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민수기강해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09

 

제 목 : 영적 군사의 자격

본 문 : 민 1:1-3

요 절 : (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 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에 관계된 내용을 기재한 글인 까닭에 민수기라고 부른다. 본 서에는 시내 산을 출발하여 약 속의 땅 가나안 바로 직전까지의 38년 간의 광야 여정이 소 개되고 있다.

그 중 본 장에서는 광야에서의 첫 번때 인구 조사가 실시되는 장면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약 1년 간 머물렀던 시내 산을 떠나기 직전에 하나님 께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계수하여 군대로 개편할 것을 명하고 있다.(출애굽 제2년 2월 1일) 성도는 역적인 군사다. 이에 본문이 제시하는 몇 가지 자격이 구비되어야 한다.

1. 하나님께 속한 자라야 한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싸움에 나갈 자를 계수하라고 명령하시는데, 첫 번째 자격은 “이스라 엘 자손의 모든 회중”이다. 즉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인정된 자들만이 싸움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이며 하 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웅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믿었기에 거인 골리앗을 물매와 돌로 물리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은 반드시 하나님게 속한 자 라야 하는 것이다.

2. 강건한 자라야 한다.

본문 2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회중 중에서 “각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고 명 하신다. 여자가 아닌 남자란 곧 강건한 자만이 전쟁에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영 적으로 강건한 사람만이 전쟁에 나가 승리할 수 있고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대장부 갈렙은 그가 85세 때 “(수14: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 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이라 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했 으며 또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엡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 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노년에 주께서 자기를 강건하게 하셨 다고 고백하고 있다. “(딤후4: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 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 니라.” 오늘날에도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영육의 강전함이 부단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3. 성숙한 자라야 한다.

본분 3절에 보면 전쟁에 나갈 자의 자격으로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 하라고 정하고 있다. 20세 이상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년이 된 나 이로 미숙하지 않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숙하지 못한 자는 결코 거룩한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 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는”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혹시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하는 데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성숙되지 않아 종종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미숙한 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실 수 없다.

적용

1) 나는 과연 영적인 전쟁에 나가 승리하기 위한 만반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가?

2)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영적 군사가 될 자격이 있다면 과연 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 신자인가?

3) 나는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강건한가?

4) 삶의 터전에서, 교회 생활에서 나에게 과연 다른 사람들게게 피해를 입히는 미숙한 신자 의 모습은 없는가?

제 목 : 성막 중심의 삶

본 문 : 민 2:1-34

요 절 : (민2: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 으로 대하여 치라

본 장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12지파의 진 배치와 광야 행진을 위한 행군순서가 마련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성막 중심의 진 배치를 명하신 사실과 행진 및 숙영할 때에 각 지파가 위치할 장소에 대한 계시로, 행진 때 중심이 될 유다, 르우벤, 에브라임, 단 지파 의 진기에 각각 소속된 지파들이다. 명단과 그들의 장정 수가 소개되고, 그들보다 성막에 근 접하여 위치할 레위 지파의 배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 장정의 총 수와 레위 지파의 특별한 위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성막 중심의 삶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본문 2절에서는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고 했다. 즉 이스라엘의 삶의 거처인 陣은 하 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막을 중심으로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배치를 통해 하나 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강조하신 것이다.

단지 숙영 때문만 아니라 행진시에도 성막 중심의 진 배치를 함으로써 어느 환경과 상황 가 운데에서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보다 더 행복하고 안정된 삶은 없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진영 배치는 죄와 불의가 가득 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임마누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소망있는 일인가 일깨워 주는 것이다.

2. 상호 협력의 삶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 혼자만 살아가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무단히 필요하다. 성막을 중심으로 한 진 배열을 보면 바로 이 협력 정신이 강하게 들 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 4방향의 진영을 각각 야곱의 아내와 첩들의 후손 지파를 고 려하여 배치하셨다.

즉 레아의 아들들인 유다, 잇사갈, 스블롬을 동쪽 진영에, 라헬의 아들들인 요셉,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을 서쪽 진영에, 레아와 그의 몸종 실바의 후손들인 르우벤, 시므온, 갓을 남쪽 진영에, 레아의 몸종인 실바와 빌하의 후손들인 단, 아셀, 납달리를 북쪽 진영에 배치시켰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혹 발생할지도 모를 감정적인 분규를 미연에 방지하고 각 지파들로 하여금 상호 협력하고 하나되는 일에 힘쓰도록 조치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는 늘 협력하는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3. 질서와 조화의 삶이다.

20세 이상 전투 가능한 수효는 603,550명이었고 그에 기준하여 여자와 노약자들을 합친다면 무려 2-3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큰 무리가 함께 숙영하고 이동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질서해지고 혼란해질 수 있는 대집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질서 있게 진행시켜나갈 수 있도록 특별한 지침을 마련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각 방향으 로 인구 수를 균형있게 배치함으로써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지 않도록 조치하셨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많은 지파로 하여금 적은 지파의 약함을 보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조화 와 균형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질서있는 신앙 생활과 서로의 약함을 보완해 주는 원만하고 조화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적용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가나안인 하 늘 나라를 늘 소망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2) 이스라엘이 성막 중심으로 진을 쳤듯이 과연 우리는 심령과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 을 살아가고 있는가?

3) 교회생활에서 서로 시기하며 경쟁적인 삶을 사는가? 아니면 서로 돕고 상부 상조하는 사 역을 하는가?

4) 교회와 직장의 삶 가운데서 약한 자를 돕고 짐을 서로 지는 조화로운 인간 관계를 유지 하고 있는가?

제 목 : 올바른 섬김

본 문 : 민 3:1-4

요 절 : (민3: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여호와 앞 에서 죽었고 무자하였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 아비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1장과 2장에서는 인구 조사와 숙영 및 행진시의 진 배치를 소개한 뒤, 이러서 군사로서의 조 직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성막을 위해 봉사할 특별한 존 재로 부름받은 레위 지파의 직무와 그들의 인구 수를 본 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한편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과 백성사이의 중보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본 문에서는 아론의 아들인 아답과 아비후의 실수를 통해 올바른 섬김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 섬겨야 한다.

본문 4절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정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자신의 지혜와 열심히 아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방법과 그 분의 의도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을 강조한 귀한 말씀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모든 제도와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하나님을 섬 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과 의도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방법을 취한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 님 앞에서 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하나님 말씀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나 열심히 아닌 오직 하나님 중심과 하 나님 의도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2. 직분을 말각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 3절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기름을 바르고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은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의 일차적인 원인은 적어도 그들이 거룩한 직분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같은 사건을 취급한 레위기 10장에 보면 그들의 죽음을 다룬 기사 바로 다음에,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고 사망을 면하라는 명령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아마도 그들은 그 당시 직분을 망각하고 술에 취해 회막에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다. 실로 직분을 망각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주엄한 심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중요한 직분을 맡은 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귀히 여기고 성실히 수행해야 하겠다.

3. 신전 의식을 가져야 한다.

본문 4절에 보면 아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고 말하며 “여호와 앞”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전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재앙을 받은 것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막에서 일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신전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핍박의 물결이 휘몰아치던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도들이 강한 신전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예배와 교제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러한 정신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로 즉사해 버리고 말았다.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전 의식은 당연히 필요하다.

적용

1)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봉사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상사의 의도와 방법대로 나는 일을 잘하고 있는가?

2) 나답과 아비후는 직분을 망각함으로 인해 죽었다. 나는 주어진 직분을 귀히 여기고 아름 다운 봉사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가?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혹시 하나님의 눈을 속이려고 한 적은 없는가?

4)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인침 받은 레위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올바른 봉 사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제 목 : 봉사의 원칙

본 문 : 민 4:1-33

요 절 : (민4:3)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 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본 장은 회막 봉사의 일을 좀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질서있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 레위의 세 자손, 곧 게르손 자손과 고핫 자손과 므라리 자손에게 각자의 업무 분담을 구체적 으로 지시하고 있다. 당시는 광야 여행 시대였기 때문에 성막은 조입식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에는 성막을 각기 분해하여 이동하는 매우 조심스러운 작업이 따랐다. 본문은 바로 성막 이동시 여러 문제들을 다룬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성막의 봉사자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제사장과 레인인들에게 맡기셨는데, 제사장들은 성물을 덮고 싸는 일을 맡았고 레위인들은 그것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이에 성막 일을 통해 효율적인 봉사의 원칙을 살펴보자.

1. 일할 만한 자를 사용하신다.

본문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일할 수 있는 자를 계수하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30세를 하한선으로 둔 것은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미숙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요, 50세를 상한선으로 둔 것은 너무나 쇠약하여 성막 일을 하는데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 배려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성막 일을 일할 만한 자에게 맡기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로 나이 어린 자나 연로한 자를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셧으며 제자들도 정열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 일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일할 만한 자를 찾아서 일하게 하신다.

2. 업무 분담을 확실하게 하신다.

본문을 보면 레위 지파의 세 자손, 즉 고핫 자손,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들에게 고유의 임무와 업무 분담을 확실하게 해주신 것을 알 수 있다. 고핫 자손들에게는 성막안의 주요 기구들을 운반하게 하고, 게르손 후손들에게는 성막의 모든 휘장과 덮게와 그 줄들을 운반하게 하셨고, 므라리 후손들에게는 성막의 기둥과 받침과 말뚝을 운반하게 하셨다.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역할과 임무를 구체적으로 정하시고 그들을 조화롭게 활용하심으로 당신의 거룩한 일을 수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을 부르시고 유대인이 사도로 베드로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분명하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월권해서는 안 된다.

일이 무질서해지고 혼란해지는 경우는 대체로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월권하기 때문이다. 본문이 이것을 말해준다. 고핫 자손이 맡은 성막 일은 성막의 근간을 이루는 지성물들의 운반이다. 이른다 6대 지성물이라 할 수 있는 언약궤, 분향단, 등대, 진설병 상, 물두멍, 번제단과 그것에 따를 부속물들을 운반하는 일이다. “(민4:4) 고핫 자손의 회막 안 지성물에 대하여 할 일은 이러하니라 (민4:5)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간 막는 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민4:6)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민4:7) 또 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민4:8) 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민4:9) 또 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대와 그 등잔들과 그 불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민4:10) 등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민4:11) 또 금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민4:12) 또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 쓰는 모든 기명을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민4:13) 또 단의 재를 버리고 그 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민4:14) 봉사하는 데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민4:15)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그런데 이때 주의할 점이 있다. 고핫 자손들은 직접 성물을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성물을 싸고 덮는 일은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들의 몫이었다. 오직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만이 성물을 만질 수 있고 레위인들인 고핫 자손들은 단지 지성물을 운반하는 일만 해야지 절대로 월권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울도 사무엘이 해야 할 일을 월권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을 기억해 보라. 주님 일도 각자 자기 일에 충성해야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적용

1)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되어 있는가? 아니면 좀더 준비해야 하 는 과정에 있는가?

2) 나는 과연 내가 맡은 일을 확실하게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분명하게 업무 분담을 시키고 있는가?

3) 교회 봉사에 있어서 남의 일을 월권함으로써 오해를 사고 있지는 않은가?

4) 이스라엘 광야 행진시 성막 일을 통해 효율적인 봉사의 일을 하고 있는가?

제 목 : 양심 보상의 원리

본 문 : 민 5:5-10

요 절 : (민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항상 거룩함을 요청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절대 거룩한 존재기 때문에 당신과 교제를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 장은 신정 국가 체제를 완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되악된 요소를 제거하고 성결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다.특히 본문은 이웃에 대한 손상을 정당하게 배상함으로써 타인의 죄를 철저히 갚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는 바로 “양심 청결” 또는 “양심 보상”이라는 말로,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 앞에 떳떳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조치다.

1. 지은 죄는 반드시 자복해야 한다.

본문 7절에 보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라고 언급하고 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흉이다. 그것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생괸 허물일지라도 자신이 이웃에게 죄를 범했다면 마땅히 그 이웃과 하나님께 동일하게 자복해야 한다. 자복이란 지은 죄에 대한 공적인 고백인데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만 시인이 아니라 범죄한 자의 전인격에서 나오는 진실한 고백이다.예수님께서도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마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을 당할지라도 이웃에게 가서 자복해야지 만일 이것이 잘 안 될 때에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위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2. 철저히 갚아야 한다.

