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바울의 문안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4:48

바울의 문안

 

빌레몬서1:1-3절

본문:빌레몬서 1장 1-3절

제목:바울의 문안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저는 교회의 주보 원고를 교정하고 인쇄소에 맡기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담임목사님이 그 주일 설교 본문으로 요엘서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본문을 주보에 실었습니다. 주보에 실을때에는 성경본문의 약자를 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보에 '욜 1장 1-3절'이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그 주일 아침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주보원고를 교정하지 않고 싣느냐?고 말하면서 "최소한 담임목사님의 설교 본문은 정확하게 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이 틀렸느냐?"고 말했더니 "왜 욥 이라고 쓰지 않고, 욜 이라고 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본문은 욥기가 아니고 요엘서라고 말했더니 갑자기 제가 있는 앞에서 성경을 막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약에 정말 요엘서라는 성경이 있고, 그 약자가 '욜'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그 분이 얼굴이 벌개져서 저에게 죄송하다고 말하였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날 저에게 따지듯이 찾아왔다가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가신 그 분을 보면서 이것이 단순히 욥기와 요엘서를 구분하지 못한 그 분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신구약 66권은 말씀의 분량이 많다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교회에서 어떤 말씀은 성도들에게 잘 소개되지 않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가령 요한계시록은 해석하기가 무척 어려울뿐 아니라 자칫 해석을 했다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한평생 목회를 하는동안 한번정도 강해를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성경이 아주 짧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시되어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방금 예를 들었던 요엘의 경우도 그렇지만 구약에서 제일 짧은 성경은 '오바댜'입니다. 물론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시편117편의 경우는 단 2절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제일 짧은 성경은 시편 117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을 제하고 보면 오바댜가 구약성경에서는 제일 짧습니다.

여러분 중에 오바댜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을 알고 계신다면 성경을 상당히 많이 아는 분이십니다. 저도 사실은 신학교에 입학하기전까지는 오바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도 단 한장으로 구성된 성경이 있습니다. 요한2서,요한3서, 유다서,그리고 오늘부터 몇주간동안 우리가 살펴볼 '빌레몬서'입니다.

아마 오늘 예배시간에 조금 일찍와서 성경본문을 보신분중에 '몬'이라는 본문을 보면서 이게 어디에 나오는 본문인가?하고 의아해 하신분도 있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중에 빌레몬서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계시는 분이 있으신지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별로 없을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어떤 성경은 우리가 너무 잘알고 있는 반면에 어떤 성경은 그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여러분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한쪽에 치우쳐서 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목회를 하면서 꼭 실천해야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교회에서 만큼은 성도들이 말씀에 대해 편식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경이 길던 짧던 신구약 66권 전부를 다 강해하고, 또 성경공부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금년들어 특별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올해부터 프리셉트도 2과목으로 늘려서 저와 백전도사님이 강의하도록 편성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다른 두 분 전도사님들도 시간이 허락되면 프리셉트를 공부하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더 많은 과목을 교회에서 개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뭏튼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하는 동안 신구약 66권 말씀 전체를 다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공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짧기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빌레몬서를 주일 낮예배시간에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빌레몬서에 대한 말씀을 잘 알기 위해서는 전체 줄거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전체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소아시아지역의 작은 도시 '골로새'라는 곳에 마음씨 좋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살았던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노예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도망을 갔을 뿐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훔쳐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물론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단순히 노예로만 취급하지 않고, 진실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황금에 눈이 어두워졌고, 또 그 돈을 가지고서 자신도 자유인으로 마음껏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훔친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로마로 향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도시는 로마였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로마는 젊은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세계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면서 거리거리마다 주점이 들어섰고, 몸을 파는 여인들이 거리에서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훔친 주인의 돈을 가지고서 마음껏 인생을 즐겼습니다. 환락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였습니다. 매일 술에 취하였고, 아름다운 여인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훔친 돈도 거의 다 써버렸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즐겼던 인생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돈을 쓰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 돈을 훔쳐 로마까지 왔는데, 인생의 참된 자유가 그것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인생을 즐기며 살다가 돈도 떨어지고 친구들도 자신의 곁을 떠나면서 그제서야 아버지의 품을 떠난 자신의 인생이 결코 참된 인생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과 같이, 오네시모도 술과 춤과 도박과 여인을 통해서 인생의 참 자유를 얻을 수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오네시모는 자신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성경은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두사람이 만난후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갇힌 주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생각하면서 교제를 했던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복음전파 사역을 감당할때 바울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압니다. 그런데 바울이 특별히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사람중에 디모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는 형제 디모데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신약의 여러곳에서 디모데를 부를 때, 자신의 아들로 불리워졌습니다. 훗날 디모데는 바울의 뒤를 이어서 복음전파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바울의 후계자였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부를때 종종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를 향하여서 자신이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이 두사람사이가 얼마나 각별했는지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흥청망청 생활했던 것을 청산했을 것입니다. 아니 흥청망청하면서 그토록 누려보려고 노력했지만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참 자유로운 삶을 오네시모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날마다 바울을 만났고,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웠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집을 나올때 주인의 돈을 훔친 죄에 대해서도 그는 하나님께 진실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오네시모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함은 받았지만, 오네시모에게는 한가지 더 해결되어져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인인 빌레몬으로부터도 용서함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마침내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기를 결심합니다. 물론 이일은 결코 쉬운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풍습에 따른다면 노예가 도망을 쳤다가 붙잡히게 되면 주인에게 맞아 죽거나 맞은 후유증으로 한평생 불구의 몸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모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자신이 죽을 수 도 있다는 것을 각오한 결심이었습니다.

