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전문가의 무지(시 118:22-23)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27

전문가의 무지(시 118:22-23)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다른 사람이 그랬더라면 놀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거리를 걷고 있는 한 사람이 돌에 관한 전문가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장난 손목시계를 구두공에게 맡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만약 내가 구두공에게 시계를 맡겼는데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면 그건 순전히 내 책임인 것이다. 손목시계의 수리는 견습 시절부터 시계를 익혀 왔고 이 분야에서는 전문가인 시계 수리공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건축자들이 모두 전문가였다는 사실이다. 돌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다. 그들은 매일 돌을 다루었으며 돌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가들 - 이렇게 정성들여 훈련을 쌓은 일인자들 -도 그 회당 앞을 지날 때면 언제나 자신들이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 그 높고 영예로운 건물 위에는, 그들이 쓸모 없다 하여 버렸던 돌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숙련된 전문가들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돌의 가치를 그저 지나던 누군가가 발견하여 모퉁이의 주춧돌로 사용한 것이다.

이렇듯 전문가들도 이따금씩은 까맣게 모를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밤낮으로 어떤 일에 정진해 온 전문가들도 때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대중들이 종종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밝혀 낼 때마다 전문가들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전문가가 자기 분야에 대해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이다. 그들의 위대한 공헌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인도 선교사 선다 싱의 식물학자 친구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수선화에 대해서라면 뭐든 설명할 수 있었고, 수선화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수선화를 선물로 받았을 때, 그는 그 꽃이 수선화라는 걸 전혀 몰랐다. 그는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수선화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뛰어난 식물학자였으며,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전문가였다. 식물의 모든 속(屬)과 목(目)을 알고 있었으며 그 서식지에 대해서도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선화의 가장 중요한 특성, 즉 우리의 냉랭한 마음을 움직여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감동하도록 만드는 특성에 대해서는 평범한 소녀보다도 더 무지했던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란 행성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별의 아름다움은 느끼지 못할 수 있는 존재이다. 모든 운율의 규칙들에 정통하면서 시의 매력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를 세밀히 연구하여 어떤 희곡이 초기작인지 후기작인지 구분할 수 있는 영문학자라도 셰익스피어의 문학성이 주는 감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문가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전문가들도 아주 가끔씩은 나무를 보느라고 숲은 보지 못하여 정말 중요한 문제들을 놓칠 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특히 나는 이러한 사실이 성경 연구에도 적용되지 않는가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때로는 성경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성경의 살아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가장 무지한 경우가 있다. 우리가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빚진 바를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성경학자들이 제공해 주는 건전하고 냉정한 비평을 통해서 성경을 새로운 책으로 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성경 전문가라면서 어떻게 진정 중요하고 유일한 성경의 내용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깊은 의혹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가끔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전문 지식을 동원하여 오경 연구의 문제점에 대해서 토론을 벌일 만한 학식이 있고, 공간복음서들의 관계에 대한 모든 연구 결과에도 정통한 성경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는, 믿는 이에게 확신을 주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여전히 봉인된 책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전문가들이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곤 한다. 선다 싱의 친구인 인도 식물학자가 수선화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오히려 수선화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매혹당하고 감동하는 이들은 언제나, 식물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시인과 어린아이들이다. 성경을 대할 때는 정확한 지식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 성경은 전심을 다해 읽는 사람에게 비로소 내밀한 비밀을 드러내 주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인이 성서학의 모든 문제들에 정통한 전문가들보다도 성경을 더욱 진실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그녀를 찾아내고 그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녀가 성경에 의지하면 성경은 그녀의 가는 길에 빛을 비춰 준다. 성경은 언제든지 그녀가 필요로 할 때면 빛이 되어 준다. 이 모든 일이 몹시 놀라운 일이기에 그녀는,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고 고백할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이 어떻게 거절당하셨는지 상기해 볼 때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의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은 말한다.

대중이 그분을 거절했던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왕을 찾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한 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대중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까지도 예수님을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들은 메시아에 관한 교리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들은 영웅주의에 가까운 열정을 가지고 밤낮으로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해서 박식한 가르침을 많이 베풀었던 바리새인들이지만 정작 메시아가 오셨을 때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돌을 버리지 않았다. 그 돌을 버린 사람들은 돌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인정받는 돌 전문가인 건축자들이었다.

우리 주님은 이 위대한 건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그 말씀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막 12:10). 주님은 이를 통해서, 때로는 전문가들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