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출애굽기요약강해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04

출애굽기요약강해

 

제 목 : 선택받은 민족의 창성

본 문 : 출 1:1-12

요 절 : (출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룩되는 현장은 인간의 육신이 평안을 얻고 물질이 차고 넘치는 안일한 현장이 아니다. 인간의 속성은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 호소에 하나님은 응답하시어 신앙과 삶의 참뜻을 헤아리게 한다.

그러나 거기에 반비례하여 하나님을 떠난 세계의 사람들은 언제나 인간의 복지와 안녕만을 추구하고 거기서 생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여건이 향상될수록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건과 그 영혼의 세계는 늘 고갈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에서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고난의 현장에서 진정한 믿음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실존과 그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1. 바로의 선전포고.

바로는 승산 없는 싸움을 향하여 발길을 내딛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를 상대로 사웠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세상의 왕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행동해 왔다. “탑을 건축하자.” “그들 무리를 갈라 놓아 이곳으로부터 멀리 추방시키자.” “그대들의 성자이신 예수를 헤롯과 빌라도를 통하여 처형하자.”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백성을 무시한 이러한 발상과 행위는 바로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학대하고 피와 땀을 흘리게 하면 그들의 세계가 위축되고 멸망할 줄 알았다.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의 신은 바로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의 단순한 생각일 뿐이었다. 이때마다 하늘 위에 앉아 계신 그분은 인간의 교만을 비웃어 오셨다. 그분의 뜻은 곧 그의 백성들의 뜻이었다. 오히려 학대받던 시대에는 언제나 번식과 창성이 있어 왔다. 이것이 바로 권좌나 물질의 풍요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비의 역사다.

2. 교회의 역사

교회가 가장 많은 수의 신자들을 배출한 때는 언제인가? 교회의 성직자들이 유능한 설교가, 행정가, 치유자들로 가득 찼을 때의 교회를 보라. 성전의 건축이 호화로운 양식과 재료로 세워지고 교회가 부로 가득했던 때를 보라. 세상 권력자들의 행진이 쉽게 진입하지 아니했던가? 더 나아가 교회가 세상의 소굴이 되어 교인들이 내쫒김을 당하지 않았던가?

초대교회가 진정 그 위대한 발자취를 이루었던 시기는 비난과 박해를 받던 처음 몇 세기 동안이었다. 이 땅에서 교회 존재의 여건이 어려울 때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했을 때 실질적으로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3. 참된 영혼을 소유했던 자들의 역사

세상 바람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불어올 때 영적인 성장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일 때 최선을 다하고, 암울한 상황에 처할 때 가장 빠른 영적 성장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과 위로와 기쁨을 맛보게 하시며, 고통과 아픔과 사별의 공간에서 성령의 은사가 증가함을 보여주신다. 순교자들이 걷는 발길이 그토록 경쾌하고 도도했던 것은 육신은 죽어가지만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엄청난 영광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이다.

적용.

1) 인간의 손에 의하여 학대를 받은 자신의 백성을 더욱 창대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기독교의 역사임을 다시 확인한다.

2) 현대의 역사가 바로 물질만능이 육적인 생활에는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얼마나 부패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3) 삶의 조건에는 또는 건강에서 오늘의 어려운 환경에 접했을 때 그 순간이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더욱 창대하게 하는 순간임을 알게 한다.

4)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포악한 손길 아래서 신음할 때 하나님의 보호는 최대한으로 주어졌으며 그 민족은 더욱 창대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실감하게 하였다.

제 목 : 구원의 역사

본 문 : 출 2:1-10

요 절 :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숫자적으로 많이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게하여 고역으로 일을 시키며 고난의 생활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연단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게 하시고 애굽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어떠한 바로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고난 저 넘어에는 끝없이 번영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난의 역사를 넘어서서 미래의 영광된 모습을 꿈꾸는 곳에 참다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핍박속에서도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창성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그분의 섭리를 기다립니다. “(출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1.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출애굽기의 중심 인물은 모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탄은 수없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려 했습니다. 바로를 통해 노역을 점점 힘들게 했고 학대하게 했습니다. “(출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출1:13)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하여 (출1:14)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또한 산파를 통해 사내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출1:16)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급기야 사내아이를 하수에 던지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출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모와 누이, 그리고 바로의 딸까지 협력시켜서 생명을 위협받는 연약한 모세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산파들도 돕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대상은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있으니 아무리 강력한 바로라고 해도 감히 대적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태어나실 때에 헤롯왕이 모든 이스라엘 중에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와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협력하게 하시어 만인을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마1:21)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옛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강력한 바로나 헤롯이 있다 하더라도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실 섭리는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2. 구원의 역사는 목숨을 건 믿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본문에서는 두 세력간의 갈등이 표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 권세의 최고의 강력한 권세자 바로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스라엘, 두산파 십브라와 부아(1:15), 레위 여인과(2:1)과 같은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연약한 사람들이 바로 왕으로부터 미래의 구원자 모세를 구원해내는 위대한 일을 해내는 이야기 입니다.

구원은 어떠한 학대로도, 생활이 괴로워도 살인의 명령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 하나님의 섭리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임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출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강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아무리 고역이 심하고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건강하게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자는 창대케 하시고 권세와 부귀로 영화를 누리는 애굽은 사망의 길로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또한 구원은 많은 시간동안 견디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레위 여인은 아이를 석달 동안 숨겼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상자에 담아 하수에 두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나 지켜보는 믿음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공주로 하여금 장성할 때까지 아이를 젖을먹이고 삯을 받게 하시며 믿음으로 키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람을 준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준비하신 섭리 속에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올바른 신앙 고백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수많은 기적과 신비한 사건을 통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이란 구원의 도리요, 구원받는 비결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서 자강 핵심적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요 중보자가 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사역보다는 그분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묻는 인격적 확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지하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질문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른 응답이 신앙 고백이고, 여기서부터 바른 신앙과 구원의 길은 열리게 됩니다. 본문의 연약한 여인들은 하나님을 전능자 하나님으로 구원자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두려워하는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3. 참된 구원의 역사는 예배와 봉사의 모습으로 표출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추상적인 진리를 터득하는 정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또한 구원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신앙 고백도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인격적인 몸과 마음과 영혼을 총동원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자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받은 은혜와 은사대로 봉사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탄생이 있기 까지는 믿음의 산파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부모가 있었습니다. 또한 지혜로운 누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봉사와 헌신 그리고 믿음이 모세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더 숨길 수 없이 될 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맡은바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봉사와 희생과 헌신을 죽을 힘을 다해 해야하는 것입니다. 산파는 산파대로 레위여인은 레위여인대로 누이는 누이대로 달란트를 통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봉사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받은 은혜와 은사대로 봉사하며 신앙고백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제 목 : 나의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본 문 : 출 2:11-15

요 절 : (출2: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본노와 폭력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순간순간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하여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비위에 거슬릴 때 서슴없이 분노한다. 때로는 폭력도 행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작용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자신의 혈기가 방자하여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숱한 문제가 발생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수히 경험하고 있다. 진정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자신의 분노와 폭력은 상반된 의미임을 알 필요가 있다.

1. 모세가 자신을 포기하다.

모세의 분노는 피조물의 격정이 자아낸 결과였으며 피조물이 지닌 힘의 결과였다. 승리의 힘이 발동한 듯 보이나 실상은 오염된 피조물의 속성의 발로였으며 결과는 패배로 끝났다. 모세는 구한 신분을 지녔지만 비천하고 불쌍한 그의 동족을 향한 동정심은 언제나 뜨거웠다. 자신의 동족을 치는 애굽인을 보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심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결국 애굽인을 죽이는 살인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하고서도 궁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여러 모로 매우 조심스럽게 행했다.

그러나 그의 살인 행위는 노출되고 그에게 찾아든 공포에 휩싸여 그의 동족이 지닌 고통의 광경을 피해 재빨리 도망갔다. 순간의 혈기가 자신을 도망자로 만들고 은둔자로 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세는 여기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내밀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업은 모세가 그의 모든 재능을 버리고 겸허한 지경에 이를 때에 비로소 그를 통해 펼쳐졌다.

2. 우리는 때때로 애굽인을 마음속에서 죽인다.

나를 괴롭히고 주변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오늘의 애굽인들이 눈에 보일 때 우리는 마음속에서 모세와 같은 폭력을 휘두른다. 감정이 솟아오를 때마다 우리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살인적인 생각에 젖을 때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애굽인의 죽음은 한 번도 나를 승리감에 젖도록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죽어 있는 애굽인은 언제나 무거운 부담을 안겨준다. 분노와 혈기의 노예로 사는 나에게 필요한 노력은 진정 무엇인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음성은 정녕 나를 움직이지 못하는가? 마음속에 자리잡은 폭력이 나의 것인지 사탄의 것인지 하나님의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신앙인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3. 우리가 애굽인을 죽이는 행위를 저지른 후를 본다.

우리는 부정과 부패의 현장에서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부조리와 죄의 실상들을 쳐부숴야 한다. 때로는 음주와 도박을 비롯한 숱한 불순한 행위를 공격해야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영웅과도 같은 승리의 팔을 휘두르게 되지만 어느 순간에 패배자로 자신이 도망자가 되는 경험은 없는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좀더 슬기로운 길은 없는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한 인상을 남기면서 나에게 보이는 오늘의 애굽인을 물리칠 길은 없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불의한 이 땅의 사연과 쉼없이 접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연코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이다. 처음 볼 때는 성급한 돌격으로 그 상황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 같지만 흔히 승리자는 애굽인이 되고 우리는 도망자가 되는 결과가 적지 아니하다.

적용

1) 우리는 내적, 외적 싸움에 있어서 모세와 같은 즉흥적인 혈기와 분노를 사용해야 하는가?

2) 모세의 40년 간의 광야생활이 주는 현재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3) 오직 인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만이 세상의 영을 이길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는가?

4) 실망과 반복되는 실패와 광야의 침묵을 통해 우리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있는가?

5)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부요 소중한 분이 되시어,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고 믿는가?

제 목 : 가장 비참한 곳을 찾아오신 하나님

본 문 : 출 3:1-8

요 절 :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헷 족속,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히위 족속,여부스 족 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3장의 말씀은 매우 놀라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가득 적혀 있다. 인간의 갈등과 분투를 생생하게 그린 2장은 아치 로마서의 7장을 상기 시킨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는 고백이 바로 모세의 살인행위와 그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3장은 전혀 다른 세계의 말씀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의 8장은 성령이 주시는 생명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본 장에서는 모세의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묻는 언급이나 책망이 거의 없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다룬 이야기들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헷 족속,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히위 족속,여부스 족 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3:20)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내려오리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내가 너와함게 있으리라” “내가 내 손을 들리라”-

1. 하나님은 우리의 가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어 그의 가장 높은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신다.

모진 노예 생활과 잔인한 십장들의 감독 빝에서 신음하며 학대받아 버려지고 지친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는 거대한 복음이 온 따에 펼쳐진다. 구원의 은총이 내리신다는 감격의 소식이다.

이것은 마치 마리아의 찬가와 “(눅1: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1: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1: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1: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한나의 노래 속에 단긴 주제와 같은 것이다. “(삼상2: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하나님은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 비천한 곳으로 내려오신다. 우리의 영혼이 외롭게 되고 무너져 버릴 때 인간의 세계에서는 저주받은 존재처럼 취급되어질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관시미을 갖고 계신다. “(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는 말씀을 언젠가 필연코 실현하신다.

2. 하나님은 굴욕의 현장에서 미소를 짓게 하신다.

노예 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처절하게 감수해야 하는 굴욕의 세월이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고난의 현장에서 홀로 서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장소와 그 시간은 하루가 천 년 같은 고통이 따르고 때로는 굴욕의 세월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에게 채찍을 들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그 존재를 책망하고 진노하는 절대자의 등장이다. 하나님이 굴욕의 세월을 보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의 백성에게 내려오신다는 말씀은 가장 큰 복음이요 오랜 소망의 실현이다. 그 소망이 현실로 오는 시점에서 새로운 역사는 실현되고 진정한 미소는 보이게 된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무기력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구할 능력이 없었다. 노예 이상으로 삶의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필요했던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졌고 그와 같이 우리 모두의 필요도 충족되어질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백지 수표와 같다. 그렇다면 그 수표에 필요한 사연을 채워넣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지혜나 용기 혹은 사랑, 또는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적어넣자. 그러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실 것이고 그 이상을 주실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은 무기력한 우리에게서 그 위력을 펼치신다. 그러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은 내려오신다.

적용

1)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대열에 서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버림받은 자의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빛과 기쁨의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2) 하나님은 그의 경륜대로 낮은 곳에서 심음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필연코 찾아오신다. 찾아오신 그 결과는 실로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다.

3) 인간이 무기력함을 자인하고 전능자의 손길을 구할 때 거기서 진정한 신앙의 발로가 있게 된다.

제 목 : 말보다는 열정과 감격을

본 문 : 출 4:1-10

요 절 : (출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말은 우리 피조물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그 말은 기독교의 복음을 전달하는 데 수중한 도구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어의 내용이나 그 언어를 생성싴키는 열정과 감격 없이 언으의 유희만 즐기는 직업인들로 변해가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자신이 말 재간이 없고 임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임을 실토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창한 언어의 소유자보다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는 뜨거운 열정과 감격을 가슴에 일찍부터 안고 있던 사람을 선택하였다. 오직 설득력이 없는 자신의 말에 중심을 두지 않고 메시지의 주인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모세가 구원의 대업을 수행할 종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1.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메시지를 받으라.

현대의 비극은 설교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거나 주시지도 않은 말을 함부로 쏟아내는 데 있다.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미화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가 상처를 받는 가장 큰 원인이다. 진정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말씀해 주실 때까지 마음속으로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이르거나 명하지도 않은 사실을 전할 때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책망을 받게 된다. “(렘14: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하나님께서 말에 능하지 못한 모세를 택하여 그 진실과 뜨거운 가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현장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사자들이 연설과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길 원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갖게 되는 열정적인 각격과 힘을 사용하여 회중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실 원하신다.

