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신명기요약강해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00

 

 

제 목 : 우리를 안으시는 하나님

본 문 : 신 1:19-33

요 절 :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모세 요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죽음을 앞둔 모세가 가나안 입성의 주역으로 성장한 이스라엘의 새 세대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축복받는 길임을 교훈하기 위해 주신 책이다. 지난날의 출애굽 역사를 상기시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반 규례와 율법을 반복하며, 새롭게 해석하고 확대적용시킨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고별 설교의 첫 부분이며 그 중에서 본문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가데스 바네아까지 행군한 이스라엘의 구세대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했던 38년 전의 쓰라린 사건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1.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우리 앞서 행하신다.

우리의 인생 행로는 실로 다양하다. 때로는 가파른 경사와 같은 험난한 고비를 만날 때도 있고, 또 때로는 적들이 우글거리고 여러 가지 독충들이 앞을 가로막는 지역을 통과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지경에 있든지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듯이 우리 성도들이 어떤 험난한 인생 광야에 있어도 늘 함께하시고 보호하신다.

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항상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앞서 행하시고 우리의 길을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그리고 늘 깨어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성도를 보호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좀더 완벽한 인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미리 가나안 땅을 예비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행복된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기다리신다.

2. 하나님은 성도를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인도하신다.

거대한 강물이 배를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두 팔을 벌려 성도들의 삶을 떠받치신다. 우리는 그의 영원한 두 팔이 우리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사람이 고안할 수 있는 그 어떤 정교한 도구보다도 더 안전한 승차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 어떠한 재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에도, 야만인의 마을을 지나야 할 때에도, 배를 침몰시키는 장애물로 가득찬 강물을 건너야 할 때에도 그 거대하고 안전한 팔로 성도를 안으시고 보호하신다.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안고 길을 걷듯이, 또 어머니가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날려 아기를 보호하듯이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3. 성도는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늘 앞서서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시기에 성도는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1:2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올라가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알라’로서,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일어나 분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약속의 땅을 믿음으로 얻으려는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을 독려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는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천성을 향해 진군해 나아가야 한다.

적용

1)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광야와 가파른 골짜기에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셨는지 회상해 보자.

2)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안음 같이 성도들을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생각해 보자.

3) 우리의 삶 속에서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히고, 언제 어떻게 망설였는지 생각해 보고 반성하자.

제 목 : 일시적인 제한

본 문 : 신 2:26-37

요 절 : (신2:37) 오직 암몬 족 속의 땅 얍복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무릇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가기를 금하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1장에 이어서 모세는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여정을 회고한다. 본 장은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시혼에 관한 명령으로 여기에는 온갖 제한과 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금지와 제한 항목이었던 것이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러서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에 포함된다. 하나님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시적으로 이들 지역을 제한 지역으로 선포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삶에는 일시적인 제한이 있을 수 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처음 아시아의 변경 국가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그가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금하셨다.

1. 장소에 있어서의 제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족속의 땅 얍복강가와 산지의 성읍들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것은 암몬 족속이 의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둘째 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장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장소들에 아무런 준비 없이 다가감으로 인해 생각지 않았던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장소들을 가까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들에 쉽게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만한 장소는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신앙이나 미래를 위해서 유익하다.

2. 지식에 있어서의 제한.

고대 헬라의 신비 종교에서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된 몇 사람에게만 훈련을 시켰고, 그 훈련된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들이 목적으로 하는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만 자신들의 비밀과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선택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비법을 전수함으로 인하여 일어날 폐해를 염두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도저히 깨닫기 어려운 말씀을 만날 때도 있다. 아마도 초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전에 알 수 없었던 신비한 일들을 깨닫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수준에 이를 만큼 우리에게 제한적으로 보였던 비밀들을 깨닫게 하신다.

3. 경험에 있어서의 제한.

루터포드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여된 것이 아니다. 또 쿠퍼가 말했던 것처럼 어떤 사람은 햇빛의 영역으로부터 제외된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다. 성장기에는 충분한 비가 내리고 추수기에는 강렬한 햇빛을 받아야 며가 잘 무르익듯이, 만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 속에서 제한된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경험의 남용은 예측하지 못한 폐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절제야말로 최선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그 제한된 경험을 토대로 모든 것은 미래에 더욱 완전한 성장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은 제한되어 있을지라도 후에는 그 복은 소유하게 된다.

적욕

1) 하나님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어떤 장소들을 제한하시는가? 그리고 그렇게 제한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2) 하나님이 금하신 장소에 갔던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고 새로운 다짐을 해 본다.

3) 하나님께서 제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의 영역을 돌아보고, 더 풍성한 지식을 누릴 방법을 생각해 본다.

4) 자신의 제한된 경험의 세계를 돌아보고 더 풍성한 삶을 향한, 좀더 풍부한 세계를 계획해 본다.

제 목 :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본 문 : 신 3:23-29

요 절 : (신3: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모세의 찬양과 간구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의 므리바 반석 사건으로 인해 이미 가나안 입성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가 요단 동편 땅을 정복하며 새 지도자 여호수아를 격려하는 과정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 나머지 하나님께 자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느 모세의 간구를 “(신3: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나안 땅 입성을 거절하신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1. 모세의 죄 때문이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출애굽 제 40년 1월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므리바 반석 사건 때문이었다.(민 20:2-13) 여기서 모세는 자신의 행위(반석을 침)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를 범했다. 사실 모세가 범한 므리바 반석 사건의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한 일면도 있었으므로, 지금까지의 모세의 행위를 생각해 볼 때 한 번쯤 용서를 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것은 지도자의 잘못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회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며, 한 번의 죄악된 행위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조건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한 모세의 충성과 봉사와 같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들어가는 것임을 예표로 보여주신다.

2. 받은 바 은혜가 족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26절을 통하여 “그만해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지금까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넉넉하여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자신에게서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구한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사실 모세는 출생시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받았으며 애굽 궁중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을 연단받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 살았다.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살아 계신 역사적 섭리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실로 모세의 120년의 삶, 즉 특별한 성장 과정과 광야의 목자 생활, 그리고 소명을 받아 애굽의 종이었던 히브리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했던 지금까지의 삶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던 것이다.

3. 다른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가나안의 광경을 보여주시기로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모세에게 그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았으나 그 땅의 광경은 보게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애타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러한 광경을 보여 줌으로써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고, 그에게 언약의 땅에 대한 아주 명백하고도 즐거운 생각을 주고자 함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응답하셨다. “육체의 가시”를 소유한 약한 바울이 더 당한 바울이 될 수 있었기에 내리신 하나님의 가장 좋은 처방이었다.

적용

1) 한 번의 실수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자.

2)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한없는 은혜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3) 항상 우리의 간구보다 더 나은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참고 기다리는 위대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자.

제 목 : 그의 기업의 백성

본 문 : 신 4:15-24

요 절 : (신4: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본문 20절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기업’, 즉 ‘나할라’는 정당한 ‘소유권’ 또는 ‘몫’을 뜻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께 속한 소유가 된 것을 의미하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열국 중 제사장의 나라가 되었고 또한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도록 부름받았다. 즉 다시 말해서 그분은 우리를 소유하기 원하신다. 그분의 본성은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도움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들로부터 거룩한 사랑과 헌신의 열매를 요구하신다.

1. 최상의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들 안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분이 우리를 울타리 안에 넣으시고 우리를 그의 경작지와 목장 안에 놓으실 때 우리는 커다란 황무지의 일부분이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다는 말씀은 있으나 왜 택하셨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무런 조건 없이 택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세상 만민 중에서 조건없이 선택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로 삼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참미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자 됨과 죄의 용서는 그분을 통해서 그분의 은혜의 부요를 따라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어떤 책임인가?

4장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를 당부하신다. 본문 15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깊이 삼가라”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었기에 더욱 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본문 24절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아주 사소한 타락의 징후까지도 지켜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기억하고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3. 어떤 희망인가?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서 일할지라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 교훈도 줄 수 없다.

때때로 농장이 파헤쳐진다. 하나님의 농부는 그분이 우리들로부터 받으시고자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입하신다 하나님의 농부는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무엇이나 심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 각양각색의 씨를 뿌려 우리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그 풍성한 결실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더 풍성한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적용

1)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선택하시어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감사드리자.

2)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하나 하나 생각해 보자.

3) 우리의 희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더욱 더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리자.

제 목 : 하나님의 명령

본 문 : 신 5:28-33

요 절 : (신5: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본 장은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의 연속으로, 서론을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 단락이다. 여기서 모세는 39년 전 호렙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언약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신국법이었다. 여기서 모세는 비록 그 계명이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구세대와 맺어진 하나님의 언약법이긴 하나 그 효력과 근본 정신은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 걸쳐 적용될 이스라엘 전 민족의 국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율법의 효력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미치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의 근본 정신이 계승, 승화, 발전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완전한 헌신에는 손해와 고통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손해와 고통이 두려워 온전한 헌신을 회피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29절에서 말씀하신다.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큰 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말씀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본문 33절에서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신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이 땅에서 큰 복을 오래도록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얽어매어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명령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29절의 말씀을 통하여 “(신5: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것’과 ‘모든 명령을 지키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만왕의 왕이시기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다. 그리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시로 우리는 마땅히 말씀하신 명령을 따라야 한다.

3. 하나님은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그래서 본문 29절에서 말씀하신다.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여기서 ‘이 같은 마음’이란 율법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마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분의 계명을 영원히 지키려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형식이나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기를 구하고, 돌 같은 마음을 신선한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요청하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비춰져서 우리가 그분을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도록 간청할 필요가 있다.

