움켜 잡은 채 피를 물며 꼬꾸라진 것까지도 거의
동시였다.
와---아
경악에 찬 감탄성이 적개심이 흐르는 주위를 휩쓸었다. 괴수도, 그리고
아까 괴수의 귀에 입을 갖다 대군(대곤)하던 키가 크고 눈이 감때 사납게
찢어진 놈(부괴수인 듯 한)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와 겨뤄보자
입에 냉소를 담은 채 걸어 나온 것은 예의 키가 큰 놈이었다. 충도
주위의 격동에서 받은 자극과 내부에서 끓어 오르는 어떤 참을 수 없는
흥분을 전신에 느끼며 칼을 잡았다. 둘은 칼을 겨눈채 마주 섰다.
서로는, 서로의 실력을 느끼었다. 칼이 부딪쳤다. 그런가 하면 떨어지며
다시 부딪쳤다. 빨랐다. 눈부신 묘기.
막상막하--- 그러나 충은 당대 신라 수위의 검사임은 우선 신라전국이
알고 있는 터였다. 얼마 안 있어 양자의 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엇
한 소리에 상대는 칼을 떨어뜨리며 비틀거렸다. 상처는 없었다. 충은
뒤돌아 보지도 않은 채 눌린듯 고즈넉한 속을 돌아 섰다. 순간, 그는
몸을 비켜피했고 가슴을 바라고 날아 온 칼은 어깨를 뚫고 박혔다.
부괴수의 짓이었다. 모르는 결에 충의 손에서도 칼이 날랐다. 귀를
찢는, 전신에 소름을 일쿼주는 비명이 울려 왔다. 그 비명이 아련히
흐려가며 충은 의식을 잃었다---
* * *
집채만한 보다도 큰 산더미 같은, 보다도 무거운 무엇이 목덜미를 타
누르는 압박에 괴롭게, 어느덧 태자는 의식이 아련히 돌아 오고 있었다.
으--- 으음
자신의 신음에 아리숭하던 의식이 언듯 선명해 왔다.
(나는 살아 있구나---)
우선 그의 뇌리를 긋고 달리는 상념이 이것이었다. 그러면서 충은
자신의 주위에 누군지 인기척을, 아니 그들의 대화를 언제부터인가 듣고
있었다. 눈은 감은 채---
이놈, 참 가엾긴 해. 젊은 놈이 똑똑하게 생겼군
정신이 좀 드나 본데---
살아 나긴 하겠어--- 살아 났자 또 별 수 없는거지만
근데 왜 죽여 없애지 않구 살려 내지
이놈은 필경 관군의 첩자야. 허니까 살려 내서 오히려 그 내막을
알려는거지
허, 고문깨나 당하겠군---
이어 죽는 거지
대화들은 마치 남의 얘기처럼 들어가며 혼몽한 의식의 미로에서
헤매더니 문소리가 나며 놈들의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동안 마련한
의식상태가 지속되었다.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그때 또 문소리가
났다. 누군지 들어서는 기척이 왠지 좀 조심스러운 태도라는 것을
느낄만치 그때 충의 의식은 명료해 왔으나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무관심하려 했다. 들어 온 사람은 선채 잠시 소리가 없더니 이윽고 예의
조심스럽고 조용히 앉는 눈치였다. 머리에 손이 왔다. 충이 놀란 것은
그 손이 움찔 소름을 느낄만치 차게 느껴지도록 제 몸이 끓고 있는 사실이
아니고 보다 그 감촉이 놀랍게 보드랍다는 점이었다.
(여자가 아닌가?)
험궂은 산적굴에 이처럼 보드라운 손을 가진 여인이 산다는 것은 매우도
놀라운 일이었다.
(괴수놈의 첩?--- 딸?)
그런데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낮고 산사람(山民)답게 거칠었으나
틀림없는 여자소리였다. 처음에는 잘 들을 수 없었으나 이내 음성은 커
왔다.
---첩자는 아닌 것 같에--- 어느 귀족이 아닐까--- 어차피 죽일
놈이로군--- 죽이기는 아까운 걸---
이윽고 여인이 일어서는 기척이었고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적요---
충은 멀쩡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여인이 나가고도 얼마를 있다가
그는 눈을 떴다. 빙그르히 천정이 돌며 다가 드는 듯하여 그는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천정이 좀 아물거렸을 뿐 그다지
어지럽지는 않았다. 그는 누운채 고개만 돌려 주위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매우 더럽고 누추한 방이었다. 자신의 몸에 덮여 있는 이불깃이
새까만 때에 찌들어 있었다. 그리고보니 냄새도 여간 역한게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누비며 일어서려 상반신을 들며 팔에 힘을 주었다.
아---
어깨죽지가 불붙는 듯 뜨겁게 아파옴을 느끼며 다시 몸을 더러운 자리로
떨구었다. 그러는데 다시 문께에 인기척이 일었다. 충은 무심코 문쪽에
시선이 갔다.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사람.
아, 그 여자
순간,
어마
그녀쪽에서 한층 놀람과 당황을, 그리고 시원스러운 눈동자 위로 환한
빛을 드러낸다.
깨어났군
충은 그 서늘한 눈매며 곧은 콧날, 보다도 오려붙인 듯한 입술에서 문득
낙랑공주의 자태를 느끼며 잠시 뇌리가 혼란했다.
(정말 산사람 치곤 이쁘구나)
둘은 시선을 마주 한 채, 잠시 굳어 버린 듯 서 있었다. 이윽고 여인은
가가와 앉으며 충의 이마를 짚어 본다.
인젠 됐군---
그녀는 누구에게라 할것없이 낮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충은
말없이 그녀의 거동만 보고 있고.
그녀는 어디라 없이 촛점을 잃었던 시선을 들어 충을 바라 보았다.
충은 순간 전신이 아뜩했다.
(저건, 바로 낙랑공주의 눈빛이다)
언젠가 후원을 산책하는 충에게로 다가들던 공주의 애절한 눈매가
서언히 나타나며 지금 눈앞을 가려 선 그녀와 자꾸 겹쳐진다.
당신은 첩자는 아니지요?
-----
귀족이시구려
-----
귀족이라도 괴수는 죽일거요
충은 갸우뚱히 그녀를 치켜보았다.
(왜 이 여자는 내게 이런 이야길 하는 걸까?)
도둑이 되세요. 그러찮음 죽어요
그녀는 일어날 듯 잠시 몸을 일으키다가, 그러다가 충을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번개같이 몸을 들어 충을 끌어 안으며 쓰러졌다.
충이 놀랄 새도 없이 그녀는 얼굴을 맞부비다가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얼마를 충은 상념의 갈피를 찾지 못한 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산여자답다---)
언뜻, 자기도 모를 어떤 정열이, 삶에의 약동하는 의욕이 분수처럼
가슴으로 몰려 들었다.
(그렇다, 나는 살아야 한다. 이것뿐이다. 살자 살자)
충이 괴수앞으로 끌려 간 것은 이튿날 저녁 무렵이었다. 어제의 상처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쏟아질 듯 아팠으나 그뿐 그외의 상처는 없었다.
괴수는 아직 노기등등한 기색이었고, 그의 주위로 병장기와 그리고
형구(刑具)들이 즐비했다.
너, 바른대로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한다. 그렇잖음 죽을 뿐이니라
-----
충은 체념의 빛이 짙은 안색이 안온한 채 어떤 결의가 드러나고 있었다.
너는 관군의 첩자지?
아니요
아니라?
첩자라면 이런 눈에 뜨이는 귀족의 복색을 했겠소?
음---
괴수는 잠시 그 새카만 턱수염을 문지르다가,
그럼 넌 뭔가? 뭣하러 이 산중엘 왔는가?
태자는 잠시 주저했다.
넌 고구려국의 귀족이냐?
아니, 난 신라의 한 말단 귀족이었소. 그러나 지금은 이미 한 생령일
뿐--- 날 무리에 끼워주오. 원수를 갚고 싶소
충은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통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별로이
생각해 둔 말은 더욱 아니었다. 어떤 삶에의 의욕만이 횃불처럼 그의
가슴에 이글거릴 뿐이었다.
음---
의외로 괴수는 만족한 듯 했다. 그날부터 충은 무리에 끼워졌다. 그때
충은 스스로 반지러운 비단옷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억센 베옷을 몸에
감았다. 상처도 거의 아물었을 무렵 충은 무리를 따라 첫 작업에 나섰다.
오늘은 충의 수완을 시험하는 날이었다.
동해의 검푸른 해변으로 빠지는 좁은 고갯길 머리에 충은 앉아 있었다.
양 산비탈에는 지금 무리들이 숨어서 충의 거동만 바라 볼 뿐이었다.
온다!
충은 용수철처럼 뛰어 일어나 고개를 아래를 굽어 보았다. 까마득히
움직이는 띠끌(티끌)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일곱개의 점이
고개를 오르느라고 움직거리고 있었다.
충은 약간 가슴이 울렁거렸으나 상상외로 태연히 왔다. 이윽고
일곱개의 물건이 점점 다가오며 자태가 분명해 오자 그는 몸을 풀 사이로
숨기었다. 일행 일곱중 하나는 말을 타고 옷에 윤이 흐르는 것으로
상전인 듯 했고 네 사람은 큼직한 짐을 지고 있다. 나머지 건장한 체구에
가벼운 갑주까지 걸친 둘은 각각 환도를 잡은 채 각각 앞뒤로 호위를
한다. 큰 행렬이다.
일행이 고개 모퉁이를 돌 즈음, 풀속에 엎디었던 충은 칼을 비껴 잡은
채 천천히 길가운데로 나섰다. 그리고 놀람에 낯빛이 질려오는 일행을
손을 들어 세웠다.
무거운데 그 짐은 놓고 가거라
그러나 그 말이 멎기도 전에,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고 교교히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두 무사는 제각기 환도를 춤추며 충에게로 다가 오고
있었다.
검술들이 괜찮았다. 충은 약간 뒤로 물러 섰다. 그 서슬에 힘을 얻은
둘이 와락 달려든 것이 실책이었다. 충이 저모를 어떤 전지(戰地)의
흥분으로 칼을 휘두르자, 동시에 둘의 허리가 꺾이며 피가 분수가 되어
비릿내를 풍기어 솟구쳤다. 그제야 말위의 상전이 오던 길을 되돌아 말을
모는 소리가 나며 짐군들이 짐을 버린채 목숨을 얻어 달아나기에 바빳다.
그제야 산위에서 환호성이 일며 우루루 무리들이 나타났다. 순간 충은
아프게 가슴을 후비는 어떤 가책을 느끼며 눈앞이 아뜩했다.
(내가 사람을 이유없이 죽였구나)
밤이 이슥토록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옆에 곯아 떨어진 놈의
코고는 소리에 졸리다 못하여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소슬했다. 달빛은
푸르게 밝고도 몸서리치게 찼다. 그는 벌레의 울음에 끌리듯 산길로 들어
섰다.
벌레 울음, 서라벌의 가을, 아까 죽은 사람, 공주, 도둑, 지우(知友),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 공주---
문득 인기척에 고개를 돌릴 즈음 무언지 목을 조르며 매달리는 게
있었다.
그 여자였다. 괴수의 첩이라는 여인. 그는 사뭇 아프게 목을 조르며,
얼굴이며 입술을 마구 부비며 풀숲으로 쓰러졌다. 얼결에,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해서 화끈히 솟구치는 욕정을 깨달으며 충도 풀로 쓰러져
버렸다. 계집은 쌔근히 가쁜 숨으로 한참을 홀로,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는 충의 몸을 애무했다. 계집은 몸을 꼬며, 가슴을 헤치며 충에게
눈짓으로 팔굽으로, 몸짓으로, 몽실히 부드러운 젖가슴과 두 다리로
그에게 요구했다. 격렬한 그리고 애절한 요구--- 충은 저모르게 빨려
들고 있었다. 자신을 포기하는 아련한 유열속에서 둘은 죽음처럼 취한
채, 숨이 가빠 왔다. 격랑(激浪)이 우뢰처럼 급박하다가 아득히 스쳐
갔다. 둘은 피로한 몸을 풀 속에 던진 채 그냥 마치 모든것이 끝난 듯이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름이 뭔고?
버들아기
버들아기라---
당신은 어떤 사람이유 도대체---? 이름은 뭐유?
이름--- 이미 말했잖아? 야기랑(郞)이라구
피! 그건 가명이지요?
글쎄---
이튿날도 충의 칼은 몇번의 피를 보았다.
(조국을 버린 사람같지 않은 사람--- 죽여두, 죽여두 그래 어쨌단
말이냐)
충은 한번 눈을 흡떠 본다.
두개의 싸움과 그리고 이어오는 야수같은 칼부림과 버들아기의
정염과--- 이렇게 열흘--- 보름--- 어느덧 한삭이 흘렀다. 어느 밤 충은
괴수의 방으로 불리웠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버들아기가 괴수옆에
앉아 있었다.
---자네를 한달간 봐 왔네--- 놀라운 무옐세 놀라운 무예야---
괴수는 이미 벌겋게 핏기가 오른 취안을 들어 충을 건너 보다가
오늘 이처럼 부른 까닭은--- 좀 은밀히 상의할게 있어서이네---
괴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술을 한주발 목마른 듯 마시고는
금시 눈에 눈물을 담는 것이었다. 수년전 그의 아비가 죄없이 그 고을
군수에게 죽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복수를 맹세하고 입산을 했고, 그
군수는 고려에 항복하고 여태 그 고을에서 군수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이 예서 근 백리 남짓일세--- 내일이 바로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
날이야. 그래서, 나는 늘 벼루어 온 것일세, 언제구 내, 애비가 죽은 날
그 군수놈을 이 내 칼로 목을 쳐 주겠다구--- 그러나 알다시피 내
주위에는 사람이 귀했네--- 자네를 만나 그 얼마나 기쁜 줄 아나?
밤이 깊도록 숙의가 있었다.
이튿날 밤. 어둠을 타고 충과 괴수를 선두로 열명남짓이 뽑아낸 무리는
산을 내려왔다. 밤길을 달리기 한식경해서 그들은 커다란 담앞에
멈춰섰다.
여길세
괴수가 눈에 불을 일쿠며 말했다.
그 옆에는 버들아기가 남장으로 말위에 앉았다. 부하 두엇이
쪽제비처럼 담을 타 넘어 섰고 대문께가 잠시 어수선하더니 이내 소리없이
문이 열리었다. 소리없이 십여 무리가 마당으로 들어 섰다.
어느덧 충과 괴수와 그리고 버들아기는 군수의 방앞에 있었다.
버들아기의 손에는 횃불이 그리고 충과 괴수의 손에는 환도가 잡혀
있었다. 괴수가 문을 열어 젖혔다. 그 서슬에 먼저 기척이 인 것은
건너편 방이었다.
여, 누구냐?
그 방문이 열리며 어느새 칼을 잡은 두어 군졸이 뛰어 나왔다. 그러자
괴수가 먼저 칼을 번뜩였고 두 토막이 된 시체 둘이 충의 발앞에 쓰러지며
피를 뿜어 그의 옷을 적셨다.
누구냐?
비로소 군수가 잠을 깨어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쉬---
방안이 일시에 밝아 왔다.
으아?
발가벗은 채 돼지같은 군수가 몸을 뒤치며 눈을 치떴다. 그러자 역시
알몸뚱이인 계집이 겁에 질린 낯빛으로 방구석에 가 섰다. 괴수가
나섰다. 버들아기도 따랐다.
너 날 모르겠니?
나를 모르겠니?
누구---?
흥, 죽일 놈, 이 찢어 먹을 놈, 내가 바로 이향춘대감의 아들이다.
알겠니? 이 여잔 돌아간 김춘의 딸이야---
누, 누구?---
더 말 말아라. 오늘이 우리 부친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날--- 조용히
칼을 받아라
그 다음은 간단했다. 괴수가 칼을 날렸고 어깨죽지에 피를 뿜으며
쓰러진 몸에 버들아기의 비수가 꽂혔다.
와!
밖이 소란해 왔다. 셋은 한번 시선을 모았다가 밖으로 나섰다.
칼소리---
셋은 시체를 뒤로 하며 대문을 향했다. 부하들의 한 짓으로 이미 집은
불꽃에 싸이고 있었다. 한떼의 군졸이 꺾이고 잠시 고요한 새 그들은
부하를 앞세우고 이미 대문 근처에 이르렀다. 함성이 일며 뒤에 다시
한떼의 군졸이 달려 나왔다. 그때 충은 멈칫 말을 세웠다. 삽시에
괴수가 앞으로 지나치고 충만이 남았다.
왜 이래요?
멈칫 같이 말을 멈추는 건 버들아기였다.
저 봐, 저 소리--- 아 저기야
아, 저 애기말에요?
그래, 타 죽겠어---
충은 말을 내리려 했다.
저 뒤를 봐요. 빨리!
버들아기가 채찍으로 충의 말을 때렸고 순간 말은 펄쩍 뛰며 대문을
나서 버렸다.
아, 저 애기---
외치면서도 어느새 충은 밤길을 달리고 있었다.
몇년전 괴수나 제 가족들은 모두 굶어 죽었어요---
말등에서 버들아기가 한 말이었다.
왜, 산채로 데려오지---
아니, 우릴 잡으려구, 감옥에서 굶겨 죽였어요
충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충은 그 울음소리--- 깨는 듯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귀에서 머리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 충은 밤을 새웠다. 이튿날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열이 사뭇 무섭게 올랐다. 헛소리가 나왔다.
버들아기의 간호가 극진했어도 열흘을 앓고야 미음을 들 수가 있었다.
충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머리로는 그 밤의 그 모습을 그리며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일며 들어 선 것은
버들아기였다. 몹시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 봐요, 큰일 났어요. 저 아래서 큰 싸움이---
아니 관군이야?
아니에요, 헌데 장사들인가 봐요. 우리편두 위태해요--- 괴수와
두엇밖엔 안 남았어요---
무어?
오늘 아침 무리의 대부분을 먼 곳에 보내고 산채에 사람이 적던 것을
깨닫자 충은 칼을 쥐며 문을 박찼다.
충이 버들아기의 손을 끌며 싸움터에 이르렀을 때는 괴수와 또한
부하만이 남아서 한명 남은 적과 마주 서 있었다. 충은 더욱 걸음을
날리어 싸움중에 들어 섰다. 그 순간---
아아, 태자님!
아, 승규!
놀람도 찰나, 괴수의 칼이 섬광을 그었고
아악---
* * *
<<< 이 하 없 음 (편집오류로 추정됨) >>>
* * *
< 1996년 9월 11일 오전 3시 20분!>
<제 12 화>
望鄕哀話(망향애화)
阿非知의 九層塔 <제목이상>
하나, 둘, 셋, 넷---
분명히 느껴지는 살기(殺氣)가 넷이다.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왔다가 다시 멀어진다.
(쳇! 오늘만은 편히 쉴랬더니 또 귀찮아지겠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소리없이 자리를 일어선 시커먼 그림자 하나.
밤.
온 누리는 칠흑속에 잠겨버린 三경이다.
이슬을 받으며 노숙(露宿)하던 그림자는 살기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넷을 따른다.
그림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앞길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맹인(盲人)들이 나아갈 길 앞의 상대를 피하려고 더듬는 것처럼---
그렇다.
그림자는 바로 맹인인 것이다.
(네놈중의 두놈은 장한(壯漢)이군. 그리고 두놈은 좀팽이다. 그중
한놈의 손엔 오랏줄이 들려있단 말이다. 병장기는 칼이다)
맹인은 앞에 가는 살기 넷의 정체를 속으로 진맥해 보았다.
육중하게 놓여지는 발소리와 잽싸게 움직여지는 발소리로 장한과
좀팽이는 구별이 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를 듣고 오랏줄과
칼을 식별할 수가 있었다.
(누구를 생포(生捕)하러 가는 모양이군)
맹인은 여전히 뒤를 따르면서 생각한다.
그렇다면 뒤 따라갈 필요는 없다.
돌아오는 길목을 기다리자.
우뚝 걸음을 멈춘 맹인---
그가 바로 운월(雲月)이다.
맹인 운월(盲人雲月).
어디서 떠나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해가 있는 한, 보통 사람들도 따르기 힘든 속보(速步)로써 길을
걷고 해가 떨어지면 아무 곳에서나 노숙하는 걸객에 불과한 것이다.
운월의 주위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운월은 반드시 참견한다.
운월의 전신은 무엇일까.
어제 밤도 그제 밤도, 잡초속에 몸을 누인 운월의 주변에선 사건이
있었다.
그제다.
어둠이 쫙 깔린 초저녁의 칠흑속에 운월은 하루의 보행으로 인하여 좀
피곤해진 몸을 눕혔다.
고개 밑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했으나 운월은 별을 보는지 못보는지 그저 반뜻하게
고개를 가누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의 시각이 지난 후.
그렇다.
발소리가 들린 것이다.
사뿐 사뿐 놓이는 가벼운 발소리와 육중하게 놓이는 두개의 발소리가.
(흠, 여인과 사내군. 어떤 사이일까)
운월은 속으로 빙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호젓한 고개밑에도 찾아 든 초저녁의 어둠--- 그
속에서 이제 속삭여질 달콤한 사랑을 시울속에서 그려 보며---
두개의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들려올 즈음---
보아라!
어지럽게 다가오는 서너개의 발자국소리를---
(잠을 또 설치게 됐군)
속으로 중얼거린 운월은 풀섶에 누운채 지팡이를 단단히 거머 쥐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으나 지팡이 끝은 날카로운 송곳 끝 같다.
그러자---
뛰어 오는 기척.
여인과 사내가 뛰어 오는 모양이다.
그들이 바로 머리맡을 지났을 때---
우뚝 자리를 차고 일어선 운월.
(셋이다!)
운월은 상대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라! 도망 가면 어디까지 갈테냐!
굵직한 말소리가 어지러운 발자국소리 틈에서 흘러 나온다.
이어서
헤헤헤, 오늘이야 내 수중에 들었지
하는 소리.
그 비열한 말투에 운월은 잠시 몸을 흔들었다.
보화(寶花)! 제발 헛수고 시키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서라. 너에겐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
말씨와 말투로 인하여 쫓기는 사람은 죄없는 자요, 쫓는 놈들은 음흉한
놈들이란걸 운월은 알았다.
번개같은 동작으로 남녀와 추적자(追跡者) 사이를 뚫고 들어 간 운월.
누구냐!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들이 우뚝 멈췄다.
소경!
길을 비켜라. 앞이 바쁘다
이 길목은 아무도 못 지나간다
무뢰한!
칼을 뽑는 소리.
이어서 두개의 똑 같은 소리가 밤 바람 속에 퍼져 간다.
운월은 여전히 땅을 짚고 있는 지팡이 뿐!
이 놈은 내가 맡을테니 너는 어서 연놈을 붙들어라!
한 사내가 운월의 곁을 스쳐 빠져나가려 할 때.
그때다.
땅 끝에 꽂혀 있던 지팡이가 조금 움직였다.
순간,
앗!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사내의 육중한 몸뚱아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쨍그렁
칼이 제 멋대로 딩구는 소리가 났다.
놈이!
쓰러진 입에서 저주의 찬 소리가 흐른다.
하늘이 높은 줄 모르는 무뢰한! 베어 버릴테다!
소원이다!
우렁찬 소리와 싸늘하나 천근 무게를 가진 소리가 엇갈린다.
저승에 가서 후회 마라. 네가 저지른 업보(業報)이니---
이 몸이 할 말---
그 뿐.
잠시 죽은듯한 정적---
그리고 찰나의 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바람 소리.
그러나,
앗!
비명을 지른 것은 싸늘한 소리가 아니라 우렁찬 소리였다.
쨍그렁
칼이 땅에 떨어졌다.
어느새.
운월의 지팡이는 놈의 손목을 호되게 치고 있었던 것이다.
필경, 손목뼈는 부러지고 손은 팔뚝에 매달린듯 덜렁 덜렁 하리라.
다신 못 쓰게 된 오른 손이다.
쓰러졌던 놈과 남아 있던 놈이 좌우에서 한꺼번에 칼날을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그러나 미처 칼을 내려치려고도 하기 전에 두놈은
악!
윽!
하는 처절한 비명을 남기고 쓰러졌다.
지팡이는 땅에 꽂힌채 잠시도 움직이지 않는 듯 하였으나 어느결에 두
놈의 목덜미에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나마 이 방해자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읽은 장한은
그대로 땅에 부복했다.
우둔하와 몰라 뵈었으니 천한 목숨 한번만 살려 주옵소서
그 때 발자국 두쌍이 등 뒤로 다가왔다.
어느 분이시온지?
아직도 놀램이 가시지 않는듯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묻는다.
당신네는?
운월의 목소리는 부드러울대로 부드러웠다.
그 보단 먼저 존함을 알려 주옵소서
집도 절도 없이 떠다니는 사람, 이름도 없소. 모두들 나를 보고
운월이라 부르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그 보다도 오늘 밤 이 소란은?
말씀드리오리다. 소인의 옆에 있는 여인은 보화라 부르는 양가집
처자입니다. 보화의 부모와 소인의 부모는 우리들을 짝 지워주고 평생을
즐거이 살라 하셨읍니다. 한데 이 고을 병방(兵房)이 보화의 아리따움에
취해서 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고을 원님의 그늘 밑에서 세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변방은 보화의 아버지를 온갖 힘을 다 기울여서 못 살게
굴었습니다. 보화의 아버지가 관가에 끌려가서 얼마나 호된 변을
만났던지 모르옵니다. 지금 저희들을 쫓아 온 놈들은 병방의
졸개들입니다. 보화를 강제 납치하려고 무척 벼루었사옵니다. 집밖에
나오는 짬을 노렸지요
운월은 앞뒤를 알았다.
아무 것도 아닌---
그저 한 낱 계집에게 대한 야욕 때문에 피비린내를 풍기려는 사내,
병방에 대한 미움이 불끈 치솟았다.
자기가 나타나지만 않았던들, 이 사내의 목은 이미 떨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리고 보화는 개 끌리듯 놈들에게 끌려가서 병방에게 곤욕을
당했으리라.
그 다음은 보화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하지않으면 암살될 것이리라.
그리고 피살자를 잡으려는 소동이 일어날 것이고 억울한 누명을 쓴 또
하나의 사람이 잡혀와서 처형 되리라.
운월의 가슴속에는 병방에 대한 미움이 불끈 치솟았다.
(고연놈!)
다음날, 칠산 고을의 야산 밑에는 흑장(黑裝)의 장한 셋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고을은 발칵 뒤집혔다.
병방은 속으로 참으로 괴이하게 여겼다.
제 부하중에서도 칼 잘 쓰고 몸 날래기로 유명한 놈만 셋을 골라
보냈는데 그 누가 그들을 초개같이 쓰러 뜨렸을까.
이 고을에는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다.
더구나 칼을 가지고서는---
그런데 셋의 시체에는 칼자국이 없고 한결 같이 목덜미에 구멍이 뻥
뚫여(뚫려) 있었다.
상대의 흉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여간 무예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살해 방법!
고을에 수색망이 깔렸다.
그러나 용의자는 잡히지 않았다.
보화의 배필인 사내가 일단 붙잡혀 갔으나, 곧 풀려 나왔다.
그로서는 흉기도 없을 뿐 칼에 능한 셋을 죽일 수 있는 무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하루가 지난 다음.
다시 밤이 왔다.
병방은 안개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사내를 머리속에서 더듬어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안이, 알지 못할 불안이 엄습해 왔다.
자정이 되었으리라.
어느새 병방이 하루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들어 갔다.
날이 샜다.
동녘에 해가 솟아 오를 무렵.
고을 안은 다시금 발끈 뒤집혔다.
병방이 하룻밤 새에 누구에겐가 또 피살된 것이다.
아무도 어떻게 그가 살해 되었는지를 모른다.
다만 가슴 한복판에 비수자국이 있다는 것만을 감정했을 뿐이다.
큰 일이었다.
한 고을의 병방이 살해 되었다는 것은---
그 범인을 잡지 못할 경우에는 원은 파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누가 살해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낮 전에 여러 사람이 관가에 끌려 갔다 나오군(나오곤) 했다.
운월은 고을의 소동을 들으며 지팡이를 더듬 더듬 길을 떠났다.
(못된 놈들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
(그런 피는 얼마든지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이틀밤을 연거푸 사건을 일으킨 운월은 칠산 고을을 등
뒤에 두고 백리길을 걸어서 갑주 고을로 들어 왔다.
해가 저물고 이어서 어둠이 내려 덮이자, 그는 밤을 새우려고 길가에서
노숙할 자리를 찾았다.
(오늘 밤만은 편히 좀 쉴까)
그러나 그 생각도 산산히 부숴지고 또 다시 알숭달숭한 사건에 휘감겨
버리고 만 것이다.
운원은 한참을 기다렸다.
이윽고---
다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온다!)
온 신경이 귀로 갔다.
넷이다.
그러나 발걸음이 갈 때 보다는 더디다. 누구를 메고 오는 기척!
억센 사내의 어깨 위에서 뒤틀거리는 소리가 귀에 닿는다.
비단 소리.
(여인이다!)
입을 틀어 막았는지 소리 하나 없다.
(왜 이리 사건에는 여인만이 낄까)
차차 가까워 온다.
(규수 피납!)
곧 납득이 갔다.
야반(夜半)에 규수를 붙잡아 오는덴 필경 좋지 못한 곡절이 있을께다.
누구냐! 길을 비켜라!
어둠을 등에 지고 길 복판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
움직이지 않는 한 사람.
소리 친 사내는 이 의외의 출현자에게 무척 놀랜 모양이다.
아닌 밤중에 이렇게 호젓한 곳에 우뚝 서 있는 사내의 정체는?
짐을 맡기시오
싸늘하나 빈틈 하나 없이 갈아 앉은 소리가 말한다.
베어 버려! 귀 은데
커렁커렁한 소리가 말한다.
고이 짐을 맡기고 가시지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소리.
찰나.
칼 뽑는 소리와 이어서
으으윽---
하는 비명.
제법 안다?
경탄이 섞인 소리가 비꼰다.
(조그만 놈이다)
운월은 자기의 지팡이에 의하여 나가 떨어진 놈을 속으로 감정했다.
이내 칼 뽑는 소리가 뒤섞여 나고 그리고
악!
음!
비명과 비명이 처절하게 야기속을 흐른다.
어느 새 길 가에 동당이 쳐진 땅 위의 짐이 꿈틀하는 모양이다. 비명
셋이 연이어 나자 쏜살 같이 달아나는 외톨이 발자국소리가 운월을
상쾌하게 했다.
으하하핫!
검은 하늘로 운월의 호쾌한 너털웃음이 거침없이 퍼진다.
운월은 웃음을 거두고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몸을 굽히며 손을 뻗치자
손 끝을 통하여 전신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감촉!
그의 손이 두어번 놀려지자 여인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답하게 막혔던 숨!
그 숨이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공포에서 풀리지 않은 듯 콱 흐르지 못한다.
이윽고 운월의 부축을 받고 상반신을 일으킨 여인은 힘에 겨운듯 입을
열었다.
어느 분이시온지!
아!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어찌된 일이냐!
티 하나 없이 맑은 목소리이긴 하나 고통에 사로잡힌 성대였다.
오랏줄이 파고 들었던 자리의 아픔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리라.
그 보다도 어디로 옮기셔야지? 댁은?
긴 말 어찌 다 사뢰리까. 하찮은 목숨 건져 준 은혜 백골
난망이겠사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몸이 무엇을 했단 말씀이요. 댁으로 가셔야지?
댁은?
은혜를 입은 몸이 기망하기 어렵사오나 그 말씀만은---
여인의 뒷말이 가늘게 사라진다.
운월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어둠속에
망연히 서 있었다.
혹시?
운월의 가슴속에 그 어떤 감격이 벅차게 솟아 올랐다.
法水
반년 전의 얘기다.
봄의 향훈이 향긋이 몸에 닿는다.
해가 서산 마루에 걸려 있다.
저녁 연기가 집집에서 오르고 있었다.
길 가는 사람!
누가 부르는 소리에 운월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 말이요?
음, 당신 말이다!
운월은 목소리로 상대의 정체를 점치며 한발 다가선다.
무슨 볼 일이요?
소경!
운월의 흰자위만이 데굴 데굴 구른다. 요기(妖氣)가 운월의 전신을
싸고 있는 것을 불러 세운 사나이는 보았다.
운월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수평으로 오르더니 자기를 향한다.
사내는 운월의 몸을 감싸고 있는 요기를 뚫고 운월의 가슴속을 한참
파헤쳐 보다가
흉상(凶相)!
그러나 또렷이 내 뱉았다.
뭣? 흉상?
운월의 핏기없이 새파란 입술이 구겨졌다.
그렇소. 그러한 상을 검난(劍難)의 사상(死相)이라 하지
사내의 목소리는 조금도 동요가 없다. 오히려 검난(劍難)의 사상이라는
대목에는 힘까지 넣었다.
음! 우롱할 셈인가?
사내를 향하고 있던 지팡이 끝이 꿈틀거렸다.
이제는 해가 떨어진 어스름 속에 퍼지는 그것은, 무서운 살기였다.
내 관상에 거짓은 없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
그러자 사내의 목소리가 또 흐른다.
사람의 운명이란 지팡이로는 모른단 말이야. 역시 당신은
사운(死運)이야. 아무리 보아도 사운! 언젠가 당신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하고 말걸
그 목소리는 얼음 보다도 짙다.
죽지 않는다!
한마디 부르짖고 운월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 사취(死臭)가 풍겼다.
보아라!
운월은 한 발을 가벼이 벌렸다.
들개(野犬)리라.
털이 버숭 버숭한 강아지가 너털 너털 걸어오다가
캥!
하고 피를 토했다.
운월의 지팡이가 어느 새 강아지의 두골을 산산히 부수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죽는 것은 이 놈이다!
툭- 하고 죽은 강아지를 걷어차고는 덜렁 덜렁 걷기 시작하는 운월---
그러나 다음 순간!
몸을 돌리는가 했는데 오른 손의 지팡이가 마치 번개처럼 사내를
엄습했다.
나도 안죽는다!
그 소리는 열자나 떨어진 곳에서 들려 왔다.
흥! 언젠간 죽는다!
소경 운월은 한마디 씹어 뱉고 또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운월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사내는
흐---읏
하고 한숨을 길게 내뿜고 중얼거렸다.
무서운 놈이다. 소경이라 하나 걸음걸이가 범상치 않아서 무술을 익힌
놈인가 한번 시험하려 했더니 과연 광귀(狂鬼)같은 자식이야!
사내는 터덜 터덜 어둠을 뚫고 장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안에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타닥 타닥 타닥---
어둠의 저쪽에서 발자국소리다.
흩으러진(흐트러진?) 발자국!
휘청 휘청, 휘청거리다간 멈추고 또 걷기 시작해서 연약하게 계속
되다간 다시금 멈춘다.
급병이 발생한 사낸가? 취한일까? 그렇지않으면--- 혹?
-----피!
개처럼 코가 발달했는지 이 사내는 발자국을 향하여 뛰고 있었다.
그림자가 움직인다.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뛰어가는 사내다.
나무가 몇그루 있는 거리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
여자---
젊은 여인이다!
그 여인의 오른 편 어깨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큰일 났군!
사내는 여인을 부축한다.
정신 차리시오
이--- 이것을---
하며 여인은 허리춤으로 손을 넣으려고 한다.
내가---
사내가 대신 손을 넣어보니 하나의 봉지가 나왔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이 사내는 여인의 상처가 이미 출혈다량(出血多量)으로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으- 으- 으-
여자는 무엇인가 말할듯 했다.
하지만 이 사내는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말 하오. 다시 한번
-----
그러나 대답이 없다.
주검.
여인은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의 주름살이나 죽음의 공포조차도 없었다.
미모(美貌).
비록 핏기가 가신 얼굴이라 하나 어둠속에서 보아서 그런지 몸이 오싹할
정도의 미모였다.
어둠이 두 사람을 싸고 있었다.
삶과 죽음!
명암(明暗) 두개의 남녀의 자태가 거멓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어느 사이엔가, 그 사내의 주위를 흑장의 괴한 여덟이 둘러 싸고
있었다.
여덟명의 괴한이 이룩한 울타리에는 빈틈이 하나 없다.
보았다!
씹어 삼키는 듯한 소리로 흑장의 괴한 한사람이 말했다.
이리 내라
이번에는 등 뒤로부터 흐린 소리가 나왔다.
무엇을?
사내는 동요 하나 없다.
계집의 허리춤에서 꺼낸 것 말이다
그것 때문에 이러나?
내 놔라!
거절한다!
뭣?
어느 새 뽑혀진 여덟개의 칼.
이 사내를 둘러싼 여덟이 말없이 뽑은 것이다.
목숨이 날은다!
흐흐흥!
사내는 웃고 그리고---
오늘은 묘하게도 죽느냐, 사느냐 문답이 많은 날이군
에잇!
배후의 한 사람이 칼을 내려쳤다.
미친!
벌떡 일어선 사내는 어느틈에 허리춤에서 짤막한 칼을 꺼내서 그 사내의
배를 찌르고 옆으로 七척을 뛰고 있었다.
옆으로 뛰면서 짜르는 검법(劍法)!
횡비류검법(橫飛流劍法)이다.
원진(圓陣)에 뻥 뚫어진 구멍을 뒤에 두고 그대로 뛰어가는 사내.
빠르다.
마치 번개처럼.
그는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눈깜짝 할 사이의 운신(運身)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사내, 이름은 법수(法水)다.
그저 법수라고 불러 두자.
북악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
법수는 한숨을 내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여인의 허리춤에서 꺼낸 것을 보았다.
음---
법수의 입에서 흐른 신음.
지금의 법수의 손에는 금비녀가 들려있다.
그렇다.
여인이 법수에게 넘겨준 것은 찬란히 빛나는 금비녀였다.
머리가 제비꼬리처럼 갈라진 금비녀!
법수의 머리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정화옹주(貞花翁主)!
(정화옹주의 비녀다!)
법수는 속으로 외쳤다.
정화옹주의 금비녀는 소문이 세상에 자자했다.
청(淸)의 궁중에서 선사로 받은 비녀다. 그 머리가 제비꼬리처럼
생겼다는 소문도 아울러 퍼졌다.
그 정화옹주가 궁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 얼마전의 일이었다.
실종(失踪)!
하늘로 솟았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스스로 행방을 감추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피납(被拉)되었는가.
세상은 떠들석했다.
비록 공주는 아니라 하나 왕손의 실종은 말썽이 안될 수가 없었다.
법수는 죽어간 여자와 옹주사이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다.
(음, 옹주가 어디 계신지를 알리려 했나부다)
(어떤 음모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일각의 유예가 있을 수 없다.
옹주를 찾자, 옹주를---
(그래서 음모를 부수자)
(아까의 흑장 괴한들은 무엇일까?)
법수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홀연히 암자를 떠났다.
풍운이 일어날 것만 같다.
어떤 풍운일까?
피비린내를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달콤한 사랑! 옹주가 지니고 있는 애련(哀戀)을 볼
것인가!
검풍(劍風)이냐!
연풍(戀風)이냐!
하여간 풍운은 일어날게다.
법수의 걸음은 어디론지 향했다.
入山修道
등불이 반짝이는 초가가 보였다.
호젓한 집.