본문 7절에 보면 “(민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철저히 배상해야 함을 강조한 말씀이다. 즉 지은 죄에 대한 구체적인 배상이 있어야 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해 잘못한 일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졌다. 즉 양심 보상이 철저히 되었다는 말이다. 회개란 회(悔)와 개(改)의 합성어로서 감정적인 뉘우침뿐만 아니라 의지적인 행동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질적인 것이라면 물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라면 정신적으로 반드시 보산해야 하는 것이다.

3. 가능한 방법으로 반드시 갚아야 한다.

본문 8절에 보면 “(민5:8)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족이 없거든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수양 외에 돌릴 것이니라.”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배상은 면제받을 수 없고 가능한 방법으로 반드시 배상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으나 그가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미 돌아가신 분들게 어떻게 배상할 수 없어서 복음의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끝내는 순교하기에 이른다. 아무튼 가능한 방법으로 이웃에게 빚진 자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추호도 부끄러움 없이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적용

1)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우리의 삶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회개하고 자복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2)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에게 죄를 범하고는 진심으로 자복했는지 돌이켜보자.

3) 삭개오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것처럼 이웃에게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철저 히 배상했는가?

4) 양심 보상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과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 왔는가?

제 목 : 제사장의 축복 기도

본 문 : 민 6:22-27

요 절 : (민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며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거룩한 민족이다. 이러한 성민적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 바로 본 장에 나와 있는 나실인과 제사장 제도다. 특히 본문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권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베푸는 이른바 축도권에 대한 내용이다.본 축도는 그 내용이 매우 짜임새 있고 은혜스러우며 거칠고 험난한 광야 여정에서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이스라엘에게 주었음에 틀림없다. 제사장의 축복 기도 내용을 살펴보자.

1. 보호의 복.

24절에 “(민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험악하고 험난한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던 그 하나님께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보호와 안전으로 돕기를 원하시는 분이다.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눈동자같이 지키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고 체험한다면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2. 은혜의 복.

본문 25절에서 “(민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신다. 실로 얼굴은 그 사람의 전인격을 대변하는 것으로 “얼굴을 비췬다”는 것은 아무런 사심 없이 온 마음을 그에게로 향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런 사심 없이 백성들에게 다가와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은혜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호의와 사랑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은혜를 사모하는 빈 마음이 과연 나에게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겠다.

3. 평강의 복.

본문 26절에서는 “(민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말씀하신다. 평강이란 “온전하다” “완성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제거되고 온전한 관계가 성립되는 상태를 말한다.이러한 온전함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평강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강이란 무조건 문제 없는 상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그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평안함이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평강을 하나님께서는 주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적용

1) 우리는 과연 세상의 판단과 가치관에 매도된 그런 복을 간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 니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을 간구하고 있는가?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듯 우리들을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나는 과연 이것을 실 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3)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갈구하는가?

4) 이 세상이 주는 평강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구별하고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제 목 :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

본 문 : 민 7:1-11

요 절 : (민7:1)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본 장에서는 이전 장에 이어 속건제 및 화목제의 규례가 언급되어 있으며, 이 제사에서 제사장의 몫과 그 제물을 먹는 규례가 언급되어 있다. 특히 제사의 종류와 방법에 대해 세밀한 부분까지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매우 놀랍다.본문은 인구 조사가 종결된 출애급 제 2년 1월 1일로부터 약 한 달 수인 제2년 2월 8일경에 있었던 성막 봉헌식에 대한 내용이다. 특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1. 기름을 발라 구별했다.

기름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성별의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의 왕들을 세울 때는 반드시 기름 뿔을 취하여 그 머리 위에 붓고 선지자가 기도하여 왕으로 세웠다. 제사장을 세울 때에도 역시 기름을 부어 세웠다. 여호와의 장막 속에 있는 단이나 기물들 모든 것에 기름을 발라 성별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은 거룩하게 구별해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성전과 같은 존재이므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 자원함으로 드렸다.

본문 2절을 보면 각 종족의 두령들을 강제적인 방법이 아닌 자원하는 심정으로 예물을 드린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온 우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예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예물 속에 담겨진 인간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그와 더욱 돈독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셔서 참다운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3. 지정된 방법으로 드렸다.

본문 “(민7: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족장들은 하루 한 사람씩 단의 봉헌 예물을 드릴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내 임의대로 드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으로 드려야 한다. 즉 성경에 기록된 예물의 종류와 방법 및 절기에 따라 드려야 한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실 정도로 광대하시지만 또한 우리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세말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기 때문이다.

적용

1)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무엇인들 하나 님께 바치기를 주저하겠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께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단순히 물질만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시간, 지식, 건강 등 모두 예물이 될 수 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된 삶을 살기 위해 거룩한 발버둥을 치고 있는가?

4) 예물을 드리는 일에도 봉사를 하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자를 기뻐하시는데 나는 과연 자원함이 있는가? 아니면 억지로 하는가?

제 목 : 레위인의 봉사 자격

본 문 : 민 8:5-26

요 절 : (민8: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본 장에서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성별되는 위임식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위임식 제사는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위임식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일반 제사의 방법과절차를 사용했던 복합적인 제사였다.

특히 본 장의 위임식과 더불어 아론과 그 아들들이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림으로써 비로소 제사장의 임무에 임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과 백성들의 교제가 세로운 방법으로 시작된 것을 타나내주고 있다.

특히 본문은 레위인들을 정결과 선택 목적 및 봉사 연한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 레위인의 봉사 자격에 대해 살펴본다.

1. 정결케 되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요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 봉사해야 할 레위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허물과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레위인들은 전신을 삭도로 밀어야만 하고, 의복도 빨아야 하며, 규정된 제사만 드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레위인도 정결케 되어야 한다. 특히 도덕적 혹은 육체적으로 성결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를 대상으로 하는 신앙적인 성결이 우선 요구되고 있다. “(욥17: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 손이 깨끗한 자만이 점점 힘을 얻는가고 한 것처럼 영적으로 깨끗게 된 자만이 하나님의 봉사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 소명을 받아야만 한다.

레위인은 스스로의 인격이나 자격을 온전히 갖추어 하나님 일을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레위인들은 애굽에서 처음 난 자를 하나님께서 구속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당신의 소유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심으로써 레위인들은 성막에서 봉사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주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이 인간적인 열심히나 야망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3. 성숙해야 한다.

레위인이라고 해서 다 성막에 나가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 중에서도 25-50세까지만 봉사할 수 있다는 나이 제한을 두셨다. “(민4:35)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 봉사에 입참하여 일할 만한 모든 자” 그러므로 25세에 부름을 받아서 5년간 수습 봉사자로 훈련받은 후 30세에 정식으로 봉사자의 반열에 설 수 있다.

이러한 제한을 두신 이유는 나이가 너무 어려 미숙함으로 인해 미연에 실수를 방지하기 위함이며, 또 너무 연로해서 힘이 모자라 있을 수 있는 실수를 막기 위함이다. “(삼하6: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하나님의 봉사의 일을 할 사람은 영육간에 성숙이 먼저 요구된다.

적용.

1) 영적인 레위인이란 넓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며 좁게는 목회자로 국한될 수 있겠다.

2) 하나님의 봉사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성결한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3) 목회자 후보생이나 목회자가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는 매우 큰일이다.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4)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미숙해서 실수를 한 적은 없는가? 성숙함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자.

제 목 : 여호와의 명을 좇아

본 문 : 민 9:19-20

요 절 : (민9:20)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

본 장은 시간 순서로 즉 시내 산에서 출발하여 약 38년 후 모압 평지까지 광야 여정이 소개된 순서로 볼 때 본 서의 내용 가운데 가장 앞선 부분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출발해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직전의 내용이다.

존 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시내 광야에서 첫 번째로 맞는 유월절 준수 장면이 소개되고, 사고로 인해 유월절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구제 곧 특별법이 언급되며, 이어 광야 여정 내내 이스라엘의 앞길을 인도한 불과 구름 기둥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이 소개된다. 특히 분문은 광야 행진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머물 때와 가야 할 때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라.

본문에 “여호와의 명을 좇아”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명령은 말씀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행진도, 머무는 것도, 진을 치는 것도, 전쟁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한 것이다.

요한복음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체계는 명령이다. 쉬고 싶어도 명령이 떨어지야 하며, 행군도 명령이 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군대 또한 마찬가지다. 그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여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머무를 때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장막에 머물면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때에 따라서는 한 달 또는 1년 이상 있을 때도 있었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낮의 뜨거운 열기와 밤중의 추위, 끊임없이 괴롭히는 해충과 불편한 환경을 견뎌야 했다. 날마다 성막의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대했지만 오늘도 여전히 구름이 머물러 있음을 보았을 때 그들은 초조하고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야 햇다.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무서운 고독 때문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도, 진퇴 양난의 늪에 빠졌을 때에도 생명이 위협받는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 없이 “기다리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3. 머물를 때가 있는가 하면 가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가야 할 때는 언제인가? 물론 구름이 떠올랐을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구름이 떠오른 성막은 이스라엘 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 방향을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민2:17)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과 함께 모든 진의 중앙에 있어 진행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그 위치에서 그 기를 따라 앞으로 행할지니라.” 늑 가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길도 없는 광야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약속의 땅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본문에서는 문제의 해결을 이렇게 밝혀준다. “(민9:20)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떠오르면 떠나는데 반드시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받은 후에 진행했다. 오늘날 성막의 구름과 하나님의 명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 구름은 성경 말씀이고 하나님의 명은 네가 골방에서 엎드려 있을 때 나타난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시편 “(시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적용

1) 우리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를 소망하고 광야 같은 이 땅의 인생 길을 가는 나그네요 객이다.

2) 인도자 없이는 도무지 갈 수 없는 험하고 거친 광야 길을 가는데 나는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고 있는가? 참 목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3) 우리 삶 속에서 일어서고 앚고 하는 모든 삶의 문제를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행하고 있는가?

4) “기다리라”는 명령을 하나님께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신다. 이때 과연 나의 행동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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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일꾼 초청의 원리

본 문 : 민 10:29-32

요 절 : (민10:31) 모세가 가로되 청컨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 것을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1년 동안이나 시내 광야에서 머무른 후 비로소 바란 광야로 향하는 대이동을 위한 행군을 재개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행군은 회막 위에 구름이 떠오르면 제사장이 나팔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군 대열 앞에는 항상 여호와의 언약궤가 위치했다.

본 장에서는 위와 같은 사실들을 열거해 광야 여행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본문은 모세가 광야 지리에 밝은 그의 처남 호밥에게 광야의 길 안내를 부탁하는 장면이다. 일꾼을 초청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몇 가지 원리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1. 정중함과 간절함으로 해야 한다.

본문 29절에 보면 모세가 “(민10:29)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라고 제의하나 호밥은 “(민10:30)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라고 거절한다. 그러나 모세는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호밥은 광야 길에 매우 눈이 밝은 사람으로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모세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같청한다. “(민10:31) 모세가 가로되 청컨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 것을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고 예의를 갖추어 초청하고 있다.

이처럼 일꾼을 얻는 데는 정중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정중함은 있는데 간절함이 없어도 안 되고, 간절함은 있는데 정중함이 없어도 안 된다. 실로 인격을 존중해 주며 간절하게 요청하면 일꾼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2. 능력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면서 일을 해주는 법이다. 누구든지 인정을 받으면 그 안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능려과 지혜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일꾼을 부릴 줄 아는 지혜인 것이다.

보문 31절에 보면 모세가 호밥에게 “우리의 눈이 되리라”고 그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해준다. 호밥은 광야에서 자라고 광야에서 익숙하여 광야 형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안내할 수 있는 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꾼을 처청해서 함께 동역하기를 원하면 상대방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상대방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지 않고 일꾼으로 부르는 것은 분명히 자기 기만이며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3. 상응하는 보답을 약속하고 실행해야 한다.

모세는 “(민10:32)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라고 신실한 약속을 한다. 우리가 일꾼을 초청해 동역하고자 할 때 그의 노력에 준하는 넉넉한 보상을 마련하고 이를 준행해야 한다. 신실한 보답은 초청하는 자와 처청하는 자 사이에 아름다운 매개체가 되어 더욱 좋은 관계로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 땅에서 당신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에 대해 신실하게 상급으로 도답해주시는 분임을 믿고 주의 나라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용.

