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레위기요약강해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4:55

레위기요약강해

 

제 목 :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향기

본 문 : 레 1:9-17

요 절 : (레1:13)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전 행위를 바르게 진행하도록 하는 법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제사장을 위한 지침서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과 맺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 즉 거룩과 성결의 구체적인 행위를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배와 관심 밖으로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레위기를 통한 희생 제물로 드르는 예전에 대한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속죄와 봉헌이라는 주제의 실천이었다.

이 가르침은 신약과 근본적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가 드려야 할 모든 희생의 예전을 대신해 주셨다는 소중한 진리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의 본문 9,13,17절의 말씀에 나타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기버 받으시는 완전한 봉헌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엡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 가장 향기로운 제물로서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을 아버지께 예물로 바침은 그 얼마나 향기로운 일인가! “(엡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번제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완벽한 것이 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보시고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스럽게 해드릴 것을 결단하셨다.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그의 보좌에서 내려와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기쁘도소리다”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조차 순종하고 받아들이셨을 때, 정원에 만발한 꽃들이 우리에게 향기롭듯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향기로웠다. 더 이상 향기를 내뿜는 제물이 이 땅 위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가 최대의 향기를 내는 제물로 하나님을 기브시게 해드렸기 때문이다.

2. 십자가 위의 재물의 향기를 받으신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은 물에 씻은 제물을 제단 위에 놓고 불살라야 했던 번제를 드리고 있다. 그 제물이 타는 동안 거기서 나온 향기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흠 없고 완전하게 바쳐지는 제물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제물은 찾을 길이 없다. 십자가 위에 찟기신 그 귀한 몸돠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그 희생 제사는 모든 형식과 예전을 초월한 가장 고귀한 향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관심은 지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은총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히 나타났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가운데 이 은총은 영원히 펼쳐나가게 된다.

3. 오늘 우리도 값진 헌신을 통해 향기로운 제물을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성한 헌신 또한 향기로우며 값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나를 바칠 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우리 삶 전체를 맡길 때, 우리가 살아 있는 희생양으로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우리의 행동을 만족시켜 주신다. 언제나 이 사실을 믿으로. 우리들은 전율을 못 느끼고 찬란한 광채를 못 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치는 것을 받으시며 오순절 성령의 불로 우리 희생에 왕관을 씌워주실 것을 믿으라. 오늘 누가 하나님께 복종하여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는 제물이 되려는가? 오닉 결단만이 요구되는 순간 앞에 우리는 서 있다.

적용.

1) 하나님 앞에 나와 드리는 예배 행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향기를 드리기 위한 예배인가? 아니면 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함인가?

2) 분문에서는 여호와께 향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절차를 밟으며 제물을 드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예배와 비교해 보자.

3) 시???자가 위에서 완전한 희생과 제물로 우리 주님이 드려지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는 어떤 실체들이 되었을 것인지 생각해 보면서 그 은혜 앞에 머리 숙이자.

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를 풍기는 값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 지 이제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제 목 :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으라

본 문 : 레 2:1-2

요 절 : (레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소제는 곡식을 제물로하여 드리는 예전이었다. 이것은 다음 네 가지 형태로 분류되었다. 곡식 가루로 드리는 소제, 화덕에 구운 것으로 드리는 소제, 돌판에 부친 것으로 드리는 소제, 솥에 삶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것으로 소제의 가장 기본적인 곡식 가루로 드리는 제사다. 곡식 제물로 드린 이 예전은 언제나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제사의 의미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삶을 드리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와 관련된 제사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제사는 많은 제사 중 유일하게 피 없이 드리는 것이었다.

이 제사의 모형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며 그것은 충성과 감사를 상징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하신 고귀한 품성을 예표한 것이었다.

1. 고운 가루를 원하시는 하나님.

곡식 가루를 가지고 드린 소제는 거칠게 갈아지거나 매끄럽지 않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모든 가루는 고르고 부드러워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완벽한 고운 가루의 제물을 원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은총과 관대한 인격은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귀한 예전의 주역이었다. 인성을 지닌 그 몸에서 그토록 고운 모습을 보여주심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격체를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성도들이 언제나 곱고 부드러운 인격체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전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살육자들의 손에 끌려가도 한 번도 울부짖지 앟고 고이 침묵을 지키셨던 그 고매한 인격의 품성은 바로 우리 앞에 보여주신 고운 가루의 제물이다.

2. 성령의 기름으로 반죽을 하라.

고운 가루는 기름으로 반죽했다. 하나님 앞에 바쳐질 수 있는 고운 인격과 지식과 교양이 가득하더라도 성령의 기름으로 젹셔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인간으로 머무를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즉 성령님이 우리의 은밀한 영적생활 속으로 다가오셔야 하고 하나님 사업을 위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입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님이 우선하시지 않는 크시스천의 일 속에서는 진정한 가치성과 영원성이 있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일이 발생할 수도 없다. 기름으로 반죽되어질 때 드디어 제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반죽되어야 그 형태와 내용이 달라지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있다.

3. 단 위에 으른 기념물이 되게 하라.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에게 가져온 예물은 부분적으로 기념물을 취해 단 위에 올려 그것이 불살라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냄새를 풀겨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의 기념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물”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인간의 편에서는 “정성의 표”로 이름할 수 있다. 오늘 예배 현장에서 보면 자신의 예물이 단 위에 오르고, 거기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바라는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인가? 아니면 예물을 드리는 인간의 심성을 충족시키는 행위인가?

우리 삶의 모든 행위들이 선별된 기념물이 될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인가? 분명히 가능하다. 하나님을 향하여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기고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 찬 사고와 행동과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향기를 널리 뿜을 수 있다. 단 위에 오를 수 있는 기념물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대열 속으로 늘 전진해 나아갈 수 있다.

적용

1) 우리는 하나님이 진정 원하고 반기시는 제물로서의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2) 자신의 거친 품성과 죄성을 모두 무너뜨린 부드럽고 고운 밀가루와 같은 순수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는가?

3) 하나님의 제물로 나와 있는 자신은 성령의 기름으로 반죽되어 실체는 감추어지고 오직 성령님이 주관하는 실존이 되고 있는가?

4) 내 신앙의 어느 부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념물이 되어 제단 위에 오를 수 있는가?

제 목 : 여호와를 뵙게 하는 화목제

본 문 : 레 3:1-5

요 절 : (레3: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화목제의 “셀렘”이라는 어휘는 “평화” 또는 “온전함”을 의미하는 “샬롬”에서 유래된 말이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 사이에 진교와 화평을 목적으로 드리는 예전이다. 이 예전은 세 가지로 분류되었는데 그것은 구원과 주신 복에 응답하는 감사제, 서원의 예물로 드리는 서원제,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드리는 낙헌제 등이었다. 이 제사는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바쳐지는 부분과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제물로 분류된 유일한 제사였다. 이때의 제물은 흠이 없는 소와 양과 염소였다.

이 예전이 오늘날에도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아무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친교와 화평을 위해 친히 화목제의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점이다. “(롬5: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화목제의 희생 제물이 되었기에 오늘의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할 수 있는 친교와 화평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1. 감격과 기쁨을 안겨준 화목 제사.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제물로 함께 먹으면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된 잔치의 현장에 자신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도 모른 채 성도의 신분을 지키ㅣ고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 우리는 한때 멀리 사악한 곳으로 떨어져 있던 신분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지금 가까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상에 둘러앉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멀리 떠나 있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려진 화목제 이후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눅15:24) 이 냬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우리는 누구의 공로로 오늘의 이 영광을 안게 되었으며 이 감격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는가? 누가 이 정엄한 역사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어주셨는가? 다시 그 주인공을 찾아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실로 측량할 수 없는 친교와 평화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성립된 것이다. 그것은 오직 화목제의 희생 제물이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의로운 몸들이 되었으며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 다 저주는 은총으로, 원거리는 근거리로, 천재는 환대로 바뀌게 된다. 과거는 영원히 예수님의 피에 묻혀버리며, 우리 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맑은 하늘이 존재한다. 평화의 그림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에덴이 다가온다.

3. 우리에게는 평화의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를 위하여 드려진 화목제는 영원하다. 평화의 하나님이 우리 세계의 중심이 되어 주신다. 이 낮은 세상을 휩쓰는 분노와 투쟁의 폭풍우가 아무리 억세더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화의 마당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의 파수꾼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방해물로부터 보호하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평화롭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완벽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의 공급자가 되신다.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감사의 근원이 되어주신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신령한 눈을 고착시킨다면 평화의 강물이 넘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 성도들과 아름다운 가족의 친교를 누리면서 감사와 찬송의 물결이 넘치는 삶을 살 것이다.

적용

1) 화목 제사의 내용을 좀더 상세하게 살펴본다. 그리고 그 화목제의 깊은 의미를 명상하고 그 제사가 주님의 사건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 알자.

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어떤 항목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없었는지 점검해 보자.

3) 인간이 중심이 된 평화와 하나님이 중심이 된 평화의 차이점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헤아려 보자.

4)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저라고 부르면서 그 평화를 경험하고 있는지 자신의 신앙생활을 살펴보자.

제 목 : 죄로 얼룩진 몸들

본 문 : 레 4:1-12

요 절 : (레 4:2)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볌하였으되

속죄제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다.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과,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 백성의 지도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과 일반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그 제사의 내용과 형태는 동일했다. 본문에 나타난 속죄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서 예전을 집전하고 있었던 제사장들이 실수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경우에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성명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어느 특정 세계의 죄를 구분하여 메시지를 탖는 데 있지 않고, 주구나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해 인간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지 듣는 데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현명하다.

1. 과녁에서 빗나가지 말라.

죄란 무엇인가? 교회의 여러 신조에서는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들을 모두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죄의 정확한 뜻은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근복적인 뜻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즉 “죄”라는 어휘는 본래 “과녁에서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양심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 양심은 우리 죄들을 용서해 주거나 사정을 참작해 줄 수도 있으며, 적절한 계도가 필요한 것들을 탐지해 내는 데 실패할 수도 있고, 습관이나 감정에 의해 잘못 인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경우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시각으로는 문제되지 않을 수 있는 사연들이 하나님의 시가에서 볼 때 심각한 잘못들이 적지 않다. 인간은 그것의 죄악에 대해 깨닫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않으면서 저지를 수 있다.