한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 나의 아들아! 나에게 너희 마음을 달라!”

적용

1)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킴으로 얻게 될 복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며, 더욱 더 법을 잘 지키는 성도가 되기를 다짐해 보자.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징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드을 나열해 보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임을 되새겨 보자.

3)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생각해 보고, 이를 실천해 보자.

4) 외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늘 인식하고 하나님께 항상 마음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자.

제 목 :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본 문 : 신 6:4-9

요 절 :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본 장은 우리들에게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고 또한 그 율법을 자손들에게 철저히 가르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임을 교훈해 준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과 그 후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이스라엘인이 된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실로 하나님은 모든 피조 세계의 주인으로서, 그분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우주 안에 아무것도 없다. 그는 유일하시며 완전하시고 또한 만물을 친히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1. 마음과 성품과 힘.

하나님은 본문 5절에서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서 ‘마음’에 해당하는 원어 ‘레밥’은 지, 정, 의를 포함하는 인간의 내적, 정신적 본질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품’에 해당하는 ‘네페쉬’는 영혼, 생명, 호흡 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육체와 정신 전체를 포괄한 전인격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에 해당하는 ‘메도드’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력 및 모든 능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으 전적인 헌신과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사랑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그다. 그러나 나는 죽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나 자신을 너를 위해 주었다. 나는 심지어 죽음조차도 깨뜨릴 수 없는 구속으로 너를 영원히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진실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너 역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해라”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인간인 제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위해 행할 것이니 다음과 같은 명령들에 복종하여라.”

1) 모든 분노와 화냄과 악의와 악한 말들을 삼가라. 이런 모든 것들은 나의 영을 탄식하게 하는 것이다.

2) 성령께서 네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도록 너를 성령님께 맡겨라.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

3) 특별히 내 사랑의 대상이 너라고 생각하라. 네가 아직 죄 중에 빠져 있을 때에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한 희생을 숙고해 보아라. 이로서 너는 너의 죄를 씻고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를 즐기게 될 것이다.

4) 만약에 너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너의 의지를 나에게 맡겨라. 그리고 내가 나의 의지에 따라서 네 안에서 일할 수 있고, 나의 기쁜 뜻을 따라서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라.“

적용

1)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묵상해 보고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보자.

2)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3)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4)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인식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를 성령님께 사랑의 도구로 내어 드리자.

제 목 : 이방인과의 결혼

본 문 : 신 7:1-11

요 절 : (신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본 장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제2계명에 관한 교훈으로 집중되어 있다. 조만간에 이루어질 가나안 정복 후 백성들이 접하게 될 가나안 종교와 그 우상들에 대하여 엄히 경고하며 이를 멀리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본문에는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신앙의 동반자로 생각한 적은 없으나, 이방인과 결혼하면 이방인 남편과 아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부패시킬 것이므로 그들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세계와 분리된 수수한 성민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다.

1. 악인의 개종보다 선인의 타락이 쉽다.

오늘날 많은 신앙의 젊은이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타종교인과의 결혼을 통하여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위험스러운 생각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거듭나게하여 개종시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거부하고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생각대로 성령님이 움직이실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인 결혼으로 인하여 자기를 망쳐 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솔로몬 역시 이 점에서 자신의 우매한 결정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러므로 배우자의 선택은 신앙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

2.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4절에서 말씀하신다. “(신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하여 그들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나 한편으로는 철저한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보편적인 면에서는 바다와 같이 넓고 크신 사랑을 베푸시지만 언약의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일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시며 철저히 징계하신다.

본문 4절에 나타나는 “갑자기”라는 말은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이 ‘갑자기’라는 말의 원어는 ‘마헤르’인데 ‘서두르다’, ‘속도를 내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 뜻은 예기치 못한 일이 돌발적으로 발생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속히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방인과 결혼하여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면 아무리 자비하신 하나님일지라도 지체없이 벌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3. 타협보다 단절이 유리하다.

이러한 결혼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멸절시키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멸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사회와 관습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하셨다.

학살은 무자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민족으로 완전하게 선택받은 민족을 보존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멸절과 단절은 최고로 엄격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너무도 사랑스러운 백성이기에 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가장 완벽한 선택을 해야 했다. 단절이나 멸절은 타협이나 다른 방법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어떠한 위험도 배제된,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 고백이었다.

적용

1) 우리 주위에 있는 신앙인과 불신앙인의 결혼의 예들을 나열해 보고 불신앙인의 거듭남과 신앙인의 타락의 수를 비교해 본다.

2)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쉽게 야기되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임을 기억하고, 우상 숭배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 번 가다듬어 본다.

3) 선택된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타협보다는 단절을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더욱 더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앙인이 된다.

제 목 : 그분은 너를 주리게 하셨다.

본 문 : 신 8:1-10

요 절 :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 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준행하라는 율법의 대강령을 단순히 계명 전달 위주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실제로 과거의 역사를 예로 들어 선포하였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지난 40년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을 지켜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키면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라고 권면하는 부분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를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실로 광야 40년의 고난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단련하시고 선장시키셨던 것이다.

1. 그분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굶주리고 목마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백성들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들에게 고난을 주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삭막하고 메마른 광야에서 40년 간이나 생활하는 동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조차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서는 40년 간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시며 해진 옷과 신발을 신지 않게 해 주셨다. 절대 결핍의 장소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굶지 않았고 신발이 없어 발이 주르트지도 않았다.

2.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행하도록 인도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간이나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그러하시에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올라가 그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이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인생을 구원하시어 천국 백성을 삼으시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성령님께 복종하는 신실한 마음이 필요하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여러 위험 앞에서 철저히 자신들의 무력감을 통감하며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했다.

3. 그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양식으로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주리게 하셨다가 만나를 먹이셨다. 궁핍의 최고 경지는 그때 그들에게 베풀어지는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기쁘게 받고 더욱 두드러지게 할 수 있었으리라.

만나는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들도 전혀 알지 못하는 종류의 음식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 방대한 양으로, 또 그렇게 끊이지 않고 어느 계절이든지 그렇게 오래, 그리고 일정하게 정해진 지역에만 떨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이것은 완전한 기적이요, 전례없는 일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간을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만드는 특별 교육 기간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적용

1)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40년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해아려 보고, 철저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자.

2)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우리 안에 교만한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보자.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간 가르치시기 원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고 지금 우리가 겪는 고난과 비교해 보자.

제 목 : 너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본 문 : 신 9:1-5

요 절 : (신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본 장은 전 장에 이어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갖게 될지 모를 자만심에 대하여 경고한다. 이를 위해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은헤임을 밝히고, 이스라엘의 공로는 오직 금송아지 사건과 다른 여러 곳에서의 패역함뿐임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살려 주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영광에 호소한 모세의 중보 기도 때문임을 밝힌다.

진정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입성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아무런 칭찬받을 요소도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1. 오직 은혜였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5절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신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 그리고 또 4절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신9: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하나님은 거듭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얻게 됨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님을 명백히 하셨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입성은 의로움과는 무관하였다. 그들이 가나안 땅 입성 전까지 하나님께 보여준 것은 원망과 패역함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모든 것을 참으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당연한 권리로 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고, 주시는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의 자유로운 은혜로부터이다. 우리의 구원도 그분의 은혜 때문이고, 우리가 그분의 양자 됨도 우리의 공로와는 무관한 그분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불순종과 반역된 행위와 부끄러움과 좌절뿐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셨다. 오 하나님의 높고 깊고 풍요한 은혜여!

2. 민족의 악함 때뭉이었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에 의하면 가나안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컸다. 네겝의 아말랙인이든 산지의 햇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이든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단 계속에 거하는 가나안인이든 그들은 모두 강했다.

“(출17: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출17: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출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출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출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출17: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17: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군들의 비판적인 주장대로 힘이나 외적인 조건으로는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 승리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민족들의 악함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스스로 쌓아올린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당한 것처럼, 가나안 족속들도 아브라함 이후 근 700여 년 동안이나 계속 쌓아올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추악한 죄악들 때문에 그 심판의 날을 자초했던 것이다.

“(창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

3. 조상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후손이 막강한 나라가 되어 가나안 땅을 상속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변개치 않으신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약속을 생각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적용

1)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드리자.

2)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쫓겨난 가나안 땅 사람들을 생각하며, 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죄가 없는지 살펴보고 철저히 회개하자.

3) 과거 조상들과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갖자.

제 목 : 하나님의 뜻

본 문 : 신 10:12-22

요 절 : (신10: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본 장은 내용상 전 장의 연속으로, 우상 숭배로 인해 파기되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그분의 은혜로 다시 회복되었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곧 오늘날 패역한 죄로 인해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들도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갈뿐 아니라 내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을 그붐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인가?

1.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만을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전체로 보신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기에 만물의 보이는 부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도 아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체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외모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 영혼까지 너무나 잘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방법대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보듯이, 자녀인 우리들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내면과 진실함을 보아야 한다.

2.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부패하기 이를 데 없는 이방신들과는 달리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시며 정의를 즐겨 수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 고대 근동의 신들은 마음으로부터 돌이킴이 없이 바치는 제물도 그대로 가납하는 탐욕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은 참된 회개나 믿음이 없이 바치는 제사나 제물은 절대 수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불의한 제물이나 제사를 싫어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공의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특별히 뇌물은 공의를 구부러뜨려 불의를 행하게 하므로 철저히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물의 먹음직스러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정의를 세워 가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야 한다.

