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23편 6절-24편 4절.
23편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4편 1절-4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23편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진리성도 다윗은 평생 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체험을 했다. 무슨 말인가 하니 다윗은 ‘나를 여호와 하나님처럼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구나’ 하는 이것을 체험을 했다는 거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이라는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니까 나쁜 사건을 주면 하나님을 선하심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육신생활에 좋도록 해주면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선대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기 쉽다 그 말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사건 환경들은 상 위에 차려진 음식과 같다. 그래서 ‘다윗아, 이걸 먹어라’ 하고 사건 환경을 주어서 다윗이 이걸 먹는 건데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가 다른 거다. 다윗은 믿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자기 앞에 놓여진 사건을 겪는 거다.
우리도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신경질을 내며 투정을 부리는 식으로 나가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는구나’ 하면서 감사함으로 받아라. 좋은 사건을 줘도 그렇고, 인간 보기에 나쁜 사건을 줘도 그렇다. 이건 참으로 고차원적인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다윗 앞에 차려놓은 상에는 첫째는 하나님의 종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음이라든지, 두 번째는 골리앗을 죽인 일이라든지, 골리앗을 죽인 이 일은 다윗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나간 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리라’ 하고 나간 것은 아니다. 목숨을 내놓고 나간 거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그대로 죽는 거다.
또 세 번째는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하여 쫓겨 다닐 때라든지, 네 번째는 왕이 된 후에 밧세바의 사건에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책망하여 회개케 한 사실이라든지, 다섯 번째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라든지, 이 외에도 전쟁의 사건들이 많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셔서 선하신 역사를 한다고 믿으면서 교만치 않고 깨닫고 감사한 거다. 원망불평이 아니라 그대로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과 인자하심으로 다윗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역사하심을 믿는 신앙이다. 이런 것을 다 모르고서는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하겠느냐? 모르고는 못하는 거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지금도 마음이 그렇지만 마지막 죽음 이후에도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같이 살 것이라는 거다. 그러면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같이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남이라면 같이 사느냐? 그러니까 남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 식구라는 말이다. 그리고 한 식구라는 것은 뜻이 같다는 말이다. 집이 잘 되는 일로 뜻이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닮았다는 말이요, 평소에 서로가 사랑을 했다는 말이요, 그래서 영원히 같이 산다는 말이다. 같이 산다는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사랑하면 같이 산다. 사랑을 안 하면 같이 못 산다. 뜻이 같고 마음을 같이 하는 게 들어있다. 우리의 신앙도 이래야 한다.
24편 1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무엇이냐?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그 모든 물질을 말한다. 동물류, 식물류, 조류, 어류, 산과 강들, 자연계의 모든 법칙들, 이게 다 누구의 것이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까 여호와의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자기 것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네가 한 번 다스려 봐라’ 하고 나에게 잠깐 맡긴 거다. 잘 다스리지 못하면 몽둥이찜질이 올 거고, 잘 다스리면 자기에게 많은 혜택이 올 거다.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세계’란 각 나라 민족과 인류들을 말한다. 이게 누구의 것?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피부와 색깔과 골각의 차이가 있고 언어와 풍습이 다 다르더라도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그 중에 거하는 자’란 세계 인류 중에 거하는 자를 말한다. 이 자가 누구냐? 영적 선민 이스라엘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지으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피로 사신 당신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영물들까지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전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 모든 것을 지으셨을까? 여호와 하나님에게 이런 모든 게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다 필요한 것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자연만물을 만들어 놓으시고 이 자연 가운데 인간을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 자연만물을 보게 해서 ‘야, 참 아름답구나. 이걸 다 누가 만들었느냐?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셨구나.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이 소리를 듣고 싶어서 만든 것일까, 아니면 다른 뜻이 더 있는 것일까?
한 마디로 성도 자기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우주만물 삼라만상을 다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연법칙을 이용 활용하게 했고, 진리와 아가페로 연관관계성을 잘 맺으면서 이룰구원을 잘 이루라고 많은 사람들을 나게 하신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만물의 변화 속에서, 악한 영물들의 활동을 허용한 그 속에서, 사람들의 민심의 동요와, 크고 작은 사건들의 발생과, 환경의 변화와, 남녀노소 빈부의 격차와, 영광의 격차와, 미모의 격차와, 능력의 격차와, 활동의 격차 등이 있는 이런 세상 속에서 진리의 성도가 이룰구원의 신앙실력을 쌓아가도록 한 것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주와 자연만물을 이용하시면서 성도를 바로 세우고, 또 깨닫게 해서 참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을 하시는 것이니 믿는 자기가 이런 세상에 살면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느냐, 이룰구원을 이루지 않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나 징계가 따르는 거다.
