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7 / 노아와 믿음의 순종
서론과 복습
1. 믿음의 증거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실례(實例)들을 접하게 되는데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참된 믿음은 개개인의 행위로 말미암아 알려지도록 되어 있었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행하여진 사역들과 행위들을 통해서만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만일 내가 믿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의 삶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지적해 주는 무엇인가를 본 후에야 비로소 나의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약 2:17 참조). 이와 같이 모든 믿음의 용사들이 열거되어 있는 이 대단한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그들 모두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믿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자신들의 행함과 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 믿음의 진보
성령께서는 믿음에 대한 실례(實例)들을 아벨(4절)로부터 시작하여 믿음 생활의 시작을 다루시며, 그 후에는 에녹에게로 가 지속적 인 믿음의 발걸음을 다루시고, 세번째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역을 예시하는 노아에까지 이르신다. 여기에는 점진성이 나타나 있다.
아벨의 기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에녹의 기사는 예배와 하나님과의 동행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노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을 보게 된다. 노아는 믿음에 있어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믿음이 다음과 같이 역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기 전에 예배드릴 것이 요구되며, 믿음의 사역을 할 수 있기에 앞서 하나님과의 동행함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겨우 첫번째 단계에까지만 도달한다. ...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다. 어떤 이들은 두번째 단계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까지 ... 도달한다. 그리고 그 후에야 하나님을 믿고 동행할 뿐아니라 믿음에 전폭적으로 의지한 노아와 같은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순종이다.
노아의 믿음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어서 정상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가 노아가 한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멍청이 짓이 될 것이다. 루이스(C. S. Lewis)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감연히 바보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셨던 것이기에 행하였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그의 믿음으로 밖에는 볼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이기에 행하였던 것이다. 이 점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노아의 믿음이 합당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세 가지 증거들, 즉 노아의 믿음에 대한 세 가지 위대한 증거들이 있다.
-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다.
- 그는 세상을 책망했다.
- 그는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었다.
이러한 것들이 세 가지의 전통적인 참된 믿음에 대한 지적들이다. 믿음이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것이며, 세상을 책망하며 살게 될 것이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바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함(7 상반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Ⅰ. 그의 헌신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다. 어찌나 잘 믿었던지 그는 방주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밖에서 방주를 짓고 있을 때 그의 이웃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모든 것을 눈에 선하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노아에게 "노아야,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물로 세상을 멸하고자 한다. 너는 방주를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이에 대해 노아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모든 것을 차치하고 백년 이상을 방주를 짓는 데에 보냈던 것이다. 그것도 바다와는 너무나 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의 어느 한 장소에서 방주를 지었다.
당신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나 같으면 70년이나 80년 후에는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믿음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데 있어서 이유를 대지 않는 것이다.
노아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이 그에게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를 짓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위대한 헌신인 것이다. 사실 그는 바다로 나가는 배들이 있던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으므로 배에 관하여는 모르는 점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듣고서는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순종하여 그것에 자신의 생(生)을 바쳤던 것이다. 그가 뛰어 나가서 재목감들을 마련한 것도 훌륭한 믿음이지만, 백년 후에도 여전히 역청을 바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노아는 헌신하되 계속하여 하였던 것이다.
Ⅱ. 그의 경외심
7절은 "믿음으로 노아는...(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말해준다. 괄호의 "하나님의"라는 구절은 어떤 역본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개역 한글성경에는 표기되지 않았으나 흠정역에는 표기되었다 - 역자 주). 그러나, 그것은 작은 글씨로나마 분명히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아가 "... 보지 못하는 일에(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할 때, 이 구절에는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test)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신은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는가? 노아는 물을 보지 못했었다. 또한 그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또한 7절은 "노아는 ...경외함으로 ..."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당신은 "아하! 그래서 그가 방주를 지었군요. 하나님께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이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너를 치겠다」고 말씀하셨군요"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잘못 안 것이다. "경외하다"(fear)는 단어는 당 신에게 잘못된 인상, 즉 노아가 두려움으로 인하여 행동했다는 인상을 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단어는 헬라어(eulabeomai)로는 "존경하다"를 뜻한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바를 행했던 것이다. 그는 경건한 조심성으로 행동했었다. "경외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로 경건한 조심성이다. 그는 큰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멧세지를 대했고 방주를 예비했던 것이다. 노아의 믿음은 칭찬을 들었으며 그의 가정, 즉 그의 아내와 세 자녀 셈, 함, 야벳 그리고 그들의 세 아내들은 구원을 받았다. 여덟 명의 영혼들이 구원받았던 것이다.