2. 알맞은 말을 찾으라.

우리는 얼마나 언어의 낭비가 심한 세대에 살고 있는가? 직장에서부터 안방에까지 찾아든 언어는 인간의 입과 매체를 통하여 쉬임없이 우리의 귀를 두드리고 있다. 실로 언어의 공해가 우리의 심신을 괴롭히는 현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어의 낭비를 모르는 모세를 통하여 적시 적소에 위탁받은 메시지만을 전하도록 하셨던 과정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거나 감당하기 힘들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대답을 구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를 보라.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던 사도들도 언어의 낭비나 방향 감각이 없는 언어를 남발한 흔벅은 찾을 길이 없다. 성령의 인도로 지시하고 가르쳐 주신 메시지를 필요한 곳에 전하였던 현장이 바로 오늘의 교회가 다라야할 기중이 되어야 한다.

3. 함께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라.

인간의 가장 설득력 있는 말보다 더 정교하고 예리한 또다른 힘이 있다면 바로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의 거룩한 논증적 설명과 협동 증언을 구하라 그리하면 우리의 말을 듣는 자들의 마음은 신비로운 영향을 받아 감동될 것이다. 보통 사람이 알 수 없는 성령의 위대한 협동과 작업이 입증되어짐을 볼 것이다.

그러기에 최선을 다하여 66권을 통하여 주신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데 집중하고 그리고 그 뜻을 통하여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겸허히 기다리는 것이 오늘날 말씀을 위탁받은 사역자들과 기독인들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닌가?

적용

1)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인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선용하고 있는가? 언어의 낭비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가?

2)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간 메시지를 구사할 때 메시지의 주인의 음성을 얼마나 담고 있는가?

3) 우리의 입이 어둔하고 언어구사가 명석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열정과 감격을 안고 있는가?

제 목 : 마지막 벼랑에서 하고픈 말은

본 문 : 출 5:15-23

요 절 : (출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 반드시 우리를 막다른 곳까지 이끄신다. 바울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서신들을 집필하고 사역을 행하도록 부르심 받았을 때 그의 힘은 가장 나약한 상태로 전락했었고 인생의 좌절조차도 맛보았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두 손을 들 때 하나님의 권능은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그 앞에 교만한 인간의 모든 속성은 굴복하게 된다.

1. 모세가 절망의 벼랑에 섰을 때.

40년 동안 모든 것을 비우는 과정을 계속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역사 속에서 그를 부르셨을 때 자기 안에서, 자기의 사명 속에서, 자기가 겪은 기적들 속에서, 아론의 유창한 말 속에서 자신감이 약간 되살아남을 느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능력과 자신의 위치를 연결지어 자신을 과다평가하려 했던 순간들이 없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 왕으로부터 거절당했을 때, 그의 동족 어른들의 쓰디쓴 항의를 받았을 때 당황한 경험을 갖게 하셨다. 그리고 모세 자신의 노력이 백성들의 상황을 오히려 더 악화시킨 결과를 가져왔을 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이 슬픔과 고독의 순간에 서게 하셨다. 모세는 분명히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엄청난 교훈을 배우게 되었던 인물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절박한 환경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사명 안에서 무엇인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벽돌 만드는 곳을 통해, 그의 처음 몇 해 동안 이루어지지 않는 바로 왕과의 대화에서 그들은 서서히 절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날이 갈수록 비참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은 인간을 통한 희망의 성취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모세와 아론도 그들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이 예비되어졌다.

노예 생활로 시달리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쳐다보는 그들의 신앙이 서서히 삭트기 시작하였다.

3. 우리 자신들이 실패의 장에 서 있을 때에.

우리 인생길을 따라 반복되어지는 실패를 통해 하나님깨서는 똑같은 교훈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인하고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을 받들고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노력은 마지막에 끊임없는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벽돌의 수효는 배로 늘어나고 감당할 짐도 늘어만 간다. 우리가 목적하는 힘이 무너져 버려 몹시 실망하게 된다.

이렇게 영혼이 완전히 황폐케 되었을 때 신랑이신 예수께서 가까이 오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인생의 실패의 장에서 자신의 한계와 실패를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움은 더욱 찬란하게 빛이난다.

적용.

1) 백성이 원성이 극에 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길이 없을 때 나타난 모세의 절박한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자.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하는 모세의 함성은 원망이 아니고 자신이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인정하는 소리다.

2) 하나님의 존재를 빋고 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의 벼랑에서 무엇이라고 외치고 있는가? 하나님을 원망하는가? 아니면 구원을 호소하는 함성을 지로고 있는가?

3) 진정 하나님이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없는 삶을 주시는 주인임을 확고히 믿고 있는가?

제 목 : 내가 여호와라, 내가 하리라.

본 문 : 출 6:2-9

요 절 : (출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출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모세가 자신의 한계점에 도달하여 하나님을 찾아와 “(출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라고 고하면서 좌절감을 표할 때 하나님은 실로 놀라운 응답을 주신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 대역사에 직접 관여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출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내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직접 해결해 주신다는 응답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밝히고 있다.

“내가 여호와라”는 거듭된 표현은 이 땅의 모든 것을 지으시고 운영하신 절대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여가 있는 세계는 모든 것이 이룩되고 모든 것이 초인간적인 기적으로 가득함을 우리는 경험한다.

1. 인간의 희망이 포기될 때.

인간의 모든 계획과 노력이 실패로 긑나고, 지치고 좌절감에 빠진 육과 영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인간이 희망을 포기할 때 하나님은 다가오셔서 “내가 여기 있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마치 다음과 같이 속삭이심을 경험할 때가 적지 아니하다. “너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그 모든 가능성과 능력은 내 안에 있노라.”

우리 주님은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따뜻한 길을 우리에게 안내하신다. 인간의 힘으로 도달하고자 몸부림치는 현장에는 포기와 좌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를 깨닫고 믿고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포기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라는 경험을 갖게 된다.

2. 영혼의 소생을 위한 참혹한 고통.

이스라엘 민족은 내굽의 진미 - 부추와 양파, 환락가와 육체적 즐거움 -를 맛보며 즐기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육적인 삶에 도취된 채 시간을 낭비하고 삶의 목표를 상실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신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은 육신을 즐겁게 하는 삶의 조건을 그들에게서 단념시키고 하나님 자신과의 결합을 준비시키기 위해 참혹한 노예 생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이 경험을 깊이 할수록 언제나 먼저 등장하는 것은 고난의 경험이다. 세상의 육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무대를 벗어나 갈급한 영혼을 채우는 길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도들에게 있어서 세상의 헛된 영광과 자만과 부러움, 육체의 즐거움, 주위의 칭찬과 좋은 평판들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들이었다. 자칫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초월해야 하며 때로는 이런 항목들이 헛되고 한전하지 못한 것임을 느껴야 한다.

3. 겸손과 인내를 위한 실패.

인간이 직면하는 실팰간 겸손과 인내를 배우는 데 종종 필요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없데 된다.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오직 예수 안에서 새로운 감각의 자신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만족과 기쁨을 찾을 준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패의 쓴잔을 부등켜 안고 울고 있는 자녀를 찾아오셔서 “나는 여호와라...내가 하리라.”는 말씀을 주신다.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무한한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적용

1) “내가 여호와라...내가 하리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믿음과 마음의 귀가 있는가?

2) 아직도 나는 스스로의 능력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자심감에 차 있는가?

3) 나에게 실패의 쓴 잔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인내가 있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제 목 :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본 문 : 출 7:1-7

요 절 : (출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면서 애굽에서 자신을 보여주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리하여 구원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무리를 벽돌 만드는 노예 상태에서 부활의 땅으로 인도해 내셨을 때 하나님의 새로운 면모가 이 땅에 새롭게 보여지기 시작하였다. 즉 세상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과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다. 대굽과 주변 나라들은 출애굽 사건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구속자시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된다.

1.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란 구원받은 무리들의 모임이다. 그들이 모여서 구원의 주권자 앞에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서 있다. 이들이 구원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를 알 길이 없었다. 천사도 흠모할 수밖에 없는 이 구원의 대역사는 출애굽의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서 더욱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은총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이 구속받은 모든 무리를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영원한 아침의 광채 속에 서도록 이끄셨을 때 모두가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진정 하나님이 이루신 일은 그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진리이심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2. 각 신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각 예수님을 위해 지음받았으므로 그를 칭송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이 확산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상의 심한 육적 부패로부터 해방되었다. 시련과 복종과 변치 않는 희망에 대한 우리의 인내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찬란한 진리는 빛난다. 타인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께서 죄 많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보여주게 된다.

3. 하나님의 구원의 여호와인 줄 아는 길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믿고 그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주 하나님을 알아간다. 이것이 가장 진실하고 확실한 길임에 틀림이 없다.

어느 인간의 순간적인 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발견보다는 나의 수난의 역사와 죄 많은 과거로부터 구원의 자비를 베풀어 주신 데에서 하나님의 실존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나의 앞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즐거움으로 동화될 것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소중한 진리의 진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순간마다 구원받은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장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은 진정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새롭게 단장하는 첨단의 영양소가 될 것이다.

적용

1) 자신이 육적인 조건만을 채우기 위하여 노예가 되었던 시절을 상기시키면서 오늘의 구원받은 삶과 대조를 해본다.

2) 세상 사람들이 현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의 여호와인 줄 알게 되는지를 생각해 본다.

3) 오늘의 교회는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그 구원의 실현을 위하여 험한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감사하는가?

4) 오늘 나 자신의 삶에서 애굽의 종살이와도 같은 사연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심도 있게 분석해 본다.

제 목 :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라.

본 문 : 출 8:20-24

요 절 : (출8: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대 속의 죽음은 우리를 죽음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사는 세계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별한 신분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된 인간 생명체로서 오늘을 사는 특권을 소유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분하여 애굽인들의 세계에 거침없이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를 받고 바로의 백성은 재앙에 시달린 모습을 모두가 알게 하셨다. 바로는 비록 순간적인 결심이었지만 구별을 두어 내리는 하나님의 재앙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1. 하나님이 주신 구별은 영원하다.

인간들의 환경과 조건에 의한 선별은 한시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환경을 비롯하여 제도와 사회와 경제의 변화에 따라 선택의 기준과 대상은 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별된 선택은 영원 불변하다. 비록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미천한 생명이라도 그 구별된 선택의 약속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하여 재앙을 내리시는 방면을 비롯하여 그 백성을 아끼시는 인자한 역사는 실로 위대하다. 광야에서의 탈선이나 계약의 위반을 통하여 상처를 받으시면서도 하나님은 선별한 민족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2. 제2의 구별은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았다.

이 선별의 역사가 애굽 땅에서 발생되어 더 이상의 구별된 선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얼마나 참담한 운명의 주역들이 되었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버려진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선별된 자식으로 삼으시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철저한 대 속의 희생을 치르게 하시었다. 그리고 구원의 주님으로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구별하시어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놀라운 경륜을 펼치셨다.

아브라함의 선택과 그 후손의 구별은 어려움 없이 이룩된 선별로 보이나 우리를 선별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실로 그가 찟기시고 피 흘리시는 수난의 역사를 통하여 내려진 구별의 역사다.

3. 이 구별은 성령의 은총으로 매일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로 가득 찬 비천한 우리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시원스럽게 알 길이 없다. 오직 감사함으로 그 선별의 손길을 받을 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소유물이 된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음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내제한 죄의 속성은 늘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여 어두운 그늘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이 함정은 쉬임없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한다면 성령께서는 보이지 않는 내적인 구별을 이루어 놓으실 것이다. 우리의 취향과 욕망, 희망과 목표는 바뀔 것이고, 우리 자신이 세상과 점점 달라져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후 세상과 구별된 영혼에게로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신다. 부드러운 사랑의 말로써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성령으로 부어주신다.

적용

1) 바로의 세계에는 어둠과 재앙이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의 선민이 살던 고센 땅에는 빛과 승리의 개가만이 있었다. 세상은 질병과 재앙으로 가득하나 세상과 구별된 영혼에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행복이 가득함을 인식하자.

2) 십자가는 양 팔을 벌리고 교회와 하나님을 저버린 세상 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역사를 감당하신다. 교회는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호흡을 한다. 이 호흡은 세상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 위에 사는데 우리의 생각과 행위들이 차원이 틀리게 구별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제 목 : 하나님의 계약이 머무는 곳에 내가 머물리라.

본 문 : 출 9:13-26

요 절 : (출9:26)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의 방패와 산성이 되어줄 수 있는 분을 보시고 그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오늘의 험준한 세상의 파도를 넘는 데 아무런 염려도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방황은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오늘을 지탱해야 하는 고독하고 피곤한 실존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된다. 현대인들의 보호막이 되어주겠다고 나서는 모든 사람들은 희생적신 차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익이 발생되는 경우로 한정시키고 있다.

바로 왕으로부터 버림받고 노예로 전락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피나는 노동에 시달려도 바로의 백성들처럼 재앙으로부터의 불안이나 공포가 없었다.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시기 때문이었다.

1. 하나님과의 언약과 조항에 포함된 자들은 인침을 받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창 26: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이 존엄한 언약은 영원히 그 효력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도 그 후손을 멸하거나 학대하도록 버려둘 수 없었다. 그들에게 비바람이 몰아치려고 할 권세를 얻은 천사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계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고 한다.

오늘도 성삼위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보호 속에 살게 되며 이 땅ㅇㅇ의 어떤 세력도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고 해칠 수 없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2. 영혼이 안전할 수 있는 오직 한 곳은 언약 안에서다.