2. 죄는 제거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에서 지적하는 것을 보자. 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간을 데리고 제단을 쌓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일지라도 단순히 실수로 범?는 사소한 죄마저 제거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한 인간의 실수는 죄로 규정되고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매한 수송아지가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고 바쳐져야 했다. 화목제와 같은 다른 제사들ㅇ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원하여 드렸지만 속죄제는 의무적으로 드리라고 강조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없는 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생명이다. 그 생명은 사망 선고를 받은 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기에 죄를 나의 몸으로부터 제거하는 길을 지체없이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에 틀림없다.

3. 아직도 죄가 보이지 않는다.

죄에 물든 몸으로 죄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죄보다 더 많은 죄가 우리 육체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 아무 죄도 범하지 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거든 초롱 불빛이 전기 불빛으로 바뀌는 것처럼 더 강한 빛이 우리 마음 속의 동기들과 의도들을 비췰 때까지 기다려 보라. 그러면 곧 얼룩과 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려진 계명들을 실제로 범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하고 무한한 기준에서 볼 때는 심히 부족할 것이다. 누가 감히 그의 마음과 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노라고 애기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가 우리에겐 언제나 죄를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죄가 우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4. 여기 속죄의 길이 있다.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알지 못하여 또는 실수로 범한 죄일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일찍이 열어놓으셨다. 속죄의 길은 어떤 길이 있는가? 그것은 본문에서 보여주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픔과 거대한 희생을 통한 속죄의 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깨끗이 씻고 용서함 받은 것이다. 이것은 단일회(單一回)적인 행사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의 피로 우리 죄를 씻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지은 죄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고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각자의 마음과 양심에 따라 성령의 고백과 성령의 용서의 사역은 우리 삶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적용.

1) 죄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 단순한 실수로 범한 죄는 문제삼지 않는 우리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3) 오늘도 모든 죄를 끊임없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제 목 : 죄의 점검과 고백, 그리고 용서

본 문 : 레 5:1-6

요 절 : (레5:5)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레5:6)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본문은 제4주제의 연속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생활 가운제서 무의식적으로 범하기 쉬운 죄들을 열거하고 있다. 허위 진술이나 성실한 진술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롯해 정결치 못한 것을 만지고 부전한 몸이 된 자, 그리고 깊은 생각 없이 함부로 맹세한 사람들은 모두 속죄제를 드려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부정한 경우에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모두 속죄제의 절차를 밟아 공식적인 용서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셨다. 누구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허물이 되는 죄를 지었으면 제사장 앞에 나아가 자복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는 철저한 율법이 백성들의 탈선을 막고 있었다.

오늘의 성도들은 오늘 본문과 같은 율법을 따르지 아니함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계속 자유 분방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오늘의 성도들이 이 율법의 정신마저 상실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바른 자세가 아님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1. 자신도 모르는 흔적을 보라.

현대인들은 지극히 바쁜 삶의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쳐다보고 창조주의 손길을 노래할 겨를이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그 깊은 진리와 접하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모두 단절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군인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돌아오면서 자기도 모르는 숨겨진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는 일과 같다. 이렇게 우리는 서두르는 생활 속에서 더러운 것을 만지는 일이 적지 않다. 생각 없이 성급하게 던지는 말들이 죄를 범한다. 나 하나의 이기심만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행동이 이웃에게 허다한 상처를 안겨준다. 이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영혼의 하얀 의복에 더러운 얼룩점들이 남는 모습들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이 부자연스럽고 우리의 기도가 늘 막힘은 무슨 연고인가 생각해 보라. 내 몸이 내가 일지 못하는 무수한 죄악에 의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 점검하라. 죄악으로 인해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지 똑바로 보라.

2. 범과하였노라고 자복하라.

인간이 제 양심을 속이고 살아가면 무서운 독소가 그 안에 성장한다. 한 인생을 무감각의 세계로, 더 나아가 파멸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세미한 암세포가 마침내는 생명 전체를 삼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늦게라도 자신의 죄가 생각나면 지체 없이 속건제를 드리면서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 고백해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제사장을 찾아 속건제의 희생물을 드리고 그로부터 용서를 받는 절차가 생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절차를 대신해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대한 희생 제사가 우뚝 솟아 있다. 우리는 지체 없이 하나님 앞에 그를 통하여 우리 죄를 자복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은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을 떠난 사람이다. 스스로의 허물과 모순과 실수를 발견하고 성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받을 수 있다.

3. 용서받는자가 되라.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갈급한 심정으로 용서를 찾는다. 용서의 필요성을 느기지 못한 사람들은 의인이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의인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단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이 기도가 필요하지 않는 성도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용서를 구하자. 먼저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여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자가 되자. 그리고 나로 인하여 상처와 피해를 받은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자. 그리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원이 되자. 용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의 하나다. 그 분의 용서가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 오늘도 우리 귀에는 쉴새 없이 이런 말씀이 들려온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적용

1) 우리는 모두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죄악의 씨앗이 우리 영혼과 육신에 파고든다.

2) 스며든 죄악에 대한 점검 없이 지속한다면 결국 죄악의 늪에 빠지게 된다.

3)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자. 그리고 죄를 용서받아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자.

제 목 : 여호와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

본 문 : 레 6:8-13

요 절 : (레6:13)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레위기에서는 5대 제사 즉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의 법규를 상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 가르침은 주로 이런 제사를 집전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규례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번제에 관한 규례를 명시하고 있다. 번제는 동물 전체를 태워 드리는 제사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특별한 명령이다. 그 이유는 제단의 불은 여호와가 내리신 불로 인식되었고, 그 보존은 제사장들의 중요한 임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모든 제단의 제물은 이 “여호와의 불”로 태워지도록 한 바 있다.

(레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이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레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레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하나님의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름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고, 그들의 성결과 계속적인 제사는 지속되었다.

1.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제단의 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계속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창조 이후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언제나 사랑의 불길을 지속시키셨다.

이스라엘의 구출을 위해 모세를 선택해 그와의 첫 만남을 가져왔던 호렙 산에서의 떨기나무 불꽃은 거룩한 불길이었으며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바알과 하나님과의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 제단에 물을 붓고 하나님의 응답을 간구할 때 “여호와의 불”이 내려왔던 사건은 하나님의 위력을 다시 체험했던 현장이었다. “(왕상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오늘도 “여호와의 불”은 우리 앞에서 언제나 타고 있다. 그 분의 사랑과 관심과 공의와 위대하심을 보이는 불은 인류의 종말이 다하도록 꺼짐없이 타오를 것이다.

2. 십자가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

하나님의 성전에서 타오르던 그 영원한 불길을 이제 우리 예배의 현장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불빛은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 불길은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어 오늘도 우리 앞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찟기고 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불길이다. 그 보혈은 새로운 차원의 “여호와의 불”로 위대한 구원의 경험을 하게 한다.

십자가 위의 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변함 없는 용서의 사역이시다. 지금도 십자가 위의 주님 앞에 속죄함을 받기 위해 바쳐진 우리의 마음과 정성은 제단의 제물이 되어 그의 보혈로 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를 내뿜게 된다. 그 십자가 위의 불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기 위해 존재한다. 길고 긴 밤중에 성전에서 타고 있던 불은 희미해지거나 기울어지지 않는 우리 구원자의 역사하심의 고결함에 대한 예표였다.

3. 성령의 사역을 통한 불길.

교회가 인간의 힘에 의해 오늘도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강림과 그의 역사에서 오늘의 교회가 지속되고 있음을 기독교의 고유한 사연이다.

오순절에 밝혀진 불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타고 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 불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세계 구석구석에 존재하고 있는 그 많은 종족에게 복음의 불이 타도록 하는 것은 오늘 “여호와의 불”의 힘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이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길이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우리 자신의 사랑과 청결함과 기도의 성실성은 그 불이 우리 가운데 지속적으로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 그 불이 꺼지지 않으면, 우리 영혼 속의 생명이 과연 영원한 것이라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항상 살아 계시며 사랑하시는 그 “여호와의 불”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적용.

1) 하나님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지성소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명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는가?

2) 여호와의 불이 어떤 경우에 나타났는지 찾아보자. 그리고 그때마다 발생된 사건들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3) 하나님이 원하셨던 대로 우리 신앙에 그리고 삶의 현장에 여호와의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지 살펴보자.

4) 십자가 위에서 타오르는 보혈의 불길과 성령강림으로 이어지는 불길이 오늘의 교회에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고하자.

제 목 : 깨끗한 자만이

본 문 : 레 7:19-21

요 절 : (레7:19)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7장에서는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 저지른 과살로 인한 손해 배상을 위해 드렸던 속건제에 대한 설명에 이어 화목제에 대한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일부는 화제로 태워드리고 일부는 제사장과 봉헌자가 먹는 것이 특징이다. 제물로 드려지는 희생의 고기들은 정결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또 하나의 사실이 첨가되어졌다. 그것은 바로 그 음식을 먹는 데 동참하는 사람들의 정결성에 대한 명령이었다.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갖는 공동체의 특권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깨끗한 자만이 이 자리에 동참할 것을 명령하셨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과 직결된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중요성은 오늘도 새롭게 우리 가슴에 와닿는다.

1. 깨끗한 사람들의 공동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신의 자녀들이 세속에 휩싸여 탈선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고결한 공동체로서 오늘을 승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사이에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화목제는 공동체의 형태와 성격과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은 실로 엄격했다. 깨끗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불결한 상태의 사람이 먹으면 그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해야 한다는 규례에서는 공동체의 순결성을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우리들은 과연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성결성을 진정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성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세속인들의 모임과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 아니 오히려 더 부패해졌다는 사실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실로 깊이 반성해야 한다.

2. 성만찬의 예전에서.

오늘의 화목제는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만찬과 성례전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공동체의 가장 핵심적인 성례전이다. 오늘의 이 귀한 예전에서도 우리는 오늘 분문에서 요구하신 “깨끗한 자”만이 함께 주의 살과 피를 받을 수 있다는 음성을 듣는다. “ (고전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전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때때로 우리 앞에 다가선 주의 살과 잔을 대할 때 깨끗한 사람으로서 동참할 수 있다면 그는 실로 복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주의 살을 먹고 그의 잔을 받으면서 오직 경배와 감사의 기도와 찬송만이 터져나올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의 주인인가! 그는 실로 측량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경지를 달리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3. 불행의 정점에 서지 말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불행한 정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내 자신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것에서 제외되어야 하고, 성막의 거룩한 경배로 들어서는 것을 중지당하는 순간이다. 인간들이 읽을 수 있는 규정에서는 자격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 양심에서 우리는 흔히 스스로 실격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면 파문된, 또는 당연히 파문을 받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얼마든지 교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기쁨을 잃어버린 것들은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불행의 정점으로 끌려가지 말자. 그곳에 이르지 않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성령의 손목을 붙잡자. 불행의 정점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나 “깨끗한 자”만이 모이는 행복의 정점으로 발길을 옮기자.