3. 고아와 과부를 신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셨다. 여기서 ‘신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 미쉬파트’는 ‘정의를 행하다’ 또는 ‘정당한 권리를 찾아 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늘 고아와 과부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신다는 말이다.

고아나 과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나 천대를 받기 쉽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항상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러한 고아나 과부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친히 ‘고아의 아버지’ 또는 과부의 재판장‘으로 선포하신다. 공의를 기뻐하며 사라의 세상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고아의 아버지 또는 과부의 재판장으로 부리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시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여라!”

적용

1) 지금까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 예를 생각해 보고, 그 각각을 바르게 보는 방법을 찾아 본다.

2) 오늘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뇌물의 예들을 나열해 보자.

3) 더러운 뇌물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일면들을 제시해 보고, 뇌물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시 새기자.

4)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고아와 과부를 우리는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 보고, 그들을 위하여 신원하는 삶을 살자.

제 목 :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본 문 : 신 11:18-32

요 절 : (신11: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신11:23)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6장에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순종을 촉구하고 있는 모세는 이제 본 장에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여구가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그리고 번영과 파멸의 갈림길이 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따라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 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과 참된 자유가 허락되지만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심판 그리고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복음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모든 계명들은 우리가 무엇을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계명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만약 우리의 병이 고쳐지기를 원한다면 담당 의사가 금지하는 것을 피해야 하고 지시하는 것을 따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그분의 모든 계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시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본문 22-23절에서 말씀하신다. “(신11: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신11:23)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

그러나 하나님은 또 본문 28절에서 말씀하신다. “(신11: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2.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끊임없이 우리에게 붙어 다니는 죄악들을 쫓아 버리거나 정복해 버리지 않으실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그 죄악들을 소유하지 않을지라도 그 죄악들은 우리를 소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거나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행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가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쫓아 다니는 죄악으로부터 구해 주실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분이 재판장이시며 왕이실 때만이다. 저명한 외과 의사는 만일 그에게 전체적인 감독이 맡겨지지 않는다면 환자를 책임지지 않으려 할 것이다. 장군은 한 도시의 통치권이 전적으로 자기 손에 넘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 도시를 보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만 그분이 얼마나 강한 분이신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매일 그와 함께 교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본문 18절에서 “(신11: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신11: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하면 언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매일 매순간마다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연약한 우리가 시험에 들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타락의 길을 향해 떠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용.

1)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 받게 될 징계도 적어 보자.

2) 매일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고백한 후에도 실제로는 우리 뜻대로 살아온 순간들을 반성해 보자.

3)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해 보고 이를 실천하자.

제 목 : 여호와 앞에서 모두 함께 기쁨으로

본 문 : 신 12:1-19

요 절 : (신12:18)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본 장에서부터 26장 19절까지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의 본론으로, 본 장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에 관한 재해석과 적용이며, 본문은 특별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어떻게 여호와를 섬길 것인가 하는 방법적인 규례에 관해 상술하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이방인들의 다신론 사상과 자기들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신당이나 신전을 지어 놓고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인간 중심의 예배 장소와 제사 방법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강조하고 있다.

1. 여호아 앞에서.

하나님은 본문 5절에서 예배는 “(신12: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방신에게 하는 예배처럼 예배자 마음대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원하는 신성한 장소에서 드려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열납하신다는 말이다.

또 하나님은 본문 7절에서 예배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드릴 것을 가르쳐 주신다. 곧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성한 장소에서 드려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드려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므로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이다.

2. 모두 함께.

하나님께서는 본문 12절에서 예배시 함께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곧 “(신12:12)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찌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1차적인 관심은 소외된 사람 없이 모두 함께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가깝고 친한 사람만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제외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노비나 가난한 레위인 등 모든 소외된 이웃과 함께 드려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가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어떠한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외제 밍크코트를 입고 참석해야 어색함없이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들은 없지 않은가?

3. 기뻐함으로.

예배는 본래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리는 예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즐거워할지니라”. “즐거워할 것이요.”, “즐거워하되” 등 본문 안에서만 세 번이나 반복하여 예배 시간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질 것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괴롭히고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인간에게 희생 제사를 원하는 이방신들과 달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본문 7절 말씀처럼 “수고한 일에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적용

1) 오늘 한국 교회가 드리는 예배가 진정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드리는 예배인지 생각해 보고, 그렇지 않은 면이 있다면 하나하나 나열해 보자.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모든 사람이 소외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기억하고 오늘 우리의 예배를 성찰해 보자.

3) 오늘 우리의 예배 속에 진정 기쁨이 넘치는지 생각해 보고 기쁘고 즐거운 예배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 보자.

제 목 : 하나님의 시험

본 문 : 신 13:1-11

요 절 : (신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수많은 시험을 만난다. 그 시험들은 때때로 우리를 실망과 좌절로 인도할 때도 있으나, 때로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험은 사람을 연단하고 교육하는 도구로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하나님께서도 시험을 신잉인의 단련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적절한 방법으로 그를 시험하시고 연단하신다.

본 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소개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경험하게 될 시험과 유혹에 대해서 말하고 이러한 시험을 엄밀히 경계하여 물리칠 것을 촉구한다.

1.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은 먼저 기사와 이적을 통한 시험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기사와 이적은 진리의 시금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적은 많은 종교에서 일어나며, 사탄은 세상을 속이기 위해서 종종 거짓 종교와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이러한 이적을 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적과 기사를 진리의 시금석으로 생각하여 시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예언이 적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의 예언이 하나님의 명령과 모순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한 기적보다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며, 하나님만이 모든 진리의 판단 기준이시기 때문이다.

2. 돈을 통하여.

하나님은 때때로 그분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돈을 통하여 우리를 판단하신다. 돈은 우리를 쉽게 시험에 들게 한다. 그리고 돈은 때때로 우리의 진정한 부요함이 아니라, 불의한 부로 묘사된다.

그러나 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보물들을 맡기시기 전에 우리를 시험하려고 맡겨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사용할 때 주의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 이 땅에서의 돈의 사용 방법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맡겨 주신 당신의 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감찰하신다.

3.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본문 6절에서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우리를 유혹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형제나 자녀나 아내마저도 우리를 시험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진정 가족이나 친구로 말미암는 유혹은 참으로 그 누구도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도 가족이나 친구들에 의해 미혹되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신다.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너무도 분명하고 단호하시다. 곧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용

1) 기사와 이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분명한 진리의 기준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서는 신앙 생활을 하자.

2) 우리가 지금까지 겪은 시험 가운데 돈으로 인한 경우를 생각해 보고 돈에 대한 경각심을 갖자.

3)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의 시험의 예를 찾아 보고 그 대처 방안을 말해 보자.

제 목 : 가지고 갈 수 없거든

본 문 : 신 14:22-27

요 절 : (신14: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은 매우 특별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종류의 십일조를 예배 처소가 너무 멀어 나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들을 돈으로 바꾸어서 그 돈을 싸가지고 가서 그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예배가 지루해진다든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영혼이 쇠약해져도 된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예배자가 원한다면 예배자가 예배에 필요한 완화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추리는 이러한 원리를 몇 가지 면에서 적용해 볼 수 있다. 곧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힘든 노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이나 사역은 기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 주님의 날은.

일주일 중에서 가장 기쁜 날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과 기쁨과 거룩한 노래로 충만해야 한다. 주님의 날은 그 날을 우리 모두 힘겹게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날이 아니다. 하나님은 본문 26절에서 말씀하신다.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종 절기와 예배를 주심은 그들이 지금까지 수고한 수고의 결실과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기쁨을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나누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은 어떤 형태로든 한 주간에서 가장 기쁜 날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녀나 모든 사람들이 기쁨으로 고대하는 날이 되어야만 한다.

2. 크리스챤의 사역은.

기진맥진할 정도까지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건강과 정신이 파괴되어 그 사역자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나거나 능력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다. 또 우리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선하기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 선택이나 우리 크리스천의 구원은 일의 수행이나 공로와는 관련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사역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의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헌신의 행위는 .

우리의 기쁨과 재충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 때때로 기도의 능력보다는 기도의 길이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안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들의 헌신의 형태는 아주 다양하고 길어서, 다른 사람들의 동정이나 관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건전한 헌신은 진실된 마음가짐에서 나오며 기쁨에 넘쳐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남이 보기에 아무 의미 없는 기도의 말을 반복하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금식을 계속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이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 땅에서 가장 천국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에 있어서 신자의 헌신 역시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적용

1) 오늘날 한국 교회의 주일의 모습을 분석해 보고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2) 한국 교회의 대형화와 물량주의화의 병폐로 인하여 야기되는 지나친 크리스천 사역의 병폐를 진단해 보고 크리스천 사역의 바른 가치관을 확립하자.

3) 우리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참모습을 생각해 보고 지금까지의 우리의 헌신과 비교해 보자.

제 목 : 영원한 종

본 문 : 신 15:12-18

요 절 : (신15:17)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

본문에 나오는 종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영원한 종이 되기를 원한다. 본문 16,17절 말씀에 따르면 어떤 종이 그 주인집에서 주인과 함께 6년을 살고도 주인집을 떠나기 싫어하여 자신의 귀를 뚫고 주인의 영원한 종으로 남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그 종은 주인과 함께 사는 것을 자유자가 되어 세상에 나가 홀로 사는 것보다 좋다고 여겼기에 영원한 종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 역시 우리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보다 누군가의 종으로, 특별히 우리에게 모든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을 모시고 그 주인의 종으로 살기를 원한자. 바울 역시 누군가의 종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기를 즐겨 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우리에게 다른 피난처는 없다. 다른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다. 우리 역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매에게서 달아나는 새처럼 우리는 그분의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폭풍에 쫓겨온 선원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참 피난처를 맛본다. 우리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을 선택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분의 부드럽고도 강한 품에 놀라 탄성을 외친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그분과 함께 남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나가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복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가 홀로 방황하지 아니하고 누군가의 종으로 영원히 후회 없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2.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마음속 깊이 사랑한 나머지 그분 없이 홀로 있기 보다는 그분과 함께 어디든지 가겠다고 결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결심은 그분의 재가가 필요하다.