하나님의 언약이 머무는 곳이 영혼의 안식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정한 곳에 머물도록 명령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경험하도록 하였다. 그곳에서는 단지 우박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검으로부터도 안전할 수 있었다. 신성하게 봉입되어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 그 울타리는 아브라함을 향하신 하나님의 맹세요,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어 그들을 구출해 내시겠다고 하는 가장 신성한 약속의 줄로 스스로를 매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늘이 되사 날개를 펼쳐 우박을 받ㅇ아내셨고, 그들을 그 많은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셨다.

3. 그 안약은 공로나 업적으로 이행되지 않는다.

노예가 된 백성은 자신의 이상이나 소유나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쉽게 언약 안에 설 수 있었다. 이 언약은 노예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들의 선행이나 공로로 가져올 수 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늘의 성도도 범죄로 가득한 현대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로나 업적을 남기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안고 계신 주 예수와의 관계를 통해 더 좋은 언약이 세워진 세계 속에 들어와 살고 있다. 그곳은 진정 가장 안전하고 복받은 세계다. 실로 아무 공로 없이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따르게 되고,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사랑받았음을 알게 된다.

4. 아, 복받은 사랑의 영혼들이여.

우리는 모질고 거친 비바람이 우리의 육과 영을 지나가며 결코 우리를 마지ㅣ거나 해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방패와 구속자 되시며 우리의 강한 성이시다.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죽음의 비바람과 심판과 계곡을 당당히 통과할 수 있음을 믿는다.

적용

1) 우리는 현대의 험준한 파도가 밀려올 때 나 홀로 그 파도를 헤쳐나가려고 몸부림치다가 좌절하지는 않는가?

2) 하나님의 언약이 내게 머물고 있다는 확신은 어느 정도인가?

3)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공로나 선행의 업적은 없어 방황하는가? 하나님의 언약은 오직 나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지금껏 배우며 듣고 있지 아니한가.

제 목 : 나의 가슴에 진리의 빛만을

본 문 : 출 10:21-29

요 절 : (출10:23)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어둠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빛이 있다. 이것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나 한결같이 느끼게 되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진노의 손을 들 때 해는 자취를 감추고 달은 하늘로부터 모습을 감추게 되었음을 본다. 그리고 오직 칠흑같이 깜깜한 흑암만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덮게 되었다. 바로 왕과 그의 관료들은 빛이 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당혹과 근심에 싸였고 만사가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현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곳에는 광명이 여전히 찬한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원한 빛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는 오늘도 끊임없는 광채가 우리의 삶 속에 비춰온다.

1. 빛은 순결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드러난 영혼은 하나님이 순결하신 것처럼 스스로 순결해지며,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얗고 흠없는 옷을 입고 걸어나간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육욕을 따르며 어둠 속으로 걷는 자는 거짓된 자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름답고 순결한 광채로 인해 그의 인생이 빛나면 아름답게 된다.

애굽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이방 종교에 오염이 되고 불결한 노예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빛은 순결한 것이었다. 인간이 회복해야 할 순결성의 기준은 결코 인생 가운데서 찾을 수 없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근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2. 빛은 지식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노력과 지혜와 이적을 우리 인간의 두뇌로는 다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소중한 은혜의 빛을 값없이 주시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하나님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신다.

인간은 목적 없이 진리를 더듬으며 우주의 비밀을 찾으려고 애슬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질서와 경륜 가운데 역사를 진행시키신다. 오늘도 하나님을 우러러 사모하는 사랑스럽고도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에게는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빛의 눈을 허락하시고 풍부한 지식의 눈을 뜨게 하신다. 거기서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게 하고 감추어진 지혜의 선물들을 얻게 하신다.

3. 빛은 사랑이다.

빛이 오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태양이 어둡던 대지를 밝히는 데 아무런 소음을 들을 수 없다. 모두가 생기를 찾게 되고 생명의 새로운 연장을 경험한다. 포근한 세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랑의 보금자리인 양 느껴진다. 빛은 세상 위에 내려지면서 자연과 생물과 모든 동물들을 비롯하여 병상의 인간들에게까지 풍요한 복을 내려주는 사랑의 화신으로 임한다.

애굽 땅의 빛은 사라지고 흑암만이 내려진 곳에서는 질식과 혼돈과 상처의 함성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서는 광명이 계속되어 사랑의 노래가 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빛으로 경험한 그 현장에서는 모두가 밝은 미소를 간직할 뿐이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 깊이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시게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생명의 뿌리가 내리고 자리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적용

1)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에서 발생될 사건들을 모두 나열해 보면서 빛의 소중함과 우월함을 인식해 보라.

2) 내가 있는 곳에 흑암이 있는지 하나님이 비추어 주신 광명이 있는지를 눈여겨 보라.

3)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을 새롭게 경청하고 음미해 보라.

제 목 : 주님의 필요로 만드신 보물

본 문 : 출 11:1-3

요 절 : (출11:2)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인들로부터 은, 금 등의 패물을 요구하도록 하셨다. 어떤 섭리를 가지고 계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과 은을 소유하도록 하셨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물질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함이었는지도 묻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개인의 물질적인 영화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훗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크신 경륜이 있으셨기에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게 되는 순간에 이러한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좁은 인간의 소견과 제한된 우리의 이해력을 가지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대가를 요구하신 하나님.

채찍을 맞아가면서 벽돌을 만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 생활에는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던가? 아니다. 거기는 노동력의 착취만이 있었을 뿐이고 포기된 땀과 눈물이 있을 뿐이었다. 주어진 노임을 모아 미래의 설계를 이야기할 아무 희망이 없던 세계였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흘린 눈물과 땀과 피의 대가를 요구하시게 된 것이다. 애굽인들이 누리던 영화는 끝이 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동안 보상받지 못했던 수고의 대가를 받는 날을 허락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애굽인들의 소유 중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은총을 주셨다.

2. 이 보물들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신 하나님.

애굽인들로부터 가져온 금과 은이 시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한때는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심기에 노를 발하게 하는 자룔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시내산에 있는 동안에 사단의 유혹이 지배하던 순간의 행위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 성전을 세우고 거기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금과 은이 성전의 장식품과 치장들로 사용되어졌던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대제사장의 흉패에서 번쩍였고, 거룩한 그릇들 가운데서 빛났다. 그리고 다윗이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모은 보물들과 그것들이 후에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 데 사용되어진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것들은 또한 땅의 왕들로부터 그들의 보물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모아들이는 역사를 보여준다.

3. 새 예루살렘에서 빛날 보물들.

그것들은 교회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든지 선택된 자녀들을 위한 것이든지 간에 종종 애굽의 한가운데로부터 취해져왔다. 다소의 사울이 그러한 보석이 아닌가? 세상은 그를 가장 귀한 가문에 속한 자손 중의 하나로 간주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임마누엘의 흉패에 박힌 보석으로 만드셨다.

포로되고 고난당하는 땅으로부터 보석들을 찾아보자. 그것은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단을 위하여 우리가 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을 견디는 것만으로는 충만치 않다.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시험으로부터 보석들을 캐내야 한다.

모든 시험과 유혹들이 “역설적인 은혜”로 우리를 풍부하게 하도록 하자. 우리의 생 가운데 무거운 채찍으로 처절하게 괴롭히는 애굽인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우리에게 부를 가져다 줄 것이며 우리는 거룩한 예배를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보석들은 새 예루살렘의 건축과 예배 가운데서 빛날 것이다.

적용

1) 무거운 채찍 속에 우리가 당한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주님께 드릴 보물은 무엇인가?

2) 임마누엘의 흉패에 박힐 보물로 나는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물들은 결국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제 목 : 쓴 나물

본 문 : 출 12:1-14

요 절 : (출12: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유월절 축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상징이다. 노예된 우리를 건지시고 어둠의 세력을 무참히 패배시킨 그날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승리의 표징이다. 영원한 유월절 양이 되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의 보혈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보혈의 가장 강한 간구를 듣고 계신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살을 그분 스스로의 명령에 따라 성찬 예배에서 매시간 마다 먹도록 부름받았다.

이것은 우리의 입맛을 즐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님에 틀림없다. 이것은 주님의 희생의 고통에 동참하는 이픈 경험의 순간이다. 이스라엘이 유유절에 먹어야 했던 쓴 나물은 애굽에서 겪은 자신들의 쓴 경험을 회상하기 위함이었다. 이 경험의 회상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을 새롭게 기리는 방법이었다.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회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심지어 가장 황홀한 순간에도 우리는 쓴 나물을 맛보게 된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다시 우러러 보고 머리를 숙이는 믿음의 경지에 머물게 된다.

1. 우리는 결코 쉬임없이 먹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주신 구 속의 대가를 잊을 수 없다. 심지어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실현되는 하늘 나라에서의 복받는 순간에서도 그분 손의 못자국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십자가와 수난의 고뇌와 피땀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쓴 마물로 준비된 만찬을 먹게 될 것이다.

하물며 이 험준한 지상에서의 삶에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소중한 쓴 나물을 먹지 않고서야 어찌 오늘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 그 쓰라린 십자가의 고난을 회상하고 머리 숙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계속되지 않고는 오늘을 승리ㅣ하기란 실로 어렵다. 쉬임없이 그의 고귀한 죽음의 효력을 필요로 하는 이 땅이기 때문이다.

2. 우리의 쓴 나물을 생각하자.

죄인 됨의 기억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과 죄악을 잊을 수 없다. 비록 주님은 용서하셨지만 늘 죄스러운 우리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기 전까지의 그 반역과 고집불통의 날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같은 것들로서 우리에게는 참으로 쓴 경험이었다. 죄의 노예로 헤매이던 그날들은 정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임을 쓴 나물을 먹으면서 회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알고 난 후에도 우리에게는 교만과 나의 의지로 가득찼던 날들이 무수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모든 부끄러운 사연은 자신에게 돌아와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숙에게 한다. 그때마다 쓴 나물을 먹으면서 생각하자. 죄의 노예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품에 있을 것인지.

3. 더 나아가 쓴 나물이 나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

계속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음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과 육체의 의지에 대해서는 죽고 주님의 십자가의 특성인 자아 복종과 겸손에 의해서 고무될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의 쓴 나물을 먹을 수 있다. 그때 십자가의 공로로 세례받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인치심의 의미가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가 깊은 의미를 지닌 쓴 나물로서 우리에게 와 닿는다.

또한 현재의 어떤 쓴 수난의 경험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오늘의 쓴 나물에 감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보는 신앙의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적용

1) 과거의 죄의 노예 생활이나 곤혹스러운 경험도 해방의 만찬인 유월절 식탁, 오늘의 성만찬의 식탁에서 회상해 보자.

2) 과거의 회상을 위한 쓴 나물보다는 오늘 나의 삶에 감당하기 어려운 쓴 나물은 없는가를 보면서 장차 나타날 영광된 그날과 비교를 해보자.

3)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 성만찬 성례전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그리면서 쓴 나물을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자.

제 목 : 그 권능의 손 때문에

본 문 : 출 13:1-16

요 절 : (출13:14)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 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이 장에서는 여호와의 능하신 손과 그 손의 권능이 자주 표현되고 있다. 이 손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속해 제시는 하나님의 강한 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자비와 사랑의 손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절대 권력으로부터 구출해낸 권능의 손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하나님의 손이 미치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신약을 통하여 주신 말씀과 연관을 맺어 그 의미가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 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 하나님은 강한 손을 가장 낮은 곳까지 펼쳐주신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가 있는 가장 낮고 미천한 자리에서 뻗치신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정한 어떤 수준까지 스스로를 돕고 그 나머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부름받았다면, 하나님의 권능의 손은 오늘처럼 인정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오직 웅던이의 바닥에 누워서 신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깨어져있었다. 스스로 일어서거나 출발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강한 손이 펼쳐 있었다. 하나님의 손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잡으시고 만지시기 위해서 뻗어 내리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행동에 따른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헛되이 힘을 소진하여 영혼이 쇠하여졌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리로 오신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힘이 되시고 영원히 우리의 분깃이 되신다.

2. 하나님의 강한 손은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의 것보다 강하시다.

바로는 지상에서 실로 최강의 권력 소유자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그의 꽉 쥔 주먹 안에 나방을 뒤고 있듯이 바로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러나 어른의 손을 어린아이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손은 바로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강한 손이었다.

그러므로 사단이 수많은 시간 우리를 속박 가운데 잡고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더 이상 두려워 말자. 하나님의 그 능하신 손이 나타날 때 사단의 손은 스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나를 괴롭히는 사단의 손길만을 볼 때 두려움과 낙심이 가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손의 강력하심을 바라라. 그의 손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3. 우리는 하나님의 강한 손을 소유하고 믿고 있는가?

연약한 인간이 누구의 손을 붙잡고 신뢰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의 인생의 방향과 자세와 결과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 손의 능력과 속성에 따라 한 인생의 운명은 좌우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강한 손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권능을 믿고 따랐기에 그들에게는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손은 마치 기관차가 객차들 앞에 있듯이 믿는 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객차들은 기관차와 철저한 이음새가 있기에 자신들이 이끌림을 받을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손과 이음새가 필요하다. 그 이음새는 바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험준한 함정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 강하심을 바라고 그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불신앙과 죄악이 그의 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방해하거나 가로막지 않는 한 그의 손은 짧지도, 마비되지도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적용

1) 나를 어두운 그늘로 끌고 가는 원치 않은 손길만을 보지 말다. 그 손길을 파멸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보자.

2) 하나님은 그 능력의 손을 나의 근심과 한숨이 극치에 달했을 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펼쳐주신다.

3) 진정 이 땅에서의 승리자는 그 능력의 손과 자신의 손이 강하게 이어져 있는 사람이다. 다시 한 번 이음새를 확인하자.