운월은 여인을 부축하고 길을 걸었다.
웬일이냐!
지팡이로 앞을 더듬지 않고도 성큼 성큼 잘 걸어가지 않는가.
괴상한 맹인이다.
괴인 운월.
그의 정체는 무엇이냐!
이윽고---
방안에 들어 앉을 수가 있었다.
기름쟁반에 담겨진 심지 끝에서 붉으레한 불꽃이 하늘 하늘 춤추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하나 있다.
힌자위만 있던 눈에 꺼먼, 초롱 초롱 빛나는 꺼먼 눈동자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운월은 소경이 아닌가?
맹인이 아니란 말인가?
옹주!
비로소 운월의 입에서 감격에 넘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수(廷壽)님!
놀란 눈동자와 함께 건성에 뜬듯 들리는 소리.
옹주!
아! 대체 이들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어떠한 비밀, 어떠한 참극이 있는가!
가짜 소경 운월.
그러나 언제나 눈을 감는 운월.
눈을 감고도 칼에 날랜 적 서넛을 무서운 무예로 무찌르는 운월.
그에게서 옹주라고 불리운 여인은 그를 정수라고 부른다.
노숙하려던 맹인의 뜻하지 않은 사건에 뛰어 들어 난지에 빠진 여인을
구했다는 그런 사실 밖에는 정말로 없던 이 밤이다.
운월도 정화 옹주도 뜻하지 않은 사실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얘기를 먼 과거로 돌려 보자.
그러니까 다섯해 반전의 얘기가 된다.
옹주의 나이 열일곱.
활짝 필대로 핀 옹주의 아리따움은 어느 사람이든지 한번 보기만 하면
황홀함에 을 잃을 지경이었다.
정수는 옹주를 본 이후로 오매불망 돋아나는 반달같은 옹주를 잊을 수가
없었다.
과거를 보아 승지가 된 정수는 궁중에서 옹주를 대할 기회가 있었다.
옹주도 사내답게 생긴 정수를 한번 보자 그만 열일곱해 동안 고이
간직해 온 그의 향긋한 사랑을 보냈다.
반년!
서로 안타까운 반년이 지났다.
남의 이목이 두려운 궁중이며 지체에 차이가 있는지라 두 사람은
터질듯한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한채 애틋한 나날을 보냈다.
매일 같이 같았다.
서로 호젓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사랑은 나날이 짙어가기만 했다.
그 무렵.
커다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정수는 어느날 입궐치 않는 하루를 소요하기 위하여 북악(北岳)밑
활터를 구경간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역시 비번인 무관들이 서넛 활을 가지고 나와 과녁을 겨누고
연거푸 시위를 잡아 당기고 있었다.
문관인 정수는 그저 망연히 구경하고 있었다.
서로 겨루어 가면서 활만 쏘던 무관들은 정수를 보자 저희들 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킬킬거리고 웃어댔다.
정수는 비웃음! 그들의 웃음 속에서 지독한 비웃음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자기를 비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비꼬는 풍은 도가 점점 높아져 갔다.
개들이 짖어대는 꼴은 정말 보기가 역겨웁더구만
상감마마 앞에서 남 모략 할땐 있는 주둥이 없는 주둥이, 다 까대고서
참새떼처럼 짖어 대는 주제에 싸움만 한번 나보지. 걸음아 나살려라하고
염체 체통 다 버리고 달아나기 바쁘지
분명히 자기의 옷을 보고 비웃어대는 것이다.
궁정에서나 어디서나 문관은 무관을 비웃어대는 버릇이 있던 터였다.
싸움터에 나가서 너희들은 초개같이 목숨을 버려라. 호강은 우리가
한다.
이러한 관념들이 문관의 머리에 틀어 백여 있었고 사실상 여러가지
면에서 그러한 사건이 나타나고 있던 때다.
무관들의 가슴속에는 은근히 반항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모였던 울분이 지금 조금 터진 것이었다.
그렇지. 주둥이만 깐 참새떼들!
정수는 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발길을 돌렸다.
몇발자국 걸어 갔을까?
그때 갑자기 등이 시큰하면서 고통이 온몸에 퍼졌다.
찌르르한 아픔!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이었다.
정수는 그 몽롱한 가운데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등어리의 고통으로 인하여 운신조차 할 수
없었다.
뼈가 으스러진 것만 같았다.
어느새.
해는 무척 기울고 인적이 드문 북악 밑에는 그만이 홀로 쓰러져 있었다.
옆에는 활촉이 뽑힌 화살 하나가 있었다.
(음---)
정수의 가슴에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분하고 원통함으로 인하여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무술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놈들!)
정수의 가슴에는 갑자기 무예를 익히고 싶은 충동이 일어 났다.
그래서 무기를 믿고 날뛰는 놈들의 코를 깍아주고 싶어졌다.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자기를 생각해 볼 때 그의 머리속에는 황홀한
공상이 뭉게 뭉게 피어 올랐다.
한번 결심한 정수는 잠시도 유예치 않았다.
몸이 회복되고 겨우 행동이 자유로워졌을 때 그는 입궐하여 퇴궐할 때가
되어도 퇴궐치 않았다.
숨어 있었다.
낮에 옹주와 밀회를 약속했던 것이다.
사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자정에 뵈웠으면
시종들의 귀를 피하여 잠간 속삭였다.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끄떡인 옹주는 그날밤 밀회하기로 지정한 장소로 나왔다.
정수는 비로소 떨리는 소리로 오랫동안 간직해오던 사랑을 고백했다.
옹주는 지체도 잊고 그녀를 대담하게 해주는 야음을 타서 정수의 품에
몸을 던졌다.
정수는 중책을 사임하고 무예를 익히려 입산할려는 결심을 토로했다.
옹주는 만류하지 않았다.
재회를 약속하면서 둘은 헤어져야만 했다.
정수가 품은 앙심은 그렇게도 굳세던 것이다.
정수는 곧 금강산에 들어 갔다.
거기서 검사(劍師)로 모신분이 맹인 초광(超光)선생이었다.
평안감사의 사원(私怨)에 의하여 두 눈알을 파인 초광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평양 감영에 있을 때에, 감사의 수청 기생 초월(草月)이가 그와
정을 통했던 것이다.
사랑의 바람이라는 것은 세찬 것이다.
이성을 여지없이 마비시키는 것이다.
초광은 초월의 정을 처음에는 받아 들이지 않았으나 아리땁고 우아한
그가 매일처럼 육박해 옴에 견디지 못하여서 정을 맺고 말았다.
눈을 잃은 초광은 금강산에 틀어 백혀서(박혀서?)
독심검법(讀心劍法)의 길을 닦았다.
독심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을 읽는 다는 것이다.
적과 칼을 마주 대할 때에 우선 제 마음을 구석 구석까지 읽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엔 자기에게 엄습해 오는 모든 적을 베인다는 것이다.
우선 바람으로 안다.
얼마나 굵고 가는 것인지가 구별이 간다.
한해 두해.
이미 초광은 자기 지척에 있는 모든 물체는 구별이 갔고, 자기를
향하여 날아드는 파리의 몸마저 두동강이 낼 수 있도록 숙달된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암흑에 티끌만한 이상이 생겨도 곧 감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수, 아니 운월은 그때부터 팔자에 없는 소경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후부터 네해.
운월은 단 한각도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운월은 처음 한 두달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반년이 가고 한해가 지나니 눈을 뜰 수가 없을 것 같았고
마음까지가 완전한 소경이 되어있었다.
네해 동안 정말 눈을 뜨지 않았다.
이미 앙심 품은 그인지라 초광을 초월할 정도로 독심검법에 숙달했다.
그는 체감(體感)으로 만물이 구별이 갔고 그가 한번 지팡이를 휘두를
때에는 그 주위에 운무(雲霧)가 끼고 번개가 그 속에서 번쩍 했다.
그가 선생앞을 떠나서, 삼천리를 떠다니기 시작한 것은 여섯달
전이었다.
폭력을 증오하는 그의 마음엔 광기(狂氣)가 끼고 있었다.
용서가 없었고, 인정이 없었다.
자기 등에 억울한 화살을 맞던 생각을 할 때마다 폭력자의 피를
보아야만 후련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거의 사건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지팡이에
악한들이 쓰러져 갔다.
그의 독심(讀心)에 착오는 없었다.
운월이 옹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서울에 나타났을 때에는
예친구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을 떳을 때도 동자는 시울 속에 감추고 흰자위만을 내놓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얼굴 모습이 정말 완연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옥같이 부드럽고 하얗던 살결이 거무틱틱, 울퉁불퉁 했고 몸가짐도
우아(優雅)를 떠나서 거칠어졌다.
그가 서울에 이르렀을 때 이미 옹주는 실종된 다음이었다.
그 소문을 귀에 한 그는 옹주의 실종에 일말의 의심을 품고, 옹주를
찾을 결심을 굳게 했다.
막연한 일이었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옹주를 찾아 낸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마찬가지었(였?)다.
우선 옹주를 찾기전에 그녀가 왜 실종되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흥인문 밖에서 그가 법수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劒風戀鍾
맹인의 육감이란 무서운 것이다. 운월은, 옹주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았는가 하는 의아까지 품어 보았으나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소문을 모으며 운월은 장안을 돌아 다녔다.
옹주에 대한 이야기꺼리가 구석 구석에서 벌어졌지만, 하나도 운월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말은 없었다.
옹주는 어디로 갔을 것인가?
무엇 때문에?
그때 운월의 머리에 떠오른 육감이 있었다.
혹시나?
궁궐 깊은 곳에 틀어 백여(혀?) 있는 옹주를 납치해 가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옹주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왜 옹주는 스스로 궁궐을 떠나야만 했는가.
기실 운월의 어림에 틀림은 없었다.
얘기를 돌리자.
후궁들이 머물고 있는 호젓한 곳.
밤이 이르렀다.
옹주는 밤내 잠도 못 이루고 그 어머님 되시는 숙빈(淑嬪) 홍(洪)씨의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한 두어달 전부터 시름 시름 앓다가 자리에 누우신 후로는 좀체 차도가
없는 터였다.
전의(典醫)의 백약도 아무 효험이 없이 숙빈 홍씨의 숨소리는 나날이
작아만 갔따.
이미 임종을 맞게 된 것이었다.
홍씨는 그날 따라 측근을 물리고 정화옹주만을 옆에 앉혔다.
그리고 그야말로 놀라운 사실을 그녀에게 얘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제 가기 숨은 곧 끊어지리라는 얘기와 아울러 세상에서도 끔찍한
소리를 옹주는 들어야만 하였다.
너는 상감마마의 피를 받지 않았느니라. 이 이 죄받을 몸이---
그리고 옹주의 안색이 지나친 놀라움으로 창백해질 때 숙빈의 숨은
완전히 꺼져 버린 다음이었다.
장례식이 있은 뒤.
옹주는 드디어 궁궐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자기는 왜 답답한 궁중에서 옹주라는 탈을 쓰고 답답하게 살아야만 한단
말인가.
떠나자. 궁 밖으로.
비록 빌어먹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는 궁밖으로 떠나야 한다고
옹주는 스스로 다짐 두었다.
옹주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값진 패물을 이용하여 사람을 매수하기에
성공했다.
그 매수된 자가 번드는 틈을 타서 옹주는 궁 밖으로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을 수가 있다.
궁밖으로 나가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옹주에게 갈 곳이라곤 없다.
그러나 단 한군데 머리에 집히는데가 있었다.
생소한 곳이기는 하나 어머님의 고향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어릴 때 늘 어머님에게 얘기를 듣지 않았는가.
갑주 고을---
그렇다. 그리로 가자. 그래서 연줄을 찾아보면 반드시 가까운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
그러나 이내 옹주는 머리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자기가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나라에서 가만 있지는
않으리라. 찾으러 오거나 찾아내면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러한 오뇌가 옹주를 감싸고 있는 반면에 하나의 즐거움이란 정수를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었다.
꼭 한번 밀회했던 생각이 달콤하게 그녀의 가슴속에 되살아 올랐다.
잠시 자기 머리를 기댔던 그의 가슴의 체취가 강렬하게 그녀를 엄습할
때마다 옹주는 기억속에서 아슬히 사라져 가려고 하는 정수의 모습을
안타까이 더듬었다.
옹주는 낯선 곳에 가서 무슨 짓을 하던 어떠한 시련을 겪던우선은
나가려고 하였다.
어머님의 고향인 갑주에나 한번 가보고---
어느 날.
달도 없는 칠흑이었다.
흑의(黑衣)로 몸을 걸친 옹주는, 가까운 시녀 하나만을 데리고 삼엄한
경비속에 싸인 궁을 빠져 나왔다.
순라꾼의 발소리조차 들리지않는 고요한 밤---
만뢰는 죽은듯이 잠자고 있었다.
궁궐 후문을 빠져 시녀와 둘이 발소리를 죽여가며 얼마쯤 걸어 왔을까.
갑자기
주위의 소란!
검은 그림자들이 서넛 움직인다.
아니, 서넛이 아니라 여러개다.
숱한 인원들---
옹주와 시녀가 미처 입조차 열기전에 어느새 그녀들의 몸은 자유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정신을 찾은 것은 어느 컴컴한 토방속에서였다.
어둠이 꽤 깃든 토방.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계집은 나가라. 그리고 옹주는---
이윽고 사내는 방을 비우고 밖에서 빗장을 채웠다.
그때 시녀는 옹주의 몸에 다가올 위기를 알았다.
곧 둘은 옷을 바꾸어 입고 패물까지도 시녀가 모조리 달았다.
금비녀--- 소문이 자자하던 금비녀도 시녀의 손으로 넘어 왔다.
한참 후.
다시 빗장이 열리고 시녀는 밖으로 내쫓기었다.
옹주만이 남은 토방에는 빗장이 걸려지고 시녀는 눈을 가리운채 어두운
골목을 이리 저리 한참 끌려서 어느 곳엔가 버려졌다.
홀로 된 시녀--- 아니 정화옹주는 걸음을 재촉하여 갑주를 향하였다.
어머님의 고향을 한번만 다녀서 어디로든 가리라.
한편 옹주가 시녀가 되어서 빠져 나간뒤에 가옹주가 된 시녀는 어찌
되었는가.
그보다도 옹주 일행을 납치하게 된 경위부터 더듬어 보자.
값진 패물로서 옹주가 번 서는 군사를 매수 하였을 때 그곳에는 커다란
암이 하나 있었다.
놈은 옹주의 탈출 계획을 불한당에게 내통했고 그 댓가로서 막대한
보수를 받았던 것이었다.
흥인문에 본거를 둔 독수리 일당은 이 놀라운 정보에 그들의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옹주만 자기네 수중에 들어 온다면---
그렇다.
그 이상의 재물을 얻을 수도 있고 또한 어떤 음모를 꾸밀 길도 열리는
것이다.
독수리 일당은 미리 내통이 있던 장소에서 대기하다가 옹주와 시녀를
납치했던 것이다.
옹주를 한번도 대해 보지 못한 독수리 패는 다음날 동이 훤히
터서야(도?) 시녀를 옹주인 줄만 알았다.
우선, 그들의 계획으로는 옹주를 딴곳으로 옮겨 놓으려는 것이었다.
옹주의 실종이 알려지면 곧 서울 장안엔 삼엄한 경계망이 퍼진다.
그렇게 되면 자기네의 죄가 들어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다음날 밤으로 시골 구석에 숨겨둘 작정을 하고 흥인문 밖으로
끌어 내려 하였다.
다시 밤이 이르렀다.
궁궐을 빠져나와서 첫번째 맞이하는 밤.
옹주는--- 아니 시녀는 놈들의 일당에게 끌려서 길을 떠났다.
시녀의 머릿속에는 도망갈 생각이 무럭 무럭 일어났다.
어떻게 이놈들의 수중을 빠져 나갈 것인가.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에 떠오는 것은 뒤를 본다는 핑계였다.
아무리 세상에 없는 악당이라 할지라도 여인이--- 그것도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한 나라의 가장 귀한 왕족인 분이 뒤를 본다는데까지 옆에 바싹
붙어서 있을 놈은 없을상 싶었다.
그러는 동안에 연락할 곳이 생기든지 아니면 도망 갈 수 있으라.
그러나 시녀의 이 생각은 잘못이었다.
여러놈은 그 곳에서 머물러 있었지만 한놈이 지키러 따라온 것이었다.
여럿 있는데서 좀 떨어진 으슥한 곳에 이르자 놈은 일을 빨리 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시녀는 옹주의 위엄을 가장해서 사람눈이 미치지 않는 호젓한
곳에 이르자 시녀를 지키는 놈의 욕정이 불끈 솟았다.
그는 앞뒤를 헤아릴 길없이 이 귀한(?) 왕녀에게 덤벼들었다.
시녀는 가슴이 철렁 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이 곤욕!
그러나 시녀의 머리에는 번개같이 계략 하나가 떠 올랐다.
왜 이래? 무엄한지고!
거짓 꾸짖었으나 다음 순간 시녀의 입이 악한의 귀 가까이 옮겨졌다.
이 몸 반항은 안한다. 궁궐 담속에서 이토록 자란 이 몸 무척 사내
품이 그리웠느니
시녀는 스스로 안겨 갔다.
놈은 이 너무나 황감함에 만사를 잃고
옹주마마!
하고 감격에 넘치는 소리를 질렀다.
이어서---
어둠속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바로 뒤.
으으윽---
목줄기로 기어드는 듯한 사내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시녀의
몸위에 덮치려던 놈의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시녀는 사내의 상징(象徵)을 두 손으로 꽉 움켜 쥐고 힘껏 나꿔 채었다.
사내가 쓰러지자 재빨리 몸을 일으킨 시녀는 어둠을 가르고 뛰기
시작했다. 쓰러진 놈은 의식이 몽롱한 속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나마
꿈틀거려 거의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서 한 두어 발자국 뛴 시녀의 등뒤로
칼을 던졌다.
음---
시녀의 비명!
그러나 그녀는 결사적으로 뛰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받은 시녀는 숨이 끊어질때까지 뛰다가 쓰러졌다.
그때 그 자리에 이르른 것이 법수 였다.
옹주의 뒤를 찾는 운월과 법수!
하나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의 옹주룰 위하여
탐험의 길을 떠났다.
이들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
운월은 서울에서 맹인떼거리에 끼이게 되었다.
맹인 불한당 거지, 그들 사이에는 언통이 있는 법이다.
운월은 불한당 패의 소행을 줏어 들었다.
운월은 불한당에 대한 증오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낼 수 없는 설움때문에 복수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법수는 옹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대로 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우연히도 같은 점에 착안할 수가 있었다.
나라의 옹주에 대한 의협에서 행동을 개시한 법수도 옹주의 혹 스스로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우선 그렇게 가정하고서 그길로 염탐을 해볼 심산이었다.
스스로 궁궐을 떠났다면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만 자라 온 그녀가 간
곳이 어데일까.
궁중에 들어 가기전까지 세속에 있었던 모후(母后)의 고향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모후의 친족에 의탁해서 살지도 모른다.
법수는 이런 경로로 숙빈의 고향 갑주를 알아내었고, 갑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운월은 시녀를 강제로 욕 보이려다가 겨우 정신을 돌이켜서 살아난 놈의
입에서 나온 말로 그것이 옹주가 아닌듯 하단 얘기를 들었다.
도망 가겠다는 일념에서 그런 잔꾀를 쓰도록 자라오지 않는
옹주였으리라.
옹주가 시녀 대신 납치 되던 날 밤에 도망쳤다면 어디로 갔을 것인가.
운월 역시 법수와 꼭 같은 추리--- 그리고 그것은 사실인--- 추리를
했다.
운월은 갑주길을 재촉하면서 사건 하나 하나 오고 가는 말 하나 하나에
정신을 바싹 모았다.
그동안 몇개의 사건을 치루었다.
운월의 재주, 독심검법은 사람의 피를 숱하게 보았다.
닥치는대로 해치웠다.
얘기는 돌아간다.
갑주에 이른 공주는 홍씨 일문을 찾았다.
모후의 친척중에서 꼭 한번 모후 덕에 시골 군수 한자리를 얻어 한 삼촌
되는 분을 만난 일이 있으나 그 외엔 궁중 출입이 금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난 일이 없었다.
양주에 들어선 옹주는 자기의 정체를 그대로 숨긴채 홍씨 일문을
찾았다.
찾아서 여생을 의탁하겠다는 마음은 없었으나 누구든지 만나 보아야만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가까운 친척을 만나지 못했다.
옹주가 비밀히 지녔던 패물로써 갑주에서 며칠 묵는 동안 그녀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져갔다.
옹주가 묵고 있는 집 주인이 그녀의 평상 거동과 식음법을 보고서
아무래도 상사람(常人)이 아닌 것을 눈치 챘다.
그녀의 목같이 고운 살결, 단아한 몸매, 무척 고상한 품이 구한 집
자손이라 해도 이만 저만 귀한 집 자손이 아닌 것 같았다.
뒤에서 수근 수근 말이 돌아 갔고, 선녀같은 여인이 갑주고을에 묵고
있다는 얘기는 인근 동네에 파다하니 퍼졌다.
옛날에 포도대장이라는 나라의 중직을 맡고 있다가 여자와의 치정관계로
인하여 상감마마의 노여움을 서서 벽지로 유배되었다가 풀린 후 고향
칠산에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는 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래 성질이 호랑이 같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포도대장까지
되었으나 여색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었다.
포도대장 시절에 무예에 능숙했던 부하 다섯을 데리고 집에 두었었다.
박노인이 옹주에 대한 소식을 모를 리가 없다.
귀한 집 딸?
그의 뇌리에 스치는게 있었다.
그가 조정에 있을 당시 왕의 총애를 받아 숙빈이 된 홍씨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힘이 컷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흥! 혹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딸일지 모른다)
포도대장은 당시 자기와 막역한 벗이었던 병조참판이 홍씨와 불의
관계를 맺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기는 병조참판을 협박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치부를 하지
않았던가.
음분한 피가 그 어미에게 있었으니 딸인들 없으랴.
박노인은 수하의 장한중 네명을 갑주로 보내어 옹주를 납치해 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월을 만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등불이 반짝이는 초가에서 오랫만에 진실로 오랫만에 눈을 뜬 운월, 아니
옛날의 정수와 정화옹주는 마주 앉아 있었다.
한참동안 말이 없이 감격에 차있던 정수의 몸에는 그 옛날에 불었던
사랑의 바람, 그러나 오랫동안 어느 곳에 머무른체 풀려나지 않던
연풍(戀風)을 쐬일 수 있었다.
거칠대로 거칠어지고 굳을대로 굳어진 정수의 몸에 사랑의 바람이
서서히 스며 들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읍니다
이미 굳어져 버린 그의 버릇 때문인지 보지 않던 빛에 눈이 부셔서인지
정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정수님 보입고, 보입고 싶었음니다
열일곱의 꽃같은 가슴에 사랑의 씨를 뿌려 놓고 홀연히 떠나버린 이
사내를 쳐다 보는 옹주의 가슴에는 새로운 설움이 맺혔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이까?
정수는 그제서야, 어둠속에서 옹주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가슴속에
벅차게 밀려오던 감격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다.
말씀 드리자면 기옵니다
그 얘기에 이어 옹주의 입에서도 그 말 못할 비밀---
커다란 비밀이 줄이어 나왔다.
음---
모든 것을 알고 난 정수는 놀랬다.
그리고 신음이 흘렀다.
이제야 우리가 속 편히 있을 날이 온 모양입니다
정수의 마음은 웬일인지 오히려 흐믓 하였다.
그 밤이 새었다.
감격에 찬 그리고 모든 인생이 일변하는 하룻밤이 지난 다음이었다.
이미 둘은 딴 사람이 아니었다.
예를 갖추지 않았다 해도 이미 지아비와 지어미는 찬란히 솟아 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초가집을 나섰다.
정수는 여전히 맹인이었고, 지팡이를 더듬었다.
그때다.
갑자기 그들 앞에 불쑥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다. 법수였다.
옹주를 찾아서 이곳까지 온 법수였다. 옹주와 같이 걷고 있는 맹인!
그렇다.
흉상(凶相)!
언젠가 흥인문 밖에서 만났던 그 소경!
(음, 그때다 예사놈이 아니었다. 그 비범한 무예. 그 기괴한 태도!
놈이 옹주에 대한 음모를 기도한 바로 장본인일지 모른다!)
법수의 가슴에는 뭉클 증오가 치밀었다.
흉상!
법수는 외쳤다.
흥인문 밖에서 외치던 바로 그 외침을---
그때는 놀림쪼였지만 이번에는 무서운 증오가 담겨 있는 소리였다.
음! 문밖의 놈! 개같은 놈!
운월은 대뜸 알았다.
그 소리.
아직도 귀에 남아있는 소리가 있었다. 살기가 어려오는 지팡이.
어느 새 법수는 짧막한(짤막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옹주를 모시러 왔다
법수의 소리
이어서
허허허헛
하늘로 하늘로 퍼지는 운월의 웃음. 서로 말하고 웃었으나 바람 한점
샐틈없는 무서운 경계였다.
서로의 칼끝이 파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장벽같은 방어.
흉상! 비명횡사수다!
죽는 건 너다!
이어서 살기가 어려있던 법수의 칼이 번개 같이 움직이면서 눈을 감고
있는 운월을 엄습했다.
정화는 길옆에 끓어 앉아 합장하고 있었다.
(왜 눈을 감으세요. 뜨시지 않고!)
열심히 기원했으나 그 말은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법수의 칼이 번개 같이 움직였을때, 옹주는 눈을 감았다.
이미 운월의 몸은 두 동강이가 나 있으리라.
그러나 그때까지도 짚은 채로 있던 지팡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니,
딱!
법수의 칼이 튄다. 놀라운 방어다.
옹주는 입을 벌린채 다물줄 몰랐다.
눈을 감고도 천하에 다시 없는 무서운 칼을 막아낸 정수!
그가 눈만 뜬다면---
이번에 정수의 지팡이가 무지개를 그으며 법수의 목덜미를 파고
들었으나, 이미 법수는 저쯤 뛰어 난 다음이었다.
뽀얀 안개 속에서 무지개만이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가끔씩 맞부딪치는 소리.
그때 운월의 가슴에 옹주에 대한 근심이 불끈 솟았다.
이 처참한 싸움을 보아야만 하는 옹주!
그녀는 지금 얼마나 애처로이 이 피비린내 이는듯한 대결을 보고있는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지팡이 끝은 법수를 노리고 있었으나 마음은 옹주에게 있었다.
보아야 견딜 것만 같은 이 안타까움.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운월---
앗!
운월이 눈을 뜨는 순간 법수는 지나친 놀라움에서 짤막한 비명을 남기고
몸을 피했다.
소경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함과 거의 동시에 법수는 횡비류검법의 묘(妙)를 다하여
운월을 공격했다.
음---
운월의 신음.
그의 허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흐른다.
눈을 뜬 운월.
그에겐 이미 독심검법의 묘에는 허가 생겼던 것이다.
광명(光明)이 파고 들은 허(虛)!
그러나 운월의 허리를 가르고 옆으로 나르는 법수의 목에도 어느듯
운우러의 손을 떠나서 허공을 나른 지팡이의 첨단이 깊숙이 박히고
있었다.
짧막한(짤막한?) 법수의 신음이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옆에서는 옹주의 울음만이, 애처로운 울음만이 한참
흐르다가 뚝 그쳤다.
울음 그친 옹주의 목에는 법수의 목에서 뽑은 운월의 지팡이 끝이 박혀
있었다.
어느 새 중천에 뜬 해가 뜨겁게 내려 비치기 시작했다.
한 여름 태양의 옆에 바람은 다 사라져 가고 만것이다.
칼 바람 사랑 바람이--- < 끝 >
1996년 11월 21일 03시 20분 ...
<제 13 화>
名妓哀話(명기애화)
可憐杜十娘
명나라 만력(萬歷) 연간의 일이었다.
북경태감(北京太監)에는 각지 청년이 천여 인이나 몰려들어 있었다.
한때는 북경 시내가 이를 좌감(坐監) 학생들의 판이 되고 말았다.
명나라 조정에서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입감(入監)의 전례를 만들었느냐
하면 이때 일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대병을 움직이어 명나라를 치려는
생각으로 먼저 조선을 습격하매 오래 태평에 젖은 조선은 도저히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급거히 이 병화를 명나라 조정에게 고하고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누차 황제 어전에서 회의를 거듭하여 마침내 조선을
도웁기로 가결은 되었지마는 큰 군사를 움직이는 데에는 막대한 군비가
필요한지라, 국고에 있는 현재의 돈으로는 도저히 그 막대한 군비를
담당(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필경 꾀를 낸다는 것이 태감(太監)을
개방하여 적지 않는 상납금을 받고 청년을 수용하여 군비에 사용하기로 된
까닭이었다.
이때 그들 청년가운데에 이갑(李甲)이라는 청년이 있었으니 절강
소흥부(浙江紹興府)에서 명문거족의 자손으로 유명한 이포정(李布政)의 큰
아들이었다.
이러한 집 큰 아들로 매양 귀히 자라고 응석으로 자라서 공부에 힘을
쓰지 못하였고 마음은 약하기 여자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청운의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동향 친구
유우춘(柳遇春)이란 청년과 작반(작당?)하여 북경으로 올라온지 이미
반여년, 좌감(坐監)의 목적은 달하였지마는 그 대신 전에 감히 하여보지
못하던 일 하나를 배우게 되었으니 그섯은 교방(敎坊) 오입이었다.
나이도 젊으려니와 인물이 여자와 흡사하다 할만치 고와 교방에
출입하는 허다한 남자 가운데서 특히 뛰어나 보이었다.
인물이 그러하였을 뿐 아니었다. 돈 쓰는데에도 그다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러한 인물과 이러한 풍도를 가지고 일없이 지낼 수는 만무하였다.
교방의 미인들은 서로 다투어 이공자의 총애를 받아 보고자 하였다.
그 허다한 미인 가운데에서 동무의 질시와 선망을 받아가며 마침내
이공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 개의 미인이 있었으니 그는
두십랑(杜十娘)이라는 기명을 가진 열아홉살 먹은 예기였다.
교방사원(敎坊司院) 천여명 예기 가운데에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미인으로 만도 유야랑의 인기를 끄는 아교(兒敎)이었다.
두십랑은 열두살 먹었을 때 지금 양모에게 몸이 팔려 와서 오늘까지
칠년 동안 수만금의 돈을 벌어 주었다.
그의 인기는 그의 고운 얼굴과 절묘한 기예와 아울러 그의 착한 심지에
있었다.
그의 심지는 이러한 화류계에서 드물게 보는 착한 심지였다. 동무중에
신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의 용돈을 절약하여서라도 힘껏의
동정을 아끼지 않았고 유야랑 가운데에 너무나 끝없는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미움을 각오하면서도 그의 비행을 극구 만류하기도 하였다.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일이 만도의 인기를 끄는데 가장
유럭하였다.
그리하여 두십랑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야망을 가지는 자가 나날이
늘어갔다.
그러나 두십랑은 여간해서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돈이면 무슨 일이든지 행하지 못할바 없는 화류계이지마는 두십랑의
절개를 깨뜨리지는 못하였다.
권력도 하잘 것 없었고 황금의 힘도 쓸 데 없었다.
이러한 두십랑이 한 개 한미한 서생 이공자(李公子)에게 몸과 마음을
아울러 기울일 줄은 누구나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두십랑은 이공자를 만날 날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굳센 힘이 둘의 몸을
붙들어 매어 주는 것처럼 떨어지기가 싫었다.
이러고도 내가 소위 명기이던가
이러한 반성을 하기는 하면서도 두십랑은 이공자의 곁을 떠나기 싫었고
이공자 앞에서는 마치 처녀같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었다.
이것은 두십랑이 그러할 뿐이 아니었다. 이공자 역시 두십랑과 자리를
같이한 이후로는 다른 교방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두십랑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밥맛이 없었다.
* * *
초련(初戀)에 미쳐진 두 남녀의 얼은 남보기에 해괴할만치 상규(常規)를
잃었다.
이공자는 몸에 지니고 왔던 돈은 이미 써서 없거니와 멀리 아들의
성공을 축수하고 있는 시골 부친을 속이어 적지않은 돈을 올려다가 이
교방에 흩였다.
그러나 사람의 정은 오직 깊어갈 뿐 그칠바를 모르지마는, 한 있는 돈은
필경 그쳐지고 말았다.
이공자의 부친은 아들의 방탕을 눈치채게 되어서 겨우 연명하여갈
돈만을 아들의 친구 유우춘(柳遇春)에게 부쳐서 아들에게 내어주게 할
뿐으로 넉넉한 돈을 보내지 않았다.
이것을 당하게 된 이공자의 가슴은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급하고
아픈 것은 두십랑의 사랑을 놓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리하여
이공자는 가졌던 패물과 서책까지도 내 팔아가지고 두십랑의 집에 출입을
계속하였다.
유우춘은 동무의 타락하여 가는 것을 보매 은근히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 권고도 하였다.
여보게 우리가 애초 교방에 출입하여 보게 됨은 열인도 하여 보고
견문도 늘려 보자는 것이었지 자네처럼 몰두 종사하자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만 정신을 차리는 것이 어떠한가, 유래로 교방 기녀란 믿을 수 없는
것이니
하면 이공자는
이것도 한 때이고 저것도 한 때이니 미칠 대로 미쳐 보겠네
하고 막가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공자는 부친의 마음을 거역하고 아내를 배반하고 친구를 잃고라도
한개 두십랑을 얻어 보자는 결심이었다.
두십랑 역시 이공자의 열렬한 사랑에 진정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으려니와 그 역시 모든 것을 잃고라도 이공자 하나만을 얻으면
만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열렬한 정이 맺어진 둘 사이에 한 커다란 장해는 역시
돈이 없음이었다.
두십랑의 수양모 되는 노파는 이갑(李甲)의 수중이 점점 궁핍하여 가는
형편을 보고 냉대하기를 시작하였다.
어제까지 이갑을 보면 바로 왕후 장상이나 맞이 하는 듯이 아첨과
봉명을 유공불급히 하던 노파가 오늘은 눈쌀을 찌푸리고 괄시하기를
마지않았다.
화류계란 돈이 없는 날이 인연이 끊어지는 날인줄 알면서도 이갑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발을 끊을 이공자는 아니었다.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이공자는 두십랑의 정을 유일의 편을 삼아 하루
궐하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런 중에도 가장 고생은 두십랑이었다. 이 눈치 저 눈치를 보아가면서
이공자의 마음을 즐거웁게 하자니 더욱 힘이 들었다.
노파는 이제는 노골로 두십랑을 꾸짖고 욕설까지 하는 날이 늘어갔다.
이런 빌어먹을 신세보지, 이마에 솜털이 미어지기 전에 얻어다가 인제
제법 돈푼이나 벌게 되니까 게다가 버러지가 붙어 일 참 잘 된다.
이럴랴거든 차라리 다른 교방에다가 몸을 팔아서나 그동안에 든 돈이나
빼게 해다고
하는 욕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두십랑의 덕으로 수만금의 돈을 벌어
먹었건마는 그런 소리는 꿈에도 하지 않는다.
두십랑은 듣다 못하여
아니 그게 어인 말씀이요. 이공자인들 한푼 두푼의 돈을 썼소,
오늘까지에 허비한 돈만 해도 볏백거리나 넘지 않소
그돈을 다 나 주었니, 그게 왠소리냐.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이노릇 해 먹는 년이 해가에 남의 사정까지 본다더냐. 정히 너 그 위인을
딸고 싶거들랑 네 몸을 물어달라고 그러려므나. 그랬으면 고만 아니냐.
나는 돈만 받았으면 그만이지 누가 널더러 살지를 말랬니, 보지를 말랬니,
같이 살던 죽던 내야 알배 있니
아니 어머니는 진정으로 하시는 소리요, 홧김에 하시는 말요
늙은 년이 무얼 못해먹어서 젊은 것 데불고 거짓말 해 먹으라더냐
아니 그러면 어머니는 내 몸 값을 얼마 받으시려우
노파는 이 말을 듣더니 코웃음을 치면서
얼마나 받으려우(?), 바로 돈이 있는 듯이 말을 하는구나. 다른 사람
같으면 천금을 준대도 부족히 알겠다마는 쿵쿵지가 된 이생에게서 받으면
멀마나 받겠니, 은자 삼백량만 삼일 안으로 내 노라고 그러려므나.
그것도 말이지 특별히 생각한 것이니까 사흘 안에 만들어 와야지 삼일이
넘으면 천금을 준대도 싫다. 사흘이 넘거든 행여 우리 문안에 발을
들여놀 생각을 말래라 만일에 그래도 뻔뻔히 들어오면 창피한 꼴
당하리라고 해라
노파는 한미한 서생 따위가 무슨 놈의 삼백금이 있으랴 하고 얕잡아
생각한 것이었다.
지당한 말씀이요마는 사흘 한은 너무나 혹하지 않소. 그야 삼백량 돈
만들려며는 못만들기야 허겠소마는 기위 선심을 쓰는데는 열흘만 한을
잡아 주시우
노파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낯으로
삼백량 돈 만들기가 어렵지 않은 사람이면 사흘을 해 무얼 허겠니마는
니가 그렇게 말하니 그럼 열흘을 보아 주마
하고 선선히 대답하였다.
열흘이 넘어서도 돈이 안되면 이공자인들 무안해서 다시 오기야
허겠소마는 만일에 돈이 돼서 온 후에 이러니 저러니 말씀은 마슈
죽고 썩어도 비릿비릿허게 굴 내가 아니다
하고 노파는 도리어 어깨 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이날밤 두십랑은 이공자와 한자리에 누워서 낮에 양모와 설왕설래한
내용을 이야기 하며
몸을 깍아 파는 수가 있더라도 여기를 벗어났으면 좋겠소
하였다.
그야 낸들 그 생각이 없나마는 지금 수중에 돈이 없으니 어쩌면 좋은가
정히 없으면야 허는 수 있소마는 친구다운 친구가 있다면 그만한 돈
돌려 주지 못하겠소. 다른 일과 달라서 돈 삼백량만 있으면 우리 둘이
꺼릴 것 없이 평생을 해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첫째 분해서 못
살겠소
음
하고 이공자는 한동안을 신음하다가
어디 그럼 내일 짐 단속을 해놓고 몇몇 친구를 만나보고 시골 갈
터인데 노수가 부족하다고 사정 사정해 보지 그리해서 줏어모아 보는 수
밖에
글쎄 그렇게라도 해 보슈, 설마 하느님도 하느님이지 우리더러
죽으라고야 허시겠소, 무슨 탁방이든지 나겠지
과히 염려 말게 어떻게 만들어 보지
이렇게 대답을 하였지마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이튿날부터 삼일 동안을 동분서주 하여 보았다.
말인즉 시골 갈 노수를 잠시 취해 달라는 것이었지마는 듣는 사람은
곧이 듣지 않았다.
시골서 상당히 지내는 문벌가로 만일에 아들을 불러 내릴 필요가 있다면
노수를 아니 보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는 족족
실패에 돌아갔다. 여출일구(如出一口 = 異口同聲)로
객지에 우린들 무슨 돈이 넉넉한가, 도리어 날 좀 꾸어 주었으면
좋겠네
하는 대답이었다.
* * *
벌써 나흘째 공연히 걸음만 걷고 말품만 팔았다.