적용

1) 우리가 성도의 교제로부터 차단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우리의 과거사를 잘 살펴야 한다.

2) 나의 인위적인 노력으로 깨끗한 자로 서지 못할 때 우리의 더러운 발을 주님 앞에 내밀어 주님의 손으로 씻김을 받자.

3) 성만찬을 대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어떤 준비를 계속해야 하는지 알아 쉬지 말고 준비에 힘쓰자.

제 목 : 주님의 회막에 머물라

본 문 : 레 8:30-36

요 절 : (레8:33) 위임식이 마치는 날까지 칠 일 동안은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성별된 직책을 감수해야 할 제사장들을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전이었다. 본 장에서는 지금까지 각종 제사의 규례를 정해 지시한 후, 그 규례를 집례할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 직분에 관련된 사항들과 그 위임식을 위한 제사의 규례 등을 밝히고 있다.

오늘 본문은 7일 동안 제사장으로 공식 위임 절차를 행한 아론과 그 아들들은 밤낮으로 성막 안에 머물며 공동 식사를 하면서 성막 뜰에서 잤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7일이 지난 후 그들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 직책의 소유자로 평생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1. 새로운 회막 안에 머물라.

“너희는 회막 안에 머물고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따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7일 동안 회막 안에서 함께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이미 제사장의 성직을 위해 그들의 머리에 뿌려진 관유와 피로 새록게 선별된 몸들이었다. 그들은 8일째가 되어 제사장으로서의 의무를 위해 부름받을 때까지 성별된 음식을 먹으면서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동일하게 우리는 첫 제사장인 아론과 함께 갇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땅에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 우리는 노아가 방주 안에 있듯이 하나님의 보호 속에 머물고 있다. 어린아이가 집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있듯이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우리는 원수들의 악의와 힘이 부술 수 없는 요새와 망대와 성과 같은 그 분의 울타리 안에 있다. 우리는 대연회장 같고 밀전병과 함께 있는 성막과 같으며 강림하는 불이 있는 다락방과 같은 그 분 안에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사연인가?

2. 바깥의 유혹에 유념하라.

우리의 걸음과 경험들이 이처럼 복된 높은 곳에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영혼의 큰 원수는 우리를 우리 거할 곳으로부터 끌어내려 낮은 곳에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내 육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곳이 분명히 밖의 세계라고 판단될 때가 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무물고 있는 회막 안의 삶이 너무나 단조로움을 경험한다. 세상과 멀어진 느낌도 갖는다.

그러나 조심하라. 그것은 단순히 내 욕구 충족을 위한 충동이 아니다. 사탄의 교묘한 유혹의 일환이다. 우리의 영특한 지식과 지혜를 넘어 활동하는 사탄의 역사다. 그러므로 조심하라. 미끼는 매력적일 수 있지만 그 끝은 죽음이다. 주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가득 찬 오늘의 회막에 완전히 성숙해질 때까지 머물러 있으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과 밤과 낮으로 동행하면서 자신을 확증하라.

3. 회막 안에서 먹고 잘 수 있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세운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 아론과 그 아들들은 회막 안에서 공동 식사를하고 함께 잠을 자면서 새로운 삶과 직분에 대한 다짐을 했다. 미래의 설계를 세웠다. 세상의 헛된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일생을 바칠 삶의 방향과 내용을 점검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오늘의 우리들이 주님의 품에서 그와 함께 성만찬을 나누고 목자되신 그 분 곁에서 편히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주님이 명령하신 복음의 확산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지 구상하고 실천하는 발길은 참으로 복된다.

세상에서 힘 있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운 순간을 만나고 지탱하기 힘들 때 언제나 열려있는 주님의 회막 안으로 달려들어가 보호받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진정 가장 행복한 주님의 회막에 머무는 자가 될 것이다.

적용.

1) 성직의 수임과 그 과정은 오늘날에도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자. 오늘의 교회엔 성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다.

2) 회막 안에서 새롭게 훈련을 받은 제사장들처럼 오늘의 우리도 주님의 품안에서 필요한 말씀과 훈련을 받은 성도들이 되도록 하자.

3) 바깥 세상의 유혹이 밀려와도 요동치 않는 굳은 의지의 믿음이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자라게 하자.

4) 주님의 회막이 된 교회가 언제나 새롭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모력하자. 오늘의 회막이 즐거운 낙원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이자.

제 목 : 타인을 향한 축복을 인하여

본 문 : 레 9:22-24

요 절 : (레9: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회막 안에서의 7일 동안 제사장으로 공식 위임의 모든 절차를 끝낸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의 명령을 받는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을 위한 제사를 드린다. “(레9:8)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이어서 백성들을 위한 제사를 드린다. “(레9:15) 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 곧 백성을 위한 속죄제의 염소를 취하여 잡아 전과 같이 죄를 위하여 드리고” 여기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한 제사를 드리는 존재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도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전을 끝낸 다음 이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실 것을 손을 들어 선언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선언하는 강복이었다. 그 내용은 민수기 6장 24-27절에 잘 나타나 있다. “(민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아론이 남긴 이 축도는 바울의 축도와 함께 기독교 목회자들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1. 우리에게 다가온 복의 손길.

제사장들이 출발을 시작하였던 그 여덟째 날은 분명히 찬란한 천년 왕국의 아침을 상징한다. 현세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경험한 희망들과 기쁨들, 삶의 목적들 그리고 그 신비한 비밀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실 날이 멀지 않았으며 그때에 우리도 영광 속에서 그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

제사장들의 무리가 대제사장을 따라 회막에서 나오는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세상에 복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재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실 때 그들을 향해 강복하시는 모습으로 충분히 상징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계속되는 세대들을 향해 그 강복의 손이 여전히 뻗혀있다. 그리고 그 복을 내려주시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2. 미워하는 자에게도 축복의 손길을.

손을 들어 비는 곳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말씀을 명상하자. 아론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후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실 것을 선언하는 순간을 보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원한다는 장엄한 선언이 있었던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난 사실을 연상해 보라. 이 얼마나 장엄한 순간인가?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은 너무나 흔한 사실이다. 그러나 남을 위해 복을 비는 것은 실로 차원 높은 신앙의 행위이다. 더욱이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빈다는 것은 더욱 괴롭고 아픈 일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라. “(눅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진정 그 분 안에는 모든 모욕과 증오를 참는 온유함과 잘못된 행동을 사랑의 사역으로 갚으시는 자비가 결합되어 있다.

3.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현장을 만들라.

백성을 향하여 축복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현장에서 백성들은 감격의 소리를 지르면서 앞드렸던 오늘 말씀을 주시하라. 나를 위한 복의 성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비는 기도는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주님에게는 자신을 희생하고 무리들을 향한 축복의 손길이 가득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들도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분 안에 가득했다. 그에게서는 축복의 물줄기가 쉼없이 흐르고 있었다.

주님의 성품을 닮자! 그리고 우리 생명체에서 주변 사람들을 향한 축복의 물줄기가 끊임없이 흐르게 하자.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의 복되신 주님과 더욱 가까이 동행해야 한다. 그 분의 얼굴을 바라면서 우리는 그 분의 형상을 반영해야 된다. 그 분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하며 이 세상 것이 아닌 사랑스러움으로 빛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영광이 교회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적용.

1)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서 남을 위한 축복의 손길을 얼마나 자주 들고 있는가 반성해 보자.

2) 남을 위한 축복의 손을 들었을 때 나에게 유익한 존재들만 그 대상이 되고 있는가 확인하자.

3) 우리는 진정 나를 증오하고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까지 축복의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는지 생각해 보자.

4)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는 사연을 만들어 내는 성도들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존재들인지 점검해 보자.

제 목 : 인간의 사연을 극복한 아론

본 문 : 레 10:1-7

요 절 : (레10: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의 네 아들 중에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멸하지 않는 다른 불로 분향하자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켜 죽고 말았다. 이 두 아들은 모세와 같이 시내 산에 동라갔던 제사장이었다. “(출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의 불”로 분향하지 않고 임의대로 행동했을 때 이것은 염연히 여호와의 뜻에 위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순종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으며 처절한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엄하게 심판하신다는 것과 자신의 일꾼들은 온전하게 순종해야 함을 엄히 보여주고 있다. 많은 것을 맡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며, “(눅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지도자의 입장에 있는 자에게는 더욱 엄격한 심판이 주어진다는 말씀을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말씀이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1. 자식의 죽음 앞에 침묵을 지킨 아론.

회막 바닥에 늘어져 있는 아들의 시체를 보았을 때 아론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괴로워했다. 아버지로서 비통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죽은 두 아들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더 소중함을 익히 알고 있던 아론은 인간적으로 당연히 느껴지는 부정(父情)마저도 조용히 삼켜야 했다. 오직 그는 울음을 참고 슬픔을 견디면서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자신의 성직을 수행했다. 아론은 극기주의자가 아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들과의 관계보다 중요했으므로 눈물을 참았다.

아론의 침묵은 인간이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명시해 주는 사건이었다.

2. 하나님의 관점에서 악을 보았던 아론.

모든 법과 규칙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사람의 관점이나 생각을 넘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아론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위치와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들은 “너는 나를 거룩히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 순종은 섬김과 존경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이다. 제사장으로서 순종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준엄한 말씀을 들려주신다. “(레10: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3.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감당했던 아론.

주의 멍에를 매고 그것을 잘 감당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의무에만 충실해야 한다. 말 없이 따르는 것이 주의 잔을 마시고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이다. 아론은 자신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사장 직분임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엄숙하고 두려운 일이다. 제사장의 직분은 때에 따라 인간적인 모든 것을 무시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직분이다. 하나님을 위한 섬김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인 것이다.

현대에는 나의 일을 먼저 채우고 난 후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득한 것이 현실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슬픔 속에서도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아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는 영혼의 눈을 뜨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자.

1)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잃고 나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아론은 아들을 잃고 묵묵히 주의 사역을 감당했다. 환경에 의해 주님의 사역이 멈추어져서는 안 된다.

2) 우리는 교인들은 말만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말없이 묵묵히 주의 일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3) 우리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주님의 일이다.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자. 그리고 나의 의식주를 생각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이다.

