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바울의 기도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4:48

바울의 기도

 

2빌레몬서1:4-7절

본문:빌레몬서 1장 4-7절

제목:바울의 기도

벤허라는 영화를 보신분들이 많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아마 많이 보신분들은 적어도 서너번씩 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는가? 하면 물론 '찰톤 헤스톤'이라는 걸출한 연기자가 연기를 했고, 또 영화가 워낙 대형영화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속에 아주 감동적인 장면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영화의 수 많은 장면 중에서 제가 잊지못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벤허가 노예가 되어서 노예선을 타고 배의 노를 젓고 있는 장면이 혹 기억나십니까? 이때 한 사령관이 배의 노를 젓고 있는 노예들을 바라보다가 특별히 그의 시선이 벤허에게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노예 신세가 되어 배의 밑바닥에서 노를 젓고 있지만 그의 눈과 그리고 그의 행동은 그 배에서 노를 젓는 많은 노예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령관은 벤허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저 놈은 노예가 아니다, 자유인이다, 그러니 저를 풀어주라"

성도 여러분!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도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영화에 나오는 벤허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주인의 집에서 도망을 치면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집을 도망쳐서 꿈의 도시, 환락의 도시인 로마로 걸음을 향했던 것입니다.

그곳으로 갈때 오네시모는 아마 큰 꿈에 부풀어있었을 것입니다. 주머니에 돈도 두둑하고, 더구나 주인의 간섭도 없고, 오히려 돈만 있으면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그리면서 로마에 도착을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으로 환락에 빠져 들기 시작했습니다.