오늘도 한편으로는 무안해서 두십랑의 집을 찾을 수도 없으려니와
객관에 들어가기도 당기지 않아서 유우춘의 집을 방문하였다.
무관한 터이기 때문이었다.
자네 요새 신색이 좋지 못하니 무슨 근심되는 일이나 생겼나
유우춘은 근심스러운 낯으로 이공자의 눈치를 본다.
이공자는 울울한 가슴 속이 이야기만 해도 풀릴 것 같아서 두십랑과
약속한 내력을 낱낱이 얘기해 들렸다.
유우춘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머리를 외두르며
잘못일세 잘못야. 두십랑은 당대의 명기로 기원 제일이 아닌가.
그러한 명기로 몸값이 겨우 삼백금이란 것도 말이 안되고 또 굳기가
쇠뭉치같은 노파가 그만한 돈에 두십랑을 내놓을 리 만무하여이. 그런
소리를 해 가지고 자네에게서 돈 삼백량을 울겨 먹자는 것이 분명하여이
하고 곧이 듣지 않는 것이었다.
울거 먹을대로 먹었으니까 그리고 자네가 돈이 없어진 것을 알고
그러한 어려운 문제를 내서 자네를 못오게 하는 꾀가 분명하여이, 내
생각같아서는 하루빨리 절교를 해 버리는게 옳을 것 같으이
하고 충고하는 것이었다.
글쎄 그것도 그럴듯한 말일세
이렇게 겉으로 대답은 하고도 이공자는 미련이 남아서 이후 삼일 동안을
동분서주하여 보았지마는 역시 헛애만 쓰고 말았다.
도합 엿새가 되었다.
두십랑은 이공자와 헤어진지 엿새가 되도록 아무 소식 없는 것을 보고
속이 답답해서 부리는 아이를 길로 내보면서
만일에 이공자를 만나거든 죽기를 한하고 모셔 오너라
하고 일렀다.
저녁때가 되어서 부리는 것은 이공자를 다행히 길에서 붙들었다.
무안해서 아니 오려는 이공자를 한사코 끌고 왔다.
서방님 대관절 웬 일이시우
하고 물었다.
이공자는 고개를 숙일 뿐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돈이 안된 모양이구려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엿새를 돌아다녀도 삼백량커녕 삼백푼이 안되니
무안해서 올 수 있던가
인정을 모르는 강박한 세상이 그르지 서방님이 그를게 무어요. 하여간
이 눈치를 양모에게는 보이지 마시고 오늘은 내게서 주무시우, 달리
생각한 배가 있으니
하고 붙들어 재우더니 이날밤에 두십랑이 장농 속에서 은자 일백오십량을
내 놓으며
내가 푼푼이 모은 돈이 이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유우춘
서방님을 보고 사정을 자세히 말씀하면 설마 퇴각이야 허시겠소.
나머지를 채워 주실 것 같소. 그 양반은 워낙 부호가 자제라 그만한 돈
없을 리는 없으리다
엿새 동안에 돈 한량도 구처 못한 이갑이에게는 한 커다란 서광이
비치었다.
이튼날 날이 새자마자 이공자는 그 돈을 몸에 지니고 발이 공중에 떠서
유우춘의 집을 찾았다.
유우춘은 이갑의 이야기를 듣고는 천만 뜻밖이란 낯으로
세상에 사람이란 경솔히 말못할 것일세그려, 두십랑의 심지가 그러할
줄 모르고 어쩌니 어쩌니 한 내가 부끄러우이, 참 세상에 드문 여자일세.
화류계 속에도 그런 여자가 있더란 말인가. 희한한 일일세. 염려말게,
그러면나머지 일백오십량은 내가 채워 놈세. 내가 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네가 속을까봐 그런 것이었네
하고 쾌락을 하고 몇번이나 감탄을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넨 복이 있네. 그런 부실을 얻다니
하고 부러워 하기까지 하였다.
이공자는 너무나 기뻐서 도리어 말문이 막혀서 얼빠진 사람같이 멍하니
있었다.
* * *
어머니 이공자께서 은자 삼백량을 만들어 가지고 오셨으니 받으슈
노파는 제아무리 정 아니라 무엇이 있은들 은자 삼백량이 무슨 수로
마련되랴 하고 얕잡아 생각하고 태평으로 있었던 것이 눈앞에 은덩이를 내
논것을 본즉 후회도 나고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한다.
설마 어머니가 날더러 전에 헌 말이 거짓말이라고야 허실 수 있겠소.
만일에 그렇다면 나는 당장에 자결이라도 할 터이니 깊이 생각허슈
두십랑은 결심의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이렇게 다졌다. 노파는 사리가
이젠 하는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일이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까 가는 수 밖에 있니
하고 저울을 내다가 은자를 달아 받으며
기위 가게 된 바에는 당장에 나가거라. 그리고 그동안 몸에 걸친 입성
패물은 하나두 건드리지 마라
이것도 사리에 당치 않은 말이언마는 두십랑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염려마슈, 당장에 나가오리다. 그리고 옷과 패물 등속은 상고해
받으슈
하고 노파가 장만해준 의복과 패물을 하나 깔축없이 챙겨 내주고는 그길로
바로 칠년 동안 정든 처소를 등지고 나왔다.
자아 우리 보교를 잡아 타고 유우춘의 집으로 가서 내두사를 의논하세
이공자는 아직 세수단장도 아니하고 자고난 헌옷 하나만을 몸에 걸친
애인을 바라보며 의논하였다.
천만에 이꼴을 하고 어디를 가겠소. 내 동무 사월랑(謝月娘)의 집으로
가십시다. 여기서 지척이니
두십랑은 눈물이 글성글성 해서 이공자의 팔을 잡았다.
세상에 화류계란 이다지도 강박한가. 소위 명기라던 계집으로 속신하고
나가는 꼴이 이다지 초초해서 옳을 일인가. 미웁든 곱든 칠년 동안 돈을
벌어주고 한솥의 밥을 먹은 수양모이어든 잘 가란 말 한마디라도 있는
것이 당연치 아니한가.
노파는 두십랑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대문을 걸어 잠그며
잘 살기나 해보지, 다시 행여 찾아오지 마라
한다. 이것이 사람의 인사일까. 이것을 생각하매 구차히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욕일까도 싶어서 한심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눈앞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정든 이랑이 있음에 다시
맘을 고쳐 먹고
자아 어서 가십시다
하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분하고 억울하고 괘씸해서 눈물도 나오지 아니하였다.
사월랑은 발바닥으로 뛰어나오다 시피 둘을 맞아 들이었다.
이공자가 두십랑을 속신코자 돈을 주선하러 다닌다는 말은 기위 들어서
알지마는 오늘 이렇게 들어닥칠 줄은 몰랐었다.
아니 그런데 아우님 속신하고 나오게 된 것이 기쁘긴 하오마는 대관절
어째 이렇게 초초히 나오셨소
하며 사월랑은 두십랑의 초초한 행색을 휘둘러 본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두십랑의 두뺨에 흘러나린다.
여보 세상에 이런 법이 있소, 이럴래서야 세상에 이노릇을 해먹을 연이
어디 있소. 우리가 팔자가 기구해서 이 짓을 해 먹으오마는 이런 냉혹한
대접을 받아보기는 난생 처음이구려
하며 수양모의 냉혹한 태도를 눈물섞어 이야기 하였다.
당한 두십랑보다 듣는 자들이 이를 갈았다. 신세가 일반인 처지에 있는
그들이라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아니 세상에 그런 몹쓸 늙은이가 어디 있나? 그게 인두겁을 썼으니까
사람이지, 온전히 죽지는 못허리라
이러한 욕설까지 하였다. 그리고 동정의 눈물이 저절로 솟아 올랐다.
사월랑은 이를 갈다시피 하며
가만 있게 아우님을 이렇게 초초히 보내서는 우리들의 낯이 깎이네
하고 일변 동무에게 통문을 돌리어 모이게 하고 일변 자기의 패물
등속으로 장신을 해 주었다.
형님 어쩔라고 이러슈
아니 자네가 당한 일이 내가 당한 일이나 진배 없네
하고 일변 부근 반관에 기별하여 성찬을 차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두십랑과 이공자를 주빈으로 성대한 송별연을 열었다.
* * *
이 송별연은 북경 화류계에서도 드물게 보는 굉장한 연회이었다.
일등기란 명기는 다 모여들었고 이렇다는 오입장이는 다 모여들었다.
반나절 밖에 아니되는 시간에 간신히 통문을 돌렸건마는 그 통지를 받은
기생들과 오입장이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평소에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던 두십랑의 인기가 그렇게 만든 것도
만든 것이지마는 주간(주관?)하는 기생이 당대의 명기의 하나로 유명한
사월랑인 덕도 있었다.
이날 밤이 초경에 가깝도록 진탕으로 놀은 후에 먼저 두십랑 내외를
사월랑 자기집으로 보내고는 사월랑이 일어서서 일장 설화를 하였다.
두십랑의 지금 처지와 수양모의 냉혹한 처사를 호소하였다.
사월랑의 눈물겨운 호소는 듣는자의 심금을 울리지 않고는 마지 않았다.
여럿은 의분이 일어나고 동정이 생기어 삽시에 전송금이 모여들었다.
나도나도 하여 성책에 응분의 금액을 기록하였다. 사월랑은 자기일처럼
기뻐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여러 동무에게 치사를 마지 아니하여
우리도 사람이란 것을 이런 때에 남에게 알려 봅시다
하고 부르짖었다.
두십랑 내외는 연회를 마치고 그날밤은 은혜를 입은 유우춘의 사관에서
하루를 이야기로 새웠다.
그리고 이튿날 곧 행장을 차려가지고 절강 고향으로 가기로 하였다.
고향을 떠나서 단둘이 새가정을 이룬다 할지라도 일단 시부모에게 신부의
예를 마치는 것이 도리에 옳은 것을 두십랑 자신이 역설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공자는 두십랑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기를 매우 꺼리어 하였다.
그대의 말이 지당함으로 가기는 가야하겠네마는 오늘까지 부모에게
불효를 끼친 나머지에 외첩을 데리고 간다면 상필 우리 둘은 문전에
들이지 않을 것 같으이
하며 두십랑에게 슬품과 고생을 끼칠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해서 호구를 하여 가든지 그대로 몰래
살아가다가 나중에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재삼 두십랑이 결심을 고치기를 바랐다. 두십랑은 의외라는 듯이
불만의 빛을 얼굴에 띄며
그게 무슨 말씀이요. 우리들은 평생을 누릴 결심을 하고 함께
되었거든 한때의 부모의 노염을 두려워하여 숨어 산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무슨 큰 죄라고 그다지 숨어 살게 무엇이요. 그뿐아니라 안사
천리라니 가사 아것이 불미한 일이라면 어찌 이 소문이 고향댁으로 가지
않고 말 리 있소. 만일 나중에 양친께서 아시고 보면 더구나 노염이 크실
것이 아니겠소. 부자지간은 천륜이어든 어찌 영영 뵙지 않고 말게 될 될
리 있겠소. 나 역시 한개 천첩이라 할지라도 공자를 평생의 남편으로
뫼시는 이상 어찌 시부모의 알아보심이 없이 지낼 수 있사오리까. 그런
말씀은 섭섭한 말이시니 행여 그렇다 생각 마시오
이공자는 두십랑의 도리 깊은 말에 대답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고 곁에 있는 유우춘은
여부가 있는 말이요, 지당한 의견이지. 여보게 이군 자네는 너무
심약해서 못쓰겠네. 부모의 노염은 한때의 노염이고 도리는 천고의
도리가 아닌가
하고 권하였다. 두십랑은 이공자의 눈치를 보며 한편으로 가엾게
생각함이었든지
만일 불쑥 들어가시기가 난처하시거든 함께 내려가서 나는 댁 근처에서
며칠 사관을 잡고 있을 테니 그동안에 부모님의 노염을 푸시게 하고
나중에 들어가 뵈옵는 것도 좋지 않소
이 말에 다소 생기를 얻은 이 공자는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떠나기로 합시다
하였다.
이리하여 곧 출발하기로 의논이 끝나매 유우춘은 사관 하인을 내보내어
하남으로 내려가는 배 한척을 잡게 하였다.
두십랑은 길을 떠나기로 결정이 나매 더욱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머나먼 뱃길이 비참하고도 애달픈 나그네 길이 될 줄이야
귀신 아니어든 어찌 짐작 조차 할 수 있었으랴.
* * *
이틀 동안을 유우춘의 집에서 정양한 두십랑 내외는 때마침 하남으로
내려가는 배를 잡아 타게 되었다.
배는 두돛배기 중선이었다.
마침 다른 선객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배는 마치 두십랑 내외를 위해서
꾸며 논 배와 다름없었다.
명화 두십랑이 연경을 뜬다네
하는 소문은 북경 화류계에 파다하여져서 이날 강두에는 때아닌 꽃이
만발하였다.
여느때는 지저분하고 혼잡하고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르는 부두에 오늘은
꽃같은 기생들이 향기를 피워주는 것이었다.
당대의 명기란 명기는 사월랑을 비롯하여 대개가 모여들었고 유명한
반관의 장괴들도 친히 못오면 대인이라도 보냈다.
개중에는 오입장이도 많았다. 평소의 두십랑에게는 직접 간접으로 폐를
끼치는 사람들은 구경 겸 모여들었고 이공자의 친구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구경하고자 모여든 군중은 부두를 시커멓게 물들여버리었다.
배가 닻줄을 감아 올리고 주황색 돛을 드르럭 드르럭하며 달아 올리기
시작하니 부두에 오른 여러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로평안(一路平安)의
인사를 부르짖었다.
이때에 사월랑은 조그마한 손궤함을 손수 받들고 배 위에 올라서
두십랑에게 전하며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동무들의 정성껏 모아서 아우님께 드리는
것이니 약소타 말고 받아주오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모인 것이니 함부로 열지 마시고 급할 때에
열어보슈
하며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금방 떨어질 듯이 가득히
고이었다. 두십랑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여러 동무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하겠소. 배를 나려(내려?)
일일이 치사할 수 없으니 형님이 대신해서 아뢰어주슈
하고 그 궤를 받아 옆에 끼고 뱃전에 나서서 여러 동무를 내려다보고
몇마디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감격에 눈물이 솟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 광경을 바라본 여러 기생들은 거의 다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코를
훌쩍어리었다.
유우춘은 육지에 내려서는 차마 바로 볼 수 없음인지 돌아서서 자꾸
눈물을 씻는 것이었다.
그 중에 수선쟁이 오입장이 하나가
기쁜 길을 떠나는데 눈물이 웬일이요. 자아 배가 떠나니 고별이나
허슈
하고 소리를 치며
두십랑 내외 백세천세!
하고 부르짖었다.
삿대가 육지를 밀어 넘기매 육중한 배는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하고
여럿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일로 평안히 백세를 누리시오
하는 인사의 소리가 한덩어리가 되어서 부두를 뒤흔들었다.
무심한 배는 물을 헤치며 몸을 돌린다. 이공자는 손을 들어 여럿에게
인사하고 두십랑은 뱃전에 머리를 대고 엎대어 운다.
이 아름답고도 애처러운 광경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구경군들도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 제-기 북경에 자랑거리 하나 없어졌네!
하고 히히탄식을 하는자도 있었다.
* * *
노수가 모두 얼마나 남았소
하고 이공자는 두십랑에게 묻는다.
연경에서 떠난지 사흘후에 풍우가 대작하여 중간 어느 연강 포구에 배를
대고 사, 오일을 묵고나니 서울서 지니고 떠난 이십량 노수는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아서 심약한 이공자는 이렇게 아내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두십랑은
이십랑을 가지고 떠났으니 얼마나 남았겠소. 그러나 설마 노수가 없어
중간에 봉변이야 하게 되겠소
돈 없으면 봉변이지 별 수가 있소
정히 그렇게 심려가 되시면 안심하시도록 보여 드리리다
하고 두십랑은 한편으로 너무나 심약한 이공자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애인의 심려를 덜어주기 위해서 출발임시에 사월랑이 전하고
간 조그마한 상자를 끌러 이공자의 앞에 놓으며
이걸 좀 열어보슈,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마는 어려운 때에
열어보라고 했을 적엔 기필코 그 속엔 돈이 들어있을 듯 허오.
이공자는
당신에게 준 것이니 당신이 끌러보우
하는 것을 두십랑은 얼레빗으로 머리를 가리면서
네것 내것이 어디 있소. 어서 열어보슈, 열쇠가 여기 있으니
하고 협낭을 내어민다.
협낭끈 끝에는 조그만 열쇠 두개가 매달려 있다.
이공자는 상자를 열었다. 그 상자 속에는 또한개 조그마한 궤가
들어있고 그 궤 위에 한봉의 쇄금(碎金)이 놓여 있다.
여보 금이구려 금
하는 이공자는 반가운 낯으로 그 사금봉지를 두십랑에게 전한다.
얼마치나 될 것인지 꺼내보슈 그려
이거 아무리 적게 치더라도 백량어치는 될 듯 싶소
그만하면 족하구려, 설마 든다허니 백량까지야 들겠소, 또 그건
무엇이요
하고 턱으로 그 상자 속에 있는 궤를 가리킨다.
글쎄 가만 있어
하고 이공자가 이윽히 그 궤 두께를 들여다보더니
여보 여기 이상한 글이 써 있구려
한다. 두십랑 역시 이공자의 말에 호기심이 생겨서
어디 봅시다
하고 자기 앞으로 끌어다가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세자(細字)로
杜娘以外 斷勿觸手 如有違則 當有重報
(두랑이외 단물촉수 여유위측 당유중보)
의 네 글귀가 쓰여 있다.
날더러만 보라구 했구려, 어이 무엇이길래 이 따위 장난을 했을까,
나만 보랬으니 나만 그럼 열어볼까
하고 그 궤짝을 들어 자물쇠를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두께(뚜껑?)을 덮어 잠그며
장난들두
하고는 고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무어야
시댁에 가서 차차 보여드리리다
하고 상자를 저리로 치워 놓는다.
이공자는 더 재쳐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젊은 여자들의 짓이니 상필
무슨 장난의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여간 백량어치의 쇄금은 이공자의 마음을 명랑하게 하였다.
이튼날 날이 개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배는 다시 행선하기를 시작하여
연 사흘을 남으로 남으로 흘러 내려갔다.
때는 마침 구월 열 사흗날(사흘날?)이다. 만월에 가까운 명랑한 달은
완월객의 심서를 산란케 하고 망망한 강물 위에는 천조각 만조각의
금파은파(金波銀波)가 뛰놀았다.
배는 홍구(虹口)라는 포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강 언덕
주루에서 바람에 실려 흘러오는 풍류소리는 바야흐로 상녀부지
망국한(商女不知 亡國恨)의 옛글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였다.
여보 우리도 연경을 떠난지 일순(열흘?)에 가깝도록 아무 흥취가 없이
지냈으니 오늘밤 달을 볼겸 술이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소
선창에서 달을 바라 보고 있던 이공자가 돌연히 이런 제의를 하였다.
두십랑 역시 감개가 무량하던 차이라 이공자의 말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지 아니해도 나 역시 그런 청을 헐까 하던 차이요, 그럼 사공을
부르셔서 분부를 허시구려
이공자는 기뻐서 사공을 불러 술과 안주 등속을 장만해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십랑은 따로 돈 얼마를 사공들에게 행하해 주면서 육지에
올라가서 술을 사먹고 돌아오게 하였다.
사공들은
이러기에 같은 값이면 서울 행차를 뫼셔야 해
하고 치사를 마지아니하며 둘을 남겨 놓고 상류하였다.
* * *
뱃머리에 술상을 차려놓고 두십랑 내외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두십랑의 부어주는 술을 오늘 처음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마는 이공자는
새삼스러이 흥취를 느끼었다.
두십랑 역시 같은 느낌이었든지 오늘은 먹지 못하는 술을 벌써 수삼배
마셨다.
그렇게 먹어서 괜찮겠소
괜찬지 않으면 어때요, 당신이 곁에 계시니 취해 정신을 모른들 설마
날 버리고 달아나실까
하고 웃었다.
여보 그런데 취흥이 일어나고 보니 그대로 있을 수 없구려. 당신헌테
소리를 청허는 것이 예가 아닌 것 같소마는 당신의 노래를 들은지도
오래고 또 이 야심한데 뉘 볼 사람이 있소 한마디 불러 보우
두십랑은 이공자의 청을 쾌락하였다. 그역시 한마디 부르고 싶은
충동을 받았던 것이었다.
곡명(曲名)은 소도홍(小桃紅)이다.
유객의 청을 따라 하기 싫은 노래를 부를 때에도 명창이란 칭찬을
받았거든 이제 정랑과 더불어 기탄없는 술을 월하에 마셨으니 그 어찌
아름다운 목청이 나오지 않을 것이랴.
청아한 음성이 강산에 흘러 뛰노는 인어도 바야흐로 숨을 죽이고 들을
듯 오묘한 곡조와 아울러 듣는 사람의 심서를 울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공자는 무릎을 자로 치며 갈채를 마지 않는다.
여보 고만허우, 더 듣다가는 살아 있지 못할것 같소
하고 두십랑의 손을 잡는다.
이때에 이 두십랑의 배에서 그리 동안 뜨지 않은 곳에 배를 대고
하룻밤을 묵고 있은 청년 하나가 있었으니 그의 성은 손(孫)이요 이름은
부(富)이었다.
그는 휘주신안부(徽州新安府) 사람으로 연기 이십에 누거만의 재산을
가지고 있은 호운아였다.
그의 생화는 양주(楊州)로 소금을 무역하러 다니는 관계로 이따금 이
포구에 배를 대는 수가 적지 않았다.
오늘도 뱃속에서 혼자 적적히 누워 있노라니 어디서 떠들어 오는
노래소리 그 청아한 성음과 곡조는 바야흐로 연경 화류항에서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묘음이다.
이 노래의 주인이 누구일꼬
손부는 벌떡 일어나서 선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은 중천에 높이 떠
사면이 백주와 같은데 노래는 바로 건너 뱃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였다.
손부는 그 노래 주인의 근지를 알고 싶어 부리는 하인더러
너 저 건넛배에서 지금 소리를 하고 계신 부인이 어떤 이인지 알아봐라
하였다. 하인이 금방 돌아와서 하는 말이
가서 물어본즉 이공자께서 꾸며 타신 배인데 소리를 하시는 부인은
이공자의 아낙이시란 말만 들었읍니다
음
하고 손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공자라 하니 의당 행세하는 집 사람이 분명하되 행세하는 집
정부인으로 저와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상필 서울 기생의 퇴물이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하매 의마심원(意馬心猿)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 * *
이날밤 새벽녘부터 또다시 풍우가 대작하고 때아닌 진눈깨비까지 섞여서
쏟아지매 배는 하루를 더 이 포구에서 묵게 되었다. 손부는 천재일우의
이 풍우를 기화(奇貨)로 여기어 자기 배를 이공자의 배 곁으로 대이게
하고 창문을 열어 놓고 이공자의 내행의 얼굴을 구경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에 두십랑은 일찌기 일어나서 소세단장을 한 연후에 세수물을 선창
밖으로 내버릴 양으로 선창 창문을 열고 반신을 내 밀었다.
손부는 두십랑의 화용을 한번 바라보매 정신이 황홀하였다.
방가위(方可謂之) 국색이었다. 손부는 돌차간(잠깐사이)에도 그가
가정의 양부(良婦)가 아닌 것을 짐작하고 더욱이 동심이 되어 먼저
이공자의 내력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선창을 두드리며
고학사(高學士)의 매화시 두귀(梅花詩二句)를 읊었다.
설만산중고사와 하니 월이임하미인래라
(雪滿山中高士臥, 月移林下美人來)
이갑은 시 읊는 소리를 듣고 누가 이 글을 읊나하고 선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사면을 둘러 본다.
손부의 계획은 들어 맞았다.
그리 되기를 예기하고 글을 읊은 손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거참 피차에 풍우를 만나 고생이외다 그려. 어디로 가시는
행차이오니까
네 나는 절강으로 가는 사람이외마는 노형은
네 나는 연경으로 소금을 무역하러 가는 상고이외다마는 택호가
뉘신지요?
택호랄게 있음니까. 나는 이갑이란 한미한 서생이외다
천만에 소제는 손부라 이릅니다
이렇게 수인사를 한 뒤에 둘은 시사이야기로 한동안을 보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둘은 급작히 친하여 졌다.
손부는
풍우가 우리의 행선을 머물게 한 것은 상필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반가이 만나게 하는 것인듯 하니 우리 이 포구 주루에서 한잔 나누면서
청담을 하시는게 어떠하오
말씀은 고마우나 우연히 만난 우리 사이에 폐를 끼쳐서야 되겠읍니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사해는 개형제라니 사귀면 친구이어든
공연히 사양치 마시오. 외려 섭섭하외다
하며 부리는 아이를 불러서 우산을 잡게하고
자아 어서 그대로 나오시오
하고 상륙하기를 재촉한다.
이공자는 할일 없이 옷을 고쳐 입고 배에서 내렸다.
할일 없다느니 보다 속으로 해롭지 않게 여기었다. 그래서 둘은 얼마
걷지 않아서 이 포구에서 제일가는 주루에 올랐다.
손부는 깨끗한 방 하나를 치고 이공자를 인도해 들였다.
자아 우리 여기서 종일을 놀아 봅시다
하고 값을 묻지 않고 극히 사치하는 음식을 주문하였다.
너무 그리
하고 사양을 하는 것을 손을 들어 말리며
뜻 밖에 친구를 얻었거든 돈이 무슨 관계가 되리오리까
하고 부호다운 풍도를 보이었다.
이윽고 갖은 주효가 식탁에 가득히 배열되매 손부가 잔을 들어
이공자에게 권하며 문한시화로 부터 이야기하기를 시작하여 화두를 차차
화류계로 돌리었다.
한동안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 하던 끝에 손부는 음성을 낮추며
그런데 어제밤 형의 뱃속에서 노래를 부른이가 누구이오니까
하고 물었다.
이갑은 다소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그 노래 소리가 어떠합디까
명창아니고는 그렇게 부를 수가 없읍니다
그렇다니 말이지 당대 북경 명기로 유명한 두십랑이외다
두십랑? 익히 듣던 이름이외다. 그런데 당대 명기가 어찌하여 형과
함께 배를 타게 되었읍니까
원래 정직한 이갑이는 하나도 숨기지 않고 두십랑을 알게 된 내력과
유우춘에게 돈을 취해서 몸값을 치러준 이야기까지 자세히 설파하니
손부는 듣기를 다하더니 무릎을 치며
미인을 끼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그역 호쾌한 일이로군
하고 껄껄대고 웃더니 금시에 점잖은 얼굴을 하고
그러나 춘부장께서 용납을 하실는지
아닌게 아니라 그것이 염려가 돼서 집사람은 말하기를 함께 가긴 가도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자기만은 내집 근처에 사관을 잡고 있다가
먼저 가친의 허락을 받은 후에 들어 가서 뵙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있소
하고 자랑삼아 말을 하며 그의 의견을 듣고자 하였다.
손부는 아무 대답없이 잠시 무엇을 말할 듯 말할 듯 하더니
말하고 싶은 일은 없는게 아니지마는 초면에 너무 지나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려운 일이니 그만해 두지요
하고 언중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을 은근히 표시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요, 비록 초면일 망정 깊이 믿지 않는 터이면 어찌
자세한 사정을 아뢰었을 것이요
그럴진대 기탄없이 말을 하겠소마는 지금 이형이 취하시는 방책이 매우
졸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형의 부친께서는 이미 이형의 오입을 극히
괘씸히 생각하셨을 것인데 이제 또 돌연히 외첩을 대동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하면 상필 체면을 생각하셔서라도 용서하실 리 만무하고 또 친구를
찾아 부자간의 조종을 청한다 할지라도 누군들 이형의 춘부장을 쫓으려
하지 불효의 아들 편을 들 사람이 있을리 있읍니까, 그러고 본 즉 첫째
부친의 노염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남의 동정을 잃어 기필코
이형은 진퇴양난의 곤란을 받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러 저러
하다가 노수나 떨어지고 보면 젊은 여자를 사관에 두고 큰 고생을 하게
되오리다. 형과 같은 형편에 빠져서 큰 고생을 하던 친구를 내 눈으로 본
경험이 있으니 말씀하는 것이외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이갑의 가슴은 급작히 답답하였다. 그러지 아니해도
지금 있는 돈이 종후 얼마를 능히 지탕할는지 알 수 엇는 터에 진퇴양난이
되리라는 말을 들으매 더욱 큰 협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형의 말씀이 극히 지당한 말씀이외다
지당하다고야 말씀할 수 있소마는 하여튼 십중 팔구 그렇게 될 것은
분명하외다. 그런데 도리가 하나 있긴 하오마는 형이 믿어주실는지
모르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요. 쌍말에 뒤보고 밑 아니 씻은 셈으로 그냥 지날
수 있는 일이겠소? 어서 말씀해 주시오
글쎄 친한 터가 아니면 고이쩍어 못 할 말이요마는
어서 말씀이나 해보슈
그러면 아주 기탄없는 말을 해 보겠소. 자고로 말하기를 부녀는
수성무상(婦女水性無常)이라고 해서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오는
터이지마는 화류계 여자란 더구나 믿지 못할 것이외다. 항차 내행은
대원명기(大院名妓)이었다 하니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였을
것이고 그 중에는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
않소? 그러고 본즉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혀의 내행이 꼭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유하면 그렇다는 것이니 행여 어찌 아지는 마시오마는 전에도 나의 친구
하나가 형과 꼭 같은 형편으로 외첩 하나를 얻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우선 사관을 잡고 며칠을 유숙시켜 놓았더니 바로 이, 삼일 되는
날 밤에 부지거처로 도망해 버리지 않았겠소, 그래서 차차 뒤를 알아 본즉
따로 정부 하나가 있어서 서로 짜고서는 그 친구로 하여금 몸 만 치르게
하고 저희끼리 짜고 도망을 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 형의 일과 그 친구의 내행과는 사람도 다르고 하니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겠지마는 그런 일도 생각은 해 두어도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공자의 가슴은 이 손부의 말에 다소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강잉해서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소
하고 부인하였더니 손부는 고개를 흔들며
흥 그렇게만 믿으시오. 유래로 강남자제는 교언영색의 무리가 많기로
유명하니 형이 없는 동안에 벽에 구멍을 뚫고 담을 넘는 위인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으며 그렇다고 내행을 데리고 부모께 뵙자니 반드시 부친의
큰 꾸지람을 받고 혹은 집에서 쫓겨나게 될 터이니 위자지도에 일개
계집으로 말미암아 집을 쫓겨난다면 친구인들 돌볼 사람이 있을 리
있읍니까. 대관절 무슨 낯을 들고 천지간에 서시려고 합니까
속이 깊지 못한 이공자는 이 말에 완전히 끌리고 말았다. 들을수록
당연한 말같이 들리었다.
아니 그러면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씀이오니까
하고 재쳐 물으니까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내게 좋은 계책은 하나 있소마는 형이 신정지초에 서로 떨어지기를
싫어 할듯하니 공연히 말품만 팔면 무얼 하오리까
그게 무슨 말씀이요, 내게 좋은 계책이면 나에게는 은인이신데 무슨
말씀을 못 하실게 있소
그러면 말씀하겠소마는 나의 생각에는 춘부장께서 이제까지 노하고
계신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형이 북경에서 화류계에 허다한 돈을
낭비하였다는 것에 있은즉 내가 돈 천금을 드릴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가셔서 부친께 그동안 돈을 낭비한 줄 여기셨지마는 기실은 돈을 이렇게
따로 모아 두었읍니다 하고 내놀 것 같으면 필연 부친께서도 곧이
들으시고 노기가 풀리실 것이 아니겠소. 그런 후에 차차 기회를 타서
이번 일을 애소해서 허락을 받으신 연후에 데려 가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은 어디다가 둬야 옳단 말씀요
만만한 데가 없으면 내 집에 계시도록 하면 형이 데려 가시기까지 잘
보호해 드리리다
단순한 이공자는 손부의 말이 엄융(?)의 그것처럼 들리었다. 그리고 돈
천금을 내준다는 말에 감격하기 이를데 없었다.
말씀만 들어도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한번 내 안사람에게 의논을
해 볼 수 밖에 없소이다. 아무리 우리가 마음이 합한다고 해도 당자가
싫다면 그역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고 여부가 있소. 하여튼 내가 돈 천금까지 드리겠다는 것을
보드라도 내가 공연히 남의 일을 훼방 놓자는 것이 아닌 것을
짐작하시겠죠
그게 무슨 말씀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려 섭섭한 일이외다
이공자는 돈 천금에 십분 마음이 움직이었다.
* * *
자리 옷을 갈아 입으시고 누으시지(누우시지?) 왜 그러고 앉으셨소
늦게 돌아와서 주기가 가득한 채 자리 위에 덜썩 앉아서 무슨 곡절인지
한숨을 치쉬었다 내리쉬었다 하는 이공자의 수상한 태도에 두십랑은
한동안 그의 눈치를 본 연후에 이렇게 권해 보는 것이었다. 이공자는
고개만을 끄덕 하고는 아무 말이 없다.
왜 어디가 불편하슈
아니
그럼 왜 눕지 않으슈
-----
우리들은 내외가 아니요. 속에 무슨 근심되는 일이 있거든 말씀을
하시구려. 그러고만 계시면 너무나 서어하지 않소
이공자는 두십랑의 말에 잠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면 어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렇게 돌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친께 뵙는게 암만해도 도리에 합당치 않은 것 같소
그건 한두번 생각한 것이 아니요마는 딴 무슨 도리가 있단말요,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했소. 아버님의 마음이 내키시기까지 사관을 잡고
있자고 하지 않았소
그야 마찬가지이지, 같이 가는게 좋지 못하다는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웬 변덕이신지는 모르오마는 대관절 어쩌면 좋단 말이요
내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오늘 이 옆 배에 묵고 있는 손부라는
친구의 의견을 들어본즉 귀절이 지당한 말일 뿐더러 돈 천량을 자기가
내줄테니 그걸 가지고 나혼자 먼저 집으로 가서
하고 손부가 말한 전후 사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으로
나 역시 지금 부모의 노염을 풀지 않고는 내두사가 막막하니까
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 돈 천량으로 잠시동안 내 몸을 사자는 말이구려
사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기면 안심되지 않느냐는 말이지
그래 당신은 뭐라고 그랬소
나는 그리 하자는 약속을 했지마는 하여튼 당신의 의견을 들어
보겠다고 했지
두십랑의 가슴은 끓는 물을 마신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러한 심약하고 열정 없고 이기주의인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이러히 냉정한 사람을 내 어이하여 평생의 애인으로 삼으려고 하였던고.
돈 천금에 눈이 어두워 애인을 남에게 팔려는 비루하고도 심약한 이
남자를 어찌 평생의 애인으로 삼을 수 있으랴.
이것이 남자의 마음인가. 그렇다면 내 세번 환토해서라도 남자란
남자의 피를 빨아 먹으리라 그리하여 이 원통한 분풀이를 하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울서 여러 동무와
작별할 제 그들은 나의 갱생(更生)을 축수하고 부러워 하였다.
아아 생각할수록 이 세상이 싫어진다. 목숨을 내놓고 사랑을 바친
남자에게서--- 믿고 믿었던 남자의 입에서 이 한심한 말을 들으니만치
그의 설움과 분과 염세의 비관은 컸다.
그게 무에 그리 어려운 일요, 퍽 좋은 말이구려 당신은 돈 천금을
가지고 가게 되고 나는 잠시라도 부자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니---
그런데 돈은 정녕 내준답디까 잘못하다가 헛탕을 치리다
아니 그대만 쾌락한다면 내일 아침에 돈을 주마고 하더구만
괘락이고 아니고가 어디 있소. 당신의 계집 당신이 파는데
하고 두십랑은 한심한 웃음을 웃었다.
* * *
이튿날 아침 손부는 은자 천량을 이공자의 배로 듬뿍 옮겨 싣고 자기
역시 새옷을 갈아 입고 이공자의 배로 건너와서 두십랑과 초대면의 인사를
하였다. 노상 입이 헤 벌어져 있었다.
자아 그럼 이배는 떠날테니 우리 배로 가지요
하고 손부는 재촉을 한다.
평생을 뫼실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급하실게 무엇있읍니까 잠간만
계십쇼
하더니 사공을 시키어 배에 탄 다른 손 전부를 청해다가 놓고 이공자와
만나게 된 전후사와 지금 손부가 돈 천량으로 자기 몸을 농락하여 가는
내력을 설파한 후에 앞에 놓은 상자의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있는 조그마한
상자를 끄내서 들고
이것은 나의 동무들이 내가 죽을 고팽이를 치게 될 때에 열어 보라고
한 것이니까 지금 여러분이 계신 앞에서 열어 보겠습니다
하고 그 뚜껑을 열어 젖치니 거기에는 싸고 싼 사금이 싯가로 해서
사,오천량어치나 쏟아져 나오고 그 외에도 야광주 기타의 보물이
수천량어치가 쏟아져 나왔다.
여러 선캑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이런 보물을 가진 애인을 남에게 돈 천량에 팔다니
하고 이공자를 일제히 바라본다. 두십랑은 눈물을 흘리며 이공자의
박정을 공격하고 손부의 비루한 행동을 극구 타매하며
사랑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을 평생 애인으로 삼았던 내가 불쌍한
연이요
하고 그 보물 상자를 가슴에 끼어 안고 일어서더니 여럿이 깜짝 놀라는
사이에 몸을 날려 창창한 강물에 빠져 버렸다. 여럿은 당황망조하여
사공을 시켜서 강물에 뛰어들게 하여 두십랑의 몸을 건지려 하였으나 그의
몸은 다시 강위에 솟지 않고 무심한 강물만이 트레를 치며 흘러갈
뿐이었다.
* * *
이 소문은 십여일 후에 북경 화류계를 격분과 감격과 슬픔으로 뒤
흔들었다.
사람들의 흥분이 아직 사라지기 전에 또하나 기괴한 소문이 돌았으니
그것은 두십랑의 영혼이 유우춘의 머리 맡에 나타나서 북경을 떠날 때에
돌려준 일백오십량에 대한 치사를 하고 보물 한개를 놓고 갔는데 그
야광주 한개 값이 천금이 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갑이는 집에 도착한 후 사흘이 넘지를 않아서 실신이 되어 입으로
두십랑의 이름을 연호하며 부지거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 끝 >
1996년 12월 4일 23시.
<제 14 화>
怪夢奇譚(괴몽기담)
公主와 神尺
꿈이 빚은 悲劇
원 이럴수가 이럴수가 으으음---
점심밥에 취하여 논 두덩 수양버들 그늘에 네 활개를 큰댓자로 내던지고
누웠던 떡보는 자기 잠꼬대에 낮잠을 깨어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야! 꿈이기는 하다마는 정말 멋이 있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며 일어나 앉았다.
아이 깜짝이야! 미친 사람같이 뭐가---
급작스러이 경탄하는 남편의 거동에 떡보의 아내는 깜짝 놀랐다.
음 정말--- 야 참 좋구나!
떡보는 아직도 꿈인양 두 번 세 번 연거푸 무릎을 친다.
