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사순절 과 부활절

열려라 에바다 2011. 10. 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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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준비 기간 (Pre-Lent)

우리나라 개신교 월력에는 대체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있을 뿐이다. 요즘 와서 대강절(또는 강림절), 사순절 등을 지키는 경향이 차츰 있기는 하나 아직도 그 본래의 의미가 우리 개신교에서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대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무의미 하듯이 긴 고난기간의 참회와 기도의 준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고통과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여 부활하신 사건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가장 의미있고 환희에 찬 승리의 부활절을 맞기 위하여는 고난기간을 통하여 성실하게 기도로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의 내부에서 재현함으로써 예수의 고난에 우리가 동참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부활의 사건이 우리에게 참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교회력을 중히 여기는 전통교회 또는 의식교회(천주교, 성공회, Luther교 등) 에서 부활절의 준비는 부활절 전 9주 부터 시작된다. 부활절 전 9번째 주일은 부활절 주간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로 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70일이 되는 날이다. 이날 까지는 크리스마스 또는 현현일의 연장이어야 한다. 7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Babylon에서 살았던 포로생활 70년을 상기하는데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속의 발자취의 맥락에서 볼때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즉 Babylon에서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약속된 땅(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과 우리들이 죄의 속박을 청산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우리의 영적인 본향)을 향하는 우리의 삶의 여정과의 관계에서 그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부활전 70일 부터 성회일(Ash Wednsday)까지를 사순절 준비기간(Pre-lent)이라고 한다.

현재 기독교에서 사순절 준비 기간을 갖는 교회는 거의 없다. 여기에서는 다만 교회력의 역사를 알기 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Pre-Lent는 6세기 이태리에서 있었든 전쟁과, 흑사병과, 기근 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이 겹쳐 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하고 탄원을 하기 위하여 시작되어 발전한 것이다. 이 기간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3주일이 포함 되는데, 이를 Septuagesima, Sexagesima, 그리고 Quinquagesima 라 부르고, 이는 대략 부활 전으로 따져 70일, 60일, 50일 전이 된다는 뜻이다. 이 간에는 사순절에서 갖는 금식과 속죄행사는 없다.

사순절 (Lent)

사순절은 聖灰日(또는 속죄일)부터 시작된다. 사순절을 영어로 Lent라고 하는데 Easter란 말에 부활이란 뜻이 없듯이 Lent란 말도 이 절기의 의미를 나타내고는 있지 않다. Lent는 본래 Anglo Saxon語의 "spring" 즉 봄이란 말의 lencten or Lenchthen 과 길다란 말의 long에서 온 말이다. 즉 봄이 시작되는 날을 늘리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1세기의 사순절은 그리스도가 무덤 속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단 40시간 이었다. 이 40시간이 연장되어 6일이 되었고, 이 6일을 성주간이라고 했다. 6일은 다시 6주간으로 늘어 났는데 6주×7일-6일(주일에는 금식을 안하므로)=36일이 되는데 이는 1년 365일의 십분지 일인 36일을 의미한다. 36일이었던 것이 731년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 시대 다시 4일을 더 첨가하여 40일이 되었고, 그래서 사순절은 성회 수요일부터 시작 된다.

사순절은 본래 부활 전야에 세례 받을 사람들을 준비 시키기 위한 기간으로 사용한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6주간 이들은 집중적인 학습을 하고, 신앙훈련과 기도와 금식 회개를 하면서 세례준비를 한다. 이 때 주로 공부하는 교육의 내용은 복음서, 사도신경, 주기도문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 교육과 훈련을 위해 성 금요일과 토요일에 완전 금식을 하고 목사 앞에서 질문에 답하고 세례를 받았다. 40일 (6주간)의 사순절이 토의 된 것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였다. 기독교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대단히 의미 있는 숫자이다. 예수가 40일간 금식하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으며(마 4:1-2), 노아때엔 40일 동안 폭우가 내려 홍수가 지게 하였고(창 7:17),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을 했고(출 24:18), 엘리야는 천사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걸어서 갔고 (왕상 19:8),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을 한 다음,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냈다

