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창세기요약강해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01

 

1. 빛과 어두움

(창1:1-5, 요1:1-5, 사60:1-3)

항상 빛과 어두움은 대립되는 것이다. 빛이 없어도 어두움이 있을 수 없고, 어두움이 없어도 빛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물질계나 영계나 우리 육적 생활에 있어서 빛과 어두움은 무엇이냐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물체의 흑암과 하나님의 빛 (창 1 :1-5)

물질의 자체에는 아무런 빛이 없는 혼돈, 공허, 흑암 이었다. 유물론 자들은 물체 자체에 진화할 힘이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흑암에 빠져있는 인간들의 머리속에서 나오는 한 공상적인 이론에 불과하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동시에 물체에는 어떠한 활동과 무엇을 낼 수 있는 힘이 전혀 없고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활동이 물체를 움직일 적에 물체는 하나님의 전능의 힘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물체를 움직여주는 역사아래서 그 물체를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쓸수는 있다. 예를 든다면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데 사람이 무엇을 가져다 거기에 넣으면 돌아가는 기계가 사람의 마음대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고 있지만 그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 것은 물과 불의 힘일 것이다. 이와같이 대 자연을 움직이는 활동은 하나님께 있고 그 자연을 통하여 나타나는 열매를 먹고 그 힘을 얻어서 물건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물체 자체에는 아무것도 없는 흑암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힘의 역사가 물체를 움직여 주므로 사람은 빛의 세계에서 생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영적 사망의 흑암과 그리스도의 빛 (요 1:1-5)

모든 인간들은 영적으로 타락하여 사망의 권세를 가진 마귀 흑암에 잠겨서 도저히 그 흑암을 벗어 날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신 것이다.물체에 아무런 활동할 힘이 없는데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와서 활동하므로 대 자연계가 창조되었고 마귀 미혹을 아 범죄한 인간들이 죄의 흑암의 권세를 벗어날 수 없는 깜깜한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시므로써 모든 영들은 중생을 받아 빛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세계로 옴겨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빛이 어두움을 찾아왔는데 그빛을 찾지 못하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는 자는 멸망이요, 그 빛을 따라오는 자는 영생이다. (요 3:18-21)

3. 미혹의 흑암과 말씀의 빛 (사 60:1-3)

그리스도의 빛이 죽은 영을 살리므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천국복음 운동이다. 그러나 인간 종말에 흑암의 권세로 모든 사람을 미혹해 보고 말씀의 빛으로 그 흑암을 물리치고 새시대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누구든지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자라면 이 땅에 남은 자가 되게하고 말씀의 빛을 순종하지 않는자는 다 미혹에 빠지게 하는 동시에 미혹하던 마귀를 없이할 때에 다 전멸시키고 남은 자로 지상왕국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마귀 미혹을 이기지 못하므로 저주 받았던 땅을 마귀 미혹을 이긴 자로서 지상축복을 받도록끔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인데 이것이 이사야60장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사59:18 이하를 보면 하나님 께서 “그대적에게 분노하시며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서방에서는 여호와 이름을 두려워 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 할 것은 여호와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라고 하였고 21절에 네입에 있는 나의 신과 네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에서와 에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은 입에 말씀을 받은 자가 마귀 미혹을 이기므로 영원한 축복을 받을 것을 가르쳤다. 영이 죄에서 해방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빛이요, 몸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시대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마귀 흑암의 새력을 말씀의 빛으로 물리치고 이긴 자에게 있게죈다.

결 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게가 이루어진 것은 땅이 혼돈 공허 흑암이 깊음위에 있는데서 하나님의 빛의 역사가 들어와 역사하므로 이루어졌고 사망의 권세아래서 모든 영들이 천국으로 가는 것은 흑암에 빠진 영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오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마귀 미혹이 온세계를 덮을 때에 해돋는 편에서부터 말씀의 빛이 나타나므로 지상왕국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2. 흑암이 깊음 위에 빛이 있음 (창1:1-5)

하나님은 빛의 자체가 되시며 빛의 역사를 하시는 능력의 신이시며 능력을 통하여 창조의 열매로써 당신의 사랑의 본위를 나타내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시고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상에 모든 활동하는 물체가 그 자체에 어떤 힘이나 빛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은 혼돈, 공허, 흑암에 있던 것인데 빛의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빛의 역사가 물체에 부딛쳐 역사하므로써 물체는 움직일수 있는 힘을 받게 되고, 모든 열매를 맺을수 있는 생명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혼돈, 공허, 흑암 위에 빛이 있으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 세계 인류를 이루는 시발점의 하나가 된다고 보는데는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빛이 있으라 한 의의

하나님은 빛의 자체이신데 영원부터 스스로 계신 신이시다. 그러나 영원부터 빛으로 홀로 계셔서 영원히 홀로 있다는 것은 빛의 가치를 발휘할 수 없고 아무런 효과없는 빛이 될 것이로되 물체에 빛이 있으라 하는 그때부터 하나님은 기뻐하실 일이 시작되었다. 예를든다면 아무리 부족함이 없는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홀로 있다는 것으로는 인격의 가치를 발휘할 수가 없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을 찾아가야 할 것이고 힘이 있다면 약한 자를 찾아가야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아무리 생명의 빛의 자체라 하더라도 생명없는 물체에 들어와서 역사하는 일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가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영원한 빛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물체에서부터 역사해서 천지를 창조하므로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흑암 위에 빛이 있으라 할 때부터가 천국 건설 운동에 개업을 하는 시발점의 선언이 되었다. 지금 유물론자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물체 자체가 점점 진화하는 변동의 힘이 있어서 이것으로써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본다는 것은 영적 흑암의 마귀의 미혹이라고 본다. 물체 자체의 힘이 천지 만물과 일,월,성신이 이렇게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되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은 빠짐이 없이 있게 되었다고 본다면 이 이론은 허무맹랑한 이론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치라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 조차 모르는 이론이다. 오늘이라도 내 몸에 생명의 빛이 떠나면 내 몸 자체가 즉시 혼돈, 공허, 흑암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육체의 몸을 흙에서 받았고 생명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영과 혼은 하나님 본체에서 왔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왜냐할때에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있고 또는 종교적인 신앙에서 창조 주 신과 교통할 수 있는 생활을 체험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할 때에 그 목적은 물체에서 사람을 창조하여 그 사람으로 창조 주의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했다고 보게 된다.

2. 빛이 있으라 한 기능

하나님은 당신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빛이 물체로 들어와야만 할 것은 이 물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능이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무소 불능의 역사가 물체를 찾아 왔던 것이다. 예를든다면 산속에 있는 광물이 사람을 찾아 올 수 없고 사람이 광물을 찾아가 그것을 바로 사용할 때에 그 광물은 효과를 발휘하므로 사람의 생활에 필수품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빛의 활동이 흑암을 찾아오므로 물체에서 여호와의 능력의 말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본다. 물체가 움직여지는 그때부터 창조적인 활동이 물체에 들어오므로 아름다운 우주의 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의 자체인 동시에 그 빛이 먼저 물체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것도 없는 혼돈, 공허, 흑암에 세계만이 있었을 것이다. 기능적인 활동에 빛이 있으라 할 때부터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으므로써 역사적인 조류가 흘러온 것이다. 그 기능은 영원히 우리 사람을 위하여 활동해주므로써 세세 영광이라는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3. 빛이 있으라한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완전한 삼위에게 있는 것이니 그 사랑은 빛이 있으라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무소불능의 생명의 빛이 되시는 신이시지만 당신의 가진 것을 주고 싶은데서 말씀으로 움직이는 기능을 통하여 사랑의 자체가 되는 신의 소원을 이룬 것이 창조의 역사이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따라 오게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주기를 좋아하는 것이 본질이니 완전한 신께서 그 완전한 것을 누구에게 주어야만 그 신의 마음은 기쁨이 되겠으므로 빛이 있으라 할 때부터 지금까지 어두움을 찾아 오시면서 역사하는 사랑의 신이시다.

결 론

물체가 흑암에 잠겨 있을 때에 빛이 있으라 한 것으로 창조의 일을하여 물체가 열매를 맺게 하시었고 피조물된 인생이 타락하므로 흑암에 떨어질 적에 생명의 빛이 되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서 빛이 있게 했고(요1:4-5) 또는 온 세계가 극도로 부패하여 흑암으로 들어가는 환란기에 빛의 말씀을 동방에 나타내어 그 말씀으로써 새시대를 이루는 것이니(사60:1-3) 이와같이 어두움이 깊음 위에 빛이 있게 하는 역사가 세 번 있으므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창조적인 삼대 위력

(창 1:1-5)

서 론

우리 인생은 조물주의 창조적인 3대 위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아는데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초점이 될 것이다. 만일 이 진리를 모른다면 성경을 읽어도 들어도 알 수 없는 자리에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이제 창조력의 3대 위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저 한다.

1. 태초의 창조력 (창 1장)

여기에 태초라는 것은 창조적인 태초를 말했으니 이 창조라는 것은 물체적인 창조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체에 창조의 위력을 들여 보내어 역사한 것이 첫째날에 된 일이다. 땅이 혼돈, 공허, 흑암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물체라는 자체는 힘이라는 것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조물주의 창조력의 힘이 아니라면 물체는 자동적으로 혼돈, 공허, 흑암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들고 생기를 불어 넣으니 흙덩어리가 움직여지면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힘을 거두어 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 인형은 혼돈, 공허, 흑암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위력이라는 것은 목적이 없이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는 것이다. 태초에 창조력이 물체에 들어와 움직이는 것은 그 목적은 하나님의 미의 세계를 이루어서 하나님이 만족한 세세 영광으로서 사람과 동거동락 하겠다는 것이 태초의 창조력을 움직인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일을 시작했으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사람이 부족해도 이루어 놓고야 만다는 것이 조물주의 무소불능한 힘의 활동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조물주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하든지 그 목적을 이루고야 만다는 뜻을 발표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첫째 아담의 범죄로 죽었던 인생을 다시 살릴 능력도 있고 살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영원히 죽지 않도록 변화시킬 능력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한 번만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시대 시대를 따라서 말씀한 것은 오메가를 완전히 이루는 끝을 이루기까지 되어 있는 것이다.

2. 천지를 없애는 위력 (계20:11)

하나님의 창조는 영원을 목적한 것도 있고 한 사업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도 있으니 물질 세계를 창조한 것은 영원한 천국으로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사업적인 창조이기 때문에 사업을 완성하는 그때에는 창조력의 역사로 다시 없앨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흙에서 나는 소산을 먹고 흙에서 나는 물을 먹고 양육하고 번창해서 그 씨로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낸 목적은 영원한 천국에서 세세왕국을 이루자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물체적인 지구의 효과를 발휘하여 그 목적인 축복을 인간에게 다시 찾아 주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왕국의 건설이 땅에 먼저 이루어지는 것은 첫째 아담의 실패로 잃었던 축복을 누리기 위한 성도의 왕국이다. 그러나 목적을 다 이룬 천년왕국을 천년이 찰 때 이것을 없애는 것은 신천신지의 영원한 왕국을 목적했기 때문에 죽은자는 부활하고 살아 남은자를 무궁세계로 옮기기 위해서는 대 심판을 거칠 적에 사업적인 목적으로 창조한 물체는 다시 혼돈, 공허, 흑암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물체속에서 역사하던 창조주의 위력이 물체에서 옮겨가기 때문에 다시 근본적인 혼돈, 공허, 흑암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1-12).

3. 신천신지를 이루는 창조의 위력 (계21:5-7)

하나님께서 신천신지의 화력한 도성은 이기는 자를 위해서 창조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물질세계는 사람을 생육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신천신지의 영원한 천국은 이기는 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육하는 물질계에서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한 자는 아름다운 도성의 왕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잠간동안인 생육적인 물질계에서 바로 자라서 바로 열매를 맺었다면 영원한 무궁 세계에 영원한 만물을 기업으로 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체를 가진 신령한 몸으로 먹고 마시고 누리는 생활에 필요한 생명으로써 이루어진 것 뿐이다. 생명나무, 생명물이 식물이 되고 열두 진주보다도 좋은 보석으로 쌓은 성이요 정금보다도 더 맑은 유리 맑은 곳으로 바닥을 깔았고 해와 달이 쓸데없는 빛의 세계이다. 영원히 보전되는 것으로 지은 도성이다. 이 성에는 소제도 필요없고 죽음, 고통, 슬픔이 하 등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가 영광이요 미요 거룩이요 평강이니 이것을 피조물된 사람으로 함께 누려보자는 것 밖에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의 활동으로 되는 영원한 무궁세계라는 것이다.

결 론

창조란 것은 하나님 본체의 이름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활동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창조력을 가졌으니 그 사랑의 본성을 나타내고 본 힘을 발휘시켜서 열매로 이루어진 것이 사람이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무궁 세계를 이루어 준다는 것이다.

4. 수면에 운행하시던 신의 창조 (창1:1-13)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신이신 동시에 신의 활동하는 세계는 물 위에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한다. 신은 뼈와 살이 없으나 신의 자체로서는 물체와 하 등에 관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의 역사가 수면에서만 운행하시고 물체를 움직이는 역사가 없었다면 신의 영광은 큰 열매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의 신이 수면에만 운행하시고 아무런 창조가 없었다면 그 신은 영광을 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로되 수면에 운행하시던 신의 창조가 물속에 들어와서 역사가 있게 되었다. 신의 세계에서 물질계를 창조하여 물질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당신의 영광으로 받으시는 것은 신의 섭리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1. 물 속에 한 세계를 이루심 (1-8)

물 속에 한 세계가 이루어진 일을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첫째: 물체속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음(1-2).

하나님께서 물 위에 운행하실 때에 물속에 잠겨있는 물체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이 혼돈, 공허, 흑암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자체가 되시며 빛의 자체가 되신다. 그러므로 물체에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체의 활동력은 근본이 하나님께 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활동인 빛이 물체에서 떠나간다면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든다면 큰 공장의 모든 기계가 자동적으로 돌고 있지만 거기에는 기술자 한 사람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우주안의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 위에 운행하시다가 물 속에 한 세계를 이루게 된 것은 수면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세계에 완전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천국은 물 속에 있는 세계가 아니고 물밖에 나가 있는 세계를 말한다.

둘째: 빛이 있으라 하심 (4-5)

이 빛이라는 것은 생명의 빛을 뜻한 것이다. 그런데 빛이 있으라 할 때에 그 생명의 빛이 비로소 있을 것이 아니고 이미 있던 생명의 빛이 물체 속에 들어와서 역사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든다면 기계속에는 아무런 활동할 힘이 없는데 전력이 기계에 들어올때에 그 기계는 전력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다. 반드시 선을 따라서 전력이 나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의 활동은 반드시 물체의 질을 바로 움직여서 창조의 역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궁창을 만들어 물 속 세계를 이룸 (6-8)

궁창은 물 속에 한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물을 막고 있는 한계다. 예를든다면 바다 속에 한 공장을 이룰려면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쇠로 완전히 막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장을 세워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쇠벽 안에는 비어 있을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쇠벽 밖에는 물 세계가 되고 쇠벽 안에는 물이 없는 공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공간에는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공장을 이룰 수 있다. 물 밖의 공기를 쇠벽 안으로 통하게만 한다면 물 속 공장에는 얼마든지 생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궁창이라는 것은 많은 물을 막고 있는 쇠벽과 같이 물이 우주 공간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창조했다고 본다. 궁창위의 물과 아랫물이 나뉘었다는 것은 많은 물은 궁창밖에 나가게 되고 궁창으로써 막게 한 후에 궁창안에 있는 물이 한데로 모여서 바닷가 된 것을 말한다. 물에 있던 흙이 한데로 모여서 굳어진 것이 지구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궁창 안에 있는 우주 세계는 궁창밖에 있는 세계의 천국을 이루는 한 공장 같은 인격 훈련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해서 흙에서 활동하도록 해 놓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라면 신의 영광의 나라로 옮겨다가 하나님과 동거 동락케 한다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 된다.