세상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니 다 하나님이 것임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이 가운데 인간을 만들어서 이 세상 가운데서 훈련 연단을 시켜서 하나님의 신령한 성품을 입혀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려는 것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는 면으로도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아니 것이 하나도 없다. 신령계와 물질계를 총 망라하여 다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2절: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이 말씀이 참 수수께끼 같기도 하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어디 위에? 바다 위에 세우시고, 또 강물 위에다 건설을 했다고 한다.
삿:에 보면 삼손이 수수께끼를 냈는데,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도다.’ 이건 삼손 자기 혼자만 답을 아는 수수께끼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계의 수수께끼도 그렇다. 그런데 삼손이 이 문제로 우리들에게 수수께끼를 낸다면 우리는 성경에 이 내용이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에 답을 금방 안다. 그런데 그 때 당시로는 삼손 자기만 아는 것이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먹은 다음에 안 먹는 게 나온다고 하면 이건 뒤로 빠지는 것인데,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고 했으니 이게 뭘까? 하기야 짐승들을 보면 풀이라도 뜯어먹어야 젖이 나오지 안 먹으면 안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 이치로 볼 때 돌멩이는 먹지를 못하니 먹는 거든 안 먹는 거든 뭐가 나오겠느냐? 지금 이 말은 이게 아니라 영적인 뜻이 있다. 즉 영의 말씀을 먹는 자라야 먹을 것이 나온다는 거다.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강한 자에게서 하나님의 단 말씀이 나오게 되어있다. 원리가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모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볼 때는 다 수수께끼 같은 사람들이다. 원리가 그렇다. 즉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속을 모른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믿는 사람이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깊은 속을 가져야 되는 거지 일반사람들과 똑같은 속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도 우리의 속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아래로 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백성들이 복음을 전하는 게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면 수수께끼라서 못 알아맞힌다.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수수께끼는 알아맞혀야 재미가 있지 못 알아맞히면 재미가 없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바다 위에 세워진 터가 무엇이냐? 이 지구 땅덩어리가 처음에는 바다였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물이 한 곳으로 몰리게 하고서 ‘땅이 솟아나라’ 하고 명령을 하시니 바다 위로 땅이 솟아났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된 게 바닷물이 한 쪽으로 모이니까 산(땅)이 나타난 건지, 아니면 바다는 그대로 있는데 산이 솟은 건지? 정말 신기하다.
그리고 지구는 둥구니까 바닷물이 지구 옆에 붙어있는 셈이고 우리도 지구 옆으로 붙어있는 셈인데, 과학의 세계에서야 지구가 끌어당겨서 이렇게 된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없다면 당장이라도 한없이 밑으로 떨어져 버릴 거다. 참 신비롭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바다 위로 땅이 솟아나서 ‘바다 위의 터’라고 한 것일까?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바다 밑으로 내려가면 바다 아래도 땅이다. 땅이 있어야 바다가 생기는 거지 땅이 없는 곳에서는 바다도 없는 거다. 그래서 바다는 땅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담겨진 물이기도 하다. 땅이라는 그릇 속에 담겨진 물이다.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그러면 흐르는 강물은 무엇이냐? 땅이 솟아나고 물이 한 쪽으로 몰려갈 때 이 물이 빨리 빠진 것은 바다가 되어버렸는데 아직 덜 빠진 물은 계속 흘러가니까 이게 강물이 된 것이냐? 천천히 흘러가니까 강물이 되었고 빨리 빠진 것은 바다가 된 거냐? 바다 위에 터가 세워진 이것이 무엇일까? 바다 밑에도 땅인데 문제는 바다 위에 터가 세워져 있다고 하는데 이게 뭐냐?
바다는 산 밑에 있기 때문에 이걸 하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다는 하늘 아래 지구 땅에 있다. 그런데 바다 위에 터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게 뭘까? 석유를 채취한다고 시추기를 설치해 놓은 건 아닐 테고 이게 뭘까? 여기서 바다는 인간세상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인간세상 위에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속한 기본구원의 터를 세운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거다.
이 기본구원의 터는 신령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기본구원의 터가 어디에 있느냐? 성도다. 성도는 기본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기본구원의 성격 성질은, 하나님의 것으로 닮은 것은 물 위에 있는 것이지 물 밑에 빠지지 않는 성질이다. 신령성이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기본구원의 터, 그 정신 사상, 그 신앙 믿음을 가진 자는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 세상이라고 하는 물질 밑으로 빠지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참 희한한 수수께끼다.