1) 교회 사역을 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꾼을 초청하는 일에 간절하고 정중하게 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강제적으로 명령하고 있는가?

2) 봉사의 일을 하면서 상대방의 능력과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지 돌이켜보자.

3) 일꾼에게 수고에 상응하는 보답과 칭찬을 하고 있는가?

4) 우리는 하늘의 상급을 얻기 위해 선한 싸움을 얼마나 잘 싸우고 있는가?

제 목 : 앞을 바라보고 위를 바라보자

본 문 : 민 11:1-15

요 절 : (민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본 장에서는 성막의 건립과 제사 제도의 확립 직후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와 만나를 공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으로 불평하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본문은 시내 산을 떠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로 향하는 여정 동안 생긴 일을 다루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불행하게도 백성들의 원망과 모세의 한탄으로 이루어진 불신앙적 사건이다. 즉 백성들은 고기를 달라고 원망하자 그러한 모습에 모세는 낙담하고 실망해 도무지 이 백성을 이끌 자신이 없다고 한탄하는 장면이다.

1. 성도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아야 한다.

1절에 보면 “(민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시절을 돌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이며 억지며 거짓이다.

어쩌다 얻어먹은 굴욕의 음식 이외에 노예에게 어찌 풍족함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당장 광야에서 역경과 고통을 당하자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애굽의 노예 시절을 과장되게 미화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욕되게 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애굽에서 심한 고역과 압제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가나안 땅을 소망했던가?

따라서 그들은 출애굽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오직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망의 가나안을 바라보는 대신 번번이 뒤에 있는 애굽을 바라보며 급기야 이것이 실패와 원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면서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천성문만을 향해 전진하자.

2. 지도자는 아래를 바라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하며 이것이 직접적으로 모세에게 화살로 다가오니 모세는 크게 낙담하고 실의에 빠진다. 왜 자기에게 그 백성을 맡겨주었느냐고 불평하며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으니 나로 하여금 곤고함을 보지 않도록 죽여달라고 한다. 물론 모세의 곤고함도 이해가 간다. “(민11:11)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민11: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11: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민11: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민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땅을 내려다 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기를 바라셨다. 즉 백성들의 요동치는 울음과 불평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홍해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듯이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오늘날도 주의 사역을 하다 보면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아 모세처럼 주의 종은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그때가 위기인 줄 알고 원망 많고 불평 많은 이 땅의 불신앙적 기류에 휩싸이지 말고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굳세게 바라보며 주어진 목회의 길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적용

1)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을 망각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며 물질과 세상의 종이 되는 것을 심히 곤고해 하신다는 사실을 알자.

2) 성도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되었던 적은 없었는가?

3) 지도자로서 풍랑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낙심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힘을 얻자.

4) 과거에 우리에게 행하셨던 능력과 역사의 주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믿음으로 내일을 열자.

제 목 : 지도자 비방의 원인

본 문 : 민 12:1-10

요 절 : (민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층 인사라 볼 수 있는 여 선지자면서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과 원망이 소개된다. 모세가 이방 여자와 결혼한 사실을 비방했지만 실상 그 비방의 근본적 원인은 모세의 우월성에 대한 인간적 시기였으며 모세의 독주에 대한 비겁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세를 비방한 죄에 대한 징벌로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다. 이러한 미리암의 질투는 모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세를 지도자로 임명한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사랑이 없으므로 문제가 되었다.

모세를 비롯하여 그의 형인 아론과 누이인 미리암은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즉 아론은 초대 제사장으로서 성막을 돌보는 최고 어른이었고, 미리암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여 선지자였다. 모두 중요하고 고상한 지위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중심으로 아론과 미리암을 협조자로 삼아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이같은 질서 체계를 아론과 미리암은 시기하며 질투했다. 미리암이 주동이 되어 모세의 이방 결혼을 문제 삼아 그에게 진정한 충고나 의견을 개진한 것이 아니라 그를 비방하고 나섰다. “(민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체계를 무시한 것이며 이는 그 마음속에 진정으로 지도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리암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 “(민12: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사랑 없이 저지르는 시기와 비방의 종말은 비극이다. 사랑 없이 지도자의 행하는 일을 보면 만사가 모순과 실수로 보이나 사랑이 있으면 만사가 좋아 보이는 법이다.

2. 마음속에 질투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상대방을 평가 절하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그들의 치졸한 질투심이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모세의 충성과 온유함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과 은밀하게 교제하는 것을 질투한 것이다. 더군다나 모세가 자기들의 동생이라는 데에 더욱 시기가 난 것이다. 그런데 마침 모세의 실수가 보이자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 포문을 쏘아댄 것이었다. 마음속에 심한 질투와 추악한 시기심이 있으면 언젠가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도 이렇지 않은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지도자는 인정해야 한다.

인생사에서 상대방이 월등히 탁월하지 않는데도 상사에게 인정을 받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불평과 원망이 생겨난다. 미리암과 아론도 자신들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와 교제한 것과 같이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항변한다. 이 말을 통해 자기들이 모세와 동등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모세를 비방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상대방보다 못할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편만 들어주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존중하지도 않고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면 생각하기에 비방하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를 대할 때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낫기에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이 필요한 것이다.

적용

1) 우리는 세상과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기에 신자의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달아야 한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2) 우리는 모임에 있어서 분란케 하는 자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존재인가?

3) 혹시 지도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적은 없는가?

4) 마음속에 심한 경쟁 의식으로 상대 동역자나 이웃을 비방하고 질투를 보내지는 않았는가?

제 목 : 불신앙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본 문 : 민 13:21-33

요 절 : (민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본 장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40년 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가나안 땅 탐지를 위해 파견된 열두 정탐꾼들이 40일 동안의 가나안 탐지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해 모세와 백성들 앞에서 탐지 보고를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열두 정탐꾼들의 보고는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보고를 하는 반면, 나머지 10인은 주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한다.

1. 불신앙적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들.

12명의 정탐꾼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인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본문을 보면 이들은 3가지 불신앙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현대에도 동시에 적용된다.

첫째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열 정탐꿈은 탐지한 땅을 악평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왜곡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시각이 항상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민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둘째는 보이는 현상만 보았다. 열 정탐꾼들은 그 땅 주민들을 묘사하면서 모두 신장이 장대한 자며 아낙 자손의 대장부라고 말한다. 이처럼 부정적인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크게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힘, 곧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미리 겁을 먹는다. 열 정탐꾼들은 자기들을 스스로 메뚜기 같다하여 그들이 보기에도 그럴 것이라고 미리 겁먹는 장면이 나온다. “(민13: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처럼 부정적인 사람들은 싸워 보기도 전에 미리 겁부터 먹는다. 그들은 늘상 싸움은 하나마나 질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이고 육신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2. 이것이 바로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의 최후요 결과다.

신앙적인 보고를 한 갈렙과 여호수아는 10명의 정탐꾼들이 “그러나”하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할 때 여호수아는 (본문에서 갈렙만 등장하지만 다음장에는 여호수아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면서 신앙적인 보고를 한다. 세가지 유형의 긍정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첫째, 믿음의 보고다. 10인이 “(민13: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라고 주장한 반면 두 사람은 “(민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민13: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한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긍정적으로 믿음의 보고를 하고 있다.

둘째, 소망의 보고를 한다. 열 명의 정탐꾼이 갈 수 없다고 절망적인 보고를 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오쳤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포도송이를 견본으로 보이면서 “우리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소망을 복돋워주고 있다.

셋째, 사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자기 중심으로 살았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하여 옷을 찟으며 하나님의 계심을 선포했고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그 말대로 가나안 백성들을 치고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으로 불신앙과 믿음의 삶은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를 가리는 시금석이 된다.

적용

1) 우리는 매일 매순간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자며 나그네인 것을 인정하고 실감하면서 살아가는가?

2)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소유해야 할 가장 큰 재산은 물질도, 지식도, 배경도 아닌 천국으로 인도해 주어야 할 믿음인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는가?

3)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신앙적이며 부정적인 사고 방식 가운데 휩사이지는 않았는가?

4)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정신을 갖고 긍정적이며 신앙적인 삶의 모범을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제 목 : 불신앙의 삯과 소수

본 문 : 민 14:1-38

요 절 : (민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13장에서 가나안 정탐을 하고 온 10명의 불신앙적 보고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모두 상심해 하나님과 모세를 더욱 원망하자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가 소개된다. 특히 본문은 믿음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러 말로 백성들을 격려하지만 이미 불신앙의 늪에 빠진 백성들은 애굽 귀환을 주장하며 출애굽 사역을 멸시한다. “(민14: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민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민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둘ㅕ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 하니.” 이에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생활이라는 징계를 내렸고, 그 죄로 인해 광야에서 죽어가야 하는 비극적인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1. 불신앙의 삯은 죽음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복지까지 인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땅을 성취하기 바로 직전에 그들은 가나안 성읍이 견고하고, 그 땅 원주민에 비해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고 하면서 정복을 포기했다.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했고 모세에게 불평했다. 사실 지금까지 인도했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 소치다. 이같은 백성의 패역함을 보다 못한 하나님은 마침내 징계를 내렸다. 그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꾼들은 재앙으로 즉시 멸하고, 그들의 악평에 부화 뇌동한 백성들은 40년 광야 유랑과 더불어 마침내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민14: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민14: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예나 지금이나 불신앙의 삯은 죽음뿐이다.

2.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신다.

10인의 정탐꾼과는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능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물리치신 하나님께서 가나안도 정복하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인 것이다. 그들의 믿음대로 가나안은 정복됐고 그들의 확신대로 가나안은 그들의 밥에 불과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20세 이상 된 120만 명의 불신앙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광야에서도 풍성한 삶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런즉 비록 악인이 불신앙의 사회에서 환란과 시험을 당할 수는 있지만 결코 멸망당하는 법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창조적 소수라 할지라도 어러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창조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결륜과 섭리는 마침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일시나마 10명의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와 백성들의 불평과 더불어 그들의 죽음을 통해 중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오차 없이 진행되 나갔다.

불신앙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딸린 유아들의 생사를 걱정하면서 가나안 정복을 포기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걱정한 유아들은 오히려 가나안 땅에 당당히 들러가고 그 땅을 정복한 반면 장년들은 광야에서 헤메다가 죽고 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비록 불신앙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로를 방해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어김없이 진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적용

1) 이스라엘 백성이 이같이 처절한 절말 가운데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불신앙의 대가가 죽음과 파멸인 것을 역사를 통해 보면서 우리의 삶을 더듬어보자.

3) 불의가 득세하고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있는가?

4)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인물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제 목 : 제사 규례

본 문 : 민 15:1-31

요 절 : (민15:20)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같이 들어 드리라

13, 14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이 40년 간이나 유보되고 그나마 출애굽 제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게 되는 비극적 사건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존 장에서는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여러 규례들이 소개된다. 특히 본문에선은 레위기의 보충적인 규례로 번제 혹은 소제와 함께 드려지는 전체 규례와 첫 소산의 거제 규례 그리고 비의도적 범죄시의 속죄제 규례로 구성되었다.

1. 규례대로 드려야 한다.

번제 혹은 소제와 함께 드려지는 전제(포도주나 기름을 제물 위에 부어드리는 제사) 규례는 제물의 크기에 따라 각기 그 규정이 달랐다. 즉

1) 희생 제물이 어린 양일 경우 - 고운가루 1/10 에바, 기름과 포도주 각각 1/4 힌 2) 수양의 경우 - 고운 가루 2/10에바, 기름과 포도주 각각 1/3 힌, 3) 수송아지일 경우 - 고운 가루 3/10에바, 기름과 포도주 각각 1/2 힌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규례는 본토인이나 타국인이 차별없이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와 같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규례대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민15:13) 무릇 본토 소생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이 법대로 할 것이요 (민15:14)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가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 (민15:15) 회중 곧 너희나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율례니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너희의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 (민15:16) 너희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법도,한 규례니라”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물 그 자체가 아니라 순종과 헌신의 예물인 것이다.

2. 첫 열매로 드려야 한다.