뭐가 그렇게 좋단 말이요. 좀 같이 압시다
떡보 아내는 남편의 곁에 다가앉으며 선잠을 깨우는 듯이 떡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떡보는 아내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크게 떴던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으려 버린다.
여보 말 좀 해봐요. 뭐가 그렇게 좋단 말이요
떡보의 아내는 자꾸 어깨를 흔들었으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수그러진 머리만이 힘없이 좌우로 흥청거릴 뿐 떡보는 입을 다문채 아무
대답이 없다.
떡보는 원래 술 잘 먹고 투전 잘 하기로 이름난 명랑한 사내로서 밖에
나가서는 풍을 치고 돌아다니다가도 집에 들어와서는 비밀이 많은
남편이었다. 그 비밀이란 딴 것이 아니고 계집질 관계이기 때문에 아내의
<쎈스>는 언제나 지나치게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버릇이 거듭됨에 따라 남편의 말눈치나 행동이
흐리멍덩(흐리멍텅?)만 할 지경이면 걸핏 계집이라는 선입감이 앞서기
때문에 버럭 악을 쓰며 대들게 되는 것이 예사이었다(였다).
그래서 이 꿈 얘기만 하더라도 채 내용을 따질 새도 없이 아내의
머릿속에는 질투의 불꽃이 먼저 튀었다.
오오라 알았어! 그 어떤 년이 꿈에 나타났더란 말이지? 그래 말해
봐요! 어떤 년이야 어떤 년! 꿈에 보고 그렇게 야단할 것 없이 어떤
년인지 그년한테로 갑시다
아내는 땀에 젖은 삼베 적삼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남편의 손목을
끌어당긴다.
그제야 떡보는 얼굴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거 왜 이러는거야 그따위 문제가 아니야, 큰일이야 큰일.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할 큰 일이야
큰 일? 무슨 꿈이길래 말도 못해?
이 사람아 큰 일이라면 큰 일인 줄만 알아! 목이 짤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은 못해
정말 못해?
죽어도 못할 말이라니깐
정말 못해?
분에 받힌 아내는 김 매던 호미자루를 두르며 게거품을 뿜고 덤비기
시작한다.
이 년이 환장을 했나?
떡보의 억센 주먹에 아내는 밥광주리를 왱강 뎅강 엎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땅에 부딪친 뒷머리에서는 피가 흐른다.
아구머니 떡보가 사람 죽이네, 아이구 아이구---
이 년이 누구를 못살게 할려구 극성이야
이렇게 벌어진 부부싸움은 온 동네 사람을 모으고(모우고?) 그 말 못할
꿈의 소문은 그 지방 관가에까지 알게 되었다.
대관절 무슨 꿈이길래 그렇게도 기를 쓰고 입을 봉한단 말인가?
하는 호기심에서 관가에서는 떡보를 불렀다.
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차마 꿈 얘기만은 설파 할 수가 없읍니다
관헌의 앞에서도 떡보의 꿈의 비밀은 공개되지 못했다.
야 굉장한 꿈이로구나
필유곡절이라 이 소문은 멀지 않은 서울에도 전파되어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렸다.
무슨 꿈이길래 그럴 수가 있나. 어디 그 놈 불러 들여라
임금님도 호기심에 소문만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떡보는 어전에 부복하였다.
그래 무슨 몽사였던고? 나한테는 말할 수 있겠지
처음듣는 지존의 위엄있는 음성에도 달래는듯한 부드러움을 엿볼수
있었다. 그러나 꿈의 사연만은 차마 아뢸 수 없는 떡보였다.
예 황송하오이다. 그저 죽여 주시옵소서
말 못하겠단 말이냐?
-----
떡보는 엎드린채 말이 없다.
너 이놈 어명이 지중한 줄은 알렸다
예 알다 뿐이오리까?
그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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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보는 역시 말이 없다.
비위가 거슬린 임금님은 다시금 정색을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호령을
내린다.
여봐라 이놈 하옥하여라. 그리고 끝내 정신을 못 차리면 사흘 후에
목을 베어라
떡보는 당장에 옥중신세가 되었다.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다. 죄아닌 꿈의 비밀로 말미암아 사형을 당하게
되다니--- 팔자 타령도 하여 보았고 주책없는 아내의 극성도 원망하여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 황홀한 꿈의 장면이 회상될 때엔 옥방(獄房)을 잊어 버릴
지경인 행복스러운 떡보만의 비밀이었다.
에라! 아무 때 죽으면 안 죽겠나
죄는 아니련만 감히 터뜨리지는 못할 어마어마한 비밀. 그렇다고해서
말해 봤댔자 세상사람의 웃음거리 밖에 못되는 것일진댄(덴?) 영원히 비밀
그대로 간직하고 죽어 버리리라는 생각에서 자위하는 떡보였다.
獄中의 怪變
하옥된지 이틀의 날자가 흘러가고 단두대에 오를 날이 왔다.
오늘은 죽는구나
허탈된 떡보는 자리에 누운채 기다리는 줄 모르고 형장에 나갈 시각을
기다리며 망연히 철창너머로 아침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아직도 자나?
옥사정(獄事丁)이었다.
죽을 시각을 기다리네
떡보는 살창 틈으로 기웃거리는 옥사정을 마주 보며 쓴 웃음을 웃었다.
이 사람아 자네따위 죽이고 살리는 문제가 아니야! 지금 궁중은
울음바다가 터져서 정신이 없는 판이야
울음바다?
어제밤 이팔청춘 꽃다운 공주님이 세상을 떠났어
아니 공주님이?
그러니깐 자네따위 죽이고 살리는 문제는 아주 멀어졌다니까
돌연 공주가 죽었다는 놀라움보다 자기의 사형집행이 연기된다는 새로운
사실에 떡보는 눈을 크게 떴다.
비록 고식적이나마 금방 죽기는 면했따.
---옥사정이 간 뒤에 무료히 담배 연기와 희롱하고 있노라니까 방구석에서
밤알만한 생쥐새끼 한마리가 나타났다.
이놈 어떻거나 보자
떡보는 숨소리를 죽여가며 그 생쥐새끼의 거동을 흥미있게 노려보았다.
그 생쥐새끼의 거동을 흥미있게 노려보았다. 그 생쥐새끼는 두리번
거리더니 반대 방향 구석의 조그만 구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응 쥐란놈이 새끼를 깠구나
떡보는 심심하던 판에 좋은 일 만났다고 고양이 모양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아까 쥐 나오던 구멍과 들어가던 구멍을 부리나케 번갈아 보며
하회(下回)를 기다렸다.
같은 또랫 놈이 또 나타났다. 뒤이어 두놈 세놈.
요놈들 어디로 가는거야
떡보는 들었던 장죽을 날쌔게 휘둘렀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생쥐새끼들은 도망칠 겨를도 없이 그만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잔인스러운 흥분에 들뜬 떡보는 나타나는대로 모조리 갈겼다.
십여마리의 쥐새끼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졌다.
얼마 후 이번에 나타난 쥐는 죽은 새끼들의 어미인지 무지무지하게 큰
놈이다. 컴컴한 구멍에서 앞발을 내놓고 두 눈을 빤짝거리며 떡보의
모양을 노려보던 쥐는 조심스러이 사방을 살피며 냄새를 맡듯이 코 끝으로
죽어 넘어진 새끼쥐의 몸뚱이를 차례차례 더듬더니 슬며시 나오던
구멍으로 들어가 버린다. 떡보는 마음속으로 그 정경을 가긍히 여기면서
흥미를 가지고 그 큰 쥐의 뒷조치를 기다렸다.
얼마 안있어 되돌아 나온 큰 쥐는 무슨 장손가락 길이만한 나무가지
하나를 입에 물었다. 쥐는 떡보를 힐끗 보더니 입에 문 나무가지로 마치
자질하듯이 한자 두자 새끼쥐 시체를 더듬는다.
으음 저런!
떡보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질 하는대로 죽었던 새끼쥐들은
차례차례 살아나서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하여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죽었던 새끼쥐들은 모조리 살아서 달아나 버리고
나중 큰쥐마저 가버릴 참이다. 그 찰나.
이놈 잠간 있거라
떡보의 반사적으로 후려갈긴 장죽에 대가리를 맞은 큰쥐는
찌익
비명을 지르며 사지를 뻗었다. 떡보는 무엇인지 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무슨 마귀에 홀린 것만 같은 자기 정신을 가다듬는듯이 눈을 부비며
쥐의 입에서 떨어진 나무가지를 줏어 들었다.
진달래나무같이 보이는 젓가락 굵기의 통나무 가지다.
이것이 죽은 목숨을 다시 살리는 기이한 물건인가?
떡보는 당장에 시험해 볼 작정으로 눈앞에 죽어 넘어진 큰쥐의 몸뚱이를
자질해 보았다.
앗!
사지를 뻗었던 쥐는 금시 일어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 흥분과 긴장이 풀린 떡보는 그 신기한 나무가지가 든
주머니를 어루만지며 아침 옥사정한테서 들은 공주의 죽음을 생각하였다.
이 나무가지를 가지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니 되든 안되든 한번 대들어 볼만한
일이다. 생각끝에 용단을 내렸다.
여보 옥사정!
떡보는 신난 목소리로 옥사정을 불렀다.
내 죽은 사람 살리는 재주가 있어! 공주님께서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다니 상감님께서 오죽(오즉)하시겠나. 이제 그 공주님을 살려
봄이 어떨까?
자신있게 자기 뜻을 소개했다.
말을 듣는 옥사정은 배룰 움켜쥐고 웃어가며
여보게 정말 혼이 빠졌나. 이사람아 정신 차려 하하하--- 죽은 사람을
살려?
떡보를 미친놈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아니 경을 쳐도 내가 칠 것이 아닌가. 당신은 내 말을 상감마마께
통하여만 달라니까--- 이봐요 그러다가 내가 성공하는 날이면 당신도
옥사정 신세를 면케 될지 누가 알아. 그러지 말구 빨리---
웃어버리려던 옥사정도 떡보의 달콤한 말에는 입맛이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람아 농담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인가?
정말이구말구 당장에 살려 놓을테니 봐요. 머뭇거리지 말구 빨리 내
청만 들어 줘요. 신세 갚음은 톡톡히 할께
이리하여 옥사정은 이리저리 다리를 놓아 임금님께 상주하여 보기로
하였다.
一躍 駙馬로
비록 미친놈의 수작일망정 슬픔에 싸인 궁중으로서는 그저 귓가로 흘려
보낼 수는 없는 얘기였기 때문에 논의가 분분하던 끝에
그러다 어떤 기적이나 있지 않을까
하여 드디어 묘의(廟議)는 떡보를 부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옥으로부터 일로 대궐로 들어간 떡보는 어전에 다짐을 두고 나서 어명에
의하여 호기 당당히 제반 절차를 명령하였다.
첫째 시체를 조용한 방에 옮길 것.
둘째 그 방에는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떡보 자신 의외 잡인의 출입을
금할 것.
세째 꿀물 한그릇을 준비하여 놓을 것.
떡보의 기세야말로 벌써 어제까지 촌에 묻혔던 농부는 아니었다.
나중에에 어찌 되든 당장에 임하여서는 제아무리 재상일지라도 떡보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중한 거동으로 위의를 꾸미는 떡보는 계하에 둘러선 문무백관을
좌우로 바라보며 천천히 층층대를 올라 조용히 시체실로 들어섰다.
넓다란 방이다. 방 한복판에 눈부신 비단 이부자리가 펴 놓였는데 이불
깃가로 윤기도는 까만 머리와 하얀 이마가 반쯤 보인다. 떡보는 무언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서쪽 창문에는 아직도 유원(유월?)의 또약볕(뙤약볕?) 이 내려쪼이고
있건만 방 가득히 서리운 향냄새에는 태고의 적멸이 깃드린듯 시체 머리맡
촉대 위에 너울거리는 촛불마저 이 떡보의 장난아닌 장난을 저주하는 신의
손짓과도 같이 보였다.
금시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이 떡보의 등을 떠민다.
그렇다고 용기를 꺾이울 떡보는 아니었다. 큰 기침 두어번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러이 이불 깃을 잡아 제쳤다.
꽃같은 처녀의 얼굴. 가볍게 눈을 감고 단정히 누운 자태며 웃음을
머금은 듯한 표정은 흔히 연상되는 흉칙스러운 주검이 아니라 마치 한폭
미인의 그림인양 보였다.
저윽이 진정을 회복한 떡보는 허리에 찬 주머니 속에서 그 신기한
나무가지를 끄집어 내었다.
하느님 살려 주시옵소서
떡보는 자기를 살려 달라는 말인지 공주를 살려달라는 말인지 입속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그 나무가지로 시체의 꼭대기에서부터 자질하기
시작했다.
발끝까지 자질을 끝낸 떡보는 사람인(人)자로 다리를 벌리고 선채로
시체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다.
기적이 나타나느냐 않느냐 하는 숨가쁜 순간이다.
바르르 살눈섭이 떨리자 번쩍하고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얏! 살았다!
떡보는 공주를 껴안을듯이 두팔을 벌리고 허리를 굽혔다가 두서너걸음
뒤로 물러섰다. 분명히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멍하니 낯설은 떡보의 얼굴을 쳐다보던 공주는 다시 눈을 감더니 가는
목소리로
아이 목 말라
하고 입을 다시며 두손을 들어 젖가슴 위에 얹는다.
소생된 모습을 확인한 떡보는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흥조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주위에서 초조히 화회를 기다리던 여러 고관들은 떡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우욱 혜하로 몰려들었다.
그래 어찌 되었소?
황급히 묻는 말에 떡보는 빙그레 웃으며 임금님을 찾는듯이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정중히 입을 열었다.
상감을 모시고 들어들 가보시지. 공주님께서는 지금 목이
말라하실겝니다. 마련해 둔 꿀물을 드리시오
여러 고관들은 와아하고 함성을 터뜨렸다.
죽었던 사람을 살렸다는 놀라움도 놀라움이려니와 공주가 소생된 궁중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금님도 친히 떡보의 손목을 붙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명에 따라 부랴부랴 별당을 소제하여 떡보의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한편 아리따운 궁녀의 시종(시중)으로 떡보를 목욕시킨 후 새옷을 갈아
입히게 하였다.
벌써 연못 가 누대에 준비된 경축연(慶祝宴)자리로부터는 떡보라는
저속한 이름을 부르기가 못마땅하다하여 무슨 벼슬인지
사생대부(司生大夫)라는 관직을 하사하였다.
떡보는 이것이 꿈인양 정신이 얼떨떨하여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찬란한 옷차림으로 남녀 관비에 옹위되어 경축연 누대에 오른 사생대부
떡보는 풍악의 영접을 받아가며 상좌 임금님 곁에 공손히 정좌하였다.
임금님은 감격한 어조로 만당의 신하들에게 오늘의 기쁨을 피력하면서
곁에 앉은 공주를 향하여
이 이가 바로 너를 부활시킨 생명의 은인이다
하고 떡보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는 공주의 얼굴은 짙어가는 황혼 속에서도
떠오르는 보름달같이 황홀하게 보였다.
자아 오늘밤은 우리 공주를 위하여 또 그리고 귀한 사생대부를 위하여
즐겨 볼까하오
임금님은 잔을 높이 들었다. 좌중은 이에 따라 잔을 들었다.
계속되는 풍악소리에 어울려 잔은 거듭되고 또 거듭되었다. 떡보는
공주가 따라주는 술도 여러잔을 받았다.
누대 안은 불빛이 휘황하나 바깥은 어두운지 이미 오래다.
춤추는 궁녀들의 오색 장삼소매도 취흥이 어리운듯 물결이 높았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에 잠긴듯 묵묵히 앉았던 임금님은 은근히 떡보의
손을 잡으며
사생대부!
하고 떡보에게 말을 건넨다.
떡보는
예?
하며 얼굴을 돌렸다. 임금님의 붉어진 얼굴에는 미소가 띄었다.
내 대부에게 청이 있는데
청이시라오니 황송하오이다. 무슨 분부시온지?
농촌에 살면서도 서울 출입이 잦았던 탓인지 제법 존대엣 말도 쓸 줄
아는 떡보이기도 하다.
대부 우리 공주와 배필됨이 어떨꼬?
임금님은 나란히 앉아있는 공주도 들으라는 듯이 상반신을 기울이면서
떡보와 공주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는 것이었다.
말문이 막힌 떡보는 한참동안 얼빠진모양 멍하니 앉았다가 두 손을 짚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너무나도 황송하옵신 말씀 감히 분간키 어렵나이다. 더욱이 이 떡보
일찍부터 같이 사는 처가 있사옵거늘---
임금님은 껄껄 웃으며
본처가 있어도 좋아. 우리 공주는 이미 죽었던 사람이니 인제 소생된
목숨은 살려준 대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타당한 길일 것이다. 그것이
살려준 대부에게 대한 은혜 갚음일 것이야. 내 소원이니 어떠냐 공주는?
동의를 구하는듯 공주를 바라본다.
공주는 수줍은듯이 고개를 숙인다. 세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다.
이윽고 임금님은 이 이상 따질 것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하지?
하고 정면으로 돌아 앉더니 손을 들어 풍악을 멈추었다. 춤도 멎고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여졌다.
임금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즐거운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내 오늘의 기쁜 소식 한가지를 전하노니
우리 공주 별아기와 사생대부 떡보 두사람은 오늘로써 부부됨을 허하노라.
만조 백관과 천하 만민은 같이 기뻐할진저---
임금님의 선언이 끝나자 일동은 두 손을 들어 읍하며
경하하오이다
이로써 미천한 일개 농부 떡보는 하루 아침에 부마(왕의 사위)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호랑이의 報恩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떡보의 소문은 서울 장안으로부터 나라안을
휩쓸고 중국 제후국 고을고을을 거쳐 어느덧 천자(天子)에게까지 알린바
되어 십년전에 역시 처녀의 몸으로 애석히 죽은 천자의 딸을 살려 달라는
전갈을 가지고 사신이 달려왔다.
이것은 널리 국제적으로 우리나라 국위를 빛내는 일이라하여 임금님의
기쁨이란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떠나라는 어명을 받은 떡보로서는 큰
근심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별아기공주는 죽자마자의 일이었거니와 중국천자의 딸 그 공주란
죽은지 이미 십년. 살이 다 썩어빠진 해골일터이니 어찌한단 말인가.
지금 떡보가 지니고 있는 재주란 갓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있어도 뼈만
남은 해골에 살을 붙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줄은 모르고 궁중은 사생대부 떡보님의 행차 준비에 바빴다.
사랑하는 아내 별아기공주인들 남편의 이 고민이야 알아차릴 바가 있으랴.
택한 길일(吉日) 출발의 날은 왔다.
임금님 공주 기타 조정 고관들로부터 전별인사를 받으며 사생대부
떡보는 아무 계책없이 망연한 생각에 잠긴 채 남여(籃輿) 위에 올라탔다.
대궐 문을 나서는 행차는 배종(陪從) 하는 관원과 호위하는군졸이
장사진을 이루고 바람에 나부끼는 오색 깃발은 연도에 늘어선 구경군의
눈을 어지럽게 할 지경이다.
서울을 뒤로 행차는 서북을 향하여---
---재를 넘고 물을 건너 국경을 넘은지도 수일째. 망망한 벌판을 지나
첩첩한 대륙 산기슭을 탄 어떤날이었다. 밀림속으로 뚫린 으슥한 산길로
걸음을 재촉할 즈음. 으악! 하는 선두의 비명과 함께 행렬은 멈칫 섰다.
범이다
큰 범 한마리가 행차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앞을 섰던 전위 군졸과
관원들은 혼을 잃고 길 좌우로 굴러 떨어진다.
일찍 떠날 때부터 남모를 수심을 품었던 떡보는 이 심상치 않은 징조에
직각적으로 불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운이
진하였다면 죽을 때에 임하여서도 호기나 부려보리라 결심하고
이놈들아 정신 차려라
남여채를 두들기며 소리 높여 사시나무 떨듯하는 교군을 꾸짖었다.
범은 커다란 두 눈을 번쩍거리며 서서히 남여 앞으로 다가온다.
떡보는 고개를 높이 들고 위엄있게 두 눈을 부릅뜨며 전신의 힘을
다하여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너 이놈 아무리 짐승이기로서니 미물이 아닐진댄 어명을 받고 가는
사신행차를 몰라본단 말이냐?
떡보의 힘찬 고함은 은은히 산을 울린다. 비록 공포를 초월한
떡보일망정 참말로 자신도 의심할만한 기개였다.
범은 떡보의 기세에 위압을 당하였음인지 남여 가까이 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떡보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앞발을 끓고 머리를 굽실거리는
것이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동작일까. 사람을 해치려는 살기가 사라진 것만은
짐작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물러갈(가)려는 눈치인 것같지도 않다.
이놈 썩 물러가지 못해?
떡보는 다시 호령을 하였다. 그러나 범은 여전히 무엇인가 애원하는듯
머리를 굽실거릴 뿐 몸을 일으키려하지 않는다.
너 산중호걸이라 하였으니 뭇 짐승과 달라 지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청이라도 있단 말인가?
떡보는 사람을 대한듯이 은근히 물었다.
그제야 범은 머리를 들어 떡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이는 것이었다.
그래 무슨 청일꼬?
떡보가 다시 묻자 범은 돌아서서 등을 남여 앞으로 내대며 힐끗힐끗
고개를 돌린다.
이놈 나너러 네 등에 타란말이냐?
범은 그렇다는 듯이 또 고개를 굽실거린다.
범의 뜻을 알아차린 떡보는 전후 좌우로 일행을 돌아보며
말은 못하나 이 범이 무슨 소중한 청이 잇는 모양이야, 범을
따라갔다가 올터이니 너희들은 서슴치 말고 예정대로 다음참인 산너머
촌락에서 오늘 밤을 자면서 기다려라
명령을 내리고 남여에서 내려 범의 등에 올라탔다.
떡보를 태운 범은 나는듯이 울창한 밀림 속을 헤치며 준험한 능선을
따라 어디로인지 달린다.
나무가지새로 보름달이 얼른거린다. 산을 넘고 넘어 얼마를 갔는지
교교한 달빛아래 끝없이 뻗은 산줄기만이 밭이랑같이 굽어 보일 뿐이다.
방향 모를 곳 높은 절벽 앞에 당도하였다. 떡보를 등에서 내려놓은
범은 시커먼 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뼈만 남은 늙은 범 한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암범이었다.
이 늙은 범은 입을 벌린채 다물리지 못하고 침만을 흘리고 있다. 모든
태도로 미루어 이 두 범은 모자간인 것 같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늙은
범은 병에 지친 것이 틀림이 없는것 같앗다.
떡보는 물었다.
네 어미냐?
범은 끄떡인다.
무슨 탈이 들었느냐?
범은 다시 끄떡이며 앞발로 어미범의 입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떡보는 어미범 아가리를 추켜들고 달빛에 비쳐보았다. 목에 무엇인가
가로 걸려 있는 것 같다. 떡보는 손을 넣어 더듬었다. 무슨 뼈다귀였다.
어미범은 얼마 동안이나 고생하였는지 모르나 뼈다귀가 뽑힌 뒤에야
제대로 입을 다물었다.
범의 모자는 고개를 굽실거리며 무한히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었다.
내가 죽은 사람을 살리러 가는 명의(名醫)라는 것을 짐승 세계에서도
알았던 것이로구나---
하고 떡보는 생각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어미를 도로 굴 속에 데려다 두고 나온 범은 다시 떡보를 등에 태우고
어디로인지 한참 달렸다.
이번에는 묘가 즐비한 북망산이다.
떡보를 내려놓은 범은 앞발로 고총 하나를 파더니 묻힌지 몇백년이나
되었는지 모를 하얀 해골을 끄집어 내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뼈를
정돈해 놓은 후 이것을 자세히 보라는듯이 떡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손짓하듯이 앞발을 흔든다.
그래 잘 볼께
범은 언제 어디서 지니고 온 것인지 기다란 수염을 씰룩거리며 입
안에서 네모 진 초록색 손수건 하나를 뱉았다.
범은 그 손수건을 펴서 입에 물고 해골 위를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손수건으로 한번 스쳤다.
그러자 그 앙상한 뼈만이던 해골은 어느새 살이 제대로 붙은 백발
노파로 변한 것이 아닌가. 떡보는 눈이 둥그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앗! 썩은 살이 되 산단 말인가!
떡보는 지금 고민하는 숙제(宿題), 중국 공주, 십년 전에 죽은 시체
처리에 대한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떡보는 범의 양해를 구할 새도 없이 황급히 주머니 속에서 그 신기한
나무가지를 끄집어내어 하던 식대로 그 노파의 시체를 자질했다.
아니나다를까 노파는 즉시 눈을 뜨더니
아이 실컷 잤다. 그런데 내 옷은 다 어디 갔노?
하며 창피하다는듯이 두손으로 다릿사이를 가리우며 일아나 앉는 것이
아닌가.
떡보는 미칠듯이 기뻤다.
범은 입에 문 손수건을 떡보의 허리에 달린 주머니에다 대고 흔든다.
받아 넣으라는 것이다.
고맙소
이번에는 떡보 편에서의 인사였다.
떡보는 허리를 굽혀 감사하면서 손수건을 받아 주머니 속에 간수하고
범의 등에 업혀 그곳을 떠났다.
다시금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 동틀 무렵에야 일행이 초조히 기다리는
마을 주막에 돌아왔다.
---범으로부터 신기한 보물을 선사받은 떡보는 의기양양히 중국 서울로
행차를 재촉하였다.
中國公主의 回生
멀리 수십리 밖에서부터 영접을 받으며 성대한 환영 속에 중국 서울에
들어선 떡보는 천자의 별궁 영빈전(迎賓殿) 깊숙이 자리를 잡고 유유히
노독을 풀었다.
천자를 비롯하여 중국조정은 예의상 차마 서둘지는 못하나 떡보로부터
무슨 지시가 있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그러나 썩어빠진 살까지 되 살릴
수 있는 떡보로서는 일부러 늦장을 낼만도 한 것이었다.
입경 십여일 후에야 떡보는 몸차림을 고치고 나섰다.
마침 대궐로 나가 천자에게 알현한 다음 대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차
공주의 소생을 맞이할 때까지의 제반 절차를 지시하였다.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지만 자기만이 지닌 재주를 뽐내기 위한 떡보의 지시는 필요이상
까다로운 절차로 꾸며진 것이었다.
날자는 어느날. 묘를 파되 해골을 땅위에 올리는 시각은 동틀무렵
몇시. 해골을 향수로 닦아 구리관에 옮길것. 해골을 운반할 적엔 지난날
출장 때와 같이 성대한 의식을 갖출것. 해골을 안치할 곳은 공주 생시에
거처하던 궁전으로 정할 것. 해골에는 공주 생시에 입던 관복을
산사람모양 입혀서 이부자리에 눕힐 것. 회생시키는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궁전 뜰 앞에 제단을 꾸며 놓고 신악(神樂)을 연주하며 초혼제를
지낼 것. 떡보 자신이 해골 모신 방에 들어가 있을 동안에는 절대 잡인의
출입을 금할 것. 그리고 이날 밤은 초혼제에 앞서 궁중을 비롯하여 서울
장안에 집집마다 등촉을 밝힐 것. 물론 꿀물도 준비시켰다.
상여다, 상복이다, 궁중은 출장 아닌 출장인 경사 잔치 준비에
흥성거리고 장안 거리는 이 소문을 듣고 구경차 모여드는 사람으로
뒤끓었다.
모든 절차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묘소를 떠난 공주의 해골은 장송곡 아닌
회생곡에 발 맞추어 십년 전에 영결하였던 옛궁으로 돌아왔다.
해 지기가 바쁘게 궁중은 물론 장안거리는 집집마다 오색 등불이 켜지고
성벽 주변 산봉우리에까지 불꽃이 찬란하게 피어 오른다.
밤이 깊어 기다리던 시각은 왔다. 관복에 위의를 갖춘 떡보는 둘러선
문무백관의 금빛 관대(冠帶)가 불빛에 반사되어 불야성같이 번쩍이는
초혼제장에 나가 제단 앞에 분향재배하고 정숙히 발을 옮겨 빈실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향기가 서렸는데 문 밖에서는 신곡의 풍악소리가 조용히
일어난다. 꾸며진 일이면서도 스며드는 신비스러운 느낌에 떡보는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바로 잡았다.
조심스러이 이불을 걷었다. 현란한 관복의 옷무늬와 금은 보석의
패물만이 그 옛날의 영화를 자랑하는듯 그 속에 싸인 잔해는 짐승
뼈다귀와 별 다름 없는 흉악한 모습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모름지기 꽃과 달을 무색케 하였을 미모의 주인공이었으리라. 떡보는
눈을 감고 장차 옛 자태로 환원될 공주의 풍모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서
녹색 손수건을 펴들었다.
가볍게 얼굴을 덮는듯 손수건이 발끝까지 스치는 순간 쑥 꺼졌던 옷이
불쑥 부풀어 오르며 베개위에 놓인 바가지같던 해골은 백설같은 피부의
아름다운 처녀의 얼굴로 변한 것이었다.
떡보는 멍하니 그 소생된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별아기공주의
유가 아니다. 정말 절세의 미인이다. 경탄하는 떡보는 이제서야 죽은지
십년이 되도록 애석의 정을 잊지 못하여 하는 어버이 천자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떡보는 다음 그 나무가지를 꺼내어 자질을 했다.
방금 시체였던 공주는 자던 사람모양으로 눈을 뜨며 흘러간 십년도
꿈이었던양 큰 기지개를 하는 것이었다.
방을 나선 떡보는 굽어보이는 젯장을 향하여 손을 들어 풍악을 멈추면서
공주에게 꿀물을 등대하시오
하고 공주의 소생을 알렸다.
하회를 기다리던 근친들은 우르르 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편전에서
기다리는 천자에게도 기별이 날랐다.
불야성을 이룬 장안은 환희속에 날이 바뀌는 줄도 모르는 것만 같았다.
삼일 후 천자는 관하 지방 방백 수령이며 각국 사신을 청하여 딸의
소생을 자축하는 큰 잔치를 베풀기로 하였다. 그날 아침이다. 떡보는
천자에게 불렸다.
이미 십년전에 장사 지냈던 딸이요, 회생구명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떡보더러 살아난 달빛공주를 아내로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떡보에게는 이 또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만 황송이오이다. 떡보 본래 처가 있사옵는 위에 모국의 공주를
둘째로 맞았삽거늘 아무리 황송하온 어명이실지라도 다시 생각지 않을 수
없음을 아뢰나이다
천자는 만면에 웃음을 걷지 못한채
있을법도 한 일, 셋찌인들 어떤가 내 대부의 뜻을 믿고 오늘 연석에서
천하에 이를 선포코저하는 바요---
하며 다정히 떡보의 손을 쥔다.
이로써 떡보는 모국의 별아기공주를 제이부인으로 중국의 달빛공주를
제삼부인으로 맞이하여 수만리 타국땅 구중심처에 깊이 묻혀 새로운
밀월생활을 이루게 된 것이다.
錦衣로 還國
끝없는 애정의 달콤한 꿈속에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그 신기로운
나무가지며 녹색손수건의 기억도 아득하여 가는 어떤날 떡보는 뜻밖에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이나라 젊은 재상 황이라는 사람이엇다.
인사를 마친 후 황은 짐짓 거북스러운 태도로 잠간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대단히 황송스러운 청이오나 저는 외아들로서 십오년전에 부모를
일시에 여의었삽는데 양주 모두 아직 여년이 있을 때이었사옵기 자식된
마음에 아직도 망극하기 짝이 없사오니 대인께서 이 불효자식의 미진한
효성을 가긍히 생각하시사 선친 양위의 부활의 덕을 베풀어 주시옵기
바라는 바입니다
떡보는 이제서야 그 신기한 나무가지와 녹색 손수건을 잊었던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입니다
떡보는 허식을 늘어 놓을 여념도 없이 선뜻 대답하여 버렸다.
천만 감사합니다. 대인의 은혜야말로 백골이 된들 잊을 법
있사오리까. 그러면 준비 절차는 어찌하면 좋사올는지---
그리 거창스러이 아니하고도 될 수 있으니 간단히 해골만 파서 댁에다
깨끗이 모셔 놓으시지요
또 날자는?
아무 때도 좋습니다
떡보는 일사천리의 쾌락을 하였다.
---재상 황의 부모가 불시에 회생되자 이번에는 어떤 부호로부터 애첩을
살려 달라는 청이 들어왔다. 살려주었다. 뒤이어 어떤 열녀로부터
불상히(불쌍히?) 죽은 남편을 살려 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도 살려
주었다. 스승을 살려달라는 제자들의 청이 왔다. 그도 살렸다. 애
주검, 늙은 주검, 남편 주검, 아내 주검, 궁중에 통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은 제각기 꼬리를 물었다.
떡보는 성가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 달빛공주의
권고로 낱낱이 응대하는 한편 천자에게 주청하여 천하에 방을 붙이게
하였다.
애석히 죽은 사람은 지방 관가의 알선으로 구역과 날자를 차례로
정하여 큰길 가에 시체를 나란히 내놓으라
방이 나붙자 중국 전역은 묘 파는 사람으로 북망산을 뒤덮었다.
떡보는 잘 달리는 말 한필을 마련하였다. 그 신기한 나무가지와 녹색
손수건을 각각 지팡이 길이의 막대기 끝에 매달아 가지고 말에 올라 그
막대기 끝으로 길가에 내 놓은 시체를 스치며 달렸다. 떡보가 지난 뒤의
길 좌우는 되살아난 애 어른이 열을 짓는다. 개중에는 죽은지 몇백년된
후손도 낯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다.
떡보는 동으로, 서로, 매일같이 쉴새없이 달렸다.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몇해를 달렸다.
---그러는 동안 몇천만 밖에 안되던 중국 인구는 일약 사억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환호로 들끓던 세상 여론은 점점 근심조로 변하였다.
이렇게 인구가 늘다가는 장차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리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천자도 이를 염려하여
인제는 그만하고 돌아오라
는 명을 내렸다.
떡보는 몇해만에 천자궁에 돌아왔다.
천자는 잔치를 베풀고 떡보를 위하여
그동안 수고 많았소. 인제는 모국에서 기다릴 때도 되었으니 돌아감이
어떨꼬---
환국을 종용하였다.
---떡보는 천자로부터 받은 금은보화며 비단 등속을 수백필의 말에 실리고
제삼부인 달빛공주와 함께 회로에 올랐다.
행차가 지나가는 길가에는 새 마을과 없던 거리가 연달아 생기고
수목만이 울창하던 산과 들은 농사터로 개간되고 있다.
이리하여 살림터를 찾는 사람의 떼는 물을 따라 들판따라 새땅으로
새땅으로 뻗어, 인구 사억으로 급격히 팽창된 중국의 강토는 동으로
북으로 또 남으로 나날이 확장되어 가는 것이었다.
神秘한 꿈
오래간만에 돌아온 떡보를 맞이한 모국의 궁중은 환영절차에 바빴다.
신부 달빛공주가 거처할 궁전도 마련해야 했다.
그 동안 궁전 일부도 확장되어 미리 중국천자로부터 보내온 사례금으로
떡보루(德甫樓)라는 큰 전각이 새로 섰다.
임금님은 떡보를 위로하기 위하여 만조백관이며 각지방의 방백수령들을
불러 떡보의 기념으로 세운 떡보루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옷차림도 찬란히 수백명이 둘러앉은 중앙 임금님 맞은편이 떡보의
자리다. 왼편에는 제이부인 별아기공주를 앉히고 바른편에 제삼부인
달빛공주를 앉히었다. 희색이 만면하여 떡보의 좌우를 바라보고 있던
임금님은 좌중의 정좌를 기다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리하여 우리 떡보대부는 멀리 중국에까지 가서 광활한 미개지에
사억인구의 씨를 뿌려 제대로 나라의 기초를 잡게하고 왔으니 우리나라
국위가 바야흐로 사해(四海)에 빛나는도다. 이 어찌 짐의
기쁨만이리요--- 널리 그 공을 찬양하며 정성껏 그 노고를 위로하노라
황송하오이다
임금님의 찬사에 떡보는 머리숙여 답례를 하였다.
임금님을 따라 일동은 잔을 들었다.
수륙 만리 먼먼 길에---
임금님은 다음 달빛공주를 소개하려 하였다. 이때였다. 갑자기 대궐문
안이 소란하여진다. 뭣인가하고 모두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임금님도
말을 끊었다.
흙 묻은 삼베옷 차림의 어떤 여자가 황황히 잡는 관원들을 밀치면서
내가 바로 떡보의 여편네야!
하고 악을 쓰는 것이었다.
떡보 너 이놈 나는 이꼴로 버려두고 너만이 호강이냐? 이놈! 이놈!
알아볼 것도 없이 떡보의 큰마누라였다.
알아차린 임금님은 빙그레 웃으며
알았다. 빨리 목욕시키고 새옷을 갈아입혀 이곳 자기 남편 곁으로
인도하여라
명을 내렸다.
볕에 글대로 글은 검붉은 얼굴과 거칠은 노랑머리가 갑자기 뒤집어씌운
비단옷에 어울릴 리 있으리요만 그래도 사생대부 떡보대감님의 부인임엔
틀림이 없었다.
남편 옆에 좌정한 떡보마누라는 이제서야 주위를 깨달았음인지 발광하던
흥분도 가라앉고 꿀먹은 벙어리모양 묵묵히 앉아있다.
한참동안 어수선하던 잔치는 점차 흥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전각의 처마끝에는 봄빛이 무르익었고 떡보의 마음속에는 애정이
짙었다.
난간 앞 연못에는 원앙새 또한 쌍쌍인데 낙화는 춤추는 소매끝에
휘날리고 새 노래는 풍악속에 멋들었다.
상감마마
떡보는 허리를 굽히며 취기어린 눈으로 임금님을 우러렀다.
떡보 지난날 감히 말하지 못하였던 꿈이란 바로 지금 이
광경이었나이다. 제가 상감마마께서 베푸신 자리에 마누라를 앞에다
우리나라 공주를 왼편에다 중국 공주를 바른편에다 앉히우고 호강을 하는
장면이었사오니 아무리 꿈이라 하온들 감히 입밖에 낼 수 있었사오리까?
임금님은 인제야 알았다고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다. 이말이 전해지자
전각이 무너질듯이 웃음이 터졌다.
잔치가 파할 무렵 텀벙하는 돌던지는 소리에 원앙새 몇쌍이 놀라
날아갔다.
이것은 돌이 아니라 떡보가 던진 별아기공주를 살리고 달빛공주를
살리고 또 중국 사억인구의 기초를 만든 신기한 나무가지와 녹색손수건
그것이었다.
신기한 보물을 영원히 삼켜버린 궁궐안 깊은 연못은 짙어가는 황혼속에
둥근 무늬만을 그리고 또 그릴뿐이었다.
< 끝 >
1996. 12. 5. 21시
<제 15 화>
落照悲話(낙조비화)
餘愁
설움찬 宮殿
자시(子時).
축시(丑時).
인시(寅時)도 거진 되었다.
송악(松嶽)을 넘어서 내려부는 이월의 혹독한 바람은 솔가지에서 처참한
노래를 부르고 있고 온 천하가 추위에 오그러뜨리고 있는 겨울
밤중이었다.
이 추위에 위압되어 행길에는 개새끼 한마리도 얼씬하지 않고
개경(開京) 십만 인구는 두꺼운 이불 속에서 겨울의 긴 꿈을 꾸구 있을
때다.
