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바울의 동역자들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4:51

바울의 동역자들

 

5빌레몬서1:20-25절

본문:빌레몬서 1:20-25절

제목:바울의 동역자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광고를 했듯이 이제 내일이면 건축하고 있는 새 성전으로 옮기게 됩니다.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당분간은 여러모양으로 불편한점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위한 수고'라 생각한다면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새로 옮기는 장소에서 당분간 불편하게 예배를 드린다할찌라도 그것을 정말 불편하게 여길 분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3년간 우리교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모두가 함께 느끼고 있는 기쁨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저께 금요기도회를 막 시작하려는데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날 수화교실에 대한 광고를 국민일보에 끼웠는데 그것을 보고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수화교실에 대한 광고를 여러번 보았고, 그래서 참여를 하고 싶은데 한번도 이런 일에 참여를 해본 일이 없어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과 개인적으로 우리교회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마 그 분이 이곳으로 이사를 오실때, 온유한 교회를 아는 분을 통해 온유한 교회에 등록해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교회를 등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온유한 교회가 주위에 좋은 소문이 퍼져있음을 얘기하셨습니다.

굳이 제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잘 성장하고 있고 또 말씀을 실제 삶속에서 실천하면서 살아보려고 하는 성도여러분의 노력들이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굳게 확신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위에 좋은 소문과 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속에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된 것은 목회자 한사람만의 노력으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이 수고하고, 헌신하여서 이런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저는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그 주위에는 참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충성이 바울을 바울되게 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을 항상 기억하고 그들에게 문안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비록 노예였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형제가 되었으므로 사랑으로 용납하고 받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노예제도의 폐단이나 노예제도의 단점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허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그래서 두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을 보니까 바울을 가리켜서 '조용한 개혁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회의 나쁜제도나 악한 영향을 미칠것에 대해 '제도를 바꿉시다' 혹은 '법을 고칩시다'라고 목소리를 높힙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꾸어도 그 속에서 만족할만한 대안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변화는 '소리없는 사랑의 증거'로 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난주 최대의 사건이었다면 당연히 북한 노동당 비서인 '황장엽'비서가 망명을 요청한 일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흥미진진합니다. 황장엽비서가 망명하는데는 '중국'이라는 가장 큰 걸림돌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뭏튼 그 분이 한국에 오는데는 중국도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올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망명을 요청하게 된 이유가 여러가지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남북의 통일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북한에서 이루지 못한 평화통일의 꿈을 남한에서 펼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뉴스시간에 대부분이 이분에 대해 보도를 하고 우리민족의 통일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시 통일문제가 활발하게 논의가 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처음 망명을 요청했을 때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황장엽비서의 망명은 북한사회에 아주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인해 북한의 붕괴는 과속화 되어질 것이라고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신문에 다시 이러한 사실을 정정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황장엽 비서'의 망명은 분명 북한지도층에 조그마한 파장을 가져올지는 몰라도 북한전체의 분위기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북한은 이 사건이 있은 직후 북한 중앙뉴스를 통해서 '이것은 남한이 납치한 사건이었다'고 보도를 했는데, 이 뉴스는 외신용이므로 북한 주민은 아예 이 사건을 알지 못할 것이고 설령 알았다 할지라도 뉴스의 보도대로 남한이 납치한 사건으로 생각해버리므로 북한 사회 전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을 것이라는 기사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황장엽비서가 망명을 요청한 것은 분명 엄청난 일이지만 그것으로 남북관계에 진정한 변화와 만족할만한 어떤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도를 바꾸고 법을 고침으로 좋은 결과를 나을 수 있었다면 바울도 노예제도를 폐지하라고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노예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이 두 사람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종과 노예의 관계를 허물고, 오히려 그리스도안에서 서로의 허물과 단점을 용서해주는 형제의 관계로서 만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그렇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복음에서 비롯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시작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생활할 때 남편이나 아내를 보면 고쳐야 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자녀를 보아도 이것도 잘못되었고, 저것도 잘못되었고, 그래서 바로 잡아주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다 대고 "이것도 잘못됐고, 저것도 잘못됐고"하면서 말하면 여러분의 남편 혹은 여러분의 아내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잠깐동안은 자신의 행동을 고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개혁되어지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과 같이 조용한 사랑의 증거로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합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이 말씀은 "빌레몬이여 당신이 내 요청을 받아 주어서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닌 형제로 영접함으로 내 마음에 기쁨을 얻게 하고 또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세 평안해 질 수 있도록 내 부탁을 들어 주시오"라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간구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부탁한 것 이상으로 빌레몬이 사랑을 보여 줄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합니다.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이 말 후에 바울은 조만간에 빌레몬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만났을 때, 모든 일을 사랑으로 처리한 아름다운 간증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22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식기를 바라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으로 용서함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어떤 아름다운 사랑의 간증내용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다윗의 원수였던 몰락한 사울왕가에 손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므비보셋이었습니다. 원수의 집안에 있었던 이 므비보셋을 찾아내기 위해 다윗은 들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자신의 가슴에 칼과 창을 들이대던 사울왕가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황무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버림받고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은 마침내 들을 헤매다가 이 사람을 찾았습니다. 원수의 자손이니 죽일 것이 당연한데 죽이기는 커녕 그에게 자유함을 베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 상에 와서 이제부터는 같이 먹고 같이 살자." 므리보셋은 너무나 감격해서 다윗왕앞에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죽어 마땅할 이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간증내용이 있으신지요?