4) 교회에서 성별된 직분을 맡은 것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서 그가 원하시는 거룩한 사역에 나를 던지는 것이다. 결코 육신적인 욕구의 충족에 있지 않다.

제 목 : 새김질과 분리된 모습

본 문 : 레 11:1-8

요 절 : (레11: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레위기의 11-15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결을 위한 규정들이 제시되고 있다. 본장에서는 육류로 먹을 수 있는 동물과 그렇지 못한 동물을 구별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의 건강한 영과 육을 짐승의 생태학적인면과 위생적인 면 등에 섬세하게 지도하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보다 더 성결한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대로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동물들은 “(신14:4)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신14: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럼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 흰 노루와 뿔 긴 사슴과 산양들 (신14:6)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동물들은 풀만 먹고 사는 초식 동물로서 깨끗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약 시대에 와서는 사도들이 목매어 죽은 것 외에는 다 먹도록 하는 내용을 결정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행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오늘 말씀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신앙과 연결하여 영적인 해석을 피?요로 한다. 그것은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을 정결한 짐승으로 분류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묵상과 분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1.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그리스도인들.

오늘 언급된 짐승들은 단순히 초장에서 배를 채우고 한가롭게 먼 산만 쳐다보고 멍하게 앉아 있는 짐승들이 아니다. 그들은 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먹은 음식을 다시 씹어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것이 더 갑진 영양이 되도록 일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먹은 자들임을 생각해 보자. 그 말씀을 일회적으로 먹고 만족해서 앉아 있다면 그곳에서 더 이상 발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거것을 따로 시간을 내서 되새겨 음미해 보아야 한다. 깊은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 삶에서 성경적인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한다. 그때 성령이 주님의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해주신다. 그럴 때 우리 영혼과 신앙의 삶은 튼튼해지지 않겠는가?

2. 분리된 모습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하나님께서 정결한 동물로서 굽이 갈라진 짐승들을 지적하신 것에는 음미해야 할 영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이 심령에 자리잡게 되면 삶의 모습은 선과 악으로 분리된다는 점이다. 다음의 말씀이 얼마나 강하게 우리의 삶에 뚜렷한 분리를 가져오는가 경청하라.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는 그리스도에게 접근을 말한다. 육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는 영적인 삶의 접근을 말한다. 천박한 사고로부터의 분리는 신령한 세계의 접근을 말한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할 때 혼과 관절과 골수가 쪼개어지며 새로운 세계의 지평선을 향해 달리게 된다.

3. 반추와 분리의 조화를 이루는 그리드도인들.

오늘 본문에서는 굽이 갈라졌지만 새김질하지 않으면 부정한 짐승이다. 그리고 새김질을 하여도 굽이 갈아지지 않으면 동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계속 반추하면서 그 진리를 음미하며 행복하게 산다면 그것 또한 한 부분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다. 반면 어둠과 혼돈과 죄악의 세계로부터 뚜렷하게 분리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되새기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들 또한 생명의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삶의 주인들이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이 말씀의 되새김과 성별된 모습의 삶을 누리는 온전한 성도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적용

1)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러나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2) 우리는 길만 나서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너무 많아 영육이 모두 함께 흡수당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분리 현상을 경험하는가?

3) 성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려면 어떤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제 목 : 가난한 자들의 용납

본 문 : 레 12:1-8

요 절 : (레12:8)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산모가 아이를 낳은 다음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던다? 출산하게된 것이 진정 죄가 되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기 위해 희생물을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가야 했던가? 출산은 죄가 아니었다. 단 산모로서 피흘린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 몸의 정결의 예식(禮式)으로 본문의 속죄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의 깊게 집중시키는 말씀은 산모가 양 한 마리를 바칠 형편이 못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제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한 점이다. 그럴 때 제사장은 그 산모의 죄를 속해 주면 그 산모는 정결케 될 수 있다는 규례다. 철통 같은 율법이었지만 가난하고 고단한 심령에게 가능한 길을 열어주었던 점이 가슴에 와닿는다.

1. 비둘기는 어린 양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제물.

속죄의 제사는 언제나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면서 진행되었던 소중한 예전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한 마리의 양을 바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비둘기를 제물로 용납하셨다. “(레5:7)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 가되 하나는 속죄 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여기서 하나님은 제물의 질을 보지 않고 예배자의 심령을 보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의 속죄 제물에 관한 규칙들은 갈보리 산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희생은 가장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에게까지 그 효력이 미친다. 누구에게든 그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법은 없다. 오히려 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물질이 넉넉하지 못하였던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양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보다 두 마리의 비둘기를 들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무리를 오늘도 원하신다.

2. 연약하여 쓰러지셨던 희생양을 보라.

손쉽게 생명을 끊어 제물로 삼을 수 있었던 비둘기를 명상해 보라. 몸부림도 고통의 함성도 지를 겨를도 없이 순간적으로 희생물이 되어버린 연약한 그 제물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가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던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나약성을 상징할 수 있다. 연약해서 쓰러지시면서 나아가 드렸던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 제사는 제사장들이 황소로 드렸던 제사와 비교할 수 없다.

문제는 희생 제물이 얼마나 많고 화려한가에 있지 않다. 누가 어떠한 믿음과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아무 것도 손에 든 것이 없이도 주님의 옷만 닿아도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깊은 신앙을 소유했던 여인이 곧바로 깨끗함을 받지 않았던가?

(마9: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마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마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3. 아기 예수와 함께 드렸던 빈약한 제물.

요셉과 마리아는 산후 40일이 되었을 때 오늘의 본문대로 정결 예식을 위해 성전으로 갔다. 그리고 주께 아기 예수를 드리는 예식을 갖기 위해 성전에 갔던 것을 읽게 된다. 이때 그들이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던 기록이 오늘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다. (눅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비록 죄가 없으신 몸이었으나 세상 죄를 담당할 몸이셨기에 그는 겸손히 속죄제에 함께해야 했었다. 그는 법이 허락하는 가장 빈약한 희생을 드렸다. 그는 부한 자의 제사의 모습이 아니라 빈약한 제물을 드리는 제사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가 비웠으므로 우리는 채워졌고, 그가 가난해졌으므로 우리는 부자가 되었다. 그가 사람이 됨으로 우리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적용.

1)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가기에 문턱이 너무 높다는 말이 들린다. 주위를 돌아보자.

2) 우리는 스스로를 비워 가난해지는 법을 배워야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복음은 풍요로운 육신의 삶보다는 청빈한 삶 속에서 더욱 빛난다.

3) 연약한 제물로 드려졌던 주님의 속죄의 제사가 영원한 희생 제물로서 우리 죄를 속해 주심을 깨닫는 신앙이 시들지 않도록 하자.

제 목 : 완전한 절망에서 소망으로

본 문 : 레 13:12-17

요 절 : (레13: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후와 풍토 조건은 여러 형태의 피부병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문둥병이라고 일컫는 악성 피부병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무서운 질병이었기에 하나님에 의해 징계받은 병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병은 신분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갖게 된 듯하다. 유다 왕 웃시야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비롯하여 “(왕하15: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엘리사의 종 게하시에 이르기까지, “(민12: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이 피부병은 보편적인 병으로 알려져 있다. “(왕하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본 장에서는 이러한 질병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장이 이 병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지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분문 말씀 12-17절에 나타난 피부병 환자는 비록 “문둥병”이라는 동일한 이름이 주어졌으나 앞부분과는 다른 피부병을 일컫고 있다. 오늘의 백색 나병과 같거나 건성 피부 습진의 증세와 같다. 온몸의 피부가 항얗고 단단하게 되었다가 얼마 후에 자연히 사라지는 병이기에 그에게는 “정하다”는 진단이 선언되었다.

1.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건강한 몸이 어느날 서서히 그 형태가 달라지면서 무서운 병이 되는 증상이 뚜렷해질 때의 공포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던 얼굴, 귀, 손, 발 등에 차츰차츰 이사이 발생되고 주변으로부터 천벌을 받은 몸이라고 지적될 때 한 인생은 가장 심한 충격과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더욱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벌을 내리신 사연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에 접하게 될 때 그에게는 어떤 소망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몇 년씩 계속되는 자신의 병이 영원히 이길 수 없던 질병이 아니라 드디어 정함 몸으로 곧 다시 희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게 될 때는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찾는 믿음이 솟아오르게 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환자들은 외모로는 살갗 전체가 하얀색으로 되어버렸으나 그토록 지독한 악성 피부염으로부터는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몸들이었다. 그들이 갖는 기쁨과 새로운 희망은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것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즉 죄로 온뭄이 얼룩진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깨끗한 자녀로 살게 되었다는 이 복음이 바로 우리에게는 거대한 희망과 기쁨이 되고 있다.

2. 내 모습 그대로 보이라.

문둥병이라는 악성 피부병을 앓던 사람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실로 가슴 아픈 모습이다. 그러나 감출 방법이 없다. 오늘 분문에 나타난 피부 질환은 전신이 하얗게 되는 독특한 모습이다. 어늘 때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변모시킬 길이 없다.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가 진단을 받아야 한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자신들이 악성 피부병보다 더 심하고 천한 죄악에 오염이 되어 있어도 모두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는 데 정신이 없다. 모두 자신의 죄악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것이 인간들의 눈앞에서만 위장을 일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하는 데 무서운 비극이 있다. 제발 하나님 앞에서만은 내 심려의 질병을 숨기지 말자. 내 영혼의 상처를 위장하지 말자. 내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지 말자. 내 모습 그대로를 보이고 깨끗한 씻음을 입자.

3. 정하다는 선언을 받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앓고 있던 이 병은 자신의 판단으로 정한 몸이 될 수 없었다. 비록 그 모습이 정상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정한 몸이라고 선언할 길이 없었다. 오직 제사장이 율법에 명시된 대로 관찰한 후에 선언한 “정한 몸”만이 정상인의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죄인 된 우리 몸이 어느 곳에서 “정한 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길이 열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열렸다. 그 분으로부터 “정한 몸”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다음 말씀을 자신과 연결지어 명상하라.

(사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적용

1) 어떤 절망도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만 받으면 세상의 어떤 절망의 모습도 물러난다.

2) 나의 모습을 감추지 말자. 나의 모습 그대로 겸손히 가지고 나아가자.

3)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자.

