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그리스도인의 관계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4:50

그리스도인의 관계

 

4빌레몬서1:15-19절

본문:빌레몬서 1:15-19절

제목:그리스도인의 관계

인류 역사를 통틀어 로마 제국시대에 가장 많은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에 노예가 자그마치 6천만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남북한 합쳐서 인구가 7천만 정도 된다고 하니까 6천만의 노예가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시(市)에만 해도 65만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노예가 아닌 사람은 자유인이라 불렀는데 노예와 자유인의 비율을 따져보면 4대 1이었습니다. 즉 자유인 한사람당 노예가 평균 4명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통계상 평균치이므로 부유한 집에서는 더 많은 노예를 거느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통계자료에 의하면 로마 사에서 가장 많은 노예를 거느린 사람으로 기록된 사례는 무려 4116명의 노예를 부린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뭏튼 이 당시 노예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했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노예는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짝지어 주는대로 결혼하거나 심한 경우 결혼하여 잘 사는데 주인이 이혼하라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혼도 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주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노예를 성적으로 희롱할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의 갖은 학대와 힘든 노역에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이 말하면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주인의 권세는 대단했고 노예가 된다는 것은 너무도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TV를 통해서 '뿌리'라는 드라마가 상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백인사회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가를 보여주는 드라마였습니다. 흑인은 백인상류사회의 노리개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흑인들의 삶의 애환과, 짐승보다 더 못한 노예의 삶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도 노예였습니다. 물론 오네시모의 경우는 주인을 잘 만나서 이러한 비인격적인 학대나 짐승처럼 취급당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예라는 신분 그 자체로도 항상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를 찾아 주인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노예라는 신분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주인집을 도망쳐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로마의 거리는 휘황찬란했습니다. 그 순간 오네시모는 "이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소리를 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얼마가지 못해 그것이 참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네시모가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교제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나자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참된 자유가 간섭받던 주인집을 뛰쳐나올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또 휘황찬란한 로마의 거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자신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결심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참된 자유를 가슴에 간직하고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결단합니다. 자신을 지금까지 구속하고 억압했던 것은, 자신의 노예라는 신분이 아니라 죄 아래서 살았던 죄된 본성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주인집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치않았습니다. 얼마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오네시모와 깊은 영적인 교제가 있었고 그를 자신이 갇힌자 중에 낳은 영적인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그를 그냥 돌려보낸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두기고 편에 편지를 쓰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해 줄 것을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용서해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치기 전에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시간적으로 따질때 일시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죽어버리면 그는 더 이상 빌레몬과는 아무런 관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서, 형제로서, 친구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혹은 선배와 후배로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동안의 관계일 뿐입니다.

누구라고 얘기하면 인신공격이 될 것 같아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름만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만한 유명한 가수가 있습니다. 그 분의 아내가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을 했습니다. 남편은 참 지극정성이었습니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것 같이 아내의 병수발을 했습니다.

신문과 잡지에 그사람의 남다른 아내사랑을 공개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 세상의 남편들이 정말 이렇게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아내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 아내는 죽었습니다. 처절하게 남편은 울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아내에 대한 기억을 머리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한 여인이 그 사람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또 다시 그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자신보다 20여세 어린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재혼한 것을 지금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의 관계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도 오네시모가 주인집을 도망치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단지 주인과 종의 관계라는 일시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사도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논지입니다.

그런데 도망한 오네시모가 예수를 믿고 다시 돌아왔을 때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는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한 형제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비록 빌레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도망을 쳤는지는 모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섭리가 있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골로새라는 작은 마을에서 같이 거하며 살았던 일시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영적으로 영원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여러분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아닙니까? 또 여러분의 자식이나 부모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관계가 만약 그리스도안에서 영적인 관계로 맺어지지 못한다면 단순히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의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으로 미루어보아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이라할찌라도 그 관계가 영적인 관계가 아니면 결국은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설 명절에 고향을 잘 다녀오셨는지요? 아직까지 오시지 못한 분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의 작은아버님께서 목사님이신데 이미 일선에서 은퇴를 하셨습니다. 올해 만 70세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집안의 모든 예배도 이제 제가 인도하라고 말씀하셔셔 올해부터 저희 집안의 모든 예배는 제가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라는 특수성때문에 명절이 다가와도 고향을 가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가야만 합니다. 오랜만에 고향의 어른들과 형제를 만나 뵈니 참 기쁩니다. 그래도 참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집안의 모든 분들이 예수를 믿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를 인도할 때 찬송가도 305장을 부를 예정입니다. 물론 진주 저의 처가에서 예배를 드릴때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와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고 찬송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저는 진실로 저희 가족을 사랑합니다. 저희 모든 가족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함께 거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하신지요? 제가 이런 얘기를 드릴때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 분은 계시지 않으신지요? 우리가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무엇을 사들고 고향에 갈것인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지를 더 생각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이제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 영접하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오네시모와 빌레몬은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에게 돌아가는데,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같은 형제로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아름다운 섭리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예와 주인이라는 관계가 변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라는 영광스러운 관계로 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안에서는 모두가 한형제 자매입니다. 거기에는 신분의 격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식의 많고 적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함과 가난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과거에는 너의 노예라는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네 형제다"라고 말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만나는 그 순간 그들은 노예제도라는 굴레를 훌쩍 뛰어넘어서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형제라는 새로운 각성을 가지고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두 사람의 놀라운 신앙적 결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차례 말씀을 드렸거니와 오네시모가 예수를 믿고나서 그의 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애에 중요한 결단을 내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한 것은 그의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오냐하면 그 당시 구름한점 없는 맑은 날만 계속 되었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 홍수라는 것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위의 사람들은 그 맑은 날에 배를 만든다고 모두다 비아냥 대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 아무리 하늘을 쳐다보아도 비가 올것같지 않은데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라고 말하면서 그 일을 포기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방주를 만들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느날 가족들과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고향 친척 본토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고향집을 떠나는 것을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야하는지 목적지가 불분명한 가운데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갈 것을 결단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은 요셉이 타국땅에서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못 이기는 척 받아주었으면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뒤를 돌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혹을 뿌리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하나님앞에서 득죄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룻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시어미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그의 인생의 모험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환경과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시어미를 따라간다고 해서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오미를 따라 나서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은 어떤 신상이나 우상앞에서 절을 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민족을 구한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내리고 아하수에로 왕앞에 나아갔습니다. 문둥병을 치유받은 나아만도 엘리사의 지시에 순종하여 요단강으로 향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후, 주를 위해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는지요? 내 삶을 한번 바꾸어 보겠다고 결단을 해보셨는지요? 지금까지 내가 추구해왔던 삶의 가치와 목표도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바꾸어 보겠다는 결심과 결단을 해보셨는지요?

오네시모는 예수를 믿자 죽음을 각오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서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오네시모의 죽음을 각오한 결단과 더불어 과거에 자신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빌레몬의 훌륭한 믿음과 인격입니다.

여러분!

종을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일일까요? 이 당시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상류계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자존심을 더 소중하게 여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존심마저 다 버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이 자존심을 버리면서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미 1-2절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진실로 그리스도안에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내세울때가 정말 많습니다. 내 자존심이 상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나'라는 개인은 사라져야합니다. 오직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말입니까? 오네시모를 대신해서 자신이 오네시모의 빚을 갚아주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빚을 나누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형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형제의식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우리'라는 공동체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나보다 더 먼저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모두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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