제 목 : 시체로 변한 악의 세력

본 문 : 출 14:21-31

요 절 : (출14: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의 바닷가에서 친 장막에서 지낸 밤은 초조와 불안으로 이어진 밤이었다. 그러나 더욱이 날이 밝아 바로의 장관들이 거느린 수많은 병거가 뒤를 쫓아오는 것을 본 그 순간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공포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홍해의 한복판에서 바로의 장관들과 그의 군대가 완전히 수장되어 모두가 시체로 물 위에 뜨는 처절한 사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피 흘리는 싸움이 없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홍해를 나와 수를 광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 전날 밤의 근심으로부터 아침이 가져온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 그들이 눈을 들었을 때 그들은 바로와 위협적으로 쫓아오는 애굽인 감독들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차갑고 굳은 시체들이 해안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는 그들을 보지 않을 것이며 그들 채찍의 파열음을 듣지 않을 것이다.

1. 무서운 죄의 세력이 우리 앞에 시체로 보이리라.

십자가를 앞세우고 나아가는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따라온 숱한 어둠의 세력이 줄을 잇고 있다. 순간순간 절망에 서 있는 경험을 한다. 불안과 초조가 나를 붙잡고 있을 때가 적지 아니함을 경험한다. 그러나 거기서 뒤를 보지 말자. 뒤를 보면 우리를 삼키려는 사단의 행진 소리가 들릴 뿐이다. 열려 있는 앞길만 보고 힘껏 달리자.

오늘의 홍해를 나와 수르 광야에 발을 디딜 때 우리를 괴복히던 무서운 유혹들과 악한 것들이 갑자기 모든 힘을 잃고 침몰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십자가 위의 우리 주님의 위력이 우리를 반드시 승리의 광야로 이끄심을 경험할 것이다. 그럴 때 무서운 죄의 세력은 우리 앞에 시체로 즐비하게 늘어서게 될 것이다.

2. 시험의 압박 가운데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리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려 할 때 때로 심히 어려운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어떤한 시험이라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알지 못하고 그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어떠한 것도 우리 삶에 들어올 수가 없다. 우리 시험의 압박이 거의 견딜 수 없을만큼 크더라도 바로 다음에 이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언제나 예비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날 애굽 사람들이 죽은 시체로 변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어한 우리를 괴롭힌 모든 시험이 죽음의 계곡에 즐비하게 놓이게 될 것이다.

3. 영혼을 괴롭힌 유혹의 세계를 벗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너는 순간은 화급한 마음과 함께 벅찬 행진의 계속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벗어났을 때 그들은 기대 밖의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순간에 그 유혹들은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우리를 그 함정에서 구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허용한 자기 방종의 습관과 유혹에 대하여 계속 무너져내리는 비굴함으로부터 너무나도 확실하게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닷가에 쓰러져 죽어 있는 애굽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언젠가 우리도 이러한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을 놀라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적용

1)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유혹의 세력을 벗어나는 데는 힘이 든다는 것을 인정하자.

2) 나의 힘으로는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사단의 세력이 우리를 삼키려 한다. 그러나 그들을 단숨에 시체로 만든 하나님의 거대한 권능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자.

3) 나를 줄기차게 쫓아 다니는 죄의 손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확인하자.

제 목 : 쓴 물이 단물로 변하다.

본 문 : 출 15:22-27

요 절 :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애굽의 장관들과 그 병사들의 시체를 보면서 여호와의 권능과 보호에 감격했던 백성들은 예상할 수 없던 한 순간에 직면한다. 생명의 필수물인 먹을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땅 마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방활하며 불평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손에 의하여 구원받은 무리들을 그대로 방치하시지 아니하였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그 쓴 물에 던지게하여 단물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목마른 자녀들의 시급한 갈증을 풀게 하시고 법도와 율례를 정해 주셨다.

1. 우리의 희(喜)와 비(悲)는 근접하여 있다.

자연의 동식물 모두가 공생공존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희와 비는 언제나 가깝게 놓여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의 해안에서 승리의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다시는 불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순간이 미쳐 지나기도 전에, 고통과 실망의 땅 마라에 서서 그들의 처지를 불평하는 자리로 기울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슨 물을 달게 만드는 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의 출현과도 같았다. 우리가 죄 아래서 쓴 고통을 당하고 그 죄의 쓴 물을 마시면서 신음할 때 하나님은 주님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로 달고 오묘한 말씀의 생수를 마시게 하였다.

죄악의 쓴 물과 구원의 단물은 순간의 거리에 곤존한다. 우리가 생의 다양한 가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고 견디든지, 행하든지 우리 자신을 그 뜻에 복종시키게 될 때에 당 위의 쓴 것들이 달라지며 어려운 일들이 쉬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예”라고 대답할 때 은혜의 생수와 접한다.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은 실로 소중한 신앙의 자세다. 자신의 지식과 기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예”와 “아니요”를 말하는 것은 복받는 자세가 아니다. 오직 “예”의 자세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질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이 있을 때에만 은혜의 생수를 마실 수 있다. 복받는 비결은 바로 다양한 우리 삶의 환경 가운데서 정성을 다하여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다. 따뜻한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굽히고 들어와 주어진 명령대로 하는 그곳에 뚜렷하게 주어진다.

모세가 이의를 달지 않고 무조건 명령을 따를 때 모든 백성들이 흡족히 마실 수 있는 생수가 터져 나왔다. “예”라고 대답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찾으신다.

3. 주신 은총을 기다리라.

우리 인간은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사연 앞에 서는 순간 기쁨보다는 불평을 계속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악이 선의 가치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이론을 생각하면 고통의 의미는 다시 새로워진다. 고통은 바로 은총의 가치와 그 의미를 더욱 깊게 경험하게 하는 소중한 것이다.

고통 중에서도 인내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실로 중요한 신앙인의 자세다. 내가 쓴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시점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보다 그 뒤에 다가올 은혜의 단물을 생각하면서 넏넉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한정된 인간의 속성이 나를 인내의 세계에 무물지 못하도록 유혹할지라도 그 순간을 지혜롭게 넘긴다며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의 단물을 마시게 해주신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태풍은 순간적이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아름다운 신앙인들은 모두가 그 아픔을 견디면서 연단을 음미해야 한다.

적용

1) 마실 수 없는 쓴 물을 앞에 놓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다시 음미해 보자.

2) 하나님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기적의 손길을 가지고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심을 확신하자.

3) 아무 이유나 질문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음미하면서 나의 순종은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해 보자.

4) 십자가의 그 쓰리고 아픈 고통이 온 인류에게 달고 오묘한 진리로 바뀐 구속의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자.

제 목 : 하루 하루를 생각하라.

본 문 : 출 16:1-12

요 절 : (출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이 내리신 만나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그날 그날의 분량을 취하여 가져와 먹도록 하신 것이었다. 인간의 욕심에 따라 많이 거둔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주어진 일용할 양식이었다. 모세의 말을 청종하지 않고 욕심대로 거두었어도 먹고 남은 것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버려야 했다. 날마다 땀을 흘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을 거두고, 평화로운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1. 매일 매일을 감사한다.

밝아온 한 날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먼저 감사를 드린다. 우선 나의 생명을 이 새날에도 연장시켜 주시니 감사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일터를 주시기에 더욱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어 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일 해야 하는 낮을 주시고 쉬어야 하는 밤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위해 둘러앉아 감사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평화로운 삶의 모습인가? 여기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평화로운 명상과 함께 주님 앞에 앉아 감사하는 시간이다.

2. 매일 매일의 일을 생각한다.

가장 고된 일정은 매일 매일 나에게 주어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은 인간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이 가장 정상적임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은 선한 일들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하나하나 그것들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갈 길을 준비하셨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성취해야 할 임무와 힘써야 될 봉사의 직분을 분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계산하지 않고 사는 비법을 배워야 한다. 오직 그분의 섭리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날 한날을 사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

3. 매일 매일 그날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리의 영혼이 매일 매일 잔잔한 물가와 푸른 풀밭에서 살아갈지라도 우리의 육신의 삶은 쉬임없이 가슴 조이는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려움들을 우리의 날들 가운데 분산시켜서 우리가 견딜 수 잇는 만큼만 한날에 주신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대로 눈앞에 다가선 시험을 볼 때는 넘지 못할 태산처럼 보이나 한 날이 지나고 보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안위함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4. 매일 매일 그날의 필요를 공급한다.

이스라엘 족속 중 어느 누구도 만나 창고를 가리키면서 어떤 기근에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축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매일의 양식에 대한 매일의 신뢰, 즉 한날이 되면 새 만나가 떨어지는 데 대한 가르침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구름 기둥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생계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다. 그름이 머무는 곳에 만나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의 귀에 들려지고 있다.

적용

1) 새로운 하루가 다시 주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맨 먼저 감사하는가?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심을 먼저 감사해야 한다.

2) 오늘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나의 삶을 이끌어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만나처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 한 날도 감사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3) 그날에 주어진 어려운 시험을 감당하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튼튼히 연단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제 목 : 동역자로 나타나신 하나님

본 문 : 출 17:1-7

요 절 :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이 장세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당신의 종들과 협력하는 한 아름다운 예를 볼 수 있다. 모세가 바위를 내려치는 행위는 매우 작은 부분이고 중심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체의 행위는 독자적이 아니고 협동적이었다는 데 오늘의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역사를 담당하셨고 모세는 보이는 주체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럴 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역사가 발생하였다. 반석에서 물이 쏟아질 때 기적에 대한 함성보다는 목마른 백성들을 살리는 은총의 사역이 펼쳐짐을 보면서 우리는 함성을 질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개입한 사역은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다시 입증하고 있다.

1. 보충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일하라.

오늘의 교회에서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계시는 모든 기독교 사역의 행위 속에는 두 사역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곧 하나님과 그의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는 사역자가 주체가 되고 보이지 않는 사역자 하나님은 마음에 두지 않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실상 사역자는 단순한 연출자에 불과하다. 모든 시나리오는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룩된다. 모세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바위를 치는 단순 작업자에 불과하였다. 오직 하나님을 보필하고 그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자일 뿐이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돕는 사람들은 보충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를 인식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바르게 깨닫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2. 그날 모세가 바위로 갈 때의 마음을 상상해 보라.

바위를 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어떤 마음의 상태와 행위를 가지고 임하였는지를 상상해 보자. 그의 백성들이 마실 수 있는 생수를 쏟아지게 하기 위하여 반석 위로 갈 때에 그에게 의심의 마음이 있었다고 상상이 되는가? 또는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하면서 걱정으로 눈쌀을 찌푸리며 근심에 눌려 있었다고 보는가? 분명히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에 오직 명령대로 내려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다 하나님께서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오늘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유업이 자기 어깨에 실려 있는 양 근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자세다. 모세는 아무런 근심이나 의심 없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내려치는 아주 단순한 일을 감당하는 순간 원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3. 모든 기적의 결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르비딤 광야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들과 함께 마실 물을 찾지 못하고 심한 갈증을 겪게 되었다. 이들 앞에 필요한 것은 오직 물뿐이었다. 반석을 쳐 쏟아진 생수를 마시는 기적의 현장에서 모세는 말 없이 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당위성에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였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기 위해 함께 하신다. 그러나 이 역사는 필히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실현하신다. 문제는 도구로서 쓰임을 받은 인간이 모든 영광을 가로채는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어떤 기적이 발생하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오늘의 교회는 단순히 하나님의 심부름만을 했을 뿐이라는 자기의 분수를 아는 일꾼들이 필요한 것이다.

적용

1)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시키는 대로 우리는 묵묵히 일하고 있다는 기본 자세의 틀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2) 기획과 시나리오는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진행되고 주의 하역자는 오직 연출을 맡은 심부름꾼에 불과함을 상기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그 결과에 대한 영광을 취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두자.

제 목 : 인간들의 충고와 하나님의 허락

본 문 : 출 18:13-27

요 절 : (출18:23)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모세가 지도자로서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있을 때에 소중한 한 인간의 충고가 있었다. 장인 이드로가 사위 모세에게 준 이 충고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바르고 선한 것이었다. 백 사람 분의 일을 혼자 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백 사람을 쓰는 편이 언제나 더 낫다는 사실을 그에게 충고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일을 맡김으로써 그들의 잠재된 가능성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예술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드로의 축고에서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음 먼저 하나님께 상의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할 때까지는 그 충고를 실행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점이다.

1. 인간의 충고를 눈여겨보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충고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충고들 가운데는 건강을 위한 만병통치의 묘책도 있고, 삶의 방향을 위한 것도 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이드로가 모세에게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도 있다.

종종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더 나은 어떤 것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머물고 있을 때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도록 하는 충고가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뜻이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명하는지를 듣도록 권하는 충고가 우리 주변에서 때때로 주어진다. 이러한 충고를 지체 없이 받아들여 실행하는 슬기가 있어야 한다.

2. 인간의 가르침을 시험해 보라.

세상은 너무 많은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학교의 정규적인 교육 이외에도 수많은 종교적인 가르침과 종파들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가르침들과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시각으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적지 아니하다. 여기 찬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기준이 있다.

1)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가?

2) 육신을 낮추는가?

3)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4) 과거의 기독교 역사의 경험과 일치하는가?

이상의 질문 앞에 “그렇다”라는 확신이 설 때에 우리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과 같은 교사는 없다.

들을 귀가 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그의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 그 목소리는 작고 조용하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가르치신 교훈은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에게만 집중시키며 그분을 푯대로 삼도록 하신다. 맑은 귀와 눈을 가지고 있을 때 그의 가르침은 실로 명확하고 분명하다.

만약 우리의 전화선에 많은 소리들이 분명치 않게 응얼거리고 있다면 우리 아버지의 인격과 교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혼선을 가져오는 잡다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환경을 정리하라. 잡음을 일으키는 모든 선을 삭제하고 오직 그분과의 통화에만 집중하라. 그때 하나님의 가르침과 허락하심이 분명하게 들려올 것이다.

적용

1) 나의 주변에 나를 위하여 따뜻한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신앙의 따듯한 벗이 있는가를 찾아보자. 이러한 벗이 없을 때 진정 나는 고독한 존재이다.

2) 우리를 유혹하는 감언이설의 가르침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기준을 설정해야 바른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알아본다.