Ⅲ. 그의 도전
창세기 6장으로 돌아가서 이 사건을 살펴보고, 이 기사에서의 흥미있는 몇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창세기 6장 14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말이지 선례(先例)가 없는 믿음에의 도전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광야 한가운데에 거대한 배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행위들 중의 하나는 노아가 팔을 뻗어 첫번째 나무를 쓰러뜨렸던 사실이다. 한층 더 나은 믿음의 행위는 첫번째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연장을 집어든 사실이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가!
유의 사항 : 방주에는 많은 풍유와 상징이 있다. 이것의 한 가지 예는 "역청"이라는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역청(Pi-tch)은 속죄(Atonement)와 같은 단어이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피를 너의 영혼을 위해 단 위에 바르도록(pitch) 너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영혼을 위한 역청(pitch)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피이기 때문이다"라고 바꾸어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방주 안에 있으면 안전했다. 왜냐하면 역청이 밖의 물 심판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역청은 우리를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이다. 방주에는 역청으로 말미암아 물이 새는 곳이 있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피가 심판의 홍수로부터 신자를 감쌌으므로 결코 신자를 해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사상인 것이다!
2. 창세기 6장 15절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상세한 청사진은 다음과 같았다. 즉,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長)이 삼백 규빗 광(廣)이 오십 규빗 고(高)가 삼십 규빗이며 ..."
한 규빗(cubit)이 얼마만한 길이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즉, 그 길이가 44-56cm가 된다고 말들을 한다. 만일 우리가 가장 짧은 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방주가 길이 132m, 폭이 22m, 그리고 높이가 13m(약 4층 건물의 높이)의 크기가 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방주는 3개의 갑판 (3층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임 - 역자 주)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갑판의 총 넓이는 대략 8,891평방미터(보통의 야구장 20개의 넓이보다도 넓다)이며, 방주의 총 부피는 40,917입방미터나 되는 것이었다.
자!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배인가! 그것의 크기는 오늘날의 거대한 철제 원양 화물선들의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아닌 수준이다. 그 모양은 우리가 최대한 잘 표현한다면, 직사각형의 바닥이 편편한 오막살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뗏목에 윗 부분만 덮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여러 용적들의 배들을 건조해 왔다. 그런데 한 번은 영국 해군의기술자들이드레드노트(Dreadnought: 20세기 초기의 최대 최강의 전함 - 역자 주)의 치수들에 대한 공식을 발견했다. 그 공식은 과학적으로 완전한 것임이 발견되었으므로 모든 해군 함정들은 이 공식의 비율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 드레드노트 전함의 치수 비율과 방주의 치수 비율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배를 지으시는가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3. 창세기 6장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비가 내릴 것이며 당신께서 땅에 홍수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6절에 의하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땅은 땅 밑에서 올라오는 안개로 적셔졌다. 그리고 아마도 안개로 말미암아 땅 전체가 감싸져 있었을 것이다(창 1:6-7). 땅을 뒤덮고 있었던 이러한 안개는 홍수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 장수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태양의 방사선은 결코 그 안개를 통과할 수 없었고, 따라서 태양의 방사선으로 말미암는 폐해에 노출되지 알았기에 사람들은 900년 이상을 향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큰 깊음의 샘들을 터뜨리시자(창 7:11) 땅의 전체 대기(大氣)는 변화되었고 인간의 생명은 태양의 방사선에 노출됨에 따라 즉시 짧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理性)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신 내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이유들이 있다.