본문에 나오는 종은 6년 동안 주인과 살았던 세월이 너무 좋아 영원히 주인의 집에서 주인과 살기를 원하여 주인의 허락을 얻어 자신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었음을 만방에 알리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귀를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곧 자기 희생과 자아 포기의 피를 통해서, 우리의 이기적인 삶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곧 자기 희생과 자아 포기의 피를 통해서, 우리의 이기적인 삶을 십자가에 못박음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과 부활에서 그분과 동일시함을 통해서, 우리를 방해할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과 보다 깊고 가까운 사람이 된다. 송곳으로 귀를 뚫은 종만이 주인의 영원한 종이듯이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종이 될 수 있다.

3. 영원히 주인집에 머물러야.

본문에 나오는 종이 아무리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뚫었다 할지라도 몇 년 후 그 종이 주인집이 싫어 그 주인집을 떠나 멀리 도망하였다면 그는 그 주인의 영원한 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종이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송곳으로 귀를 뚫는 것 이외에도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인과 함께 살겠다는 결심과 이를 실천하는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떠나고 싶은 마음을 쳐서 복종시켜 세상 끝날까지 예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적용

1)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심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결심해 보자.

2) 십자가에 자신을 목박은 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고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께 삶 전체를 맡기자.

3) 영원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영원토록 주의 집에 거해야 함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주의 뜻과 말씀의 집안에 거하자.

제 목 : 너는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본 문 : 신 16:9-17

요 절 : (신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본 장은 이스라엘 모든 성인들이 1년에 세 차례씩 반드시 중앙 성소에 올라가 지켜야 할 이스라엘의 3대 절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 중 1-8절은 유월절에 관한 규례이고, 9-12절은 칠칠절에 관한 규례이며, 13-17절은 초막절에 관한 규례이다. 그리고 18-22절은 부언적으로 이스라엘은 재판에 있어서도 공의를 수호해야 하며 단연코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됨을 설명한다.

이 중에서 본문은 칠칠절과 초막절에 관한 이야기인데, 인상적인 부분은 이러한 축제의 절기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가족 외에 노비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고부와 같은 소외되기 쉬운 이웃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1. 너도 종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 돌아오면 무교병을 먹는다. 이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떡으로, ‘고난의 떡’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무교병을 먹는 것은 과거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고난의 시절과 그곳에서 탈출하던 상황을 기억하면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하신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다시 말하면 너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해 보았으니, 종처럼 소외된 노비나 객이나 레위인, 고아 과부의 형편을 이해하고 기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삶을 위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말씀하신다. 너희도 과거에 온갖 죄의 종으로서 살다가 구원을 얻었으니. 네 이웃에 있던 죄인들을 멸시하지 말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라.

2. 그들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동정의 손으로 어루만지고 달래면서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구호품 분배 관리자로 적당하게 훈련시키기 위해 당신을 불 같은 시련을 통과하도록 인도하시는지 모른다. 그리고 당신을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자로 부르실지 모른다.

하나님은 부드러움과 온유한 말씀으로 당신이 슬픔과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인도하시고, 그 결과 당신은 그분이 당신을 위로하던 어투와 부드러움과 관심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렇게 훈련시키신다면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관심은 고아와 과부와 소외된 이웃과 고통받는 종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고, 그들을 구원하여 소외된 이웃을 부탁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소외도니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그들을 교회의 진정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3. 온유와 친절로 하라.

부드러움과 진실된 친절이 없다면 우리의 선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마음으로, 육체로 또는 환경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 본 사람만큼 민감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구제를 베푸는 태도에 있어서 사소한 거침이나 가혹함조차도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은 마지못해서 큰 선물을 던져 주는 것보다도 소량이지만 온유한 마음으로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스라엘 배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신들의 쓰라린 과거를 기억하며 고아와 과부와 객에게 온유와 친절을 베풀 듯이, 오늘의 교회도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았던 과거를 기억하며 모든 소외된 이웃에게 진정한 사랑과 온유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적용

1) 하나님이 이 땅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들을 말해 보자.

2) 우리 역시 죄인이었음을 기억하고 비록 죄인 된 이웃일지라도 참사랑으로 대하자.

3) 지금까지의 우리의 구제 모습을 명상해 보고 잘못된 점을 기록해 보자.

제 목 : 율법서를 가까이하라

본 문 : 신 17:18-20

요 절 : (신17: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스라엘의 왕은 율법을 따르고, 그것을 자신의 규칙으로 삼아야 했다. 율법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부귀와 명예와 오락보다 더 좋은 것이 되어야 했으며, 많은 말과 많은 아내아 수천의 금은 보화보다도 더 귀한 것이 되어야 했다.

그는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보관하고 있는 율법서 원본에서 자신이 직접 사본을 베껴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골방에 보관해 주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 된 자가 좀더 훌륭한 왕으로 오래도록 왕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율법서을 가까이 두고 주야로 읽게 하셨다.

1.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성경은 소유한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매일 읽히고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성경이 주는 만나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소화만 잘된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에 참된 자양분이 되고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만일 어떤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그 영혼은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본문 20절 말씀을 통하여, 성경을 읽고 배우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심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것과 자신은 그분의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자들은 하나님을 즐거이 경외하게 된다.

2. 교만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20절 말씀에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셨다. 이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교만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교만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죄이다. 천사들도 교만으로 인하여 타락하였다. 천사들이 교만에 의해서 타락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교만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는가! 어떤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다가 명령하는 영향력있는 위치로 승진하게 되면 그는 교만이라는 유혹을 만나기 쉽다. 그리고 그가 매번 받게 되는 아첨은 겸손하게 사는 것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가 한 번 교만함에 빠지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닫게 된다. 그리고 교만하게 된 사람은 자기 위치를 더욱 더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은금을 모으고 말들을 즐가시킨다. 결국 그로 인하여 가장 높으신 분의 도움의 문을 막아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교만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성경만이 우리의 교만을 꺾고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

3.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그에 대한 더 큰 보상을 받게 된다. 먼저 본인이 큰 복을 받게 된다. 그가 왕이라면 왕위에 견고히 앉아 오래도록 왕위를 유지할 것이다. 또 그가 사업가라면 사업이 확장되고 불경기에도 요동하지 않는 기업을 이룰 것이다.

또한 그의 가족이나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된다. 비록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앙위 세습 제도가 인정되기는 하였지만 만약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합당치 않은 태도와 행실을 취한다면 그 왕위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20절에서 약속하셨다.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곧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자손도 큰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적용

1) 이스라엘의 왕들도 율법서를 필사하여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었음을 기억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함에 대한 새로운 경각심을 갖자.

2) 교만함으로 야기될 수 있는 폐해들을 생각해 보고 성경을 더욱 가까이함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자.

3) 성경을 주야로 읽고 묵상함으로 얻게 될 복들을 하나하나 적어 보자.

제 목 : 하나님의 선지자

본 문 : 신 18:15-22

요 절 : (신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본 장은 모세의 두 번째 설교 중 지도자에 관한 규례의 마지막 부분으로, 종교 지도자들에 관한 규례이다. 그 중 1-8절은 제사장가 레위인에 대한 규례로서 그들의 분깃을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9-14절은 제사장과 전혀 다른 이방 사술자들을 용납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마지막으로 15-22절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에 관한 규례이다.

하나님은 이방 사술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보내시는 선지자들으 특성을 정확히 묘사해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선지자들을 따라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셨다.

1.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사람이다. 하나님은 본문 15절에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장차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또 하나님은 본문 18절에서 다시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당신이 직접 세우실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진실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어떤 형태로든 개입되지 않은 선지자는 참 선지자라 말할 수 없다.

2.말씀을 맡은 사람.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본문 18절에서 말씀하신다.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말을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계시해 주시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전령이자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줄곧 메시지의 내용을 선포하기에 앞서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렘13:1)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 “ (겔6: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을 먼저 전제한 후 메시지를 선포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을 그대로 전하였다.

3. 궁극적인 선지자.

모세와 같은 궁극적인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분이셨으며,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신 분이셨다. 여호수아라 할지라도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세 이래로 백성 앞에서 능력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있어서 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모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모세는 미래의 모든 선지자들을 위하여 기준을 설정하였다. 선지자 각자는 새 언약을 선포하실 분이 오실 때까지 모세의 모범에 따라 행동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은 모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궁극적인 선지자가 나타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모세처럼 이스라엘에게 표적과 기사와 능력있는 행동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임을 증명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었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적용

1)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자.

2)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임을 명심하고, 맡겨 주신 말씀을 더욱 자세히 연구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자.

3) 이 땅에 오신 가장 궁극적인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고, 오직 그분의 인도하심과 사랑 안에 거하자.

제 목 : 형제에게 행한 대로 갚으라

본 문 : 신 19:15-21

요 절 : (신19:19)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 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본 장에서부터 25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 생활에 관하여 교훈한다. 그 중에서도 본 장은 십계명 중 이웃 사랑과 관련된 제반 규례들을 설명한다. 곧 1-13절은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과 관련된 도피성 제도이며, 14절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 8계명 및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제 10계명과 관련된 경계표 제도이고, 마지막으로 15-21절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 9계명과 관련된 위증에 관한 규례이다.