첫 소산의 열매란 모든 수확물을 대표하는 곡물이다. 이를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땅에 대한 터전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받은 데 대한 즐거움의 표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표시기 때문이다. 방법으로는 거제로 드려야 하며, 가루와 떡으로 드려야 하며, 타작 마당의 거제같이 드려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첫 소산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신앙 고백의 행위다.

이와같이 오늘날의 성도들도 첫 소산 규례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 이는 곧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정신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3.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여기 나온 규정은 이스라엘 사람이거나 나그네거나 간에 부지중에 죄를 범하였을 때(인간이 연약한 본성 때문에 실수나 무지로 저지른 죄를 말한다.) 개인적으로 혹은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수행하는 희생 제사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이다. 이 죄를 속함 받을 수 있도록 속죄제에 대한 규례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속죄제 규례로 이러한 인간의 죄를 사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구속적인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 분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하고 참된 속죄 제물이시기 때문이다.

적용.

1) 제사의 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대로 지키기를 원하신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성도가 하나님의 법인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2) 헌금생활에 있어서 십일조와 첫 소산의 예물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3)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제의 긍휼을 베풀어주시듯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가?

4)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짓는 자범죄에 대해 하나님께 온전히 자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제 목 :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본 문 : 민 16:4-11

요 절 : (민16:5)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16장에 기록된 사건은 광야 40년 가운데 마지막 시기, 즉 38년 이후의 마지막 1,2년 동안 발생했던 사건이다. 그 내용은 레위 지파 사람으로서 성막에서 봉사하는 영광을 얻었음에도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분수에 맞지 않게 지도자 자리를 넘봄으로써 처참한 종말을 맞았던 고라와 그 일당들의 비극적인 삶과 어리석은 결말에 대한 이야기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사건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시하신 선택하고 부르시는 자에 대한 말씀이다.

1.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는 사람.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한 그 사람은 복이 있다”고 외쳤던 것은 바로 오늘의 요절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많은 실망을 경험한다. 일찍이 “ 토마스 웰스”는 아침에 6-9시 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을 찾으려고 씨름해 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분의 것이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라는 그 분의 약속을 믿으면서,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나아오시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2. 영혼의 외침.

아침에 기도할 때나, 기도하기 위해서 따로 떼어놓은 다른 시간에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인도하소서”라는 영혼의 외침이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과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오 하나님! 제가 당신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인도 하소서”라는 기도는 우리 현대인의 기원이 되어야 한다.

현대의 삶은 너무나 분주하고 하나님과 철저하게 유리된 세속적인 삶이 되기 쉬우므로 현대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며 간절한 영혼의 외침을 되풀이해야 한다. 바쁜 일상 생활에서 그의 궁전에 거할 수 있도록 그를 더욱 의지하고 그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3. 포기하는 삶.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그 분의 것이 되도록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 가까이 오실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에 거한다면,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이요, 진실을 행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조류가 우리를 그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며, 우리는 정박할 수도, 물에서 끌어 올려질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분의 손길에 응답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손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늘 모습을 느끼기 위해 지상의 것들을 느슨히 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거룩함을 의미한다. “누가 그의 것이며 누가 거룩한가?”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죄의 분리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이것을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우리를 당신께 이끌어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좇아갈 것입니다.

적용

1) 오늘의 세속적이고 급변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했는지 살펴보자.

2)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 했던 안일한 방법을 반성하고, 오늘의 환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궁전에 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조자.

3)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대하며 그 분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조급한 마음과 행동을 버리고 인내하는 마음을 배우자.

4)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오시지 않는다. 그것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파악해 철저히 제거하자.

제 목 : 택한 자의 지팡이

본 문 : 민 17:1-11

요 절 : (민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해서 지시하시는 방법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들의 기쁨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보호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택의 주요한 결과들 중 하나가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아론의 지팡이는 싹이 났고, 꽃이 피었으며, 탐스러운 살구 열매들을 맺었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즉 다시 말하면 약속, 성숙 그리고 열매 등이 거의 그 신비로운 지팡이 안에 동시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선택된 사람들 안에는 그것들이 있어야 한다.

1. 봄의 싹.

진실한 성도에게는 영원한 신선함이 있다. 그는 세월을 따라 늙을지 모르지만, 그의 잎사귀에는 봄 기운이 완연한 푸르름과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가 이제까지 성취해 온 것보다 더 풍성하고 더좋은 것들에 대한 싹이 터오르는 약속이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론의 지팡이는 다른 열한 개의 지팡이와 다름없이 딱딱하고 메마른 죽음의 그림자를 껴안은 막대기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증거의 장막 속에서 “(민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외모는 쇠퇴해지지만 그 내면의 젊음은 독수리처럼 힘있고 강하게 날로 새로워진다. 젊은이들이 피곤해지고 지치지만 곧 새로운 힘을 갖게 되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으로 새로운 움이 돋고 순이 난다.

2. 초여름의 개화.

움이 돋고 싹이 났던 아론의 지팡이는 시간이 되자 아름다운 꽃을 피워 그 아름다움과 향기를 온 땅에 발하였다. 성도 역시 절절한 시간이 되면 신앙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게 된 새 생명의 기쁨과 삶이 아름다운 꽃으로, 향기로 나타나야 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신비하다. 과수원과 정원에 있는 꽃 속에는 절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연약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자태를 발한다. 곧 떨어질 것만 같은 연약하면서도 온 세상의 추함을 물리치고 그 아름다움을 터뜨리는 장엄함! 그 어떤 화가도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비밀스러운 색깔 혼합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성도의 성격과 품행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아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매력적이고 얼마 아름다운가?라고 탄성을 지르게 되어야 한다.

3. 가을에 열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꽃을 보호하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아론의 지팡이에도 움이 돋고 꽃이 피더니 살구 열매가 열렸다. 왜 하나님께서 지팡이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셨을까? 특별히 수분이 완전히 제거된 죽은 막대기에 불과했던 지팡이를 초자연적인 역사로 단번에 생명을 얻어 결실을 맺게 하셨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을 찾는 것임을 보여주며, 이미 죽음이 선고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아 생명을 향해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성도들을 선택하신 목적이 열매를 얻기 위함임을 드러내신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고 훈련시키시는 목적은 훌륭한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성도는 모름지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열매를 기다리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적용.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은 비록 외모는 늙어가지만 내면은 날로 새로워져야 함을 기억하고 더욱 생명력 있고 풍성한 삶을 우리기 위해 노력하자.

2) 성도의 아름다운 삶과 모습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이를 실생활 속에서 아름답게 꽃피워나가자.

3)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맺어온 열매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또 그 열매들을 분석해 보고, 잘못된 열매는 반성하고, 좋은 열매는 더욱 탐스럽고 풍성하게 가꾸어 나가자.

4)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맺힌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함을 기억하고,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그 분을 의지해 나가자.

제 목 : 성도의 기업

본 문 : 민 18:1-20

요 절 : (민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레위인들의 직무에 관한 규례와 그들의 직무를 위해 바쳐질 십일조에 대한 내용으로 엮어진 본 장은 레위 지파, 그 중에서도 특히 아론 가문을 택하시고 그들의 직분과 생계를 주장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섭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일을 수행해 가는 자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시며 모든 필요를 따라 채워주신다. 그리고 당신의 일꾼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큰 영예와 분깃을 얻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기업이 되어주셔서 날마다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생애로 만들어주신다. 오늘의 성도 역시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과 섭리로 부르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분깃이요 기업이다.

1.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업이다.

하나님게서는 각종 제사와 성막 봉사에만 전념해야 했던 제사장들에게 생계 수단이 되는 여타의 토지나 직업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그들에게 당신이 친히 분깃이 되어주심으로써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의 일꾼들에게 그 수고를 갚아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이렇게 선포하셨다. “(민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성도의 진정한 분깃은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분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분깃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도 슬퍼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분깃이요 기업이므로 우리의 부족과 궁핍은 속히 채워질 것이고, 그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어려움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듯하나 온 새상을 만들고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분깃이므로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파별로 땅을 기업으로 할당받았다. 즉 삶의 터전을 배당받은 것이다. 각 지파에게 그 땅은 육의 양식을 제공하고 심적으로 안정을 주며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분깃이요 기업이었다. 그런데 제사장 직분을 부여받은 아론과 그의 후순에게는 아무런 분깃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분깃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아론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분의 손길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부르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우리가 오직 그 분만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만 믿고 의지하며 살 때 영육간에 풍성한 복을 약속하신다.

3. 넓고 깊게 헌신하라.

하나님께서 자기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층 더 많이 주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싶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기쁨은 당신 삶에 있어서 깊고 넓은 헌신에 정확하게 비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ㄹ레위 지파의 기업이요 분깃이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 “(민18:3)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단에는 가까이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민18:4)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지킬 것이요 외인은 너희에게 가까이 못할 것이니라.”라고 아론과 레위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론과 레위 지파는 자신들의 기업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기에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해야 했다. 그들에게 맡기신 직무에 충실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욱 사랑하셨다. 우리의 헌신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적용

1) 우리는 하나님의 분깃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분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2) 오직 하나님만 의질하며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것을 좇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자.

3) 이 땅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참된 대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바른 신앙관을 정립하자.

4) 우리의 진정한 삶의 기쁨이 하나님에 대한 깊고 넓은 헌신에 비례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앞으로 어떻게 헌신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제 목 : 재와 물

본 문 : 민 19:14-22

요 절 : (민19:17)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취하여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본 장에는 주검을 접촉해 부정하게 된 자를 정결케 하기 위한 잿물 제조법과 그 사용법, 시체를 접촉한 자가 행할 정결의 법, 임종에 동참한 자의 부정과 그 정결의 법, 부정하게 되었음에도 정결 예식을 치르지 않은 자의 추방 명령 등이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에 이어 또 한 번 정결에 관한 율례를 선포하신 것은 절대 거룩하신 당신을 가까이서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 역시 절대 거룩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의 부패성과 그 파괴적인 파급 효과를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더욱 내외적으로 정결에 힘 쓸 것을 가르치려 하셨던 것이다.

1. 어럽혀지지 않는 방법.

부지중에 부정해지기는 매우 쉬웠다. 시체를 만지는 것, 주검이 있는 방에 있는 것, 무덤을 우연히 밟고 지나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럽히기에 충분했으며, 성스러운 의식이 거행되는 성소로부터 그들을 추방하기에 충분했다. 그 어떤 것의 죄의 전염성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나, 사람들의 부정한 말로 더럽혀진 공기를 마시는 사람들이나, 부정한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책을 읽는 사람들과 우리는 접촉할 수 없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우리가 가끔 기도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이유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더럽혀짐 때문에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부터 제외된다. 그런데 이런 부정과 더럽혀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덮여져 있고, 성령에 의해 신비하게 인침 받는 것이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 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2. 자신을 정결케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깊이 이해하고 계셨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기에 그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을 제시해주신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를 벌하시기보다는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벌하시는 것이다. 그 분은 아무리 큰 죄라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따라서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회개하여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 용서하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영원한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소하게 느껴지는 작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는 삶이 요구된다.

3.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정결의 예복을 입어야 하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육체가 깨끗해지기를 추구해야 한다. 흠 없이 죽은 암소는 예수님을, 그 암소의 재는 그것들의 끊임없는 효능과 신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흐르는 물과 섞여진다. 암소의 재가 육체의 정결함을 위해 이용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 얼마나 더 많은 피가 있어야 하는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받기를 구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장 거룩한 곳에 자신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민수기의 붉은 암송아지는 요한복음 13장에 답이 제시되어 있다. 서로 서로 재와 정결의 물을 적용해 보자. 예수님게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적용

1) 오늘의 삶의 장은 과거보다 우리를 더욱 부지중에 부정하게 만든다. 본문 말씀이 제시하는 것 외에 오늘의 현장에서 우리를 부지중에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을 나열해 보자.

2) 우리 자신을 온갖 부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3) 정결 의식을 행하지 않는 자의 치명적인 결과를 기억하고 지금까지 지은 죄를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하자.

4) 재와 물과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자.