술이 있고, 여자가 있고, 도박이 있고, 오네시모는 한동안 이런 것으로 만족한 인생을 사는 듯 했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그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이 떨어지면서부터였습니다.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흥겹고 만족하리라고만 상상했던 환락과 자유의 생활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고독과 불안과 허무가 그의 가슴에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주인집을 도망치면서까지 그토록 추구해왔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오네시모가 어떠한 연유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났을 때, 바울은 옥중에 있었습니다. 감옥은 자유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인집에 갇혀있음으로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자유를 찾아나섰던 오네시모 자신은 거리를 활보하면서도 참 자유를 얻지 못했는데, 자신이 만난 이 사람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참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네시모에게는 무엇보다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오네시모와 바울은 특별한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심혈을 기울여 오네시모의 신앙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바울의 도움으로 오네시모는 어느새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자신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의 장래를 두고 생각할 때, 아직 오네시모에게는 바로 잡지 못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했을 때 주인의 돈을 훔치고 달아난 죄를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회개가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고 오네시모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바로잡는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고 오네시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일은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 당시의 풍속대로 하자면 도망친 노예는 주인에게 붙잡히는 순간 주인에게 맞아 죽습니다. 혹은 불구의 몸이 되기도 하고 야생동물의 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오네시모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바로 잡아 하나님과 사람앞에 회개의 열매를 간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옛주인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이 눈물어린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바울도 믿음의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빌레몬의 집에서 오네시모가 맞아 죽을지 모릅니다. 물론 바울은 빌레몬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를 때리거나, 동물의 밥이 되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주인집으로 돌아가는 오네시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기고 편에 오네시모의 주인이요, 복음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눈물겨운 호소를 담은 이 편지를 보내면서 비록 잘못을 저지르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도망을 쳤던 오네시모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바울은 제일먼저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4-7절까지의 내용이 바울의 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 주었던 것은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연합군은 뚜렷한 승리의 전가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연합군은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중에는 기도를 어떤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수단방법을 다 사용해서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두손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어, 차를 운전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고 칩시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그 처음가는 길을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준비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리 그 지역에 대한 지도를 준비하고, 또 대강 가는 길을 미리 익혀둘 것입니다. 어디를 어떻게 가면 뭐가 있고 그 곳이 나타나면 좌회전을 해서 몇미터쯤 가다가 삼거리가 나오면 그곳에서 이번엔 우회전을 하고…등등 그 길을 익혀둡니다. 만약 그것을 다 익힐 수 없다면 지도를 펴보고 수시로 자신이 가는 길을 확인하면서 가면 쉽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길을 가는데 지도는 차 안에 준비해두고도 그 지도를 보지 않고, 또 길도 미리 익혀 두지 않고 이리갔다가 저리갔다가 온통사방을 다 헤매다가 막다른 골목길에 접어들어서야 '아차'하고 지도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옆에서 함께 동승하고 있는 사람이 볼 때,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도 바로 그런의미입니다. 기도란 차를 몰고가다가 막다른 골목길에 접어들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펼쳐보는 지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나기에 앞서 길을 안내 받기 위해 펼치는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은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성경에 기도의 사람들이 참 많이 등장을 합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와 홀로 맞서서 기도의 대결을 벌였던 엘리야 선지자를 아십니까? 죽음의 문턱에서 생명을 걸고 처절하게 기도했던 히스기야를 아십니까? 굶주린 사자의 입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다니엘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 모두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많은 기도의 사람들 중에 특히 느헤미야의 기도를 자주 생각합니다. 느헤미야도 문제에 부딪혔을 때 제일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닥사스다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자기 민족이 사는 예루살렘성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찢고 울면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루살렘에 다시 훼파되어진 성을 중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실 아닥사스다왕의 총애를 받는 느헤미야의 위치쯤이면 충분히 아닥사스다왕에게 찾아가서 부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닥사스다왕도 느헤미야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어집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사람이 해결하고,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해야 된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 말은 틀린말입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빌레몬은 바울과 동역자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사도의 권위로 빌레몬에게 근엄하게 말을 해도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권위있는 말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로 이 문제의 해결책을 간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떠하신지요? 기도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몰래 숨겨두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제가 어렸을 때 놀이라고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가 고작이었습니다. 특히 딱지치기를 좋아했지만 이 당시 종이가 귀한터라 딱지를 많이 만들수가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한번은 아주 빳빳한 종이를 가지고서 딱지를 크게 만든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종이 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종이로 딱지를 만들어도 흐물흐물해서 두겹세겹 겹쳐서 딱지를 만들었는데 이 종이는 얼마나 빳빳한지 한번만 접어도 딱지가 빳빳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이로 딱지를 크게 만들고서 "언젠가 딱지치기를 하다가 위급할때 이 딱지로 동네 아이들의 딱지를 다 따먹어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딱지를 칠때는 형편없는 딱지로 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 먹기 위해서 저만의 비밀장소에다 몰래 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리한 장마가 계속되는 동안 동네아이들과 딱지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장마가 그치자 동네아이들이 딱지를 가지고 나와 딱지치기를 합니다. 저도 딱지치기를 하다가 그날따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저는 안심을 했습니다. 그 빳빳한 딱지를 가지고 오면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숨겨놓은 곳에 가보니 그 딱지가 장마로 인해 눅눅하게 되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어려고 숨겨두었다가 아예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쓸모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으려고 고이 간직해두면 결정적인 순간이 와도 그것을 우리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언제나 모든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기도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남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먼저 4절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쉬지않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서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계시는지요? 어느 가정에 교회에 다니는 부인이 예수를 더 잘 믿어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를 않았을 뿐 아니라 세상친구들과 어울려서 허구한날 술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어느날 남편이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다시피 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부인은 속이 상해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교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란 목사님의 설교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남편 옆에 앉아서 이러한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제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부인은 억지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감사를 하려고 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정말로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나름대로 감사할 조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지!, 저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미시고도 용케 집을 찾아오니 감사하지, 어디 그뿐인가? 주일이면 자기가 집을 봐준다며 교회에 보내주지, 거기다가 미안하다고 헌금까지 주니까 그게 어디야? 다 감사한일이지!"

그러면서 부인이 감사 소리를 연발하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잠시 후에 남편이 목이 말라 눈을 떴는데 틀림없이 찡그리고 앉아 있어야 할 아내가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아내에게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사실대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내가 다음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줄께"라고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이 있으신지요? 여러분이 처해있는 지금의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지요? 하나님만 생각하면 그저 감사하지 않을래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을 소유하고 계시는지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감사하고 있는 이유는 빌레몬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빌레몬에게 있는 사랑과 믿음때문에 바울은 더욱 깊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5-7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재산은 사랑과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성도를 향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은 사랑으로 완성이 되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첫 출발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종착역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자라고 있습니까?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밖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형제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이 입증되고 있습니까?

우리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빌레몬의 경우도 이제 이 시험을 받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축내고, 노예로서 자기에게 말할수 없는 상처를 입힌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용서해야할 것인지는 분명 빌레몬에게 주어진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믿음을 사랑으로 나타내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 사랑으로 인해 다른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기쁨과 위로를 가져다줍니까?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톤이 죽은 지 삼년 후에 아프리카 대륙을 방문하게 된 설교가 헨리 드러몬드는 그가 만나는 대륙의 원주민들 특히 리빙스턴을 가까이 했던 이들에게 리빙스턴의 평소의 인상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의 입술에서 한 가지 일치된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그 검은 대륙을 복음화할 수 있었던 비밀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사랑을 표현한다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을 표현한다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큰 기쁨과 위로를 여러분을 통해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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