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호소
3빌레몬서1:8-14절 본문:빌레몬서 1:8-14절 제목:바울의 호소
구약 아가서 8장 6절에 보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신약 고전 13장 1절에서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힘이 그 어떤 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주라"는 편지를 쓰면서 사도적 권위로 명령하지 않고 사랑으로 호소한다고 말합니다. 8절을 다시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지금 빌레몬에게 부탁하려는 일, 즉 오네시모를 받아달라는 부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도덕적인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위로서 확신있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령보다는 차라리 사랑으로 간구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우리의 자녀들이나 혹은 우리 이웃의 잘못을 볼때, 그것을 말로서 바로 잡아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스승은 말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도 말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가운데 '나인티 쓰리'라는 책에 아주 인상깊은 내용이 나옵니다. 불란서 혁명직후, 숲을 지나가던 병사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어머니와 세 아이들을 발견했습니다. 굶주림때문에 거의 죽게 된 이 모자(母子)들을 바라보다가 상사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빵 한덩이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아이의 엄마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빵을 받아들자 지체없이 떡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이들에게 분배를 했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젊은 병사가 "저 여자는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상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아닐세, 그게 어머니의 사랑이라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프리카 원주민을 감동시킨 것은 리빙스턴의 훌륭한 웅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나아온 것도 그 분의 말씀이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말없이 걸어가신 그분의 사랑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유명한 설교가는 "성도가 올바른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으로 말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현대 교회들이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교회를 비판하고 책망하는 소리들이 높아갑니다. 그런데 올바른 소리가 많아질수록 문제는 더 심각지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속에 사랑이 없고 올바른 말만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각당의 대변인들이 아주 조그마한 사건까지도 논평을 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모두가 올바른 소리입니다. 틀린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무엇하나 국민들이 만족할만한 일은 하나도 이루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속에 사랑이 없고 올바른 주장만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소리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올바른 소리보다 중요한 것은 참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그 권위를 이용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도록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위로서 사람을 억압하고, 누름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눈물어린 사랑의 호소를 빌레몬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눈물어린 호소를 통해 바울의 뜨거운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자 되어"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이많은 나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주석에 의하면 이 당시 바울의 나이가 약 55세 가량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나이 55세면 아직 청춘입니다. 55세 되신 분 노인 취급했다가는 큰일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사회시간에 북한에서는 '60세를 청춘'이라 하고 '90세를 환갑'이라 한다고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55세정도면 요즘 우스갯 소리로 '젊은오빠'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55세정도면 이제 인생의 마지막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었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시점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아주 나이 많은 사람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백발이 된 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젊은 사람에게 부탁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원래 나이가 들면 고정관념이 뚜렷해집니다. 남과 타협을 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존심이 강해지기 때문에 젊은 사람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더욱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머리를 숙였습니다. 눈물로 호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집에서 돈을 훔쳐 도망을 쳤고, 로마 환락의 거리에서 흥청망청 세월을 보내다가 예수 믿고 변화받은 노예 오네시모때문에 그 위대한 대 사도 바울이 눈물로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과거에는 주인의 집에 메인 노예였을 뿐아니라 돈을 훔친 도둑이었고, 주인집을 뛰쳐나간 도망자였고, 로마의 거리에서 인생을 허비한 탕자였지만 이제는 그가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때 오네시모를 만나 복음을 전하였고 오네시모가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갇힌 중에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호소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호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연말에 저희집에 도둑이 들어온 사건을 제가 설교시간에 조금 말씀을 드린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 그 아이들 부모에게 모두 연락을 취해서 며칠간 아이들을 정신교육시키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교회 건축하는 현장에 나오게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체험하게 하고 또 제가 읽고 감동을 받은 책을 주어서 감상문을 쓰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는 기미가 보여서 용서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그 아이들 중에 한 아버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한눈에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몸도 메마른 체구의 볼품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찾아와서 아무개 아버지라고 소개를 하시면서 자신이 얼마전에 위암수술을 받고 건강이 좋지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면서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용서해주어서 고맙다고 연신 머리를 숙여 감사해 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버지의 이 마음을 그녀석이 얼마나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비록 자식이 남의 집에서 도둑질을 했어도 자식이기에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 이것은 사도 바울의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이것은 죄 많은 우리인생들을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과거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기전, 오네시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왔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종이였듯이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의 집에서 돈을 훔쳤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돈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오네시모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의 간섭이 싫어서 주인집을 도망쳤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서 하나님의 집을 뛰쳐나갔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의 거리에서 자신의 육신적 쾌락을 추구하며 흥청망청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전에 우리도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육신의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구나 내 삶의 목표나 방향을 상실한채, 세상에서 흥청망청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우리가 오네시모보다 나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마침내 우리의 그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박고도 자신의 죄를 알지 못했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주인집에 돌아가는 오네시모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빌레몬에게 말하였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이 말은 참으로 흥미있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유익하다'란 뜻입니다. 이 유익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오네시모가 전에는 무익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름은 유익했지만 실제로는 무익한 삶을 살았던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모두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바다 (海)에 땅 (坤)자를 씁니다. 아마 저의 부모님께서 제 이름을 지으실때 바다와 땅에서 즉 세상에서 유익한 사람이 되라고 해서 지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집 아이 이름을 睿鍾이라고 지은 이유는 물론 한자는 좀 다른 의미이지만 훗날 '예수님의 종'이 되라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사람들마다 그 이름에 담긴 깊은 뜻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이름과 같이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지을 때 심사숙고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계시는지요?