그러나 대궐에는 이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고관에서 부터 말직까지가
모두 입직하여 있고 방방이 경계하는듯한 촛불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왕후궁 노국대장공주전(魯國大長公主殿)의 앞에는 내시며 궁액들이 몸을
오그리고 추위에 떨며 심부름을 기다리고 있었고 침전의 밖에도 두명이
지키고 있었다.
침전 --- 침전에는 아무도 없는 대신에 그 협실에 두 사람이 있었다.
협실에 안치한 불상 앞에 중 편조(遍照)가 합장을 하고 꿇어 앉고 그
곁에는 고려국왕 공민이 단 아래 역시 불상앞에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난산 후에 환후 위독한 왕후 대장공주의 쾌치를 불전에 빌기 위하여
왕은 비밀히 중 편조를 침전까지 불러 들이어서 여기서 기원을 드리는
것이었다.
부처에 매우 귀의해 있는 왕이 이전 원나라에 있을 때에 구해 두었던
영하다는 불상앞에 지성으로 굻어 엎드려 있는 왕과 편조.
어지럽고 불길한 일이 박두해 있는 가운데서도 고요히 고요히 깊어가는
겨울의 밤을 왕과 편조는 불상 앞에 엎드려서 공주의 쾌차를 빌고 있었다.
궁중에 비밀히 불러들인 편조라 큰소리로 기원을 외이지도 못하고 입
속으로 드리는 그 기원에 왕은 연하여 합장 예배하였다.
이때에 복도를 좇아서 공주부(숙옹)에서 침전으로 달려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소리나 또한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였다.
왕은 빨리 일어나서 협실에서 정침으로 나갔다. 협실과 정침을
가로막는 장짓문을 겨우 닫을 때 쯤 공주부에서 달려온 궁녀가 침전 밖에
시직하는 내시에게 무엇을 소군소군 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이 자리에 자리를 잡을 때에
완관 최만생 아뢰옵니다
하는 내시의 말이 들렸다.
음. 무에냐?
잠간 내전까지 임어하십사는 후전 마마의 전탁이 계시옵니다
음. 가마
황황히 일어나서 내시의 부액도 받을 겨를이 없이 공주부로 발을
옮길동안 왕의 가슴은 놀랍게도 방망이질 하였다.
* * *
공주부에 입시해 있는 전의(典醫)의 표정을 보고 왕은 벌써 사태가 그른
것을 짐작하였다.
진맥을 하기 위하여 뚫은 병풍의 구멍 틈으로 은어와 같은 공주의 손의
맥을 짚고 있던 전의는 왕의 입어에 허리를 굽혔지만 얼굴로써는 뜻을
나타내었다.
병풍을 돌아서 공주에게로 내려가매 머리맡에는 왕의 어머님 명덕
태후가 앉아있고 발치에는 혜비 이씨(惠妃李氏)가 앉아 있으며 그 뒤로는
몇몇 지밀궁녀(至密宮女=지밀나인)들이 지켜 있다가 왕의 입어에 조금씩
자리를 움직이기는 하였지만말 한마디도 없이 공주의 누워있는 얼굴로
눈들을 향하고 있다.
왕은 공주의 침두에 가서 고요히 앉았다.
몽고인(蒙古人) 특유의 기다란 살눈섭이 반달모양으로 굳게 닫겨 있고
좀 짧은듯한 웃 입술이 방긋이 열려서 기운없는 호흡이 그 틈으로
드나드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비교적 넓고 균형잡힌 백옥같은 이마에는 머리칼이 두어올 걸리어
있었으며 그새 십개월간의 태중과 이번 난산 때문에 여위고 여윈 뺨에는
따로 만들어 붙인듯이 광대뼈가 솟아 보였다.
왕은 손을 들어서 고요히 공주의 이마에 얹었다. 선뜻한 왕의 손이
이마에 얹히우매 공주는 눈을 번쩍 떴다. 번쩍 띄운 눈은 잠시 허공에서
방황하였다. 허공에서 휘번득이던 눈이 왕에게로 돌아와서 잠시 머무를
동안 겁에 띠운듯 하던 눈은 차차 사람다운 표정을 갖기 시작하였다.
왕을 알아 본 것이었다.
상감마마
비로소 입에서 나온 말.
왕은 곁에 놓인 붓으로 공주의 마른 입술을 추기어 주려고 손을
움직이려할 때에 공주의 손이 벼락같이 왕의 손을 와서 잡았다. 단지
사람다운 표정이 나타난데 지나지 못하던 공주의 눈이 순간에 변하여
타는듯한 정열이 나타났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공주 좀---
상감마마. 신을 안아 주세요
움직일 기운이 없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는 그 고민. 왕은 양팔을
공주의 허리 아래로 넣어서 공주의 몸을 안았다.
상반신을 왕의 무릎에 올려놓은 공주는 최후의 정열 때문에 창백하던
얼굴이 붉게 변하고 그 눈에 광채가 났다.
상감마마. 좀 더 힘있게 안아 주세요. 힘껏 신의 허리가
끊어지도록---
왕의 팔의 힘이 차차 더하여 감을 따라서 머리를 좀 더 들어 보려는
공주의 최후의 노력.
삼감마마. 신은 기쁘옵니다. 더 힘껏--- 신은--- 신은 다만 마마께
사후없으신 것이 죄송---
숨이 찬듯이 말을 끊었다. 온 정열을 모아서 왕을 우러러 보던 공주의
눈힘도 어느덧 풀렸다. 걸그렁 걸그렁 힘없는 숨소리.
그 숨이 문득 끊겼다. 왕의 마음이 철석 내려앉는 순간 아직껏 좀
가볍던 공주의 몸이 천근 같이 무거워 졌다.
공주! 공주!
예기는 하였지만 이 의외의 사변에 공주의 몸을 안은채 어쩔줄을 모르고
공주만 연하여 찾았다.
이 동안 국모 대장공주의 승하를 조상하는 애곡성이 태후며 혜비
이씨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이튿날 국상은 정식으로 반포되었다.
공민왕 십사년 이월, 아직도 매운 바람이 몸을 에이는 겨울이었다.
긴듯 하고도 짧은 생애. 짧은듯 하고도 긴 생애.
왕이 아직 한낱 고려 종실로서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라는 몽고의
이름으로 원(元)나라 서울에 잠저(潛邸)해 있을 때에 원나라 황제의
어명으로 원나라 종실 위왕(魏王)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즉 이번에 승하한 대장공주였다. 후에 본국 고려로 돌아와서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고려 국왕이 된 이래 십사년간을 변함없이
사랑하던 왕비였다.
즉위 이래 십사년간 어지러운 고려의 정파(政波)에 올라 앉아서
파란많은 생애를 보낼 동안 사랑하는 공주의 내조만 없었더면 왕은 이
왕위를 내어던지고 공주와 함께 어느 조용한 곳에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으려 떠났을 것이다.
동과 서와 남쪽의 해변으로는 왜적의 난이 끊이지 않는 일면에 또한
북쪽으로는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있어서 그 편도 한때도 평안한 날이
없이 어떤때는 왕이 멀리 상주까지 몽진을 한 일까지 있었다.
이렇듯, 동, 남, 서, 북으로 외국의 환이 끊일 날이 없으면서 또한
안으로는 내란이 끊이지를 않았다.
즉위 원년에 최유 김원지의 무리가 월나라의 힘을 빌려서 본국인 고려를
침범하려던 일을 비롯하여 조일신, 김용등의 난이라, 무엇이라 한때도
베개를 편안히 하고 잠잘 날이 없었다.
신임하는 신화와 대할 때에도 저 사람의 마음의 배포가 어떤가를 속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왕의 입장이었다. 신임하는 신하가 연하여
당신을 배반할 때에 왕의 눈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믿을 사람이 없어만
보였다.
이렇듯 얽히고 설핀( 힌?) 어지러운 국정에 또한 재상가 끼리의
세력다툼이며 사병(私兵)을 양성하는 장상끼리의 싸움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어지러운 정국이었다.
이런 어지러운 정국안에서 왕후 노국공주의 따뜻한 사랑만 없었더면
왕은 일년을 왕위에 배겨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 * *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에서 과거 십사년간의 치적을 돌아보건데 과연
용하였다.
먼저 원나라의 세력이 이 왕의 손으로 얼마만치 꺽이었다.
이전에는 무슨 소소한 일을 행할지라도 반드시 먼저 원나라에 품하여
허가를 얻고야 하던 것을 이 왕의 대에서는 선참후주의 방침으로
나아갔다. 먼저 행하고 후에 아뢰었다.
아직껏은 각 재상 분권이던 정치를 중앙집권을 꾀하여 재상끼리의
세력다툼을 얼마듣지 완화시키고 모든 권세를 국왕인 당신이 잡았다.
그 밖에도 집안 문벌이나 학벌만 자랑하고 아무 실능력이 없는 재상들은
차차 경원해 버리고 실능력을 가진 장상을 좌우에 모아들였다.
풍속에 있어서도 원나라 풍속과 고려의 풍속을 다 잘 알고 있으니만치
세밀한 주의로써 개량을 하였다.
각 뫼에 솔을 심어서 사태에 방비하고, 재상들의 매사냥을 금하여
공연한 살륙을 막고, 아울러 이때문에 밟히는 전토를 보호하고, 돈을
만들어서 일용에 편케하고 수차를 만들어 농사에 편리케 하고, 흔히
민간에 미행하여 백성의 고초를 살피고- 세세한 일까지 모두 살피고
살펴서 국운을 융성케하여 피폐하였던 고려의 국정이 바야흐로 이 왕의
내에서 중흥이 되나부다 누구든 믿었다.
이 왕의 위업의 뒤에 숨은 공주의 내조의 힘이 얼마나 컸던고. 첩첩히
쌓인 어지러운 문제에 골머리 쏘아서, 에라 왕이고 무어고 내어던지고
말까 할때마다 공주의 부드러운 손은 왕의 어깨에 얹히었다.
상감마마. 마마께서 내 던지시면 고려의 백성은 누구를 믿고 살리까?
격려하는 공주이 말은 피곤한 왕으로 하여금 다시 용기를 나게 하곤
하였다.
* * *
빈전(殯殿) - 재궁(梓宮)을 지키는 왕.
수없이 피운 향의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왕은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삼감마마 수라를 어찌하리까?
환관 신소봉(申小鳳)이 이렇게 아뢸때도 왕은 아무 대답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공주 승하한지 초칠일이 지난 이때까지 왕은 아직도 수라를 받아보지
않았다. 몇번 냉수를 찾고 몇번 태후의 강권에 못이기어 술 몇잔과 돈육
몇점을 입에 넣어 본 뿐 수라반은 대하지 않았다.
여전히 끼니때라고 환관은 예에 의지해서 수라를 채근하지만 왕은 또한
여전히 예에 의지해서 대답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상감마마. 수라를 어찌리까?
신소봉은 한번 더 채근하여 보았다. 그런 뒤에 잠시 기다려 보고는
인젠 자기의 직책은 다 하였다는듯이 왕과 제궁앞에 합장 명목하고 염불을
외고 있었다.
대사
불러 계시오니까?
다시 공주는 안 돌아 올까?
생자 필멸이 올씨다
말이 끊어졌다.
또 다시 왕은 눈을 감고 편조는 염불을 외었다.
잠시는 정숙가운데서 시간이 흘렀다. 잠시 뒤에 이번은 편조가 염불을
중지하고 왕의 편으로 돌아 앉았다.
생자 필멸, 회자정리- 이것이 사람의 세상이올시다. 여기 이르러서는
왕후 장상이라도 필부와 다른것이 없읍니다. 돌아가신 분은 이미
돌아가셨거니와 전하께서는 전하를 아버지로 알고 있는 천만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좀더 보중하시지 않으면 안될까 하옵니다
마디마디마다 똑똑히 끊어서 아뢰는 편조의 말. 그러나 왕은 여전히
등등 않았다.
전하. 다른 점은 그만두고라도 공주전 재세시에 공주전께서 그렇듯
사랑하시던 이 창생을 위하여서도 옥체를 보중하옵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전하께서 애통하시는 마음은 어리석은 빈도도 짐작 못하는 바가
아니옵니다마는 이 창생을 위해서 보다도, 전하를 위해서 보다도,
전하께서 이 창생을 버리시면 승하합신 공주전의 영이 가장 슬퍼하실 점을
생각 하셔서라도 좀더 보중하시지 않으면 안될까 하옵니다
무슨 말을 할지라도 여전히 눈을 감고 부처같이 가만히 앉아있는 왕.
좌우 눈에서는 눈물만 연하여 흘러서 침침한 촛불에 눈물이 번쩍 거리고
있다.
公主는 갔건만
편조는 딱하였다.
어떻게하면 이 왕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서 수라를 진어케
하나.
공주 승하한 뒤에는 마치 산 송장으로 자처하는 이 왕을 어떻게 하면
잠시라도 인간다운 감정과 감각을 회복하도록 하게 하나.
본시부터 공주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다른 여인은 눈 거듭떠 보지않던
왕이라 공주 승하한 뒤 부터는 여인이란 여인은 모두 악마로만 보는
모양이다.
이번 공주 승하한 뒤로는 왕은 모든 아리따운 후궁들 까지도 악마같이
보았다. 공주 이미 없는 이 세상에 다른 계집들은 어째서 존재하느냐
저런 계집들은 왜 살아있고 공주는 왜 없어졌느냐. 이러한 마음으로써
여인들은 빈전 가까이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주
승하하였는지라 당연한 순서로 인전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혜빈이씨
가 빈전으로 들어오다가 왕에게 쫓겨난 이래로 이 빈전에는 여인이라고는
왕의 모후되는 명덕태후 한 사람이 들어올 뿐 다른 여인은 얼씬 하지를
못하였다.
지금에 있어서 가장 근심되는 것은 왕의 건강이었다.
벌써 팔구일간을 수라를 진어치 않았으며 어떻게 하여서든 수라반을
대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제일 급무였다.
수라를 권키 위하여 왕께 생자필멸의 이치를 강론하던 편조는 이
돌부처와 같은 왕을 우러러 보며 잠시 가만 있다가 한 걸음 무릎으로
나아가서 왕의 딱 맞은 편에 앉았다.
전하!
대답이 없었다.
전하
-----
전하!
편조는 왕의 양손(무릎위에 합장하고 있는 손을 꽉 잡았다.
전하! 전하!
대사!
왕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것은 폭발하려는 통곡의 그
서곡이었다. 대사- 한마디 부를 뿐 왕은 체면을 내던지고 당신의 손을
뽑아서 얼굴을 덮고 울었다.
대사. 반혼법(返魂法)은 불가(佛家)든가? 도가(道家)든가?
울음에 섞이어 하는 왕의 이 하소연에 기지있는 편조는 매달렸다.
전하. 빈도가 마침 그 말씀을 올리려 했읍니다. 공주전 가셨다
할지라도 반혼술로 다시 전하를 뵐날이 있을까 하옵니다. 보중하소서.
전하, 보중하소서.
편조는 왕의 손을 다시 끄을어 잡고 장삼 소매로써 왕의 눈물을 씻어
드렸다.
만약 그런 술(術)이 있다 하면, 여기 공주의 혼을 다시 불러 주
아니올시다. 입토(入土)키 전에는 혼은 공주전 속체에 그냥 계셔서
출현하실 수가 없사옵니다. 보중하소서. 공주전 입토하신 뒤에는 빈도가
반드시 공주전의 혼으로 전하를 모시게 하오리다. 그때 돌아오신
공주전의 혼께서 전하의 너무도 수척하신 용안을 대하오면 얼마나
심통하오리까. 수라를 부릅소서. 공주전을 위하셔서 옵니다
그날 왕은 비로소 수라를 진어하였다.
적적한 수라. 이전에는 반드시 공주가 함께 앉아서 서로 권하며 받으며
하던 수라반을 혼자서 받을 때에 왕은 너무도 적적하여 편조에게 배식을
명하였다.
한개 옥천사(玉川寺) 사비(寺婢)의 자식으로 그 아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중 편조는 이리하여 왕의 총애와 신임을 차차 높이어 갔다.
* * *
이월에서 삼월 사월 - 공주의 영해를 정릉(正陵)에 안장하기까지 왕은
빈전에서 난적이 없었다.
왕은 인제 공주 입토한 뒤에 편조의 반혼법으로 공주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이 단 한가지의 희망으로 쓸쓸한 삶을 그냥 계속하였다.
이월에서 삼월 사월, 날이 차차 따스해 감을 따라서 공주의 제궁에서도
차차 냄새가 괴악하여 갔다. 밖에서 갑자기 빈전에 들어 오는 사람은
한순간 숨이 딱 막힐만치 냄새가 괴악하였다. 이 냄새를 감추기 위하여
눈이 쓰라리도록 향을 피웠지만 인위적 향내가(로) 그 냄새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 방에 젖은 왕의 코도 이 냄새는 맡았다. 그러나 이 냄새조차
왕에게는 눔물을 자아내는 향내였다. 이것이 공주의 몸이 썩느라고 나는
냄새거니 이 냄새가 밖으로 나아가서 대공에 헤지는 것이 아까웠다.
많은 물재를 들이어서 삼화서 가져온 오석(烏石)으로 명공이 깎은
석관에서도 틈틈으로는 붉은 물이 바닥에 새어 내렸다.
다른 사람이면 이 빈전에 오기조차 싫어할 것이나 왕은 빈전에서 한번도
밖에 나가 보지를 않았다.
찬바람이 살을 에이고 산야에는 아직 두꺼운 눈이 쌓여 있는 이월에
승하하여 백화가 난만한 오월에 안장을 할 동안- 눈이 녹고 땅의 얼음이
풀리고 흙이 트고 풀이 나고 자라고 나무에 잎이 피고 남국 갔던 새들이
모두 돌아오고 할 동안- 왕은 세월이 가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어둑침침한 빈전- 촛불고 향연기와 양내와 악취가 뒤서리는 가운데서 꿈과
같이 생시와 같이 만 삼개월 남아를 보냈다.
그것은 다만 뒤숭숭하고 순서없고 갈피를 차릴 수가 없는 날이 가고
오고 하는 것 뿐이었다. 그 가운데는 아무 합리된 일도 없고 명료한 일도
없고 엄벙벙의 꿈과 같은 세월이었다.
때때로는 재상들이 와서 무엇이 어떻다 하고는 돌아가고 태후도 간간
와서 이렇다 저렇다 하다가는 가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섯바뀌고
혼돈되어 돌아갈 뿐 왕은 모두 알지도 못하였거니와 알려 하지도 않았다.
공주는 이젠 돌아올 길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 일념 뿐이 지금의 왕을
지배하는 단 한가지의 생각이었다. 그 밖엣 것은 왕의 감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이리하여 하오월(여름5월) 공주를 정릉에 안장한 뒤에는 왕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 건장하고 원만하던 체격이며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도록 여위고
약하여진 것은 두말도 할 것이 없거니와 성격과 감정에 있어서도 본시의
왕과는 딴 사람이 되었다.
그 세밀한 관찰력과 치밀하고도 밝던 정치안이며 인자하고 관대하던
성질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멍하니 얼혼 빠진 사람같이 되어
버렸다. 무한한 창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나절을 움직이지 않고 그냥
앉아 있기가 일수며 신하들이 무슨 말을 할지라도 듣는둥 마는둥 몇번을
찾아도 대답도 않고 대답이 있댔자 헛대답이 많았다.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온갖 감정이며 감동이며를 잃은- 한개의
움직이는 허수아비였다.
* * *
공주를 정릉에 안장한 십여일 지난 어떤날 밤이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왕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므로 침전밖에 입직해 있던 환관 최만생이 침전
뒷마루로 돌아가려 할때에 왕이 침전에서 나왔다. 보매
뜻밖에(미복이나마) 두면까지 쓰고 어디 밖으로 거둥(거동?)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만생과 동료 환관 한 명이 달려와서 부액을 하려하매 왕은 손짓으로
그만 두란 뜻과 조용하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만생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디 거둥(거동)을 하시옵니까?
응. 편조의 집까지
작은 소리로 왕은 대답하였다. 그리고 더욱 작은 소리로
미행이다. 너희만 따라라
하고 보태었다.
이리하여 왕은 환관 두명만 데리고 걸어서 대궐을 빠져 나왔다.
대궐 담을 넘어 행길까지 뻗어 우거져 있는 꽃을 우러러 보며 말없이
걷는 왕의 뒤를 환관 두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만일을 경계하며 따랐다.
현월(眩月)은 벌써 서산에 걸리고 상쾌한 바람이 옷깃을 날리는 여름
저녁이었다. 아직 초저녁이라 행길에는 오고가는 사람도 꽤 많았다.
이러한 가운데를 왕은 왕으로서 따로이 근심을 갖고 환관들은 직무상의
근심을 갖고 묵묵히 행인의 눈을 피하며 갔다.
반혼법(返魂法)을---
왕이 편조를 밤에 찾은 것은 편조의 반혼술로 그리운 공주의 면영이나마
다시 한번 보고자 함이었다.
호반(胡盤)에 주안을 배포하고 왕과 편조는 마주 앉아 있었다.
전하 아직 시간이 이르옵니다. 대개 혼백은 자정이 지나지 않으면
출유치 않으옵니다
왕께 공손히 술을 부어 드리며 편조는 이렇게 말하였다. 좀하면 도로
펴려는 얼굴을 정신차려 근엄히 꾸미며 편조는 연하여 왕께 술을
권하였다. 왕은 편조가 드리는 술을 받아서 들이키고 받아서는 들이키고
하였다. 한번도 사양하거나 함이 없었다.
편조는 이 드리는대로 술을 받아 들이키는 왕을 보면서 속으로
탄식하였다. 일국의 국왕- 그가 한번 호령하면 천백의 미희(美姬)라도
당장에 구할 수 있겠거늘 잃은 공주에게 대한 지극한 사모의 염이 이
금지옥엽으로 하여금 보행으로 천승(賤僧)의 집까지 오게 하였구나.
전하
상에 벌린 많은 음식중에 공주에게 소하는 뜻으로 채소만을 안주로 하는
이 정열의 중년남자. 여위고 여윈 얼굴은 어느덧 술때문에 검붉게 되고
톡 두드러진 광대뼈 위에 번득이는 두 눈은 눈물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충혈이 되었다. 떨리는 그의 손. 술때문에 중심을 잡기 힘들어 연하여
팔꿉으로 호반을 짚어 쓰러지기를 면하는 쇠약한 몸.
이 가련한 왕의 신경을 생각할 때는 편조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려
하였다.
전하. 오늘 반혼술로 공주전의 혼백을 어전에 부르기는
하겠읍니다마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한 뒤에 편조는 그 말끝을 맺었다.
전하께서는 공주전의 혼백을 한번 보시면 다시 이전과 같으신
인군(仁君)이 되시겠사오니까?
왕은 눈을 들었다. 바야흐로 들이키려는 잔을 중도에 멈추었다.
적적하구료. 적적해 오늘 보면 내일 또 보고 싶고 모래 또 보고
싶고---
아니올시다. 혼백은 자유롭지 못한 것. 한달에 한번쯤이나 현신케
하올까. 매일은 힘들것 같사옵니다
한달에 한번- 한달 삼심일- 서른날-
혼잣말 같이 이렇게 뇌이던 왕은 아직 들고 있던 잔을 딱하니 상에
놓았다.
대사. 한달에 한번씩이라도 제발---
그대신 빈도의 아뢰인 말씀을 잊지 말아 주시옵시오. 이전과 같은
인군이 됩소서. 전하 한분을 우러러 보는 창생을 살핍소서
다시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밤은 차차 깊어 갔다.
* * *
자정. 반혼법을 베풀어서 대장공주의 혼백을 왕의 앞에 다시 불러
낸다는 시각이었다. 이때는 왕은 편조의 권하는 술때문에 꽤 취한
때였다. 취하기는 꽤 취하였지만 일단 정신을 박은 일이라 연하여 자정이
아직 안되었느냐고 채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자정. 편조는 일어나서 왕을 부액하였다. 연하여 쓰러지려는
왕을 단단히 부액을 하고 반혼실로 천천히 걷는 동안 편조는 왕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한마디씩 한마디씩 똑똑한 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혼백은 형태는 있으나 소리는 없읍니다. 첫째로 말씀을 걸으시지
말것이며, 혼백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오니 밝기 전에 놓아 보내셔서
후일의 기약에 편리토록 하옵소서
반혼실은 복도를 통하여 뒤에 따로이 달린(딸린?) 이 집 후당이었다.
편조가 앞서서 문을 열어 잡고 왕을 인도하여 반혼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 머리맡에는 금불 한채가 안치되어 있고 아랫간은 오색이 찬란한
비단으로 담벽을 삼고 그 앞에는 향로에 향불이 피어 있으며 머리맡
불전에 놓인 방석은 편조의 자린듯하고 웃간 담벽에 기대어 금병풍이
둘리고 그 앞에 용을 수놓은 방석이 왕의 앉을 자리인 모양이었다.
편조는 먼저 왕을 인도하여 불전에 서서 함께 합장예배 하였다.
그리고는 왕을 와으이 자리로 가게 하고 자기는 반혼향가루 한줌을
내어다가 향로에 뿌린 뒤에 불전에 가서 명목하고 꿇어 앉았다.
불전에 명명하는 촛불 두대와 향로 좌우편에 키어있는 두개의 촛불을
광원으로한 이 밤은 비교적 밝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용석에 앉아 기다리는 왕.
엄숙한 태도로 불전에 축문을 외이는 편조.
향로에서는 편조의 뿌린 향가루 때문에 자욱히 연기가 피어 오른다.
엄숙하고 정숙한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왕은 이 너무도 경건한
찰나에 어느덧 몹시 취하였던 술조차 얼마간 깨었다.
편조의 축문은 차차 차차 템포 가 빨라갔다. 방안의 향기는 더욱이
자욱하였다. 향로에서는 이윽고 향가루도 거진 탔는지 연기가 점점 엷어
간다.
그때에 그 엷어가는 연기의 틈으로 왕은 보았다.
틀림이 없는 대장공주였다. 너무도 엄숙한 기분이기 때문에 취기도
거진 깬 왕의 눈이 그릇 보았을 까닭이 없었다.
연기가 차차 엷어가는 뒤로 오색 비단을 두른 담벼락을 등지고 단아히
서 있는 한 개의 이국부인(異國婦人).
희고도 좀 넓은 이마며 좀 짧은 듯한 웃입술이며 길고 꼬리가 위로
향한듯한 눈이며 시꺼먼 살눈섭으로, 아로새긴듯 한 코로, 또는 그
몸태도, 옷(원나라 황실복장이었다) 어느 곳이든 일호의 틀림이 없는
공주의 현신이었다. 이 너무도 기이한 일에 한 순간 눈이 아득하여졌다가
다시 왕이 시력을 회복할 때에 아랫간 공주는 얼굴에 미소를 나타내었다.
이젠 연기도 사라진 때라 방긋이 웃노라고 열린 입틈에서 왕은 공주의
이빨까지 보았다. 좌우편 송곳니가 덧니이기 때문에 웃을 때는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던 공주의 그 덧니까지 틀림이 없었다. 단지 승하 직전의
공주와 조금 다른 점은 공주가 제 아무리 늙지 않은 본국태생으로서
승하할 때까지 청춘미를 그냥 보전하고 있었다하나 그래도 나이가 서른이
넘은 완숙한 맛은 그 얼굴에서든 몸매에서든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지금 왕의 앞에 나타난 이 공주는 왕이 일찌기 백안첩목아로서 원경에
있어서 처음 공주를 알고 처음 공주와 사랑을 속삭일 그때의 공주였다.
아! 공주!
그것은 애무와 반가움의 소리라기 보다 오히려 맹호의 신음성과 같았다.
이런 신음성을 내이며 왕이 공주에게로 달려 내려가려 할때의 왕의
옷깃을 붙들은 사람이 있었다.
펄떡 보니 편조였다.
편조의 만면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편조는 왕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전하. 아까 아뢴 말씀을 잊지 마시도록, 그리고 저 문을 열면 협실이
있사옵고 그 방에는 금침 준비도 있사옵니다. 그럼 빈도는 밝는 날 다시
배알하겠사오니 오래 막히셨던 정회를 푸시옵소서
공주!
왕은 편조의 말은 듣는듯 마는듯 편조가 밖으로 나가는 동안 두 팔을
벌리고 허둥지둥 공주에게로 내려갔다.
공주는 얼굴에 부끄럼과 미소를 띄고 역시 왕을 맞으려 한 걸음
두걸음--- .
왕을 반혼실에 남겨두고 편조는 홀로 나왔다. 왕과 함께 있기 때문에
저린 팔 다리 허리를 몇번의 기지개로 풀면서 정침으로 향하였다. 왕을
모시노라고 얼굴에 지었던 근엄한 표정도 사라졌다.
재미를 봅시오
후당을 돌아보며 한번 씩 웃은 뒤에 걸음을 빨리하여 제 방으로
돌아왔다.
편조의 방에는 금침이 벌써 준비되어 있고 편조의 베개에 엎드려 한
계집이 자고 있다. 편조는 내려갔다. 가만가만 내려가서 계집의 좌우
엉덩이의 틈을 발로 쿡 찔렀다. 거기 깜짝 놀라서 일어나는 계집을
웃목으로 데구로 굴려 버리고 덤썩 제자리에 누웠다.
굴러간 계집은 일어나 앉았다.
요망스럽게 잠은 웬 잠이야!
계집도 마주 흘겨 보았다.
에끼! 여우같으니!
편조는 계집을 꾸짖었다.
내가 여우같으면 대사는 뭣 같으오?
묏(멧)돼지 같지. 그래 속이 시원하니?
마주 보는 계집의 흘기는 눈이 가늘어 졌다. 서로 가느다란 눈으로
한참을 흘겼다.
내가 묏돼지면 임자는 암퇘지 되련?
싫어
싫어? 잘 싫겠다
싫구나
싫으면 임자는 나가구 주씨(朱氏)나 보내게
것두 싫구나
이두 싫구 저두 싫구- 에라 임자 오늘 밤은 암퇘지 되게
편조는 벌떡 일어났다.
한소리 계명성으로 짧은 밤이 밝았다. 날이 밝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편조는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등대된 옷을 바꾸어 입고 후당으로 돌아가
보았다.
왕도 벌써 일어난 모양이었다. 협실 밖에서 잠시 방안의 기수를 살핀
뒤에 편조는 햄, 햄, 두어번 기침을 하였다. 얼굴에는 근엄한 표정을
부치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동정이 없었다.
햄! 햄!
또다시 짖어보고 그냥 동정이 없으므로 문을 방싯이 열고 보았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왕- 누구에게 혼을 빼앗긴사람모양으로 눈이 퀭하니
이불 위에 까치 다리로 앉아서 한군데만 주시하고 있다.
편조는 이 모양을 보고 문을 좀 더 넓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빈도(?편조)의 어깨는 또 우그러졌다.
빈도 올시다
궁중의 절을 모르는 편조는 왕의 맞은 편에 가서 정면으로 왕께
절하였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한군데만 주시하고 있을 뿐 편조의 인사를
의식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편조는 한번 큰 소리로 기침을 하였다.
왕이 비로소 알았다. 깜짝 놀라며 몸까지 소스라쳤다.
빈도 올시다
왕은 잠시 멍하니 편조를 보았다.
오. 대사 밝기전에 갔구료
혼백은 광명한 곳을 싫어하옵니다. 전하. 초조반을 진어하압셔야지
혼백은 형(形)은 있어도 체(體)는 없다는데- 공주의 혼백은 체까지
있었구료
네. 전하의 지극하신 정성에 부처가 감동하셔서 특별히 체까지 보낸
모양이옵니다
체까지- 체까지- 아직 방안에 향내가 남고 몇 올 머리털이 남고.
대사. 오늘밤 또 못볼까?
전하 얼른 초조반을 진어 합시고 환궁합셔야지 대궐에서 알면 적지않은
소동이 일어날까 하옵니다
대사. 나는 대궐에 안올라 가겠소
전하께서 환궁 안합시면 빈도의 목이 그냥 남지 못하리이다
왕은 의아한듯이 편조를 굽어 보았다.
公主의 眞影
여름은 무르익었다.
교외에서 빛을 자랑하던 하록(夏綠)은 어느덧 개성안에까지 스며들어서
길가 담 틈, 뜰 구석마다 푸른빛은 한창을 자랑하고 있다.
수녕궁 향각(壽寧宮 香閣) 앞에 작약도 제철이라고 만개하여 하늘을
나는 나비들을 부르고 잇다.
이전에는 공주와 함께 따던 이꽃을-
지금 혼자서 바라보는 왕의 심사는 형용하기 어렵도록 적적 하였다.
향각 난간에 의지하여 한참을 꽃을 굽어보고 있다가 왕은 탄식하며
자리에 돌아왔다.
자리에는 비단 한폭, 붓 몇자루, 단청, 물, 등이 준비되어 있고 내시
몇사람이 부채를 들고 묵묵히 분부를 기다리고 있다.
왕은 자리에 앉아서 붓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번 눈을 감은 뒤에는 뜰줄을 모르는 왕은 여기서도 눈뜰것을 잊은듯이
잠자코 있었다. 공주의 영(影)을 그려 보려고 이곳에 자리잡은 왕이었다.
이전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서(書)며 화(畵)에 있어서 입신의
기(入神之技)라는 찬사를 받아오던 왕은 몸소 공주의 진영을 그려서 이와
매일 대하고자 여름의 작약냄새 우거진 이 향각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공주의 모습을 생각하고자 일단 눈을 감자 왕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해마다 공주와 함께 여름에는 작약을 따던 이 동산 또는
지금으로부터 오년전의 한 겨울을 공주와 함께 말타기를 연습하던
연마장으로 쓴 일이 있는 이 동산에 자리를 잡자부터 공주의 모습보다도
지난 십육년간의 공주와의 부부생활이 주마등과 같이 왕의 머리에
어른거려서 붓 들을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일국의 국왕이나 또한 어지러운 정국의 통어자로서의 왕의 과거는
기구한 생애였다. 연년 다달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외환 내우.
이 고달프고 어지러운 왕, 생애를 보내는 동안, 물건의 그림자와 같이
왕의 곁에서 고초를 같이 겪어 드리고 간난을 나누어 맛보는 공주가
있었거늘.
왕의 재위 십사년간 그냥 계속적으로 있는 어지러운 일이 생기면 누구를
믿고 누구와 어려움을 나누랴.
아직 낮이 되기 전에 향각에 자리 잡은 왕은 화견을 앞한채 해가 서산에
기울때까지 그냥 망연히 있었다. 붓을 적시어 보지도 않았다.
해가 서산에 넘고 들에 나갔던 새들이 제 깃을 찾을 때야 왕은 비로소
눈을 떴다.
마음이 산란해서 여기서는 안됐다. 환궁하자
* * *
일심을 다하여 왕이 공주의 진영을 완성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신기(神技)라는 일컬음을 듣던 왕의 필력이요, 일심을 다하여 가장
사랑하는 이를 그린 것이라 과연 혼이 들은 듯한 진영이 완성된 뒤부터는
왕은 끼니때마다 진영의 앞에로 수라반을 갖다 바치게 하여 산사람 대하듯
하였다. 그 애무와 대접에 있어서 공주 생존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하였다.
이렇게 공주에게 마음을 향하기 때문에 왕은 온갖 세상사가 귀찮았다.
이렇다 저렇다 대신들이 문제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귀찮고
시끄럽기만 하였다. 이 모든 세상 잡무에서 피하여 공주만 생각하여 그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이리하여 세상 잡무를 피하기 위하여 왕은 중 편조를 사부(師傅)로 삼고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내리고 국정을 자순케 하였다.
과거 십사년간의 경험으로 보아서 소위 세신거족(世臣巨族)들은 서로
틀고 서로 무웃고(?) 서로 짜고--- 이리하여 삐억삐억 좋지못한 꾀만
꾀하고 도당이 짜지고 넘어지면 자연히 세력이 생기고 세력이 생기면
자연히 다른 세력과 다투고 다툴 세력이 없으면 왕에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까지 품게 되고--- 고려 오백년간을 쌓아 내려온 이 세력은 지금은
너무도 뿌리가 크게 뻗어서 이들에게는 도저히 한나라의 정사를 맡길 수가
없었다.
초야의 신진에서 인물을 추려 낼 수가 없는 바가 아니지만 이들도 차차
올라가서 명망이 생기고 귀하게 되면 어느덧 자기의 초라한 근본을
부끄러이 여겨서 거족들과 혼인을 하고 그 틈으로 잠겨버리니까 이것도
또한 길만 있는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유생은 또한 나약하여 굳센 맛이 없고 그 위에 학벌의 뿌리로써 얼기
설기 연락되어 강직한 정치를 하지를 못할 것이다.
과거 십사년간을 고려의 국왕으로 있으면서 지나본 바로서 통절히
느낀바 있어서 언제든 고립하고 강직한 인물만 골라오던 왕이라 이번에
고려의 정치의 대행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중 편조를 부른 것이었다.
득도(得道)한 불도(佛徒)매 욕심 적고 천한 태생이매 얽히는 연줄이
없고 홀몸이매 역모할 근심이 없는 이 편조야 말로 오래 왕이 구해 오던
이상적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편조는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여름도 어느덧 가고 성했던 모기들도 송악으로 그림자를 감춘 어떤
가을날이었다.
왕도 인제는 얼마만치는 안돈이 된 때였다. 만날 공주의 진영과 음식
거처를 같이 하며 한달에 한번씩 쯤은 반혼법으로 공주의 몸을 어루만질
수 가 있는지라 처음 한 동안과 같이는 비통하지 않았다. 공주 잃은 뒤에
눈물이 잦아진 왕이라 지금도 공주의 말만 나오면 두 뺨으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하였지만 여느때는 담소도 예사로이 하도록 안돈 되었다.
그 어떤 날 왕은 편조와 함께 강안전에서 환담을 하고 있었다.
편조의 말.
빈도- 아니 소신은 본이 불도 출신이라 귀현의 예의에 통치
못하옵니다. 이런 점은 관대히 용서해 주셔야 하겠사옵니다
사실 편조는 어전임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펴고 까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얼굴에 근엄한 표정을 장식하는 것과 어깨를 좀 우그리는 것이 편조에게
있어서는 최대유일의 존경법이었다.
전하의 관후하신 처분으로 사부라는 직책을 맡았사옵지만 소신은---
사부는 그것부터가 틀렸소이다. 소신이라고는 않는 법이요
왕도 웃었다. 편조도 웃었다.
예. 신, 신이 무엇을 알리까. 성의대로만 행하 지만 소 아니 신
본시 미천하와 명문거족들을 어(御)키 힘든 것이 걱정이옵니다
그게야 무슨 근심이 되리까? 사부의 뒤에는 국왕이 있으니 국왕의
명에야 명문거족인들 거역하리까?
그야 그렇지만 신이 전하를 추천하와 사환한 사람들도 일단 높은
지위에만 오르면 신을 무식한 청승이라 수모하오니 이것이 신에게는
억울합니다
왕은 이말을 듣고 얼굴에 검은찌를 한순간에 보였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천승- 명족- 천승- 명족.