2. 지구에 세계를 이루심 (9-13)

지구에 세계라는 것은 영원한 것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궁창 밖의 세계에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일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 사람을 꾀어 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물을 바로 사용하나 못하나 시험을 해보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간교한 뱀을 창조한 목적은 세계에서 가장 진실한 사람을 골라 내기 위한 목적이니 누구든지 간교한 뱀의 말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는 자라면 완전히 승리한 자로써 궁창밖의 천국 세계에서 제일 큰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의 나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나라요. 그 밖의 별 세계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가 아니고 이것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를 위하여 돕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다.

결 론

물을 갈라 궁창 밖으로 나가게 하고 물을 막고 있는 궁창 안에 한 세계를 이루어 그 안에서 사람을 창조하여 간교한 뱀으로 시험을 해보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참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영원히 동거 동락하자는 것이 수면에 운행하시던 신의 섭리이다.

5. 하늘과 땅의 의의 (창 1:6-13)

우리 인생은 하늘과 땅의 의의를 바로 아는데서부터 참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동방에 소위 문학이라는 것은 천지는 작부모 라는 문귀가 있다. 이것은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미라는 말이니 이것이 문학의 근본이라면 이 문학으로는 옳은 발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소위 역사라는 근본을 천황시, 지황시, 인황시 라는 것으로 역사의 근본을 삼았다는 것은 그 근본조차 바로 찾지 못한 역사이다. 완전한 문학을 가져오는 하늘과 땅의 의의를 아는데서부터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1. 하늘의 의의 (6-8)

하늘이라는 것은 궁창을 뜻한 것인데 궁창은 창조할 때 물을 갈라서 놓기 위하여 창조한 것이다. 창세 전에는 전부 물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한 것 뿐이고 이 물체라는 것은 전부가 많은 물속에 잠겨 물만이 가득한 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들어 물을 몰아내어 궁창 위에로 나가게 하고 궁창 아래에 물이 없는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예를든다면 큰 그릇을 물속에 넣으면 그릇 안에는 물이 없는 세계까 있듯이 궁창 안에 들어온 별 세계는 궁창이 물을 막아주므로 물이 없는 공간을 보존하고 있다. 이렇게 한 것은 궁창 안에 우주 세계를 두어 여기에서 역사를 시작하여 궁창밖에 천국의 세계로 사람을 인도하여 영원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니 궁창은 천국과 지옥 세계와 인간과의 어간에 있는 한계를 막고 있는 궁창이다. 그런데 이 하늘을 아버지라고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또는 궁창안에 사는 사람이 궁창밖의 일을 모르고 소위 유물론 공산당이란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인공 위성을 타고 지구를 돌면서 망원경을 쓰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천국을 보지 못했다는 망령된 소리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볼때에는 예를든다면 세계 인류가 사는 큰 그릇안에 벌레들이 오물거리듯이 살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말씀했다(사40:22. 15). 다시 말한다면 큰 천막을 치고 그 속에 공장을 시설한거와 같다. 세계 인류가 사는 생활은 하나님이 볼때에 한 공장으로 보는 것 같이 되어 있다. 사람이 만든 공장은 고장이 나도 하나님이 만든 우주 공장은 쉬지 않고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하늘의 의의를 바로 알므로 천국을 바로 알 수 있고 인간을 바로 알 수 있다. 인간 우주 공장에서 모든 활동하는 것은 천국을 위한 건설이라고 본다. 이곳에서 인격을 바로 이루는 자라면 천국에 가서 큰 자가 되는 것이 공장안에서 바로 만들어진 기계가 공장밖에 나가 가치가 있듯이 우주 공장 안에서 바로 이루어진 인격이 궁창 밖의 세계에 나가서 영원히 가치가 있는 인격으로 왕권을 누리게 된다(계21:1-2, 22:1-5).

2. 땅의 의의 (9-13)

궁창을 지어서 궁창 아래에 물이 없는 공간을 내시고 적게 남은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바닷가 되게 하고 흙을 한 곳으로 모아 지구성을 이루어서 지구에서 자동적으로 열매있는 각종 식물을 내게 한 것은 그 열매로 말미암아 천국을 이루는 활동에 필수품이 되게 했다. 만일 금일에 지구에서 맺어주는 열매가 없다면 궁창밖에 아무런 것도 이룰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한 것은 이 땅에서 사는 생활에 먹고 입고 사는 생활을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천부께서 더하여 주신다는 것은 궁창밖에 나라를 위하여 바로 일하는 자에게 땅에서 열매를 많이 맺게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날마다 그날 그날의 수고를 영광으로 알고 일해 나가는 것이 가장 족한 생활이라고 말씀했다(마6:33-34). 하나님께서 우주안에 모든 별세계가 움직이는 것은 지구 위에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징조, 사시, 일자, 연한으로 규정되어 움직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를 싸고 생명을 주는 공기는 움직이고 있고 그 공기 안에서 사람에게 활동할 수 있는 작용을 하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공중의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말씀한 것이다. 천하에 제일 큰 일은 천국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하여 전도하는 일이라고 부탁하면서 주님은 승천하셨다(행1:8-9). 올라가신 주께서 지금 이땅에 사는 사람이 천국 건설 운동을 하게 하기 위하여 성신의 역사를 부어주시되 20세기에 도달하도록 계속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오늘에 과학이 극도로 발전하게 한 것은 지상에 완전한 새시대를 이루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니 지구에서 되어지는 모든 열매는 천국을 위한 활동 기간이 되는 것 뿐이다. 아무리 유물론 사상이 과학 발전을 하나님 같이 알고 있다 하여도 필경은 하나님 모략안에서 이용을 당하는 것 뿐이다. 악자의 활동이나 의인의 활동이나 다 천국을 위한 활동이 되고 만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의의를 바로 알고 움직일때에 그야말로 복된 생활이요,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야말로 가련한 생활이다. 오히려 동물은 하늘과 땅의 의의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지만 사람이 바로 살지 못하므로 동물보다도 더 화가 크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뿐이니 심판이 하등 관계가 없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사람이니 하나님의 심판이 해당되는 것이다.

6.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인 사람에게 원하는 일 (창 1:26-28)

하나님께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화로운 형상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당신과 같은 형상을 만들적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당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어 놓으라는 것이 인생이 맡은 사명이다. 하나님은 첫째가 사랑인 동시에 사랑의 심정을 맞추어서 일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맡은 사명이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할 일이 무엇이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다 (26-28상)

충만하려면 남자 홀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음을 아시고 남자의 사명을 돕기 위하여여자를 창조할 때 여자는 남자의 씨가 이 땅에 충만해지는 일에 돕는 배필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금일에 와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충만해지지 않고 원하지 않는 마귀의 자녀들이 충만해진 것은 여자가 자기 사명을 벗어나서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것은 남자가 맡은 사명을 도와서 남자의 거룩한 씨가 이땅에 충만해지게 하는 일에 절대 복종할 것 뿐인데 자기 사명을 탈선해서 남자에게 나쁜 씨를 나도록끔 한 것은 선악과를 먹을때부터 남자의 몸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씨를 전해줄 수 없는 여자의 몸이 되었다. 이것은 의로운 씨를 전하는 몸에 선악과의 질이 들어온 원인이다. 여자의 몸이라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남자의 몸에서 갈빗대 하나로 하나님이 만들은 몸인데 그 몸을 남자를 위해서 쓰지 못하고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으므로 그 몸을 더럽힌 것이 사명을 할 수 있는 자리로 떨어진 동기다. 자기가 도와야 될 남자를 망치게 했다는 죄는 더 큰 죄라고 본다. 자기 몸을 더럽히고 남자의 몸까지 더럽히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 사업을 망치는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자에게 다시 역사해서 성신의 잉태를 받도록 할 때에 선악과를 먹은 타락한 몸의 피를 통하지 않고 성신의 역사로 물과 피가 임하게하여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을 하도록 한 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하나가 영생을 줄 수 있는 몸이 되므로 그 피로 말미암아 영과 육을 다시 구원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 의로운 씨로 충만해지는 새시대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비유했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한 것은 여자의 몸에서 의로운 씨가 나므로 지면에 충만해지라는 그 사명을 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는 둘째 아담이 되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종족을 내기 위하여 신부 자격을 이루어 놓는 것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변화 성도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생할 몸이 되므로 말미암아 의로운 씨를 이땅에 전하는 신부의 자격을 이룰 수가 있다. 기독교의 온전한 역사라는 것은 이 땅에 의로운 씨를 충만케 하는 것이 신부된 저희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 미혹을 받지 않고 절개있는 신부가 되므로만이 하나님의 원하는 일을 하므로 이 땅에 의로운 씨로 충만케 하는 사명을 하게 될 것이다.

2.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28 상)

하나님께서 제일로 원하는 것은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원수를 이기고 정복하라는 것이다. 가장 간교한 뱀을 낸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간교한 뱀을 이기고 왕권으로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정복이라는 것은 통치권을 뜻한 것인데 금일에 와서 붉은 용인 옛 뱀의 세력이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하나님은 원수를 대립시켜 놓고 당신의 사람으로 정복하라는 것이니 승리할려면 정복할 수 있는 인격을 받아야 할 것인데 여자가 벌써 자기 인격을 상실한 것을 첫째 의심이요, 둘째 경솔이요, 셋째 몸을 더럽힌 것이다. 우리의 정복이라는 것은 적은 일에서부터 승리해야 되는 것이다. 세계를 정복할 용사를 많이 낳아 길러야 될 해와가 그 사상이 철저하지 못한데서부터 금일에 악의 씨가 세계를 정복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우리가 세계를 정복할 사상은 유일신 종교의 사상인데 이 사상은 첫째: 하나님 밖에는 참된 신이 없다는 것, 둘째: 그 말씀 밖에는 믿을 진리가 없다는 것, 셋째: 그 사랑밖에는 다른 사랑은 필요 없다는 것이 세계를 정복할 하나님의 사람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다는 것은 몸을 더럽히는 음녀의 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금일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을 정복하려면 유일신 종교의 사상, 정확 무오한 진리의 사상, 백절 불굴의 사랑의 절개를 지켜야만 이 땅을 정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제일 원하는 것은 이 사상에 삼대 요소를 가진 자가 이 땅을 정복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니 하나님만이 참되시니이다 하는 것과 그 말씀만이 확실합니다 하는 것과 그 사랑만이 그립습니다 하는 사람으로서 대 승리를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 승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3. 다스리라는 것이다 (28하)

하나님은 조물주이시지만 당신이 사람을 통하여 다스리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이름까지라도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은 몸도 영도 다스릴 수 있는 인격으로 주신 것이다. 사람의 영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는 기능을 준 것이요 몸도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는 그릇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말씀을 의심할 때에 영도 약해지고 몸으로 절개를 지키지 못할때에 몸도 약해지므로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약해서 영적으로는 마귀에게 눌리고 몸으로는 동물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은 영으로 마귀 말을 믿고 몸으로 마귀에게 절개를 빼앗기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리의 십자가를 의심없이 믿을때에 영이 다시 소성하는 것이며 몸으로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괴로움을 극복하고 나갈때에 하나님의 신의 역사가 승리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되므로 우리는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일로 영광을 받의는 일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다스리는 일이다. 아무리 교회라도 원치 않는 사람이 다스릴때에 하나님은 역사를 거두어 가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이 다스리게 될 때에 하나님은 강한 역사를 나리시어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이 하실 일를 원하는 사람으로서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결 론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왕권을 받는 일에 돕기 위하여 창조한 것이요 천국의 열두 진주문에 열두가지 보석으로 쌓은 성에 황금 길을 걸어가는 그 거리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완전히 승리하고 왕권을 가지고 길이 길이 영광을 누리라는 거룩한 곳이다. 열두가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달마다 맺게 하시는 것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승리의 왕권을 받은 몸으로서 재미있게 살며 맛있게 먹는 식료가 되게 하셨고 생명수 강물이 흘러가는 것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마시고 피곤없이 길이 길이 살라는 것이다.

7. 인생의 복된 생활

(창 1:26-31, 2:18-19)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요 생명의 근원이요 빛의 자체이시니 인생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복된 생활이 인생에게 있게하여 복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이루자는 것이 조물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물주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복된 생활을 주신 일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1. 복된 인격 (26-27)

가장 복된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 인격이라고 본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 인격 하나를 바로 가지지 못한다면 모든 일이 다 헛된 것 뿐이로되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진 인격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도 허사가 없고 다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인생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활동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한 짐승에 불과하다고 계13장에 가르쳤다. 이것은 붉은 용의 도구가 되고 보니 심판의 대상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은 짐승의 사상에 표를 받지 않고 이긴 자들로 새시대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낼 때에 복된 인격을 준 것인데 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으므로 복된 인격을 상실한 것을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말의 진리를 믿으므로 간교한 뱀의 미혹을 이긴 자는 복된 인격을 다시 찾게 되므로써 이루어지는 시대를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2. 복된 사명 (28-31)

인생이라는 것은 복된 사명을 바로하므로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한 목적이 인생의 복된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창조했기 때문이다. 인생이 복된 사명을 하므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요 그 목적을 달성할 때 인생은 그 사명을 다했다는 값으로 세세 왕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인생의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자녀를 이땅에 충만케 하라는 것이니 복된 인격이 복된 사명을 다 할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루어진 인격을 지면에 충만케하므로 완전한 영광의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충만에 있다고 본다. 우리 사명을 가진 자들은 우리의 받은 인격을 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요 자기와 같은 사람을 많이 번창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본다. 이렇게 되는데는 모든 만물은 사람이 복된 사명을 바로하므로 말미암아 바로 사용되는 만물이 될 때에 그 만물은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땅의 만물은 복된 사명을 위하여 있고 천국의 만물은 사명을 다한 종들의 영광을 위하여 있다(계21:5-7).

3. 복된 교제 (2:18-29)

복된 교제라는 것은 돕는 배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너는 내 아니요 나는 네 남편이라고 하시었고 예수님도 당신은 신랑이요 우리를 신부라고 한 것은 복된 교제를 뜻한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런 교제없이 홀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여자를 낼 때에 남자와 복된 교제를 할 수 있는 인격을 만들어서 남자를 돕게 했던 것이다. 언제나 남자라는 것은 여자의 돕는 일이 없이는 복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 남자와 여자가 성결한 생활에서 복된 교제가 있으므로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남자에게 큰 사명을 맡기고 여자가 그 사명을 도와 주므로써 완전한 열매를 맺는 일을 하게 되고 열매있는 생활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동시에 그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돕는 자가 있게 되므로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되고 친밀한 교제가 있으므로 아름다운 가정과 아름다운 사회를 이룰수가 있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 가장 복된 인격을 이룰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고 복된 사명을 맡길 때에 얼마든지 자유롭게 충만해지고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살라는 것이며 복된 교제를 하게 할 때에 영육간 일체된 관계를 맺으면서 아름다운 만물을 아름답게 사용하고 아름답게 생활하면서 아름답게 길이길이 영광을 누리라는 것이 사람에게 축복한 것이니 이 축복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그 축복을 다시 받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8.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명 (창1:27-29, 2:15-19)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드시고, 그 열매를 먹고 일을 하라는 사명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에게 맡기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이 바로 행하므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동시에 당신의 가장 기뻐하는 소원을 이룰려고 하신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길이길이 복을 누리는 것이며, 당신과 동거 동락하는 사람들을 많이 나게 하여서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도 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그들에게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제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를 이루어야 함 (1:27-29)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나라와 사회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직분이며, 큰 축복을 받을 일이 된다. 인류 역사상 많은 나라가 있었지만, 이상적인 국가와 사회를 이루지 못한 것은 열매를 먹으면서도 사람들이 자기가 해야할 사명을 바로 하지 못한 원인이다. 모든 식물은 사람에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공급하고 있건마는 오늘날 사람들은 그 열매를 먹고 자기의 사명을 하지 못하고 또 그 열매를 먹기 위하여 땀을 흘리는 일 밖에는 할 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람이 열매를 먹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고 만다는 것은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람이 되지 못한 수치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먹게 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이상적인 사회와 나라를 이루라는 것을 말한다.