본 장은 기독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이웃에 대한 실천적이고 궁체적인 사랑을 베푸는 종교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문은 특별히 악인에 의한 무고나 위증에 예를 들어 악인에게 그가 행하려던 악을 되돌려 주라고 명령함으로 하나님의 세심한 사랑과 공의의 정신을 보여준다.

1. 나쁜 일을 행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이 있다.

나쁜 일을 행하면 천벌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앙갚음을 당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모략을 꾀하면 그 모략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칼을 자기고 있는 사람들은 그 칼로 인하여 망한다. 아들과 아버지를 타락시키기 위해서 술을 파는 술집 주인은 자기 자신의 가족이 술로 망하는 것을 보게 도니다. 여자들을 배신하는 남자는 자기 아들이 여자들의 계략하에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서 교수대를 세웠다. 그렇지만 그 교수대에 처형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아도니베섹은 사로잡힌 왕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랐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 닥쳐왔던 운명의 공의를 고백했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강요했다. 그러나 곧 이것이 인도와 버어마에서 자기 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부패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직한 사람들이 악한 길로 빠져들도록 저주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2. 왜 그럴까?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시며, 현제의 희미한 커튼 뒤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형벌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당장 보려고 기다릴 필요는 없다. 이제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그분 앞으로 모든 족속들이 모여든다. 니느웨, 발빌론, 가버나움, 두로, 폼페이, 스페인 제국, 나폴레옹 제국 증은 이미 Hades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지금 재판이 열렸다. 그리고 책들이 펼쳐졌다. ‘오라, 너 축복받은 자여’라는 말과 ‘떠나라, 너 주주받은 자여’라는말이 선포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그 자신이 일생 동안 적절한 손해를 당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예비하셨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그가 행한 대로 적절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3. 그러므로 선을 행하자.

하나님이 모든 악에 대하여 상응하는 벌을 내리시는 이유는 이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본문 21절에서 “(신19:21)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눈은 눈으로,이는 이로,손은 손으로,발은 발로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긍휼이 없으시기 때문도 아니고, 징계만을 즐겨 하시는 악한 신이시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오직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게 하시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악을 제하고 선을 행하여, 이 세상을 선함과 착함과 진실함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적용

1) 우리 주위에서 악한 일을 행하다 그 악으로 인하여 자신이 벌을 받은 사람의 예를 찾아보고, 우리의 악행에 대한 경각심을 갖자.

2) 오늘도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우리의 언행 심사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근신하는 마음으로 행하자.

3) 악을 제하시고 선을 이루시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한 가지 선이라도 더 행하는 선도들이 되자.

제 목 : 이스라엘의 전쟁

본 문 : 신 20:1-9

요 절 : (신20:2)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거든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본 장은 이스라엘의 전쟁에 관한 규례이다. 여기서 전쟁이라 함은 우선 아직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수행해야 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의미하고, 다음으로는 그 곳에 정착한 후 사면에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시도할 열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잔순한 국가 간의 전쟁이나 국지전이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언약으로 인침받은 거룩한 땅 가나안의 회복과 수호를 위한 성전이었으며, 영적으로는 사탄의 왕국을 쳐부수고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거룩한 성전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쟁에는 다른 전쟁에서 보기 어려운 요소들이 전쟁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것은 제사장과 용기와 믿음이었다.

1. 제사장.

이스라엘의 전쟁에는 다른 나라의 전쟁과는 달리 항상 제사장이 함께했다. 이 제사장은 순수하게 제사직만을 수행하는 일반 제사장과는 달리 비느하스처럼 군사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제사장이었다.

“(민31:6) 모세가 매 지파에 일천 인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싸움에 보내매”

이들은 전쟁에 나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군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들의 역할은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법궤를 돌보는 일과, 참으로 용기를 내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군사들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상징이었다.

2. 용기.

하나님은 본문 3절에서 말씀하신다. “(신20: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하나님이 제사장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두려워 말라고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은 용기라는 것이다. 아무리 무기가 좋고 군사력이 월등하여도 군사들에게 용기가 없다면 그 군대는 승전가를 부를 수 없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도 그에게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골리앗이 죽은 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이길 수 있었던 요인도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으로 인해 잃었던 용기를 회복하였고, 블레셋 군대는 용기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본문 8절에서 말씀하신다. “(신20:8)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3. 믿음.

말과 병거는 당시 군사력의 상징으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던 정예 주력 부대였는데, 당시 애굽과 가나안 민족들은 이러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스라엘에게는 그러한 말과 병기가 없었다. “(출14:7)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수17:16)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들의 군사력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숱한 이적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켰고,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광야의 숱한 역경 중에서도 별다른 희생 없이 가나안 문턱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단지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단즌 믿음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 대적을 치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쟁의 승패는 오직 그들의 믿음에 달려 있었다. “(신20: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

적용

1) 이스라엘이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들을 나열해 보고, 오늘 우리들의 상황과 연계시켜 생각해 보자.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한 용기를 생각해 보고, 용기의 가치를 되새겨 보자.

3)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 무기였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도 이를 적용해 보자.

제 목 :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

본 문 : 신 21:1-9

요 절 : (신21:4)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본 장에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사회적인 성결에 대한 규례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속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내용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가엾은 암소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살인범을 대신해서 목이 꺾여 죽어야 하는 “부리우지도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이다. 이 암송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류를 대신해서 피흘리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하며 그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게 된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죄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는 범인을 모르는 한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피흘린 죄가 돌아가게 하지 않기 위하여 피흘림의 속죄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의 피를 흘려 속죄제를 올렸다. 이는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죄사함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어린양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속하심으로 수많은 제사아 피흘림은 중단되었다. 이 어린양 예수는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의 죄악을 단번에 짊어지시고 속죄피를 흘린 것이다. 암송아지가 살인범을 대신하여 희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타락한 우리들의 죄와 형벌을 보상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의 은혜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도말한 죽음이다. 암송아지의 목이 꺾인 장소는 ‘물이 항상 흐르는 곳’이었다. ‘항상’은 원어로 ‘영원한’이란 의미이다. 결국 물이 항상 흐르는 곳에서 암송아지를 죽인 것은 암송아지의 피로 속량된 살인자의 죄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영원히’떠나보낸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영원히 제거하시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 9:26,28)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제사를 드리신 바 된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다.

어린 암송아지의 죽음은 이름 모를 살인자를 위한 죽음이다. 그러므로 이 암송아지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인 것이다. 이때 대속의 방법은 어린 암송아지에게 피흘린 죄를 전가시켜 그 송아지의 목을 꺾는 것이다. 원래는 살인자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 암송아지가 살인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의 피를 흘림으로서 살인자의 죄는 이스라엘 중에서 해결함을 받는다. 여기서 어린 암송아지는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을 예수를 예표한다. 예수는 아무 죄가 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분이다. 즉, 암송아지가 죄를 대신하여 희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보상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며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모든 인류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산 제물이 되셨다.

적용

1)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속주가 되신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합당한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3)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기억하며 대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본받아 남을 위한 희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제 목 : 이웃 사랑의 법

본 문 : 신 22:1-4

요 절 : (신22:1)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본 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서 지켜야 할 사회 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율법이 언급되어 있다. 특히 사회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이웃 사랑에 대한 규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창조적 질서에 역행하는 일체의 행동들은 대부분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법으로 설정하고 있다. 어느 주석가는 이를 인도주의적이며 의식적인 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명기 법전에서는 성결 법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은 없으나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본문은 이웃 사랑에 대한 규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1. 이웃 사랑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본문에서 3번이나 반복되는 중요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못 본 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숨기다”란 말이다. 그러므로 “못 본 체한다”는 것은 일부러 이웃의 어려움을 회피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이 행위에 대하여 거듭거듭 금지하고 있다. 이 말은 무척이나 평범하고 단순한 말이나 너무도 이기적이고 철저하게 무관심한 사회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도전이 되는 말씀이다. 구체적으로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체하지 말라” “형제가 잃은 것을 못 본체하지 말라”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웃의 곤경이나 손해를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지 말고 관심을 가지라는 명령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불쌍한 자나 가난한 자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곧 주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기에 이는 성도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2. 이웃 사랑은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은 이웃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본문에서 “너는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고 한다. 이는 권면이 아니고 명령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주어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책임가 의무와 명령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야고보 사도를 통하여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강조하신다. 뿐만 아니라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진정으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랑은 분명 위선과 가식이며, 입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이웃 사랑은 작은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지극히 작은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고 있다.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주인에게 돌려주고”, “잃어버린 의복을 찾아 주며”, “형제나 나귀와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일으켜 세워 줄 것이며····”등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다. 즉, 일상 생활 속에서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과 사랑과 보살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한 일만을 사랑으로 실천하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지극히 작은 일, 평범한 일상 사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작은 일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작은 일들을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작은 일에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큰 일에도 사랑을 갖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용

1)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사랑이 보족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를 반성해 봄이 필요하지 않은가?

2) 우리는 사랑을 이론적으로만 배우고 아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삶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3) 기독교 교회 안의 종교로만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불신자를 포함한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보살핌이 필요하다. 강단과 교회 안에서의 사랑의 울림이 진정 세상으로 향해 선한 사마리아식 사랑의 메아리가 되어 울려 펴지고 있는가?