제 목 : 므리바 물

본 문 : 민 20:2-13

요 절 : (민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비록 불평과 범죄로 점철된 생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약 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가고 있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와 더불어 그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훨씬 탁월한 존재들이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세 지도자인 모세, 아론, 미리암 등은 가나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죽거나 죽어가고 있는 장면이 대조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지정한 통치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가나안 땅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주역은 결단코 혈기와 감정과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1. 반석을 두 번 친 모세.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완악한 백성들 앞에서 순간적인 혈기를 참지 못해 범죄하고 말았다. 시편 기자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106:32)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시106:33)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결국 모세는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모세는 단지 바위에게 명하기만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깊은 이유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아마 그것은 말만으로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모세는 말해야 했고, 쳐서는 안 됐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2. 연약한 인간.

슬프게도 모세는 불복종했다. 왜냐하면 크게 보아서 아마도 그는 말만으로 그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간이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를 깨닫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돕기 위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앞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 온전한 영광을 돌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수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사실과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3. 솟아나는 물.

모세가 화를 내고, 불복종하고,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은 펑펑 솟아났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불순종 때문에 공경에 처한 백성의 어려움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종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신의는 깨어지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믿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이 사실은 복된 교훈이다. 우리들은 무가치하고 부적당한 종이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둑을 넘쳐 흘러서 수정 같은 물결로 광야를 적셨다. 시편 기자에 따르면 물은 졸졸 흐르지 않았고, 펑펑 솟아 올랐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그 얼마나 신실한가! 그러나 모세 그 자신은 인생 말년에 벌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종의 불복종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의 인격이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고상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스스로 선택하셨기에 그들이 잘못했을 때 더욱 엄하게 벌하신다.

적용

1)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때때로 불순종의 삶을 산다. 우리는 보통 어떤 때 어떻게 불순종하는가?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고 이를 반성하자.

2) 모세는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행동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 생각해 보자.

3)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던 종 모세도 연약한 인간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우리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고 더욱더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자.

4)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마찬가질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와 불순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제 목 : 우물물아 솟아나라!

본 문 : 민 21:10-20

요 절 : (민21:17)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에돔이 자국 통과 거부로 인해 부득불ㄹ 에돔 지경을 우회해 요단 동편으로 북상해야 했던 이스라엘은 이제 드디어 죽음의 땅 광야를 벗어나 약 속의 땅 가나안을 거의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가나안에 입국하기까지는 아직도 수많은 장에물들을 극복해야 했다.

본 장에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내외적인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해쳐나가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본문은 이러한 장애물들을 해쳐나가며 고생하는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브엘로 인도하셔서 우물을 파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물을 얻게 하셨다.

1. 우리 가슴속에서 우물물아 솟아나라.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삶으로 솟아오르는 샘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흐르지 않는 웅덩이가 아니라 샘이다. 끊어지는 우물이 아니라, 영구한 실로암이다. 이 우물물은 우리의 영혼을 시원케 하시는 성령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리하여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항상 내주하게 하심으로써 각자의 심령을 만족케 하는 생명수가 되게 하셨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오늘 거칠고 메마른 이 절망의 땅 위에서 천국의 순례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뜨거운 사랑과 신선한 영감을 채워주고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잊지 않게 하신다. 이제 우리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을 가로막는 모든 죄악을 벗어버리고, 신선한 샘물이 솟아나게 하자. 영원한 성령의 샘물이 솟아나게 하자.

2. 교회 안에서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무 오랫동안 기름진 땅이 메마르고 황폐해졌다. 큰 가뭄이 기름진 땅을 덮쳐서 모든 초목을 삼켜버렸다. 꽃은 시들고 열매는 떨어져버렸다. 영원한 기쁨의 생명수로 넘쳐흘러야 할 교회가 황폐한 광야와 같이, 오랜 가뭄으로 갈라진 강바닥처럼 터지고 메마른 모습으로 누워 있다. 시골 교회도, 작은 교회도 큰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십자가를 막대기 삼아 우물을 파신다. 메말라가는 교회에게 영생수를 공급하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를 지신다. 또한 생수의 원천이신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엄청난 양과 힘으로 솟아오르기를 원하신다. 족장들이 우물을 파듯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지도자들의 관할 아래 우물을 파듯이 우리를 통해 황폐해 가는 교회에 새로운 생명수를 공급하기를 원하신다.

3. 우물물아 소아나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우물물아 솟아나라! 세상에서 우물물아 솟아나라! 브엘의 우물물은 신약 시대 모든 인간들을 해갈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예표한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척박한 이 땅에 보내셔서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우물이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드네인 우리들이 천국에 이를 때까지 생수를 제공받아 항상 풍성하고 만족한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러나 이 우물물도 세속화의 거친 모래 폭풍에 잠겨버렸다. 종교 다원주의와 인본주의라는 거대한 바위 때문에 입구가 막혀버렸다. 또한 이 우물물은 우리의 슬픔과 죄로 인해 약해져버렸다. 사막의 모래가 너물 길게 오랫동안 덮혀 황폐해졌다. 그리하여 이제 온 세상은 우물 없는 세상으로 변했고, 우물은 있어도 물이 없는 우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내벼려두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 다시 우물을 파야한다. 막힌 우물을 치워 샘물이 솟아나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샘물이, 성령의 넘쳐 흐르는 기쁨이 솟아나게 해야 한다. 이제 사막에서 샘물이 솟아 오르고, 광야에서 장미가 꽃을 피우는 천년 왕국이 도래하게 해야 한다.

적용.

1) 우리 가습속에서 영원한 기쁨을 솟아나게 하는 성령의 우물을 막아버린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 요소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자.

2) 죄인들에게 속죄의 샘물, 구원의 샘물, 영생의 샘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3) 오늘의 교회가 세상에 참된 생명수를 공급하지 못하고, 더욱 황량해녀 가는 원인을 분석해 보고, 그 대안을 찾아보자.

4) 온 세상에 영원한 생명수를 공급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메말라가는 이 세상에 다시 생명수를 공급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보자.

제 목 : 여호와의 사자

본 문 : 민 22:21-25

요 절 : (민22:22)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본 장은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로서 이스라엘의 승전보를 듣고 심한 위기 의식에 사로잡혔던 모압 왕 발락과 그 동조자 발람의 어리석은 행각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22-24장에 나타나틑 그 두 사람의 악한 계획을 여러 번 철저히 분쇄하시고 매순간마다 오히려 당신의 뜻을 실현하는 계기로 삼으신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복술가 발람의 입술을 통해 미래에 도래할 당신의 나라와 그 나라 왕에 대해 계시하기까지 하신다. 신약 성경은 발람을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자, 어그러진 길로 간 자라고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들의 영영한 모범으로 취급하고 있다.

(벧후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유1: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1. 발람의 눈.

너무 자주 우리들의 두 눈은 세상적인 것에 사로잡힌다. 돈에 대한 탐욕의 마음이 우리의 이성을 잃게 하고 우리 눈마저 가려버린다. 어두운 권력의 그림자가 우리 눈을 가려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탐욕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신령하고 거룩한 것은 물론 하나님을 뵐 수 없데 만든다. 발람은 발락이 보낸 예물과 그가 약속한 권력에 대한 사랑으로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발락을 향해 떠났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칼을 든 하나님의 사자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그가 타고 간 나귀가 그의 주인을 죽이려고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눈먼 주인의 채찍에 맞으면서도 주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사자의 칼을 피하였다. 짐승에 불과한 나귀도 하나님의 사자를 볼 수 있었으나 돈과 권력에 눈먼 발람은 그를 볼 수 없었다.

2. 여호와의 천사의 칼.

여호와의 천사는 종종 사람들에게 아주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로, 그리고 두려운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로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발람에게 칼을 뽑아든 존재로 언급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는 여리고에서 여호수아를 위한 것처럼 그의 칼이 우리를 위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 구부러진 길로 갈 때, 칼은 우리를 대항해 뽑힌다.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칼은 우리가 보다 깊이 볼 때, 우리가 파멸로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애쓰는 천사의 힘이다. 우리가 갑자기 우리의 인생 행로에서 멈춰서서 되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추구하고, 불의한 것에서 대가를 위하려고 여념이 없었다.

또 다른 단계에서 우리는 절벽의 끝에 다달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갑자기 진행을 금했던 것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주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아래에는 우리를 우리의 악한 목적에서 돌이키도록 애쓰는 하나님의 온유한 천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의 칼이 우리를 대적해 뽑혀질지라도, 그는 우리가 일생 동안 후회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를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자비.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비길 데 없는 섭리에 대적해 안달하고 애달아 했다. 천사를 보고 자신을 벽에다 떠밀어버리는 나귀를 보고 우리는 흥분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겸손한 사람이 됭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우리의 진로를 막으셨던 이유를 알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든지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깨어진 계획 속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결과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그 분의 약속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적용

1) 하나님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나열해 보자.

2) 지금까지의 인생 행로에서 우리 앞길을 막았던 장애물들을 생각해 보고, 그 장애물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자.

3) 우리가 바른 길을 갈 때는 물론 바르지 못한 길을 갈 때에도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궁극적으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4) 발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삶을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자.

제 목 : 성도의 복

본 문 : 민 23:13-26

요 절 : (민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발람은 악한 사람이었고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발람이 발락의 초청에 응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발락이 제시한 재물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적당히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 대가로 재물과 영화를 얻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사로잠아 당신의 도구로 쓰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임에 강력한 말씀을 주시어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심히 부패한 발람이지만 전능자의 권능으로 악한 자의 모든 생각과 의지를 꺾으시고 그를 통해 주께서 이루고자 하는 뜻을 이루셨다. 할 수 있었다면 발람은 축복을 저주로 바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커다란 대가가 그가 그렇게 행하는 것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제지당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이 너무 강하게 달려와 그가 막아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전능자의 권능으로 성도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1. 변함 없는 복.

(민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복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복이었다. 발람이 오히려 축복을 계속하자 발락은 장소를 옮겨가며 저주를 종용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발람은 마지막 예언으로 메시아 예언까지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내리기를 원하시는 복은 그 누구도 변개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며 영원히 변함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 분의 이름이 우리에게 지명되었으며, 그 분의 인격이 악으로부터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과 찬미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도 사탄 마귀는 그의 택함 받은 백성을 넘어뜨리고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 시키고, 축복을 저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탄이 족장 욥에게 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우리를 불신하게 하고 우리를 저주로 인도하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구리고 확고하게 결합된 구원의 복을 파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사랑으로 당신의 택하신 백성에게 복을 내리신다.

2. 함께하시는 복.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통하여 “(민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40년 동안 수없이 많은 불의를 당신이 영영히 진노하실 심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벌하지 않으시고 다른 열방들과는 달리 흠 없고 의로운 민족으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곳마다 함께하며 사랑과 은총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백성과 함께하시어 영원토록 그들의 주가 되신다.

3. 양자의 복.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다. 과거에 우리가 누려야 했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고동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상속자로 선정된 것이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직위는 누구도 변경할 수 없다. 우리는 유혹당하거나 정복당할지도 모르며 잠시 동안 먼 나라로 떠날지도 모른다. 또 가문에 모욕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신과 묶어놓으신 양자의 매듭을 풀지 못한다.

적용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신 백성에게 영원토록 복을 내리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때때로 의심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했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곤고히 하자.

2)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자.

3)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선택해 당신의 양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결심하자.

제 목 : 바른 신앙

본 문 : 민 24:1-9

요 절 : (민24:2)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발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위한 엄격한 경고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보았지만 불쌍하게 멸망당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전능하신 분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불의한 죄악을 사랑하고 어그러진 길에서 돌아서지 않아 자기가 축복했던 사람들에 의해 싸움터에서 살해당했다. 그는 의인의 모습으로 죽기를 원했으나, 배교자처럼 죽임을 당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근신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구원의 문에 가까이 다가간 듯 보일지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발람처럼 불쌍하게 멸망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기름부음과 연합의 구별.

영국의 위대한 신학자 후퍼는 “연합의 은혜를 기름부음의 은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성령을 받지 않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처럼 중생함 없이 높은 직책을 위해 기름부음 받는 일은 가능하다. 직무상의 위치는 가치있게 채워질지도 모르지만 그의 가습은 직무상의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름부음이나 직책을 향해 낭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2. 은사와 은혜의 구별.

우리는 사랑이 없어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고, 기도의 은사를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은사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상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결코 최상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발람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하는 능을 갖게 되었으나 멸망의 길을 가는 비운의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또 은사만 너무 추구하거나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고 그로 인해 교만해서도 안된다. 은사보다는 한없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은혜를 맛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3. 이상과 실현의 구별.