주일은 절대로 금식을 하지 않는 날이다. 따라서 사순절이 주일에 시작 될 수는 없다. 금식을 성회 수요일 부터 시작하고, 따라서 이 날이 사순절의 첫날이 된다. 이날을 회개일 또는 회개의 시작일로 정했다. "재"(ash)는 회개의 상징이었다. 사제들은 신자들의 이마 위에 재로 십자가를 그려주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을 기억하라"고 말해 준다. 지금도 로마 캐토릭 교회에서는 재회 수요일에 죄를 용서받는 표로 이마에 재를 찍어 바른다.(렘 6:26;욘 3:6; 마 11:21) 이 일로 인해서 천주교회에서는 이날을 재회 수요일 또는 성회 수요일(Ash Wedesesday)이라고 부른다. 중세 때에는 이 기간 동안 교인들이 회개의 상징으로 자루옷을 입고 다녔고, 머리에는 재를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9세기에 들어서서 없어지기 시작 했다. 중세에는 사순절 기간 40일 동안 모든 사람들이 금식하도록 되어 있어서 하루에 한끼(저녁)밖에 먹지 않았으며, 부활절이 지날 때 까지 화려한 음악회도 허용되지 않았고, 오페라는 금지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 연주된 음악은 주로 오라토리오, 수난곡, 칸타타 등이었다. 기쁨을 노래하거나 화려한 음악으로 되어있는 "알렐루야"와 하나님의 영광을 장엄하게 노래하는 "대영광송"(Gloria) 은 수난을 받으시는 예수를 기념하여 슬픈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부활절에 이르기 까지 사순절 기간에는 부르지 않는것이 교회의 전통이다.

사순절 기간에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살을 뾵기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명상하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므로써 우리의 영적 갱신을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순절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따르고, 그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에서는 이 기간 특별한 새벽기도회를 갖는다든가 또는 제자훈련과 같은 신앙 훈련기간을 갖는것은 매우 바람직 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먼 발치에서 구경꾼의 한사람으로 바라 보자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가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함께 동행하는데에 사순절의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가 가신 길과 크리스챤이 가야 할 길은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가 말씀 하시기를 "네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네 안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리스도가 내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내가 안 가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 만이 그의 부활에도 동참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부활에 동참한다는 말은 주님의 부활을 구경하는 관객으로서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내 속 사람이 부활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 주간 (Passion Week or Holy Week)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 바로 고난 주간이다. 이 기간은 40일의 사순절 중에서도 특별히 거룩한 주간으로써 고난주간(Passion Week) 또는 성주간(聖週間) (Holy Week)이라고도 한다. 성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 295-373) 는 그의 저서 {Festal Letter} 에서 이 기간을 "Holy Paschal Week"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이 때가 되면 주위의 적절하고 거룩한 장소에서 수난예배 의식극을 가졌었다고 한다. 오늘날 교회에세 종려주일 아침에 종려를 들고 행진해 들어오는 것과, 성금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등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진 의식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주간이 특별히 거룩한 주간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입성하시는 종려주일과, 그의 마지막 만찬, 십자가에 달리심, 죽으심과 부활 등의 사건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삶을 재 음미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구원의 역사가 클라이맥스(Climax)에 달하는 가장 극적인 주간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절은 3.1절이나 광복절 처럼 이미 지나 가버린 역사 속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인간들 속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항상 새로운 신비스러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만약 복음서에 근거한 수난곡을 연주 한다면 사순절 기간에 연주하는 것이 좋지만 특별히 고난주간의 월, 화, 수, 목요일에 연주하는 것이 더욱 좋다.

⑴ 종려주일 (Palm Sunday)

부활주일 바로 전 주일이 종려주일이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 부터 시작 된다. 이날 의식교회에서는 종려나무에 축복하고, 장엄한 행진으로 예배를 시작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나귀를 타시고 우리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환영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이 때 어린이와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어 흔들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게 찬양을! 앞으로 올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따라서 이날에는 "호산나"를 노래 하여야 한다. 이날만은 그동안 부르지 않았던 대영광송을 부를 수도 있다. 교회에 따라서(천주교)는 이날을 고난주일로 지켜 마태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고난을 처음부터 끝까지 봉독함으로 고난을 회고하기도 한다.