바울도 오네시모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도 용서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결심한 오네시모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네시모를 위해서 그는 두기고편에 편지를 보내어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내용이 빌레몬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짧은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사랑과 용서가 무엇인지,또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빌레몬에게 바울이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의 겸손함을 우리는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서 두가지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바울의 겸손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표현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라는 표현대신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자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오네시모를 위한 깊은 배려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는 빌레몬에게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돌아가면 그에 대한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주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부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겸손한 태도로 부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겸손한 태도는 청탁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보여주는 그런 겸손함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든지 타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어떤 배려를 하고 계십니까? 내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베풀수 있는 배려라면 그 일을 기쁜마음으로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나의 명예나 나의 감정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겸손함이 있으신지요?

두번째는 그리스도때문에 갇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때문에 손해보는 일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개척하고 제일먼저 낮예배시간에 저는 빌립보서를 강해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보면서 바울이 얼마나 그리스도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쓰던 당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두가지 단어가 확연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고난과 기쁨'입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이 두 단어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고난과 기쁨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난보다는 기쁨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신이 복음때문에 갇힌 고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때문에 고난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신지요? 예수님때문에 어려움에 처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그럴때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워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핑계를 대면서 피해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갇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오네시모뿐 아니라 이 편지를 받는 빌레몬이라는 사람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는 빌레몬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2절에 보면 우리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한 사람은 압비아이고 또 한 사람은 아킵보입니다. 이 두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주석을 보았더니 주석가들은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였을 것이고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해서 본다면 분명 빌레몬의 가정은 가족 모두가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의 가정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이 2절에 바울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빌레몬의 가정은 골로새라는 작은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골로새라는 지역에서의 예배는 이 빌레몬의 가정에서 드린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언제나 가정을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가령예를 든다면 빌립보에서는 루디아의 집이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는 눔바의 집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아굴라 부부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마가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때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예배의 처소로 제공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초대교회에는 지금과 같이 이렇게 교회건물이 지어져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건물이 없어도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라는 지역도 교회의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의 집이 복음을 위해서 예배의 처소로 개방되어졌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족모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안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주님을 위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레몬의 가정이 부럽지 않습니까? 빌레몬의 아내는 주안에서 거듭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였습니다. 본문 2절에서 아킵보를 가리켜서 군사라고 말한 것은 군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집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은 이 교회의 지도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빌레몬의 가정을 보면서 저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정의 남편들이 가정교회의 진정한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아내들은 주안에서 거듭난 신실한 내조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을까요?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헌신된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현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말씀과 찬송이 넘치는 작은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까요?

빌레몬의 가정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고 헌신된 삶을 살았던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을 향해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말할 때 한번도 순서를 바꾸어서 평강과 은혜라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모두가 평화를 원합니다. 평강을 원합니다. 그런데 평화나 평강의 전제조건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평강을 소유하려는 것은 순서상 맞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평강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이 깃들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때 우리가정에 평강이 깃들고 내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장 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빌레몬서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여러분 가정에도 빌레몬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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