이상과 그 이상의 실현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상과 실현은 분명히 다르다. 아무리 이상이 좋다고 해도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주 좋은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 때문에 기뻐한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때로 목놓아 외쳐 기도하고, 찬양하고, 방언하고, 환상을 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위대한 실현된 신앙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실현된 신앙을 원하신다. 발람이 보았던 것처럼 그 아름다운 땅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다리로 그 토양을 딛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축복된 인생에 대해 지적으로 아는 것과, 그 땅에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즉 다시 말해 찬양하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겸손과 신앙으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적용

1) 기름부음 받음이나 어떤 특별한 직분을 받음이 구원의 충분 조건은 아니다. 기름부음 받았던 사울이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신이 임했던 발람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직분을 받았든지 근신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노력하자.

2)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 베푸신 은혜를 하나하나 나열해 보자.

3) 우리가 가진 이상은 무엇인가? 그 이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이상을 하나님께서 주셨는가? 자신이 가진 이상을 바르게 분석해 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른 이상을 갖자.

4) 이상은 현실로 나타나야 한다. 내가 가진 이상을 현실로 나타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해 보자.

제 목 : 죄로부터의 자유

본 문 : 민 25:1-13

요 절 : (민25: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본 장에서 이스라엘은 싯딤에 머물러 있는 동안 모압 여자들의 유혹을 받아 음행하며, 음란한 제사에 깊이 빠져든다. 이에 하나님의 징계 명령이 떨어지고,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의분에 못 이겨 범죄자들을 처단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후손에게 대대로 제사장 직분을 맡기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본 장을 통해 거룩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상 범죄의 가능성이 있으며, 육체적 범죄와 영적인 범죄는 긴밀한 상관 관계가 있다는 사실과 타락한 자와 타락케 한 자는 모두 하나님의 준엄하신 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1. 죄의 멍에/

개역 성경의 난외주에는 멍에에 대한 양자택일이 제시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여인들의 매력에 매료되어 기꺼이 음행을 행했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적인 쾌락으로 가담했던 것이 멍에로 고정되고 말았다.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술고래는 자기를 얽매는 속박의 사슬을 싫어해서 다시는 굴복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모든 게 비효과적이고 몸부림치면서도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난봉꾼들은 정욕의 노예가 되어, 그의 가슴은 지하 감옥 같고, 양심은 그를 채찍질하지만 육체의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일단 요부들이 우리를 설득해 우리들을 자기들의 영향권 하래 두게 되면, 그 요부들은 자기들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들의 무서운 의지를 작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짊어져서는 안된다. 죄의 모양이라도 우리 가까이 두어서는 안된다.

2. 죄의 결과.

이스라엘이 음행 죄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도 백성 중 하나가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진 안으로 들어가 사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가문의 비느하스를 통해 공의의 창을 뽑아 음행하는 두 남녀의 배를 꿰뚫었다. 또한 백성들은 지독한 염병으로 2만 4천 명이나 죽게 했으며, 두령들은 공중 앞에 끌어내어 공개적으로 목매달아 죽게 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징계는 무섭고 단호하다. 미봉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죄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비느하스가 창을 집어들고, 저주받은 인생들과 더러운 음행을 징벌하듯이, 저주받은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를 노예로 삼기 위해 슬며시 다가올 때,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단호하게 근절해야 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의 의지를 먹어 치우는 어떤 비밀스러운 악이 있는가? 그것을 단호히 물리침으로써 우리는 여호와의 강하고 무서운 징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3. 성령을 의지하라.

우리들의 의지는 너무나 연약하다. 작은 유혹에도 쉽사리 넘어지고, 의지의 통제 기능을 잃어버린다. 또 죄의 달콤한 유혹에 때때로 우리는 자의적인 마음으로 악을 행한다. 순간의 달콤함이 영원한 아픔과 쓰라림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인간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연약한 죄인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인정하시던 다윗도 정욕에 눈이 멀어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차지했다.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빛나던 모세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신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분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성령 안에서 행하라. 그러면 너는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욕망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적용

1) 오늘날 우리를 얽매기 쉬운 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열해 보고, 그 죄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자.

2)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죄에 대한 경계의 마음을 다지자.

3) 죄의 멍에에 한 번 얽매이게 되면 쉽사리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죄악의 결과는 철저히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모든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자.

4) 자신을 온갖 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구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깨닫고 성령께 철저히 의지하자.

제 목 : 여호수아와 갈렙

본 문 : 민 26:63-65

요 절 : (민26: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모세는 두 번 백성들을 계수 했다. 처음에는 광야 40년 생활을 시작할 때 아론과 함께 했고, 두 번째는 엘르아살과 함께 했다. 본 장에 나타나는 인구 조사는 그 두 번째 인구 조사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제 40년에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가 모압 평지에 있을 때에 일어났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이 인구 조사의 목적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을 군대 조직으로 편성함과 동시에 정복 이후에 약속된 땅의 분배를 위한 것이었다. 이제 이스라엘의 방황은 끝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목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처음 인구 조사를 했을 때 계수 되었던 사람들 중 단지 둘만이 생존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긍정적으로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생존했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다루는 것처럼 한 민족을 다루셨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다루는 것처럼 한 민족을 다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놓치지 않으셨다.

1.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놓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무소 부재, 전지 전능하심으로 자신의 백성을 온전히 감찰하신다. 선한 목자가 병동으로 내려왔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병든 아이가 잠들기 전에 가지의 손을 침대보 밖으로 내어놓았다면 하나님의 불꽃같은 두 눈은 결단코 그 아이의 손을 놓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든 그 분이 우리를 놓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 분은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을 찾으신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서 그 분 자신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놓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1차 인구 조사의 대상이었던 20세 이상의 백성 전체를 놓치지 않으셨다. 가데스 반역 사건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백성은 죽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한 명도 예외 없이 2차 인구 조사에서는 계수될 수 없었다. 603,560명에 달하던 1차 인구 조사 때의 인구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남았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 분의 주목을 끌 것이다. 당신의 패가 약해져 병들게 된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자신을 그 분의 영에게 맡긴다면, 그 분은 그것을 채워 주실 것이다. 당신이 오순절의 선물을 받기를 바란다면, 비록 당신이 옛날 목동 시편 기자만큼이나 무명이라 할지라도 그 선물은 당신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던 모든 사람은 죽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살아남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자를 남기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온전히 확장해 나가기 위해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종들을 필요로 하신다. 의심의 안개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들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름답게 이루어 간다. 믿음은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끈이며 자연과 초자연을, 이 땅과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시키는 밧줄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에 남아 있을 수도 없다.

2. 죽음과 심판은 아무도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불신자 개개인 모두에게 실행되었다. 떨어지는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위에 있는 가을 잎들처럼 한둘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들 동료들의 운명을 나눈다. 그리스도가 먼저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 차례가 올 것이다. 아담처럼 모든 사람은 죽는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법정에서야 한다. 우리 각인은 혼자서 태어났고, 혼자서 죽어야 하고, 혼자서 왕께 설명을 드려야 한다. 내 영혼아,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라!

적용

1)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인생들을 감찰하신다. 오늘 우리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할지 생각해 보자.

2)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인도하시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여호수아와 갈렙의 바른 신상을 본받자.

3)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영원한 기쁨의 삶을 누릴 수도 없음을 기억하고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자.

4)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과 심판을 기억하며 이에 대비하자.

제 목 : 우림의 판결법

본 문 : 민 27:12-23

요 절 : (민27:21)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 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 라

하나님께서는 신 광야의 므리바 물 사건을 회상하면서 모세에게 그의 임종을 고지하셨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가나안 입성이 좌절되는 쓰라린 현실 속에서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개인을 위한 기도보다는 새로운 이스라엘 지도자를 위한 간절한 기도에 임한다.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택한 지도자로서의 위임 식을 거행하도록 하신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여쭈어 봐야 하고, 그의 말을 좇아 즉 엘르아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한다. 사람들을 나가게도 하고 들어오게도 하는 제사장 엘르아살로부터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국가의 중대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

1. 우리의 나감.

우리의 나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해져야 한다. 모든 행동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의 우림을(Urim) 가지고 있는 진정한 성직자 앞에 섰을 때, 그리고 자신이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는 결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자존심의 부추김으로 또는 경쟁이나 까다로운 행동에 자극이 되어 우리는 번번이 나가 버렸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가며, 우리가 뒤에 남지 않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나간다. 이런 상황 아래 우리의 아침 출발은 즐거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실망과 좌절에 직면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그분은 절대적으로 책임져 주신다. 우리의 나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익한 수많은 노력과 그로 인한 슬픔으로 우리 자신을 더욱 불신하게 될 것이다.

2. 우리의 들어옴.

우리의 들어옴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쉬기 위해 들어오고, 기도하기 위해 또 우리의 영혼을 그 분의 영으로 채우기 위해, 비밀스럽게 고통을 겪기 위해 들어오고, 또는 죽기 위해 들어와야 할 때 우리는 그 분의 뜻과 결정에 우리의 들어옴을 맡겨야 한다. 들어오는 것은 나가는 것보다 더 쉽다. 능동적인 행위는 수동적인 행위보다 더 즐겁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고통을 겪기보다는 세상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 여전히 놓여 있기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대는 그 분의 손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가 지정되어 있는 우림의 결정을 인식하자마자 우리는 보다 빠르게 평화 속에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게 되면 우리들의 출입은 그 분의 영에 의해 바르게 결정될 것이다.

3. 우림과 둠밈.

“우림과 둠밈”이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출28:30)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 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여호수아는 비록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을 뿐 아니라 또한 율법의 제정 자로서 모든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거느렸던 모세의 절대 권위와는 달리 대제사장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의 국가의 중대사를 직접 결정할 수 없었고,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물어 처리하는 정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어려운 문에가 닥칠 때마다 대제사장 앞에 나아가 “우림의 판결”을 받아야 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실로 이스라엘의 신정 역사에 있어서 모든 사명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이런 점에서 모세의 후계자도 모세나 또는 회중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임되었다.

적용

1) 날마다 우리들의 나감이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었나 생각해 보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가는 삶을 살자.

2)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주 들어온다. 일자리에, 선을 행하는 자리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 우리의 쉽게 들어옴을 반성해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들어오는 삶을 추구해 보자.

3) 지금까지는 우리의 들어오고 나감을 점검해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

4) 우리 인생의 모든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종들이 되자.

제 목 : 여호와 하나님의 음식

본 문 : 민 28:1-10

요 절 : (민28: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

본 장에서는 정기 제사를 시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매일 드리는 제사와 그 제물, 안식일에 드릴 제물, 월삭에 드릴 제물, 유월절과 무교절에 드릴 제물, 그리고 칠칠절에 드릴 제물들이 길게 열거되어 있다.

그 제물들을 언제 어떻게 드릴 것인지 어떤 것을 드릴 것인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규례에 따라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지 않고, 드려야 할 것은 온전히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율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속하기에는 양도 소도 너무나 보잘것 없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써 온전한 제사와 하나님께 드림을 완성하셨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의 모든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1. 이스라엘이 드린 제사와 제물.

본 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매일 아침과 해질녘에 상번제를 드렸다. 상번제의 제물은 어린 양 한 마리를 전제로 드리고 소제와 전제를 동시에 드리는 것이었다. 또 매주 안식일에는 평일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제물을 드렸다. 그리고 월삭에는 상번제 외에 월삭을 위한 제물 곧, 수송아지 둘, 수양 하나, 1년 된 어린 수양 일곱 그리고 속죄 제물로 수염소 하나를 드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유월절에는 7일 동안 상번제 외에 월삭에 드리는 제물과 똑같은 분량의 제물을 매일 드렸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매일 시간을 정해서 예배를 드렸고, 또 새로운 달이 시작될 때 제사를 드렸고, 특별히 기억해야 할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정결하고 흠이 없으며 적절한 크기의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동물만 구별하여 제물을 삼았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최고의 제물을 최선을 다해 드린 것이었다.