제 목 : 자유자가 되어 힘껏 날으라

본 문 : 레 14:1-9

요 절 : (레14:7)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13장에서처럼 나환자의 병이 치료된 것이 확인된 경우 그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식을 거치게 되었다. 하나는 본문에 나타난 정결 의식과 7일 간의 격리 다음에 8일에 정해진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드리는 정결 의식에는 두 마리 새를 가지고 한 마리는 잡아 제물로 했고 한 마리는 들판으로 날려보냈다. 이 새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영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죽임을 당한 새는 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며, 자유를 얻은 새는 하나님의 자비로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새 힘을 부여받은 생명체가 되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식이 끝난 다음에는 그 치료를 받은 사람은 가족들의 품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성소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진에서까지 쫓김을 당하였던 과거를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생기에 찬 미래에서는 자유자가 되는 감격을 가슴에 안고 살게 되었다.

1. 이 새는 바로 몸부림 치는 우리 자신이다.

자유의 몸이 되기 이전의 새를 보자. 그 새는 죽어간 동료 새를 본다. 그리고 그 동료의 피를 뒤집어 쓰고 공포의 순간을 경험해야 했다. 그 새에게 근본적으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결하지 못한 한 사람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다. 드디어 몸부림치던 공포의 순간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우리는 죄의 속박에 묶여 자유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죄는 자연의 숲에서 잡혀온 새를 가두어 놓은 새장의 빗장과 같다. 죄는 자유를 빼앗아간다. 우리는 죄악의 빗장을 풀고 자유로운 들판을 향해 날아가야 한다. 이것은 곧 죄악의 폭력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되는 해방을 말한다. 오늘 이 죄의 새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새장의 삶을 즐기는 생명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죄의 종이요, 그 종말은 사망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 것인가?

버림받았던 한 인간이 정상인의 공동체 속에 들어올 때 거기에는 매우 의미 깊은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두 마리의 새에 대한 기록이 주는 상징이 우리 마음에 와닿는다. 한 마리의 새는 흐르는 물 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 피를 흘렸다. 그리고 또 한 마리의 새는 그 피로 적심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죄인을 성결하다고 확증해 주는 피를 우리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라. 그리고 흐르는 생수를 성령의 품으로 생각해 보라.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 속의 의미를 충분히 연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문둥병자가 피 뿌림으로 정결함을 받아 추방된 곳에서 일반인들의 거주지로 들어오는 자유를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서 죄와 허물의 착고를 풀어준다. 정결함을 선언받은 분둥병자가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고 예배하는 청중들 사이에 끼게 된다. 우리 역시 거룩한 것과 섞이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간다.

3. 부활의 신비를 상상하라.

한 마리 새가 모면한 것은 결코 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주어진 은총의 산물이었다. 놓아주는 자의 은총이 있었기에 속박에서 자유자로 변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생명은 죄의 종으로 살다가 부활하신 분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 능력 안에 있다. 그 분이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하늘 나라에 올라간 것처럼 우리도 역시 들림을 받는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죄의 세력에서 다유롭게 되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유를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신비의 은총 아래 사는 몸들이다. 이제는 죽음의 새장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힘껏 날아가라. 행복하라. 하나님의 품에 둥지를 틀라. 눈을 들어 높고 위대한 것을 찾으라!

적용

1) 많은 사람들은 죄악을 즐기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고 속박임을 깨달아야 한다.

2)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 죄가 명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았는가 생각해보자. 주님께서는 죄의 종이 된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3) 우리에게 참 자유가 있는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자유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이것들을 얻을 수 있다.

제 목 : 부정한 것을 삼가라

본 문 : 레 15:1-12

요 절 : (레15:7)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본 장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정결과 성생활에 연관된 규정을 서술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은 남자가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그 정결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유출병이란 성병과 같은 것으로 피 또는 고름과 같ㅇ은 불순물을 흘리는 경우를 말한다. 당시에도 이 병은 전염성이 강한 질병으로 병자의 침상, 의자 안장, 식기까지도 불결하게 취급했다. 이러한 병을 가진 사람은 죄인 취급받았으며, 그 병이 치료된 다음에는 천박한 죄인으로서의 오명을 벗기 위해서 비둘기를 제물로 가져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 본래의 신분을 회복하게 했다.

1. 인간의 건강한 삶을 안내하신 하나님.

오늘 본문에 주어진 말씀은 부끄러운 병을 얻은 자를 되인으로 정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기본적인 부부생활에서 육체적으로 깨끗하게 삶을 영위하도록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레위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제반 규정은 인간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많은 법을 만들어 주셨고 그것을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지어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우리 관심을 지붕시키는 것은 위생과 관련된 규정들은 죄의 악함과 그 본질을 가르쳐 주기 위한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채찍을 들고 진노하시는 일이 그 주 임무가 아니라 죄를 지은 자들이 성결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는 인자한 모습이 오히려 뚜렷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부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신앙적으로 떳떳하게 삶을 영위해야 함을 지시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2. 계속 씻음을 받아야 할 인간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출병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친절하고 상세하게 안내를 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유출병자와의 접촉은 물론 그가 앉았던 자리까지 청결히 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전염성이 강한 유출병에 감염되기 쉽기 때문에 계속 정결한 환경과 격리를 명령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동의 귀중한 피로 씻음을 받아 죄의 종의 신분으로부터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을 얻었다. 그러나 계속 말씀과 성례를 통해 계속 자신들을 정결하게 지키지 못하면 쉽게 부정한 세계에 오염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의하고 예방하여 부정하고 거룩하지 않는 것과는 접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거기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 악한 것과는 접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정결한 삶의 지름길.

정결한 삶이란 필요할 때마다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죄제를 드림으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죄를 짓고 습관적으로 성전을 찾아 고백하고 또다시 죄의 함정에 빠진 후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피곤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다.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매일 삶 속에서 완전히 정결하게 되기란 힘들다. 사악한 마음이 항상 죄의 본성을 부추긴다. 우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것에서부터 가장 비밀스런 일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지구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 분은 눈에 보이시지는 않지만 항상 가까이 계신다. 그 분의 피와 은총과 정결케 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움직이기 전에, 또 움직이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해야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정결한 삶을 영위하는 지름길이다.

적용

1)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교회 밖에서는 교인이라는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다. 혹시 우리 모두가 부정한 것에 너무 깊숙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가?

2) 우리는 내면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볼 시간을 갖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부정한 것에 오염되어 있는지 모르고 지낼 수 있다. 먼저 더러운 것을 발견하는 눈이 있어야 정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3) 하나님 앞에는 작은 부정이나 큰 부정이나 차이가 없다. 이것쯤이야 하고 지나치는 일이 없나 반성해 보자. 특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현대 문화 속에서 오염된 죄가 있다면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 잎에 머리를 숙이자.

4) 오늘 분문에 나타난 불결한 병은 나에게 머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 가족과 이웃에게 감염시키는 무서운 결과까지 초래한다.

제 목 : 광야로 보내신 희생양 때문에

본 문 : 레 16:1-22

요 절 : (레16: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11-15장은 부정에 대한 내용들을 모아놓고 정결의 규례를 정하여 온 백성에게 알린바 있었다. 이제 16장에서는 10장에서 중단된 내용을 계속 다루면서 속죄 제사의 규례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모세의 율법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속죄일에 대한 것으로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 그 백성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해 아론을 비롯한 제사?들이 먼저 제물을 드렸다. 그리고 백성을 위해 준비한 두 말 염소 가운데 하나는 속죄제의 제물로, 하나는 광야의 사탄의 상징이었던 아사겔에게 내보내 이스라엘의 죄를 돌려 보내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피로 성소 및 번제단의 정결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예전 행위를 통해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속죄의 은총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대속죄제의 집례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고 사탄에 이끌려 생명을 버리신 중보 사역을 예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 광야로 보내진 중보자.

본 장은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충분히 드러낸 준다. 이스라엘의 여러 제사는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드려지는데, 이것은 마치 다이아몬드가 여러 면에서 빛을 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제 산 채로 광야에 보내지는 염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론은 두 손을 염소의 머리에 얹고 모든 범과를 염소에게 전가시킨 다음에 광야로 보냈다. 그 염소를 떠나 보낸 사람은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리켜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다. 그에게 모두 담당시키시고 사탄의 무리들에게 끌려가시어 십자가 위에 버려진 생명체가 되었다. 광야로 보내진 우리 중보자의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충분히 보게 된다.

2. 죄가 멀리 떠났다, 새 옷을 입자!

염소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멀리 떠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그 세계에서 멀리 추방하는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속죄일에 죄의 추방이 이룩된 새로운 감회로 새롭게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십자가 위의 희생에 실려 멀리 떠나보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취급하시지 않으신다. 아론은 세마포 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위해 속죄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마포 옷을 입지 않고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해주셨다. 예언자 스가랴의 눈에 보여진 여호수아의 새 옷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옷에 대해 실감을 더해 주고 있다.

(슥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망각의 땅으로 던져버리고 이제 새롭게 태어난 우리에게 새 옷을 입히시리라. 아멘.

3. 외로운 속죄양 그리스도.

홀로 광야로 떠나는 염소의 발길은 지극히 외로운 길이었다. 그리고 그 몸은 지극히 무거웠다. 아무도 그를 보살펴 주거나 동행하는 발길이 없었다. 오직 광야의 아세살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 역시 외로운 사역이었다. 그의 아픔과 고통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십자가 옆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지만 끝내는 인류의 죄를 위한 희생양으로 끌려갈 때 그는 혼자였다. 얼마나 외로우셨겠는가! 그의 아버지마저도 그를 버리는 순간이었다.

적용.

1) 속죄의 양으로서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부터 이미 그 예표가 보여졌다. 십자가는 순간에 솟아난 것이 아니라 바로 속죄제의 예전에서부터 예시되었음을 상기하자.

2) 우리 죄를 그의 피로 씻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새 옷을 주셨다. 새로운 옷을 입고도 헌 옷을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 옷은 다시 헌옷이 될 것이다.

3) 멀리 광야로 추방된 과거의 죄악을 가지고 자시 씨름하지 말자. 오직 자유함을 입은 실존으로 새로운 미래만 바라보자.

제 목 : 피의 중요성

본 문 : 레 17:10-16

요 절 :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오늘의 본문은 동물의 피를 섭취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버려진 동물의 시체를 먹지 못하도록 명하고 있다. 이러한 일을 저지른 자는 그를 백성에게서 끊어버리고 말겠다고 준엄하게 명령을 하신다.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주인되심을 거듭 확인시키고 있다.

각종 제사에서 모든 제사장은 피를 부리거나 발랐다. 피를 바친다는 것은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한 생명을 바침으로 다른 생명이 살아날 수 있음을 알린다. 신약에서도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말한바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의 의미가 우리 앞에 새롭게 다가온다.