사명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먼저 완전한 인격을 가지게 되면 그 인격적인 열매로써 이상적인 나라를 이룰수 있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범죄하였으므로 죄의 세상이 이루어졌고, 둘째 아담 그리스도가 의를 행하셨으므로 거룩한 세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형상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였기 때문에 첫 열매로 가인을 낳게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의인을 죽이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씨가 땅에 편만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으로 그들을 전멸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아담이 자기가 해야할 사명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열매는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악한 세상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그 질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불로 살라 없애 버리는 심판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바벨론 세상이다. 이것을 본다면 한 사람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 죄로 전 세계가 멸망을 받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한 분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신 의로 영원히 복을 누리는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명이라는 것을 열매를 먹고, 또 그 열매를 먹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아니요, 열매를 먹은 사람으로서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일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많이 생육하는 일이라고 본다. 거룩한 사람이 될 때에 거룩한 사람이 열매로 나타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때에 지혜로운 사람이 열매로 나타나고, 사랑의 사람이 될 때에 사랑의 사람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루어진 인격을 가지고 그 형상대로 이루어진 사람을 생육하고, 충만케 하며, 이 땅을 거룩한 사람으로 정복케 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은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이 해야할 사명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지도자가 사람들을 지도할 때에 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억지로 자기 주권을 내세우면서 사람을 노예화 시킨다면 이것은 악한 행동이라고 본다. 어떤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화로워지고, 사랑의 불이 타게 된다면 열매를 먹고 사명을 바로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할 때에 오히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복잡해지고, 말씀이 혼선되고, 사랑이 식어지고 만다면 이 설교자는 열매를 먹고 또 그 열매를 먹기 위하여 일하는 삯꾼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본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어야 함 (2:15-19)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에게 돕는 사람이 있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홀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당신과 의합된 사람을 택해서 쓰시므로 당신도 영광을 받으시고, 의합된 사람에게 영광을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명을 맡은 자에게도 돕는 짝을 주어서 사명자가 영광을 누리는 동시에 돕는 자도 같이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사명자가 일체가 되는 것 같이, 사명자와 일체가 되는 사람이 있어서 한 단체를 이루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을 때에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돕는 배필을 지어 함께 살게 하셨다. 이것은 부부에 관한 것만을 뜻한 것이 아니요, 거룩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명자에게 대한 것을 뜻한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의 부부라는 것은 거룩한 씨를 내는 것 보다도 악한 씨를 많이 내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아담 해와가 질적 타락이 되었으므로 그 피를 받은 부부는 타락한 사람을 생육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정의 부부 생활도 예수님은 신랑이요, 우리는 신부가 된 것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던 것이다. 지금 아무리 큰 사명을 가진 자라도 그를 돕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왕권 반열이 이루어지는 것은 큰 사명을 맡은 자와 그 사명을 돕던 자로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명자의 결합으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가정이라는 것은 사명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사명을 위한 가정과 같이 되어야 한다. 아담이 정녕 죽으리라 하는 법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해와가 죽을까 하노라 하는 말을 했다는 것은 돕는 사명자의 탈선된 말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 하는 법을 받은 사명자를 돕는 자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따라갔다는 것은 사명자를 돕는 일이 아니요, 오히려 대적이 되는 일이므로 세상을 망치는 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가 열매를 먹고 사명을 바로하는 사람이 될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표적인 종을 돕기 위해서 그가 받은 말씀의 법을 엄중히 알고, 그 말씀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종이 받은 말씀의 법대로 싸우는 일에 돕는 사람이 되어야만 사명을 바로 할 수 있는 종이 되며, 가정적인 단체를 이룰 수 있다.

결 론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드시고 그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허락하셨다. 이 열매를 먹는 사람으로써 사명을 바로 할 때에 생명과를 먹고, 생명수를 마시고, 영생할 몸이 되어 세세왕권을 받아 가지고 영광을 길이길이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이다.

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창 1:27-31)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는 그때부터 있게된 것인데 사람이 그 가치를 상실한 것이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홀로 역사할 수 없고 자기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을 목적 두고 천지 만물을 창조한 동시에 사람을 창조한 것이다. 모든 만물은 사람이 자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에 돕는 피조물이 되고 사람은 그 만물의 도움을 받아 일할 수 있는 생활이 있게 된 것이다. 만물이라는 것은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있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복을 받으면 만물이 영광을 나타내고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면 만물은 쇠약해지는 것이 인간 생활의 가치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생의 사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명이다 (27-28상)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복을 줄 수도 있고 화를 줄 수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복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3가지로 구분을 지어주시는 것이다.

1) 만물을 은혜로 주는 축복이다.

모든 동물은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한 활동 기관이다. 그러므로 이 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만물이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전부 효과를 발휘하여 그 열매로 사람을 돕는 것이다. 사람이 복을 받을 때에 만물은 열매가 좋아지고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할 때에 만물은 열매가 적어지는 것이다. 열매가 좋아지는 것을 물권 축복이라는 것이다. 이 축복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창조시에 무조건 주었던 축복이다.

2) 왕권의 축복이다.

왕권이라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을 충분히 할 때에 받는 축복이다 (계5:10-11). 하나님은 이 축복을 주시는 것은 일한 것이 없이 무조건 주는 것이 아니고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꾀어보고 그 뱀의 세력을 이기면 받는 것이요, 이기지 못하면 받지 못하는 것이 복을 주는 공의로운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뱀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했다 하여도 이 왕권을 받기 위해서는 둘째 아담 예수를 보내서 역사하는 것이다(계3:21).

3) 세세 영광이다

하나님은 세세 영광을 당신이 가지신 동시에 그 영광을 사람에게 주되 왕권으로 주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영광을 준다.

ㄱ. 물질계 보다 더 화려한 도성을 주신다.

이 도성이라는 것은 흙에서 난 몸이 영체가 되어서 누리는 도성이다. 지금은 사람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목적에서 만물을 주셨지만 다음에 주는 영광은 만물을 영광으로 받는 축복이 된다 (계 21:3-5).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 만물만 주고 새로운 다른 것이 없다면 영원한 영광이 될 수 없다. 영원한 영광이라는 것은 영원한 만물이 있어야 될 것이다.

ㄴ. 영광으로 이루어진 도성을 받는다.

지금 이 세상은 영광으로 이루어진 도성이 아니고 만물의 빛으로 이루어진 도성이다. 하늘의 태양이 비춰지므로 이루어지는 것은 잠간의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계21:23). 만일 태양의 빛으로 밝아지는 도성만 있고 영광으로 이루어지는 도성이 없다면 사람에게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태양의 빛을 통하여 만물이 희생하고 열매를 맺는 것이니 만일 이 빛이 아니라면 도저히 물짉라는 자체가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햇빛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다.

2. 충만케 하는 사명이다 (28 중)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하에서 열매를 많이 이루어 놓는 것을 목적 둔 사명이다. 모든 식물은 씨 맺는 열매로 충만할 사명이 있고 동물은 동물로써 충만케 할 사명이 있고 사람은 사람의 의로운 씨로서 충만케 할 사명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므로 의로운 씨가 충만해지지 않고 악한 씨가 충만해질 때에 하나님은 진노하게 되었다. 홍수 심판도 악한 씨를 없애기 위한 목적이요 인류 종말에 바벨론이 한시간에 불타는 것도 악한 씨를 없애기 위한 심판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새일역사라는 것은 악한 씨를 없애고 의로운 씨만으로 지면에 채우는 것을 말한다 (사43:19-21, 49:20-21).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되 네씨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진다는 것은 새시대의 축복을 두고 가르친 말이다. 그러므로 중생받은 자녀들이 붉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의 표를 받지 않고 남은자가 지면에 충만해지므로 창조의 목적을 달성시키고 영원한 천국의 수가 차게 되므로 무궁 세계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많은 열매를 맺어 추만한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3. 다스리라는 사명이다 (28 하)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물을 맡긴 것은 바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보다 만물의 종이 되는데까지 떨어진 것을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뱀에게 미혹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순종했으므로 다스리는 권세를 빼앗기고 만물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스리는 권세를 다시 찾아서 의로운 사람이 통치하는 곳을 새시대 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기능을 준 것인데 그 기능을 상실하고 오늘의 과학 발전이 되었다 하드라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원자핵으로 말미암아 인류 전멸이라는 비참을 이루게 된 것은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어버린 인간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물과 불이 당치 못하는 역사가 택한 자에게 임하므로 물질의 피해를 당치 않는 사람으로서 이루어지는 그때의 사람은 자기 사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사명을 받은 자로서 그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 변화, 성결로서 이루어지는 왕국이라는 것이다.

10. 동방 에덴의 새 가정 (창 2:4-19)

서 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인공인 사람을 낼 때 사람에게 새로운 가정적인 생활에서 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땅을 정복하고 충만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동방 에덴의 새 가정은 어떤 가정인가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생령으로 이룬 가정 (7)

모든 동물들은 흙으로 지었으나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온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특별히 사람에게 생기를 넣어 줄 때 생령으로 움직이는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생령이 되었기 떄문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동물은 생령이 없으므로 가정을 이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이란 깨끗한 양심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활동이 있는 곳에 아름다운 가정이 있게 된다. 양심적인 절개가 없는 생활의 가정이란 보존될 수가 없다. 부부라는 것은 맑은 양심에서 절개를 지키는 일이 없이 부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양심 속에서 움직이는 생령이 있는 가정에 하나님은 왕래하신다. 이것은 영적 교회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영적 교회를 가정과 동일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2. 협력으로 이루어진 가정 (18)

하나님은 합심협력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합심 협력한 배필을 축복으로 주었던 것이다. 아담은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써 돕는 배필을 받았던 것이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돕는 정신의 협력이 없이는 인간의 미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도와주는 사람을 준 것은 영광으로 주었던 것이다(고전11:7). 가정의 주인공은 남자가 되는 것이 진리요 여자는 가정의 미를 이루기 위하여 돕는 동시에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지혜와 지식으로 이루어짐 (19-20)

사람은 창작적인 재능을 받았으므로 모든 동물의 이름을 창작할 수 있는 지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창작적인 지혜와 지식은 동물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머리속에 꺠닫는 지혜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정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가정에 새로이 생각을 해서 창작적으로 일을 연구해서 새로이 할 일이 없다면 그 가정은 아무런 일을 이룰수가 없는 것이다.

4. 일체가 된 가정 (23-24)

가정은 한 몸이니 일심단합이 있는 동시에 일체적인 열매로 이 땅에 충만할 수 있는 자녀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5. 부끄러움이 없는 가정 (25)

가정이란 서로 부끄러움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의 빛 안에 안겨 있는 생활이니 죄가 없는 가정이요 공포와 수치가 없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구원이란 동방 에덴에 있던 새가정의 생활을 다시 복구해 주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사65:25-28).

11. 미혹의 말이 무엇인가 주의할 일 (창3:1-5, 마4:1-11)

하나님께서 언제나 대표적인 사람에게 간교한 마귀로 미혹의 말을 하도록 허락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는 자가 되느냐를 시험하는 거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변론을 바로 해서 이기나 보자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만 존경하는 생활이 있나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아담 해와에게 미혹의 말이 왔고 둘째 아담 예수에게 미혹의 말이 왔다. 미혹의 말이라는 것은 그때에 그 인격을 따라서 오는 것이다. 이제 미혹의 말이 오는 그 환경과 입장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아담 해와에게 오는 미혹의 말 (창3:1-5)

미혹의 말이라는 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격과 환경에 따라서 미혹을 받도록금 하는 말이다. 이제 미혹의 말이 어떠한 환경과 인격에 따라서 오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하나님 말씀을 물어보는 말로 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완전한 답변을 못할 인격을 가진 자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와와 같이 말씀을 옳게 대답을 못하는 자가 되면 대답을 바로 못하는 시간에 벌써 마귀에게 지는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해와가 마귀의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하나님 말씀에서 정확히 대답을 못하는 인격이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죽을까 라는 말로 대답이 나올 때에 해와는 미혹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마귀는 말씀 무장이 못된 자에게 답변을 바로 못할줄 알때는 성경을 물어 보는 말로 미혹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미혹의 말을 이길려면 물어보는 말에 정확히 대답할 무장이 있어야 한다. 금일에 소위 목자라는 살마들이 물어보는 말에 하나님 말씀으로 정확히 대답을 못한다면 교회를 망치는 목자가 될 것이다 (창3:1-3).

2)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도 미혹자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볼 거싱 아니고 한 상징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 에덴 동산에서 해와에게 결코 죽지 아니한다는 말이나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말씀은 언제나 사랑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 미혹의 말이다. 우리는 공의를 떠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데서 말씀은 공의의 법이라는 것을 믿고 말씀 그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법인줄 알고 마귀와 대적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 미혹은 얼마든지 말씀을 변경시킬려는 것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창3:4).

3)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이루어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마귀는 이것을 의심나도록 하는 말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까봐 먹지 말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마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케 해 주고자 하는 사랑을 의심나게 하는 말을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에게 유익한 것으로 생각이 나지 않고 오히려 불리하게 될 것으로 생각이 나도록끔하는 것이니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해 주시는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할 것이다 (창3:5).

2. 둘째 아담 예수에게 오는 미혹의 말 (마4:1-11)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를 마귀의 말로 미혹해 보듯이 둘째 아담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마귀의 말로 미혹을 시켜본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미혹해 보는 말을 할 때에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 해와에게 말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신을 받고 성신의 인도하에서 미혹을 하는 말을 할 때에 성신 받은 사람으로서 미혹 받을 말을 했던 것이다.

1)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이적이다 (3-4).

이것은 성신 받은 사람이 이적을 중심한다는 것은 미혹 받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적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양떼를 살리기 위한 목적인데 말씀으로 살리지 않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이적이라는 것은 곁길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이적을 행했다 하여도 진리로서 우리를 살리는 일이 없다면 그 이적은 필요가 없는 일이요, 금일에 아무리 이적을 행하는 종이 있다하여도 말씀으로 양떼를 살리는 역사가 없다면 그 이적은 오히려 미혹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으로 이겼던 것이다. 금일에 아무리 이적이 많아 육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일이 있다 하여도 말씀으로 그 생명을 살려주는 일이 아니라면 거짓 선지의 미혹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5-7)

성신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한다고 해서 함부로 위험한 일을 저지르면서 보호할 줄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할려는 생각이 되는 것이니 마치 마술자가 필요없이 마술을 행하듯이 아무 필요없는 일에 하나님의 신의 역사를 이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노여워할 일이다. 예를든다면 군대가 전쟁을 할 때에 자기가 주의치 않고 싸움에 실패하면서 상부의 보호만 믿고 있다는 것은 망령된 일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사람이 주의할 일을 주의하고 피할 일을 피하고 싸울일을 싸우면서 그밖에 내가 못할 일을 하나님의 역사로 된다는 것을 믿고 나가지 않고 공연히 필요없는 일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라고 하면서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오히려 미혹을 받는 길이 될 것이다.

3) 타협적으로 나가자는 말이다(8-11)

마귀는 언제나 싸우지 말고 자기 말만 들으면 얼마든지 좋게 해 준다는 것이다. 금일에 공산당이 기독교를 향하여 공산 사상을 지지만 해 준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것이니 이 말이 마귀의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온 것인데 마귀 앞에 타협을 한다면 벌ㅆ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은 붉은 마귀의 일을 없이할려는 것인데 마귀의 일을 없이하기 위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마귀의 일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그 시간에 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초림의 주로 오신 것은 타협할 수가 없이 죄를 진 인간들을 향하여 대신 죽으러 온 것이요 재림의 주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마귀의 일을 몽땅 없애려 오시는 것이니 누구든지 마귀의 일에 타협하자는 것은 미혹의 말로 알아야 할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사명은 마귀에게 미혹받은 세상을 깨닫게해서 구원해 주자는 것이니 마귀의 미혹의 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기도 신자로서 허공을 치는 바람잡이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12. 가장 간교한 뱀과 인생 가치

(창 3:1-10)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하여서 그 가치에 향상과 타락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꼐서 가장 간교한 뱀을 낸 것은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는 영생의 과실과 세세 영광을 누리는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은 사람의 과오이다. 하나님은 간교한 뱀을 상대해서 아무리 꾀어도 내 말을 참으로 믿고 순종하면 너는 비록 흙에서 난 몸이지만 영생과를 먹으므로 영생할 몸이 되는 가치와 또는 나와 같이 다스리는 권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동시에 인생의 가치를 발휘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인생이 가치를 상실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상실한 것이다 (1-3)

말씀의 존위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사람이 가감할 수 없는 말씀인데 사람이 조물주의 말씀에 존위성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그 말씀을 말한다는 것은 사람된 가치를 상실하는 큰 과오가 되었다.