2. 우리의 제사와 제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과 감사 그리고 예배, 헌신하는 자세로 우리 자신들을 드리는 마음, 그리고 선물들이 그리스도의 제단 앞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아름다운 제사와 제물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분의 음식이 된다. “(히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을 향해 굶주린 사람으로 말한다.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에 굶주려 있고, 우리의 진심을 다해 드리는 헌신에 굶주려 있으며, 그 분과의 교제에 굶주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아침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드리지 않은 채로 기도 실을 떠나거나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분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헌신과 찬양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고결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아침에 굶주리신 주님께서는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신다. 그런데 대부분 잎만 발견하신다. 그 분은 “나는 나의 나무에서 아주 탐스럽고 맛있는 열매를 먹었다.”고 말씀하고 싶어하신다.

3. 그리스도와 산 제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을 친히 십자가에 제물로 희생시킴으로써 인류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인류 구원이라는 사랑에 넘치는 역사를 행하셨다. 결국 구약의 모든 율법 특히 제사 규례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히 성취, 승화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그 분과 다함없는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지금까지의 그 분의 갈증과 배고픔을 만족시키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보이신 산제사의 예를 우리도 실천해 나가야 한다. 입술과 말로만 찬양과 감사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행동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며 의를 행함으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사, 맛있는 음식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적용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와 제물을 생각해 보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나열해 보자.

2) 이스라엘의 제사와 우리의 예배를 비교해 보고 우리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자.

3)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산제사를 드리자.

4) 오늘 우리 교회의 예배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고 그 대안을 생각해 보자.

제 목 : 성도의 일

본 문 : 민 29:1-11

요 절 : (민29:1)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일 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여호와께서 성회로 선포하시는 날이나 절기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때 해야 할 많은 양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노동이 아니었다. 제7월 내내 그 일은 다른 시대에서처럼 이스라엘의 장막과 직업에 중심이 된 것이기보다는 장막 주변과 하나님에 대한 봉사에 집중되어졌다. 똑같은 구별이 사도 바울에 의해 분명히 제시되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 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9)

1. 십자가로 인하여 일하라.

진정한 성도는 십자가에 이르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인하여 십자가 때문에 일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십자가에 나와서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일이나 노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했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의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은혜를 느끼며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일을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다. 즉 다시 말해서 노예의 일이 아니라 아들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 즉 먼저 구원을 받고, 그 다음에 일한다는 사실을 구원을 받기 위해 일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혼동한다.

2.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일하라.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까요? 라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이르기 위하여 일하지 말고,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들의 어떤 행위로도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들을 연합시킬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신과 살아 있는 연합으로 접목시킬 수 있도록, 우리들을 위대한 농사꾼의 발아래 놓는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리하면 은혜로우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리고 일단 그 결합이 완성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 우리의 손과 발은 놀라운 에너지를 쏟아 내며 일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우리 일은 더 이상 힘든 노동이 아니며, 열매를 맺기 위한 우리의 행위는 더 이상 힘든 노동이 아니라 쉽고 자연스럽고 복된 것이 된다.

3. 초막절을 인하여 일하라.

우리는 복된 중재자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어떤 눈물로도, 기도로도, 영혼의 경기자들도 그것을 살 수 없다. 그것은 유일한 신앙의 행위에 의해서만 받게 된다. 그러나 일단 주님께서 그 분의 충만함 속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눈물과 기도가 노력 없이 흘러 넘친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예 근성도 없고, 어떤 긴장도 없으며, 구속함도 없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초막절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한없는 은혜를 생각할 때 초막절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지키는 것이다. 성도의 어떤 눈물이나 기도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살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선한 일을 행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해도 구원을 살수는 없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도, 초막절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적용

1)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일 이나 절기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자.

2)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이나 주일을 어떻게 지켜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3) 지금까지 십자가를 바라보던 우리의 시각을 생각해 보고, 십자가의 은혜 아래 거할 때만이 주님의 일을 쉽고도 기쁘게 또 온전히 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4) 모든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여 주님 안에서 행하자.

제 목 : 온전한 서원

본 문 : 민 30:1-16

요 절 : (민30:5) 그러나 그 아비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서약이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본문에서는 민수기 6장과 레위기 27장에서 이미 주어졌던 서원에 대한 규례가 여자의 서원을 중심으로 다시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세한 부분의 서원에까지 그 규례를 제정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서원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그 파급 효과가 생활 전반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므로, 그의 백성인 성도들 역시 서원을 지키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서원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연약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1. 처녀의 서원.

만일 아버지나 남편이 허락하지 않은 채, 여자가 서원을 할 경우 그 서원은 유효하지 않으며, 그녀가 그것을 이행할 책임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제어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행할 수 없는 약속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심오한 원리다. 우리는 어떤 신앙의 단계에서 그리스도께 자신의 무엇인가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 즉 그 분이 그것을 취하도록 우리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흔쾌히 서원할 수도 있다. 우리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급한 금지나 외과 의사의 판정 또는 다른 방향에서 우리의 서원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화를 내실까? 그렇지 않다. 그 분은 그 경우 완벽하게 전체를 이해하며, 행위를 위한 우리의 의지를 용납하며, 우리를 평화롭게 가도록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비가 보기에 옳지 않은 서원을 하는 처녀의 서원을 그 아비가 허락지 않으면 그 처녀가 그 서원을 이루지 못해도 용서하신다.

2. 남편과 서원.

한 여인이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 그녀는 그 서원을 지켜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 서원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때문에 그녀는 매일 무겁게 내리누르는 의무 이행에 대한 짐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 결혼이 그녀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 서원을 남편에게 고백하는 순간 그녀는 서원이라는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랑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서원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원죄와 지금까지 우리를 억눌러온 율법과 양심에 저촉되는 온갖 죄의식들을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리하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신 우리의 신랑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맡아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해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신다.

3. 바른 서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서원을 했고, 부차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적 성숙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과 재산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또한 그들은 상대방과의 신뢰를 증진시키고 소속된 공동체의 결속과 안정을 위해 말 또는 행동으로 맹세했다. 그러나 일단 서원을 했을 경우 그것이 일시적인 충동이었든지, 실수였든지, 아니면 그것이 자신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든지 상관없이 반드시 성실하게 실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의 의지에 의한 자발적인 서원도 서원한 사람에게 기쁨을 주거나 자유를 누리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게 참다운 기쁨을 주고 자유를 누리게 하는 서원이 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안에서 행하는 서원이다. 죄인된 몸이나 죄인의 의식으로 하는 서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우리 주님의 뜻으로 행하는 서원이기에, 이 서원을 통해 주님께는 영광이 그리고 우리에게는 참다운 기쁨이 나타나는 것이다.

적용

1) 우리는 지금까지 분별없는 처녀처럼 서원을 남발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했던 약속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자.

2)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꼭 실행해야 함을 기억하고 서원에 신중을 기하다.

3) 우리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죄짐을 내려놓고 참자유를 누리자.

4) 바른 서원과 그 서원의 성취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뜻대로 할 때만 가능함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노력하자.

제 목 : 정결케 하라

본 문 : 민 31:19-24

요 절 : (민31:23) 무릇 불에 견딜 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본문에서 모세는 싸움에서 돌아온 모든 자들과 사로잡혀온 포로들에게 정결 의식을 행하도록 명령한다. 즉 모세는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치렀지만 그들은 분명히 살인한 자요, 시체에 접촉해 부정을 입은 자였기에 그들 각 개인뿐 아니라, 전쟁에 사용된 무기, 소지품, 심지어 그들의 의복과 또한 각종 전리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정결케 하였다. 그 정결 방법으로는 시체와 접촉하여 부정케 된 자는 19장에 제시된 정결례에 준해 깨끗케 해야 했으며, 전장에서 사용한 무기와 소지품 및 전리품은 정결케 하는 불 또는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잿물로 깨끗케 해야 한다.

1. 우리는 철저하게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성도는 철저하게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성결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정결한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성도를 원하신다. 그 어떤 공력이나 헌신보다도 정결함을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더럽혀지고 오염된 그릇에 물을 담지 않으실 것이다. 오직 깨끗하고 정결한 그릇에만 자신의 사랑과 은총을 부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우리가 불에 견딜 수 없다면 불을 통과하게 하지 않으신다.

불은 소멸시키는 성질이 있는 것으로서 곧 불에 녹지 않는 금, 은, 동, 철, 상납, 납 등과 같은 물건을 불에 통과시키도록 한 것은 곧 죄로 더러워진 기물을 의식적으로 정결케 하는 상징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 속을 통과해도 상하지 않는 모든 금속은 일단 불에 의해 정결케 한 다음 그와 더불어 반드시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 만든 재를 섞은 물인 “정결케 하는 물”로 깨끗하게 해야 했다. 이는 피흘림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속죄의 대원칙에 따른 것이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해서 위험에 노출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시험에 빠지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철저하게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도록 지금 부름 받는다면,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 어려운 시련을 참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라 사멸해 버릴 금보다 훨씬 더 귀한 우리의 믿음의 시련이 비록 불로 시험받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3. 불을 통과할 수 없다면 물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종교적이든, 사회적이든 아니면 의식법상이든 인간이 죄를 범한 경우는 예외 없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범죄로 정죄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실수를 저지른 자라 하더라도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악 됨을 자복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법도에 따라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불에 견딜 수 없는 것은 물을 통과해야 했다.

율법을 견딜 수 없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을 깨끗케 하는 “정결의 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는 법령에서 “견뎌야 할 모든 것이 불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물을 통과해야만 한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소극적이고, 후자는 적극적이다. 전자는 세례 요한과 관련되고, 후자는 성령에 관련된다. 우리가 불을 통과할 수 없다면, 우리는 보다 완화된 규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한다.

적용

1) 우리를 향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 정결함임을 기억하고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자.

2) 우리가 정결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3) 우리에게 불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4) 우리에게 불로 시험해도 견딜 만한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더욱 강인한 신앙을 갖자.

4) 우리의 모든 것은 불을 통과하든지 아니면 물을 통과하여 깨끗하게 되어야 함을 기억하고, 더욱 정결한 성도의 삶을 추구하자.

제 목 : 우리의 죄

본 문 : 민 32:20-27

요 절 : (민32:23)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기나긴 광야 여정에 지쳐버린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미디안을 쳐서 얻은 땅을 그들이 받을 분깃으로 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던 주님의 뜻을 망각한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요단 동편 땅은 약 속의 땅이 아니라는 점과 이로 인해 각 지파간의 분열이 발생하여 가나안 정복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두 지파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두 지파는 타지파와 함께 가나안 정복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며 강청했다. 결국 모세는 두 지파에게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말로 승낙한다.

1. 부메랑 같은 죄.

죄는 원시인이 사용하는 부메랑과 같아서 죄를 지은 사람의 손에 되돌아온다. 형제들이 요셉을 스파이라는 혐으로 고소했고,, 그를 구멍에 던져넣었다. 그런데 똑같은 혐으로 그 형제들이 감옥에 투옥되었다. 다윗 왕은 간음과 살인을 범했다. 그러자 압살롬은 다윗에게 똑같아 그렇게 보답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십자가 때문에 자기 자신들의 거처와 산림이 파괴될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형벌을 받았다. 사회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이웃을 다루듯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듯 사람을 다루신다. 결과가 항상 즉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가끔 번갯불과 벼락 사이에는 긴 시간 간격이 있다. 악한 일에 대한 형벌은 갑자가 실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제분기가 천천히 갈아진다 하더라도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철저히 갈아져 가루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는 말씀은 그 분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2. 여호와 앞에.

“여호와 앞에서”란 말이 20-22정 사이에서만 무려 6번이나 언급되었다. 모세는 이 말을 반복함으로써 르우벤, 갓 두 지파와 자신 사이의 약속 및 실행 여부가 모두 하나님의 눈앞에 놓여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나님 앞에서”란 말이 의미하듯 성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있는 존재임을 믿는 믿음은 모든 불화와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신앙은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초석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 여호와께서 그 범죄를 낱낱이 찾아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늘 주님 앞에 서 있음을 명심하고 죄를 멀리해야 한다.

3. 예수님 안에.

범인을 추적하는 수색견처럼 죄가 당신을 찾아낸다면, 당신은 예수 안에서 발견되어 지리라는 것을 확신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발견되어지도록 노력하라. 예수님의 피와 공로를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죄의 복수의 무시무시한 집행을 방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분을 당신과 당신의 죄 사이에, 당신과 당신의 과거 사이에, 또 당신과 당신이 위반한 법의 벌칙 사이에 모시라. 예수님의 피가 하늘과 땅을 통해 당신을 위해 변호할 때 무시무시한 죄의 유전이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라.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죄의 결과와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온갖 추한 죄를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서자. 비록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리하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실 것이다.