왕이 이 점에 대하여 좀 생각하고 있을 동안 편조는 두리번 두리번 살펴
보다가 갑자기
전하. 내밀히 아뢸 말씀이 있읍니다
왕을 쿡하니 었다. 어두운데 주먹으로 넙적하니 엎드린 것도
우스웠고 그 묏더미만한 몸집에서 떨리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우스웠거니와 떨리는 애원성으로 소신 하니 신이라고 정정하는 것이
어욱이 우스웠다. 왕은 고소가운데서 이렇게 물었다-
사부는 대체 무슨 일이요?
죽여 줍시사
글쎄 무슨 일이요?
신이 전하를 기만하왔읍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신이 전하를 기만하였습니다. 신자로서 국왕을 속인다는 것은 마땅히
죽을 죈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기만하왔읍니다
글쎄 무슨 일이요?
너무도 수다스럽게 구는 바람에 왕도 눈을 크게 하고 이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엇다.
전하, 오늘밤 누옥까지 미행합시면 신이 천팜에 바칠 것이 있읍니다.
죽여 줍시사
사부 죽이기는 저녁뒤에 하기로 하고 지금 일어나서 이야기나 합시다
왕은을 무엇으로 보답하리까?
편조는 일어나 앉았다. 방금까지도 죽여달라고 목소리를 떨던 그가
천연히 일어나서 어깨를 우그리고 얼굴에 근엄한 표정을 나타내고 마주
앉은 이 꼴을 왕은 막연히 바라 보았다.
* * *
그날 밤 편조의 집, 공주 반혼청에는 세사람이 솥발(삼발이?) 모양으로
둘러 앉았다.
금병풍 앞 용석위에 앉은 사람은 왕이었다.
그 곁에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는 젊은 여인은 대장공주였다.
그 맞은 편에 엉거주춤히 꿇어 앉아있는 사람은 편조였다.
전하, 반야(般若)라는 북국여인이옵니다. 전하를 기만한 죄는 일백번
죽어도 마땅하오니 처분하옵소서. 그러니 이는 신 스스로를 위함이
아니옵고 위으로는 전하를 위함이옵고 아래로는 전하를 잃으면 광명을
끊기는 고려의 창생을 위하여서 옵니다. 공주전 승하 후에 전하를 몇달간
빈전에 모실때에 전하의 심경을 살피옵고 신이 몰래 사람을 놓아서
전국에서 구해 온 여인 백명중에서 골라 내인 사람이 이 반야옵니다.
공주전의 면영을 닮았다고 구해 온 백여명 여인 중에서 가장 흡사한 자로
택한 여인이 이 반야옵니다. 전비(田卑)의 천생이 어찌 감히
용종(龍種)에야 비기리까 마는 그래도 얼른 보기에는 외람 되어도
공주전의 면영을 닮았삽기 행여 전하의 부르심을 볼까하고 신이 꾸이 던
한막의 연극이로소이다. 국왕을 기만한 죄 일백번 일천번 도륙을
당하와도 한이 없사오이다. 죽여 줍시사
왕은 대답이 없었다. 눈을 꾹 감은채 묵묵히 있었다. 방심한듯---
그밖에 다른 표정은 없었다.
아직껏 공주의 혼으로 알고 애무하던 것이 사실인즉 한개 실물 여인에
지나지 못하였으니 거기 대한 낙망때문에 이렇듯 방심 상태가 되었나?
반혼술이라 해서 국왕을 이렇듯 농락한 편조의 행동을 괘씸히 보기
때문에 그 노염으로 이렇듯 묵묵히 있나?
이런 무리들에게 속아서 줄줄 따라다니던 당신의 행동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기 때문에 대답이 없나?
혹은 대장공주 아닌 이 반야라는 여인에게 애정이 품어지므로 그것을
꺼리어서 가만 있나? 왕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반야도 또한 전하를 모신지 수삭에 외람되이도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는지 이젠 공주전의 혼백으로가 아니요, 반야 자신으로 모셔보고 싶어
하는 듯한 양을 보면 그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심사가 가증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가련도 하옵니다. 성의(聖意)는 어떠 하온지---
잠간 말을 끊고 왕과 반야를 본 뒤에 편조는 또 말을 계속하였다---
또 한가지 반야는 전하를 처음 모신 뒤부터 태기가 있는 모양이옵니다.
(왕은 이말에는 몸을 흠칫 하였다) 벌써 오륙삭--- 밭은 전비의
천종이나마 씨는 용종, 이 뒤라도 혜비전 마마께서 왕자를 탄생합시면
다른 일이 없겠거니와 그렇지 못하오면 이 아이가 유일의 혈자가
아니오니까? 지금 나라의 정국이 어지러운 때에 하루바삐 혈사 없으시면
고려의 사직이 위태롭사옵니다. 신의 죄는 일백번 죽어도 마땅하옵기
어전에 죽음을 빌거니와 전하의 후를 생각하셔서 반야에게는 관대하신
처분이 계시기를 바라옵니다
왕의 앞이라고 억지로 지으려던 근엄한 표정은 어느덧 자연적 위엄까지
띄었다. 눈에는 눈물 흔적까지 보였다.
왕은 그냥 침묵을 지켰다. 고요한 방에 세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한참 뒤에 왕이 일어섰다.
전하 어디로?
편조가 펄떡 놀라서 뒤따라 일어섰으나 왕은 따라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두어번 설레 설레 짓고는 머리를 푹 수그린채 방 밖으로 나갔다.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편조도 펄떡 놀라서 뒤따라 일어서기는 아혔으나 따라오지 말라는
바람에 따르지도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반야는 왕이 임어할 때부터 지금껏 머리를 가슴에 묻고 깍아놓은 듯이
앉아 있었다.
좀 뒤에 편조가 나가 알아보니 왕은 어까 벌써 환궁하였다 한다.
왕자는 났건만
그로부터 두달 편조는 대죄하는 뜻으로 집에 박혀 있어서 입궐치
않았다.
반야도 자기의 거실인 별당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에게서는 아무말도 없었다. 죄를 준다는 뜻도 입궐하라는
분부도 없었다.
편조도 이번 일은 왕과 반야와 자기 세사람만이 아는 사건이라 어떻다
말을 낼 수도 없고 단지 침묵 중에서 왕명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뜻밖에도 섣달에 들면서 왕은 편조를 수정이순논도 섭리
보세공신 벽상삼한중대광령도첨의사 사사 관중방 감찰 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
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重大匡領都僉議使 司事 判重房 監察司事
鷲城府院君提調 僧錄司事 兼 判書雲觀事) 를 봉하고 겸하여
환속(還俗)하기를 명하고 속명까지 신돈(辛旽)이라고 내렸다.
편조--- 변하여 신돈은 이 너무도 황송하고 놀라운 성은에 울었다.
첨의(신돈의 벼슬이름). 나를 위해서 국정을 도와 주시오, 그새 안
부른 것은 첨의를 밉게 봄이 아니라 내 좀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 그리
하였소
왕이 신돈을 대궐에 불러서 이렇게 말한 때에 신돈은 엉엉 어린애같이
울었다.
전하. 무어라 말씀 올리리까. 다만 전하께서 간사한 무리의 참소에만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면 신은 미련하오나 신의 힘이 및는 껏 신이
생각이 자라느 ㄴ껏은 전하의 고려, 생명의 복리를 위해서 이 노구를
아끼지 않으리다
이리하여 왕은 친필로써
師救我 我救師 生死以之 無或人言 佛天證明 이라는 맹서문을 써서 주고
신돈은 고려의 섭정의 지위에 서게 되었다.
* * *
반야는 잊어버린 존재같이 되었다. 왕도 반야에 관한 일은 다시
신돈에게 지 않았다. 신돈도 이 열적은 말을 다시 왕의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태중이기 때문도 되겠지만 나날이 안색이 창백하여 가는 반야를 신돈은
간간 별당까지 가서 위로 하였다.
성욕이 강하기 때문에 젊은 여인의 가까이 가기만 하여도 어지러운
생각을 금하기 어려운 신돈은 반야의 방에 가면 이부자리 쪽으로 눈이 갈
기회를 피하고 할 수 있는대로 엄숙한 기분과 경건한 태도로 반야를
대하고 하였다.
자기의 방에서는 젊은 계집들과 음란한 장난을 기탄없이 하는
신돈이로되 반야에게 들어 가 볼 때에는 언제든 어깨를 우그리고 근엄한
얼굴을 하였다.
그리고 내실과 별당과의 새를 엄중히 경계하게 하여 내실 여인들이
별당에 가는 것을 엄금하고 하인들도 반야의 하인을 따로 두어서 반야의
하인의 내실 출입을 금하고 내실 하인들의 별당 출입을 금하였다.
장래를 기다리오. 상감마마의 부르시는 날을 기다리오. 태중의
애기가 나오시는 날은 상감께서 부르시겠지
어깨를 우그리고 외면을 하고 반야에게 이렇게 말하는 신돈의 태도는
마치 재상가 소지에게 시종드는 늙은 충복 같았다.
이 신돈의 보호 아래서 복중의 왕자는 차차 세상에 고함칠 날을 고요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도 어느덧 과거장에 말리어 들어가고 새해가 이르렀다. 왕의 제위
십오년이요, 원나라 지정(至正) 이십육년이었다.
그해 이월 신돈의 별당에서는 한개 새로운 생명이 첫울음 소리를 쳤다.
사내였다. 대장공주에게 혈사가 없고 다른 여인은 가까이 하지 않은 이
왕에게는 유일한 왕자였다.
그러나 이 아기의 아버님되는 왕은 아기 탄생을 아지도 못하였다.
신돈은 장차 좋은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서 아직 가만 내버려 두었다.
아기는 탄생후 며칠을 지나지 못하여 연령 두살이라 부르게 되었다.
입춘(立春) 전에 탄생하였는지라 입춘이 지나서는 두살로 세었다.
그러나 두살로 세게 되기까지 아직 아버지의 축복을 못받은 가련한
아기였다. 아버지의 축복을 못받았는지라 이름도 아직 못지었다.
내실 사람들은 토끼리 없이
아기
라 칭하였다. 누구의 아긴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별당 하인들 뿐은
아기마마
라 불렀다. 신돈이 이렇게 시킨 것이다. 그러나 왜
마마
라고 부르는지는 신돈과 반야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공주를 정릉에 안장한지도 일년이 지났다.
공주의 일주기까지는 감히 이런 말을 어전에 꺼내지 못하였지만
일주기가 지나면서 부터는 대신들은 왕께 왕비간택하기를 졸랐다. 그리고
안극인(安克仁)의 따님을 후보자로 들었다. 왕에게 원자가 없는지라 어서
원자를 보아야 겠다는 것이었다.
왕은 마음에 없는 일이었다. 현재 있는 혜비 이씨며 그밖에 궁녀들도
돌보지 않거늘 어찌 또 무슨 여인을 맞아 들이랴. 그러니 너무도 귀찮게
굴므로 어떤날 이 문제를 신돈에게 의논 하였다.
납비 합시다
신돈의 의견은 간단하였다.
그러니 지금 혜비도 혼자 공방을 지키는데 또 한 과부를 만들면
무얼하오?
적적한듯이 왕이 어렇게 말함에 신돈은
그렇지만 전하께서 거절 하시면 연달아 상계가 들어 올테니 귀찮지
않사옵니까?
하며 무사주의를 취하기를 주장하였다.
왕은 신돈의 이 의견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
있다가
반--- 무어? 반---
거북한 모양이다. 신돈은 알아 들었다. 신돈은 씩 웃었다.
전하. 축하 드리옵니다. 거 이월에 왕자가 탄생하셨읍니다. 전하
이하로 고려 천만 창생의 행복이로소이다
왕은 그냥 가만 있었다. 기쁜듯한--- 그러면서도 더 적적한 기괴한
심정이었다.
이 왕자가 공주에게 났으면 얼마나 기쁘랴.
공주 생존시에 늘 왕자를 보고싶어 하더니, 공주 자신의 몸에서
못낳으면 다른 여인의 몸에서라도 왕의 혈사가 생기기를 그렇게도
기다리더니. 지금 난 왕자가 하다 못해 공주 생존시에라도 났더면 공주도
마음을 놓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공주 임종의 마지막 말---
마마께 사후 없으신 것이 죄송하옵니다
왕은 문득 물었다.
언제요?
예? 이월 **일 이 니다. 원자께서도 건강하시옵고 반야도 산후
평안하옵니다
왕은 눈을 굴려서 벽에 걸린 공주의 진영을 쳐다 보았다.
산듯--- 바야흐로 입을 움직이려는듯 왕을 굽어 보는 공주의 진영.
신돈이 퇴궐할 때에 왕은 원자를 축복하는 뜻으로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에 쓰던 옥띠를 주었다. 이름은 무니노(無尼奴)라 지었다.
* * *
드디어 안극인의 따님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인
이 정비(定妃) 안씨도 첫날부터 별궁에 거처하고 그의 청춘을 외로이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가련한 여성이었다.
* * *
어제날 까지도 한개 중에 지나지 못하던 신돈이 놀라운 세도로 자리에
올라가면서 고려의 조정은 물 끓듯 하였다.
왕의 뜻을 받아서 신돈의 행한 첫번 정사가 세신 권속들의 그 얽히고
얽힌 뿌리들을 죄 짤라버리는 것이었다.
한미한 곳에서 자란 신돈이라 나라의 정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될지 이런 복잡한 문제는 잘 처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대신
열과 성으로써 여기 대신하려 하였다.
세세로 내려온 조상의 위력을 방패삼아 아무 훈공도 없이 높은 자리에서
편안히 지나는 무리. 왕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얻어 가지고 아래를 누르는
무리. 사병(私兵)을 양성하여 이로써 국방에 당하지 않고 도리어
개인세력을 높이려는 무리.
중 출신의 신돈에게는 꺼릴만한 아무 인연도 없었다.
공자 맹자가 인연이 없으니 그의 후배되는 유림도 걸릴 것이 없었다.
세족(世族)에게 연분이 없으니 권문도 무서운 바가 없었다.
역사를 안배웠으니 원나라도 무서운줄 몰랐다.
고려에서 높일 사람은 왕 한분밖에는 없다.
고려왕은 공자에게 구속될 것이 아니요, 원나라에 구속될 것이 아니요,
세족권문에게 구속될 것이 아니요, 유림에게 구속될 것이 아니요, 만일
구속될 것이 있다면 단지 고려백성에게만 구속되어야 할 것이다.
세태에 무식하기 때문에 이런 용감한 단안을 내린 신돈은 왕이 맡긴
자기의 권한을 높이 들고 재추에 일어 섰다.
신돈이 이렇게 아무 배경도 없는 한개의 중으로서 고려조정에 일어서매
고려조정에서는 가만 있을 이가 없었다.
자기네들 끼리 맡아볼 때는 자기네들 끼리 서로 깎고(깍?) 싸우고
하였지만 상대편으로 신돈이라는 중이 나타나매 일제히 그리로 싸움의
예봉을 들었다.
좌사의대부 정추(左司議大夫 鄭樞)와 우정언 이존오(右正言 李存吾) 두
언관의 상소가 그 첫 시합이었다. 상소문은 대략 이런 뜻이었다.
그 어떤날 문수회(文殊會)에서 보매 영도참의 신돈은 신하의 자리에
서지 않고 전하와 나란히 하여 구경하였으며 영도참의의 하명이 내리는
날도 조복(朝服)을 입지 않았으며 반달이 지나지 못하여 대궐에서도 고추
서서 다니며 말을 탄채로 홍문(紅門)을 출입하며 늘 전하와 나란히 하여
호상에 앉으며 자기집에서도 재상들이 뜰아래서 절하는 것을 자기는 방에
앉아서 받으니 이런 외람된 자는 벌하셔야 합니다.
이 상소문을 왕은 예에 의지하여 신돈과 호상에 나란히 앉아 받았다.
이 상소문을 보고 신돈은 안색이 변하여 상아래 내려 꿇어 앉았다.
전하. 신이 예절을 모르기 때문이옵니다. 죄하십사
그러나 왕은 내려 앉은 신돈을 몸소 붙들어 상에 오르게 하였다.
섭정이 대왕과 나란히 한다는 것은 결코 예절에 어그러지지 않는
일이외다. 오늘 첨의가 세신(世臣)의 한개 상소문에 이렇듯 굴하면 장래
어떻게 국정을 마음놓고 맡기리까?
그리고 도리어 정추와 이존오를 불러서 꾸짖었다.
첨의는 야생(野生)이라 예절에 서투른 것은 나도 알고 맡긴바여니와
그래 몸이 언관(言官)에 있으면서 민정과 왕도에 관해서는 진언할 일이
없어서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연변에는 도둑이 왕성하고 나라는
가물어서 백성이 농사짓기가 곤난해 하는 이때에 그래 예의의 말절이나
이렇다 저렇다 할 밖에는 다른 말이 할것이 없단 말인가. 그래서 넉넉히
언관의 직책을 다할 수가 있을까?
이리하여 정추를 동래현령으로 이존오를 장사감무로 좌천을 시켰다.
이렇듯 왕이 철저적으로 신돈을 두호하여 주기 때문에 신돈은 자기
마음대로 고려정치를 주무를 수가 있었다.
서울서 놀고 있는 장신(將臣)들을 차례 차례로 변방으로 쫓았다.
이것은 첫째로는 변방으로 침범하는 도둑을 막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장신들을 서울에 그냥 두면 서로 핥고 흘기고 모함하고 하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무능한 세속(世俗)들을 용서없이 벼슬을 깎았다. 아직껏은 무능한 줄은
알지만 혹은 학벌로 혹은 족벌로 얽히는 곳이 있어서 그냥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무능한 명문들을 없이하기 위함이었다.
정민추정도감 을 두고 신돈 자기가 판사가 되어서 민원(民寃)을 직접
듣기도 하였다. 고려의 정사가 흐리고 권문이 너무 높기 때문에 횡포가
심해서 백성들은 권문에게 재산을 빼앗기되 호소할 곳도 없어서 참던
신돈은 호소할 길을 터서 권문들의 횡포를 금하였다.
賣妻求官
권세를 따르는 것은 예나 이제나 일반이었다. 신돈의 권세가 이렇게
되매 차차 신돈에게 부회하는 무리가 많아 갔다. 이 가운데서 신돈은
소인을 추려서 자기의 좌우에 두어서 몸을 장식하게 하고 재능있는 사람은
추려서 상당한 관직을 맡겨서 갈충보국케 하였다.
유림의 반대성 권문들의 아우성 가운데서도 신돈의 권세는 나날이
높아갔다.
공자밖에는 존경할줄을 모르고 원나라 사람 밖에는 숭배할 줄을 모르는
유림이며 권문들은 떨구어 버리려고 별 야단을 다 하였다. 그러나 신돈의
세력은 인제는 튼튼하여져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림은 주둥이만
까졌지 신돈을 대할만한 실제력이 없고 권문들은 자기네들의 내흥때문에
실력을 당할 수가 없고 장수들은 벌써 변경에 쫓겨가서 외구(外寇)막기에
겨를이 없고--- 이리하여 신돈을 꺼꾸러뜨릴 힘은 합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신돈은 왕의 고적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주의 영전(影殿)을
설계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 * *
그해 십이월 종실 덕풍군(德豊君)의 따님을 맞아서 익비(益妃)로
봉고(성을 한씨라 고침)왕비 책립의 잔치가 대궐에 크게 있는 날이었다.
신돈은 외연(外宴)이 끝나고 내연으로 들어서게 될때에 백관을 거느리고
왕께 축하하는 절을 드린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예쁜 여인--- 왕께 바치어서 외따로이 별궁에서 청춘을 보내라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익비 한씨의 얼굴이 연하여 눈앞에 보이므로 이것을 힘있게
떨구며 내실로 들어와서 신돈은 그의 비대한 몸집을 보료위에 커다랗게
내던졌다.
뒤따라 신돈의 심복인 기연의 아내가 들어와서 먼저 찌앉은 촛불을
다스려서 밝혀 놓은 뒤에 좀 어색한 듯이 말하였다.
아까부터 누가 와서 기다리고 있읍니다
신돈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기연의 아내를 쳐다 보았다. 한편 촛불을
받은 여인의 완숙한 얼굴을 잠시 쳐다 보다가 물었다.
누구야
여인이 올시다
좀 질투하는 음성이었다.
여인? 물론 젊은이겠지
예
예쁜가? 임자와 어떤가?
소인보다 예쁘고 말구요
신돈은 눈으로 미소하였다.
어디 불러 들이게
잠시 디에 문이 열리며 젊은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여인은 문안에 읍하고 섰다. 신돈은 여인의 얼굴을 보려 하였으나 불이
약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자. 이리 와 앉지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여기로 오지 않았다가는 내가 일어설 테야
계집은 앉았다.
좀 더 가까이
계집은 더 가까이 왔다. 신돈은 계집의 얼굴에 비치도록 불을 돌려
놓았다. 서민은 아니었다. 스물서넛 났을까 꽤 예뻤다.
무슨 일로?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이상에는 무슨 곡절이 있겠지. 대답 안하면
도로 내보낼 테야
소인의 지아비의 구실자리를 좀 높여 달라러---
지아비의 구실자리야? 그럼 왜 지아비가 안오고 임자가 와?
병중인가?
계집은 대답이 없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된 뿐이었다. 신돈은 거듭
물었다.
병중이 아니면 절름발인가?
-----
절름발이가 아니면 천친가?
신돈은 불쾌하여 졌다. 말이 거칠었다.
그래 서방의 주소 성명은?
선부의랑 이모의 아내라고 계집은 대답하였다. 신돈은 그것을 적었다.
음 알았다. 네 서방은 밝은 아침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경외에 내쫓고
너는 내집에 있거라. 벼슬을 얻고자 계집을 보내는 놈은 벼슬도 못하고
계집까지 잃을 것이고 너는 이미 내게 허락할 생각으로 온 이상에는 여기
있거라
신돈이 계집을 좋아하여 집에 많은 계집을 둔 것을 알고 신돈의 권력을
시기하는 권문들은 고 한 풍설을 많이 퍼쳤다.
---신돈은 황음무쌍하여 계집을 즐기므로 신돈에게 제 마누라를 바치고
그 덕으로 벼슬을 얻어 하는 무리가 많다. 지금 신돈의 신임을 받고 있는
무리들은 다 제 마누라를 빌린 자들이다. 무누라만 바치면 아무런
벼슬이라도 할 수 있다.
이런 소문이 퍼져서 신돈의 집을 찾아오는 젊은 여인들이 차차 생기게
되었다. 벼슬에 눈 어둔 사람들의 행사였다.
본래 색을 즐기는 신돈은 처음 몇명은 벼슬도 시켜주었다. 그러나 차차
이런 무리가 너무도 많아가므로 인젠 도리어 너무도 해이된 풍속에 싫증이
생겨서 그 비루한 행동을 벌하는 뜻으로 계집만 거두고 사내는 벌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집들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다.
신돈에게 뜻밖의 선고를 들은 계집의 얼굴은 순간 창백하게 되었다.
몸을 훔쳤다.
* * *
한각경 뒤 캄캄한 신돈의 침실 밖에 계집하인 하나이(가) 어쩔 줄을
모르고 망서리고 있었다.
신돈이 알아차리고 누구냐고 물었다. 하인의 대답은 왕이 미행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신돈은 깜짝 놀랐다. 처음은 거짓말인줄 알았다. 반야의 정체를 안
이래 아직 다시 왕이 와 본적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대궐에서는 왕비
영립의 잔치가 있었는데 왕이 미행할 까닭이 없으므로 그래서 재차 물어
보아도 여전히 왕이 거둥하셨다는 것이다.
신돈은 할일없이 일어났다. 계집은 버려두고---
신돈은 얼른 나와서 소세를 하고 사랑으로 갓다. 과연 왕은 내시
두명을 데리고 와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거둥하셨읍니까?
신돈은 절하니 왕은 적적히 웃을 뿐이다.
오늘 잔치는 어찌 하시고 이렇듯?
또 가련한 과부가 하나 생길 뿐이요
왕은 또 미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는듯한 미소였다.
순간전까지의 음락에서 갑자기 왕의 적적한 심경에 직면한 신돈은 왕을
위로코자 얼굴에 미소를 나타내려 하였다. 그러나 잘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환관을 돌아보며 손을 내릴 때 환관은 무슨 작은 보퉁이를 하나
왕께 드렸다.
아기-
?
무니노에게
신돈은 가슴이 덜컥 하였다. 왕이 갑자기 미행한 것은 아기를 보기
위하였던가. 새 왕비를 맞기 위하여 대궐에서는 욱적할 동안 왕의 적적한
심사는 문득 유일의 혈육인 무니노 아기를 생각나게 하였던가. 얼마나
고적하면 대궐을 벗어나서 이곳까지 미행 하였는가.
이리로 모셔 오리까?
왕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러나 신돈이 바야흐로 일어나서 나가려 할
때에
잠간 내가 들어갑시다. 겨울 바람이 찬데
하면서 몸소 일어났다.
환관이 왕을 부액하려 하였다. 그것을 왕은 손짓으로 말리고 신돈과
함께 나섰다.
별당에서 뜻아닌 왕의 임어에 방과 몸을 정제할 동안 왕은 몸소 손에
보퉁이를 들고 찬 바람에 덜덜 떨며 기다렸다.
생후 처음의 부자의 대면, 방이 정제되기를 기다려서 들어 가매
남향하여 왕의 자리가 깔리고 그 앞에는 강보에 싸인 아기가 눈을 뜨고
주먹을 빨고 있으며 반야가 웃목에 국궁하고 서 있었다.
왕과 신돈은 들어갔다. 왕은 남향하여 앉고 신돈은 마주 굻어 앉고
반야는 영외에 엎드렸다.
왕은 힐끗 반야를 보았다. 볼뿐 곧 도로 아기에게로 눈을 돌리고 잠시
굽어 보았다. 신돈이 촛불을 정면으로 비치인 아래 누운 강보의 왕자는
주먹을 빨며 무엇이라 중얼 중얼하며 휘번득거리었다.
이 모양을 굽어 볼 동안 왕의 얼굴에는 차차 차차 미소가 나타났다.
음울한 기분이 식어져 갔다. 왕은 손을 들어서 강보의 자락을 들었다.
그런 뒤에 당신 손이 찬것을 근심하는 듯이 몇번 손을 비빈 뒤에 왼편
옆구리를 들치고 들여다 보았다.
첨의
만면의 웃음.
왕씨의 자손은 반드시 왼편 옆구리에 커다란 사마귀 세개가 있소이다.
자, 이것 보시오
굽어 보매 거기는 큼직큼직한 사마귀 세개가 분명히 있었다.
왕은 그것을 본 뒤에 만족한듯이 아기를 두 손으로 조심히 쳐들었다.
얼굴 맞은 편에 높이 쳐들고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을동안 만족한듯이
미소가 나타났던 얼굴에 미소가 없어지고 차차 적적해지고 그 뒤에는 차차
우울해지고 마지막에는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전하. 왜 앙앙해 하십니까?
왕은 덜컥 아기를 놓았다. 흙(흑?)하니 느꼈다.
전하!
공주가 살아서---
전하. 이미 가신이는 가신이 올시다. 돌아 오시지 못할 분을
생각하시면 무얼하리까? 전하 유일의 혈사가 장성하시기까지---
아니. 이 아기의 장성은 보지 못할 것 같구료
그런 말씀---
아니. 영전(影殿)이나 낙성한 뒤에는 나도 머리를 깍고 공주의
명복이나 빌면서 여생을 보낼까 하지만 그때까지도 살지 못할 것 같구료
아니올시다. 전하. 전하께서는---
첨의도 모르시지 내 마음은, 이즈음 강잉히 살아는 가지만 속으로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들어눕기만 하면 방금이라도 죽을 것 같구료
신돈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할일 없이 손으로 아기의 볼을 쓸어
보았다.
나 천추만세 후에는 이 아기는 첨의께 밖에는 부탁할 곳이 없소이다
왕은 눈물을 씻었다. 그리고 가져온 보퉁이를 아기의 강보 곁에 가만히
갖다 놓았다. 자식에게 어버이로서의 선사. 신돈은 그냥 허리를 굽히고
아기의 볼만 쓸고 있다가 힐끗 영외에 엎드려 있는 반야를 보았다. 행여
왕의 눈이 한번이라도 돌아올까 하여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 측은하였다.
신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도 손을 펴서 아기의 머리만 쓸어주고
있었다.
한참을 이렇게 말없이 지난 뒤에 신돈이 문득 몸을 조금 훔쳤다.
신은 차차 늙어서 그러온지 밤엔 요통이 심하오니 먼저 물러가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니. 나도 환궁하겠소
신돈은 뜻하지 않고 반야를 힐끗 보았다. 그러나 한순간 뿐이요 곧
눈을 돌렸다.
신돈은 왕을 모시고 별당에서 나왔다. 별당 밖에 국궁한 반야. 비록
소리는 안내지만 울고 있는 것이 분명 하였다. 문밖까지 왕의 보련을
보낸 신돈은 내실로 들어가지 않고 사랑에 자리하게 하였다.
승하한지 만 이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도 공주를 잊지 못해
앙앙불락하는 왕---
왕의 돌아봄을 못받아 적적해하는 반야---
두개의 적적한 혼을 생각할 때에 신돈은 오래간만에 느끼는
승도(僧徒)로서의 감정--- 인간 무상에 얽힌 고적감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실에서는 한 여인이 그의 돌아오기를 기다릴 동안 신돈은 사랑에서
인간무상과 가지가지의 인간상태를 탄식하고 있었다.
* * *
신돈의 정치적 업적의 제 일년도 지났다. 각 창령들은 변방으로 보내기
때문에 외구의 침범이 적었고 관리의 탐욕을 용서없이 벌하기 때문에
백성의 기운이 얼마간 펴고 얽히고 얽힌 권문들의 거미줄을 되는대로 끊어
놓기 때문에 지어 음모를 하는 일이 없어지고 공맹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선비들의 잔소리가 적어지고--- 첫솜씨로서는 성공한 편이었다.
세족과 선비들의 아우성은 꽤 심하였지만 이것은 모두 자기네의 개인적
원한을 토로함인지 서민들은
성인(聖人)이 출현하였다
고 까지 찬송하였다.
이런 일년이 지나고 그 이듬해 여름 작년 봄에 기공한 공주 영전이 거의
낙성되어 갈 때에 왕은 영전을 몸소 가서 보고 다시 헐어버리라는 엄명이
내렸다. 영전이 작고 좁아서 중 삼천을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 왕에게
불만하었다.
그리하여 짓던 영전은 그냥 버려두고 마암(馬岩)에다가 굉장히 큰
설계로써 새로이 짓기 시작하였다. 왕이 공주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은
영전이나마 전무후무한 것을 짓고 싶었다.
신돈은 딱하였다. 왕의 심경을 동정하자면 얼마든 광대한 영전이라도
지어 드리고 싶었으나 지금 농번기에 많은 인력을 들여서 또 새로이
영전을 기공한다 하는 것은 목민자(牧民者)의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벌써부터 민원성이 차차 들렸다.
새 영전 역사를 시작한 것이 유월--- 육월에서 칠월, 팔월, 한창
농번기에 농민들은 사역하는 공사라 말썽이 차차 높았다.
이리하여 팔월 어떤 날 때의 도첨의 시중 유탁(柳濯)과 첨서밀직
정사도(鄭思道)와 정비 안씨의 친정 아버지 극인이 서로 의논한 결과 왕께
영전 역사를 중지하기를 상소하였다.
그날도 마침 영전 도본을 상에 놓고 어떻게 하면 전무후무한 영전이
될까 하고 이리궁리 저리궁리할 때에 이 상소가 들어 왔다.
왕은 처음에는 무심히 이 글을 보았다. 보다가 얼굴이 검붉게 되었다.
왕은 글을 찢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서 둘러보고---
삼사사(三司使) 입직 안했느냐?
고 호령하였다.
이 명에 삼사좌사 이색이 달려와서 미처 대령한다는 말도 올리기 전에
도첨의 시중 유탁과 첨서밀직 정사도를 당장에 순군에 내리오,
동지밀직 안국인은 집에 가서 대명할 것이고 정비(定妃)는 아비의 죄로 제
친정으로 돌려 보내오
하여 영이 추상같았다.
왕의 친명이며 또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이색은 명령대로 시행하러
나갈 때에 왕은 소매를 떨치고 침전으로 들어갔다.
왕의 노염이 너무도 컸는지라 재상들은 노염을 깨드리고자 연하여
아뢰었으나 왕은 침전에서 나지 않고 침전에 누구든 들이지 않았다.
정비 안씨를 쫓아 보내기 때문에 안 문제까지 되므로 태후는 근심하여
시신을 보냈지만 태후의 시신까지도 왕을 보지 못하였다.
그밤을 왕은 통분하여 한잠을 못잤다. 공주의 신성함을 유린당한 것
같아서 속이 불붙듯 하는 가운데서 왕은 그새 잊었던 삼년정의 일까지
회상하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공주 승하한 뒤 처음은 사흘동안
제사를 안드렸다. 공주의 장례를 영화공주<인종(仁宗)의 딸>의 의식에
좇(쫓)아서 했다. 이 두가지의 일이었다.
서민도 죽으면 그 첫날부터 제사를 지내거늘 일국의 국모되는 공주는
사흘을 제사를 못받았다. 또한 장례에 있어서도 영화공주는 일개 왕녀에
지나지 못하는 신위(臣位)요 대장공주는 일국의 국모임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장례를 영화의 의식에 따라서 행한 것이었다.
그때에도 이것을 도맡아 본 사람은 유탁이었다. 그때의 그 유탁이
이번에 또한 영전 역사를 중지하라는 상소를 한 것이다.
이 유탁에게 대하 ㄴ괘씸한 생각 때문에 왕은 밤새도록 한잠을 못이루고
밝는 날 새벽에 신돈과 재상들을 불러 들이고 삼사좌사 이색에게 명하여서
유탁을 국문케 하였다.
이 때에 이색의 지혜만 없었더면 유탁은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이색은 유탁을 국문한 뒤에 서전에 엎드려 복계하였다.
유탁의 말을 듣잡건데 국모 승하하신 뒤에 신자로서 국모를 잃은
애통때문에 순서를 잃고 부지중 궐제를 한 것이옵고 장례의 절차는 신축년
난리에 고례문(古禮文)을 죄 잃어서 빙거할 바를 아지 못하옵고 단지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공주 장의의 절차로 행하였다 하옵니다. 신자의
도리로서 아무리 애통 총망중이기로 궐제를 하였다는 일은 용서치 못할
죄옵지만 국모상을 항한 망극중이오니 관대한 처분이 계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런 말로 면하려고? 내 마음이 굽히지 않으니 헐 수 없소
냉혹한 태도로 왕은 간단히 유탁을 죽일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신돈도 왕의 곁에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맹렬히 노한
것을 처음 보므로 어떻다 말을 끼울 수가 없었다.
서글픈 王情
무서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군신은 잠시 묵묵히 있었다. 그 뒤에
왕이 또 입을 열었다.
유시중의 죄로 말하면 첫째로 오래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불의한
일을 해서 하늘이 가무르니 이것이 죄요, 둘째는 연복사의 밭을
빼앗았으니 이것이 죄요, 공주 승하 후에 삼일 궐제가 그 셋째요, 장례에
영화공주의 예를 좇(쫓)은 것이 넷째--- 이렇듯 불의 불충한 신하니 알아
하오
이색이 또 응하였다.
그러나 전하, 그것은 모두 기왕지사요
그냥 말을 계속하는 것을 왕이 빼앗았다.
여러말 말고 그러면 유시중이 옭고 내가 글르단 말이지?
비교적 낮은 음성이나 장차 폭발할 노염을 감춘 음성이었다. 한 찰라
두 찰라--- 왕의 입이 드디어 폭발하려 할 때에 이색은
뿐만 아니오라 이 일은 영도첨의(신돈)도 아실 일이옵니다---
고 신돈에게 밀어 버렸다.
왕은 신돈의 편으로 눈을 돌렸다. 힐문하는 눈이었다. 신돈은 즉시
받았다.
신도 아옵니다
그럼 첨의의 의견도 역사를 중지하라는 편이요?
이 힐난에 신돈은 푹 머리를 묻었다. 눈물이 그의 늙은 눈에서
떨어졌다.
전하. 성지(聖志)야 거역하리까 마는 민원이 약간 있사옵니다
왕은 잠시 뚫어져라 하고 신돈을 바라보았다. 신돈까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너무도 억울하였다. 그래도 신돈뿐은 공주의 편을 들어
주리라고 믿었더니. 그러면 세상이 모두 공주를 배반하고 나를
배반하는가.
왕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이춘부를 불렀다.
이시중. 이 국새(國璽)를 봉하오
순간 모든 사람의 등골로는 소름이 일제히 돌았다. 모두 푹 엎드린채
숨까지 죽였다. 지적받은 이춘부는 몸을 와들와들 떨뿐 움찍을 못하였다.
왕은 잠간 기다리다가
그것까지도 복종할 신하가 없소?
신돈이 할 수 없이 이색에게 눈짓하였다. 이색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손을 와들와들 떨면서 옥새를 봉하고
신 이색 근봉
이라 썼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덕이 없다고 내 말을 좇지 않으니 마음대로 유덕한 자를 구해서
국새를 맡기오. 왕손은 별 종자며 서민은 별 종잘까. 고약한!
최후의 말을 탁 내어 던지고 획 들어가 버렸다.
왕이 들어간 뒤에도 모두 잠시는 죽은듯이 고요하였다.
이 신하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왕을 찾을 때는 왕은 환관 네명을 데리고
대궐에서 종적이 사라진 때였다.
왕을 잃은 대궐은 물끓듯 하였다. 대궐에서 왕을 찾노라고 야단할
동안은 왕은 환관 네명을 데리고 정비 안씨궁(정비는 어제 친정으로
쫓았다)으로 공주의 진영 하나만 모시고 가서 그 앞에서 너무도 통분하여
통곡을 하고 있었다.
왕의 행방을 알고 재상들이 옥새를 받들고 행궁으로 갔지만 댓돌 위에도
올라서지 못하게 하여 그냥 돌아왔다. 수라반도 못들이게 한다고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돌아갈 뿐이었다.
* * *
대신들은 모두 어쩔줄을 모르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고
있을동안 신돈은 혼자서 넓다란 정청을 지키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딱한 일이 생겼군
그러나 신돈의 마음은 이 재상들은 결코 죽이고 싶지 않았다. 유탁의
용맹과 과단성, 정사도의 곧은 마음, 이색의 슬기로움, 모두 일국의
재상으로 그 자리를 더럽히지 않는 인물들로서 이런 변변치 않은 일과는
차마 목숨을 바꿀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신돈은 자기의 몸을 호화롭게 하기 위하여 좌우에 모든 소인배의 무리와
달라서(다른?) 이 인물들은 국가 동량의 재로 아껴오는 인물들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목숨을 해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을 시켜야겠다.
두런거리는 대궐에 외따로이 홀로 앉아 있던 신돈은 저녁이 거진 되어
왕이 사랑하여 기르는 비들기들이 모두 제 깃으로 들어갈 때쯤 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군에 명하여 이색을 옥에 내리었다.
그날 밤도 꽤 어두어서 신돈은 혼자서 왕이 있는 정비궁으로 갔다.