해와가 보지도 말라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한 것은 벌써 합법적인 위치를 떠난 중언부언하는 횡설수설의 말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알고 그 말씀을 증거할 때는 권위이게 말하여야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상실하고 함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져다 붙일 탓” 이라고 하는 말까지 있는 것은 중생받은 성도로써의 그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할때에 말을 똑똑하게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잃지 말고 입으로 위엄있게 그 말씀을 말하여야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마귀의 간교한 시험이 올 때에 성경을 본문대로 위엄있게 읽어서 마귀를 물리쳤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 말씀 자체를 권위있게 증거해야만 마귀는 물러가게 된다.

2. 뱀의 말에 충격을 받은 일이다 (4-6상)

인생이라는 것은 언제나 마귀의 말에 충격을 받지 않아야 된다. 왜냐하면, 마귀 말에 충격 받는 시간에 영적으로 마귀의 흑암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아무리 간교한 뱀이 말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도 없고 마음에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가야만 사람은 영적으로 침투해오는 마귀의 압력을 받지 않게 된다. 지금 무신론 공산주의 변론이라는 것은 간교한 옛뱀인 용의 말이다 (계13:7). 간교한 뱀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때에만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심판기에도 말한다고 했다. 기독교의 중생의 도리가 십자가의 증거로서 온 세계의 인류를 빛으로 인도한 금일에 와서 간교한 옛 뱀을 다시 말하게 한다. 그것이 소위(유물론 공산주의)의 간교한 선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에는 귀담아 들을 것도 없고 현재에 그 세력이 강하게 일어난다 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도 마음에 충격조차 받을 필요 없는 말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공산주의 변론 앞에서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듣고 서로 이해한다는 말은 에덴 동산에서 해와가 뱀과 말할 때에 뱀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그 미혹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공산주의 변론과는 사정없이 끊어버리는 칼을 써야 한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는다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이 법을 준 것은 처음에 뱀의 말에 충격을 받고 미혹받은 인생이 잃었던 지상 축복을 중생받은 사람에게 주기 위한 방법으로 용에게 말한 것인 소위 유물적 정책의 공산주의 변론이라는 것이다.

3.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게 되는 일이다 (6 하)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준 인격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에 그때부터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영이 하나님과만 교통하고 사모할 때에 하나님께로 오는 축복을 받으므로만이 발전하고 또는 완전한 권리를 시행할 수 있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선악과로 끌렸다는 것은 선악과보다 못한 존재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의 화려하게 보이는 물질에 끌린다면 그 시간에서부터 그 가치를 상실하는 인격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4. 피가 더러워진 일이다 (7)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 빛 아래 살던 아담 해와는 선악과를 먹은 즉시에 부끄러운 생각이 난 것은 그 몸이 더러워진 증거이다. 인간들이 부끄러운 생각이 난 것은 가치를 잃어버린 몸이 된 증거이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완전한 몸이 될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영원한 영광 속에 들어가므로 영생할 몸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자체는 자동적으로 몸에서 생긴 것이니 그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증거다. 기독교인이 이 몸이 부끄럽지 않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려면 예언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서 선악과와 같은 바벨적인 세력에 물들지 않아야 될 것이다.

5.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8-10)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람의 인격적인 가치가 상실된 증거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하나님과 동거동락할 수 있는 위치를 준 것인데 선악과를 먹을 때에 그 위치를 가질 수 없는 인격이 되었다.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품 안을 떠나서 탈선된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날에는 어찌할 줄 모르고 떨게 될 것은 사실이다. 우리 주님이 지상 평화 왕국을 건설하려고 재림할 때에 두려워 떠는 사람이 된다면 이 사람은 뱀의 말을 듣고 그 몸이 죽을 사람이라고 본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간교한 뱀과 말씀을 놓고 싸워 이기면 향상이요 이기지 못하면 가치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마귀의 지배를 받는 생활로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생의 잃어버린 가치를 둘째 아담을 통하여 찾아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 말씀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13. 말씀의 칼을 잃은 인생의 비극

(창 3:1-19)

서 론

하나님께서 만무을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말씀의 칼을 법으로 삼아서 이것을 지켜면 너는 영원히 살 것이요 이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극히 사랑하므로서 향상의 진보를 가짐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생명과를 기업으로 주고져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말씀의 칼을 잃고 마귀의 말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인간에 슬픔의 눈물의 골짜기 죽음의 비참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말씀의 칼을 잃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 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자기의 주관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3:6)

인생은 말씀의 칼이 마음에 새겨져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리는대로 보이는대로 흔들리는 자가 됨으로 자기의 주관을 잃고 미혹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칼을 잃어버린 해와는 선악과를 볼 때에 마음이 끌리고 눈이 혼미한 미혹을 받아 뱀의 말대로 선악과를 먹고 남편까지 먹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할 자가 되려면 말씀의 칼을 마음판에 새겨서 대항하여야 할 것이다.

2. 인생의 자격을 상실함 (3:7)

말씀을 떠난 생활을 하고 보니 영광스럽던 그 몸은 수치스러운 몸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고 보면 벌거벗은 수치와 같이 자기의 존귀한 인격은 낮고 천한 수치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말씀을 지켜서 영광이요 지키지 못함으로 수치를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3. 담대함을 잃어버림 (3:8-10)

인생 자체는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는 담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떠난 생활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맟을 피하여 숨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공포심이 왔던 것이다. 말씀이 곧 힘이요 능력이니 말씀을 떠난 인격은 아무것도 담대히 나갈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4. 심령의 암흑 (3:12-13)

말씀을 떠난 생활을 할 때 아담과 해와는 각각 자기의 부족을 남에게 덮어 씌우는 암흑이 왔던 것이다. 흑암이라는 것은 남의 부족은 알아도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것을 흑암이라는 것이다.

5. 원수를 맺음 (3:15)

말씀을 떠난 생활에는 원수의 피해를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책임지고 보호할 수는 있으나 말씀을 떠난 사람은 책임을 질 수 없이 원수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6. 지위를 상실함 (3:16-17)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지위를 아담 해와에게 주었으나 말씀을 떠난 부부에게 수고의 땀과 해산의 고통을 주게되므로 행복된 안락의 생활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7. 자신의 사망 (3:19)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변할수 없는 것이니 아무리 일남일녀의 귀한 몸으로 창조를 받은 것이로되 말씀의 법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 론

인생은 최고의 가치도 말씀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요 최저의 타락도 말씀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은 피조물된 인생에게 인격의 향상 발전을 위해서 준 것이니 말씀이 없다면 동물에 불고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체가 사랑인 동시에 말씀을 떠난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4.가정에 오는 난제와 인류 문제 (창3:6-17, 마1:18-25)

하나님께서 인류적인 대 사업을 할 때는 언제나 지극히 적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대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역사를 하게 하셨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낼 때에도 아름다운 동산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아름답게 살며 아름다운 영광을 길이 길이 누리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 해와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일은 세계 인류를 타락시켰다. 그리고 지극히 적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시작된 일이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타락의 근본되는 가정과 인류 향상의 근본이 되는 가정의 차잇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인류 타락의 시발점이 된 가정 (창 3:6-17)

세계 인류를 대표하는 가정에서, 여자 하나가 잘못하여 인류적인 큰 영향이 되었다는 것을 볼 때에 사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간교한 마귀를 용납했다는 것이 세계를 망치는 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가 조금이라도 불의한 세력을 용납한다는 것은 벌써 자기 사명을 상실하는 일이다. 해와가 뱀의 말을 물리치지 못하고 거기에 끌려 선악과를 볼때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게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 인류 타락의 근본이 되었다. 사명자가 자기 인격을 상실하고 남에게 끌린다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류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사명을 가진자로써 자기 사명의 획선을 조금이라도 남에게 침범을 당하게 된다면 반듯이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자기가 맡은 사명에서 사상과 정신이 조금이라도 상실될 때에 그 시간부터 큰 일이 난 것으로 알고 그것을 물리치는데 전력을 두어야 한다. 해와가 뱀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하여도 그 충격을 따라서 행동하지 않고 자기의 주인된 남편을 사모하고 따라갔던들 이러한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명자들은 자기 사명에 대하여 방해가 되는 충격이 올 때에 이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담이 아내를 아무리 사랑한다 하여도 자기 사명의 획선을 벗어나기까지 하내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큰 실패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사명을 침범할 때에는 예수님과 같이 사단아 물러가라 는 책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담이 아내를 책망하지 못하고 그 일에 끌렸다는 것은 세계적인 대표가 되는 인격이라고 볼 수 없다. 아담과 해와가 사명의 인격을 상실할 때에 수치와 공포와 분쟁이 오는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담의 가정에서 시작된 수치 공포 분쟁은 오늘날 인류적인 수치 공포 분쟁이 되었다. 언제나 사명자라는 것은 무엇에 치우치는 일이나 끌리는 일이 없어야만 세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인류 향상의 시발점이 된 가정 (마1:18-25)

나사렛 동네의 빈난한 가정에서 여자 하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이 세계 인류를 향상시키는 근본이 되었다. 인간 도덕으로는 큰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에게 성신의 잉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할 때에 세계 인류 향상의 시발점이 되는 성신의 잉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성경대로 자기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나므로 다윗의 왕국이 세계를 통일하는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을 믿고 자기 앞에 여러 가지 난관이 있을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종하였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려면 앞으로 오는 여러 가지 난제를 생각지 말고, 주의 능력에 무조건 순종할 때에 순종을 제사보다 낫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므로 되는 것이다. 마리아도 하나님의 무소 불능을 믿고 순종하였으므로 무소 불능의 역사가 그 몸에 그 시간부터 시작되어 온 세계 인류에게 큰 구원을 주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의 몸에 잉태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 경솔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주의 천사의 지시를 받아 범죄하지 않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게 되었다. 만일 천사의 지시를 받지 못하였던들 요셉은 큰 범죄를 하므로 인류 향상의 시발점이 되는 그리스도 탄생의 대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으므로 천사의 지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 닥쳐올 때에 이것을 바로 알아 보기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가장 거룩한 성도의 자격을 가진 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했다는 것은 신앙 양심으로서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므로 요셉은 묵묵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무엇이나 깊이 생각을 해 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뜻을 기다리는 것이 있기 전에는 세계적인 대표가 되는 사명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수치스러운 일이 온다하여도 주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시행하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 도덕적인 방면으로 본다면 처녀로 잉태한 마리아를 요셉이 집으로 데려와 받들어 섬긴다는 것은 비방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들이 비방한다고 거기에 흔들리고 자기의 위신이 떨어진다고, 여기에 치우친다면 이 사람은 세계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보기에는 빈난한 목수의 가정이었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에 출생하여 세계적인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 가정이 순종치 아니하므로 전 세계 인류가 저주 아래로 떨어졌고 한 가정이 순종하므로 전 세계 인류가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가정의 난제가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고 한 가정의 축복이 세계적인 축복이 된 것이다.

결 론

한 가정의 일이 세계적인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가정에서부터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있어야할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복된 가정, 복된 교회, 복된 나라를 이룰수 있다.

15. 원수가 생긴 가정과 원수가 없는 가정 (창 3:13-15, 사65:21-25)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기뻐하기도 하시고 가정을 슬퍼하기도 하신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노엽게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기 떄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가정을 이루어 주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의의 씨를 충만케 하라는 것과 의의 권세로 땅을 정복하라는 것과 의로운 인격으로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지만 가정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므로 원수가 생기는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이기는 가정으로 평화로운 왕국을 이루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원수가 생긴 가정과 원수가 없는 가정의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원수가 생긴 가정 (창 3:13-15)

하나님께서 원수를 내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써 원수가 생긴 것이다. 에덴 동산의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하여도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나갔다면 뱀은 사람에게 원수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뱀의 가장 간교한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믿었으므로 가장 간교한 뱀이 원수인 마귀가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뱀은 사람을 속이는 죄를 졌으므로 저주를 받게 되었고 사람은 속았으므로 축복을 잃게 되었는데 사람을 속인 뱀은 그때부터 사람을 계속으로 속일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끝까지 속이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뱀에게 한 번 속아 타락한 인생은 끝까지 속는 사람이 되었기 떄문이다. 사람이 뱀의 말을 듣지 않고 이겼다면 뱀은 사람에게 감히 피해를 줄 수가 없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귀라는 것은 가장 간교한 뱀이 사람을 속여서 타락시킬 때부터 저주를 받은 동물로써 더 악해지고 최후에는 독한 독사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뱀을 창조하실 때에 가장 간교하게 내신 것은 이기면 얼마든지 승 할 수 있는 기능을 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해서 다른 동물과는 상대가 되지 않아도 가장 간교한 뱀과는 상대가 되게 하셨다. 이 상대라는 것은 의의 상대가 아니라 가장 간교해서 속일 수 있는 동물과 가장 정직하여서 속을 수 있는 사람과의 상대이다. 그런데 정직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거짓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있지 않으므로 거짓이라는 자체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뱀이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의심한 것 보다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신이신데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이 나게 되었다. 언제나 원수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달리 생각이 나도록 하는 일과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달리 생각하게 하는 일과 하나님의 역사를 잘못 생각이 나도록 하는 것을 감화로 넣어 주어서 말씀과 사랑과 역사를 탈선된대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다시 성도의 가정에 들어와서 원수가 되는 일이 있게 된다. 지금도 아무리 마귀가 간교하다 하여도 하나님 말씀을 바로 생각하고 사랑을 바로 생각하고 역사를 바로 생각하는 가정에는 원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2. 원수가 없는 가정 (사65:21-25)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에게 억울하게 미혹을 받고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는 다시 원수의 피해를 당하지 않는 가정을 이루어 놓는 것이 언약의 말씀의 목표가 된다.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영혼 구원을 목적하신 것이 아니라 원수가 없는 가정으로 이루어지는 새시대가 될 때까지 부분적인 구원으로 그 영을 낙원이라는 영계에 머무르게 하시는 것 뿐이다. 땅 위에 원수가 없는 가정 생활을 완전히 이루어 놓으므로 그 가정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완전히 이루는 것을 목적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중생 받은 사람으로 심령의 가난과 통회를 가지고 말씀에 떤다면 권고하여 남은 자가 되게 하고 그밖에 불의한 자들을 다 없애는 동시에 마귀의 원수 피해가 다시 없는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사66:1-2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원수가 없는 가정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생각하게 하는 것은 미혹의 신이요, 그 사랑을 바로 깨닫도록 하는 것은 진리의 신이다. 복된 가정에 원수가 생긴 것은 하나님 사랑을 잘못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장 간교한 뱀이 인생에게 원수가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 시킨 일.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생각하게 한 일

셋째: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 일이다.

가정이 말씀에 순종치 않고 단합되지 못하므로 잃어버렸던 지상 축복을 말씀에 순종하고 단합된 가정으로 다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마귀를 들어쓰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합심이 되고 안되는 것을 따라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가 없는 가정이 될려면, 첫째는 말씀을 순종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며, 둘째는 단합된 가정이 되어야 하며, 셋째는 성별된 가정이 되어야 한다. 가장 복된 일은 원수가 없는 가정이 되어 새땅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일이라고 본다. 원수인 마귀를 없이하는 것은 말씀대로 끝까지 순종하여 완전한 평화의 가정과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 론

가장 큰 일은 원수가 나에게 피해를 주느냐 못 주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모든 일이 다 잘된 것 같으나 원수의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수고는 다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에 아무리 좋은 가정이라도 원수가 있게 될 때에 불행을 가져왔고 현재 아무리 고난이 있는 가정이라도 원수가 없는 가정이 될 때에 영원한 축복이 있게 될 것이다.

