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의심을 위한 공간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관계를 세워나가는 선행 조건이 된다. 하지만 믿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탐구하고 싶을 때는 슬그머니 의심이라는 뒷문을 열고 나간다. 왜냐하면 신앙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신앙의 필요성이 가장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시계추처럼 신앙에서 불신앙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계속 옮겨다닌다면 결국 어디에 도달하게 될까? 아마 다시는 신앙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내가 지금까지 신앙을 놓지 않고 굳게 잡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런 고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가장 분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른 특별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주여, 내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단 한 가지 일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비록 나는 선천적으로 회의론자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노인들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내가 그런 열망을 소망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믿음을 칭찬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기적과 관련된 본문들을 찾아 읽으면서 믿음도 다양한 면모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담대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마땅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보다 뒤쳐졌다. 믿음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자라나고, 당연히 왕성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약화된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공간에 숨어있는 뼈대와 같다. 그런 골격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개된 장소로 이끌어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밝히는 것이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존재한다. 성경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욥기, 전도서, 시편,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 등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품는 의심의 가치를 이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거룩한 성경 속에 인간의 의심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솔직하게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는 자들은 종종 의심을 초월하는 믿음이 자기 속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딜레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4세기에 살았던 한 프랑스 수도사가 어떤 당나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당나귀는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 더미 사이에 있었다. 정확히 두 건초 더미 중간에 서 있었다. 당나귀는 양쪽을 번갈아보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당나귀는 굶어 죽었다.
위험이라는 요소를 동반하지 않으면 믿음도 있을 수 없다.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은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미국의 소설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믿을 수도 없었고 자신의 불신앙에 만족하지도 않았다.” 두 건초 더미 사이에 서 있는 당나귀처럼 그렇게 어중간한 상태는 큰 위험을 불러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열정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믿음은 목적지가 뚜렷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다음 단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인도자의 손을 붙잡고 그분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토마스 그래함(Thomas Graham)의 말처럼, “믿음은 확신을 갖기 위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이유다.” 하지만 이유 이상의 무엇이며. 이유 그 자체만으로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무엇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단계는 지금 보이는 범위 너머에 있기 마련이다.
의심이 이처럼 우리를 깊은 믿음으로 인도해주기도 하지만 한편,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경우 의심은 마땅히 의문을 품어야 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도록 이끌어주었다. 또한 믿음의 다른 모습들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나는 그러한 의심 덕분에 오늘날까지 크리스천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은 완전히 상반되는 영향을 미친다. 비록 우리는 불청객처럼 다가오는 의심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주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양분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진로를 변경시키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나는 점점 확실성보다는 신비로움 속에서 진정한 평안함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우리는 파스칼처럼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그러나 확신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게’ 깨닫는 수준에 항상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내가 자라난 교회 환경은 의심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믿어라.”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규정된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는 사람은 이상성격자로 몰려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의심의 동료를 필요로 한다. 교회는 언젠가 완성될 믿음을 위한 안전하고 든든한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단받는 믿음
“주여, 이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고난의 힘든 시기는 믿음을 성장시키고 강하게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위기의 시기를 거쳐온 사람들의 관계는 더 굳게 결속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한 이 원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깃든 비밀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믿음은 주어진 관계 속에 어느 정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로 요약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흔들림 없이 신뢰하는가? 신뢰의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다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관계는 깨지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랐고, 욥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기를 긁어야 했다. 다윗은 동굴에 숨었고, 엘리야는 사막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갔으며, 모세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물었다.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다가오는 위기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들은 혼란스럽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분기점에 서 있었다. 화를 내면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 신뢰의 길을 택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신앙의 거인들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헬라어 원본을 직역하면 좀더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발생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신다.” 나는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겪은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그 말씀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리고 나와 함께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려 하신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확신하건대 그러한 과정에 있는 믿음은 언제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응답되지 않은 채 “왜?”라는 질문이 계속되더라도 상급은 분명히 주어진다.