⑵ 세족 목요일 (Maundy Thursday)

성주간(聖週間)중에서도 더욱 거룩한 날은 목, 금, 토요일 이다. 이 세 날이 일년 중 가장 거룩한 날 이기도 하다. 이날 주교들은 학습자, 병자, 세례 희망자 등을 위하여 성유(聖油)를 준비하고 성유에 축복한다. 중세에는 모든 교인들이 이날 깊은 회개의 기도를 했었다. 유월절을 하루 앞둔 날 예수는 만찬을 가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요. 13장). 그래서 이날을 洗足木曜日 (Maundy Thursday)이라고 한다. 교회에 따라서는 실제로 세족식을 갖는 교회도 있다.

세족 목요일 저녁에는 1년중 가장 엄숙한 성만찬을 갖는 것이 세계 개신교회의 풍습이다. 초대 교회에서 촛불을 켜고 성만찬을 가졌듯이 세족목요일에는 촛불을 켜고 성만찬을 갖는 촛불예배가 대부분이다. 엄숙한 성만찬이 끝난 다음에는 제단위에 있는 모든 장식을 거두고 말끔히 닦는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요 13:2-15)이 중세부터 시작된 세족식이 거행되었다. 세족식이 거행 되는 동안 부른 노래는 Mandatum "새 계명"(요 13:34)이란 노래였다.

오늘날 새로이 부활되고 있는 또 다른 중세 전통 예배는 Teyenebrae이다. 이는 the Service of Tenebrae라고 하여 "흑암의 예배"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수,목,금요일 저녁에 드리는 예배이다. 본래는 새벽예배에 해당되는 Matins과 Lauds에서 드리던 것으로 동이 트면 촛불을 하나씩 꺼 나가는 예배였었다. 교회에 따라서는 이날 음악예배를 갖는 교회가 많이 있다. "십자가상의 죽음 (The Crucifixion),"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 "성모의 슬픔(Stabat Mater)," "갈보리 언덕(To Calvary)," "올리브산에서 갈보리까지(Olivet to Calvary)" 등을 연주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길 수 있다. 이 날은 대개 촛불예배를 드리는데 크리스마스의 촛불예배가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날의 촛불예배는 그리스도의 빛이 꺼져 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한마디 명상한 다음에 촛불을 하나씩 꺼 나감으로 결국에는 촛불이 하나만 남아 어두운 가운데 예배가 끝나도록 계획하는 것이 좋다.

⑶ 성 금요일 (Good Friday)

성 금요일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성 금요일을 영어로는 "좋은 금요일"(Good Friday)라고 한다. 이 말의 근원은 본래 천주교회에서 미사를 가질 때 성 금요일에는 떡과 포도주를 성체화 하지 않기 때문에 금요일 미사에는 전에 성체화 하여 사용 하다가 남은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미사에서 성찬을 가졌다. 그래서 이날은 "좋은 날" 이다. 성 금요일에는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고난의 장을 봉독하였다. 이날 예배에서는 "Pange lingua"(내 입술이여, 찬양하라, 저 영광스런 싸움을...)찬송가를 부르면서 십자가를 경배하며 연속적으로 그리스도와의 화해의 기도를 드린다. 성찬식과 예배가 끝난 다음에는 모든 교인들이 헤어지고, 그리고는 부활절까지 아무런 예배가 없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일곱 말씀을 남겼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 그 말씀이 예수가 되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요 1:1-13). 이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산위의 메아리 처럼 이 세상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여 역사를 거듭하면서 그 메아리가 더욱 커져 천둥처럼 크게 울려 퍼지고, 종래에는 이 세상의 방방곡곡을 말씀으로 뒤덮는 신비와 기적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교회는 이날로 부터 죽음의 어두운 밤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어둠이 참 빛을 이겨 분 적이 없었다."(요 1:5)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가 부활의 사건 없이 여기서 끝났다면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정죄로 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했겠으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다시 화해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 금요일을 죽음의 그늘 속에서나 죄의 어둠 속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 하면서 보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고난의 구주를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강력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성 금요일의 예배에서는 요한복음의 고난부분을 낭독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성 금요일의 예배는 보통 낮 12시 부터 오후 3시 사이에 갖게 되는데 이 때 "그리스도가 하신 마지막 일곱 말씀"이나 또는 "십자가의 죽음" 또는 "갈보리 언덕" 등의 칸타타를 예배형식으로 연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간에 직장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에 음악예배를 갖는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세족 목요일에 이러한 음악으로 음악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고, 원칙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3시 이후에는 아무 노래도 부르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진 않지만 우리나라의 철야기도회의 전통을 살려 금요일 밤에 고난 음악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고 본다.