16. 흙으로 돌아갈 몸과 하늘로 올라갈 몸 (창 3:17-19, 계11:7-12)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동시에 사람도 그 역사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 흙에서 창조를 받은 몸을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은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간교한 뱀으로 시험을 해보고 이기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간교한 뱀을 이기지 못하므로 흙으로 돌아갈 몸이 된 인생을 다시 간교한 뱀을 이기고 그 몸이 하늘로 올라가기까지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것이다.

1. 흙으로 돌아가게 된 몸 (창3:17-19)

아담이 간교한 뱀에게 미혹 받은 여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몸을 이루게 된 것이다. 소위 왕권을 받아야 할 사명자가 여자의 말을 따라갔다는 것은 큰 과오가 아닐 수 없다. 해와는 뱀의 미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을 때에 벌써 그 몸은 뱀의 도구가 되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령이 된 아담을 통하여 생명과를 먹고 그 몸이 하나님과 동거동락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는 여호와께서는 몸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이 사랑의 만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완전한 것을 줄 수 있는 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것을 주는데는 완전히 이기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상대하여 큰 나라를 이룰 사명을 맡은 자로서 뱀의 도구가 된 여자를 용납했다는 것은 벌써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없는 자격인 동시에 선악과를 먹기까지 했다는 몸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이라는 것이다. 이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이 되는 죄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주권을 상실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라는 것인데 여자 하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여자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준 주권을 상실한 죄이다.

둘째: 여자의 손에 있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죄다. 하나님의 일군이 남을 옳게 먹여야 할 사람이 여자의 손에서 주는 선악과를 경솔히 받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일군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알지 않고 여자의 말에 끌렸다는 것은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일군은 주권을 찾지 못하고 의무를 상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지 못한 자는 모든 일이 다 헛수고가 되고 또는 열매없는 인격으로 흙 한 덩이로 이루고 마는 것이다.

2. 하늘로 올라갈 몸 (계 11:7-12)

하나님께서는 이날까지에 종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은 죽은 영을 살리는 일에 목적을 두고 역사했던 것이다. ㅇ hosi하면 영들이 다 타락하여 죽은 영들이니 그 영을 살려 놓고야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 역사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인류가 다 하나같이 죽은 영들이 살게되는 일이 있게 하고 산 영들을 한 번 시험을해서 시험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역사를 하는 것이 오메가의 역사이다. 죽은 영을 살리는 일에는 마귀로 시험을 해보는 때가 아니고 이미 마귀에게 사로 잡힌 영들을 해방을 주기 위하여 회개 운동을 일으키되 민족적 국경의 차별이 없이 회개만 하면 무조건 그 죄를 용서하고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는 역사이다 (눅24:47-48). 시험이라는 것은 죽은 영들을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니고 산 영을 가진 자를 그 몸이 영생하게 하는 목적을 두고 역사하는데는 에덴 동산에서 생령을 가진 아담 해와를 간교한 뱀으로 시험해 보듯이 중생 받은 생령의 사람들을 시험해 보는 때를 인류 종말의 환란기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몸이 되었고 기독교 종말에는 음녀적인 바벨에게 미혹을 받지 않아야 영생할 몸이 되는 것이다. 이제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적은 책을 꿀같이 먹고 쓴 것을 통과하여 세계적인 예언을 다시하는 대표의 사람이 나오는 일 (계10:10-11)

둘째: 진리로 하나같이 척량을 받는 일 (계11:1)

셋째: 권세를 받아 마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일 (계11:3-6)

넷째: 삼일동안 쓰러져 있다가 썩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 (계11:7-12)

첫째 아담은 성신을 받지 못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지만 말세의 종은 둘째 아담 예수님의 승리의 왕권으로 오는 성신을 받아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데는 권세까지 받게 되므로 옛 뱀 용의 앞잡이 짐승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이기게 되어 변화 승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 것은 말씀 권세로 마귀 권세를 이기고 들림 받게 되는 것을 기독교 종말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난국은 말씀을 지키나, 못 지키나 시험해 보기 위하여 붉은 용, 붉은 짐승, 거짓 선지가 권세를 받고 나와서 시험해 보는 것을 난국이라는 것이다. 이 난국을 돌파하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조금도 가감없이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 난국을 돌파하고 다시 에덴 축복의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데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고 나간 자들로 지상 통치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

결 론

하나님은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공의의 법칙이라면 하늘로 올라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법의 완성이라고 본다. 사람이 아무리 타락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완전한 왕국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의 의요 승리라는 것이다.

17. 아담의 가정의 종교 싸움

(창 4:1-12)

종교라는 것은 질적 타락을 가진 사람에게 영혼 구원을 목적한 것이 종교의 시발점이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질적 타락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사람이 질적으로 타락이 될 때에 피로써 대 속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 영혼 까지도 다 사망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가정의 종교 싸움이 시작된 것이 금일까지 계속되는 싸움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종교 싸움이라는 것은 왜 있느냐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응답이 있고 없는데서 싸움이 있음 (1-5)

종교라는 것은 그 제사가 상달되느냐, 안되느냐 하는데 의하여 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좌우 된다. 아무리 한 아담의 몸에서 난 가인과 아벨이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응답이 있을 때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적에 한 가정에 두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에게는 맛있는 빵을 주고 한 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면 받은 아이는 기뻐하고 받지 못한 아이는 성이 날 것이다. 그러면 부모가 빵을 주는 것오 아무 아이에게나 줄 수 있다. 속담에 미운 녀석 빵조각 더 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리의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하는 아담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적에 용서없이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었거든 하물며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는 것이니 중심에 간절한 마음이 없는 사람의 제사는 받을 수 없을 것이고 간절한 사람의 제사만 받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가인의 제사는 왜 받지 않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선을 행치 않는 죄이다 (6-7상). 하나님은 그 제물을 보는 것보다도 중심에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단 마음으로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것을 보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일을 단 마음으로 순종치를 않는 것이 큰 죄이므로 선을 행치 않는 가인의 영적 상태를 볼 때에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심중은 간절하나 실수가 있는 사람보다도 제사는 드리면서도 그 중심이 간절한 것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죄의 어미가 되는 일이다(7하).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였다. 죄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자기가 고의적으로 지은 죄가 아니고 상대편에 끌려서 실수한 것은 죄의 어미가 되는 행동이 아니로되 옳은 사람을 이유없이 미워하는 것은 죄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 자체는 그 마음을 정욕의 사단이 점령했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상대편이 내게 감정을 주므로 끌렸다는 것과 상대편이 내게 옳게 대해 주는데 해코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벌써 그 속에 마귀의 역사가 주인이 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언제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으로 제사를 하면 받으실 것이로되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는 제사는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대적이 된 일이다 (8-9). 대적이라는 것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것도 내 대적이요, 직접 나를 대적하는 것도 내 대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았는데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니 하나님의 대적이요, 하나님을 대하여 반관심을 가진 것이니 즉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벨을 죽인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했던 것이다. 종교 악이라는 것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외식하는 일이요, 둘째는 시기하는 일이요, 셋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을 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종교를 믿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억울한 피와 보응 (10-12)

억울한 피가 이 땅을 적신 일은 대부분이 종교 싸움에서 된 일이라고 불 수 있다. 아담의 집에서 시작된 피의 호소가 이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피 값은 새시대가 이룰 때에야 갚아준다고 계 16:6, 17:6, 6:9-10에 말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의 도구가 되었고 제사의 응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억울하게 마귀의 도구가 되는 사람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이날까지 종교적인 싸움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 싸움은 이제 끝을 맺는 단계에 들어온 것이 우리 앞에 남은 전쟁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미약하므로 남에게 끌려 범죄했으니 그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은 남에게 끌려서가 아니고, 짐짓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하고 죽인 죄이므로 하나님의 대적이니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저주를 받아 영원히 멸망의 자식이 되엇던 것이다. 이와같이 금일도 종교의 싸움이 진리를 위하여 피해를 당한 자는 다시 살아서 왕권을 받을 것이고 피해를 주던 자는 영원히 멸망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아벨이가 형에게 죽은 것은 선악과를 먹은 죄 값에 죽은 것이 아니고 의로운 제사를 위하여 죽었으므로 그는 죽었더라도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의로운 사람을 마귀의 도구가 되는 거짓 종교인에게 죽게 한 것은 피 값을 갚는 날에 왕권을 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결 론

하나님은 마귀를 들어서 쓸적에 아담 해와는 직접 뱀으로 꾀어 보았지만 가인 때부터 지금까지는 종교인으로서 의로운 제사를 못드리는 자는 다 영적으로 마귀의 정복을 당해서 뱀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끝을 맺는 것이니 계13:11 이하를 보면 거짓 선지가 참된 성도를 해치는 정책을 쓰는 것이 마지막 환란인 것을 가르쳤다.

18.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창5:1-4, 눅3:21-23, 롬5:17, 고전15:22)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은 것은 하나님 자체가 영광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신으로만이 완전한 영광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몸이 있는 사람으로만이 완전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아담은 실패했으므로 그의 계통으로 내려오는 셋의 계통을 따른 아브라함의 계통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탄생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이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에 대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첫째 아담 (창 5:1-4)

하나님은 복의 근원인 동시에 생명의 자체요 생명의 자체인 동시에 사랑의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복을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의 요점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내기 전에 먼저 만물을 지은 것은 사람의 축복으로 창조했던 것이다. 그 축복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니 그 형상이라는 것은 정신, 사상, 중심, 몸의 법을 세운 것은 몸에 완전을 주고져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 사상, 중심은 하나님께로 직접 받았으나 몸은 흙으로 지은 몸이니 그 몸은 생명과를 통하여이 흙에서 난 몸을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을 주는데는 법을 지켜야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고의적이 아닌 실수 즉 아내가 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완전을 얻지 못하고 930세를 세상에 살다가 몸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사상, 정신, 양심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가인은 사상, 정신, 그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악에 속한자로서 아벨을 죽인 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다시 딴 씨가 나오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담의 계통자는 억울하게 죽어서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꼭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즉 둘째 아담 그리스도가 탄생한 계통이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지 않고 내려오는 그 사상, 정신, 양심, 이것이 계속해 내려온 것이 역사적인 종교라는 것이다.(딤후1:3). 다시말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종교라는 것은 어떤 의식, 어떤 교훈, 이것을 가진 것이 아니고 아담으로부터 모세때까지 순수한 양심적인 종교였던 것이다(롬5:14, 고전15:47). 그때는 아무런 교훈적인 성경도 없고 정해진 의식적인 제사법도 없고 순수한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양심, 이것이 계통으로 바울에게 유전되어 내려오면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 뿐이다.

2. 둘째 아담 예수 (고전 15:25)

둘째 아담 예수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피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피를 받으면 썩지 않고 하늘 형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으로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것은 성령이 마리아의 몸에 역사해서 죄가 없는 몸으로서 나게 했던 것이다. 이 몸은 흙에서 나온 계통이 아니요 하늘의 신의 역사로 썩지 않을 살 썩지 않을 피, 이것으로서 난 것을 둘째 아담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라고 한 것은 당신의 몸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몸은 만민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피를 가진 몸이었다. 이 피는 신으로부터 받은 피다(요1:14, 요1서5:6). 피도 사람의 부정으로 받은 피도 있고 성령으로 받은 피도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피를 받게되므로 썩지 않고 들림받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준다는 것은 썩지 않을 피로 썩지 않을 몸으로 영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형체와 같은 몸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말세에 썩지 않고 들림받을 종들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를 받도록 역사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사4:4). 그러므로 욜2:30 에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한 것은 29절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엑 부어주는 일이 있으므로 되는 일이다.

결 론

우리는 첫째 아담의 피의 계통으로 난 몸은 선악과를 먹은 죄의 씨를 받았으므로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육체에 부어주는 성령을 받으므예수님과 같은 몸을 받게 된 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고 하신 것이다. 주님 강림시에 죽은자도 부활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통하여 다시 일어나는 것이요 살아 남아 있는 종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썩지 않을 영생체로 들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욜2:30은 살아서 들림받은 종들에게 임하는 역사를 가르친 것이다. 변화성도는 죽지 않고 살아서 영생의 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세의 남은 종에게 부어주는 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역사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낸 목적을 첫째 아담으로는 이루지 못했으나 둘째 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기독교의 종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첫째 아담은 간교한 뱀을 이기지 못하므로 사망이 들어왔고 둘째 아담 예수는 승리하므로서 생명과를 따 먹을수 있는 몸으로 다시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우리는 에덴 동산의 아담이 뱀과 싸워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결부됨과 같이 말세에도 들림받을 종들은 붉은 용을 앞에 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싸우는 것이 증인이 권세 받고 나와서 역사하는 기간이다.

19. 홀로 된 노아의 가정

(창 6:9-22, 7:17-24)

하나님께서는 악한 세상에 나타나 역사하실 때에 대중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홀로된 사람에게 나타나서 비밀을 알리기도 하시고 역사하기도 하시고 구원하기도 하셨다. 언제나 참된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은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홀로 된 노아의 가정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 (9-12)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홀로 된 사람에게 나타나기도 하시고 동행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의합된 사람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시대에 의로운 사람이 고독감을 느낄 때에 그 사람에게 더욱 가까이 하시어 함께 하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당신이 할 일을 하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생활은 대중 심리를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일이요, 홀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것을 목적하고 나가는 신앙을 가져야만 시대적인 비밀을 알 수도 있고 축복을 받게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볼 때는 미약하고 어리석고 가장 불완전한 일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리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노아 당시에 누구나 다 노아의 고독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의 사람들이 노아는 그 시대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했을 것은 사실이다.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될려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올때는 노아 때와 같으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2. 홀로 끝 날을 알게 된 노아 (13)

노아는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서 홀로 끝 날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2).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끝 날이 왔다는 것을 안 노아가 만나는 사람마다 세상은 끝이라고 할 때에 미친사람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는 홀로 알고 홀로 정신을 차려 담대히 나섰던 것이다. 지금도 끝날이 왔다는 것을 말하면 미친 사람으로 알 것이고 끝날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안 사람이면 사람의 어떤 탄압이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하게 된다. 끝날이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을 문제로 삼지 않고, 눈물겨운 심정으로 입을 열어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노아 시대에도 노아가 아무리 말을 해도 한 사람도 그 말을 알아주는 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고 담대히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나갔던 것이다.

3. 홀로 방주를 준비한 노아 (14-22)

아무리 열심히 있는 사람이라도 돕는 자가 없이 홀로 일을 한다는 것은 힘이 빠질 일이요,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쓸쓸한 자리에 있게 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종이 홀로 일한다고 해서 힘이 없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할 때에 남이 하면 같이 열심을 내고 남이 하지 않으면 힘을 잃고 만다면 이것은 산 믿음이 있는 활동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앞으로 큰 축복을 받을려면 언제나 홀로 일하게 되는데서 더 큰 힘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열심 중에도 사람에게 보일려는 열심도 있고 남에게 끌려서 흥분으로 사는 열심도 있고 자기 홀로 끝까지 모든 일을 진행하는 열심도 있으니 노아와 같은 열심히 있는 자라야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것이다.