3)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나 벗들의 따뜻한 충고도 하나님의 인가(認可)가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제 목 :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본 문 : 출 19:1-6

요 절 :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내가 누구에게 속하며 나의 소유주가 누구인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은 결정지어진다. 그 신분과 속성과 그 삶의 양태까지 모두가 소유주에 따라 결정지어진다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적인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공식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를 선언하신다. 앞으로 계속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잘 준행하면 영원토록 이 백성을 모든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자신의 소유가 되고 거룩한 백서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는 실로 이방의 어느 나라도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는 너무나 차원 높은 선택이었다.

1. 우리는 하니님의 특별한 소유인가?

분명히 우리는 타락한 죄인들이었고 죄의 삯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생각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 모든 값을 다 치르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그리고 오늘도 다음의 말씀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소유된 생명체들인지를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생명은 보호받은 생명들이다.

우리에게 보물이 있다면 거기에 마음을 두게 됨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보물이 험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안에 있다면 그는 그 보물의 안전을 걱정하느라 침대 위에서 끊임없이 몸을 뒤척일 것이다. 만일 그의 보물이 옷감이라면 좀먹는 것을 막기 위해 애 쓸 것이며 만일 귀금속이라면 도독으로부터 지키려고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을 던져 자신의 보물로 삼아주신 우리를 부주의하게 버려두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는 선한 목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주시었다.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 말씀은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으시다. 그의 양으로서 오직 그의 우리 안에 머물면 오늘의 어떤 사나운 맹수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를 받게 된다.

3. 하나님의 부물은 영원히 그의 것이다.

보물은 특별한 소유이다. 하나님은 선택받는 자녀를 향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 “(말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하나님은 특별한 소유가 된 몸들은 이제 그 손을 뿌리칠 이유나 능력이나 시간이 없다. 오직 그의 소유로서 그의 뜻을 따를 뿐이다. 하나님 역시 이미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시켜 소유한 생명들을 어떠한 경우에도 버리지 않으신다. 세상의 높고 험한 파도 속에서도 지키시며 사단의 잔인한 유혹 속에서도 건지신다. 그리고 그 생명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반드시 사용하신다.

적용

1) 우리의 생명의 소유권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자신의 생명이 누구의 손에 점유되어 있는지를 아는 성도가 복된 길을 찾는다.

2) 생명의 주인이 발하는 목소리를 청정하고 그의 계약을 지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 소리를 외면할 때 비극은 반드시 찾아와 길 잃고 헤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3) 생명의 주인이 우리를 보실 때마다 기쁨의 노래와 사랑의 감격을 전해 드릴 수 있는 준비가 언제나 갖추어져 있는지를 확인하자.

4) 나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주시는 은혜로 그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는 긍지를 가슴에 품고 오늘을 살자.

제 목 : 하나님이 계신 암흑

본 문 : 출 20:18-21

요 절 : (출20: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기를 요청한다. 하나님을 직접 뵐 때 그들은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을 갖는다. 하나님을 뵙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도 송구한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분명히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빛나는 광채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위한한 일이기에 하나님은 먹그름으로 자신의 광채를 덮으시고 모세의 접근을 허락하셨다.

1. 신비의 어두움을 보라.

하나님은 빛이시고 빛 가운데 거하시지만 자비롭게도 인간의 연약한 눈에 대하여 가리워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지혜로운 자와 분멸 있는 자에게도 감추어두신 비밀들이 있다. 하니님의 존전에 덮여 있는 어두운 그름의 암흑은 분명히 신비의 어두움이다. 그러나 그 어두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는 찬란하게 빛이 난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하늘을 덜고 있는 칠흑 같은 먹구름은 오직 인간의 시야에 머물 뿐 그 먹구름을 뚫고 드높은 창공에 진입하면 전혀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 오히려 맑고 찬란한 빛에 반사된 하연 구름을 내려다보게 된다. 하나님의 존전은 밝고 찬한한 빛의 세계다. 신비의 어두움은 오직 하나님 얼굴의 베일일 뿐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광채를 볼 수 없는 인간을 위하여.....

2. 시련의 어두움을 뚫고 나아가라.

깜깜한 어두움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 모두는 두려워하고 피할 길을 찾는다. 그러나 믿음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리의 삶 속에 놓여진 구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암흑의 구름 뒤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에는 그의 영광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시련의 어두움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정확히 제사하고 계신다. 시련의 어두운 불길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놀라거나 이상히 여기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오히려 이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라는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우리가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시련의 어두움을 경험하지 않고 영광된 광채를 보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때로는 버릴 때가 있다. 주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 세계의 경험은 시련의 어두움을 통과한 사람에게 더욱이 큰 실감을 준다.

3. 십자가 위의 검은 구름을 보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모진 고초를 받으실 때의 현장을 보라. 하나님의 독생자가 있는 그 현장에 밝은 광채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있는 상태에서 운명하신다. “(눅23: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예수님께서는 그 어두움의 순간에서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시었다. 그러나 그 어두움의 장막 뒤에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의 영혼을 받으시고 찬란한 부활의 햇빛을 세상에 보여주셨다.

우리가 가장 외롭고, 버림받은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까이 계신다. 우리의 눈에는 가장 어두운 먹구름이 보이지만 그 구름 뒤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광채가 빛나고 있다.

적용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를 두려워한 이유들을 다시 음미하자.

2)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는 순결한 생명체가 이 땅에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진단해 보자.

3) 시련의 어두운 그늘을 우리가 직면했을 때 어떠한 자세와 용기가 결단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자.

제 목 : 송곳의 의미

본 문 : 출 21:1-6

요 절 : (출21: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 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본 장에 기록된 오늘날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율법들은 도덕법과 사회 정의라는 원칙에서 볼 때에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히브리 종에 관해서는 그가 비록 종의 신분으로 전락했더라도 종이 아닌 고용된 노동자처럼 취급받도록 했고, 또 6년이 지난 뒤에는 자유를 얻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는 종살이를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약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결혼하여 자녀를 낳은 후에 그가 나가기를 원한다면 그는 가족을 남겨두고 자신만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가족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문설주에다 귀를 대고 송곳으로 뚫어 표를 삼고 영원히 주님을 섬기도록 했다.

1. 그리스도의 종이 되라.

히브리 노예 중에 6년의 만기 시효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자한 주인의 보호 속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결정하면 그 증표로 귀를 뚫었다. 이는 주인을 영원히 섬기겠다는 일종의 헌신적인 다짐이다. 그때 사용하는 송곳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못을 예표하며 우리는 모든 헌신의 행동 속에서 그 못을 기대해야 한다. 그 못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일을 하고도 곧 되돌아서서 그렇게도 황영했던 가르침에 오히려 불신과 창피를 가져다준다.

오늘날의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값으로 지불하고 산바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종이나 욕망의 종이 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2. 우리 자신을 포기하자.

송곳으로 귀에 구멍을 뚫는 것은 노예 신분을 공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귀는 예 속의 기관으로 여겨졌기에 귀를 뚫는 것은 곧 자유를 포기하는 상징적 표식이 된 것이다. 이 송곳의 의미는 영적으로,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굴복케 하는 수치와 고통을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에너지로 자신을 헌신하려 하며, 우리 스스로의 결심의 힘 안에서 독실한 생활을 결의하며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섬기겠다고 말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을 빼앗고 우리를 무력하게 하며, 하나님만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되시게 하는 송곳을 피하려고 한다. 어떤 경우에 송곳은 친하지 않은 동료의 매일 계속되는 험담일 수도 있고, 상실에 대한 압박감이나 자존심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기 때문이다.

3. 온전히 헌신하자.

송곳으로 귀를 뚫는 행위는 주인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자의적인 행동으로서 변함없이 영원토록 주인을 섬기겠다는 일종의 헌신적인 다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아버지께 온전히 헌신하셨다. 주님의 귀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대한 온전하고 영원한 헌신을 위해 송곳으로 뚫린 것이다. 이와 같이 주 안에 거하는 우리들은 이 헌신을 받아 온 마음을 다하여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서 우리를 참으로 유익케 하며 진정한 자유를 제공하는 의의 노예가 되어 주님께 헌신하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이 되어 주께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용

1) 그리스도의 종 대신에 인간의 종 혹은 마귀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지는 않았는가?

2) 뚫린 귀는 섬김의 모습일진대 섬기는 종의 겸손보다 대접을 받기 원하는 종의 모습은 아니었는가?

3) 송곳은 내 자신을 굴복케 하는 고통과 포기인데 오히려 남을 찌르는 송곳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않았는가?

4) 주인을 섬기겠다는 영원한 헌신이 일순간의 결단으로만 변형되지는 않았는가?

제 목 : 배상할지니라

본 문 : 출 22:5-15

요 절 : (출22: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본 장의 율례들은 주로 제7계명에 관한 것들로 여러 가지 상황을 들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좀 멀어보이는 배상에 관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입힌 상처에 대해서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대치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직하게 우리가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잘못된 행동이나 말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하는 데는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종종 우리가 했던 말이나 행동이 정당했다는 생각으로 자신들을 합리화 해버리지만 그것 자체로는 정당한 행위일지 몰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이 잘못된 자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 다른 사람의 밭에 짐승을 놓았다.

만약 사람이 자기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풀어놓아 먹이다가 남의 밭에 들어가서 먹게 하면 자기 밭과 포도원에서 나온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놓아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쉴라”인데, 그 뜻은 몰아넣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풀어준 것이나 놓아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규정은 자기 밭에서 먹고 있는 짐승들을 잘 돌보지 못하여 그 짐승들이 남의 밭에 들어가 뜯어먹는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에 야기된 피해보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상의 내용은 단순히 변상이 전부이지만,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으로 변상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사전에 짐승들을 잘 단속하도록 깨우쳐주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의 한계를 강조한 윤리다. 이 윤리가 무너진 현대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2. 도적을 당했을 때.

우리는 남의 물건을 잠시 맡아서 그 물건을 간수할 경우 주의해야 한다. 만약 주의를 하였음에도 도적을 맞았다면 도적 맞은 물건의 주인에게 배상할 책임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까지는 물건을 맡은 자에게 있다. 그러나 잃었던 물건을 발견하였을 경우, 재판의 절차에 따라 죄가 규정된 자는 상대방에게 그 손해를 배상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양심에 의한 진정한 신용의 필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도둑 맞은 물건에 대하여 맡은 자기 성실과 정직을 다하였다면 이러한 번거러움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빌려준 것에 대한 보상.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 등 짐승을 맡았다가 이 짐승이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을 경우, 그 맡았던 사람이 자신은 그 짐승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맹새하면 그 임자는 그대로 믿어주라고 했다. 그 짐승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맹세하면 그 짐승은 배상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 진실하게 맹세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규정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거짓 맹세를 할 줄 몰랐다. 만일 거짓 맹세하면 하나님에게 벌 받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웃에게 빌려온 가축들이 그임자가 없을 때 상하거나 죽거나 했을 경우는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 하지만 임자가 보는 앞에서였다면 배상을 안 해도 된다. 이는 정당하게 세를 주고 채용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고의적인 행위에 의한 가해가 아니기 때문읻. 하지만 무상으로 빌렸을 경우는 믿고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보상해야 한다.

우리는 무상으로 빌려준 것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새를 주고 빌려온 것이라도 무엇이든지 잘못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적용.

1) 인간은 양심을 가진 이성자다. 이 양심은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창조주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유일한 마음이다.

2) 도적질과 불의한 행동은 당시에는 부유해지는 것 같으나 궁극에는 자신의 영혼과 물질까지도 잃게 한다.

3) 실수를 한 후 말과 혀로만 고백을 하였는가? 아니면 현대판 삭개오같이 양심의 보상 및 물질적 배상까지 하려고 노력하였는가?

제 목 :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본 문 : 출 23:22-28

요 절 : (출23:22)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본 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맺으신 계약의 계속이며 결론적인 부분이다.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복 내리심에 대한 내용으로서 첫 번째는 이스라엘 민족이 일찍 죽음을 당하지 않고 장수하는 복의 약속이었으며, 두 번째는 주위에서 공격하는 애굽, 히위, 가나안, 헷 족속들을 홍해에서부터 불레셋 바다와 하수까지 물리쳐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잘 청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원수와 대적을 하나님 자신의 원수와 대적으로 삼으시며 사자가 앞서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족속들에게로 인도하고 그들을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 지켜야 할 법도.

본문은 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보다는 권고의 형식을 띠고 있다. 권고의 내용도 지금까지 언급된 법전의 율례가 아니라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에서의 행동 지침이다. 곧 지금까지의 광야 생활을 마감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자유 분방한 생활에 젖어들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 경고는 이스라엘에게 징계와 심판을 예고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복의 약속을 주어 여호와만이 참사랑의 원천임을 알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 복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스라엘의 순종이 전제되어 있다.

(출23:21)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출23:22)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이상에서처럼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시면서까지 이스라엘이 거룩한 생활을 하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위해 봉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죄악된 세상의 정신과 문화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가지 경건과 헌신이 필요하다. 그런데 세 속의 문화를 개도해 나가며 세상에 건전한 정신 운동을 주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 우리 앞에서 행진하는 왕벌을 보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계약의 천사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은 가장 안심이 되는 사실이다. 광야를 통과해 가는 행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습을 감지하고 그의 강한 손이 우리의 길을 예비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거나 그에게 불순종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의 전능하신 옹호를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속삭임에 대한 엄격한 복종은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우리가 수난받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옹호해 주시는 것을 보장받는 길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들에 앞서 왕벌을 보내어 정리해야 할 족속을 쫓아낸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출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3.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처리하심.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신을 섬기지 않고 그들의 우상들을 부수며 하나님만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직접 가나안을 대적하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겠다 하셨다. 이런 언약은 이미 아브라함 이후로 여러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통해 확약된 바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될 때 새로운 적들을 갖게 될 것이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을 미워하는 모든 자들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영예일 뿐이다. 집주인을 비방하던 자들은 그의 종들에게도 적으를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인된 하나님을 미워한 세력을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원수들의 미움 가운데 서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들의 손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옹호하시고 구원을 주실 것이다.