이제 바울은 이 편지의 결론부분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바울 자신의 동역자들에게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들은 어쩌면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의 배후에는 이름없고 빛도 없는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과 봉사가 있었기에 위대한 바울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바울 자신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언제나 개인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더 이상 개인적인 행동이나 개인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 중 한 형제로서,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는 홀로 태어나지만 태어난 후에 가족중의 한 구성원이 되어서 함께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자마자 이 큰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 속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은 성도간에 연합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려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서로가 연합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교회의 연합을 깨치는 일에 대해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린도 교회는 연합하지 못한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자들은 동역자라는 사실을 여러차례 강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여러명의 동역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에바브라입니다. 에바브라가 누구입니까? 빌립보서를 2장 25절부터 30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에바브라는 자신의 생명보다 복음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사역의 최첨병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던 바울을 도웁니다. 돕되 자신의 생명을 마쳐서 돕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요? 아니 목회자와 성도사이가 이런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의 관계가 바울과 에바브로의 관계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동역자의식을 가지고 서로의 생명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를 우리모두 기도해야겠습니다.

두번째는 '마가'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여기서 말하는 '마가'는 '마가 요한'을 말합니다. 마가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성천하신 후, 제자들이 주로 모였던 곳은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중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조를 이루어 전도여행을 할때 마가를 데리고 다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하는 동안 마가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도여행 도중에 마가가 그 대열에서 무단이탈한 사건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불성실한 마가를 계속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고 바나바는 마가에게 기회를 다시 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왜 마가가 중도에 무단이탈을 했을까?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쩌면 마가가 부자집이라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하는 의지가 약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사람과 협력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로마에서 편지를 쓰는 빌레몬서에 마가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중간의 자세한 사항은 잘 알수 없지만 그 동안에 마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실수로 바울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마가가 나중에 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변화에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사실 젊은이들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하나님의 일에 유익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서를 쓰면서 마가를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마가의 변화된 모습이 바울의 전도에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회자로서 가장 기쁠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전했더니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날때, 어떻게 하든지 그 말씀을 삶에 적용시켜보려고 애쓰는 성도들의 모습이 보여질 때 목회자는 모든 큰 힘과 용기를 얻고 또 진정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세번째는 '아리스다고' 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아리스다고 라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 접하는 분도 계실것입니다. 사실 아리스다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리스다고라는 이름이 성경에 그 기록을 많이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아리스다고가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잡혀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된 장면이 소개되어 있고 20장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함께 동행을 했다는 기록과 27장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고생을 할때 그 배에 함께 동행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바울이 고난받는 현장에, 바울이 외로움을 느꼈던 시간에, 바울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그곳에 아리스다고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 아리스다고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리스다고는 항상 바울의 곁에 있음으로 바울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교회에도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소망이 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눈으로 드러나는 업적을 이룬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숨어서 바울에게 용기와 격려와 위로를 주었듯이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에 아리스다고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굳이 연쇄기도의 명단을 적어서 "성전건축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라고 명단을 붙이기 이전에 조용히 혼자와서 아무도 보지않아도 교회와 교역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리를 지키는 아리스다고가 우리교회에도 있습니까?

네번째는 '누가'입니다. 누가의 직업이 의사라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바울에게는 병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병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이 병을 위해서 세번씩이나 기도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병을 앓던 바울에게 누가라는 의사가 곁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까요?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글을 쓰고 있는데 그 곳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모든 사람이 외로운 사도를 버리고 뿔뿔히 도망갈 때도 누가는 끝까지 바울의 병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를 도우며 함께 복음의 사역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밭에서 일하는 일군들에게 하나님은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이 없이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지식이 있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를 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의 건강을 돌보며 끝까지 바울의 사역에 동참을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모여있습니다. 그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도간의 연합이 필요하며 함께 동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굳게 기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서로 연합하여 동역하는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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