⑷ 성 토요일 (Holy Saturday)

성 토요일은 운명하신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안식하신 날이다. 이날에는 제단의 모든 장식을 철수해야 하고, 촛불도 꺼야 하며, 오르간도 연주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노래도 부르지 말아야 하고 교회의 종도 울려서는 안된다. 주후 2세기경 교회의 의식(Liturgy)이 형성 될 무렵, 주일 성만찬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전날 밤 자정예배(Vigil)에서 성경을 읽고 시편을 낭송하는 예배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 후 매주일 갖던 전야 예배가 없어지고 부활절 전야 자정예배만 남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전통적 의식교회에서 갖는 부활절 전야 자정예배의 시초라고 본다.

부활절 전야 자정예배는 누가복음 12장 35절 부터 38절에 있는 예수의 말씀대로 "등불을 켜 놓고 띠를 띄고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충실하고져 한데에 그 신학적 의미가 있다.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주인의 즐거운 잔치에 초대되어 같은 식탁에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예배로 실천하는 것이다. 전야 자정예배는 본시 토요일 밤에 가졌던 것을 토요일 오후로 옮겼고, 다시 토요일 아침으로 되었다가, 1955년 모든 천주교에서는 부활절 전야 자정예배를 본래대로 토요일 밤 10시에 드리기로 결정 하였다. 이 예배는 새 불을 피우고, 그 불에 축복하고, 새로 준비 된 큰 촛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왕 촛대)에 새 불로 부터 점화하고 축복한 다음, 그 촛대를 들고 교회에 입당함으로 시작된다.

이 때 교회안은 어두운 채로 있고, 사제는 이 촛대를 들고 입장 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시다"하고 세번 선창하면 회중들은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하고 답창 한다. 다음에는 7군데의 예언서를 읽고, 사도의 서한에서 한번, 복음서에서 한번, 모두 9번의 성경봉독이 있다. 이때 구약에서의 성경은 유월절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는 것을 신약의 서한을 통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성수반과 그 물에 축복하고 세례와 입교식이 있고 나면, 자정부터 계속해서 부활절 첫 예배를 보게 된다.

희랍과 러시아의 정교회에서는 부활절 전야 자정예배가 교회 밖에서 갖는 행진으로 부터 시작 된다. 이 행진은 예수의 시체를 찾기 위하여 헤매고 다니는 것을 상징 하는데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 오다가 교회에 도착할 무렵 "그리스도가 부활사셨다!"란 외침을 듣고 예배가 시작되는 의식을 갖는다. 행진을 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갈 때에는 교회안에 불이 없었다가 이들이 돌아 올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상징하는 수백개의 촛불과 색깔이 있는 램프에 불을 켜서 교회당을 밝고 화려하게 만든 후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눈다.


부활절 (Easter)

고난기간의 슬픔과 비탄 후에, 복음의 완성인 부활의 사건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기쁨과 환희는 1년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은 크리스챤의 새 생활의 시작이 되고, 말씀의 완성이며, 물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동안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던 것을 이때 부터 기독교는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의 첫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하여 주의 부활을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예배와 성찬을 계속함으로써 부활의 신비를 늘 새롭게 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한때 부활주일 부터 성령강림 주일 까지 50일을 매일 주님의 날, 즉 부활의 날로 지키면서 할렐루야를 부르며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50일을 지냈다. 오늘날 대개의 개신교회에서 부활절의 기쁨과 행사가 그날로 끝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 한다. 승천일과 성령강림 주일까지 부활절의 기쁨은 계속되야 한다고 본다.