적용

1)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모두가 경계해야 할 적인 것을 명심하자.

2) 원수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어떤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는가?

3)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적으로부터 승리케 해주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법도를 준수하고 있는가?

4) 원수와 싸우된 그 원수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상기하고 있는가?

제 목 :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심

본 문 : 출 24:9-11

요 절 : (출24: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많은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데 하나님을 보거나 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감각의 즐거움을 위해 전력을 쏟는다. 세상의 자녀들로서 그들의 부르짖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다. 그러나 그들의 목숨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모든 길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배만을 채우는 데 급급할 뿐이다.

본문은 모세와 그 동행자들이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정옥 같은 발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면서 먹고 마시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1. 하나님을 보았다는 의미.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니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출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고 오히려 먹고 마셨다 한다. 즉 여기서는 하나님의 정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광을 보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먹고 마셨다는 것은 제사를 드린 후에 제물을 먹었다는 뜻이다. “(출18: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 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 떡을 먹으니라.”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한다는 것과 지금 그들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2. 화목을 갖다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체결한 후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했다. 이것은 언약 당사자,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교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간은 그 죄로 인해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사랑이 넘치는 교제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준비하신 언약의 피를 가운데 두고 그분가 언약을 체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워한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원히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로 인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영혼과 육신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서 복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다. 그러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두려워하면서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들의 일상 생활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 주일과 평일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의 것과 자신들의 것 사이에 엄격한 선을 그러 놓는다. 이러한 종교와 일상 생활의 분리는 가장 일상적인 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결합시키려는 진정한 종교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먹고 마신다. 그들은 가장 평범한 일들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본다. 그들은 그들의 영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들은 사도들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다. 모든 평범한 일상과 하나님의 비전을 결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누리는 제한되지 않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눈앞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분이 함께 계시지 않는 시련은 없다. 그분이 함께 져주시지 않는 짐은 없다. 그분이 함께 나누시지 않는 슬픔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적용

1)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제일 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말과 지식으로만 외쳐지고 있지는 아니한가?

2) 그리스도인이 종교와 일상 생활의 분리는 이원론적 삶을 살게 되면 기독교의 비극이 시작된다. 언제나 주님의 날이 되게 할 수는 없는가?

3)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 함은 하나님과 친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고 있는가?

제 목 : 오직 하나님의 지시만을

본 문 : 출 25:1-9

요 절 : (출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구름이 시내산에 머무르고 하나님의 영광이 불같이 맹렬히 나타나는 가운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름 가운데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를 산에 있었다. 그러나 25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과 그 안에 비치할 여러 기구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그 양식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인 25장 1-9절까지는 여러 예물을 하나님께 바쳐 성소를 짓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예물과 봉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의무였다. 이는 계약민들의 예배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는 점에서 그 우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 준수의 일환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행위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겠다.

1. 요청하시는 하나님.

(출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성소를 짓도록 요청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죄의 사슬에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속해 내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족장들, 그리고 애굽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교제하시기는 하셨지만 그들이 예배할 성소의 건립을 제의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위하여 구별된 사람들하고만 거하신다. 그러나 처음 성소를 짓도록 사람에게 제안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타락 이전의 사람 인 아담과 함께 거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성막과 함께 거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성막과 성전, 그리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 안에서, 오늘날은 성도들 안에서 거하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기록하고 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

성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할 곳이기 때문에,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양식과 그 기구의 양식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은 그들을 시켜 성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성취하시길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과 명령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설계를 위해 필요한 재료들만 책임지신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만약 모세나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원해 계획보다 더 많은 것을 사용하려고 고집하였다면 그들은 그 재료의 수집을 위해 걱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는 책임을 떠맡는다. 그리고는 우리 일상 생활에 수많은 것들을 스스로 끌어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에 만족하고 묵묵히 그의 계획을 따랐다면 필요 없었을 걱정과 근심으로 애를 태운다.

3. 매일 매일 위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매시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성령의 지시하심이나 주위 환경의 흐름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신다. 그분 안에 거하자.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자.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은 성막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빛나며 제물은 열납될 것이다.

적용.

1)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主)가 되고 우리가 보(副)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앞서려는 생각은 금물이다.

2)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나의 뜻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율례를 벗어난 모습은 없는가?

제 목 : 휘장의 실체

본 문 : 출 26:31-37

요 절 : (출26:33)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성전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완전한 분기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특별히 성막의 지성소에 놓여 있었던 증거궤에는 십계명을 담아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의 표시를 삼았으며 그 안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도 함께 두었다. 이 증거궤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곳마다 함께하여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임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소중한 증거궤가 있는 곳은 휘장으로 막아 함부로 출입을 할 수 없는 지성소로 구분되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직접 볼 수 없는 죄인된 모들로서 살아야 했던 무가치한 존재들이었다.

1. 이제 휘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는 제사는 이 휘장의 필요성을 말살시키고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접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치었다. “(히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성전의 휘장이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찢어졌고 성령의 오심은 그 순간부터 우리가 지성소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실 때와 또 지상 생활에서 그러하셨듯이 아버지 하나님의 존전 앞에 가까이 와서 그 안에 살도록 초청받고 있다. 이것이 히브리서 10장 19-22절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하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 더 이상의 휘장을 만들지 말라.

새롭게 사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어짐으로 완전히 열렸다. 그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기심과 동시에 성소의 휘장이 그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다.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지성소를 출입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열렸다. 단순한 출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도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는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을 떳떳이 대할 수 없도록 자신의 양심이 화인을 맞았을 때 그것은 새로운 휘장이 되어 기도가 막히고 지성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유발한다. “(딤전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그러기에 기도가 막히고 예배가 없는 삶의 부끄러운 휘장이 우리에게서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휘장 너머의 증거궤 앞에 서라.

이스라엘의 성막 안에 있었던 휘장 너머의 증거궤 앞에 설 자는 제사장을 비롯한 특수한 신분들로서 제한되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 언약궤 앞에 서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속죄의 청동제단과 매일 씻기 위한 물두덩, 그리고 중보를 위한 황금제단도 알지만 그들과 피 뿌인 보좌 사이에 빛나는 영광의 광채를 보는 교제의 복된 친밀함에는 결코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드린 단 한 번의 제사는 모든 휘장을 없애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전에 서서 그를 직접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듣도록 하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우러러 두 팔을 벌려 경배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간구하는 데 조금도 주저할 것이 없다.

적용

1) 우리는 휘장의 의미와 그 실체를 새삼스럽게 터득할 필요가 있다.

2) 지성소를 드나들 수 있는 우리의 이 자유로운 예배의 장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제사를 다시 한 번 음미해야 한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으나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바로볼 수 없는 휘장을 만들고 있지 아니한가를 반성한다.

제 목 : 순결한 올리브 기름

본 문 : 출 27:20-21

요 절 : (출27: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 되

올리브 열매를 채취한 기름을 사용한 불빛은 언제나 맑고 투명했으며 그을음이 없었다. 그래서 이 기름은 언제나 순수하고 정한 기름으로 순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인류의 어둔 죄악 세상을 밝히기 위하여 자신의 온 몸을 불사르신 예수님의 순결한 품격을 예시한다고 해석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막 안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어두움이 깃들이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잡다한 기름에 의한 빛이 아니라 순결한 기름으로만 가능하도록 명령하셨다.

1. 순결한 기름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봉사의 손길을 펴는 사람들은 언제나 순결성을 요 받는다. 성전을 위한 순결한 기름만을 성막을 밝히는 등불의 기름으로 사용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의 교회에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조심스로운 준비와 깊은 명상에서 다듬어진 헌신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다. 잡다한 이권이나 명예의 계산이 개입될 수 없는 순결한 정신이 담긴 봉사와 헌신의 결실을 요구하신다.

2. 순결한 기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보혈.

자신의 죄값으로 흘림 심자가 위의 모든 사형수들의 피를 아무도 순결한 피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 일컫지 아니한다.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보리 산정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진정 보배로운 피였다. 그 이유는 죄 없으신 몸으로 대 속의 죽음을 감당하시었기 때문이다. 진정 순결한 기름으로서 인류 위에 구원의 등불을 영원히 켜신 사건이었다. 그 꺼지지 않은 구원의 등불 때문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선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권을 소유하였다.

3. 교회의 상징으로서의 등불.

성막은 출애굽(BC 1446) 이후 성전이 완공되기(BC 959)까지 약 500년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시고 그들과 함께한 거룩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밝혀진 등불은 세상을 밝히는 교회의 모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근거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가리킨 일곱 촛대를 상기할 때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성소 안에 있는 등불은 믿는 자들인 교회의 증가이며 상징이다. 향로가 하나님을 향한 중보자로서 그들의 역할의 모형이고 일곱 가지의 촛대가 세상을 향한 빛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대한 모형인 것과 같다.

4. 어두움을 허용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

성경 안에서 언급된 빛은 언제나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와 연관을 가져왔다. 현대의 교회에서는 성령이 계속 빛을 발하게 하시는 원천이 되고 있다. 가난이나 질병, 고통의 자리 어디서든지 믿는 자들의 고난의 장에서 보이는 것은 인자한 성령의 불빛이다. 성령의 역사는 성막이나 오늘의 교회나 어디서든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순결한 등불이다. 이 빛을 보고 일어서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두움의 세계에서 파멸하였다.

이스라엘 성막의 지성소에서는 어두움이 시작된 저녁부터 빛이 시작된 아침까지 등불이 켜 있어서, 성막에서는 우둠이 허용되지 아니하였다. 오늘도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들의 가슴에 순결한 기름을 태우면서 빛을 발하는 등불을 켜라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멸령을 듣게 된다.

(빌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적용

1) 순결함은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속성이요 형태다. 하나님께 순결하다고 내놓을 수 있는 무엇인지를 나 자신에게서 찾아본다.

2) 그리스도의 순결한 보혈과 자신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면서 구원의 은총을 생각한다.

3) 순결한 기름으로 밝혀진 등불이 나에게 켜 있는지를 다시 확인해 본다.

제 목 : 거룩한 대제사장의 옷을 보라

본 문 : 출 28:15-35

요 절 : (출28:34)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방울 한 석류 한 금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는 대제사장에게 에봇과 흉패 및 우림과 둠밈, 에봇 받침 겉옷, 반포 속옷, 관, 금패 및 고의 등의 예복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출28:40)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출28:41)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하여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출28:42)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 지 이르게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출28:43)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 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이 예복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집례하는 대제사장의 직무와 기능을 더욱 고상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성을 표시하고 있다. 만일 이 거룩한 옷을 입고 그 장식으로부터 방울 소리가 나지 아니하면 죽음을 당하도록 무서운 규례를 제정하였다.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는 한쪽 발목에 밧줄을 매어 그 끝을 바깥에 두고 들어갔다고 한다. 성소 밖의 백성들은 일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방울 소리가 멈추면 이 밧줄을 조심스레 당겨서 대제사장의 생사 여부를 확인했다.

1.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거룩한 옷을 입으라.

대제사장 예복의 겉옷은 하늘과 깊은 호수, 빙하 계곡 그리고 불망초의 색깔인 푸른색이다.이 겉옷의 가장자리에는 금방울들과 석류들이 번갈아가며 장식되어 있다. 인간이 보기에는 대제사장의 장엄한 권위와 연결하여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제정한 복장이었다.

하나님은 자신 앞에 나타난 어떤 존재라도 오염된 모습을 원하시지 아니함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하나님의 계신 곳이 너무나 성스럽기에 아무나 성결한 준비 없이 그 앞에 설 수 없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스럽고 성결한 마음과 모습을 원하심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2. 주님의 거룩한 옷의 가장자리를 보라.

율법시대의 대제사장들이 착용했던 옷의 가장자리에는 금방울들과 석류들이 장식되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은혜시대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거룩한 옷 가장자리에 그의 순결한 보혈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우리들이 만질 수 있는 주님의 옷은 감히 팔이나 머리 근처의 높은 부분이 아니다. 감사하게도 그 옷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발근처의 가장자리에 엎드려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가 “(시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말한 것처럼 거룩한 기름이 우리에게까지 흘러내리기를 소원할 뿐이다. 죄 없으신 몸이 나를 위하여 흘리신 그 보배로운 핏방울을 주님의 옷가에서 만질 수 있다면 아무리 존엄한 하나님의 존전이라 해도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3. 오늘날은 초라한 주님의 홍포를 보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 앞에는 대제사장의 옷에서 들리는 매 동작마다의 딸랑거리는 금방울 소리와 석류의 풍성한이 보인다. 간혹 우리는 거기에 매혹되어 사명의 본질적인 면을 상실한다. 그리고 그 화려한에 도취되어 외형적인 면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물질과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막상 보고 만져야 할 대제사장의 복장은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우리 주님의 홍포다 로마 군병들은 비록 자칭 왕으로 조롱하기 위하여 이 옷을 입혔으나 우리에게는 희생의 제물이 되신 대제사장의 가장 화려하고 값비싼 옷임에 틀림이 없다.

적용

1)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예배드릴 때 우리의 마음에 입고 있는 옷은 어느 정도 정결하고 장엄한가?

2)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우리 주님의 홍포를 보고 만지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3) 하나님이 지금도 예배하는 무리들에게 거룩한 곳에서 죄악의 신을 벗고 네 마음에 성결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응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제 목 : 정결하게 씻은 후에

본 문 : 출 29:1-9

요 절 : (출29:4)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29장은 아론과 그 아들들의 성직 수임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먼저, 제사장들의 정결례와 의복 착용에 대해, 둘째, 제사에 대한 규례로서 속죄제, 번제, 화목제, 소제와 전제의 내용을 살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을 끈 것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정결하지 못하면 제사 의식을 집행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손과 발뿐만 아니라 온 몸을 씻어 성결한 몸으로 거룩한 집례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레16: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1. 우리의 습관을 깨끗케 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무리들이 가장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그릇된 습관으로부터의 탈피다. 상습적인 죄악의 삶을 즐기면서 하나님 앞에 부정한 몸으로 나온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현대 교회의 문제다. 교회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마저 습관화되 버린다면 성결의 계단을 오르기가 심히 어렵다. 습관은 중독이며 중독은 완전한 병으로 취급을 받는다.