너무도 당돌히 올라오므로 수직하던 내관들도 혹은 어명으로 오나하고
망서릴 동안 신돈은 어느덧 왕의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첨의 신돈 아뢰옵니다. 삼사좌사 이색을 어명에 거역한 죄로
하옥하왔읍니다. 신돈 마땅히 대죄할 처지에 있사오나 지금 이색의 일을
끝내고는 대명하겠사옵니다
왕은 신돈이 이렇게 아뢰어도 아주 대답없이 신돈을 보았다.
신돈은 거기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의 아까의
행동은 오로지 전하를 위함이지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설명하고 이색이든 유탁이든 모두 추호라도 승하한 공주를 소홀히 함이
아니라 모두 전하와 전하의 백성을 위하여 자기 몸이 죽기를 무릅쓰고
간하였다는 말을 하여 이 본시 어질은 왕으로 하여금 종내 머리를
끄덕이게 하였다.
이튿날 환궁한 왕은 하옥하였던 신하들을 모두 어전에 부르고 술을 주며
내가 너무도 가볍게 노해서 재상들을 욕보게 한 것을 너무 탓하지 말고
이 뒤에도 늘 충성을 다 해주시오
하고 간곡히 말하였다. 일단 친정으로 쫓았던 정비 안씨도 도로 불렀다.
그러나 왕의 마음에는 유탁의 과실 뿐은 장래 영구히 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이번의 사변 때문에 이 뒤에는 다시 영전역사에 대해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으며 왕은 또 왕으로서 역사를 처음같이 쳐몰지 않고
천천히 진행시켰다.
왕의 십팔년 십구년도 주마등과 같이 지나갔다.
왕이 신돈에게 대한 신임은 그 끝이 없는듯 하였다.
왕은 무니노 아기를 보기 위하여 자주 신돈의 집에 미행하였다. 신돈의
집은 이전에 있던 곳이 아니요, 대궐 서문쪽의 빈 터가 있는 것을
신돈에게 주어서 거기 짓게 한 것이다.
아기에게 대한 애정이 나날이 자람을 따라서 반야를 긍휼히 여기는
생각도 차차 들었다. 공주 이외에는 여인을 보지 않으려는 왕이매 다시는
반야를 모시게 하지는 않았지만 쌀을 한달에 삼십석(碩)씩 하사하여 용에
쓰게까지 하였다.
때때로 영전 조영하는데 거둥을 하고 밤에 신돈의 집에 미행하고
굉장하게 문수회(文殊會)를 차리고 공주의 혼전에 제사하고 이런 사사로운
일 이외에는 국정을 온통 신돈에게 일임하고 왕은 일체 간섭지 않았다.
한번 왕의 십팔년 섣달 납일에 공주의 능에 제사치 않았다고(본시부터
유탁을 좋지않게 보던 나마에) 이것도 유탁의 행한 일이라고 유탁을 옥에
가두고 그 집을 적몰 하였다가 재추에서
납제
라고는 없다는 석명을 하여 도로 놓아 준 일이 있었다.
이렇게 전 책임과 전 권세를 한 몸에 지고 나라를 꾸려 나가는 동안
인제는 웬만치 자신도 생기고 눈도 떠지기 때문에 신돈의 정치는 처음의
과도기를 지나서 차차 완숙하여 갔다.
그 때에 아직껏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가 얼마만치 세력이 꺽이고
주원장(朱元璋)이 이룩한 명나라가 커가는 것을 기회로 원나라와의 인연을
투기어 버렸다.
원나라에 맡겼던 제주도 도로 찾았다.
각 연변을 침략하던 왜구도 춤(주춤?)하였다.
정부도 이젠 안돈되어 적재 적소 배치된 정부는 장차 대고려 제국을
건설할 실력을 차차 갖추었다.
중의 아래 들기를 꺼리던(문벌을 자랑하는) 고려의 세족이며 유림들
가운데서도 좀 현명한 사람들은 신돈의 아래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십구년 사월에는 관음전(觀音殿)을 임시 쓰게 하고
그 육월에는 다시 왕께 간해서 옛날 짓다가 내버린 왕륜사의 영전을 다시
수리하고 마음의 대규모 영전은 중지하도록 하였다.
십구년 섣달--- 신돈이 집정한지 만 사개년 뒤 어떤날 왕이 입시한
사관(史官) 두명에게
민간의 이병은 다 네 득실이니 감춤없이 아뢰라
고 할 때에는 사관들은 천하가 배를 두드리며 성대를 축하하옵니다고
아뢸만치 안정이 되었다.
* * *
왕의 이십년도 절반이 지난 육월 어떤 날이었다.
어떤 날 저녁 신돈은 대궐에서 왕과 바둑을 두었다.
무엇을 깊이 생각하고 있음인지 이날은 유난히도 왕은 바둑이 서툴었다.
횡수가 많았다. 한참을 두다가 왕은 한 점을 딱 놓으며 무심히(인듯이)
이렇게 말했다.
다시 영전 역사를 시작할까 보오
안됩니다. 아직 안됩니다
바둑에 정신이 팔린 신돈은 마주 돌을 놓으며 애교없이 응하였다.
그래도 인제는 민심도 좀 안돈되고---
아직 안됩니다. 왕륜사에 영전이 있는데---
그건 너무도 협소해서---
그만 했으면 넉넉하옵지
왕은 머리를 들었다. 허덕이었다.
첨의까지 공주를 멸시---
멸시함이 아니오라 공주전 보다도 백성이 더 중하옵니다
인제는 더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왕은 벌떡 일어섰다. 바둑에
정신이 팔려서 무심히 마음에 있는대로 대답을 하다가 펄떡 정신을 차리고
우러러 보니 왕은 얼굴이 종잇장 같이 희게 되고 입술 몸 사지 할것 없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전하
깜짝 놀라서 신돈이 엎드릴 때에 왕은 홱 돌아 섰다.
괘씸한!
전하
신돈은 왕의 옷깃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왕은 빼치고 침전으로
들어갔다.
침전까지 쫓아 갔으나 왕은 내시에게 엄명하여 신돈을 보지 않았다.
신돈은 밤새도록 집에 돌아와서 근심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밝자
입궐하여 왕께 뵙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허락지 않았다.
노염이 극도에 달한 것이다.
신돈은 할일없이 집에 돌아와서 대죄하는 뜻으로 문을 닫고 근신하였다.
근신하면서도 걱정하였다. 자기 밖에는 왕이 위임하는 사람이 없는지라
지금 자기가 노염을 샀으매 왕의 마음을 풀어드릴 사람이 없었다.
* * *
근신하는 가운데 한 달이 지났다. 육, 칠월 더위에 신돈은 문을 굳이
닫고 죄인으로 자처하고 그의 즐기던 계집도 모두 멀리하고 지냈다.
어떤 날 신돈은 어명으로 드디어 결박을 지고 대궐로 가게 되었다.
신돈에게는 특별히 친국을 하겠다 하여 어전에는 말을 타고 출입하던
홍문을 (이제는?) 결박을 지고 들어갔다.
친국소 앞 뜰에 꿇어앉을 동안, 얼핏 왕을 쳐다 보니 월여에 무척이도
상하였다.
신돈은 가슴이 송구하였다. 그날 밤 바둑에만 정신이 팔리지 않았더면
좀더 다르게 대답할 말도 있었거늘 정신없이 대답을 하기 때문에 이렇듯
여위 왕을 보매 가슴이 찢어지는듯 하였다.
그러나 그 맛 죄로는 너무도 어마어마한 경계였다. 죄한대야 과즉
견책에 지나지 않을 것을.
대역 신돈. 네 죄를 알겠느냐?
벽두에 대사성 임박의 이 호령에 신돈은 깜짝 놀랐다. 대역이란?
황공 하옵니다
신돈은 머리를 흙에 부비었다. 뒤따라 추상같은 호령이 다시 내렸다---
상께서 너를 그만치 무우하사, 네게 과한 직책을 맡기시고 부귀를
주셨거늘 너는 무엇이 부족해서 기현(奇顯) 최사원(崔思遠)따위와 역적을
도모 하였느냐?
--- 신돈은 가슴이 철꺽 내려 앉았다. 한순간 온 천지가 아득하였다.
네 도당은 모두 토사를 했으니 너도 이실직고하고 성은이나 바라거라
어서 아뢰어라의 소리가 천지가 진동하듯 한 가운데 신돈은 너무 억하여
숨이 (딱)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비오듯 하였다.
역시 도모라 한다. 도당은 벌써 토사했다 한다. 그새 다년간
고려정사를 맡아본 신돈은 다 알아 채었다. 자기가 왕과 불화한 이
기회를 타서 누가 참소를 한 것이다. 누구라고 그것을 켈 것도 없다.
자기가 신임을 받거니 이 고려의 권문세가들이 모두 할 수 없이 자기에게
붙어 있었다. 그 신임만 없다치면 모두가 저편이 되고 중(僧) 출신인
자기는 홀로 비어져 나올 것이다.
언관은 자기를 극도로 참소할 것이다. 사관(史官)은 자기를 극도로
곡필을 할 것이다. 재상은 자기를 대역자로 몰 것이다.
어서 아뢰라는 호령과 함께 등으로 빗발치듯 내리는 곤장을 한참 받다가
신돈은 조금 머리를 들었다.
전하께 직소하겠읍니다
무에냐?
대사성이 대신 물었다.
전하, 신은 육년전에 전하께 죽을 죄를 짓삽고 그 때 전하께 바친
목숨이매 언제 거두실지라도 어의에 달렸을 뿐, 그 새의 연명을 사례할
따름이올시다. 오늘 친국의 취지만은 신이 도무지 모르는 바로소이다
네 도당이---
임박이 대신 호령하는 것을 신돈이 받았다.
전하도 총찰하시는바, 신의 지위가 인신의 극이오매 무엇이 부족하와
불퀘를 도모하옵고 신이 이미 연로하옵고 신에게 후사가 없으매, 누구를
위하여 외람되이 보위를 엿보리까. 이---
그것으로 미루어 볼지라도, 너는 자초지종으로 사언(詐言)이 아니냐.
네게는 자식이 있다는---
아니옵니다. 신---
있다---
아니옵니다. 신 본시 유병하와 자식을 못보옵니다. 무엄한
말씀이오나 신이 칠, 팔년간에 사(私)한 계집의 수효도 적지 않거늘 한
계집도 유신하여 보지 못하고 오직 한 계집이 작년에 사내애를
낳았삽는데, 그것은 그 계집의 본남편의 자식인것은 그 계집도 알고 신도
잘아오나 신이 노래(老來?)에 너무 적적하와 그냥 신이 아들이라 불러둔
것이 있사옵지만 그 밖에 후사가 없사옵니다. 남의 자식을 위하여 성은을
배반하올 신이 아니옵니다. 통촉합소서
네 일찍 내게 한 말이 있지 않느냐. 젊은 계집을 많이 가까이 함은
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기를 기르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사했단 말이
또 웬말인고. 그것도 사언이 아니랄까
신돈은 왕의 특별한 관후한 처분으로 수원에 유배(流配)되었다. 소위
도당들은 모두 죽었다.
유배되는 길에 신돈은 이번의 참소자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선부의랑
이인(李靭)이었다. 몇해전에 자기에게 아내를 보내서 벼슬 높여 주기를
청하였거늘 신돈은 이것을 괘씸히 보고 계집만 빼앗고 청은 안들어
주었더니, 그 결과가 오늘의 이것이었다.
배소로 떠날 때 신돈은 기회를 타서 재상 이인임에게 왕께 아기마마의
뒤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신돈은 수원 배소에서 목 자르고, 그 목을 갖다가 서울에
걸어서 구경을 시켰다.
신돈이 죽은 뒤에 왕은 신돈의 집에서 기르던 무니노를 대궐로 불러서
태후께 알현시켰다.
동시에 신돈 죽은 인제는 다시 간할 사람이 없는 영전 역사를
시작하였다.
왕자 무니노의 생모 반야는 신돈의 집이 적몰될 때에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 * *
신돈 죽은지 한 달 두 달간은 왕은 무심히 지났다. 그러나 석달---
날이 갈수록 통절한 고적감을 느꼈다.
정부에서는 그 새 신돈이 세웠던 시설을 모두 없이할 동안 왕의
마음에는 신돈을 그리는 생각이 나날이 간절하여 갔다. 어떤 때는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이나 거진 같으리만치 애타도록 그리운 때도 있었다.
마음의 괴로움을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알아줄 사람도 없었다.
그 새 다 들어서 신돈에게 맡겼던 정사는 신돈이 죽기 때문에 다시
왕에게로 돌아왔다.
그 번거러움.
정 애탈 때에는 신돈을 부르면 그래도 신돈에게서는 좀 시원한 말이라도
있었거늘, 이 막히고 빽빽하고 답답한 재상들과 대하려면 정 진저리가
났다. 사사에 공맹을 들고 나오고 송당을 들고 나오고 선왕을 들고
나오고---
이런 가운데서 왕의 성격은 괴벽하여 갔다. 신돈이 죽은지 일년 뒤---
마음영전의 종루(鐘樓)가 낙성 되었다가 헐리우고(높이가 얕다고) 영전의
취두(鷲頭, 금 육백오십량, 은 백량을 들인)가 된 때 쯤은 왕은 온전히
다른 사람 같이 되었다. 대수롭잖은 일에 성을 내고 내면 포악성을 띄는
것쯤은 그래도 인간미가 있는 편이요, 때때로는 이틀 사흘을 말 한 마디도
없이 음침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는 생각나면 엉뚱한 일을 시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하였다.
이십일년 시월에 왕은 자제위(子弟衛)라는 것을 두기로 하였다. 그것은
김흥경(金興慶)으로서 두목을 삼은 미소년들의 무리였다.
홍윤(洪倫), 한안(韓安), 권진(權晋), 홍관(洪寬), 노선(盧瑄)등이 왕의
사랑을 받는 소년들이었다.
그러는 한편 계집들에게 대한 잔학본능이 강하여져서 계집--- 그
가운데서도 젊고 예쁜 계집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는 것을 통쾌히
여기었다. 대궐에서는 계집들은 차차 이 괴벽한 왕을 무서워하고
꺼리었다. 어떤날 왕은 홍윤을 익비 한씨의 방에 몰아넣은 일까지
있었다. 한씨는 반항을 하였지만 왕까지 칼을 뽑아들고 종내는 꺽고야
말았다. 그것을 엿보며 기뻐하는 왕.
* * *
왕의 마음은 나날이 어지러워 갔다.
일찌기 어떤 날 청년 때에 개가 몹시 짖는 것을 보고 저개가 아마 배가
아픈 모양이라고 약방에 명하여 약을 주게한 일이 있느니만치 착하고
인자하던 본성은 어디로 없어졌는지 지금은 그냥 음침한 가운데서 날을
보내고 날을 맞고--- 무슨 잔혹한 일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약간 음산한
웃음을 얼굴에 띄어 보이느니 만치 왕은 격변 하였다.
어떤 때 심히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당신의 목이라도 잘라 보고 싶은
기괴한 충동 조차 일어났다. 왕의 앞에서 술상이 떠나 본적이 없다.
술이 매우 취하여서 가까스로 잠이 들면 그래도 좀 나았지만 깨어 있기만
하면 가슴이 설레거리고 강박관념에 눌리워서 잠시도 마음이 펴지는
순간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서 연달아 생각나는 것은, 하나는, 과거 십육년간을
동고동락한 대장공주의 추억이요 또 하나는 과거 육년간을 당신과 나라를
위하여 애를 쓰다가 도리어 당신께 죽인바 된 신돈 생각이었다.
공주만 살아 있어도 오늘날 이런 미칠듯한 고경(곤경)에는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주 잃은 뒤에라도 신돈이라도 그냥 살았더면 어떻게든
당신을 위로하여서 이렇듯 괴로운 경지에까지 빠지게는 안할 것이다.
나날이 체력이 쇠약하여 감을 느끼고, 나날이 늙어
감(마흔네살이었다)을 느끼고, 나날이 마음이 더 어지러워 가는 것을
느낀다. 인제 더 산대야 얼마를 더 살지 못할 것이이요, 오래 산다
하여도 그것은 괴로운 시간을 더 오래 누리는데 지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날 왕은 태후궁에 태후께 뵈러 갔다.
인사가 몇마디 왕래된 뒤에, 왕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신의 수도 인전 다 하고 얼마를 더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태후전마마. 무니노를 당부하옵니다. 아무 철 모르는 어린애옵니다만
전하는 그게 무슨 말씀이요?
신의 망령이 아니옵니다. 지금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한을 천추에
남길듯 하옵니다. 이 사직도 부탁 하려니와 공주영전의 역사를 뉘 맡아서
계승하리까!
태후는 이 아드님의 초췌한 양을 민망한듯이 한참을 보았다.
영전의 굉장 화려한 것이 천하에 무비라고 원성이 많은 위에 전하는 또
농번기에도 비만 오면 영전역사에 방해된다고 기청제(祈晴祭)를 드리고
하니 임금된 도리에 어그러진 일로 아오.
또 이 즈음 들으니 김흥경등 소년들을 일야 대궐에 머물러 둔다 하니
이것도 또한 인자의 효도를 막는 것으로 임금의 취하지 않을 일이요.
전하, 늘 밤이 깊도록 깨 계시다니 밤이 늦으면 아침도 늦는 법이라,
정사에 게을게 될 터이니 역시 임금의 피할 일인데 좀 삼가시오
왕은 침울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모후의 말이 끝나자 일어서려 하였다.
태후는 왕의 옷깃을 붙들었다.
전하. 내 말에 대답을 하고 나가시오
예
명료치 않은 대답을 하고 몸을 돌이키려는 왕을 태후는 그냥 안놓아
주었다.
들으시오? 안들으시오?
명대로 시행하겠읍니다
또 비빈(妃嬪)들은 왜 보지 않우?
왕은 머리를 끄덕 하였다.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공주만한 자 없읍니다
주루루 눈물이 흘렀다.
이 마흔네살이 난 아드님의 눈물을 보고 태후는 그만 우셨다---
사람은 한번 죽는것--- 전하도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왕은 눈을 멍하니 뜨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 * *
음산한 왕과 난륜의 궁실과 어지어운 정국--- 이런 가운데서 그 해도 또
넘어갔다.
정치의 중심이던 신돈이 없어지고 왕 또한 정치를 돌보지 않으므로
재상들이 제각기 당파를 짜가지고 제멋대로 놀아나는 고려의 정국은 다시
수습하기 어렵도록 어지러워 갔다.
이런 어지러운 가운데서 이십사년 봄도 가고 여름도 또한 가고 가을이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음산한 가을 팔월 어떤 날, 왕은 꺼질듯한 음침한
기분으로 환관 최만생의 부액을 받고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후원의 어느 곳이라 이전 한때 공주와 손을 마주 잡고 안다녀 본 곳이
있을까. 봄에는 꽃을 따라, 여름에는 녹음을 찾아, 가을에는 낙엽을
주으러, 겨울에는 눈을 보러, 늘 함께 다니던 공주의 생각 때문에 왕의 푹
숙이고 있는 얼굴에서는 연하여 눈물이 흘렀다.
한참을 이렇게 거닐다가 문득 변의(便意)가 생긴 왕은 만생을 데리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매화틀(便器)에 앉아서 왕이 침울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을 때에
곁에 부축하던 환관 최만생이 허리를 굽혀서 제 입을 왕의 귀에 가져다
대이고 소근거렸다.
상감마마, 익비께서 유신(有身, 胎中) 합신듯이 들었읍니다
무얼? 익비가?
예. 벌써 다섯달인가고 들었읍니다
왕은 한순간 기괴한 표정을 하였다. 그 뒤에 물었다.
누구라더냐? 사내는? 들었느냐?
비의 말씀이 홍윤이라 하옵니다
홍윤?
왕은 잠시 침울한 얼굴을 계속하였다.
응. 공주 생전에 늘 원자(元子)없는 것을 근심하더니 인전 됐다
왕은 일을 끝내고 일어났다.
홍윤의 입을 막아야 소문이 안나지. 내일 창릉에 알할 때 독주를
먹일까?
그러고는 획하니 얼굴을 최만생에게로 향하였다.
너도 내막을 알았으니 살지 못할줄 알아라
만생은 왕의 너무도 침울한 얼굴에 몸서리쳤다.
여전히 그 날 저녁 왕은 술을 몹시 먹고 대취해서 자리에 들면서는 정신
모르고 잠이 들었다.
그 밤도 어지간히 깊은 때에 왕의 침전을 향하여 발소리를 감추어
가지고 가까이 오는 몇명의 괴한이 있었다. 최만생, 홍윤, 권진, 한안,
노신 등이었다. 밝는 날 왕께 죄 받기 전에 왕을 시하여 자기네의 생명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대취하여 업어갈지라도 모를만치 된 왕의 이불을 벗어던진 가슴에는
흉한들의 칼이 내려박였다.
도둑이야!
역도야!
좀 뒤에 침전에서 울리는 이 아우성. 이것은 역도들이 일을 끝내고
스스로 피하려고 지른 함성이었다.
그러나 위사(衛士) 한명도 이 소란한 침전으로 달려 오는 자가 없었다.
침전에서 고함 지르는 소리에 내전 궁인들도 모두 깨어 일어났지만
무서워서 나오지 못하고 내전에서 야단들만 하고 있었다.
이런 소란한 대궐에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이 왕의 모후되는
명턱태후였다.
모후가 달려왔을 때는 흉도들은 가장 아닌체 하고 왕의 앞에서 통곡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태후궁에서 단숨에 여기까지 달려온 태후는 숨이 딱딱 막혔다. 태후는
침전에 뛰어 들면서,
아이고 이게 웬 일이요. 전하! 전하!
피가 펑 고인 방에 주저 앉아 아드님의 머리를 흔들며 울었다.
전하. 전하. 내가 왔소. 전하! 너희들은 빨리 가서 대신들은 지급
입내 하래라
태후의 명으로(아닌체 하고 있던) 흉도들이 물러간 뒤에 침전에는 태후
혼자서 아드님의 육체를 흔들며 통곡 하였다.
전하! 전하! 정신을 차리오? 전하!
문득 왕의 입술이 조금 떨렸다. 눈이 힘 없이나마 조금 움직이는듯
하였다.
태후는 얼굴을 아드님의 눈 마주 갖다 대었다.
전하. 내요, 내야
무, 무, 무
무어요? 물요?
무, 우, 니, 노
무니노 말씀이요?
왕은 그렇다는 뜻으로 눈을 감았다.
태후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져 나갔다. 왕의 최후의 소원---
무니노를 보고 싶다는 그 소원을 들어주자니 태후궁까지 갈 사람이
없었다. 임종의 아드님을 두고 태후는 떠날 수가 없었다.
< 끝 >
1996년 5월 31일 15시!
<제 16 화>
愛情悲譚(애정비담)
斬首된 별아기
신라 제 이십육대 진평왕(眞平王)이, 새로 쌓은 남산성(南山城).
성문은 굳게 닫히우고, 성벽도 높으니 불의의 외적에 의한 야중 피습의
염려는 거의 없었으나, 그 거의 라는 것이, 전연 과 달라 번도는 군사의
수고로움만은 애끼지 않았다.
반달 빛이 푸른 으스름 밤이었다.
성곽이 그림 같은데, 그 속에 움직이는 두 그림자가, 동쪽 담밑에서
나타났다.
여보게, 대야성(大耶城)에, 있을 때보다 외로워 못견디겠네
새로 축성(築城)한 곳이고 성주(城主)도 어리니 그런 마음이 드는거지
그들은 번(을)도는 두 군사였다. 얼마전까지, 대야성에 있다가, 신축된
남산성으로 떨어져 온 오백 군졸중에 끼워진 사람들이다.
인젠, 변경(邊境)살이 좀 그만 시켰으면 좋겠어--- 계집, 자식, 떨어져
세해가 됐네 그래---
허--- 이사람, 세터로 온지 반년도 못 되어 어느덧 실증이 나면
어쩌나, 변경살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저 꾹--- 참아야지
그런데 여보게, 우리 성주는 변경살이가 좋은가부지?
아-니, 우리처럼 말단 졸개들도 지긋지긋한데, 성주가 귀양살이나 진배
없는걸 좋아 할리가 있나, 서울에 있어도 떳떳한 자리 하나는 차지
할걸---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 말일세, 지금 성주는
스스로 병부령(兵部令)께 품해서 떨어져 나왔다네
어---, 별일도 다 있군, 그거 왜 그럴까?
하여튼, 이상한 일이야, 내막은 전연 모르겠지만, 북으로는 고구려가
가깝고 서에는 백제의 땅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곳을 자원하다니, --- 언제
백제군의 말 발굽소리가 들릴지 모르는 곳을. 더구나 어린 나이로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한 점도 한 두가지 생각나네 그려, 어떤
때는 성문위에 올라 서서, 퍼렇게 떠 오른 백제의 산봉우리를,
언제까지나 건너다 보고 계시던 것이라든지, 남산성에 오신 뒤 단 한번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든지
두 군사는 창을 어깨에 멘채 사방을 살필 염도 내지 않고, 알 수없는
성주의 비밀을 지껄이며 걸었다.
그들의 대화가 잠간 그쳤을 때다.
오른 편으로 걷고 있던 군사가 별안간 멈춰서며, 옆에 있는 군사의
소매를 웅켜(움켜?) 쥐었다.
저기 저기---
나직한 소리였다.
그러나 오른 편 군사가 가리킨 것을 왼편 군사는 벌써 보았다.
성주의 처소 앞에 어렴푸시(어렴풋이?) 떠 오른 흰 그림자. 그것은 좀
움직이는듯도 하고, 돌 부처처럼 서 있는 것도 같았다.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러면 성주를 해하려는 자객일까!
두 군사는 창을 바로 잡았다. 그리곤 상당히 떨어져 발소리를 죽이어
다가갔다.
누구요!
오른 편에 서 있던 군사가, 어둠을 타고 오다 푸른 달빛 속으로
내달으며 쏘았다. 동시에 왼편에 걷던 군사도 맞은 편으로 내달았다. 두
군사의 창이 달빛을 받아 개똥불처럼 푸르게 번쩍이었다.
성주 가선랑(加仙郞)
두 군사는 주춤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분(그사람)이 바로 좀 전까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나이어린 성주임을 알았다.
황송합니다
밤중에 수고들 하네, 괜히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군사들은 다시 성벽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성주 가선랑.
그는 미남자였다. 지금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김유신, 관창,
사다함, 검군똥이(?), 모두 국선도(國仙道) 출신의 미남 무사이 듯이,
그도 화랑도를 거쳐 나온 미남 무사였다.
올해 나이 스물 하나.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귀양살이나 다름 없는, 변경 성주를 자원했으며,
남들이 잠든 밤에도, 이처럼 잠 못이루고 처소 밖을 거닐고 있을까?
또, 때로는 진흥왕이래 실환하여 서로 침공의 기회만 노려보는 적국
백제를 다정한 눈매로 건너다 보고, 한없이 넋을 뺏기기도 할까?
* * *
진평왕(眞平王)은, 신라를 흥륭케한 원동력이 된 진흥대왕의 손자
되시는 분이다. 왕께서는 제위 오십사년간, 문물 제도를 고치고 또,
불법을 숭상하여 멀리 황해 건너까지 구법승을 보내시기도 하였지만, 그런
무엇보다도 변경 수비의 업적이 컸다. 거반 퇴폐하여 가는 여러 성을
개축했고, 이름있는 장군을 뽑아서 변경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왕께서는 이런 소극적인 정책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나아가,
이웃나라를 넘겨다 보시기까지 하였다.
고구려는 워낙 크나큰 나라래서, 지금의 국력으로 어찌할 수없는 것을
잘 아셨지만 백제는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맨먼저 착수하신 계략이 염탐군(꾼?) 파견이었던 것이다. 장래
백제를 무찌를 때, 각각 군사 이천이상을 거느릴만한 인재를 열명 선발할
것을 병부령에 이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백제 전역을 십등분하여 한
구역에 한명씩 보내되, 도랑하나 언덕 하나까지, 샅샅이 탐사할 것을 분부
하셨다.
그때, 뽑힌 열명이 한결같이 낭도들 뿐이었다. 무사도(武士道)를 익히
닦고, 세속 오계(世俗五戒)를 범할줄 모르는 씩씩한 낭도들이라면, 능히
중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을 상하가 모두 믿었다.
낭도 가선랑도 이 열명틈에 끼일 영광을 부여 받았다. 그것이 두해전
그러니까 가선랑의 나이 열 아홉 때다.
고구려와 흡사한 백제의 의복으로 변장한 염탄군 열명은 국경에서부터
각기 맡은 구역을 향하여 헤어졌다.
가선랑! 염탐이나 잘 하게, 괜히 백제 계집한테 혹하지 말구
남 걱정 말고, 자기나 튼튼히 하라구
그들이 헤여지는(헤어지는?) 자리에서 춘욱랑(春郁郞)과 가선랑은
이렇게 농치며, 잠시간의 이별이나마 퍽으로 애석해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갖 농담이 아니었음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았다.
* * *
가선랑에게 맡겨진 구역은 지금의 경기도 일대였다. 고국을 떠나 어언
한삭반, 옥같이 하얀 발이 부르트고, 터져 망칙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것이 지금도 고달프질 않았다. 아니, 그의 젊은 피는 굳굳한
가슴속에서 들끓기까지 하였다. 얼마 후에 신라의 준비가 갖추어지기만
하면, 자기 스스로 질풍같은 군사를 이끌고 이땅을 휘몰아칠 것을
그려보니 꿈 많은 가슴이 잔잔할 리 없었다.
그때의 그 통쾌 무비할 감격!
그는 마상에 높이 앉아, 번개처럼 내달린다. 그의 칼날이 번득이는
곳에 백제군은 초개같이 쓰러지고, 그는 이지방에 웅거한다. 그렇게되면
그동안 자기를 거처시켜준 사람들은 얼마나 놀랄까?
그의 상상은 이국의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퍼져
올라 가는 것이었다.
여보, 젊으신네
가선랑은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비로소 제 정신을 돌이켰다.
뒤에는 오십이 조이(적히?) 되었을듯한 노인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벌써 해가 떨어졌는데, 무슨 연유로 인가가 아득한 고개 밑에서
쉬시오?
그는 그제서야, 동네를 빠져 아득히 걸어 왔으며 그 쉬고 있는 곳이
운봉재 밑턱의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임을 깨달았다. 걷던 발이 쓰라려
잠간 쉬려던 것이 이토록 늦은 것이었다.
길 떠난지 오래되어 발은 부르트고, 몸은 피곤하여 잠간 쉰다는 것이
그만!
그럼 젊으신네는 고개를 넘어 가오?
글쎄요, 아무곳이나 인가 있는데로 가야 합지요
허- 마침 잘 되었군, 우리집이 바로 고개 넘어요, 나는 꼭 이밤으로
집에 들어 가야만 할일이 있는데 어두운 고개를 혼자 넘을 생각을 하고 퍽
근심을 했더니 이렇게 만나 다행이군. 동행하자구!
가선랑은 쓰라린 발을 꾹 참고 노인을 따라 일어 서면서 오늘 밤은 이
노인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고개를 잡아 들어 몇걸음 올라 갔을 때는 어둠의 장막이 온
누리를 덮어 버렸다. 운봉재는 승강로가 십리는 훨씬 넘는 커다란
고개였다.
사방은 온갖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연달아 드어차고 고갯길은
논두렁처럼 좁았다. 어둠은 각 일각 짙어오고, 어둠이 짙어 올 때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무시무시해졌다.
가선랑의 담대한 마음도, 금방 숲속에서 호랑이라도 뛰어 나올듯하여
움찔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노인이 무서워지기도 하였다. 엄연히 밤중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동행하여 고개를 넘자던 노인이 이상해졌다. 그는
애써 자기의 약하게 되는 마음을 가누려 했다.
(너는 화랑이 아니냐 !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낭도! 이제 백제의
커다란 강토를 휘감으려는 장부가 요까짓 고개길에 가슴을 조이다니 ! )
제가 저를 격려하고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침착해지는 듯도 하였다.
그들이 고개 마루턱에 올라섰을 때 활대같은 반달이 하늘에 떴다.
그때까지는 무사하였음에 안도의 긴숨을 내뿜고 막 내리막을 잡아 들었을
때다. 갑자기 노인은 해지며 가선랑의 오른 팔에 매달렸다.
가선랑도 처음에는 눈이 아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랑의
아랫배에서는 하늘이라도 뚫을듯한 용기가 무럭 무럭 피어 올랐다. 그는
벌써 수백만의 적군을 앞에 놓은 용감한 무장이었다. 우선 침착하게
노인의 손아귀를 풀고 허리속에 감춘 칼 주머니에서 번쩍이는 칼을
빼었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한 이십보 앞에 도사리고 앉은채, 눈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는 호랑이 한마리를 봤던 것이다.
그의 단도는 공중에서 두어번 그네를 타더니 달빛을 가르고 유성처럼
흘렀다. 가선랑의 재주는 무서웠다. 칼은 호랑이의 콧등 한복판에 꽂혀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단도 하나가 거대한 동물을 즉사시키기에는
너무도 약하였다. 운봉재가 흔들릴듯한 비명이 무섭더니 호랑이는 몸을
솟구치려 했다. 단지 솟구치려 했을 뿐이다. 어느덧 두번째 칼이
정수리에 백여 주춤 물러 앉고 말았다.
두군데나 급소를 얻어 맞은 호랑이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선랑이 세번째 칼을 빼들고 겨우 한숨을 돌릴 때--- 그것은 정말
번개와 같았다. 찬 바람이 휙--- 일더니 호랑이는 마지막 정력을 다하여
그에게 덥쳤던 것이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가선랑은 밑에 깔리고
말았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앞 발톱은 그의 옷을 찢고 어깨에서 배까지 깊숙한
상처를 파고야 말았다. 만일 이때 호랑이에게 손톱끝만한 힘이라도
남았었다면 가선랑은 영원히 못 일어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호랑이는 마지막 발악을 남겨두고 그대로 굴러 떨어져 뻗었다.
가선랑은 온몸에 피칠을 한채 노인에게 부축되어 삼경이 넘어서야
노인집에 이르러 아픔과 긴장 끝에 마친 피로로 인하여 잠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상처가 쓰라려 오고 갈증이 생겨 어렴푸시 의식을 회복한 그는 누가
자기의 상처에 가루를 뿌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가선랑은 실날같이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그는 천근같은 고개를 부루 잡으려 했다. 바로 자기 옆에
앉은 낭자(娘子).
몽롱한 시야 속에도 꽃송이 같이 예쁜 낭자의 자태가 비쳤던 것이다.
움직이시면 안 되어요!
가선랑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자 낭자는 급히 말했다.
지금 막 칡 가루를 뿌렸으니 괴로우시지만 한참만 그대로 계셔요
낙랑한 음성. 속이 후련히 터질듯이 시원한 성대였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히 노인 집일텐데, 노인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처녀만이--- )
가선랑은 아직까지 젊은 낭자를 가까이 해 본일이 없었다. 낭도들을
일명 풍류도(風流道)라 부르고 무술을 익히는 반면 자연에 조화할 수
있도록 정서적인 심정도 만들어 줌이 도의 방침이었지만 여자만은 가까이
못하도록 했다.
샛별같은 처녀의 향기는 그를 어지럽게 했다.
노장은 안계시오?
아버님 말씀이어요?
그분이 아버님이 되시던가?
예
가선랑은 낭자한테서 그 노인이, 호랑이를 지고 오도록 동네 젊은이에게
이르시고, 새벽을 타서 도루 고개너머로 가셨다는 것을 들었다.
아침 햇살이 눈 부시게 문풍지를 물들였다.
무슨 바쁜 일이기에 새벽에 도루 가셔야 되오?
오늘까지 군덕솔(德率-군을 다스리는 관리) 사품(四品)께 헌신해야,
한다 하여요. 무슨 관직을 얻으실듯 하다고 하시며, 그 기쁜 소식을
이몸에게 이르시러 밤길을 타 오시다 그런 변을 당할뻔 하셨다고 해요.
이 젊은이 아니면 목숨을 잃을번(뻔?) 하였다고 정성껏 보살피라고 이르고
가셨어요
가선랑은 그 낭자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상처가
자꾸 쑤셔 왔다.
* * *
낭자의 이름은 별애기라고 했다.
가선랑의 상처는 두 부녀의 정성어린 간호에 나날이 괘차하여 갔다.
상처가 아물어 가면 갈수록 가선랑과 병애기 사이의 요화같은 사랑은
점점 짙어갔다.
생전 처음 대하는 따뜻한 여자의 정성과 아리따운 용모는 가선랑의 젊은
피를 끓일대로 끓여 놓았고, 별애기의 수줍은 마음속엔 어엿하고 용감하고
잘 생긴 가선랑의 영상이 시각마다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별애기!
예?
아버지가 혹시 그말을 입 밖에 내시지나 않을까?
아이, 서방님도 별 생각을 다 하시네요. 이몸의 아버지도 서방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몰라 가슴 조리고 계시온데 서방님의 몸에
해가 미치도록 하실라구요. 어서 몸이 쾌차하셔서 하루속히 신라로
가셔야---
별애기의 말끝은 흐려갔다. 가선랑이, 자기를 떨어져 신라로 간다는
생각만 하여도 간장이 녹아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낭도들은 신라에서도 으뜸되는 분들 뿐이라는데, ---그리고 신라에는
선녀같은 여자가 많고 그들은 한결같이 낭도들만 사모한다는데---)
이런 생각이 잠시도 별애기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신라여자에 대한 질투가 횃불같이 일어났다.
별애기, 내가 어서 신라로 돌아가야 별애기 속이 편하겠소?
아유 어쩌면 그런 말씀을 하셔요, 이곳에 오래 머물러 계실수록 이몸은
기뻐요. 언제까지든지 언제까지든지, 계시오면 이몸은 더 바랄것이
없어요. 그러나 서방님은 가셔야할 몸, 한개의 계집때문에 나라 일을
그르칠 수도 없는 귀하신 몸, 단지 어서 속히 가셔서 이땅에 서방님의
우렁찬 호령소리가 들릴 때만 기다리겠어요
별애긴 나라도 생각지 않고---
서방님, 계집에겐 나라 보다 지아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셔요?
나라걱정은 사내들이 할일이요, 계집은 지아비만 성심 성의 섬기면 될줄
알아요
별애기는 자기가 백제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나라는 백제면 어떻고 신라면 어떠리. 자기에겐 가선랑의 믿음직스러운
품만이 안식처가 아니냐!
그럼 별애기도 이번에 나따라 신라로 갈까?
서방님 그런 말씀이 어떻게 나옵니까? 나도 그런 마음을 서방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부터 몇백번 먹어 왔어요. 그러나 안될 일.
만일 이몸이 서방님을 따라 신라로 가 보아요, 문무백관이 모-두 서방님을
비웃으실 뿐 아니라 이몸으로 인하여 어떤 화가 미칠지도 모를 일이
아니어요? 단지 한가지 길은 좀 전의 말처럼 어서 이땅에 신라군의
승전고가 울릴 때만 기다리는 것 뿐이에요
어째 별애기로서도 가선랑을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랴! 그러나
그가 자기가 딴 나라 무사를 따라 감으로써 생길 일을 등불보듯 환히 알
수 있었다.
별애기, 내 이런말 한다고 너무 섭섭해 마오
?
별애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초조하게 쳐다 본다.