제 목 : 총회에서 제외되는 자

본 문 : 신 23:1-3

요 절 : (신23:1)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신정 국가의 일원인 우리는 공적 혹은 사적인 모든 생활에서 거룩하게 구별되는 삶이 요구된다.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세 종류의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총회”란 이스라엘에서 시행되는 크고 작은 모든 공적인 집회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정 국가에서 시행되는 공적인 사회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란,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모든 종교적 예배 의식과 회합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 성결하지 못한 자.

본문 1절에 보면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총회에 참여할 수 없다. 이는 남자 생식기의 일부인 고환이 상하여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자나, 남자 생식기가 거세되어 후천적으로 고자가 된 자를 말한다. 이는 결혼 제도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규례를 적고 있는 전 장과 연결시켜 볼 때,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자라면 또한 정상적인 사회 활동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결함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 예배자 역시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성결해야 할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죄로 인해 성결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는 결단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참예배자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2. 음란에 거하는 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본문 2절에서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생자란 정상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나지 못한 자를 말한다. 탈무드에나 유대 랍비들은 이들을 간음이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식으로, 벌게이트역에서는 창기로부터 얻은 자식으로 본다. 따라서 사생자란 인간의 정욕에 의한 음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사회가 물질적으로 발전하고 인간 생활이 편해질수록 음란과 관련된 범죄는 늘어가고 있다. 현대 사회를 일컬어 3S(Sport, Screen, Sex) 시대라고 한다. 특히 인간에게는 누구나 본능적인 음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성의 문제는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삶 속에도 깊이 침투해 들어 올 수 있다. 성경은 엄치 경고하기를, 음란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음행의 문제에 대하여,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는 바울 사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고 3절에서 말씀하신다. 암몬과 모압 이 두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과 영원히 화친할 수 없는 족속이다. 이들에 대해서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역사적으로 그 두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었던 적대적 태도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평안과 형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에스라는 그들과 결혼 관계를 맺지 말 것을 단호히 경고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방해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뜻에 항거하는 죄를 짓고 말았다. “(스9:12)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거역하는 자는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심판하고 벌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창조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신앙인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적용

1) 죄로 인해 오염된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2) 사회 전반이 음란한 문화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성도의 거룩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3) 신앙인이면서도 혹시 불신앙 가운데 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지는 않은가?

제 목 : 약자를 위한 보호 규정

본 문 : 신 24:10-22

요 절 : (신24:13) 해질 때에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

본 장에는 19장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사회 생활에 관한 규례가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다. 본 장의 내용을 한마디로 종합하면 “약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보호 규례”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사회의 여러 종교나 법률들은 소수의 특권층만을 옹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반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이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은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며 살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하나님의 보호와 긍휼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약자들을 도울 수 있을까?

1.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줄 때 담보물을 잡기 위해 채무자의 집안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물건을 담보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채권자가 간섭하지 말고 전적으로 채무자의 뜻에 맡기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국 채무자의 생계 유지에 꼭 필요한 물건은 채권자가 담보로 잡지 못하게 하려는 규례이다.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안에까지 들어와서 막상 어떤 물건을 담보물로 잡아 버리면, 바로 그 물건이 채무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절하기가 어렵다. 결국 가난한 자를 도움으로써 백성들 중에 한명이라도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이다. 예수님게서도 ‘누가 겉옷을 요구하거든 속옷까지 내어주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약한 자를 위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깨달아 가난한 자를 세심하게 보살필 줄 아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2. 가난한 자를 직접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신24: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그렇게 무리한 명령이 아님을 다음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신24:18)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도 과거에 노예 생활을 벗어나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지금 자기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리를 죄악과 사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무한한 희생을 기억하고, 또한 지난날의 역경 가운데서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며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렵고 곤고한 이웃을 향해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사랑의 자세가 필요하다.

3.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경제의 목적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용자 편에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대의 생산성 내지는 자기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임금을 체불한다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것은 정녕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신24: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군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신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 사용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근로자를 박대하거나 착취해서는 안 된다. 근로자의 정당한 수고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인격적인 대우, 비인간적인 근로 환경, 터무니없는 저임금 등은 반드시 개선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시기 때문이다.

적용

1) 우리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한 개인적인 배려를 생각해 보고 실천하고 있는가?

2)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를 돕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무엇인가?

3) 사용자의 입장에서 노동자의 정당한 대가를 무시한 적은 없는가? 혹은 나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자를 부당하게 대우한 적은 없는가?

제 목 : 공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본 문 : 신 25:13-16

요 절 : (신25:13)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본 장은 신명기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긴 연설문 중에서 두 번째 것이다. 본 장에서 나오는 규례들은 대부분 처음 언급되는 규례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고대 근동이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어 오던 관습이 최초로 율법화된 것이다. 주된 내용은 사회 공동 생활을 함에 있어서 공정성의 유지이다. 본문에 나오는 도량형 사용법은 상거래시 ‘공평’에 대한 교훈으로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진실과 참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1. 공정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

번저 본문은 상거래에 있어서 속임이 없이 공평해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윤리적으로 아주 정당한 명령이다. 구체적으로 공정에 대한 하나님의 명열을 살펴보자. “(신25:13)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이는 공정한 상거래 질서에 관한 율법으로, 부정한 도량형 기구는 사랑과 신뢰로 뭉쳐야 할 공동체에 혼란과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무게를 달 때 돌로 만든 저울추를 사용하였는데 이때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공평하게 행하였을 때 하나님은 놀라운 복으로 함께하신다. 특히 어원적으로 ‘공평’이란 도덕적 법적인 의미에서 ‘올바르다’, ‘의롭다’는 뜻으로 표준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본문의 “(신25:15)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는 말씀에서 ‘십분’이란 ‘완전하다’라는 뜻으로,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공정한 저울추를 사용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신25:15)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 하리라 ”고 복된 말씀을 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악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이정표와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다.

2. 부당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벌.

부정직한 자들은 서로 같지 않은 두 개의 추를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물건을 살 때에는 큰 추로 무게를 측정하여 정량보다 많은 양을 거두어들이고 물건을 팔 때에는 작은 추를 사용하여 정량보다 적은 양을 줌으로써 부당 이득을 취한다. 따라서 공정한 상거래를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도량형 기구를 사용하라 말씀하신다.

또 한 가지 예가 있다. “(신25:14)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라는 말씀은 곡식을 되로 팔 때 서로 다른 되를 사용하여 부당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한편 아모스 선지자는 저울추를 속여서 무게를 많게 하거나 적게 하고, 되를 속여서 부피를 많게 하거나 적게 하는 불의에 대하여 신할하게 비난하고 있다. “(암8: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암8: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암8: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암8: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부당한 자들을 저주하고 심판하신다. “(신25:16) 무릇 이같이 하는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이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도덕적으로 부정직한 이런 모든 행동들을 일삼는 모든 자”란 뜻이 된다. 비록 사람이 사람을 속여 부당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라도,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치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다.

적용.

1) 불공평하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닮는 방법은 무엇인가?

2) 상거래를 하면서 불의하게 속이는 경우가 있었는가? 그것이 나의 경우였다면 과연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3) 경제 환경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 불공평한 저울추의 유혹을 쉽게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유혹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제 목 : 신앙 고백적 헌금 자세

본 문 : 신 26:1-11

요 절 : (신26: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본문은 신명기의 결론 부분이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에서 얻게 될 소산물에 대한 취급 절차에 관한 교훈의 말씀이다. 구체적으로 본 장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첫 열매를 거두게 될 때 첫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규례와 또한 제3년의 십일조에 관한 규례이다. 결국 본 장은 첫열매를 드리는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제3년의 십일조 규례와 그 용도를 통하여 ‘이웃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께 어떻게 봉헌해야 하며 어떻게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1. 하나님께 신앙 고백적으로 드려야 한다.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얻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모든 열매를 수확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의 첫수확을 마친 후 그것의 일부를 정성껏 광주리에 담아 제사장 앞에서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다. “모든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이 ‘맏물’이라 함은 첫열매를 말하는데 결국 이는 전체 소산물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신앙 고백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신앙 고백의 내용은

1)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2) 이스라엘의 비천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3) 그들을 인도하신 여호와의 섭리를 찬양하며

4)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을 다짐하는 것 등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맏물을 드리는 것은 가나안 땅가 그 땅의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들은 단지 소작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신앙 고백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와 신앙 고백은 하나님과 택한 백성 사이의 긴밀한 교제와 영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어려운 환경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신앙 고백적으로 봉헌해야 한다.

2.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본문 11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신2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그려진 첫열매들이 레 2:1-3의 규정에 따라 소제물로 사용되지 않고 레위인 및 객과 더불어 감사 잔치를 여는 데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감사의 표시로 당신께 봉헌된 자기 백성의 소출이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이웃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용도로 사용되기를 원하셨다. 이 말씀은 받은 축복을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이웃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더불어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우리는 받은 축복을 이웃과 함께 해야 한다. ‘나눠 주라’는 명령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바다. 예수님께서도 “(눅3: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 “(눅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 사도 바울 역시 나눔의 진리를 설파하였다. 결국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가 받은 축복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로 우리가 받은 축복을 이웃과 더불어 공유할 때 축복은 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헌금 역시 가난한 형제들을 위한 구제 사업이나 복지 사업에 중점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적용

1) 나는 헌금을 할 때 물질만이 아닌 신앙 고백적 자세로 드리고 있는가?

2) 한국 교회가 이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반성과 각오는 무엇인가?

3) 개인주의와 무관심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 이웃에게 필요한 나의 관심과 애정 어린 사랑의 손길은 무엇인가?

