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깨닭지 못하는 사람 / 시 49:1-20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20

깨닭지 못하는 사람 / 시 49:1-20

 

사람이 아는 것과 까닭은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지식을 얻음이요 깨달은 것은 지혜를 얻음입니다. 지식이 칼이라고 하면 지혜는 그 칼을 쓰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다고 해도 지혜가 없으면 그 지식으로 사람을 헤치고 자기를 헤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지혜를 지식 보다 더 낳게 여깁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을 무지하다고 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안다는 것은 이성의 기능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이해를 말하고, 지혜는 깨달은 것을 종합적으로 분석 결산하여 좋은 방법을 터득한 것을 말합니다. 지식은 과거 지향적이나 지혜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교육학에서는 깨달을 지적인 것, 받아들이는 것, 실천하는 의지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여 지. 정. 의가 합해진 그런 지식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잡한 모든 문제는 사실 알고 보면 깨달음의 부족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오 깨달음인 지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행복한 일인지---- 이 길이 죽는 길인지 사는 기인지를 알고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인간은 깨달음을 축적하면서 지혜를 얻어 오늘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

(약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거울을 보고 자기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 얼굴을 금방 잊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건방 증이 심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거울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금방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지식을 빗대 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라, 한 번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의 흠짐을 보면 다시는 그 흠집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하여 얼굴을 간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의 아집과 고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며 율법의 말씀에 귀를 귀우리면 이해의 깨달음 즉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생각이 없이 몽롱한 정신 가운데 체험하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일입니다. 생각과 경험이 합해지고 여기에 믿음이 플러스되면 놀라운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요즘 자녀들이 교육이 아주 심각합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수고를 잊어 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 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해산의 수고는 대단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이 없이 낳은 자식은 자기 자식이 아니오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 그 사람은 극한 말까지 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므로 생명의 존귀함과 자녀의 소중함을 알고, 부모의 고마움이 생기는데 그것이 없으니 무언가 잘못 되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출발부터 모든 것을 쉽게 시작한 사람이 자라서 어떻게 이 어려운 인생을 힘있게 살아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마치 누에가 고치에서 나올 떼 자기 힘으로 나오지 않으면 날아 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생의 고난과 승리를 수술로 간단히 해결을 해 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아이가 장차 어떻게 힘있는 아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취 중에 아이를 낳은 경험은 진실로 생명을 탄생시킨 거룩하고 숭고한 경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어떻게 지혜를 배우며, 어떻게 인내와 극기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에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까닭은 사람이 있고, 듣고 까닭은 사람이 있으며, 매맞고 까닭은 사람, 그리고 잊어버리고, 손해보고, 낭패 당하고 까닭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많은 사병들을 데리고 있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성수라는 사병이 있었는데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군대에 온 사람입니다. 얼마나 사람이 영리하고 지혜로운지 그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너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같이 있는 사람 하나는 얕은꾀가 무척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까지 속이고 거짓 말로 돈을 훔쳐 가는 사람이 였는데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마낄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사람은 간사한 사람이 였는데 그 사람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였고 한 사람은 어찌나 미련한지 대학까지 다니다 온 사람인데 정말 화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였습니다.

사람은 대게 어떤 강력한 자극을 받으면 깨달음을 얻어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되는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자극을 받았는데도 깨닭지 못하는 사람은 구제 불능의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는데 부자는 한평생을 살아도 돈 모으는 것만 알았지 잘 사는 것을 몰랐다가 지옥에 가서야 잘 사는 것이 무엇이며 못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그 지혜는 아무 쓸데없는 후회만 남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당히 지혜로운 줄 알고 사는데 옆에서 보니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혜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혜는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경험은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있습니다. 직접 경험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말하고 간접 경험은 다른 사람이 체험한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사건건 그 말씀이 내게 직접 경험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경험에 있어서 부분적인 경험이 있고 전체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병든 사람이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은 부분적인 경함으로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모든 재산을 다 잃고 하나님께 돌아 왔다면 그 사람은 전체적인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경험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이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10가지 재앙을 다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닭습니다. 멍청한 사람들이지요.