만일 우리들 매일의 삶 가운데 완전히 깨끗하지 못한 습관들이 있다면 제거되어져야 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술 냄새나 담배 연기 사이에는 분명히 부조화가 있어 보인다. 잘못된 어떤 종류의 육체적 탐닉의 습관도 비록 그것이 합법적일지라도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는 불일치하는 것이다.

2. 우리의 생각들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부정한 죄악은 반드시 생각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생각은 행동을 낳고 그 행동은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때로 유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온다. 그것이 가까이 올수록 미워하면서 분명히 돌아서서 예수님의 보혈이 시간 시간 깨끗하게 해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생각들을 깨끗케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게 하소서”하는 간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경배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엄숙한 순간에 서 있는 무리들이 부정한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어떤 외형적인 성결함도 허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거룩한 성소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증오와 분노가 치솟는 생각을 그대로 안고 있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3. 우리의 발을 주님께서 씻어주시도록 하라.

주님은 오늘도 허리에 수건을 두루시고 물대야를 들고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우리의 땀과 먼지로 가득한 발을 보신다. 비위가 상하도록 심한 악취로 가득한 우리의 발을 붙잡으신다. 그리고 물대야로 끌어들이신다. 너무나 송구스러운 이 순간 우리는 “(요13:8)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는 말과 함께 완강히 사양해야 할 것이다. 스승에게 불결한 나의 발을 씻어 달라는 불경스러운 제자는 드물다.

그러나 만일 나의 스승님이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 베드로처럼 나의 발뿐만 아니라 나의 손 나의 머리도 씻겨달라는 부탁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보여야 할 나의 성결은 나의 힘으로 되지 아니함을 우리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죄 씻어주심의 어진 사랑이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씻을 수 없다.

적용

1) 불결한 습관과 생각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에 들어가고 있는가?

2) 나를 성결하게 하려는 성령님의 역사를 언제 주로 깨닫게 되는가?

3) 육신이 약하여 늘 허물어진 나의 결단을 내가 붙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주님께 내어놓아 그의 손으로 어루만져 깨끗아게 해달라고 맡기고 있는가?

제 목 : 성유(聖油)로 인친 사명자들

본 문 : 출 30:31-39

요 절 : (출30:31)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출30:32)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관유(灌油)는 원래 제사장을 거룩한 직분으로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에 뿌리거나 바르는 기름으로 올리브 기름에 각종 향료를 넣어 제조했다. 이 기름은 지성소의 각종 성물(聖物)과 성막 봉사자에게 발라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상징적인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거룩한 기름(聖油)은 세속적인 몸치장이나 매매하는 물건으로 제조 또는 사용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 관유의 사용 목적과 그 실체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성택된 자에게 권위와 은혜를 더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예시 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1. 거룩한 구별을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자신의 존전에서 봉직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물건까지도 오직 성스러운 목적에만 쓰임받도록 관유를 바르게 하셨다. 그리고 그 관유는 인간의 몸치장이나 매매물로는 만들지 못하도록 엄격한 규정을 두시었다.

세상의 잡다한 범죄에 오염된 인간이 부름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회개와 중생의 과정에서 성별되기를 원하신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구 속의 은혜를 받은 자신의 성별된 신분을 확인해야 한다. 죄인 되었던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올 수 있도록 성별되어진 확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2.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주님은 그의 사역의 출발 지점에서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선언하셨다.

교회는 여러 형태의 봉직자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별하고 그들에게 각종의 사명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교회의 구조적인 제도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거룩히 구별된 사역을 간당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맡겨 주신 사명을 천직으로 알고 나아가는 봉직의 자세가 절대로 필요하다.

3. 성령의 관유는 육적인 요구와는 무관하다.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일은 우리의 성화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섬김과 사역을 위해서 성령이 역사하신 일이다. 기름 부어 선별된 봉직자는 성령의 열매로 그 인격을 새롭게 형성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죄악된 열정들이 포기되어지고 차분하고 경건하고 절제된 인격만이 필요하다. 세상적인 자존심과 야망을 만족시키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지성소의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강물을 개인적 야망의 물레바퀴를 돌리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흘려보내시지 않는다.

적용

1) 오늘의 지성소는 어디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지성소를 출입하는 데 필요한, 성령을 통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았는지 살펴본다.

2) 육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성령을 추구하다가 끝내 실패한 경험은 없는지를 반성한다.

3) 성별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서 무조건적인 선택임을 알고 머리숙여 감사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본다.

제 목 : 브살렐을 부르신 하나님

본 문 : 출 31:2-6

요 절 : (출31: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출31:3)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출31:4)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브살렐의 이름은 “하나님의 그늘(보호) 속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 속에 남다른 청지기 직분을 갖게 되었다. 그는 금속, 목재, 보석 등으로 성전의 공교한 장식들을 만드는 일을 감당하는 특이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달란트를 받아, 하나님이 필요할 때 내놓는 인물로 우리 앞에 보여지고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의 중요성을 깨닫는데 실패한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목회를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또 어떤 사람은 브살렐이나 오홀리압처럼 모든 기술 분야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절한 재능을 주셨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만드시어 이 땅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창조와 무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도공이 자신의 도자기를 정성들여 만드는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만드실 때 각 사람에게 알맞는 적절한 재능을 부여하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지혜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남보다 운동을 잘할 수 있는 건강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기계나 도구를 잘 다루는 능력을 주셨다.

오늘의 말씀 3절에서도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2.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적절한 재능을 주셨다.

브살렐에게 보석을 깎아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그것을 필요로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대로 우리의 어떤 재능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적절한 재능을 부여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적당한 직업을 마련하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기를 기대하신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비정상적인 직업, 예를 들면 폭력 조직이나 매춘이나 사기, 도적질 등등 비도독적이고 타인을 해하는 직업을 제외한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계획 아래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그곳에 부르셨다는 특별한 소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직장, 이곳에 부르시고 지금도 나의 삶을 살피고 계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현재의 직장에서 최선의 삶을 경주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재능과 능력을 전적으로 발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주위의 동료나 상사나 부하 직원들로부터 인정받는 최선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삶이 우리를 그곳으로 부르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우리의 직장으로 보내시고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를 원하신다.

적용

1)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에게 현재의 직장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2) 우리에게 적당한 재능을 주시고 우리를 현재의 직장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 직장의 삶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3) 성도는 모름지기 교회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장에서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한다.

제 목 :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본 문 : 출 32:30-34

요 절 : (출32: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모세의 마음은 온통 “속죄”라는 새롭고 경이로운 말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해 동안 속죄에 대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속죄라는 개념은 모세의 삶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배반하고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현실을 보았을 때 모세는 깊은 번민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는 일상적으로 드려왔던 희생 제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커다란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잔재우리에는 역부족임을 느꼈다. 즉 염소와 소의 피흘림으로는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없애기에 확실히 충분치 않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머리속을 스치는 한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달려가 아뢰었다. “(출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그러나 모세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세는 자신의 피의 무용성을 몰랐던 것이다. 때가 이르러 하나님 앞에서 한 점의 얼룩도 없는 순결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흘리실 예수님의 피만이 죄를 속할 수 있음은 몰랐던 것이다.

1. 속죄의 필요성.

죄 지은 인간은 모두 속죄의 필요성을 마음속 깊이 자각한다. 이 때문에 모든 나라의 역사를 특징지어온 문화유산 중에는 속죄 제사나 속죄 의식을 거행하는 사원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인간들은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파괴된 법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온 것이다. 만일 법을 파괴하거나 죄를 짓고 그것을 회개하거나 속죄의 의식을 거행하지 못했을 때 인간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심한 정신적, 영적 번미니에 사로잡혀야 했다.

속죄는 인간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과 평화를 위해서도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온 요소였다.

2. 희생 제물의 불충분함.

레위기 체제에서는 매년 죄를 기억하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한 의식 행위로 죄 자체가 깨끗해질 수 없었다. 예배자들은 그들의 죄와 죄의식을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들을 들고 성전 문을 향해 나아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희생 제물을 바치기 위해 계속해서 성전을 향해 왔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죄씻김의 확신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성직자들은 연제나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일이 끝난 것이 아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속죄의 제사나 희생으로는 이미 엎질러진 죄의 쓴 잔을 완전히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 타인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다. 백성을 위한 모세의 마음은 아름다우나 그 또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할 자격은 없었다. 진정한 대속의 제물은 아무런 죄도 없는 절대적인 순결함과 깨끗함을 간직한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인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에서 유일하게 순결한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셨다. 이제 모세의 기도처럼 확신 없는 기도나 희생 제사는 아무 필요가 없다.

적용

1)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다시 한 번 인식시키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한다.

2) 지은 죄에 대한 진정한 속죄의 방법은 인간의 영역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인식시킨다.

3) 이 세상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인식시킨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만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시킨다.

제 목 : 우리의 반석

본 문 : 출 33:17-23

요 절 : (출33: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은 “(출33: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의 말씀과 함께 동행을 거부하였다. 이 선언은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때 모세를 비롯한 모든 무리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동행과 그의 보호를 간구하였다. “(출33: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결국 그 기도의 응답으로 동행과 관계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호하는 반석이 되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출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처음에는 반석 위에, 그 다음에는 반석 틈에 있게 하셨다. 모세는 그 반석 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을 지나신다.

인간의 삶이란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같다. 세상의 제반 요소들이 인간의 삶을 끊임없는 불안과 고통 속으로 몰고 간다. 인간에게는 평안의 반석이 필요하다. 눈을 들어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셨다. 그러나 죄악된 인생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반석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반석을 절박하게 찾는 모든 무리들에게 지금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곁을 지나가시며 생명의 손길, 구원의 손길, 평안의 손길을 내미신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

인생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얼굴을 볼 수 없다. 본허스콜 경은 망원경으로 하늘을 살펴보다가, 반짝이던 시리우스 별이 갑자기 그의 시야에서 폭발하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도 온전히 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이땅에 보내신,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눈 앞에 부드럽게 변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3. 예수는 우리의 반석이시며 틈새이시다.

모세는 반석 위에 섰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곁을 지나실 때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틈새에 들어가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험한 풍파를 피하기 위해서는 바위의 틈새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방패이며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거할 수 있을까? 모세는 반석 틈새에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영원한 반석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믿고 순종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적용

1) 오늘의 불안정한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반석임을 주지시킨다.

2)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제공하신 유일한 피난처요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게 한다.

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덧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피난처시오 반석이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이 가능함을 주지시킨다.

제 목 : 얼굴의 광채

본 문 : 출 34:27-35

요 절 : (출34:29) 모세가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40일 금식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찬연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담대함이 주어지고 반대로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에게는 어두움과 공포와 절망이 있을 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를 깨닫지 못했다. 최고의 선(善)은 선(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장 나쁜 악의 특성은 악행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최고의 선을 경험하고 만난 사람의 얼굴은 어두운 세상에서 분명히 달라진 광채를 발하게 된다. 그 빛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증거이기도 하다.

1. 얼굴이 신분을 말한다.

40대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거울이기 때뭉이다. 인간의 얼굴은 어버니의 모태에서 이 땅에 태어난 이후로 계속하여 변한다. 선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얼굴은 그에 합당하게 사랑과 자비의 얼굴로, 광채나는 얼굴로 변해 갈 것이고, 악한 마음과 불건전한 정신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추하고 무서운 사단의 얼굴로 변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얼굴을 살피며 살아야 한다. 매일매일 또는 생각날 때마다 자신의 얼굴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사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지를 살펴야 한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얼굴들.

어떻게 하면 좀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모든 여성들의 소망이자 꿈이다. 그러나 사실 아름답고 멋있는 광채나는 얼굴을 갖기를 원하는 마음은 여성분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내재해 있는 마음이다.

인자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져오는 방법은 진한 화장을 통해 가능하나 그것은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마음을 갈고 닦은 사람들에게선 원하는 얼굴을 찾을 수 있다.

모세가 사십 주야를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얼굴에 광채가 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얼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될 때 빛나는 얼굴을 가질 수 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소리와 관심이 사라지는 외로움 속에서, 오직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친분 관계를 통해서만 이러한 은총의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모세가 의식하지 못했던 그 광채는 하나님과 대화할 때 빛났다. 시내산에서 보인 환상들, 시내산에서 외친 이야기들, 시내산에서 맺어진 관계들, 시내산에서 받은 여호와의 말씀들은 그 얼마나 위대한다!

3. 겸손한 마음은 사람의 얼굴을 더욱 빛나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조금 더 우수함을 깨닫게 될 때 곧바로 자란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정말로 본 적이 없으며 자기들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의 죄로부터 사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들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인 마음을 품게 되었음을 느끼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두 때때로 이러한 끔찍한 자아 의식에 빠질 유혹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진정한 선(善)은 이미 주어진 선(善)보다 남아 있는 악(惡)을,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더 의식할 때 이루어진다.

적용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어떤 얼굴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자.

2) 아름다운 얼굴과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만이 가능 함을 인식하자.

3)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삶의 가능성은 오늘 어떤 것들인지 찾아보자.

제 목 :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본 문 : 출 35:30-35

요 절 : (출35:35)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은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공교로운 일을 연구하게 하셨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자신들이 가진 것들 중에서 귀중한 것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기쁜 마음으로 자워하였다. 그들이 성막으로 가져간 물건들은 족장드르이 값진 보석들로부터 가난한 자드의 조가목과 여인들의 염소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그러므로 완성된 건물은 모든 백성의 여러 가지 선사품과 소공예품과 보석이 함하여진 기념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온 마음과 계획과 헌신의 결합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었기 때문이다.

1. 우리가 해야 할 일.