4. 홀로 구원 받은 노아의 가정 (7:7-24)

가장 놀라운 일은 홀로 구원받은 노아 가정의 일이다. 개인적인 구원은 새 시대를 이룰수 없고 가정적인 구원이라야 새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에 되는 일은 노아 때에 된 것과 같다고 한 것은 구원을 받을 자가 심히 적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영혼 구원을 받는 사람은 보통 신앙이 있어도 되지만 영과 육이 아울러서 구원받는 자가 될려면 특별한 신앙에 특별한 일을 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이 몸이 죽고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은 특별한 준비가 없어도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결한 마음이 있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 가정이 심판날에 구원을 받는 것은 특별한 신앙에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가정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며 드문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반드시 홀로 고독감을 느끼는 일이 있을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 론

가장 귀한 일은 대중적으로 있게 되는 일이 아니고 홀로 비밀을 알게 되고 홀로 준비를 하게 되고 홀로 구원을 받게 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시대를 만난 이때에 홀로 된 노아의 가정을 깊이 생각하고 새로운 힘을 날마다 얻어야 할 것이다.

20.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행하는

노아의 가정 (창 7:1-24)

인류 역사상 노아의 가정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합심하여 순종하며 준행한 가정은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롯의 가정도 소돔에서 구원을 받을 적에 합심이 안되므로 불행을 가져왔고 아브라함의 가정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완전히 준행치 못하므로 불행스러운 이스마엘이 나왔고 이삭의 가정도 두 아들이 합심이 못되므로 불행스럽게 에서의 족속이 나왔고 야곱의 가정에도 불행스러운 일이 많이 있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이 못되는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싸운 야곱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의 가정은 전 세계가 전멸되는 심판에서 세계의 어머니가 되는 가정을 이룬 것은 새 시대에 들어갈 촛대 교회에 표징이 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한 노아의 가정에서 행한 일을 본문대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가정 (1)

하나님의 명령이 노아의 가정에 온지 일백 이십년 동안에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지만 합심 단결하여 방주를 준비했다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 시대 사람이 한 사람도 노아의 방주를 지지하고 협조한 자는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그 방주에 들어간 자가 없고 노아만 그 가정 식구를 데리고 들어간 것을 본다면 그 방주를 준비할 기간에 어려운 일이 많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다 강포가 충만할 때라는 것을 창6:11-12에 말했다. 이러한 시대에서 그 가정이 합심이 안되었다면 노아는 도저히 방주를 준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금일에 우리 촛대 교회는 노아의 가정 같이 합심된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게 준행할 수 있고 준행하는 일이 있어야만 큰 축복이 나릴 것이니 많은 사람이 모이고도 합심이 안되는 것보다 적은 수라도 합심이 될 때에 완전한 촛대교회를 이룰 수가 있다.

2. 순종하는 자를 다 구원해 주는 일에 전력을 두었다 (2-9)

아무런 동물이라도 방주안으로 순종해 들어오는 동물은 다 구원을 받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사랑의 방주요 은혜의 방주라고 볼 수 있다. 동물들이 아무런 수고한 일이 없지만 무조건 구원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에 아무리 방주에 수고한 일이 없다하여도 짐승과 같이 순종하고 무조건 뱃문을 닫기 전에 들어간 자라면 무조건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방주와 같은 촛대 교회에 들어오는 자는 단체적으로 보호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말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하던 자라도 택민 보호의 진리를 믿지 않고 촛대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홍수 같이 내려오는 환란에 빠지게 될 것이요, 아무리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있던 자라도 말세 경고를 듣고 촛대 교회에 들어와서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다같이 보호를 받고 새시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 교회를 세우기에 전력을 두는 자의 그 받을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본다.

3. 큰 파도를 이긴 노아의 가정 (10-24)

천하에 모든 인류와 동물은 큰 홍수에 파도를 못이겨 전부 쓰러졌지만 하나님 명령대로 준행한 노아의 가정은 그 홍수의 부딪히는 파도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물결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가정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기 고집을 가지고 앞으로 될 일을 말씀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인간들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 인간은 자기라는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할 때에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 같으나 지나고 보면 지혜로운 일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홍수같이 환란이 온 세계를 덮는다 하여도 예언의 말씀을 믿고 준행하는 교회가 될 때에 홍수같이 밀려오는 환란은 오히려 촛대 교회의 승리를 이루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자가 더 수고롭고 시험이 많고 심지어 어려운 핍박도 있지만 물밀 듯 내려오는 환란이 올때는 방주와 같은 촛대 교회는 반드시 안정처가 있게 되는 것이다(사33:20-24).

결 론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할 때에 그 심판은 행위 심판이 아니고 복음 심판이라고 본다. 누구든지 방주안에 들어가면 살고 못들어가면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앞으로 새시대를 이룰때에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고 안받으면 산다는 심판과 대조가 된다. 다시 말하면 노아 홍수 심판은 예언적이라면 종말의 예언의 말씀대로 인종 전멸의 심판과 재앙이 올 때에 촛대 교회는 완전히 새시대를 이루는 열매가 될 것이다.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면 살고 그 명령을 순종치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 노아 때나 주 재림기나 동일한 심판이 된다. 노아 홍수 심판 후에 지상에 새시대를 이룰 수 있는 언약이 성립되었고 주 재림기에는 그 언약이 몽땅 이루어지는 것이다.

21. 아라랏 산에 걸린 방주와

감람 나무 새순 (창 8:1-9)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할 때에 노아의 방주로 남은 자가 새 땅을 개척하게 할 때 아라랏 산에 방주가 걸린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후세에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된 일이라고 본다. 지금 방주가 아라랏 산 꼭대기에 얼어 붙어 있다는 것을 현재 발견하여 배의 형체가 신문에 발표한 사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기후가 변천되게 했다는 것도 그 방주를 썩지 않게 얼어 붙이기 위한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다. 하여튼 노아 홍수 심판후에 기후가 변천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둘째: 이 땅에 악의 씨를 없애고 인종을 전하는 시발점이 높은 산에 방주가 걸린 것 같이 새시대를 이루는 촛대 교회의 아름다운 소식도 높은 산에서 시작된다고 사40:9이하에 말씀했다. 언제나 하나님은 모두 되어지는 일을 아무런 의의가 없이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될 진리를 표현했다고 본다.

셋째: 방주가 높은 곳에 앉게 된 것은 가장 성별된 뜻을 보인 것이다. 속화된 인간에 있지 않고 가장 조용하고 거룩한 산 위에 앉게 한 것은 촛대 교회는 성별되어야 된다는 뜻을 나타냈다고 본다. 이제 방주안으로 들어온 감람나무 새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

1. 비둘기가 가지고 옴 (10-11 상)

이 뜻은 비둘기 같은 성신의 역사는 감람 나무 왕권의 징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참 감람나무의 역사라는 것은 가장 순결한 비둘기 같은 성신의 역사라야 이루어질 것을 뜻한 것이다.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고 올라오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할 때에 하늘 문이 열려지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나타났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2. 감람나무 새 순을 방주로 들인 것은 방주와 같은 촛대 교회의 순의 역사가 나타날 것을 보여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11하)

다윗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고 감람 나무 순이 비둘기를 통하여 방주에 나타난 것은 방주 후에 심판이 있게 될 때는 감람나무 순의 종이 나타날 것을 방주에서 시작된 인간 개척을 감람 나무 순으로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다. 물에 잠기어 멸망한 땅 위에 새순이 나타났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기쁨을 주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촛대 교회의 순의 종들이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완전한 개척을 시작함 (12-19)

촛대 교회는 그대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교회인데 노아 방주는 분명히 촛대 교회를 뜻한 예언이라고 보게 된다. 방주 안에 있는 여덟 식구가 세계 인류의 인종의 씨가 된 것 같이 앞으로 촛대 교회 안에 있는 남은 자들이 새시대를 이루는 종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 교회라는 것은 감람 나무 순의 종을 통하여 아름다운 소식을 알게 되고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니 다윗 왕족을 감람 나무의 역사라고 시52:8과 슥4:3과 12절, 롬11:24, 계11:4에 말했다. 이것은 전부가 감람 나무 육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 보다도 다윗의 왕권 계통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에 나타난 감람나무의 순은 반드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 론

아라랏 산에 방주와 감람 나무의 순은 새시대를 이루는 알파적인 역사가 되는 것이니 종말에 방주와 같은 촛대 교회가 감람 나무 순과 같은 종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왕국이 이루어질 때는 노아 때와 같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노아 방주로 말미암아 예언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면 말세에 방주와 같은 교회로 말미암아 예언이 성취될 것은 새로운 감람 나무 순의 종들이 나타나므로 이루어질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방주에 완전한 준비가 있으므로 남은 자가 있게 되어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씨가 된 것 같이 기독교 종말에도 완전 준비를 갖춘 촛대 교회가 있으므로 그 안에서만 이 새로운 시대를 이룰자를 내게 된 것이다. 금일의 교회는 방주의 자격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진리를 모르는 교회요, 둘째로는 합심이 되지 못한 교회요, 셋째로는 완전히 희생 봉사가 부족한 교 회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 촛대 교회를 이룰려면 노아 방주 같이 되어야만 될 것이니 방주 안으로 비둘기를 통하여 푸른 새순이 들어온 것은 완전 준비가 된 교회에서 새 시대를 이루는 왕권이 나올 것을 뜻한 것이다.

22. 노아 가정에 나타난 말씀과 세계 (창 8:20-22, 9:25-27)

인류 역사상 가장 귀한 가정은 노아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신앙으로는 특별한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지만 온 가정이 단합된 가운데서 세계 인류의 어머니 가정이 되는 노아의 가정은 대표적인 가정이니만큼 그 가정에 나타난 여호와의 말씀은 세계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할때까지 큰 문제를 놓고 나타난 말씀이라고 본다. 이제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과 세계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연계 문제 (8:20-22)

하나님은 노아의 가정에서 드리는 제사를 향기롭게 받고 말씀하실 때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시었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안심하고 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나 언약이 없이 행하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연계가 움직이는 일에 있어서 자연이라는 모든 움직이는 일이 조물주의 언약이 없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안심할 수 없는 세계라고 볼수 있을 것이로되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에 의하여 자연계의 어떤 변동이 있으므로 지구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의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서 온 가정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가정이므로 그 가정에 나타난 말씀에 의하여 자연계에 큰 변동이 없는 장래를 의심없이 믿을 수 있다. 어떤 과학자의 말보다도 우리는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2. 셈의 하나님을 찬송할 일 (25-26)

하나님은 노아의 입을 통하여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한 말씀은 노아의 가정에서부터 금일까지 셈의 장막에 하나님은 나타났다. 언약 시대나 율법 시대나 은혜 시대나 다 셈의 장막에서 시대적인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서 시대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메시야도 다 셈의 장막에서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세상이 알도록 한 것이니 앞으로 심판과 새시대를 앞에 놓고 급한 환란과 재앙을 피하고 남은 자가 되어 새시대에 들어가는 역사도 동방 땅끝이라고 말했고 하나님은 해돋는 편에 영광으로 임하실 것을 말씀했으니 오늘에 지금 아시아 대륙에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강한 위력을 가지고 다 삼켜 먹다 남은 땅은 우리 나라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 나라에 있으므로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사24:16를 보면 땅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42:10을 보면 여호와께 새노래로 노래하며 땅끝에서부터 찬송하라고 하였고 사59:19에 해돋는 편에서 영광을 두려워 하리라고 한 것을 보면 셈의 하나님을 찬송할 때는 분명히 재앙의 날에 동방 땅 끝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였으니 셈의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서 모든 묵시를 보여줄 적에 중동에서 북방은 망한다고 하였고 동방에서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였고 서방 사람은 셈의 장막에서 나타난 역사를 따라가게 되므로 동방과 서방이 결합된 것을 말했다.

하나님께서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일에 대표적인 사람이 되도록 역사할 것을 말씀했으니 아무리 지금 극동 난제를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관이 닥쳐왔더라도 셈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가 나타날 때가 온 증거라고 보게 된다.

3. 야벳을 창대케하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는 일 (27)

금일에 사대 강국이라는 세력은 세계 운명을 좌우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대 강국의 과학적 문명의 세력이 세계를 평화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결말은 셈의 장막에 와서 거하므로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는 셈의 장막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야벳이 창대케 되므로 그 물질 문명이 세계 인류가 그 세력 앞에서 머리를 숙이게 된 것 같으나 결말은 셈의 장막인 동방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세계 열방의 재물은 하나님이 같이하는 동방 사람에게로 돌아오고 말 것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이 볼 때는 야벳이 창대한 것을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셈의 하나님이 나타나므로 야벳의 창대한 세력은 다 굴복을 하고 셈의 장막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따라 오므로써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결 론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은 새시대를 이루는 것으로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니 완전한 성경이 세상에 기록된 것도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노아의 가정과 같이 구원받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은 그 가정에 나타난 말씀이 다 이루어질 때에 완전히 끝을 맺는 역사가 노아 때와 같이 이루어질 것이다.

23. 복의 근원된 아브라함

(창 12:1-5)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에 복을 사람에게 주기 위한 목적에서 창조한 것인데 아담이 범죄함으로 복을 줄 수 없음을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복을 주고자 하여도 순종치 않을 때에 복받을 사람만 이 땅에 살게 하기 위하여 순종치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없이하고 순종하는 사람만 이 땅에 살게하여 순종치 않은 사람들은 전멸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에 다시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징으로 비온 후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홍수로 심판치 않겠다는 말씀을 믿지 않고 바벨탑을 쌓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또 저주한 것은 말씀을 믿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일이므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는 복에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언약을 세우셨다.

1.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하심 (1)

하나님께서 세계 인류에게 다시 복을 주기 위해서는 세계 인류가 복 받게 되는 복음 운동에 근본되는 거룩한 성자를 아브라함에게 주기 위하여 급한 명령을 나리었다. 네가 사는 본토를 떠나 내가 네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시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을 보시되 순종하는 마음이 있나 없나를 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다. 만일 순종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사명을 맡긴다면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아시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받을 사람을 인도할 때에 홀연히 급한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무조건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복받을 사람은 인간이 볼 때에 어리석은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볼 때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그 일을 순종하는 자라면 지혜로운 자가 되기 때문이다.

2.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2)

누구든지 복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한 이름을 주시며, 그 이름을 존귀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이라 이름을 주신 것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창 17:4-5).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신대로 모든 족속이 지상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아브라함 이라고 이름을 주신 것이다. 가장 큰 축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이름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홀로 잘 먹고 잘 입고 죽는다는 것이 축복이 될 수 없고 영원하고도 완전한 복된 나라를 이루는 일이 큰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인간이 볼 때는 남보다도 시련을 많이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이름 아래서 지상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의 근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41:8 이하를 보면 동방 땅 끝에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너를 싫어버리지 아니하고 도와주며 붙들어 주며 너를 대적하는 자를 멸망케 함으로 완전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되어 지상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라 한 것은 인간 종말의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남은자가 되어 새 시대를 이루는데는 동방 땅 끝에서부터 하나님의 응답이 나리게 되므로 새 시대를 이룰 것을 말씀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된 지상 왕국을 이루게 된다.

3.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겠다고 언약하심 (3)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되 친히 갚아주는 일을 하신다. 택한자를 축복하면 축복으로 저주하면 저주로 갚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 떄문이다. 언제나 대표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갚아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완전 승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갚아 주느냐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나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택하시며,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위하여 싸워주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적에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을 따라 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새 시대가 이룰때까지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된 축복을 예수를 통하여 받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께 속한 자라면 다 아브라함의 그 자손이다 (갈3: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한 것은 벌써 영적 이스라엘을 중심하여 새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축복을 받을 때에 할례를 받기 전이요 이삭을 낳기 전이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시작된 그 축복을 지상에서 완전히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신대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언제나 시작할 때에 끝을 어떻게 맺을 것을 미리 말씀하시고 그때부터 시작한 그 역사는 조금도 변함없이 끝까지 그대로 역사하는 것이다.

24. 신앙의 복된 가정 (창 18:1-3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은 왜 복된 가정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손님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가정 (1-5)

아브라함은 비록 자녀가 없는 쓸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있는 정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부지중에 하늘의 천사를 손님으로 대접한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를 대접하는 것을 당신이 대접을 받는 거와 같이 갚아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러므로 손님을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천사를 보냈던 것이다.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대접을 받는 것보다도 대접하는 생활이 가장 물질을 바로 쓰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은 도둑의 생활이요 남을 대접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종의 생활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사람에게 주는 것은 서로 대접은 하며 살면 더 좋은 것을 얼마든지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므로 너는 복의 근원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받게 되었다.