1. 이전에 비가 내린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대홍수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2. 하나님의 긍휼이 공의에 의해 감추어져 버리고 그로 인하여 전 인류를 멸절하실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었다.
3. 심판은 120년이란 먼 훗날의 일이었으므로 노아는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그래, 그것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개혁할 많은 시간을 주시는 것임이 분명해. 그러니 사람들은 그 때까지는 아마도 정신을 차릴 거야!"라고 말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4. 노아가 그 멧세지를 전했을 때 아무도 그의 멧세지를 믿지 않았다. 120년 후 마침내 홍수가 찾아왔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방주에 들어갔다. 120년 동안이나 전파하여 왔음에도 아무 결과가 없음에 대한 자연적인 반발로 그 멧세지를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계속하여 전파하였던 것이다.
5. 내가 확신하건대 노아는 자기 이웃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6. 노아가 가졌었을 한 가지 분명한 의혹은 "만일 홍수가 닥쳐온다고 할 때, 저렇게 거대하고 더구나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두 마리씩이나 싣고 있는 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것이다.
7. 또한 그 방주는 닻도 돛대도 키도 방향타도 없으며 ... 더구나 노아는 항해 방법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4.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
하나님께서는 "노아야, 나는 모든 사람을 멸절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나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8절로 돌아가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에 나타난다. 그리고 9절에 의하면,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다.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이었지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아 그 자신에게서는 은혜받을 만한 어떤 것이 없었다. 은혜는 주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 은혜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죄인에게 있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흥미를 끌 수는 없는 것이다. 노아도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창 9:21-22 참조).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심령 속에서 죄를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악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자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분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건지셔서 그와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5. 창세기 6장 19-21절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네가 방주를 지은 후 거기에 동물들을 넣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러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노아는 이 동물들이 각처에서 오는 동안 문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동물들이 정말로 나아왔던 것이다! 하나님 그분께서 그들을 방주로 이끌어 들이셨다는 것 외에는 이러한 모습을 설명할 방도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관점에서, 그 방주는 7,000종의 동물들을 쉽사리 실을 수 있었다고 계산했다. 이것은 매우 적은 수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이 두 마리씩 방주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에는 종(species)이 있는 것이다. 종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퍼져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을 시에는 분화된 각각의 동물은 같은 종이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양(sheep)보다 큰 지상의 포유류는 기껏 290종(species) 밖에 안 되며, 양보다 작고 고양이보다 큰 것이 약 757종, 그리고 고양이보다 작은 것이 1,359종 가량이 된다고 한다. 이 조사에 의하면 기껏해야 2,500종(species) 정도가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중간 크기인 고양이 정도의 동물 한 마리는 0.2평방미터도 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에서 동물들의 우리를 짓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9-21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셨던 그 명령은 여전히 이상하고 기괴한 것이었다. 즉, 그 동물들은 어떻게 그곳까지 도착할 것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거할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먹일 것이며, 누가 그 장소를 청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부대적인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거의 1년 동안이나 방주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노아는 생각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6.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왔으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 생각만 해도 자신이 없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도 못되어 하나님에 대한 인내심이 말라 버리지만, 노아는 무려 120년 동안이나 거기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아가 보여 준 놀라운 믿음의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그는 믿었으며, 자기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행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순종했던 것이다. 노아는 심판과 약속과 그밖의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었다. 그는 짓기로 되어 있던 대로 방주를 지었으며,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감내했으며 그 모든 것을 행하였던 것이다.
스펄젼(C. H. Spurgeon)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께서 대속의 보혈로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약속에 관해서는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만 심판에 관해서는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노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믿었다. 스펄젼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하나님을 고백하신 당신이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경고가 당신의 피를 얼어 붙게 하며, 당신의 본성(本性)은 저항할 수없는 운명을 피하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한 가지 점에 있어서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는, 계시된 진리의 다른 점들에 대해서도 당신이 불신하도록 이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그가 약속을 받게 될 것임을 믿었을 뿐아니라 전(全)세계가 멸망당하게 될 것도 역시 믿었다. 그는 모든 것을 믿었다... 즉,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이다.