제 목 : 또 하나의 선물로 주신 성(性)

본 문 : 신 27:20-23

요 절 : (신27: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지금까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지난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상기시킨 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항상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는 性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현대인들은 매우 잘못된 성윤리로 인해 심각하게 오염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타락한 성적 욕망으로 인해 오늘 우리 사회는 도덕적 부패와 만연된 성범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性에 대한 聖書의 가르침이 性書로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 그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다. 성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부부 생활의 기쁨을 좌절시키고 있다. 성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임을 인지할 때, 성을 불결하게 보거나 죄악된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을 허락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는 성을 통하여 인간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아 여자를 창조해 주셨으며 인간에게 성을 제공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성을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여기심을 알 수 있다. 실로 성경은 결코 성 자체에 대해서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기쁨으로 간주하신다.

“(잠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전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

2. 성은 신성한 결혼 안에서만 허락되었다.

인간은 성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시켜 쾌락과 타락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선물인 성을 인간들이 선용해야 할 영역은 무엇일까? 바로 결혼 안에서만 성적 욕망과 기쁨이 허용되는 것이다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정당한 부부로서의 새출발을 공포하는 예식이다. 성의 추구는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본문뿐 아니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창조 질서에 어긋난 근친 상간이나 단순한 쾌락 추구를 철저히 금하고 있다(레18, 20장). 그러므로 성은 분명 영육 간의 전인격적인 결합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행위를 통하여 자손 번성이 뒤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성의 범위에 대하여 두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고전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전7: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였으며 “(고전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고 언급하고 있다.

3. 비정상적인 성행위는 하나님의 저주가 따른다.

성 자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축복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바르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불결한 죄악이 되고 만다. 비정상적인 성행위로서 본문은 구체적으로 근친 상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즉, 계모, 자매, 아비의 딸, 어미의 딸, 장모와의 성관계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파렴치한 행위들이다. 또한 동물과의 교잡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하게 창조된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야만적 행동이다. 또한 성경은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성행위를 하는 동성애도 큰 죄악으로 간주한다. 그 밖에도 이기적인 성적 만족을 위한 성행위들이 많이 있다. 즉, 겁탈, 간통, 음행(미혼 남녀의 불륜한 성관계), 간은(기혼 남녀의 불륜한 성관계), 음란한 상상하에 저질러지는 자위 행위, 각종 성적 기구를 사용하는 성행위들, 술과 마약으로 저질러지는 음란한 행위 등은 모두 인격적인 요소들이 결여된 비정상적인 성행위들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 벌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임을 역사(소돔과 고모라, 로마)가 증명하고 있다.

적용

1) 외설적인 대중 매체들이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성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2) 결혼한 부부간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성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3)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부지불식간에 행했을 경우 믿음의 방법대로 잘 처리하였는가?

제 목 : 순종에 따르는 복

본 문 : 신 28:1-14

요 절 : (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본 장은 율법의 순종 여부에 따른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순종으로 말미암아 임할 개인적, 가정적, 민족적 축복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개인의 복보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내려질 복이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의 복과 공동체의 복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독교는 편협한 축복관에 얽매인 종교가 아니라 영육간의 복을 전제하는 참된 복의 종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순종에 따르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인가?

1. 물질적인 복.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성경은 생활의 복, 자녀의 복, 소유의 복, 그리고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인간 모두가 바라는 복이다. 말씀대로 살 때 이러한 풍족함의 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였을 때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형통한 복을 소유하지 않았는가? 말씀대로 준행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은금과 육축이 풍부하게 하였으며,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욥은 훗날 배가의 물질적 복을 받았다. 하나님은 부요하시고 모든 물질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에게 “(신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신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물질적 풍요의 삶을 누리게 된다.

2. 승리의 복.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승리의 복이 임한다. “(신28: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히브리인들에 있어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적들이 완전히 패배하여 제각기 산산히 흩어지리라는 말이다. 이러한 실제의 예는 가나안 정복 전쟁시 이스라엘과 아모리 연합군 간의 싸움에서 확연히 찾아볼 수 있다. “(수10:10)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수10:11)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 이스라엘의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고 여호와께 대한 믿음과 순종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결국 적의 위험 속에서도 평안과 안전의 삶을 살게 되며 이 함한 광풍노도의 세상 속에서 순간 순간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며 삶을 영위하는 복이 임한다.

3. 명예의 복.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신다. “(신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여기에서 율법에 대한 수행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 이행이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이 가질 수 없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총칼로 세계를 정복하려던 민족들은 있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진정으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에게 명철과 지혜를 주심으로 높은 명예와 권위를 얻게 하신다. 요셉, 모르드개가 그러했으며 다니엘이 이런 복을 받았다. 높이시기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하시는 분의 뜻에 순종하고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명예롭게 하시는 분이다.

적용

1) 기독교는 물질만의 종교는 아니나 이것도 포함하여 ‘복’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정리해 보자.

2) 세상과 사탄은 우리를 우는 사자같이 대적하고 있음을 볼 때 승리의 비결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3)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높음과 낮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삶의 간증이 나에게 있는가?

제 목 : 모압 평지에서의 교훈

본 문 : 신 29:1-9

요 절 : (신29:6)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 장에는 출애굽 직후 호렙산에서 맺었던 언약, 곧 호렙산 언약 외에 모압 평지에서 맺은 새 언약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호렙산에서 세운 언약과 본 장의 언약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언약이다. 다시 말하면 호렙산에서 맺었던 세대는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꾼 사건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그리고 지금 모압 평지에 있는 사람들은 호렙산 언약 당시 20세 미만이었거나 출생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대로서, 호렙산 언약을 잘 모르거나 그 언약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신세대로서, 호렙산 언약을 잘 모르거나 그 언약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신세대들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곳 모압에서 신세대들에게 언약, 곧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을 새롭게 선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이 나의 주이심을 알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큰 능력가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신29:6)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본 절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식품 인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즉,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이는 출애굽 후 광야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한편 오늘의 성도들도 일용할 양식 때문에 아쉬워하지 않는 평안한 삶을 누릴 때 자칫 무감각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을 잊고 살기 쉽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지나온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주의 은혜를 깨달아, 우리 삶의 필요를 총족시키는 주권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여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 함이다.

개인 및 민족의 역사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어도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즉, 역사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나타난 역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도 진주처럼 찬란히 빛날 때도 있지만 물에 뜬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는 비참한 면도 없지 않다. 그 중에서 특히 광야 40년은 고난의 역사이다. 40년의 가나안 여행길은 실로 장애물이 많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모세의 신앙 고백을 들어 보라. “(신29:5) 주께서 사십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 하였으며”라고 고백한다. 고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기적의 역사 속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항하였다. 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눈, 즉 역사관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의 역사 의식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시고 지배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이다.

적용

1)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主 되심을 믿고 진정 진심 어린 고백을 하고 있는가?

2) 요즘 유행하고 있는 윤회적 역사관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3) 내가 고난의 웅덩이에서 고통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제 목 : 회개의 3요소

본 문 : 신 30:1-2

요 절 : (신30: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본 장에는 언약을 어겨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때 주어지게 될 용서와 축복에 대하여 언급한다. 즉,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징계하시면서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하는 자에게는 다시 큰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 이러한 사실은 율법이 죄인을 징벌하고 심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약속 있는 계명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엄위롭고 공의로운 분이시므로, 언약을 어기고 범죄한 자들은 벌하시나 회개한 자에게는 긍휼이 풍성한 분이다. 그러나 이 회개에는 다음의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1. 자신의 죄를 기억해야 한다(지적 회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간은 단 한시라도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완악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음이 문제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먼저 발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괴로운 포로 생활에서 과거를 회고할 때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어 순종의 축복을 가져왔고 불순종은 저주를 가져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에 회개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말씀의 거울로 자신의 언행 심사를 살펴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어서 중요하며, 회개의 첫 번째 관문이 된다.

2.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정적 회개).

본문을 보면 “너와 네 자송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와”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회개할 것을 종용한 말씀이다. 이는 마치 히스기야가 질고를 당했을 때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한 것이나,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말씀을 기억하고 통열히 회개한 것이나, 베드로가 첫닭움음 소리에 말씀이 기억나서 회개한 것처럼 우리도 환란 중에서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폭정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회개치 않는다면 회복의 시기는 고만큼 늦어지고,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결국 회복의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만다. 특히 회개하된 지적인 회개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찢어지는 통한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집 나간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 돌아올 때와 같이 처절한 통회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3. 올바른 순종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의지적 회개).

회개란 단순히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고 뉘우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룟 유다도 회개한 사람의 범주에 속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회개는 뉘우칠 뿐 아니라 과감히 그 죄악의 자리에서 떠아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오는 구체적인 행위가 있을 때 완성된다. 본문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이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그렇다. 바로 참된 회개는 그 회개의 합당한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탕자가 죄를 깨닫고 아버지 품으로 한걸음 한걸음 옮긴 것처럼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즉, 스스로 마음의 회개를 한 사람은 또한 실천적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온전한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회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손과 발의 행위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적용

1) 한국 강단에 복 그리고 ‘행복을 위한 처방’은 있으되 회개에 대한 진정한 설교가 사라졌다고들 한다. 이에 대한 처방은 무엇인가?

2) 대부분의 교인들이 지적 회개에서 정지하는 경우가 많다. 정적 및 의지적 회개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3) 회개한 후 죄 사유함에 대한 확신을 말씀에 근거해서 가지고 있는가?