2. 합심된 가정 (6-8)

아무리 좋은 일을 할려해도 가정에서 합심이 안되면 복된 가정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정은 아브라함이 손님을 대접코자 할 때에 합심하여 급한 요리를 제조했던 것이다. 가정의 미라는 것은 남을 대접하는 일이라면 전 가정이 합심해서 일을 진행하는 것이 아름다운 복된 가정을 이루는 요소가 될 것이다. 합심이라는 것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어떤 가정은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자기네 가정만 잘 살아 볼려는데서 합심된 가정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을 것이로되 남을 살리고 대접하기 위하여 합심된 가정에는 얼마든지 하늘에서 남을 살리고 대접할 수 있도록 공급하는 축복이 있을 것이다.

3. 이적으로 되는 가정 (9-15)

아브라함의 가정은 세계적인 사명을 갖되 거룩한 씨를 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인간의 무엇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라는 다시 자기에게 거룩한 씨가 될 자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단념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가정에 나타난 천사는 말하기를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으리라고 할 때에 사라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나이 늙었고 경수가 끊어졌고 노쇠한 사람이 이제와서 어린애를 낳는다고 하면서 코 웃음을 쳤던 것이다. 그 때에 천사는 네가 왜 웃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며 기한이 이르를 때에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 말대로 노쇠한 몸에서 이적으로 거룩한 씨가 될 이삭을 낳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된 가정에는 모든 일이 이적적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 생활이라는 것은 과학에 국한된 생활에서 복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과학을 초월한 이적으로 되는 일이 있으므로 복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강대한 나라를 이루는 가정 (16-18)

가정은 국가를 이루는 본부가 되는 것이니 강대국을 이룰수 있는 인격은 복된가정에서부터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과학을 초월한 이적으로 시작된 거룩한 씨는 악의 세력을 이기고 세계를 통일하는 강대국을 이루게 된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멸망의 자식이 된다는 것은 불행중에 불행이요 아무리 적은 겨자씨 같은 이삭 한 사람을 낳은 가정이라도 그 씨가 새시대를 이루는 열매를 가져왔다는 것은 복된 가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참된 미라는 것은 결말이 좋아지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정의 씨가 세세 왕국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이라는 것을 인간들은 모르는 것이다.

5. 의를 위하여 택한 가정 (19)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일이라고 보게 된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 같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서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한 사람이라면 누가 그 세력을 막을 자는 전혀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정을 택할 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개척한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시작된 그 일의 열매가 되는 사람이 될 때에 가장 복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대주재 하나님이 그 가정을 통하여 당신의 할 일을 행하게 하신다는 것이 큰 축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했던 것이다.

6. 급한 비밀을 알려주는 가정 (20-33)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그들은 내일의 멸망을 모르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짓고 오락하고 춤추다가 한시간에 멸망을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천사가 와서 그 비밀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를 염려하여 의인이 그 성에서 열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하는데 까지 물어 볼때에 하나님은 열 사람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실때에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생각하여 의인 열명이 되지는 않겠는가 생각한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으므로 그 성은 망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복된 가정은 급한 비밀을 하나님께로 알려주는 일을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천하에 복된 가정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축복을 받게 되는 가정일 것이다. 우리가 받는 축복은 전부가 복된 가정인 아브라함의 집에서 시작된 그 축복을 받게 되는 가정이니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아서 복된 가정의 시발점이 무엇인 것을 알아 끝을 맺는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25. 강대한 나라를 이룰 인격

(창 18:16-19)

인류 역사의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그 인격을 짐승이라고 성경에 기록했다. 이것은 침략적인 정책의 인격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볼 때는 미약한 자 같으나 아브라함의 가정에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가장 기쁜 소식을 알려준 것은 노쇠한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아서 강국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제 강국을 이루는 아브라함의 인격은 어떠한 인격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여호와의 친구가 되는 인격 (16-17)

하나님은 당신의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는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비밀을 다 알릴 수 없는 인격이라면 그 인격은 불완전한 인격일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조금도 숨김없이 알려주는 인격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서 까불어 보아도 변치 않고 나가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인정하고 비밀을 다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본 것은 그 인격을 검열한 것이다. 그러므로 강대 국가를 이룰 인격은 시련 가운데서 인정을 받은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2. 만민을 복을 받게 하는 인격 (18)

완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자기 하나를 위하여 살다 죽는 인격이 아니고 그 인격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인격이라고 본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대로 모든 민족이 다 복을 받게 된 것은 영원한 강국을 이루는 일이 된 것이다. 언제나 자기의 영광과 주권을 위하여 싸우는 자는 다 망하고 만 것이로되 자기가 희생을 해서라도 많은 사람을 복을 받게 한다는 그 인격은 영원한 왕국을 이루는 왕권에 이르게 되므로 완전한 나라를 이루게 된다. 인간이 볼 때는 강자 같으나 실지에 악한 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코자 하는 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복을 받게 할려는 인격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남도 복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원수에게 못박혀 죽은 것은 인간이 볼 때는 약자 같으나 가장 강국을 이루는 인격이라고 본다. 그때에 로마의 정권과 유대 교권이 강한 것 같았으나 그 정권과 교권은 다 망하고 만 것이요 그리스도의 인격은 만왕의 왕으로서 강대국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의 모든 민족이 다 복을 받게 될 때에 심판 날에 그리스도의 권세를 대적하는 자는 다 망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세세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이 말씀을 믿고 끝까지 참고 나갔다는 것은 강대한 나라를 이룰 인격의 조상이 된 것이다.

3.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택한 인격 (19)

인간이 아무리 애써보아도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폐할 자는 없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악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하나님의 종으로 택함받은 자 앞에 다 굴복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하는 일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종으로서 강국을 이루는 일의 한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택함을 받은 사람이 약하고 어리석은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들어서 쓰게 되므로 택함 받지 못한 인간들이 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택한 종이라는 것은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실 경륜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그 종을 들어 쓰는 것이니 그 종의 하는 일을 막을 자는 전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택한 종을 들어서 쓰는 일을 조금도 침범할 권리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했다.

결 론

가장 위대하고도 강한 일은 강국을 이루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강대국이라는 나라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루었거든 영원하고도 완전한 성도의 강대한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에 대하여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인격도 여러 가지 시련을 시킨 후에 그 언약을 세웠거든 하물며 심판 날에 남은 종이 될 변화 성도의 인격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인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인격보다도 더 위대한 인격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우리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는 마지막 싸움에 승리하는 인격을 가질려면 아브라함의 신앙 인격에서 좀 더 진보하여 향상되는 인격을 가지기 위하여 좀더 큰 시련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26. 의인이 없는 도성의 비극

(창 18:32- 19:29)

하나님꼐서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보여준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세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때 망할 세상의 될 일을 예표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이 재림할 때에 남은 자가 될려면 롯의 처를 생각하라 고 한 것이다. 이제 의인이 없는 도성의 비극이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비극이다 (18:32-19:5)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멸할 때에 의인이 열명만 되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고 소돔성에 천사가 입성했던 것이다. 그때에 롯의 가정에 두 천사가 들어갔을 때에 소돔 백성이 무론대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발악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멸망 받을 징조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남을 해칠려는 악당들이 충만한 도성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와 같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의로운 사람을 미워하고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멸망이 올 증거이다. 예루살렘이 황폐될 때에도 의로운 사람이 예레미아 선지를 공연히 미워하다가 망하였고 주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사도를 미워하다가 황폐화 되었다. 오늘날에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옳은 사람을 미워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멸망이 가까운 증거이다. 주님께서 재림시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에 내가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신 것은 그만큼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려운 때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2. 악당들이 눈이 어두워진 일이다 (6-11)

하나님께서 악당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은 그들이 공연히 롯의 집을 해칠려고 할 때에 저주했던 것이다. 지금도 공연히 의로운 사람을 해칠려는 사람은 눈이 어둡게 될 것이다. 내일의 멸망을 모르고 의인을 대적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슥12장을 보면 심판기에 만국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을 치려 모이게 하고 그들로 눈이 멀게 한다고 한 것과 같이 소돔 고모라의 백성도 그와 같이 된 것이다. 제일 악한 일은 의인을 대적하는 일이다. 자기가 부족한 줄 알면서도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 보다도 짐짓 대중이 일어나서 의인을 해칠려는 것은 멸망을 받을 증거이다.

3. 하나님 말씀을 농담같이 아는 일이다 (12-14)

언제나 망할 인간들은 농담을 좋아하고 하나님 말씀까지라도 오락화 시켜 수수께끼 같은 말로 생각을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다림줄의 진리를 두렵게 알지 않고 농담같이 여기고 비소하는 인간들이 세상에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두렵게 알지 않고 등한히 안다는 것은 멸망을 받을 증거이다.

4. 의인을 떠나게 한 일이다 (15-22)

가장 큰 비극은 의인을 악인과 갈라 세울 때이다. 지금은 악한자나 선한자나 한 곳에 두고 악한자의 세력을 용납할 때이니 악인들이 자기가 잘난 것 같이 알고 있지만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을 보아서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도 쭉정과 알곡을 한데 두고 있지만 의인을 악인과함께 있지 못하게 할 때에 인간의 비극은 소돔과 같이 되는 것이다. 교회도 의로운 사람이 있으므로 그 교회가 유지되지만 의로운 사람을 그 교회에서 떠나게 할 때에는 그 교회에 하나님도 떠나는 것이다. 오늘날 와서 망할 교회는 옳은 종을 쫓아내는 일도 있지만 이것은 멸망을 자취하는 인간들의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이 떠나는 도성은 소돔 고모라 같이 되는 것이다.

5. 하루 아침에 멸망 (23-29)

소돔 고모라가 의인이 떠날 때에 하루 아침에 멸망을 당한 것 같이 말세에도 계18장과 같이 망하는 바벨론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한 것은 그 바벨론을 버린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소돔 고모라 같이 불탈 때가 가까운 증거이다. 롯의 처가 소돔 고모라를 돌오보다가 망한 것 같이 심판날에 망할 도성을 사랑한다면 동참죄가 되므로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한 것은 심판기에 의인은 악한 일에 동참하지 말고 떠나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결 론

오늘날 가장 복된 나라는 물질이 많은 나라가 아니요 의인이 많은 나라이다. 우리 나라는 비록 가난한 나라이지만 이 나라에 성도가 많으므로 앞으로 큰 축복이 올 것을 믿는 바이다.

27. 야곱이 복 받는 길

(창 28:1-4, 13-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야곱에게 복 받는 길이 열려진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야곱이 형인 에서에게 장자의 기업을 팔라고 한 것이 부도덕한 일이지만, 하나님꼐서 보실 때는 중심에 축복을 갈망하는 일이므로 기뻐하셨다. 장자인 에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지 않았으므로 말씀을 믿고 축복을 사모하는 야곱에게 복 받는 길이 열려진 것이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에게 있었던 일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 이제 야곱이 복 받는 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돕는 배필을 바로 만나는 길 (1-3)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큰 사명이 있다 하여도 돕는 배필을 바로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야곱을 불러서 축복한 후에 부탁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 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고 하였다. 이와같은 이삭의 부탁은 야곱에게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왜냐하면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라야 되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축복을 갈망하는 야곱은 이삭의 말을 믿고 여러 가지 시련이 있어도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삼기 위하여 14년간 수고를 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에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간 봉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무가치한 일이다. 그러나 돕는 배필을 바로 만나기 위하여 수고한 야곱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 받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야곱과 같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만일 야곱이 순종치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이룰수가 없었을 것이다. 말세의 사명자인 14만4천명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따라서 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순종의 열매라는 뜻이다. 야곱이 순종하므로 열매가 되듯이 말세의 사명자가 끝까지 순종할 때에 이스라엘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을 말세의 사명자가 받되 야곱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단체를 이루게 된다.

2.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축복을 받는 길 (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복지를 주겠다고 허락하셨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말씀을 믿고 싸운 야곱의 씨가 가나안 복지를 축복으로 받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허락했던 말씀이 있다 하여도 그 말씀을 존중히 알지 않고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판다고 말한 에서는 이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장자가 아니라도 말씀을 믿고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던 야곱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믿고 싸우는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게 되는 길이다.

축복은 장자가 받은 것이 원칙인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버림을 당하고 동생이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중심 속에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의하여 좌우된다. 에서는 말씀을 믿지 않았으므로 축복을 빼앗긴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말씀을 믿었으므로 축복을 빼앗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리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다 하여도 말씀을 믿지 않는 에서에게 축복할 수 없으므로 야곱에게 축복하였던 것이다.

3.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 (13-15)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과 함께 하시는 신이 아니요,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신이시다.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축복의 기도를 받았기 때문에 장자인 에서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서에게 쫓겨가는 야곱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약보을 홀로 가게할 수 없으므로 돌을 베고 찬 이슬을 맞으며 광야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 서. 남. 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다. 아무리 부족하다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주기 위하여 함께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이삭이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야곱이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왕국을 이루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할 때에 이스라엘의 왕국인 새시대가 이루어질 것이다.

결 론

야곱이 복 받는 길과 우리는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사명을 맡은 자라도 말씀대로 될 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역사하지 않으신다. 인간이 볼 때는 야곱이 가는 길이 실패 같았지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이루는 열매를 나타낸 것이다.

28. 야곱이 받은 축복 (창 28:10-22)

야곱이 축복 받은 비결은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은 것이니 이것은 행함으로써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의 축복이다(창25:22-23)

둘째: 믿음으로 받은 축복이다. 야곱의 행한 일을 본다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배고픈 형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장자의 기업을 팔라는 일이나, 아버지의 눈이 어두운 기회를 타서 속이고 축복을 받은 일이나 이 모든 일은 행위로 본다면 복을 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축복을 믿는 믿음을 볼 때는 축복을 에서보다도 야곱이가 받아야 할 것이다.

첫째: 시련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간 일이다. 어린 야곱이 정든 고향을 떠나 눈물겹게 홀 몸으로 적막한 들에서 찬 돌을 베고 쓰러져 있으면서도 담대히 하나님을 바라 본 그 마음을 하나님은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을 받는 야곱의 생활은 아무리 부족한 인생이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남보다도 믿음이 강하다는 것과 둘째: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 축복 받을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제 야곱이 받은 복은 다음과 같다.

1. 세계적인 대표가 됨 (13-14)

가장 큰 축복은 야곱에게 준 축복이니 모든 성경에 이스라엘이라, 야곱이라는 이름 아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복 받을 것을 가르쳐ㅓ 종말의 14만4천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였고 말세에 동방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종을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의 사명적인 계통을 가르친 것이다. 주님이 탄생할 때도 야곱의 집에 왕이 된다고 말씀했으니 야곱의 축복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이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사람 앞에 모든 일이 부족하다 하여도 축복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만 바라보는 의지가 강하다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고 무조건 복을 나려 주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 (15 상)

우리의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을 지키거나 말씀을 지켜서가 아니고 택한자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믿음이나 또는 움직이는 생활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야곱이 미약하고 어리석고 너무나 단순해서 속기를 잘하지만 하나님이 지켜주는 사람이 되므로 어린 소년이 어디를 가나 피해를 당치 않고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되고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3. 약속이 다 이루기까지 역사해 주심 (15 하)

야곱에게 네가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금일에 우리에게까지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종을 야곱이라고 한 것은 과거의 야곱을 가르친 동시에 그 약속이 말세에 새시대가 이루어지기까지 포함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떠나지 않고 다 이루도록 역사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끝까지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무조건 이루어주시는 것이다.