양면성을 지닌 믿음
순수한 믿음과 충실함을 겸비한 성숙한 신앙은 편집증과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성숙한 신앙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사랑 많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주변으로 끌어 모은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조건으로 삼는다.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나쁜 일들까지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나는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선하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우주의 제1원리라는 전제에서 시작했다. 그러한 전제에 모순되는 주장은 다른 설명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매일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혹독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승인 하에 일어난 일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 하나님께서 대변인으로 세우신 선지자들의 글을 읽어 보라. 그들은 우상숭배, 부정한 행동, 폭력, 그리고 인간의 죄악과 반역으로 나타난 여러 증상들에 대항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복음서를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있었던 온갖 장애와 불구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심으로써 위선적인 종교 집단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위대한 신비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반대하시는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을 비난하는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C. S. 루이스는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심지어 자신의 기대와 정반대되는 일이라 하더라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와 유익을 가져다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니케아의 그레고리는 성 바질의 믿음이 ‘양손잡이’같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질이 오른쪽으로는 기쁨을 받아들이고 왼쪽으로는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두 가지 모두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는 요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드코사드는 이렇게 충고했다. “지금 이 순간을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라. 모든 일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리의 성화를 위한 도구며 수단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선함을 가져다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바로 그것이 양손잡이 같은 믿음 또는 ‘양면적인’ 믿음의 이론적인 의미다.
믿음 안에서 살기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터득해야 하는 기술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내려오기 때문에 매일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두려워 말라”라는 명령을 365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현대 도시 생활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가 내면을 깊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돈에 대해 걱정하고, 소유해야 하고 알아야 할 것에 대해 걱정하고, 경쟁자들에 대해 걱정하고,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일들에 대해 걱정한다. 머튼은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비밀을 발견했다. 우리의 유일한 행복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며,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를 압박해오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의사는 사고로 절단된 손가락을 다시 붙이는 수술에 전문가였다. 일단 수술실에 들어가면 현미경을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동안 끊임없이 응시하며 사람 머리카락보다 가는 신경망과 힘줄과 혈관을 분류하고 연결시켜야 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환자의 손가락은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거나 감각을 잃게 된다. 그는 수술하는 동안 잠깐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다. 언젠가 그는 새벽 3시에 비상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나갔다. 하지만 수술이 너무 복잡해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자극을 주어 수술에 집중할 생각으로 그 수술 결과를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수술이 진행되는 몇 시간 동안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자기 어깨 위해 손을 올리고 곁에 서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수술했다.
그런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후로 그는 수술 결과를 자기가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마음으로 수술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일깨우며 말했다. “지금 아주 어려운 수술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수술을 당신께 바치고 싶습니다. 내가 수술을 하는 동안 당신 생각을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삶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가 매일 행하는 사소한 일들-전화를 받고, 직원을 고용하고, 의학 잡지를 읽고, 환자들을 만나며, 수술 일정을 잡는 것-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인식은 세상의 일들 속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전보다 간호사들을 더 배려하고 존중하며, 환자들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재정 문제에 대해 거의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적인 환경, 은혜의 활동, 마음의 완악함” 이것은 파스칼이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적어놓은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다. 외적인 환경이 우리를 죄어온다. 가족 간의 다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재정적인 근심 등 무수한 걱정거리가 압박해온다. 은혜의 활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더욱 깊은 실체에 근거를 두도록 도와준다. 마음의 완악함이란 무엇일까?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변화란 의지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작용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은혜를 간구하며 끊임없이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평범함에 정통하라
나는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내 마음을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요함 가운데 느끼는 평온과 평화가 하루 종일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혼란과 소란함으로 가득 찬 하루 가운데 겨우 30분 정도를 할애해 묵상시간으로 지키고 있지만 그 노력은 상당한 가치과 효력이 있다. 나는 공개적으로 신앙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하는 사람으로서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고 위선적으로 보일 때에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내 삶의 이면이 너무나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처리해주실 것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위대한 승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때 성취된다. 충실한 사람들은 자신이 상관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해야 하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억지로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 놓여진 일들을 책임지고 수행함으로써 믿음 생활을 유지해나가야 한다. 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나의 연주 실력이 오직 한 가지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연습이다. 음계와 아르페지오는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웅장하고 멋진 작품을 연주하려면 먼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정통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지에 대해 빛을 비춰준다. 나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존재들’을 아는 데에는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가시적인 세계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가시적인 세계를 ‘빌려오는’ 경우가 있다. 인간들은 비가시적인 세계와 접촉하기 위해 교회나 영적인 훈련, 또는 성만찬 같은 ‘은혜의 수단’들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기도는 호흡 기능을 한다. 이블린 언더힐의 주장대로 “우리는 감각과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므로 두 가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랑과 결혼이라는 요소를 끊임없이 사용한다. 토마스 그린은 성공적인 기도 생활과 성공적인 결혼 생활이 비례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결혼 서약과 하나님과의 언약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두 약속 모두 충실함을 요구하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는 의미에서 믿음을 요구한다. 우리는 오묘한 일과 확연히 드러난 일들 사이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위대한 미지의 존재시다.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는 우리를 보존하고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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