⑴ 의식 예배극 (Liturgical Drama)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무덤을 방문하는 의식이 새벽에 행해 졌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난 두 여인으로 분장한 사제가 무덤에 가고, 거기에서 찬란한 천사의 옷으로 분장한 사제가 두 여인을 향하여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고 말하여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면 처음 두 사제는 찬양대와 그 옆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분장한 다른 두 사제에게 와서 함께 다시 무덤으로 달려간다. 거기에서 이들은 빈 무덤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예수의 몸을 감쌌던 흰 수의를 들고 나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이때 찬양대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와 "유월절의 제물이 되신 주를 찬양합니다"를 노래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이 계속 발전하여 10세기 경에는 의식예배 연극이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의식 예배극은 부활절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에도 있었다. 이와같은 의식 예배극을 부활절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갖는다면 그 예배는 더욱 극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의미있는 부활절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⑵ 부활절 새벽예배

부활절의 새벽예배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그 근원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복음서의 부활에 대한 기사에 근거를 둔 듯하다. 즉 요한복음 20장 1절에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라고 기록된 것을 재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부활절 새벽 예배는 우리가 이미 위에서 밝힌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과, 해(그리스도의 빛)가 솟음으로 밤(죽음의 권세)을 이기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의미가 덧 붙여진다고 본다. 대개의 경우 부활절 새벽예배는 각 교파의 목사와 모든 교회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 연합으로 드린다. 이때 성가대도 연합성가대가 조직되어 거대한 새벽예배를 갖는 것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부활절의 제단은 백합화와 흰색으로 장식하고, 목사와 성가대의 스톨(stole)도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제단의 촛불을 킴으로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임재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알렐루야를 반복해서 부르고 대영광송도 불려진다. Te Deum과 같은 승리적인 대 합창곡이 연주되고, 특별히 승리의 상징이 되는 나팔과 브라스 앙상불(brass ensemble)로 찬송가를 반주하게 한다든가, 또는 성가대의 합창과 함께 연주하게 하면 부활절 예배의 분위기가 훨씬 더 고무 될 것이다. 이날 대체로 찬양대 특송으로 Handel의 할렐루야를 많이 부르는데 크리스마스 때 이를 많이 부르기 때문에 부활절에는 Beethoven의 할렐루야를 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 10 절 승천일 (Ascension)

주께서 부활 하신 후(눅 24:50-51; 행 1:1-11)부터 성렬강림 주일 까지의 기간을 그리스도의 대 승리의 축하 행사로 기쁘게 지냈다. 4세기에 이르기 까지 승천일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약 300년 경에 있었던 스페인의 Elvira 공의회에서는 승천일을 거부한 사실이 있다. 그러다가 4세기 말에 가서 점차적으로 온 세계의 기독교회에서 부활 후 40일이 되는 날을 승천일로 지키게 되었다. 승천일은 부활 후 40일 째 오기 때문에 늘 목요일이 승천일이 된다. 따라서 이날을 옛날 영국에서는 성 목요일(Holy Thursday)이라고 불렀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 40일간 머무시고 여기 저기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다가 승천하셨는데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본다.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주의 왕이 되시었고, 따라서 승천일은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대관식날과 다를바 없다. 주님의 승천이 단순히 이땅 위에서 하늘로 옮기는 공간적인 이동과, 있었다가 없어진 시간적인 실존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고, 초시간적이면서 초공간적인 초월적인 실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도신경에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한것처럼 예수가 하늘나라의 어느 공간에 자리잡고 앉아 계셔서 우리들의 물질세계에 오시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는 실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Luther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란 말은 부활하신 구주가 고난을 받으실 때처럼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만 존재하였던 것에 묶이지 않고 어느때 어디서든지 존재하는 초월적인 실존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하늘과 땅을 결합하였고, 또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 문을 여셨다. 승천으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이 갖는 제한성의 한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존재로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가장 작은 겨자씨 안에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우주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큰 공간안에도 존재 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승천으로 인하여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예배 안에 함께 계시고 동시에 우주안 어디서나 존재하시는 실존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날은 역사적인 날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시작되는 날이다. 천주교와 성공회를 비롯한 의식교회에서는 승천일에 특별예배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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