본문에서는 이렇게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으나 께닭음이 없어 지혜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시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소는 자기가 한 번 빠진 구덩이에 두 번 빠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사람이 한 번 잘못을 저질러 죄를 짖고 다시 죄를 짖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할 두 가지 지혜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는 재물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 재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죽 은사인 것입니다.

둘째,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얻을 기회도 있지만 그것을 써야 하는 기회도 있습니다. 재물을 얻을 줄만 알았지 써야 할 좋은 기회를 놓치면 그 재물을 선용해 보지도 못하고 잃게 됩니다. 아무튼 재산이란 많고 적든 우리에게 주신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셋째, 재물은 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입니다. 특별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나쁜 일을 해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꼴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자유입니다. 내게 주신 경제적 여유만큼 나는 자유롭게 경제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은 이 자유가 보장 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쓰고 싶을 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 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다섯째, 책임이 따르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 축복에 따르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지므로 자유를 누리려 하면서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빈축을 사고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부자는 사회적인 책임, 경제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내 돈을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잔소리를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은 부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런 법에 따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써야지 하나님께 계속적인 축복을 받지 그렇지 못하면 지옥에 간 부자처럼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 서에 저주받고 책망 받은 부자들에 그리스도 대한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약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약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약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런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늑탈하여 재물을 모을 줄만 알았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재물을 쓰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재물은 악으로 기우려 지는 큰 함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黃金黑邪心을 말하고 淸貧樂道를 말했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짖는 죄가 무엇입니까?

① 재물을 신임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면 자기가 똑똑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자기는 이 시대에 특혜를 받은 귀족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교양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돈만 가지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돈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나빠하고 저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② 재물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난할 때는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이 재물이 생기니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 저지른 모든 사악한 일들은 부자가 됨으로 그 악함이 다 소멸 되였다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 이기심을 가집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짓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종종 갱 영화에서 많은 재물을 훔친 자들이 그 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신의가 없어지고 서로 죽이고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자식들이 그 재산 때문에 의리가 없어지고 서로 원수가 되어 사는 것을 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엄청나게 많아서 평생 호화 호식하며 살아도 다 쓸 수 없는 재산인데 더 많이 가지자고 형제가 싸우고 부모와 자식이 원수되는 것을 봅니다.

④ 재물을 우상화합니다. 돈을 섬기고 자기는 그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돈이란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남을 돕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인데 그것이 신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건강이 있고 자식이 있고 명예가 있고 돈이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만 포기하라고 하면 요새 사람들은 무엇을 포기할 것 같습니까? 이중에 가장 시시한 것은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틈엔가 사람의 생명 보다 더 중한 것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봅니다. 그런 사람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돈이 귀해서 아이들을 마음대로 먹일 수도 없고 입힐 수도 없고 공부시키기에도 힘든 세상에 집안에서 마다리 부대에 담아 놓은 돈이 수억이 나왔단다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그런 사람이 구청장----????”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재산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서민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어 그가 당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별로 동정심이 가지 않습니다. “(시49: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극하는 자는 (시49: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시49: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둘째의 깨달음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종말이 순간 순간 닦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시49:10)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 도다----(시49:13)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셀라) (시49:14)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시49:15)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셀라) (시49:16)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시49:17)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시49:18)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시49:19)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주님의 이 말씀을 깨닭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모은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될 것이며 지혜로운 자가 무지한 자도 다 망하여 음부에 내려가 그 아름다움이 다 소멸하여 보잘 것이 없어질 터인데 사람이 치부하여 영광을 얻으려 하고 생시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 하니 그 영광과 재물을 가져 갈 수 없고 그 칭찬이 무익한 것이라는 것을 깨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깨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았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나간 일들과 세월을 생각하지 말고 닦아 오는 하늘 나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