1. 과학이 만들 수 없는 피.

생명이 위급한 환자를 위해 피를 구하는 광고를 더러 본자. 과학의 힘으로 인간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어도 샐명체를 지탱시키는 피만은 만들지 못하고 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피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휠씬 많은 의미를 알 수 있다. 피를 경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옳지 않은 피를 흘리는 것이 왜 두려운 일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피에 대해 그 중요성을 선언하는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는 말씀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를 줄 때 생명과 자신의 거룩한 영혼도 함께 주셨다.

2.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흔히 입에 붙은 말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습관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 없이 습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흠 없고, 티도 없고, 순전한 그리스도께서 죄악에 푹 젖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 그 생명을 완전히 주셨다. 이 귀한 생명의 피는 우리에게 흘러들어와 속죄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나에세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자비를 베푸셨다.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피를 흘리시는 순간까지 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 나의 죄를 속하려고 몸부림 치시던 그 기도를 마음을 열고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3.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누구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오늘 분분은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것을 예시한 바 있다. 그가 오셔서 동물 제사 때 바친 모든 피의 효력을 완성시키셨다. 신약에 와서는 더 이상 동물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해 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공포하셨다. 그것은 ㅇ자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이 명령은 기독교에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지켜지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해 상징적으로 그의 피를 마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동참하게 된다. 나를 버리고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것을 배운다. 이것을 행할 때마다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흡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 거하고 그는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적용

1) 인간의 과학 발전이 극치에 이르렀는데도 왜 생명을 유지시키는 피는 만들지 못하는가? 피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으며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가?

2) 동물의 피를 통한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양으로 종말을 고했다. 우리 모두는 그의 보혈의 공로로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가?

3) 우리가 성만찬 성례전에 참예할 때 받는 주님의 잔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잔을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 목 :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본 문 : 레 18:19-30

요 절 : (레18: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본 장에서는 선민 이스라엘이 실천해야 할 성도덕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친상간과 이방의 성문화 도입 등을 철저히 금하는 규정들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은 그 거룩과 속성을 지켜야 하기에 우선적으로 오염되기 쉬운 이방 문화로부터 차단되어야 했다. 가나안에 정착해 이방인들의 혼탁한 성문화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준엄한 명령이었다. 이방인들의 죄악을 답습할 때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혼과 육이 정결하게 성별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1. 경계해야 할 이방의 세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그리던 이상향 가나안은 높은 도덕률과 아름다운 문화의 땅이 아니었다. 이방 종교와 사특한 관습들로 가득 찬 세계였다. 야훼 종교와는 정반대로 무질서와 죄악이 가득한 땅이었다. 그곳은 근친상간이 난무하고 동성 연애와 짐승과의 교합 등이 보편화된 땅이었다. 실로 무서운 죄악의 문화가 정착한 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미래를 염려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선민들이 이 땅의 흑암과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말씀을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그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깊은 경고의 말씀과 손길을 계속하고 계신다. 첨단을 걷고 있는 각종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긴장을 풀지 말고 살라고 재촉하신다.

2. 하나님의 영원한 요구로서의 순종.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육적인 조건들을 극복하는 데 때로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육체의 욕구를 채우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 앞에 언제나 거침돌이 된다. 그러나 순간순간을 넘긴 다음에는 그 명령이 언제나 아름답고 고결하고 유익했음을 모두 경험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이방 여인들과 호기심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성문화는 그들을 충분히 유혹할 수 있는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깊이 섬겨온 그 백성의 대부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맞게 된다는 것을 광야의 40년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주어진 18장의 내용들이 오염된 육체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 지금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경멸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3.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많은 규례는 한 역사를 넘기고 되돌아 보면 모두가 진리였다. 이 진리 안에 사는 사란은 진정한 자유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고 떳떳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 진리를 외면하고 자신의 육적인 삶에만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었던 사람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진리를 외면했던 사람들은 모두 훗날 자신이 추잡한 실패자임을 인정해야 했다. 지?정 자유자가 아닌 죄악에 갇힌 자임을 알게 된다.

종말에 패배자의 辯은 동일하다. “나는 스스로 더렵혀진 몸이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스스로 자신을 파멸에 이끈 사람들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는 오늘의 말씀대로 회생될 수 없는 낙오자가 되어 통곡한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적용

1)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무질서한 성윤리에 대해 규례를 준 이유는 무엇인가?

2) 오늘 분문의 내용과 20세기 후반의 타락한 성질서와의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

3)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를 따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4) 고유한 신앙과 특유한 민족성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땅 가나안에 들어가 본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성공적으로 실천했는가?

제 목 : 우리의 하나님

본 문 : 레 19:1-8

요 절 : (레19:4)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종교적인 의무와 부모와 사회의 활동에 대한 의무와 순결에 대한 의무가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오늘 분문은 선민 이스라엘이 준수해야 할 기본적인 원칙으로 먼저는, 이들의 거룩한 속성과 삶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거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만을 절대시 하면서 간과하기 쉬운 부모에 대한 기분 윤리를 가르치며 부모에 대한 경외를 가르친다. 셋째,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거룩한 안식일을 생활화할 것을 명하고 있다. 끝으로, 화목제를 실천함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오차가 생기지 않도록 다시 한 번 규례를 설명해 주고 있다.

1.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가장 반갑고 기쁜 선포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선언은 실로 장엄한 역사의 장을 펼치는 소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충분히 경험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이론으로 알려진 하나님이 아니라 경험으로 체험된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선언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놀라지 않고 너무도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음성 앞에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감격의 머리를 숙인다.

2.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야 하는 의무.

나의 하나님을 모시는 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야 하는 의무가 따라야 한다. 이때야 비로소 진정으로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신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강조한 거룩함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는 말씀이 우리 앞에 놓인 의무 조항이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 우리 생각 깊숙한 곳에 하나님께서 자리잡고 계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을 느낄 때까지 묵상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에게 자신을 맡기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사랑 속에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라.

3.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는 사람들.

우리가 순간순간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법보다는 하나님의 눈길이 나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명령은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나 안식일을 엄수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을 때 더욱 정확히 지켜질 수 있다. 거룩해지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형상의 추구는 빈큼없는 하나님의 눈이 항상 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그 눈길이 나를 지키고 있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모든 사람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모든 명령을 기쁘게 따를 수 있다.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 깨어진 자신을 성령의 손에 전폭적으로 밭겨버릴 때 그 가능성은 더욱 확고해진다.

적용

1)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는 음성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데 우리는 “아닙니다. 돈이 내 하나님입니다. 자식이 하나님입니다”라는 어리석은 대답을 하지는 않는가?

2)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거룩함”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3) 한날을 사는 우리는 누구를 의식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생각해보자. 그것이 인간인지 또는 하나님인지 깊이 생각해 보자.

4)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으로 부모에 대한 공경과 주님의 날을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자.

제 목 : 만민 중에서 성별된 사람들

본 문 : 레 20:22-26

요 절 : (레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회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원주민을 추방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되리라는 예언의 재선포가 보인다. 그러나 이런 약 속의 실현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들이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성별된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지켜나가라고 규정하시고 있다.

1.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오늘의 이스라엘을 찾아간 사람들은 이 땅이 어찌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불려지고 있는지 혼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천 년 전 근동 지방을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은 자명하다. 물이 부족했던 사막 지대가 바로 그 지역 전부였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지역으로서 풍요로운 갈릴리 호수가 있고 꿀과 우유가 풍부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오아시스 땅이 일찍이 거룩하게 구별된 이스라엘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비록 그 땅에는 젖과 꿀이 풍요롭게 생산되고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이 가득한 아름다운 땅이었지만, 하나님게서 부탁한 거룩한 삶을 지속하는 데는 매우 위협적인 사연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상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계율과 거리가 먼 문화의 내용들이었다.

오늘도 우리 육신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좋은 환경은 소중하고 귀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하나님을 모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령받은 신앙을 지키기에 거침돌이 된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2.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총 가운데 선택받은 사람들은 누가 감히 추방하겠는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입성했는데 누가 그들을 정죄하고 토해 낼 것인가? 너무나 당연한 논리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행복의 안전성은 분명한 조건의 이행이 전제되는 것일 때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 조건은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일이다. 그럴 때만이 거룩하게 구별된 민족의 특권이 지속될 수 있다는 진리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은총 안에서 행복한 사연과 놀라운 복된 사연들을 접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 나의 가나안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규례와 법도를 외면하면 가나안에서 추방되는 슬픔을 겪게 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진리다.

3. 나의 소유권을 의식하라.

임자가 없는 물건을 생각해 보자. 가꿔주는 주인 없는 물건이 얼마나 천박하겠는가? 임자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고독하고 어려움이 많겠는가? 그러므로 물건은 소유자를 필요로 하고 인생은 주인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셨음이니라”고 말씀 하신다. 이 얼마나 확고한 관계선의 표현이며 그 백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말씀인가?

이 진리는 수천 년 전 단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는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 말씀과 함께 사도들은 모두 한결같이 자신들을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의 소유주를 보라. 그가 누구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 경청하라.

적용.

1) 나의 삶을 조용히 명상하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 지금 도달한 곳이 어느 지점인지 생각하라 내가 있는 것에 있는 젖과 꿀은 어떤 것인지 열거해 보라.

2) 누가 내 인생을 소유하고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지 생각하자.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한 후 나는 누구의 소유로 인생을 살아가는지 확인하자. 그리고 확실한 소속감을 가지고 언어와 행동에 임하자.

3) 나를 선택하여 거룩한 무리의 일원으로 불러주심은 분명히 커다란 은총이다. 그러나 무책임하게 은총만 누리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그 은총을 지키기 위한 의무와 책임이 따름을 명심하자.

4) 이 땅 위에서의 선택이란 냉엄하다. 많은 무리가 탈락한다. 선택받은 자는 무한한 기쁨에 젖고 탈락한 사람은 절망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했는지 반성해 보자.