세상을 책망함(7 중반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Ⅰ. 설교자로서의 노아
당신은 노아가 설교자였음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그가 무엇을 설교했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관하여 말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의 개요에 대해서도 말해 주려고 한다. 먼저 베드로후서 2장 4-5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가 무엇이었을까? 일백 이십 년 동안 배를 짓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설교였다. 그가 방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거나, 그가 나무를 쓰러뜨리는 소리를 듣거나, 혹은 그가 등에 판자들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삶으로 설교했다. 즉, 모든 쓰러진 나무들과, 톱으로 켜진 판자들, 그리고 박힌 못들이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호를 받으라"고 설교했던 것이다. 120년 동안이나 그가 설교를 하였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노아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믿음으로 자기 시대를 향한, 생생한 책망으로써 일관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책망했던 것은, 바로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꾸짖는 것이다.
Ⅱ. 노아 당시의 사회
창세기 6장을 조사해서 노아가 살고 있었던 사회의 몇 가지 특성들을 살펴보자.
1. 죄악이 관영함(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간의 눈은 사람들의 외부로 나타나는 악한 행실들만을 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심중(心中)으로 하는 일을 감찰하실 수 있는 것이다(겔 11:5 참조).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가 악했을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파렴치한 상태였다.
2. 하나님을 슬프시게 함(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는 의외의 일도 없으며,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도 않으신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대하게 되는 표현은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n)이거나 하나님에 관한 인간언어로의 진술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던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15장 29절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보기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바꾸시고 인간을 멸절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 노를 발하셨으나 마음으로는 슬퍼하셨음을 주목하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며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좋지 않은가?
3. 마귀에게 사로잡힘(7절)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얼마나 무서운 결단이신가! 사람들은 대개가 마귀에게 사로잡혔으며, 너무나 극도로 타락하였었기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멸절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함께 동거했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 즉 마귀들이었다고 믿는다(1-4절 참조).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 세대를 멸절시키셔야만 했던 것이다.
4. 패괴함(12절)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하나님의 길을-흠정역) 패괴함이었더라"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패괴했었다(더럽혔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분의 길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았으나 자신들의 길로 가기로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마서 1장 21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말한다.
또한 25절은 "...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그분의 길을 더럽혔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비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셨으나 그들이 자기들의 길로 가버렸음을 기억하라.
Ⅲ. 하나님의 선고
창세기 6장 13절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의 선고를 노아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세상은 타락했고 부패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들을 멸하겠다고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별된 백성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케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모스서 3장 7절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분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겐가 말씀하시곤 하셨으며, 이곳에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목적
어떤 사람은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우신 분으로만 여전히 보여집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긍휼은 뒤로 하시고 공의만이 그분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시간이 끝나고, 공의의 팔을 드실 것이라는 사실은 죄악으로 저주받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소망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죄가 심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악되고 파렴치한 세상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세상을 원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해 주신 세상을 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공정한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멸절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멸망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세상은 타락했고 부패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들을 멸하겠다고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별된 백성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케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모스서 3장 7절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분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겐가 말씀하시곤 하셨으며, 이곳에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목적
어떤 사람은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우신 분으로만 여전히 보여집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긍휼은 뒤로 하시고 공의만이 그분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시간이 끝나고, 공의의 팔을 드실 것이라는 사실은 죄악으로 저주받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소망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죄가 심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악되고 파렴치한 세상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세상을 원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해 주신 세상을 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공정한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멸절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멸망당한 것이다.
멸절시키심과 심판하심에는 긍휼이나 은혜는 없는 것이라고 호리라도 생각지 말라 - 그것은 분명히 있다! 반하우스(Donald Grey Bamhouse)는 "지옥은 하늘나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일부분이다"라고 말했다.