4 . 축복 받은 야곱의 제단 (16-22)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그곳을 잊지 않고 돌을 세워 놓고 기름을 부으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열의 한 분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때부터 용기있게 새로운 출발을 했던 것이다. 언제나 복을 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날 때에 그 말씀을 존중히 아는 동시에 실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야곱은 절대로 믿음이 강한 자로 조부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말씀을 의심없이 믿고 싸웠지만 이때부터는 직접 자기에게 축복하신 하나님 말씀을 믿고 용기있게 싸워 나가므로 완전 승리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 받게 된 것이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야곱과 같이 모태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동방 땅 끝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대로 종말의 야곱의 사명을 맡은 우리들에게 역사하므로 야곱의 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을 새시대 라 하는 것이다.

29.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야곱

(창 28:13-15, 30:25-27, 31:24-29)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택한 자가 인간이 볼 때는 완전치 못한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있다. 인간이 볼 때에 흠 잡을만한 것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함께 해야 될 사람이 있다. 인간이 볼 때는 흠이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함께 하시는 야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을 받음 (28:13-15)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실때에 반드시 함께 해야 될 형편에 있는 야곱이었다. 그러나 에서는 야곱을 해코자 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에 에서가 정당한 일을 한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야곱과 함께 해야할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야곱에게 있으므로

둘째: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마음이 야곱에게 있으므로

셋째: 축복을 받기 위하여 참는 마음이 야곱에게 있으므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하시겠다고 언약을 세우셨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장자의 기업을 판다는 맹세를 했고, 야곱은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의 맹세를 받았다. 형인 에서는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고도 등한히 알았지만 야곱은 그 맹서를 존중히 알고 이삭을 속여서라도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가 마음이 강팍해져서 야곱을 해코자 하였지만 야곱은 마음이 평화로운 자리에서 쓸쓸한 벧엘 광야에서 돌을 베고 누워서도 하나님꼐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축복하시되 “이 땅에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고 언약을 세우셨다. 인간 도덕으로는 야곱이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꼐 해야만 될 일이므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나리는 축복을 갈망하고 싸우면서 참는 마음으로 나가는 사람은 항상 함께 하신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행할 책임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꼐서 함께 하므로 축복이 임함 (30:25-27)

야곱은 인간이 볼 때에 아무런 수입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라도 축복을 믿고 싸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신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삼아야만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말을 믿고 14년동안 라반의 집에서 라헬과 레아를 위하여 희생 봉사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축복을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축복을 믿는 마음에서 봉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야곱이 라헬과 레아에게 육적을 끌려서 봉사했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할 수 없지만, 축복을 믿고 봉사하는 일이므로 야곱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수입이 없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줄 믿는 신앙으로 일을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내리실 책임이 있다.

3. 하나님께서 함께 하므로 피해를 받지 않음 (31:24-29)

사람이라는 것은 축복을 받을 때에 원수가 있게 된다. 야곱이 큰 축복을 받을 때에 라반은 야곱을 시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를 시기하는 라반의 집을 떠나게 되었다. 인간이 볼 때는 야곱이 라반의 집을 비밀로 떠나는 것이 부도덕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별된 걸음을 걸었기 떄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므로, 야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따라 갈때에 사람에게는 오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괴한 마음을 가진 라반에게 하나님꼐서 나타나셔서 야곱에 대해서는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므로 야곱에게 가졌던 오해를 풀고 야곱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만을 순종하기 위하여 나가는 자에게는 인간이 볼 때에 오해를 할 일이 있다 하여도 결말을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될려면 인간의 어떤 세력이든지 무서워 말고 담대히 나가야 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는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는 것이다.

결 론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어디를 가든지 평강이 같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모든 일이 형통하기 때문이다. 형통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실패 꼬 어리석은 일 같으나 결말은 큰 열매를 이루는 일이 있게 된다.

30. 하나님의 징계와 택한 가정

(창 38:1-11)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시었다 (마1:2-3).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지만 그를 통하여 거룩한 교회가 이루어지는 조상이 되게 하였다. 인간이 볼 때에 유다의 가정은 불행스럽고도 부도덕한 일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택하였으므로 다음과 같은 징계를 나리셨다.

1. 엘을 징계 하심 (6-7)

아무리 엘이 택한 가정에 거룩한 씨를 전할 사명이 있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자이므로 그를 치셨다. 하나님꼐서는 택한 가정일수록 조금이라도 악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정을 통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볼 때에 택한 가정이 택하지 않은 가정보다 불행스러운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여호와께서 악을 용납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에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택한 가정은 아무리 사명을 맡은 자라도 악한 일이 있을 때에 생명을 불러가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택한자라는 것은 사명을 행하여야만 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2. 오난을 징계하심 (8-10)

택한 자가 사명을 존중히 알지 않고 자기 이익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난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다. 왜냐하면 거룩한 씨를 전하되 장자의 씨를 전해주라는 법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인간이 볼 때에는 큰 죄가 될 일이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로 보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속화시켰기 때문이다. 오난은 거룩한 씨를 전하기 위한 일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종치 않고 그 일을 불평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씨로 말미암아 거룩한 종교를 이루고자 하였는데, 오난이 씨를 전하는 일에 순종치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자아를 희생하고 순종치 않을 때에 악한 자로 인정하는 것이니, 사명이 있는 택한 가정에는 개인의 이익을 생각지 말고, 그 사명을 더 존중히 해야만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3. 다말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음 (11)

인간이 볼 때에는 다말이 하는 일이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멸시를 당하면서도 거룩한 씨를 전하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하신 것이다. 다말이 유다를 속여 그 몸에서 씨를 전한 것은 인간으로는 죄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몸의 소생을 통하여 거룩한 종교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맡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수치를 무릅쓰고, 아무리 생명이 위태한 일이라도 불타는 마음으로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열매있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순종하면 의가 되는 것이요, 순종치 않으면 악이 되는 것이므로 아무리 택한 가정이라도 순종없이 열매가 있을 수 없다. 열매라는 것은 사람이 해야 될 일을 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라는 것은 순종하는 것 밖에는 있을 수 없다. 다말이 아무리 멸시를 받고 무시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담대히 나설 때에 그를 통하여 많은 열매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명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용기있게 돌진의 걸음을 걸어서 나간다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꼐서는 사람에게 사명을 맡긴 다음에는 징계를 해서라도 그 사명을 달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과 오난 같이 될까 조심해야 된다.

31. 야곱의 축복과 별세 (창 49:28-33)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라는 일므을 쓰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12지파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복을 빌고 세상을 떠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이스라엘에게 선지 사명을 맡겼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세계 만방에 기록해 전하도록 이스라엘, 야곱의 씨를 통하여 이루어 놓은 일이다. 이것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끝까지 싸우는 자에게 승리의 이스라엘인 왕국을 이룰 역사의 표적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야곱이 축복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지상 통치에 왕권 받을 14만4천명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야곱의 축복 받은 자를 14만4천에 대표적인 이름으로 기록한 것은 야곱에게 허락한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에 남은 종이 되어 야곱의 왕국을 이룰 변화 성도를 뜻한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축복을 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사41:8 이하를 보면 동방 땅 끝에 야곱이라고 한 것은 동방에서부터 변화 성도의 역사가 일어나서 야곱의 왕국을 완전히 이룰 것을 뜻한 것이다. 우리가 야곱의 축복을 받을려면 야곱이 지상 축복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싸우던 생활이 반드시 있어야만 될 것이다. 축복의 언약을 받은 사람도 싸워 승리하므로 언약을 받았는데 언약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종말의 역사가 어찌 그 말씀을 믿고 싸우지 않는 자에게 올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동방 땅 끝에 야곱이 될려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역사에 몸을 바쳐 싸워 나가는 자에게만 있게 될 것이다.

2. 초림의 주를 맞이하게 됨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올 때에 아무리 이스라엘에 많은 성직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야곱의 행하는 일을 하지 않는 거짓 선지였다(요8:39-40). 그러므로 야곱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하여 주님은 갈릴리 해변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사9:1-3 과 같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정신. 사상. 양심이 야곱과 같지 않으면 아무리 성직자라도 야곱의 왕국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야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요8:42-44).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므로 중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순종하는 야곱의 이름으로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세계 통일의 정부가 서게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영권 물권을 받은자 만이 있기 때문이다.

3.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됨

재림의 주를 지상에서 맞이할 자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는 신이시니 야곱에게 세운 언약이 지상 왕국이기 때문에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변화성도를 야곱이라고 하고 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야곱의 왕국을 이루는 지상 축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명자를 뜻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길 때에 사명 맡은 자의 일생에 다 이룬 것이 아니고 그 후세의 사람을 통하여서도 그 사명을 위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야곱이 맡은 사명으로 끝을 맺는 것을 동방 야곱의 역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 자손 가운데 그리스도가 와서 그로 말미암아 지상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가르친 것이니 그리스도와 우리와는 일체가 되는 한 나무가 되기 때문에 약보에게 세운 언약이 이루어지는 역사에 씌워지는 변화 성도는 그 몸이 살아서 야곱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일이 되므로 야곱은 축복을 하고 별세했지만 그의 축복은 우리에게까지 이루어지는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 자손이 지상 왕국을 이룬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왕국을 위하여 말씀했기 때문에 과거에 야곱의 자손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한 책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열매가 될 것이다.

결 론

야곱의 축복과 별세라는 것은 그때에 야곱이 축복한 그 축복속에서 이스라엘이 세계적인 대승리를 이루는 교회가 이루어졌고 그 이름으로 세계 통치의 왕국을 이룰 것을 목적두고 야곱은 예언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같이 야곱의 왕국에 가입된 주의 백성이며 종이므로 야곱에게 축복권을 준 것은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는 열매라고 보게 된다.

32. 기운이 진한 야곱과 새 힘을

받은 야곱 (창 49:33, 사 40:27-3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련 끝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던 것이다.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모테로부터 에서는 택하지 않고 야곱을 택하셨다. 그러므로 야곱이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어 거기서부터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세계를 구원하는 복음이 된 것이다.

모태로부터 택함 받은 야곱이 이스라엘 왕국을 이룬 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로 말미암아 지상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오바댜 선지가 인간 종말에 심판을 받을 자는 에서요, 구원을 받을 자는 야곱이라는 것으로 묵시를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씨지만 택하지 않은 자는 버림을 당하게 되고, 택함을 입은 자만으로 영원한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기운이 진한 야곱과 새 힘을 받은 야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기운이 진한 야곱 (창 49:33)

야곱은 모태로부터 택함을 입었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도덕과 의식을 따라서 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을 초월해서 싸운 것이다. 야곱이 자기 형인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기업을 사겠다는 것은 인간 도덕으로는 너무나 어긋난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는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형을 앞에 놓고 장자의 기업을 팔면 팥죽을 준다는 것은 사람이 볼 때에 너무나 부도덕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명예심 보다도 장자의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에 야곱은 장자가 아니므로 그 사명을 못한다는 것을 항상 분하게 여겼던 것이다. 에서는 자기로 말미암아 천하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홀히 생각을 했고, 야곱은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며 가정 큰 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인간이 볼 때에 도덕을 떠난 말을 하였지만 가장 불타는 신앙심을 가졌다고 본다. 그리고 형이 받을 축복을 자기가 받겠다고 어린 양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눈이 어두운 이삭 앞에 갔다는 것은 아버지를 속이는 행동이다. 자기 형인 에서가 털이 많으므로, 털이 없는 자기 몸에 어린양의 가죽을 둘러 아버지를 속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볼 때에 못된 자식의 행동 같지만,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야곱에게 판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속인 것이 아니요, 축복을 받기 위하여 비밀을 지킨 것이다. 한 번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비밀을 지켜서라도 그 일을 진행해야만 된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한 번 약속한 말을 그대로 진행할 때에 형에게 쫓겨나서 도망을 가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 서. 남. 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8:14). 에서는 인간 앞에는 야곱보다도 이해가 많고 활발스러운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첫째는 장자의 기업을 야곱에게 판다고 맹세한 일이요,

둘째는 그 맹세대로 진행을 하는 야곱을 죽이고자 한 일이다.

하나님의 종이 될려면 하나님 앞에 한 번 맹세한 일은 그대로 진행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혼혈을 하지 않을려고 14년 동안이나 라반의 집에서 봉사한 일이 있었다.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간 아무런 삯을 받지 않고 일해 준다는 것은 인간이 볼때에 너무나 무가치한 생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볼 때에 이것이 인정을 받게 되는 생활이 된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수고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헛수고 같으나 축복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 야곱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열두 지파의 조상이 야곱의 몸에서 탄생되었다. 이것은 예언적인 역사가 된다. 왜냐하면 야곱의 몸에서 난 씨가 이스라엘 왕국일 이루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전 승리를 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신이 강림할 때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꼭 같이 임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이방과의 차별이 없이 성신이 역사한 것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신이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세계 사람들 중에서 참된 영적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축복의 말을 하고는 기운이 진하여 지면서 세상을 떠나고, 그 몸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흙으로 돌아가는 야곱이 될 때가 아니다.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야곱이 되어야만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상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2. 새힘을 받은 야곱 (사 40:27-31)

기독교의 이날까지 역사는 야곱과 같이 기운이 진하여지면서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다 (마8:11). 오늘날 온 세계 만방에 교회가 확장된 것은 주님께서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 하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천국 복음 운동이다. 이것은 이방의 빛이 되는 역사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방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없었는데,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가게 된 것은 온 천하의 민족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는 역사라고 본다. 그러나 야곱에게 세운 언약대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왕국에서 선지들이 묵시를 받은 말씀대로 각 나라의 남은 자가 새 시대에 들어 온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야곱의 왕국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족속이 하나같이 이 땅에서 축복을 받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사람이 기운이 진하여지면서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죄 값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새 힘을 받은 야곱이라는 것은 아무리 원통하고 딱한 사정을 만났다 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고 새 힘을 주셨다. 그러므로 새 힘을 받는 야곱은 기운이 진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몸이 되지 않고, 피곤이 없고, 쓰러지지 않는 몸으로 완전 승리를 이루어 지상 왕국을 이루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새힘을 받는 야곱이 되는 인격으로 들어가야만 할 때가 왔다고 본다.

나는 여기에서부득불 간증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새 힘이라는 것은 체험한 자 외에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도 과거에는 새 힘이라는 것을 열심히 나는 정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하여야 새힘을 받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리 원통한 일을 당하고 딱한 사정을 만난다 해도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만 바라 보라. 그러면 새힘을 받으리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물주 하나님만 바라보는 묵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1967년 8월 15일, 오후 3시에 새힘이 나리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새힘이 몸에 부딪히는 대로 변화가 생기는 것이었다.

4년동안이나 계속해서 새 힘을 받고 볼 때에 몸이 완전히 변해진 증거가 확실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여도 힘들지 않고, 영양이 많이 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점점 더 강건해지는 것을 현저히 체험하고 있다. 심지어 육류나 생선이나 우유나 계란까지도 사용치 않고, 밥 한 숟갈 정도와 채소와 과일을 먹을 때에 몸은 명랑해지고, 상쾌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10시간씩 강단에 서게 되고, 남은 시간은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쓰고, 주일은 서울 새일 중앙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매달 마지막 일 주일은 집회를 나가고 있는데도 조금이라도 피곤을 모르고 있다.

이와같은 것을 체험하게 된 나는 새힘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새 힘이라는 것은 기독교 종말의 오메가 역사라고 본다. 이 새힘을 받기까지 나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심 성결이 되는 일이요

둘째: 말씀이 완전히 밝아지는 일이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에 새 힘을 받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 성도의 인격이라는 것은 새 힘을 받으므로만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기운이 진해진 야곱은 그 몸이 흙으로 돌아 갔고, 새 힘을 받은 야곱은 지상에서 야곱의 왕국을 이루는 일에 완전한 승리를 보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역사에는 증거만 보여 주셨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역사에는 열매를 완전히 맺게 하시되 영적이 아니요, 지상에 완전한 열매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 기운이 진하여진 야곱은 예언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었고, 새 힘을 받은 야곱은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다시 예언의 역사를 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 시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계10:7, 11:15).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손에 상처입은 자  (0) 2011.10.31
출애굽기요약강해  (0) 2011.10.31
신명기요약강해  (0) 2011.10.31
민수기요약강해  (0) 2011.10.31
레위기요약강해  (0) 2011.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