제 목 : 성직 수임자의 생활

본 문 : 레 21:1-9

요 절 : (레21:8)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

지금까지 선택받은 백성들을 위한 규례를 계속 다루었다. 그들의 의무와 택임, 그리고 생활에서의 도덕률까지 모든 규례를 세워 새로운 질서의 창조가 주어졌다. 본 장에서는 선민 중에서 선택된 제사장에 대한 규례가 세워지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봉사자로서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지도를 맡겨왔던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들에게는 거룩하고 완전한 생활이 요구되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일반 제사장들이 성결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나 자녀, 형제, 자매들의 장례 외에는 주검을 만지는 일을 금지했자. 그리고 제사장의 결혼에 대한 규례와 가정의 순결이 강조되고 있다. 10절 이하에서는 대제사장이 지켜야할 각종 규례들이 더욱더 엄격하게 주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 1-9절에서 제사장들의 거룩성을 강조하시면서, 그 이유는 그들이 가까이서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게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1. 성직 수임과 그 성결성.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운 데서 모시고 예전을 집례하는 성직자였던 제사장은 그 삶의 양태부터 차이를 두도록 강조하신다. 시체마저도 자신의 가족 외에는 만지지 못하도록 하는 규례를 주고 있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결혼도 순결한 여인만 대상으로하고 그 자녀들마저 탈선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성직의 수임이 얼마나 소중하며 하나님의 관심이 어떤지 충분히 알게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주변을 보자. 얼마나 많은 성직 수임자들이 탈선의 주역이 되고 있는지 보자. 거룩한 제사장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만 섬기며 전념하는 모습을 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언어는 살아 있으나 그 행동은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는 데 미흡함을 발견한다.

2. 제사장은 거룩한 삶의 모범이다.

제사장들이 부정하고 더러운 것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음은 현실 외면이 아니다. 오직 그 몸 자체가 거룩한 삶의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흠이나 의식상의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가정의 자녀마저도 탈선이 허용되지 않도록 하는 섬세한 부탁이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하는 제사장들로서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신약 시대 제사장들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선포가 주어진다. “(벧전 2: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특권이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된다.

3. 성직 수임자의 가정.

제사장은 가족의 질서도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만의 하나라도 제사장의 자녀들이 탈선을 하면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므로 그 자식은 불태워 죽여야 한다는 참으로 준엄한 경고를 주고 있다.

성직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칫 가정에 무관심하기 쉽다. 그리고 자녀들이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을 기회가 적다. 그러한 경우 자녀의 탈선은 어느 가정보다 쉽게 찾아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질서가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신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가정이 건실할 때 예배하는 무리들의 마음이 집중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세심하게 주의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읽는 책,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즐기는 오락, 가정 생활의 세세한 것들에서가지 “나는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선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적용

1) 교회의 세속화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는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택함 받은 제사장이다.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임을 기억하자.

2) 거룩한 직분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배하는 순간에만 거룩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정과 이웃에 실천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성직 수임자들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잔인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4) 성직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들의 외적인 모습도 하나님께서는 규정을 정해 주셨다. 그러므로 내적인 마음가짐과 외적인 모습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 목 :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자격

본 문 : 레 22:1-16

요 절 : (레22:4) 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21장 후반에서는 아론의 자손 중에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공적인 성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제사 때 드린 예물 중에서 제사장의 가족에게 돌아간 음식은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론의 자손 중 그 몸에 불결한 병, 즉 문둥병이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그 몸이 정결하게 치료되기 전까지는 공적인 제사장의 직무뿐만 아니라 성물을 먹는 일까지도 금지당했다. 그리고 여호와께 드린 성물은 조금도 더럽힘이 없어야 할 것이며 누구나 함부로 먹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으로서의 성결함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아무런 준비 없이 거룩한 예물을 보통 음식처럼 먹을 수 없음을 다시 밝히는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이미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오직 그 성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와 권위가 있는 것으로 온전히 구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행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5: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행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행5: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곁에 장사하니 (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 하나님의 성물을 먹기전에/

22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에 참여하는 자의 정결과 성물로 자쳐진 희생 가축의 완전성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성물의 일부는 화제로 태워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의 몫이 되었다. 제사장이 성물을 먹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그 규정의 핵심은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제사장과 그 가족에 제한된 말씀은 결코 아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 적절하게 필요한 말씀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의 귀한 자리에 나오기 전에, 말씀을 받아 먹기 전에, 그리고 성만찬을 받기 전에 일정한 신분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에 정결해야 한다.

우리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영의 양식이다. 모든 삶의 척도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말씀을 먹고 성장한 영혼만이 살 수 있다. 이 말씀은 가장 거룩한 영혼의 음식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귀한 말씀을 먹기 위한 준비에 너무 소홀하다. 좀더 정숙하고 맑은 마음과 육신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말씀을 먹는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을 때 흙이나 먼지로 더렵혀진 손을 씻고 깨끗한 모습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말씀을 읽어보자. 그 얼마나 경견한 모습이겠는가? 영혼의 양식인 성경을 읽는 사람이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3. 우리는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정결해야 한다.

우리 앞에 자주 놓이는 주님의 성만찬은 실로 존엄한 예전이다. 이 예전에 임한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육신에 아무런 준비 없이 참여한다면 이 얼마나 망령된 행동이겠는가?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잔을 받는 예식이다. 세상의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거룩한 떡이됴 잔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만찬에 참예하기 전에 마음을 맑게 정리하고 몸을 던정히 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성만찬의 예전에서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 예전에 오기 전에 얼마나 준비를 했느냐와 관계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정결해야 한다.

주님의 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는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경배와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기쁨과 복을 간직하기를 소원한다. 이 예배는 인간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장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오늘 예배하는 무리들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정숙한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더욱이 마음의 자세도 가다듬지 못한 채 추하고 더러운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집에 앉아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있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싱령과 진정을 모야야 한다.

적용.

1)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목욕 재계를 하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조심했다.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도 그렇게 엄숙항데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너무 무성의한 것은 아닌가?

2) 말씀과 성만찬과 기도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뵈올 때 우리의 준비는 어느 정도인가?

3) 우리의 육신과 정신은 어느 정도 정결하기에 이렇게 준비를 소홀히 하는가?

제 목 : 필요한 고행

본 문 : 레 23:26-32

요 절 : (레23: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한 신앙을 가지고 준수해야 할 일곱 가지 절기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8-29장에서는 제사장들이 이 절기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규례를 말하고 있다. 본 장에서 제시된 절기들은 안식일, 유월절과 무교절, 밀 곡식의 첫 이삭을 바친 오순절(칠칠절, 초실절, 맥추절이라고도 부름), 신년의 새로운 시작의 기쁨을 알리는 나팔절, 공동체 전체의 죄 문제를 하나님께 사함 받는 날로서의 대속죄일, 출애굽 광야생활을 기념하며 추수를 감사하는 초막절 등이었다.

오늘 본문은 대속죄일에 대한 특별한 규례를 요구하고 있다. 대제사장 이하 모든 백성의 죄를 속하는 날로서, 저녁부터 그 다음날 저녁까지 25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행사를 가졌다. 이 날에 모든 백성은 성회로 모여 금식하며 회개하는 날로 삼았다. 이때는 모두 스스로의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고행이 부과되었다. 고행이란 안일만 추구하는 육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귀한 훈련이었다.

1.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고행.

“너희는 네 자신을 고행하면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은총을 망각하기 쉬운 백성에게 아주 적절한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자신의 위치와 평강의 삶이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지속적으로 감사와 경배를 은총의 주인에게 드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은총에 대한 고마움은 한 순간으로 끝이 나고 모두를 자신의 수고로 인한 결실로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의 값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리기 위해 대속죄일에 고행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했다.

오늘도 이러한 신앙생활의 경험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고행이란 구약적인 신앙 형태나 로마 카톡릭의 신앙 형태로 여기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오늘의 개신교에교에서는 이러한 고행의 신앙의 형태를 거의 외면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속죄일에 가졌던 금식과 회개의 모습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2. 죄는 잊고 은총은 기억하자.

하나님의 선민들은 이스라엘이 지켜온 대속죄일에 모였다. 그런데 이 성일 기간 중에 백성들은 스스로 괴롭힐 것을 요구받고 있다. 모든 사람이 성일을 지키기 위해 종들까지도 일을 쉬게 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엄숙한 안식일에 스스로 고행을 실해하라는 명령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지만 인간들이 그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죄를 제해 주셨기 때문에 그 죄악을 계속 붙들고 괴로워할 이유가 없다. 용서받은 확신이 있는 한 그 죄를 우리 기억에서부터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 그러나 그 죄를 용서해 주신 분의 은총만은 우리 가습에 뜨겁게 간수할 필요가 있다. 그 분의 은총을 더 깊이 감사하고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은 더 겸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자시 그 죄악의 함정에 빠져들이 않는 힘이 생긴다.

3. 용서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고행을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 또는 자선 사업을 비롯한 각종 선행을 통해 자신의 죄악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용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한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구원은 행함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룩된다는 말씀이 진리임을 다시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용서는 인간이 어떤 고행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따라 용서의 은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그 의미를 새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하기 위해 스스로의 고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용서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죄 사함 받은 길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분을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섬기는 길 외에는 더 이상의 길은 없다.

적용

1) 우리는 스스로 고행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받은 은총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결험해 볼 필요가 있다.

2) 이 세상의 어떤 고행도 우리를 위해 지신 주님의 십자가와 비교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버리지 말자.

3)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 진리인지 기억하자.

제 목 :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

본 문 : 레 24:1-9

요 절 : (레24:4)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오늘의 본문은 출애굽기 27장 20-21절의 기록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했던 당시의 성막은 두 개의 방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안쪽은 지성소라하여 법궤가 놓여 있었다. 바깥쪽은 그냥 성소라고 불렀으며, 그곳에 향을 피우는 제단을 비롯하여 순금으로 만들어진 등잔과 진설병을 차려놓은 진설대가 있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 명령이 주어졌다. 하나는 순금 등잔에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넣고 거기에 불을 켜 지성소의 불이 지속되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또 하나는 진설병에 대한 규례로, 고운 밀가루를 가져다가 열두 개의 과자를 만들어 두줄로 차려놓고 향을 얹으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아론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그 불이 밤이나 낮이나 어느 때나 꺼지지 않도록 관리했고 명령대로 진설병을 차렸다.

1. 꺼지지 않은 빛이 건재한 등잔불.

하나님을 예배한 성소가 어두움에 잠겨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창조때부터 흑암과 혼돈을 물리치고 빛을 주셨던 하나님이시기에 빛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불빛을 잠시라도 대하지 않았을 때 죄악의 어두움이 지체없이 쳐들어왔던 것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 생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 순간, 바알 종교의 우상들을 만들면서 어둠의 세계에서 춤을 추고 살던 민족이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리의 빛을 보면서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꺼짐이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불빛만 주시하자. 하나님의 진리의 불이 타오르는 곳으로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옮기자. 이것만이 우리가 방향을 따라 걷는 길이다.