2.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심판은 더디게 천천히 임한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보여진다. 창세기 5장 21절은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라고 말한다. 당신은 "므두셀라의 무엇이 중요합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보내질 것이다"이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네가 너의 자녀를 보느냐?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지속될 것이다. 그가 죽을 때에야 그것을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그런데 무엇이 보내질 것인가? 멸절시키기 위해 오는 대홍수인 것이다. 세상은 에녹의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되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은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 외에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선 므두셀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므두셀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심판을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므두셀라는 얼마 동안이나 향수했는가? 그는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도 긴 969년을 향수했다. 이러한 사실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무엇인가를 말해주지 않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비난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살펴보라. 하나님은 너무도 긍휼을 베푸셔서 거의 1,0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실제로 진리를 알 기회를 가졌을까?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세상은 진리를 결코 알지 못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 로마서 1장 19-20절은 사람들이 보이는 피조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그들로 변명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 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기 위한 약속된 여자의 후손, 즉 구속자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었다.
O 하나님께 다가오는 방법으로서의 속죄의 제사가 아벨의 때에 주어졌으므로(창 4:4) 그들은 하나님께로 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창 8:20 참조).
-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계속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 아담은 930년을 향수했으며, 아마도 죄가 그에게 가져온 파급 효과에 관한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면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을 것이다.
- 에녹의 설교는 경고였다(유 14-15절).
- 노아의 설교도 경고였다.
- 성령께서는 사람들과 싸우고 계셨다(창 6:3).
그러므로 노아의 세대가 진리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들은 알고 있었으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그것을 거절했던 것이다.
Ⅳ. 노아 시대와 오늘의 유사점들
마태복음 24장 37절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노아 시대의 특성들이 무엇이었으며, 그것들 중 오늘날 반복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조롱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2. 노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번성했다.
-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인구 폭발은 당시의 두 배에 달한다고 말한다.
3.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을 인내로 대하셨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인내하며 대하신다.
4.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선 자신의 설교자들을 가지고 계셨다.
-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설교자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5.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신(神)은 사람과 싸우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아니하리니..."(창 6:3 상반절)라고 말씀하셨다. 그 싸움과 더불어 성령을 거두시겠다는 위협이 있었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神)이 사람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장 6-7절의 약속에 의하면, "막는 자"되시는 하나님의 신(神)은 떠나시게 될 것이다.
6.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멧세지는 거부되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7. 노아 시대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었다.
- 오늘날에도 있다.
8. 노아 시대에 에녹은 기적적으로 옮기워졌다.
- 이것은 심판 이전에 성도들의 휴거에 관한 모습이다.
9. 노아 시대에 땅에는 마귀가 활동하고 있었다.
- 오늘날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의 사람을 본다. 우리는 그의 믿음이 참된 것이었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으며, 세상을 책망했고,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음(7 하반절)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성경에서 의로운 자라고 불리워진 최초의 사람이다. 창세기 6장 9절에는 그가 "의인"이라고 불리웠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노아를 묘사하기 위해 "의로운"이라는 뜻의 「디카이오스」(dikaios)가 이 구절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노아가 믿음의 상속자가 되었다면, 그리고 의롭다함을 얻는 유일한 길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노아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세번째 길은 그가 의롭다고 선언된 것에 있었다.
노아가 의롭다고 선언된 사실이, 그가 자신의 힘으로 너무도 의롭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선 그의 의로움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의(義)가 그에게로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義)를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22절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싶다. 즉, 만일 당신이 장미빛 안경을 통하여 보게 된다면 모든 것은 장미 빛을 띄게 될 것이며, 파란색 안경을 통하여 본다면 파랗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통하여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보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주는 안경을 통하여 보고 계셨으며, 현재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 그분과 동일하게 보고 계신 것이다.
노아는 믿음의 삶과 걸음과 사역을 모든 방면에서 예증한다. 그는 믿음의 사람의 한 모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같이 그 명령이 아무리 기괴하고 이상하며 어렵고 비정상적인 것 같을지라도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더 많은 남종들과 여종들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셔서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며, 타락한 세상을 향해 책망하는 자로 서게 하시며,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서 서게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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