신라를 떠나 벌써 석달.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한도 이달 그믐으로
마지막이요. 별애기를 생각하면 단 한발도 이곳을 떠나긴 싫지만---
별애기 말처럼 사내에겐 나라가 중한것!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날까 하오
별애기는 이어코 오고야 말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마음은 잔
물결처럼 가라 앉는것이었다.
가셔야 하지요. 아직 기한을 넘기지 않으셨다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름다운 신라여인네에게 묻혀서 이몸을 잊으시기나
하면---
별애기는 그 다음을 어떻게 말하여야 할지를 몰랐다.
(이몸을 잊으시면 난 죽고 말테야요)
할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 요사스러운 말이라고 느껴져 꿀꺽 삼키고
말았다.
별애기, 별애긴 아직도 내 마음을 몰라, 저 하늘에서 별빛이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면 모르거니와 그전에 내 별애길 잊을듯 싶소? 이제
신라로 가거던 상부에 소청해서 별애기가 살고 있는 이땅이 보이는 곳에
성을 하나 신축하고 그곳 성주로 도임해 나오겠소. 그리곤 매일처럼
백제를 건너다 보며, 별애기의 안부를 묻겠소. 밤이면 하늘에 뜬 별을
헤며 별애기를 지긋이 이품에 안아 보겠소. 그리다가 상감마마의 명령이
떨어지는날 바람처럼 이땅에 쳐 들어 오겠소.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오
우정 귀하신 자리를 내놓고 국경으로 오신다는 말씀. 정말이에요?---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서방님이 이몸을 잊으실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믿을 테야요
화랑은 약속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것. 내 말에 거짓이 있다면
천지신명께 죄 받을 것이요
서방님!
별애기는 가선랑의 품에 쓰러졌다.
아아! 뼈에 저리도록 고마우신 이 말씀! 가선랑이 그토록이나 자기를
사랑해 주고 계셨던가! 그는 가선랑이 이땅에 쳐 들어오는 날이 백년
뒤라도, 그리고 자기가 홀 몸므로, 흰머리를 뒤집어 쓰는 한이 있어도
가선랑을 위해서 이 집터에 기다리고 있을 것을 굳게 다짐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두사람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이다지 영글게
익어 버렸던 것이다.
* * *
염탐군(꾼) 열명이 모두 무사히 귀국했다.
진평왕은 만조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일일히 그들을 위무하시고서
정세를 하문하시었다.
사비성 일대를 맡았던 춘욱랑은 백제에서도 굉장한 군비를 갖추고
있더라고 정세의 녹녹치 않음을 아뢰었다.
가선랑은 이 기회에 자기의 결심한 바를 아뢰고저 어전에 부복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고?
상감마마 우리나라의 수비의 허술함을 보았읍니다. 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음을 보았읍니다
가선랑은 남산성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것은 왕명으로
하달되었다.
물론 가선랑은 남들이 달갑게 생각지 않는 성주 자리를 자원했고
병부령은 그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즉석에서 허락되었다.
가선랑은 그날부터 석공, 목공, 잡역부를 격려하면서 축성에 착수했고,
그것이 준공되던 날은 상감마마이하 집사성시중(執事省侍中)등 백관이
모-두 먼길을 행차하셨다.
가선랑은 이런 중에도, 별애기를 끊임없이 그리었다.
신변에 무슨 일이나 없을까? 그 동네로부터 자기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지지나 않을까?
성이 준공되는 날은 성문위에 올라서서 온 천지가 깜짝 놀랠듯이 외치고
싶었다.
별애기. 나는 지금 훌륭히 그대와의 언약을 실행 했소 ---라고.
성에 틀어 백이던 날부터 그는 단 십리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처럼 성문위에 올라 서서는 백제 땅을 건너다 보며 자기 생각을 하고
있을 별애기를 그리워 했다.
별애기---
정말 별애기의 골수에 사모치는 간호가 없었다한들 자기가 그렇게 속히
완쾌되지는 않았으리라.
엄연히 적국의 염탐군인줄을 알면서도 사랑을 송두리채 바쳐주던
별애기.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아버지의 은인이라는 것하고 간호를 전담해
줬다는 이유로써만 싹튼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더욱 거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끓는 피의 혼류였다.
* * *
별애기는 가선랑이 떠나가던 날, 종일을 울음으로 흘렸다. 아직도 집안
구석구석마다 남아 있는 가선랑의 향기!
별애기는 그 향기를 맡으며 한없이 가선랑의 이름을 외웠다. 그는
어쩐지 이번의 헤어짐이 영원의 헤어짐인 것만 같았다. 다시는 가선랑의
얼굴도 못 보고 말소리도 못들을 것만 같았다.
왜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들까?
그러나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었다.
별애기는 매일처럼 동녘하늘만 우러러 보며 안타까웠던 두 해를 억지로
넘겼다.
그때 그에게 무서운 운명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백제 무왕(武王)이 운봉산에 사냥 나오셨다가 그의 아리따운 자태를 본
것이다.
아름다운 꽃은 누구의 눈에나 아름다운 법이다. 이천을 넘는 궁녀를
발밑에 둔 무왕도 일개 촌처녀의 선녀같은 자태에는 가슴이 설레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오! 아리따운 여인인지고---
무왕은 자기의 신하 한사람에게 환궁하실 때 같이 입궐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고야 말았다. 덧붙여 천한 궁녀처럼 허술히 대하지 말고
왕비의 예로 받들라고 이르시었다. 신하들이 혹시 어떻게 할까 함이다.
이 기쁜 소식은(?) 그 즉시 별애기 부녀에게 전해졌다. 이 소문을 들은
동네처녀와 처녀를 가진 부모들은 부러워 마지 않았다. 그집안의 영귀는
무엇보다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애기 부녀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가선랑과 딸의 사이를 잘 이해했고, 그로 인하여 그냥
딸을 늙어 죽이는 한이 있다 하드래도, 자기 생전에는 결코 출가시키지
않으려 마음 먹었던 ㅌ였다.
허지만 왕명임에랴!
별애기는 연약한 여자의 마음을 조일대로 조였다.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어가를 따라 입궐할 마음속은 터럭끝만치도
없었다.
무서운 악마처럼 환궁의 날은 가까워온다.
(차라리 죽어 버릴까?) 이런 모진 마음을 몇번이나 먹어 봤다.
그렇지만 죽으면 안된다. 만일 자기가 없어진 후 가선랑이 이 땅에 쳐
들어오면 그 얼마나 애통해 하랴! 그는 전설로 들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생각했다. 어떠한 일이 있드래도 가선랑에게 호동왕자가 맛
본 슬픔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연약한
계집의 몸으로 너무나 벅찬 난관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별애기가 고민끝에 한가지 길이 있음을 찾았다.
(그렇다. 오늘 밤으로 이곳을 빠져 신라로 가자! 분명히 가선랑은
이곳이 보이는 땅에 성을 지어 놓고, 자기를 생각해 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로 찾아가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 졌다. 그의 아버지도
자기에게 돌아 올 화는 생각지 않고 딸의 갸륵한 심정을 어루 만졌다.
별애기는 그 밤으로 여로의 근심을 없애기 위하여 남장을 하고 국경을
향하여 낯선 밤길을 더듬었다. 그는 가선랑을 위하여 그 밑에 종노릇도
달가웁게 받을 각오가 섰다. 남의 나라에 들어가 버젓한 무관의 정부인이
될것은 아예 마음부터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그는 잘 알았다.
* * *
그때는 봄이었다.
아지랑이 속에 남산성도 하늘하늘 나부꼈다. 노고지리 소리가 유달리
가선랑의 외로움에 겨운 마음을 흔들어 주는 날이었다.
노고지리 소리도 귀찮았다. 마음만 흔들어 주는 노고지리임에--- 기화
요초도 다 싫었다.
별애기!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별애기가 그 옆에 없는 한 온화한 봄의
정기도 그의 마음을 아득하게 하여 주질 못했다. 그의 마음은 엷게
퍼지는 백운과도 같았다.
그때다.
백제놈인듯한 염탐군을 하나 붙들었읍니다
무장 유백(兪伯)이 그에게 고했다.
염탐군?
그러하오, 어느덧 새성이 구축되었다는 정보가 들어간 모양이요.
스물도 넘지 못한 듯한 젊은 놈입니다. 이곳에 성이 언제 구축되었으며,
성주가 누구냐고 묻더라 하오. 우리 군졸중에 그런 비밀을 함부로 가르쳐
줄 놈은 하나도 없지만 염탐군인 것을 눈치채고 잡을 놈은 얼마든지
있소이다. 허허허허---
가선랑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 두해 동안에 더욱 피어 났을 별애기를
머리속에 꽉 채우고 있는데 그까짓 염탐군 한놈쯤--- .
염탄군 붙들은 것까지 뭐 일일히 말씀하오. 그대가 잘 알아
처참(處斬)해 버릴 것이지---
염탐군 같으면 즉석에 목을 짜를 것이지 보고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는 것이다. 그는 이다지 군무를 호홀히 할 정도로 별래기를
흠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염탐군이라는게 별애기의 변장한
모습이라는 것을, 그가 알리가 없었다. 몰랐기 때문에 유백에게 목을
짜르라고 하명해 버린 것이었다.
살생유택이라 하지만 염탐군은 살려서 소득이라곤 하나도 없지 않느냐.
그에게는 마땅히 살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우장 유백이 성주에게 보고할 그 임시 별애기는 성문앞에 꼭꼭 묶여
있었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 나라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왕명을
어기고 자기 몸에 부어질 영광을 박차고 수백리를 왔다가 염탐군으로 몰려
잡힌 것이었다.
남산성 군졸들은 그를 염탐꾼으로 밖엔 볼 수없었다. 성이 언제
구축되었느냐? 성주가 누구냐? 그런 질문을 듣고, 염탐군이 아니라고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너 백제 놈이구나!
예
별애기는 물론 백제 백성이 아니라고 부인할 이유가 없었다.
못된놈! 염탐군 짓을 할 테면 똑똑히 할 것이지, 죽는 것도 모르고
범의 굴에 뛰어 들어!
별애기는 깜짝 놀랬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염탐군? 그런것은 당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청천의
벽력같은 이 말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망서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라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부딪친 성이 이곳이긴
하였다.
그러나 염탐군으로 묶이게 된 별애기!
(적국의 염탐군이라면 죽이는 것일까? 차라리 모든것을 실토해 버릴까?
나는 여자라는 것. 그리고 가선랑을 찾아 왔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이 소문이 온 신라에 퍼질 것이다.
가선랑은 백제에 갔다가 염탐은 제쳐놓고 계집에게 혹해 있었다고
백성이 비웃을 뿐 아니라 조정의 신임까지 저버리지나 않을까?
그렇게 되면 가선랑은 신라에서 매장되어 버리고 자기는?---
자기는, ---혹은 동정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나 나라와 육친을
버리고 남의 나라 무장을 홀린 여우같은 계집이라고 무섭게 비난하는
사람이 한층 많을 것이다.
(만일 이대로 입을 다물어 처형되고 말면?)
가선랑이 나의 죽음을 알면 미친듯 애태울 것이다. 그리고 신라까지
찾아온 나의 순정을 알면 그것에 어떤 위안을 느끼고 명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공명을 드날릴 것이다.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것이 가선랑을 위한 것이나 아닐까?
별애기는 작정했다. 어떤 일이 닥치드라도 결코 가선랑을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고. 만일 가선랑을 입밖에 내가지고 자기가 그의 성을
찾아온 연유를 밝히게 될 때는 그가 새로 축성한 참뜻이 나라를
위함보다도 하나의 여자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대로 가선랑이 있는 신라에 들어선 것만도 그에게 출가한 것이나
다름없이 생각해야 한다.
별애기의 마음이 차디 차졌을 때 무장 유백이 성문으로 왔다. 별다른
심문도 없었다. 있어도 함구할 별애기였고.
성주께서 목을 베이란다!
별애기는 움찔했다. 마음은 작정되었다 해도 진작 무서운 선고를 듣고
보니 눈앞이 아찔했다.
혹은 가선랑의 동관일지도 모를 성주가--- (지금까진 유백을 성주로
알았다)
군졸은 그를 끌어 냈다.
별애기는 그대로 아무말이든 해선 안된다고 혀를 깨물었다. 그이를
위해서- 가선랑을 위해서-
시퍼런 칼이 공중에 번쩍했다. 그 칼이 막 내려치려 할때 유백이
큰소리로 외쳤다.
죽기전에 그렇게 알고 싶던 성주의 이름이나 알고 가거라! 가선랑!
가선랑이란 이름이 별애기의 귀에 들렸을 때 그리고 그가 입을 움찔하며
할때는 미처 숨쉴 겨를도 없이 차디 찬 칼날이 그의 목에 꽂혔다.
그밤도 가선랑은 별을 헤며 별애기를 지긋이 품에 안아 보았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던 하나의 별빛이 영원히 꺼져 버린 것도 모르고.
< 끝 >
1996년 6월 1일 19시!
<제 17 화>
義俠美譚(의협미담)
千里遠情
지금으로부터 칠백여년전 고려 고종(高宗)때의 일이다. 북방으로부터
원나라 군사가 조선국내에 쳐들어와서 전국 각처에서 상하 인민이 화를
많이 받은 때 일이다.
< 1 >
강원도 명주(溟州)땅 지금으로 치면 강릉(江陵) 땅에 김천(金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천이 자(字)를 해장(海莊)이라하고 인물이 출중하게 잘나고 천품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인근 사방에 유명하였다.
그는 날때부터 얼굴이 비범하게 났다고 일문과 인근읍에 소문이 났기
때문에 수령방백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일부러 찾아 보는 일까지 있었다.
귀가 유난히 크고 시커먼 눈섭이 붓으로 그은 듯이 뚜렷하고 이마와
미간이 넓직하고 입이 또한 ㅋ큼직하여 거의 귀밑까지 올라가고 눈이 약간
들어간 것이 이상스럽께 광채가 있고 정기가 있는데다가 웃을때면 말할 수
없이 정당운 맛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장차 일국의 재상이 될 관상이라 하였다. 아무튼지
김천의 얼굴에 귀인다운 데와 사람을 끄는데 모퉁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나이 겨우 열살이 넘자 벌써 용모에 어른답고 귀공자다운 태도가 있어서
동무들하고 놀면 언제든지 괴수가 되어 여러 아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게다가 공부를 잘하여 그야말로 일람(一覽)첩기로 하나를 배우면 열은
몰라도 두셋은 알아서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특별히 풍월과
시부를 잘하여 가끔 선생과 붐모를 놀라게 하였다.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철을 따라서 시를 지어서 읊기를 좋아하며 이태백 소동파의 글을
어떤 것은 잘했다 어떤 것은 못했다고 비평까지 하였다. 그래서 신동이라
하였다.
나이 열다섯살에 글 잘하고 말 잘하고 게다가 풍채가 좋아서 동무들
사이에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 될 뿐아니라, 동네 처녀들이 가슴속에 그
뛰어나게 잘나고 사내답고도 정당한 용모를 그리고 남모륵게 사모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그 얼굴 생김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맑고도 우렁찬
목소리와 그 음전하고도 활발한 걸음걸이며 옷입는 맵시 어느 한가지
사람의 마음을 끌지 아니하는데가 없었다.
게다가 부모에게 대한 효성이 지극하며 모든 예절이 깍듯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집안에서도 늘 귀염을 받는 중에 특별히 그 모친 김씨의 총애를
받고, 김천도 모친을 극진히 사랑하여 어려서 부터 나올 때와 들어갈 때에
반드시
어머니 다녀오겠읍니다
어머니 다녀왔읍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조금이라도 모친이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우면 잠시도
그 베개머리를 떠나지 아니 하고 시약을 하고 평시에도 그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였다.
모친은 호장(戶將) 김자룡의 딸로 천성이 너그럽고 현철하며 사리에
밝아서 시부모와 지아비를 잘 섬기고 자녀를 잘 길러서 과연 훌륭한
현모양처이었다. 모친은 역시 어려서부터 규중에서 자라나면서 소학
효경 등을 배워서 상당히 유식할 뿐 아니라 삼국지 수호지 등 책을 읽어서
옛날의 성현인 군자의 교훈과 사적으로 일러주는 것은 물론이요, 본래
구변이 좋아서 여러가지 예날(신라 고구려 중국)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었다.
어머니의 시원하고도 그럴듯한 이야기에는 해장과 동생들이 바싹 반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때는 아들 해장이 혹은 동무하고
놀던 이야기 혹은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 앞에서
이야기를 우습게도 잘해서 온 집안에 웃음판이 터지곤 하였다.
집안은 과연 즐겁고 행복스러운 가정이었다. 그러한데는 첫째는
어머니의 현숙한 심덕과 효변의 힘이요, 둘째에 김천의 효성과 활발한
성품의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김천의 조부때로 부터 전해오는
전장(田莊 : 자기가 소유한 논밭)으로 의식걱정은 없이 지내이기 때문에
누구나 김천의 화평스러운 생활을 부러워 하였다.
< 2 >
김천의 위인이 잘나고 가문조차 상당하므로 명주땅 근경에서 딸가진
사람은 저마다 사위를 삼으려고하여 사방에서 혼담이 나서 신부감을
고르고 고르다가 그중 인물곱고 얌전한 촉선땅 고진사의 작은 딸을 택하여
혼인을 정하고 오는 봄에 길일을 정하여 잔치를 하게하고 미리붙터 준비를
하고 있던 때라 오느새 가을도 지나고 눈이 펄펄 내리는 즈음에 김천의
집에는 청천벽력같은 변이 생겼다.
모친 김씨가 작은아들 덕린(德麟)을 데리고 평창(平昌)땅 친정에
다녀오는 길에 마침 서울을 지나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재물 약탈과
부녀겁탈을 함부로 하던 원나라 군사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젊은 부녀와 아이들을 잡아다가 혹은 종을 삼고 혹은
팔아먹을려고 돌아가는 길에 많이 잡아가지고 간 일이었다.
그러나 가는 길에도 겁탈을 하고 몹시 일을 부려먹고 하는 일이 있어서
그 엄혹한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면 단번에 칼로 찔러 죽이고 가버리고
그렇지 아니하고 요행히 목숨이 살아서 가던 사람들도 그해 겨울은 마침
몹시 추워서 얼어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김천의 집에서는 김천의 모친과 동생이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문득 수심에 싸여서 오늘이나 돌아올까 내일이나 무슨 소식이
있을까 하고 기다리며 온 집안은 눈물과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하루
아침은 이 소문을 듣고 온 집안은 방성통곡하고 김천은 모친과 동생은 꼭
죽은 줄로 알고 상을 발하여 모친의 몽상을 입었다.
그러자 김천은 수심과 슬픔에 싸여서 만사에 뜻이 없고 무슨 일에나
일이 손에 붙지를 아니하여 일절 출입을 폐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그럭저럭
하루 이틀을 지냈었다. 그후 몇해를 지나서야 김천이 대강 잔치를 하고
아내를 맞어 들였으나 김천의 아버지는 병객이고 김천이 아주 호주가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심한 흉년이 들어서 추수가 변변치 아니하고
김천이 아버지가 무슨 장사를 하느라고 빚을 썼다가 그 빚값에 자기
소유의 전장까지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천의 집안은 그만
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어린 김천이 일가의 전 책임을 지고 해보지
못한 농사도 짓고 혹은 장사도 하여서 간신간신히 지내갔다.
< 3 >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어느새 십오년이 지났다.
어머니가 죽은지 십오년이 된 가을이었다.
마침 가을달이 몹시 밝아서 반공에서 고요히 내려 비쳤는데 남무잎이
우수수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 가늘고 맑은 소리로 우는 귀뚜라미 소리-
게다가 반공에 끼릭끼릭 울고가는 기러기 소리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을 원통하게 잃어버린 김천에게는 모두가 속절없는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고요한 달밤에 김천은 지겟문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이면서 어머니
생각을 한다.
어머니께서 정말 돌아가셨을까?
지금도 어디서 살아 계셔서 고생을 하시면서 그리고 아들을 그리며
애를 태우시지 아니하실까?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
한잠을 들었다가 동네집 개짖는 소리에 잠을 깨이니 달은 여전히 밝은데
혼자 앉아서 꿈꾸던 생각을 한다.
휀일일까 이상하도다. 어머니가 정말 살으셨나
하고 중얼거렸다.
꿈에 대문밖에 어머니가 남루한 옷을 입고 동생의 손목을 붙잡고 서서
집안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서
해장아 해장아
하고 부르는 것이다. (어머니는 늘 김천의 자를 불러서 해장이라 하였다)
얼른 대문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어머니와 동생은 간 곳이 없었다.
김천이 꿈이 하도 이상타 해서 벌떡 일어나서 정말 대문밖으로 나가서
이리저리 어머니를 두루 찾아 보았으나 어머니의 그림자나 있으랴?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서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김천의 아내가
지난밤에 당신이 밖에 나가셨소?
그래
왜?
그렇지 않아도 내 그이야기를 하려던 차이요. 꿈에 어머니를 보고
하도 수상해서 나가 보았지
하고 꿈 이야기를 하였다.
당신이 하도 어머님 생각을 간절히 하시니간 꿈에 늘 보이는 것이
아니오
아니오 아무래도 무슨 이상한 소식이 들릴려는가 봐
기쁜 소식이나 들리면 안 겠소? 그러나 이제 십오년이나 되도록
소식이 없는데 웬걸 살아 오시겠어요
내외가 앉아서 이렇게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또 마침 뜰안의
뽕나무가지에서 까치가 요란스럽게 운다.
참말 무슨 반가운 소식이 들릴려는가 봐요. 저렇게 까치가 야단으로
우니
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로 겸 말하였다.
참말 기뿐 소식이 들리면 좋겠나?
하고 김천은 웃으나 한숨을 쉬이면서 마침 장날이라 장으로 나갔다.
< 4 >
이러한 일이 있는 저녁이라 김천은 장에서 볼일을 보고 마악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던 차에 길에서 오래간만에 촉선골 친구 김순응(金順應)을
만났다.
순응이 김천을 만나자마자 썩 반가운듯이 손을 턱 붙잡고
마침 잘 만났네. 그렇지 않아도 내 자네를 찾아가던 길일세
하는 말에는 무슨 중대한 힐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무슨 일이 있나? 오래간만인데 집으로 가세
그러나 김천은 무슨 큰 일이야 있으랴 하는듯이 무심한 태도로 이렇게
말을 한즉
일이 있네. 일이 있어. 자네 자당(慈堂)한테서 편지가 왔다네
무어? 어머님한테서 편지가 왔어? 장난의 말이지?
그말을 못믿겠다는 듯이 김천이 이렇게 말하자 순응은 정색을 하면서
손을 잡아 끌며
내가 언제 자네에게 장난하던가. 덮어놓고 가세
하고 같이 가기를 재촉하였다. 가면서 순응의 말을 들으면 이러하다.
순응이 볼일이 있어서 명주땅에 왔다가 어떤 주막에서 점심참을 하는데
원나라에서 왔다는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습성이라는 손님이 한두마디 이야기를 하던 끝에 이 명주고을에
김천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김천이란 사람은 내
친구인데 왜 찾느냐고 한즉 동경(원나라 서울)에 있는 김천의 모친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하려고 찾는 중인데 당신이 그 김천의 친구라니
마침 잘 되었소, 하면서 편지를 내보이며 찾아 주기를 청하더란다.
그래서 김천은 순응과 같이가서 원나라 손님 습성을 찾아가서 습성을
친히 만났다.
만난즉 과연 습성은 원나라에서 왔는데 김천의 어머니를 친히
만납보았다고 하며 편지를 내어준다.
김천은 꿈인가 생시인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위선(우선) 습성에게
어머니를 대한듯 절을 하고 두손으로 편지를 받아보니 과연 모친의
친필이라 글씨부터 반갑기 그지없다. 그 자리에서 팔을 들어 춤을 추고
싶은 것을 여러 사람이 있는 길거리라 그럴 수는 없으나 너무 기뻐서
껑충껑충 뛰다시피 하면서 편지 겉봉을 뜯어 보았다.
편지 사연에 하였으되
해장아 너는 내가 죽은줄만 알고 슬픔으로 냈으리라마는 죽지 않고
살아서 동경에서 삼, 사십리 가량 되는 북주(북주)라는 곳에 장모(張某)의
집에서 노비의 몸이 되어 지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천신만고한 것도
이루다 기록할 수 없거니와 이곳에서 지내는 정경은
불가형언(不可形言)이다. 이곳은 네 아다시피 본국에서 사, 오천리도
넘는 산 설고 물 설은 되땅이라 풍토가 다르고 온갖 습속이 달라 거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늙은 몸이 남의 집 종의 신섹가 되었으니 주리되
먹지 못하고 목마르되 마시지 못하고 병나되 치료 못하고 누워서 앓지조차
못하며 낮에는 김매고 밤에는 방아찧고 겨울에는 빨래와 다드미로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일을 하루도 쉴새없이 일만 하기에 나는 벌써 허리가 굽고
눈이 어둡고 몸은 수축하여 피골이 상접하였다. 만리이역(萬里異域)에서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외로운 몸이니 뉘라서 이 정경을 알아주랴. 오직
기나긴 세월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간다는 뜻으로
세월이 흘러 오래 될수록 자꾸 더하여짐을 이르는 말)에 꽃피는 아침이나
달밝은 밤에나 바라느니 고국이요, 그리느니 내 아들이라 언제나 고국을
아니 생각하며 어느날 어느시에나 너 생각을 아니 하였으랴.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운산만리(雲山萬里) 아득한 고국이라 흉중에
민망하고 초조한 마음 금할길 바이없어 밤마다 애달픈 꿈이요, 오직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로다. 그리던 즈음에 천만다행으로 고국에
돌아간다는 손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두어자 기록하노라. 그동안 너희
아버지는 기력 어떠하시며 네몸은 어떠한지 궁금한 마음이 비할길 없다.
모(母)는 비록 고생은 되나마 아직 목숨이 붙어 있고, 네 동생도 살아서
역시 남의 종노릇하는중 지내가는 형편은 또한 말할나위없다. 쌓이고
쌓인 사정을 다 기록하자면 몇권 서책을 이룰지라 어찌 끝이 있으랴.
단촉(短促)한 겨를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어서 오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줄만 알기를 바라며 천애지리(天涯지리)에 매인 몸된 모(母)는 밤이나
낮이나 바라고 바라기는 하늘이 내려다 보시고 신명이 도우셔서 생전에
내아들 너를 한번 만나 보기가 진정 소원이로다
모월 모일 동경의 모서
(某月 某日 東京의 母書)
김천이 죽은줄 알았ㅅ던 모친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의 친필을
받아보니 모친을 친히 대한듯 반가운 중에도 모친의 편지에 구구절절이
슬프고 기막히는 사연을 읽으매 김천은 흐득 흐득 느껴 울기를 시작하고
마침내 눈물이 앞을 가리고 방울방울 편지를 못읽고 나중에 목ㄴ놓아
울었다. 김천의 아내는 물론이요, 친구되는 순응과 편지를 전해준
습성이며 이 소문을 듣고 찾아 왔던 동네 사람까지 모두 울었다.
반가운 편지를 전해준 귀한 손님, 김천이 비록 가난하나 습성을 흰쌀을
구하고 씨암탉을 잡아서 극진히 대접해 보냈다.
< 5 >
김천이 모친의 편지를 받아보고 기쁜 중에도 기막히는 것은 전같으면
염려가 없으련만 지금은 가세가 몹시 빈한하여 돈이 없은즉 머나먼 길을
갈 수도 없으니 하물며 모친을 속량해올 방책이 있으랴.
모친이 살아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절절한 편지를 받고도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모친의 소원과 자기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니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아니하랴. 그러나 뉘게 구차한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아니하여 부지런히 일을 하고 먹지아니하고 돈을 모아가지고 가려고
해보았으나 그래서는 언제 갈 기약이 막연하다.
그래서 김천은 문중에 가까운 친척과 여러 친구며 부친의 친구되는
이들을 찾아서 모친에게서 온 편지를 보이고 일장 슬픈 사정으로 이야기를
하면 사정도 딱하거니와 김천이 본래 호변이라 듣는 사람마다 동정을 하여
혹은 돈으로 혹은 미곡으로 보태 준 것을 한 일년만에 겨우 백금의 돈이
되었다.
그만하면 되었느니라 하고 우선 송도(松都=開城) 서울로 올라갔다.
명주서 송도도 상당히 먼길이지만 원나라 서울 동경을 갈 사람이
송도나가는 것을 멀다 하랴. 달음질로 빨리 가서 원나라의 동경에, 가는
월국장(越國狀=지금의 여권)을 청하였다.
아직 원나라와 국제관계가 평온치 못하던 때이라 조정에서는 불허가로
퇴각을 당하였다. 나라에서 하는 일을 어찌하랴. 김천은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해를 지나 다음왕 충렬왕(忠烈王)때에 김천은 다시 여행권 수속을
할차로 서울로 올라와서 애걸하는 글을 정부에 들여 원나라 가는 것을
허락하기를 청원했으나 역시 불허가다. 그러나 김천은 굴하지 아니하고
기어이 그 뜻을 이루어볼 작정으로 이번에는 집에 내려가지 아니하고 그냥
서울에 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객지에 지내는 동안에 노자가
떨어지고 식량이 떨어져서 오도가도 못하고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지경에
빠졌다.
이때에 김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객사에 홀로 누워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고 지내다가 하루는 우연한 기회에 효연(孝緣)이라는 중을 만났다.
효연은 당시 궁중에 출입하는 세력있는 중이요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
부디 부디 동경에 가서 모친을 속량해 오도록 해달라는 김천의 애걸하는
말에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어찌하든지 가도록 주선해 주고 싶은데 마침
자기 형이 나라일로 동경가는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천더러
내 형님이 동경가시는 일이 있으니 따라가 보시오
하고 자기 형님에게 말하여 김천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을 얻어서 모든
일에 지장이 없이 주선을 해 주었다. 김천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곧
길을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벌써 습성의 편에 모친의 편지를 받아 본지가 육년이 되었던
때다. 김천이 동경을 향하여 떠나고자 하는 것을 보고 김천을 위하는
친구들은
이제 자친의 편지를 받아 본지가 육년이 지났다니, 그 동안에 자친께서
그냥 살아 계신지 불행히 돌아가셨는지도 모를 것이요, 설혹 아직 살아
계시다 치더라도 가서 만날는지 알 수 없는 터이니 잊제 공연히 멀고
험한 길을 가다가 중로에 혹 도둑이라도 만나면 아까운 재물 잃어버릴
것이니 차라리 그만 두는 것이 옳겠소
이렇게 굳이 말리었다. 그리고 벼슬을 시 줄 터이니 어디로 구실이나
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김천은
자식된 도리로 설혹 갔다가 못만나고 오더라도 가는 것이 옳지, 당장
부모가 사지에 계신줄을 알고 어찌 내 몸을 아껴서 안갈 수가 있소?
이렇게 만류하는 말을 물리쳤다.
< 6 >
김천은 마침내 효연의 형 충연을 따라서 동경에 갔다. 동경에서
유모(柳某)의 집에 주인을 정하였다. 김천은 충연의 소개로 그곳에
가있는 고려사람으로 역어 벼슬(지금의 통역관)로 있는 별장(別將)
공명(孔明)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둘이같이 북주(北州)로 노채(老寨)라는
곳을 가서 모친을 찾았더니 마침 모친이 군졸(軍卒) 요좌(要左)의 집에
있는 줄을 조사해 알았다.
어디서 오신 양반들이요?
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데 옷은 여기저기 꿰어 매어 있고
봉두난발(蓬頭難髮)에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고 수족에 때가 더덕더덕
하였다.
김천이야 설마 그것이 자기 어머닌줄 알았으랴마는 공명이 수상히
여겨져 노파더러 고려말로
우리는 고려서 온 사람이요. 당신은 웬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이때 노파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는 말이
저는 본래 고려국 명주땅 호장 김자릉의 딸로 호장 김종연에게
출가하여 아들을 둘을 낳았는데 하나는 김천인데 자를 해장이라고 부르고
하나는 덕린인데 나하고 같이 와서 나이 스무살이라오. 그 애는 지금
서변땅 백호(百戶) 천로(天老)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며 삽니다. 오늘날
여기서 본국 양반들을 만날줄은 참말 뜻밖이요
이 말을 채마치기 전에 김천은
어머니 이게 웬일이요, 제가 해장이올시다
노파의 발밑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
모친은 두손으로 김천의 손을 붙잡고
네가 참말로 내 아들이냐?
두 사람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느껴 울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주인 장모가 없기 때문에 모친을 속량할 일을 교섭할
형편이 못되어 김천은 잠시 작별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며칠후에 김천은 다시 공명을 졸라서 모친이 있는 주인집을 찾아갔다.
주인을 만나서 모친을 속량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주인은 사정 없이
거절을 하였다. 김천은 준비하였던 돈 백량을 속량금으로 바쳤으나
주인은 백량돈을 집어서 뜰에 내던지면서
뿌우야 뿌우야(일이 없다)
를 연발하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같이갔던 공명이 아무리 여러말로
간청하여 보았으나 무가내로 듣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천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장모가 모친의
속량을 거절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른 까닭이 아니라 돈에
욕심을 내어서 그런것이니 돈만 더 있으면 곧 모친을 구할 수 있을터인데
만리 타향의 외로운 손이 어디서 돈을 구하랴- 이러한 그 기막히고 슬픈
사정을 뉘라서 알아주랴.
서변 천로의 집에 있는 아우 덕린도 찾아가서 반가이 만나는 보았으나
역시 속량할 도리가 없어서 역시 다만 애달픈 작별을 하고 있다.
모친이나 아우나 차라리 보지아니 하였으면 나을걸 머나먼 길에 허덕허덕
애를 쓰고 찾아와서 만나보고 속량해 내지 못하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천은 할 수 없이 주인집에 들어 앉아서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김천이 자리에 누워서 더운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하루는 단연히 기운을 차려 일어났다. 일어나서 지필을 준비하여 있는
재주와 심혈을 부어서 장문으로 진정서를 지었다. 스스로 읽어 보아도
상당히 명문이었다. 진정서를 동경 총관부(總管府 : 지금의 경찰국)에
들이고 그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김천이 동경에
온지도 어느새 석달이 되었다. 김천이 본래 재주있고 구변이 좋은 까닭에
원나라말(곧 동경말 = 지금의 북경말)을 대강은 수작을 하게 되었다.
김천이 수심중에 잠을 들었다가 깨인즉 베개 머리에 편지 한장이 놓여
있었다. 김천이 얼른 편지를 뜯어 보매 그 편지 속에는 돈 백금짜리
어음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편지의 사연은 간단하였다.
이 적은 돈을 당신의 효심을 다하시는 일에 써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겉봉에도 이름이 없고 속에도 이름이 없으니 누가 보냈는지 알길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글씨는 썩 눈에 익은 글씨였다. 보고 다시
보고 하다가 김천은 마침내 이것이 주인의 딸 춘혜(春惠)의 글씨인 것을
발견하였다.
김천의 유하는(머무르는) 주인 마부인은 동경장자 유모의 첩으로
심심소일거리고 여관을 경영하였는데 그 집에는 춘혜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유장자의 과부딸로서 모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들며 나는
동안에 김천의 눈에도 유심히 보였거니와 춘혜의 눈에는 김천의 남자답고
비범한 용모와 풍채가 깊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김천은 춘혜의
가슴에는 잠시도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를 품고 있게 되었다.
처음에도 서로 멀리서 바라보고 웃음으로 바꾸고지내는 사이었으나 차차
날이 지나는 동안에 서로 수작말을 건느게 되고 서간(書簡)이 내왕하게
되고 조용한 틈을 타서 만나서 정담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춘혜라 김천의 정지를 알아주고 백량짜리 어음을 돌려보낸
것이었다. 장자의 딸이라 그만한 돈은 마음대로 돌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또 마침 총관부에서 김천을 부르는 기별이 나왔다. 김천은 곧
총관부에 들어가서 관원이 묻는대로 눈물을 흘려가면서 말하니 장모에게
내시를 하기로하고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리고 김천의 진정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노라고 하면서 칭찬을 하고 노자까지 약간 보태주고
역로관원에게 보호해 주라는 증명서까지 주었다.
김천은 곧 모친을 찾아가서 사연을 말하고 주인 장모를 만나서 은한봉과
총관부 소개장을 들여 놓았더니 과연 주인은 이번에는 얼른 허락을
하였다.
은은 장모를 주고 돈은 노자로 쓰기로 하였다. 그길로 김천의 모자는
서로 손을 잡고 동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마부인의 집을 찾으니 마부인은
김천의 유숙을 거절하였다.
춘혜의 부친 유장자가 자기 딸이 고려인 김천을 은근히 하고 돈까지
주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자기 딸은 큰집으로 데려가고 김천을
마부인의 집에 유하는 것까지 금하게 한 것이다.
김천은 춘혜를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그 마음도 앓는
부친을 위하여 모친을 위하여 억제하고 모친을 모시고 어서 귀국하기로
하였다.
김천은 모친을 모시고 아우 덕린이 있는 천로의 집을 찾아갔다.
작별하기 위하여 간 것이다. 천행으로 모친은 속량하였으나 아우까지는
속량할 도리가 없고 돌아갈 노자도 부족한지라 할 수 없이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고 형은 동생을 버리고 가는 심정은 어떠하며 혼자 떨어지는
덕린의 심사는 어떠하랴. 세 사람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다.
그 중에도 김천의 모친은 덕린의 목을 끌어안고 땅바닥에 뒹굴기를
마지아니 하였다.
그러나 덕린이 먼저 눈물을 거두고
나는 대장부라 아무데 가서나 못살겠소. 어서 염려말고 늙으신
어머님이나 모시고 돌아가셔요. 아버님께서도 병중에 기다리실 터이니
하루 바삐 돌아가셔요
하는 말에 어머니와 형은 더욱 슬프게 울었으나 울어야 끝이 없는줄
깨달은 김천은 모친을 강권하여 억지로 이끌고 동경으로 해서 두달만에
귀국하였다. 마침 본국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절도사 일행을 따라서
무사히 오게 되었다.
부친 종연이 그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진부(珍富)라는 역에까지
나와서 이십이년만에 젊어서 헤어졌다가 이제는 피차에 노인이 되어
만나니 서로 눈물만 좍좍 흘리고 말을 못하는 그 정경을 보는 사람으로
울지 아니하는이 없었다.
< 7 >
김천의 모친은 돌아온 다음에는 멀리 외국에서 종노릇을 하는 덕린을
잊을 날이 없어서 늘 눈물로 지내어 김천도 아우의 생각도 아니하는
바는 아니지만 춘혜의 정을 잊지 못하여 천리 만리 먼곳을 밤이나 낮이나
그리는 정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런지 다시 육년만에 명주 땅에는 몽고 옷입은 청년하고 예쁜 색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두사람은 김천의 집을 찾아갔다. 청년은 김천의 아우
덕린이요, 젊은 부인은 천리원정(千里遠情)을 멀다 하지 아니하고 찾아온
유춘혜이었다. 김천의 부모는 물론이요, 부인까지 춘혜를 대접을 잘하여
형제처럼 지냈다.
김천은 후에 나라에 교섭하는 구실을 맡게 되고 동경에 내왕하는 사신의
중직을 봉행함에 춘혜의 내조가 많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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