교회와 세상에는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은 마치 거대한 공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고친다거나, 화로에 불을 지핀다거나, 또는 숙련공에게 재료를 가져가는 것 같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일이 크든지 작든지, 또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이든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일이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맡았든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열심히 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일꾼에게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에 어울리는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을 맡기실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가운데 우리가 성공적으로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어려움과 반대 때문에 주춤하여 돌아서 버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점유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민14: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민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민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2. 자원하는 마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다. 억압받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빈손 들고 나오는 그들이 안쓰러워 많은 금은 보화를 안겨주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자원하는 마음을 원하셨다.

하나님은 억지로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사람들은 때때로 어떤 일을 강제적으로 실행한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제적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교회 안의 일이든지 교회 밖의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방법은 자워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3.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드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다양한 물건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쓰여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물건이 금이나 은이든지, 아니면 홍색 자색 청색실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를 위하여 쓰여질 물건들이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의 성소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되길 원하신다. 이 세상ㅇ에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기에 한 분 하나님을 중심으로 온 백성이 한 마음, 한 뜻이 되길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재능과 능력을 당신께 가져오길 원하신다. 그것은 악기 제조자가 연주 음악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고로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 사업의 의로운 도구로 쓰이도록 우리 자신과 우리 몸을 맡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자세이다.

적용.

1) 사람에게는 각자의 할 일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어울리는 충분한 능력을 부여하셨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나 봉사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가장 성공적인 인간의 삶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할 때 가능한 것이다.

제 목 :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본 문 : 출 36:2-7

요 절 : (출36:5)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이스라엘의 적극적인 순종과 전폭적인 헌신이 뚜렷하게 입증되는 서술이다. 그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계속 가져옴으로 성막을 짓는 데 필요한 물품이 더 이상 필요없어서 헌물을 중단시키는, 은혜가 가득한 현장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결같은 방식이었다. 어떤 말로도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과 기준을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세와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불러내시어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때,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세분하여 조심스럽게 행할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언제나 우리에게 공급하신다. 하나님의 손은 크고 하나님의 마음은 넓고 깊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의 죄사함.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깊을까? 과연 인간들의 좁은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크실까?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의심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슴을 찢는 고통 중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또한 과소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넓고 크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를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내어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가장 높은 죄악의 권세들은 용서의 홍수로 덮였으며, 알프스 산처럼 높았던 인간이 저지른 엄청난 반역과 죄악은 그 이상으로 속죄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죄 위에 위치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기도 응답.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시어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에덴 동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주신 것은 아담의 특별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의에 의한 크신 은총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요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넘치도록 풍족하게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것들을 요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 중 하나라도 주시면 감사할 것이라고 남몰래 생각한다. 우리의 이러한 마음은 그를 아프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불신 때문에 많은 것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단지 충분할 정도로만 그치지 않고 충분함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주시고 싶어하신다. 유향 바른 조개들과 만발한 꽃들과 꿈틀거리는 생명과 같은 하나님의 후하신 속성을 보라. 우리가 어떤 것을 그의 뜻에 맞게 믿음으로 구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

3. 매일의 양식.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 곁으로 매일 매일 오신다. 그리고 그가 가진 충만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의 눈을 떠서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뵈올 때, 우리 하나님은 크신 손을 벌려 우리의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하시지도 않고 인색하시지도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고의 현장에는 언제나 모든 것이 넉넉하게 차고 넘친다는 진리는 오늘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적용

1)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기에 모든 것의 소유주이심을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2)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을 통하여 터득해야 한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실 수 있는 부유하심이 있지만 때때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4)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충족함을 누릴 수 있는 신앙생활 속에 우리 모두가 머물러야 한다.

제 목 :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

본 문 : 출 37:1-9

요 절 : (출37:6)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었으니 장이 이 규빗 반,광이 일 규빗 반이며

속죄소는 정금으로 만들었으며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었다. 그리고 양 옆에 금으로 그룹 둘을 만들어 세웠다. 이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였다. 이것이 속죄소였다. 그 아래에 십계명이 놓여 있는데 모세는 처음의 것을 얻자마자 탈선한 백성들을 보고 치솟아 오른 분노를 못 이겨 그것을 깨뜨려버렸다. 그래서 여기에 놓인 것은 새롭게 받은 것이었다. 그 위엔 수세대에 걸쳐 제사장들이 속죄의 날에 피를 뿌렸던 황금 덮개가 덮여 있었다. 이 황금판은 주석가들에 의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예시라는 데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죄만을 위한 속죄양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속죄양으로 예수를 보내셨다.

1. 주님의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고귀한 순종이다.

금속 가운데 정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이 땅에 오시는 예수의 오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구귀한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그 구귀한 순종은 아무런 불순물이 포함되지 않은 정금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실 독생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기에 우주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이 만드신 이 작은 지구에 그것도 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다는 것은 하난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더구나 이 땅에 오시어 인류를 위해 죽으심은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뛰러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2. 예수님의 순종은 피에 대한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속죄의 날에 피를 뿌렸던 황금 덮개가 덮여 있었던 속죄소는 순종의 피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다. 예수님의 삶의 순간 순간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헌신적인 순종의 탐스러운 열매들로 나타났다. 생의 모든 순간이 순종의 고귀한 발자취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며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순종의 정수, 순종의 결정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피흘림이었다. 예수님은 주저함없이 피흘림에 대한 모든 일에 순종하셨다. 자신의 몸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리게 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루게 하셨다. 보혈은 곧 생명이며 생명은 보혈 속에 있다. 예수께서는 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피를 쏟으셨으며, 이로써 가장 숭고한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를 나타내셨다.

3.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은 우리의 접근 수단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불이 타고 있는 고귀한 속죄소에 담대하게 다가갈 수 있다. 예수는 죄인된 인류가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그의 삶 전체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그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거룩한 속죄소에 다가가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속죄함을 받은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삶과 인격을 닮아감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고귀하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거룩한 삶을 성화의 삶으로 구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머리 위에 기쁨의 기름을 주께서 뿌려주신 곳, 모든 것보다도 더 부드러운 곳, 그곳은 피로 물든 속죄소이다.

적용

1) 속죄소를 정금으로 만든 의미를 찾아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자.

2) 예수의 성육신 사역의 최고봉은 십자가에서의 피흘림이며 피흘림만이 죄악된 인류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확인하자.

3)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많은 사역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작은 접근 수단들이다. 이러한 수단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제 목 :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

본 문 : 출 38:8

요 절 : (출38:8)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물두멍은 번제단과 함께 성막 뜰에 비치되는 것이다. 이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다. 우리 거울이 채 발견되기 전인 고대 사회에서는 놋 거울을 사용하였다. 고대 애굽의 거울은 구리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매우 값비싼 것으로서 여인들에게는 소중한 재산 목록이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애굽 때 이것을 가지고 나와 소중히 간수래 오다가 이것을 성전의 거룩한 기물 중의 하나인 물두멍을 만드는 데 바쳤다. 그리고 물두멍은 성막 봉사자의 수족을 씻는 기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값지고 귀한 자신들의 물건을 바친 여인들은 거룩한 회막에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아 봉사하는 수종드는 여인들로 값지게 살고 있었다.

1. 값진 보화를 내놓은 여인들.

여인들의 미를 가꾸는데 필수적인 거울의 진가를 생각해 본다. 현대의 여성들에게 만일 거울이 없다면 그들의 삶에 얼마나 큰 불편을 가져올 것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고대 여인들의 세계에서 거울은 상류층의 여인들만이 갖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애굽에서 금과 은에 버금가는 거울을 구하여 가지고 나와 그 거울을 사용하는 기쁨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의 봉사자들이 사용할 물두멍의 제작에 쓰이는 놋이 필요할 때 그들은 아낌없이 자신들의 소중한 물건을 바쳤다.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필요로 할 때 아낌없이 내놓은 그 여인들의 갸륵한 믿음은 오늘까지 소중한 귀감으로 남아 있다.

2. 봉사자의 수족을 씻는 곳.

하나님 앞에 거룩한 직분을 맡아 소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성막에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러기에 반드시 세속에 물든 손과 발을 씻도록 성막뜰에 물두멍을 만들어 놓았었다.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예배에 임하기 위하여 먼저 예배드리는 처소에 하나로 손발을 씻는다는 것은 충분히 권장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단순한 물을 사용하여 손과 발을 씻는 행위보다 더 소중한 것은 물과 성령으로 씻음받고 거듭나는 삶이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3. 거울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

수종드는 여인들의 손에 있던 거울은 성전의 물두멍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 더 이상 그들의 손에 없다. 그러나 그들의 고운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제단에 비추어보면서 단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이 순단 나의 육신의 얼굴을 보기 위한 거울이 지금 나의 손에 있든지 없든지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은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거울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거울 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추한 모습을 씻을 길이 없다. 그분은 우리의 푯대이시며 우리의 정신적 영적 치료자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거울로 바라볼 때만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으며, 참다운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적용

1) 회막문에서 수종들던 여인들이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드렸듯이 예배 가운데서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2)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현대의 교인들은 얼마나 정숙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나서는가?

3) 우리 삶의 진정한 거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고 매일 매시 거울을 보듯이 그분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제 목 : 여호와께 성결

본 문 : 출 39:30-31

요 절 : (출39:30)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거룩한 패를 정금으로 만들어 거기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쓰게 하셨다. 성결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니다. 그러므로 성결하신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역시 성결해야 한다.

스가랴는 “(슥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아론의 이마에서 거룩함을 상징하던 이 신성한 비문은 일부 귀족뿐 아니라 대중적인 평민의 일과도 함께하게 되었다.

1. 성결의 출발점.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성결하시므로 우리 역시 거룩하고 성결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의 주위는 온갖 더러운 오물로 더럽혀져 있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 어떻게 성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함께 있지망 세상의 죄악을 멀리해야 한다. 원근 각처에서 악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악의 접근에 대해 민감해야 하며 재빨리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속으로 우리를 숨겨야 한다.

악은 모양이라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은 우는 사자처럼 강하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자라는 독초처럼 빠르게 그 세력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성결의 제1보는 악을 멀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는 것이다.

2. 성결의 제2보는 모든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과 요구에 매우 민감했다. 그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베레갸의 아들 스가랴처럼 그의 제단에서 죽기를 원했다. 우리 모두가 향을 바치고 인간을 축복하는 영적인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으로 여길 수 있다. 늘 거룩한 땅을 밟으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먹고 마시고 행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다. 39장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모세에게 명하셨을 때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기억하면서 이것이 우리 인생을 이끄는 법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성결의 제3보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는 것.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엄밀히 말하면 죄인은 성결하게 될 수 없다. 인간의 어떤 노력과 의지로도 한 번 죄인된 존재를 성결한 존재로 회복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의 고귀하고 성결한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 죄인들에게 성결의 길을 여셨다. 그러기에 성결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 공로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우리 죄인된 인간의 죄를 속죄할 길을 열어놓지 않으셨다.

성결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온전히 가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커가면 커갈수록 우리는 더욱 더 성결한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적용.

1) 하나님은 당신이 성결하시므로 성도들 역시 성결하기를 원하신다.

2) 성결의 제1보로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악의 속성은 강하고 빠르게 퍼지는 것이기에 그 앞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3) 성결의 제2보는 악을 단순히 피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우리 일상 생활의 모든 삶을 거룩하고 성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성결의 완성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할 때만이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제 목 :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

본 문 : 출 40:34-38

요 절 : (출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낮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었다. 또한 이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을 친히 인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하는 불이 있었다. 아마도 이 불은 항상 있었으나 어둠이 생긴 후에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불은 언제나 성령의 임무와 관련되어진다.

이사야 4장 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마치 하나님의 성막에 내리셨듯이 장차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실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1.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구름을 통해 사막의 강렬한 태양 빛으로부터 보호하셨다. 모든 식물을 목말라 죽게 하는 사막의 강렬한 태양의 열기도 우리 주님의 백성들을 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크고 넓으신 손길로 단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구름기둥 아래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안전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모일 때에만 행군해야 하며 하나님의 덮개 밑에서 쉼을 얻고 모든 삶의 신성함을 깨달아야 한다.

2. 성령의 임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다시 하늘 나라로 가시며 성령의 도래를 약속하셨다. 그리고 예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재하셨다. 성령은 그후 하늘로 가시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남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그들을 인도해 가신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듯이 성령은 오늘도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또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의 집을 뜻한다. 성령은 성도의 가정에도 늘 함께 하신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가저잉 성전이 되고 사랑하는 가족마다 돌아가면서 성직자가 된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은총이 될 것인가! 이런 가정으 극히 드물지만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자들은 이것을 이상으로 삼도록 하자.

3. 성령은 모든 예배와 성도의 삶을 인도하시고 채우신다.

옛날 구름의 움직인이 장막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결정했듯이 오순절로 시작된 교회에서 성령은 인도자와 감독자와 실행에 옮기시는 분이 되셨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오늘의 성령시대를 전적으로 이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피조물된 인생들의 가장 온전한 모습과 삶의 방향을 분명히 아신다. 건축자가 그가 지은 건물의 구조를 가장 잘 알 듯이 우리을 만드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장 잘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개인적인 일이든지 교회의 일이든지 성령의 뜻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시작하심과 가르치심과 무한한 복 주심을 기다리며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하면 영광과 보호하심이 낮의 구름 기둥으로 밤의 불기둥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적용

1) 죽음의 빛이 내리쬐는 사막의 백성들을 구름으로 보호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셨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은 십자가의 그늘 뿐이다.

2) 오늘의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그의 성도들을 구름과 불로 인도하신다.

3)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미래를 온전히 인도하시는 분임을 확인하고, 개인이나 교회의 삶 전체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한다.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수기강해  (0) 2011.10.31
하나님의 손에 상처입은 자  (0) 2011.10.31
창세기요약강해  (0) 2011.10.31
신명기요약강해  (0) 2011.10.31
민수기요약강해  (0) 2011.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