2. 등잔불은 기름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캄캄한 암흑에 머물던 인류는 십자가 위에서 타오른 밝은 빛을 보는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암흙의 세계와는 높은 담을 쌓았다. 그리고 진리에 의해 자유자가 됨을 만끽하면서 오늘을 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된 우리들에게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이 빛을 계속 꺼지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가 스스로 기름을 공급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름이 메마를 때 등불은 그대로 사라진다. 지속적으로 진리를 공급받기 위해 우리는 예배드리기와 성경 읽기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성소의 그 빛이 자신들을 지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올리브 기름을 만들어 제사장에게 바쳤다.

3. 살아 있는 진설병이 되라.

고운 가루를 취하여 열두 개의 떡을 만들어 여호와 앞에 진설하여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기하라는 명령이 오늘 본문에서 주어졌다. 열두 지파의 정성이 모아진 진설병이 제단 위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고운 가루처럼 부서져 하나님께 헌신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제단에 놓일 수 있는 나의 정성, 믿음, 희생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값진 것이다.

순수한 기름과 고운 가루는 순수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오늘도 주님의 제단에 우리의 순수성이 필요한데도 응답의 소리는 너무 희미하다.

적용.

1) 도시의 밤은 어둡지 않다. 많은 불빛이 이곳 저곳에서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날로 어두워간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자.

2) 하나님의 제단에서 타올라야 할 불빛과 진설병은 우리가 한 방울의 기름과 고운 밀가루로 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3) 한국의 밤하늘에는 십자가의 불빛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어두운 세력의 확산은 날로 더해간다. 왜 교회의 불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지 못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찾아보자.

제 목 : 여호와 앞에서 안식하게 하라

본 문 : 레 25:1-7

요 절 : (레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본 장에서는 안식년과 희년에 준수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먼저 안식년에 대해서는 그 한 해의 모든 경작지를 쉬게 하고, 안식년의 소출은 공공의 음식으로 돌려야 한다는 규례를 주고 있다. 여기서 땅과 사람의 휴식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그 다음해인 제 50년의 대속죄일로부터 1년 간이다.

본 장에서는 희년의 계산법, 기업 되는 땅을 원 소유주에게 반환하는 법, 안식년 대치법, 토지 반환법, 채무 경감법, 노예 반환법 등이 열거되어 있다.

이 모듬 법의 제정 목적은 세상의 모든 것의 공동체의 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안식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환경 보호를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때에 주어진 값진 말씀이다.

1. 미래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

인간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상력을 가지고서는 측량할 수 없는 초월성을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 분 앞에서는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의 40년이 지난 뒤 약 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당연히 농업과 목축을 기본 업으로 살아갈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만 살던 이들이 비옥한 땅에 들어가면 욕심에 따라 쉼없이 자신들과 땅을 혹사할 가능성을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보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셨던 말씀은 모두 미래 지향적인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말씀들이 많았고 그 실현성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었다는 것이 언제나 밝혀졌다.

오늙도 우리 미래를 위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자주 있다. 그때 그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아 그 인생을 순탄하게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실패의 늪에서 헤멜 것이다.

2. 창조와 질서와 안식.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아름다운 땅과 자연의 조건을 주셨다. 바다와 육지, 각종 짐승과 식물들이 조화 속에 질서를 형성해 가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하 생태계의 질서는 어떤 과학도 권력도 물질도 모방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이 지구는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지속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그 소중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각종 공해로 이 지구의 종말이 다가옴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미래를 보셨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나 땅이나 매 6년이 지나면 7년째는 안식년으로 정해 주셨고 그것을 잘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오늘의 현대인들이 오늘의 피폐해져간 땅과 사람들을 보면서 안식년을 제정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지 이제야 깨닫고 있다. 지금이라도 창조 질서를 따르자.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위해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말씀을 가슴에 두자. 사람도 땅도 이 명령을 지켜야 산다.

3. 안식이 없는 삭막한 현실.

현대의 인간들이 개발한 모든 도구들은 비행기와 자동차를 비롯해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단축한 빠른 삶의 도구들이다. 우리의 땅은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계절마다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현대인들이 빠른 생활 도구를 통해 시간을 절약하였기에 그 남은 시간은 휴식을 취하는 데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육체들은 더욱 분방하고 피곤하게 혹사당하고 있다. 그것이 생산적인 일이든 비생산적인 것이든 육체는 피곤하고 정신은 헝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 질서는 더욱 살벌해지기만 한다. 우리 땅도 쉬없이 경작을 감당하다가 이제는 지쳐서 산성화되어 피폐해지고 있다. 쉼없이 내뿜는 공해는 우리가 마셔야 할 공기와 물을 오염시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진정 하나님의 명령대로 인간과 그 삶의 장과 땅이 안식을 취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지구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적용.

1) 하나님께서 명령한 안식은 과연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자. 필요하다면 그 이유들을 열거해 보자.

2) 오늘의 생태계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 생태계의 변화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것들이 우리 생명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해 보자.

3)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안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함께 생각하자.

제 목 : 최상의 보호

본 문 : 레 26:3-13

요 절 : (레26: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26장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면 약속된 복을 받을 것이며, 그 계명을 불이행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면 다음 세 가지 은총을 받게 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 적절한 때에 비를 주시갰다는 것이며, 둘째 사나운 짐승이나 대적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은총이며, 셋째 그들이 세운 성막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은총이 주어지게 됨으로써 그의 백성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고 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을 두렵게 할 수 없다는 은총의 말씀을 주신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최선을 기울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위와 같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 때를 따라 주시는 비.

비가 내리지 않는 버림받은 땅이다. 땅으로서 그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그곳에는 인간이 머무를 수 없다. 극심한 가뭄을 겪으면서 인간이 어떤 노력도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가나안 땅이 비록 젖과 꿀이 흐름는 비옥한 땅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지 않으면 곧 메말라 삭막한 대지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일용할 양식을 심고 거둘 수 있는 땅이 사막화되어 버림다면 그 백성은 저주받은 백성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때를 따라 비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총이었다. 이 은총은 그 백성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그 생명들을 보존시키겠다는 인자한 사랑의 모습이었다.

오늘도 이 땅에 비가 때를 따라 주어지지 않을 때 인간들의 심성이 얼마나 삭막해지고, 하늘을 향한 울부짖음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한 방울의 식수라도 먼저 차지하려는 아우성이 얼마나 극심할 것인지 상상해 보라.

2. 보호받는 민족.

오늘 본문에서 주어진 두 번째 복은 그들의 땅을 평화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아무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사나운 짐승이나 전쟁의 칼날이 설치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민족을 해치려는 원수들은 모두 그들 앞에서 쫒김을 당하며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주어져 있다.

한 생명이 사는 데 두려움 없는 일생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다. 이 두려움 때문에 각 나라마다 개인마다 권력과 부를 축적하고 그 축적의 과정에서 인간의 기본 윤리와 도덕률이 무너지면서 아비규환(阿鼻叫喚)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무질서와 공포를 사전에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가?

오늘도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히 준수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러한 약속이 이룩될 것이며, 오늘의 이스라엘로 그 장래가 보장될 것이다.

3. 하나님게서 함께 머무시는 곳.

허약한 인간이 홀로 자신의 생명을 지탱하고 갖은 어려움으로부터 안전을 가져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자신 곁에 있어준다면 그곳에서는 가장 편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광야생활을 끝내고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공포의 사건이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표준 새번역이 옮긴 대로 “너희가 사는 곳에 나도 같이 살겠다”는 말씀을 주신다. 이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복한 발길을 지체 없이 옮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살아주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땅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부러워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한 그 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리라. 그 세계를 동경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영원히 행복한 삶의 주인공들로 만드실 것이다.

적용.

1) 사철에 때를 따라 내려 산천 초목을 키우시고 우리 생명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유심히 보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다.

2) 우리 삶에 사나운 맹수가 달려들어 감당하기 힘든 고뇌가 찾아올 때 하나님의 보호가 떠난 이유를 찾아보자.

3)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사신다는 확신을 갖자. 그곳에 웃음 꽃이 필 것이다.

제 목 : 하나님의 것

본 문 : 레 27:28-29

요 절 : (레27:28)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본 장은 레위기의 부록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들이 아주 적극적이고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위한 내용들이다. 그 내용을 크게 분류하면 1-29절까지는 서원의 내용들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맺은 약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30-34절까지는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십일조는 원래 여호와의 몫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서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진 메시지는 서원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이든지 물질이든지 하나님과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1. 취소될 수 없는 서원.

인간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언제나 파기가 가능하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실천에 변경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서약은 어떤 경우에도 파기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소유물이 하나님께 한 번 엄숙하게 바쳐지면 그것은 다시 취소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한 번 바쳐지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된다. 이 원칙은 신성하게 구별된 모든 것에 적용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위기를 당할 때 하나님께 서습없이 서원한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이 지나면 그 서원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우에 엄중한 경고를 내리고 있다. “(전5: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는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병들었을 때에, 가난했을 때에,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서원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서약을 파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2. 주의 보혈로 인쳐진 생명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쳐졌고 그 분의 백성이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아브라함을 택할 때부터 있었던 선택의 장면들을 상세히 보면 아브라함이 스스로 원하여 선택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임의로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아브라함은 오직 불러주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생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 벽성들도 이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가나안에 입성하게 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입장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스스로 나아간 존재들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불러주시었기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이를 확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서원은 주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결코 내 자신이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파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3. 드려진 제물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 강조하는 말씀이 있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을 주께 바쳐 그것이 거룩한 것이 되었을 때는 그것들을 팔거나 무르거나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주님께 이미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원을 한 사람도 취소할 수 없다는 준엄한 명령을 주고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하나님에게 바치겠다고 강하게 서원했던 물질을 다시 만지면서 슬그머니 취소해 버리는 사람들을 본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성전에 가지고 와서 바친 물질을 다시 반환해 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자신을 주님의 것으로 바쳐 일생을 살겠다고 서원했던 사람들이 실천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원을 소홀히 하고 마음대로 취소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그대로 두시지 않겠다는 무서운 진노의 말씀을 우리 앞에 두셨다.

적용

1) 우리는 대개 하나님께 바친다 하면 돈을 먼저 생각한다. 돈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당신의 것으로 구별하셨다.

2) 우리는 하나님께 약속한 헌신을 어무 쉽게 취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파기해도 그 효력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오직 그 길을 다시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다.

3)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그보다 열등한 일에 사용할 수 없다. 비행기 엔진을 자동차에 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4) 자신의 과거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실천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그 서원의 순간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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