적용

1)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다시 우리를 찾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하나님 앞에는 그 어떤 비밀스러운 죄도 숨길 수 없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모든 되를 낱낱이 고백하자.

3)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과 행위를 낱낱이 살피심으로 더욱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자.

4) 무서운 죄의 보복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자.

제 목 : 인생의 노정

본 문 : 민 33:1-37

요 절 : (민33:9) 마라에서 발행하여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으므로 거기 진쳤고

이스라엘이 멈춘 장소를 열거할 때, 모세는 41개의 숙영지를 말한다. 그런데 이 숙영지들은 단순한 땅 이름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의 40년간의 영욕의 역사, 곧 그들의 범죄로 인한 고난과 갈등, 눈물과 절망 및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베풀어졌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등으로 점철된 생생한 역사의 현장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장소들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이 장소들을 낱낱이 기록했다. 어떤 것은 그 지명만 기록했고, 어떤 것은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스라엘은 이 지명들을 기억함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엘림이었다. 이곳에는 열두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재충전의 기회를 얻었다.

1. 우리는 과거의 축복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곧 고통을 잊어버리게 만드셨다. 그러나 기억은 우리의 화랑의 벽에 지워질 수 없는 햇빛이 있는 광경에 대한 프레스코 화법(젖은 회벽에 그림물감으로 그리는 화법) 그림을 기꺼이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편이 되신 여호와의 손 안에서 명상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고,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가로질러야 하는 사막의 많은 어려운 행로를 겪어왔다. 그러나 70그루의 종려나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고마운 그늘과 과일들은 아직도 우리를 새롭게 해준다. 지나온 인생길의 아름다운 축복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든다. 우리는 항상 지나온 과거의 아름다운 축복들 중에서 우리의 종려아무들과 우물들을 찾을 수 있다.

2. 우리는 과거의 죄를 기억해야 한다.

애굽에서 모압 평지까지는 불과 일주일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려 40년이 걸렸다. 성경은 그 이유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치 않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죄를 지었기에 광야 길을 40년 동안 헤매야 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 함으로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로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은 낙원을 회복하기 위해 세상을 끊임없이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이러한 여정 중에서도 우리는 자고 하여 더욱더 깊은 죄의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변함없듯이 성도를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그 계획 또한 변함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인도에는 한 가지 요구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이 땅의 나그네 인생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회개하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기나긴 40년 세월 동안 자신들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뉘우치며 한 걸음 나아갔을 때 마침내 목적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과거의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기억하고 의의 길을 가야 한다.

3.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마라나 르비딤에서 그들의 어떠한 불평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너의 죄를 감추어 보이지 않게 하고,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때 그것을 잊으신다. 그 분의 책에서 그 기록을 지워 버리고, 우리를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사람처럼 다루신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러 인생의 기록을 살펴볼 때, 비록 우리가 그것들을 잊어버렸을지라도, 모든 사랑의 행위들과 자기 부정이 주의 깊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과 비록 우리가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모든 죄악들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적용

1)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수많은 복을 내리셨다. 그 복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자.

2)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 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자.

3)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제 그 죄와 어려움을 기억하며 바른 삶을 살자.

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한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자신 있게 살자.

제 목 : 우리의 땅

본 문 : 민 34:13-29

요 절 : (민34:1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는 너희가 제비뽑아 얻을 땅이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라고 명하셨나니

본 장에는 정복 전쟁으로 얻게 될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경계선과 각 지파에게 할당될 몫, 그리고 각 지파 지경을 결정할 때 제비를 뽑을 각 지파 족장의 명단이 제시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미래의 청사진을 지금 펼쳐 보인 것은 그 땅의 주인이 바로 당신 자신임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실로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인간의 피땀어린 노력에 의해 얻어진 단순한 정복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고 선물하신 복지였던 것이다. “(시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거주와 한계를 정하시는 분으로 오늘 우리 삶의 터전과 생의 한계를 친히 주장해 가신다.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1. 우리가 얼마나 멀리 가도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땅의 경계를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 삶의 한계와 가능성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고동치면서 우리를 내주 하심으로 오는 영광의 부유함을 아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고동치면서 우리를 예수님의 부활하신 삶을 나누도록 고무시키는 부활의 힘을 아는 것은 우리들의 특권이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죄의 방해로 우리의 특권을 잃어버리고 괴로워한다. 우리가 날마다 유혹에 대해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의 노예가 되어 우리의 길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빛의 한계까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 가도록 인도하신다. 날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 가신다.

2.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좀더 온전한 삶을 위해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자신의 경계 안에 머무른 것처럼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실 때까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흠이 없기를, 또 유혹의 급습으로부터 안전하지는 않지만 유혹으로부터 구해지기를, 역경의 압력으로부터 안전하지는 않지만 완벽한 평화에 머물러 있기를, 우리들 안에 어느 것이 죽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죄와 자신에 대해 죽기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그리고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되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고 구한 그 모든 것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그 경계 밖의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계 안에서 머물러야 한다. 아무리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경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3. 우리의 주권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의 경계를 나누어주셨을 때 가나안 땅에는 아직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살고 있기나 한 것처럼 경계선을 정확하게 그으셨다. 이는 그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와 더불어 그 땅의 주인이 하나님 자신임을 밝히시려는 뜻에서였다. 즉 그 땅은 이스라엘의 노력으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주어졌다. 아무런 공로 없는 백성에게 그 땅이 거져 주어졌던 것이다. 백성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이런 사실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다소 불만족스럽게 제비뽑기의 결과가 나왔더라도 결코 불평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경계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모든 환경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적용

1) 우리가 달려나가기를 원하는 저 먼 경계의 끝은 어느 방향인지 생각해 보자.

2) 우리가 머물러야 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계가 있다. 그 경계는 어떤 것인가?

3) 우리 경계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우리의 삶의 경계를 그어 나가야 한다.

4)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계선을 구체적으로 설정해 보자.

제 목 : 대제사장과 죽음

본 문 : 민 35:22-34

요 절 : (민35: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본 장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기업이 없이 오직 성막 봉사에 부름 받았던 성직 지파인 레위인을 위한 성읍 지정과 더불어 억울한 죽음을 면하게 하는 도피성 제도가 언급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본문은 그릇 살인한 자가 피의 보수자에게서 피하여 도피성으로 피신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를 보여준다. 부지중 살인자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그 성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 머물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 은혜의 법칙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과 우리 죄인들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예표해 주는 것이다.

1. 대제사장의 죽음.

재판에서 살인자의 비고의성이 판명되면 그는 보수자의 손에 넘겨지지 않고 다시 그가 처음 피신한 도피성으로 다시 보내져 보수자의 보복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는 비록 그 생명을 보호받고는 있지만 그 살인의 대가인 죽음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죽음이 보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의 생명이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 사역을 담당하는 대제사장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도피성에 있는 자가 받을 죽음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 살인자가 치를 죽음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속되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피흘려 죽으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구 속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2. 영원한 대제사장.

대제사장들은 차례로 죽어갔다. 그들은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직무를 계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대제사장의 직무와 의복과 직책은 모세가 느보산에서 자기 자신의 손으로 옷을 벗겼던 아론에게서부터 대대로 내려와 그 후손에게 차례대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여전히 살아 계셔서 속죄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 분은 과거의 모든 것이셨고, 현재의 모든 것이시다. 즉 그 분은 과거에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셨고, 현재의 우리를 위해서도 기꺼이 모든 것을 하실 것이다. 바른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을 위해 그 분이 베푸셨던 모든 관용들과 더불어 그 분의 지상 삶의 기록들은 우리를 위해 한없는 은혜를 베푸실 자비의 주님이심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죄 지은 자들이 대제사장이 있는 도피성으로 달려가듯이 우리는 영원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고, 우리를 위한 대속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3. 대 속의 죽음.

도피성에 피해 있던 살인자들은 그 성의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자유의 몸이 되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도피성에 피한 자의 피흘림을 대신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의 죽음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도피성에 피한 자보다 더 오래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대제사장의 죽음을 기다리며, 두렵고 떨리는 공포의 터널을 끝없이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대 속의 죽음은 달랐다. 우리 주님은 한 번에 모든 죄의 문에를 해결하심으로 더 이상의 기다림도 더 이상의 대속의 죽음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중재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들을 중재할 인간 제사장이 필요 없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로만 나아가면 된다. 주님께 나아가 그 분의 십자가 앞에 머리를 숙이고, 용서와 자비를 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는 새로운 자유의 몸, 새 생명의 몸을 입게 된다.

적용

1)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도피성을 마련하시고, 대 속의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2) 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해 보고 그 차이점을 인식하자.

3)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 능력을 마음속 깊이 새김으로, 우리를 죄의 문제로 유혹하는 사탄의 속임수를 물리치자.

4) 우리 주님의 대속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주님의 값진 보혈의 피의 공로가 헛되지 않도록 바른 삶을 경주하자.

제 목 : 여성의 기업

본 문 : 민 36:1-9

요 절 : (민36:2) 가로되 여호와께서 우리 주에게 명하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기업의 땅을 제비뽑아 주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우리 주에게 명하사 우리 형제 슬로브핫의 기업으로 그 딸들에게 주게 하셨은즉

고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여성의 해방에 대한 근원적인 원리와 남성과 동일하게 설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지으셨고,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여인들은 자기들의 권리 속에서 여자 상속인이었고, 자기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때 결혼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여타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여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발자취인 것이다. 룻과 베다니의 마리아와 페니키아 여인인 라합과 리디아 여인인 하갈 등등 성경의 모든 여인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지으신 여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보여주는 전형들이다.

1.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자유를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다. 가나안 땅에서 아버지 슬로브핫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기업이 주어진 것을 기뻐한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같이 자기 지파 내에서만 결혼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규례에 순종했다. 사실 혼인 문제는 개인의 자유 의사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타인의 강압이나 규제는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결혼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제한하고 간섭하시는 경우 자신의 의지나 자유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에 자신의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여성의 해방과 남녀 평등의 모든 원칙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에서만 가능하다.

2. 여성의 본성 안에 있는 기업.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사역 중에 나타나는 여성의 특징들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의 눈물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요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 여자가 온전한 사랑을 추구할 때 동정심을 보이셨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또 여자가 많은 질문을 할 때 대답하셨다. “여자야, 나를 믿으라.” 또한 여자에게 따라붙는 약점을 강조하기 위해 “여자를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절망에 빠진 여자에게 주기 위해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믿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있는 그대로를 여자의 모습으로, 여성의 기업으로 인정하셨던 것이다. 여성의 본성 중에 나타나는 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으시고, 또 그것을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기업으로 생각하고 인정하셨으며, 그에 대해 독특한 관심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여성의 본성상 특징을 남녀 차별적인 약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여성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 안에서 여성이 가져야 할 기업.

여성들은 자신의 기업을 남성들에게 가져감으로써 남성들을 부요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슬로브핫의 딸들은 그들의 땅을 남편들에게 가져가 그들을 부요케 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져감으로 제자들을 기쁘게 했다. 또 예수님과의 많은 교제를 통해 많은 것을 받은 여자들은 보다 깨끗하고 공평한 삶을 말하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 삶을 상속하도록 촉구하면서, 이기주의와 이성적 판단에 얽매여 있는 남자들에게로 다가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기업들을 남성들에게 가져가야 한다. 어머니로서 또 아내로서 자녀와 남편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고상한 생각과 행동으로 여성의 기업을 다져나가야 한다. 그럴 때 여성은 자신의 위치와 기업을 명확히 확보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남녀 평등과 온전한 해방의 길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적용

1)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본성적으로 주신 아름다운 기업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나열해 보자.

2)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여성의 본성 속에 여성다움이 남녀 불평등의 조건이 아님을 기억하고, 여성의 여성다움을 부여하신 기업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3) 하나님께서 가정과 사회 안에서 여성에게 부여하신 기업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남녀 평등과 여성 해방을 위해 여성이 추구해야 할 온전한 기업은 어떤 것들인지 생각해 보고 나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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