제 목 : 모세의 고별 설교

본 문 : 신 31:6-8

요 절 : (신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본 장은 본서의 결론 부분으로서 부록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특히 본 장은 주옥과 같은 귀한 교훈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120년 간의 삶을 살아온 모세의 마지막 고별 설교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기록된 모세의 설교는 그의 신앙의 표현이며 철학이며 그의 삶의 교훈이다. 모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백성들과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유언을 하고 있다. 특별히 모세는 막강한 군사력과 철용성 같은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는 가나안 열족들을 무찔러야 할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용기있는 권면을 하고 있다.

1.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원문에는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고 단지 ‘강하라, 담대하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강하다’의 원뜻은 ‘꽉잡다’라는 뜻으로, 손에 힘이 있어서 무엇을 잡고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하는제 심리적인 의미도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담대하라’는 무릎이나 허리에 힘이 있는 상태로서 이것은 육체적으로 분발하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강하고 담대하라는권고는 출애굽 일세대가 가나안 족속의 장대함을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던 일을 상기하면서 하는 말씀이다. 그 일로 인하여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하시므로 강하고 담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도 악한 세상과 사탄의 가나안 세력과 대적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무엇보다도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2.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본문에서 모세는 “(신31:8)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권면한다. 이제 자신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진두 지휘해야 할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전한 격려의 말은 바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말은 모세가 백성들을 격려했던 전 절의 말씀과 일관성이 있는 말씀이다. 실로 모세의 권면은 자신의 광야 40년 간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자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여호수아에게 주는 유언의 핵심이요 전부인 것이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는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가장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말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는 말씀이다.

3.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총으로 죽은 숫자보다 두려움과 정신적 피해로 인해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다는 보고가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두려움은 원치 않는 고약한 불청객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이나 여호수아 시대나 상황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가나안 족속을 겁내고 또한 하나님이 자기들을 저버리지 않을까 렴려하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상대방의 군사력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미 가나안 정탐 결과 그들의 군사력이 막강하다느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참으로 필요 적절한 위로의 말씀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서 불안한 인생 행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들려 주신다.

적용

1)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 수 있는 영적 비결이 무엇인가 상고해 보자

2)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최고의 영적 성장이라 한다면 그에 대한 나의 준비는 무엇인가?

3) 불안하고 무서운 세태 속에서 어떻게 하면 풍랑 속에서도 주무실 수 있는 주님의 평안을 체험할 수 있을까?

제 목 :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

본 문 : 신 32:5-14

요 절 : (신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본 장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모세가 이스라엘의 배역과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한 이스라엘 미래 역사를 노래하고 있는 일명 ‘모세의 노래’이다. 이러한 ‘모세의 노래’는 비록 타락과 심판이라는 이스라엘의 암울한 미래사를 예언하고 있지만 진정 이 노래가 목적하고 있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타락을 미연에 방지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하는 데 있다. 이 노래의 각 구절은 이스라엘의 죄악된 역사를 꾸짖는 준엄함과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는 신앙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셨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렇게 표현한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이는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있는 은총을 상기시킨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뜨거운 사랑으로 보호해 주셨는지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 역대의 연대, 곧 한 세대 한 세대가 지나온 세월은 아브라함 때부터 울애굽 그리고 광야 시대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곧 아득한 조상때부터 언약을 맺어 오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 그 아비와 어른들에게 묻고 마음속 깊이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보호를 근거로 미래까지도 보호해 주신다는 확신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보호를 근거로 미래까지도 보호해 주신다는 확신을 주는 힘판 메시지이다. 한편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과거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해야 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미래까지도 맡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지만 반드시 평화롭고 만사 형통하게 이끄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보호해 주셨지만 배고픔, 갈증, 전쟁, 질병 등 온갖 고초의 현장으로 그들을 이끄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하신다. 본문의 “(신32: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선민답게 양육하시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연단시키시는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해 애굽의 참혹한 종살이와 광야 생활을 겪게 하셔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시는 분은 우리 또한 연단과 훈련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시험에 승리하고 연단에 합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요 의무이다.

3. 하나님은 풍성하게 우리를 도우신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의 풍성한 보호와 은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신32:13)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누릴 풍요를 다양한 측면에서 묘사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여 지배하며 다스린다는 뜻이다. 애굽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이 영광스럽고 명예스로운 지위를 얻게 된 사실에 대한 고무적인 찬양이다. 이는 우리가 사역을 하고 삶을 영위할 때, 지치고 피곤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약속이다. 우리가 현재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좌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가나안으로 항상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말마다 부족함이 없는 인생으로 인도하신다.

적용

1) 하나님께서 곤고한 날에 나를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지 서로에게 간증해 보자.

2)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연단하심을 믿고 이 연단의 과정 속에서 합격할 수 있도록 힘쓰자.

3)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을 현재보다 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현재의 고난을 감내할 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제 목 : 레위지파 부의 비결

본 문 : 신 33:8-11

요 절 : (신33: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본 장에 언급되어 있는 모세의 유언적 축복은 일종의 기도로서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최후의 임종을 맞아 느보 산에 오르기 전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유언적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축복된 민족임을 전제하면서 이스라엘 12지파를 하나하나 축복한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이 복됨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축복으로 끝맺는다. 특히 본문은 이스라엘 여러 지파 중에서 특별히 레위지파가 받은 복의 이유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1. 레위지파는 경건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신33: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고 말씀하신다. 둠밈은 ‘온전함’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한다. 그리고 우림은 ‘빛의 비침’, 즉 ‘조명’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우림가 둠밈은 대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어떤 재판을 행할 때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제비와 같은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출28:30)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 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 따라서 본 절은 레위지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가 완전하심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우림가 둠밈을 사용하는 자는 바로 경건한 사람으로서 좁게는 대제사장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레위지파 전체를 지칭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경건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금생과 내생까지 함께하신다.

2. 하나님께 우선권을 두었다.

본문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신33:9)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하였을 때 레위지파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그 형제들을 용납하지 않고 살육한 일을 언급하고 있다. “(출32: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출32: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출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각 사람이 그 친구를,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출32: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출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 이때 레위지파의 의로운 헌신으로 말미암아 과거 그들의 조상 레위가 행한 범죄에 대한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창34:25)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창34:26)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창34: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창34: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창34:29)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 즉,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일이 부모와 형제와 자녀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예수님께서는 부모나 자녀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가르치셨다. 현대인의 우상인 물질과 수포츠, 쾌락을 좇지 아니하고 참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먼저 우선권을 두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다.

3.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레위지파는 가나안에서 유일하게 기업을 받지 못한 지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제사장 가문으로서 말씀을 가르치고 제사를 주관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데 헌신적인 사역을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하며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퐁성한 대가로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했던 굶주린 엘리야를 까마귀를 통하여 먹이셨듯이 오늘날에도 당신의 일을 헌신적으로 감당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을 절대로 고난 중에라도 방치하지 않으시고 돌보신다. 그러므로 주의 일꿈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왕상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하리라 (왕상17:5)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왕상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

적용

1) 세속의 물결이 범람하는 세태 속에서 어떻게 경건한 삶을 사는 영적 레위인이 될 수 있겠는가?

2) 매우 분주한 현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주의 사역에 우선권을 두며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3) 주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주께 헌신할 수 있도록 위로와 긍휼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 목 : 천국 입성의 자격

본 문 : 신 34:1-8

요 절 : (신34: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본문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최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느보 산에 올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는 장면과 그가 모압 땅에서 죽어 그 곳에 장사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이로써 모세는 그의 파란 만장한 120년 간의 생애를 마감한다. 오직 한 번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린 적이 없는 모세는 이제 그의 모든 직임을 마치고 하나님 품에 안게게 된다. 우리는 모세의 죽음을 통하여 천국에 입성하는 자의 영적인 자격과 의미를 새기게 된다.

1.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 몇 가지 있는데 이 중에 가장 큰 사건은 모세가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그가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건이다. 므리바 물 사건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민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범죄한 영혼은 결코 영적 가나안이라 불리우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그렇다. 범죄한 영혼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나 회개한 영혼에 대해서는 영적 면죄부를 주신다. 그러므로 이 세속의 더러움과 음란함 가운데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목욕은 물론이고 날마다의 발씻음을 통하여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우리의 공로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세의 업적을 생각해 볼 때 그가 광야 40년 간 세운 공로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 세상의 법칙대로라면 그의 업적으로도 넉넉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스가 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사실을 통해 인간의 공로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이 세상에서 공로와 업적을 남긴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공로와 수고로 인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그렇다. 인간의 공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공로가 많은 사람은 교만해질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천국 입성 자격을 제한하셨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라고,

3. 율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신약을 복음이라고 한다면 구약은 율법이라는 대칭 구조를 가진다. 율법에 있어서 주인공은 누가 뭐라해도 모세를 지칭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사실은 영적인 교훈을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아무도 율법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율법은 천국의 문턱까지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로 천국은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고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차지할 수 있는 곳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 율법적이고 자신의 신망과 덕을 앞세워 자신있게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공로나 행위로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요구된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적용

1) 한국 교회의 주일 강단에 참회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무서운 영적 무기력 상태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2)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에 반하는 사상이 교회 안에는 없는가? 이 배설물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키를 재고 있지는 않은가?

3) 나의 믿음에 대한 척도가 과연 복음적인가? 아니면 율법적인가?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애굽기요약강해  (0) 2011.10.31
창세기요약강해  (0) 2011.10.31
민수기요약강해  (0) 2011.10.31
레위기요약강해  (0) 2011.10.31
바울의 동역자들  (0) 2011.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