오네시모란 이름은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그는 무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이름대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이렇게 자신의 이름대로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서 변화되어졌을 때, 그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났을 때, 비로소 유익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무익한 인생들이었습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악하고 교만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무익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과 유익한 존재로서 삶을 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참으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변화되어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남으로서 주인의 가슴에 상처를 입힌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바울에게 충성스러운 복음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리켜서 "저는 나의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네시모는 자기의 옛주인인 빌레몬을 향해서도 새로운 마음으로 복종하려는 진실한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정말 유익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 구했을 뿐아니라 자신이 상처를 입힌 주인에게도 용서를 구하기 위해 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나아와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는 회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입술로 잘못을 고백하면 그것으로 회개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회개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종종 우리의 잘못된 과거의 삶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나 결단이 없이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한 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아프리카 콩고의 웸바라는 지역에 교회사에 길이 기억되어질 놀라운 부흥이 있었습니다. 한 마을 전체가 다 주님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그 마을의 선교사 때문도 아니었고, 성경공부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 놀라운 부흥은 두 여인과 한 남자 성도의 진실한 회개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기도하는 가운데 이 두 여인의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인들은 성령께 깊이 붙들려 자기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여인은 이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하신 분인데 교회에 바쳐진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성미를 한 자루 갖다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중에 그 생각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것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성도들 앞에 고백합니다.
"사실 이것은 교회에 쓰여져야 할 것인데 내가 임의로 써버렸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남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집의 계란 한개를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가져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 이어서 남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저는 서점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래전에 어떤 선교사와 교제를 하면서 선교사의 집에 갔습니다. 돌아오면서 선교사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 한권을 그냥 가지고 나왔습니다. 내가 그것을 다시 돌려 드리며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삶을 바로 잡으려는 이 세사람의 진지한 고백때문에 콩고의 웸바 마을에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1907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한사람이 유난히도 눈물을 흘리며 통회자복합니다. 그러다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도둑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을 틈타 여러분 주머니를 털려고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강한 힘이 나를 이끌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순간 나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으면 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나왔습니다. 이제 나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기를 원합니다. 나를 진정으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도둑의 고백으로 삽시간에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이 모두 회개하면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꾸 우리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까?. 내 허물을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내 허물입니다" "이것이 나의 약점입니다"라고 오히려 세상앞에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유익한 삶을 사는 첫걸음입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이런 오네시모를 그냥 둘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어린 눈물의 호소를 빌레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겠습니다.
사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 사람을 내가 계속 데리고 있겠다고 말해도 빌레몬은 그렇게 하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보다 빌레몬이 자의로 그렇게 해주기를 바울은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 보내면서 빌레몬이 그를 다시 자기에게로 보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강압적으로 하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는 봉사나 헌신도 모두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은 것 억지로 구걸하듯이 맡기는 것도 옳지 않을 뿐 아니라 기왕에 봉사하는 것, 헌신하는 것 자발적으로, 기쁜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억지로 하는 봉사, 억지로 하는 헌신, 억지로 하는 구제, 억지로 하는 헌금,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아야할 때입니다. 나는 스스로 하기를 원하고 있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할 시기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동참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눈물어린 호소를 통해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웅변보다 더 호소력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바울의 사랑이 담긴 이 호소가 여러분의 삶에도 변화를 주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