바다 위에 터를 닦았다? 무슨 터를 닦았느냐? 바다 위에 흙을 갖다 부어서 바다가 넓은 터가 되었다는 거냐? 이런 의미는 아니다. 바다는 세상, 여기서는 세상을 바다라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 위에, 세상이라고 하는 물 위에, 물이라고 하는 세상 위에 터를 닦았다는 거다. 세웠다는 거다. 이건 신앙의 세계에서만 이해가 되는 말이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성격과 성질은, 그 소원 목적은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에 빠지지 않는 성질이다. 왜냐? 신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초월이라 그 말이다. 물질 위라 그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예수이름으로 세상 것을 이뤄달라고 소원 목적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세상이라고 하는 물에 빠진 신앙이다. 이 신앙은 살지 못한다. 물에 빠진 신앙은 살지 못한다. 세상에 빠진 신앙은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면 흐르는 강물 위에 건설된 이것이 무엇일까? 강물은 흐르는 것이고, 물이 고여 있으면 이건 호수다. 강물은 흐르는 것인데 흐르는 이 강물 위에 무엇을 건설하였느냐? 사람들이 흐르는 강물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세월이 강물처럼 빨리 흐르는구나’ 라고 한다.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다’ 라고 한다.
그러니까 강물은 세월을 의미하고 시간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 때 지음을 받은 모든 물질세상은 다 시간의 흐름 속에 들어있다. 모든 창조물이 시간 속에 들어있다. 시간 속에 흘러가 버린 것은 마치 어둠 속에 들어간 것처럼 영원히 묻혀버리고 되돌아오지 않는다. 인간의 젊음도, 건강도, 미모도, 재산도, 부요도, 영광도, 권세도 전부는 영원으로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시간 속에서 영원으로 흘러가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도, 정들었던 부모형제나 자녀나 친구도 모두는 영원으로 사라져 버린다.
사람들은 이미 영원히 흘러간 허망한 것을 붙들고 가슴앓이를 한다. 우리 신앙의 세계에서는 좋지 않은 거라든지 좋은 거라든지 흘러가 버린 것은 다시 잡아올 수 없고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것이니, 사실 그 기억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거다. 그러니까 기억을 할 수 있다면 좋은 것만 기억을 해야지 나쁜 것은 기억하지 말아라. 그러나 좋은 것도 기억할 필요는 없는 거다.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생각이 앞으로 못 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 인간의 생각은 동시적으로 두 가지 생각을 못한다. 옛날 것을 한 번 생각하고 난 후에 앞으로 될 것을 생각을 하게 되어있지 한꺼번에 두 가지 작용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앞만 보고 뛰어라. 과거만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생각과 마음이 앞으로 발전적으로 못 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인지라 순간적으로 과거가 생각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붙들고 가슴앓이를 하지 말아라. 그러면 치매 걸리고, 사람 속에 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영원히 생명으로 살릴 수 있는 것으로 구원건설을 100% 이뤄놓았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사망으로 영원히 흘러간 것은 하나도 없다. 손발이 닿는 모든 것을 100% 영생으로 생명으로 이뤄 놨다. 이런 삶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생명적이고 영생이라는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 종교인들과 사고방식이 똑같다. 이걸 미리 아시고 우리가 안 믿을까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직접 모범으로 바른 믿음의 삶을 보여주셨고, 부활 승천한 것을 다 보여주신 거다. 그런데도 안 믿는다.
우리의 기본구원의 터는 세상에 속한 게 아니라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세상 위에 있다. 우리의 속에 예수님의 구속으로 기본구원을 얻은 이 성격 성질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신령계, 하늘나라에 속한 거다. 세상 위에 있는 거다. 우리의 기본구원의 터가 세상 위에 있는 거고, 신령성에 속하는 것이니 성도야, 제발 세상 밑에, 물 밑에 들어가서 종노릇하며 살지 말아라 그 말이다. 흐르는 강물 같은 시간 속에 살면서 그대로 영원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모든 사건 환경 속에서 이룰구원을 잘 이루고 가라 그 말이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수수께끼처럼 들리겠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한 거고, 이게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존재가치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예수 믿는 존재가치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없으면 이 세상은 불바다가 된다. 이 세상에 성도가 있을 때 지구도 존재하는 것이지 성도가 없으면 이 세상은 불태워 버린다. 그러니까 자기의 존재가치를 생각을 해보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시킨 것을 생각을 해봐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에게 닥친 사건 환경을 영원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물 위의 기본구원의 터 위에서 생명계로 삼킨바 되게 이룰구원으로 실상을 잘 건설하고 가야 한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영생으로 전부 살려라. 영생으로 건설을 하라. 네 신앙 믿음을 가지고 영원히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건설을 하라.
이를 위해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통해서, 예수님으로 통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인생이 헛 살지 않는 길을 열어 놨다. 그러니 한 번 왔다가 가는 인생이지만 영원으로 흘러가 버릴 인생으로 살지 말아라. 언행심사 손발이 닿는 것마다, 눈동자가 가는 곳마다 살려내는 작업을 하라. 이게 너의 존귀와 영광이고, 이게 너의 믿음실력이고 능력이다. 절대로 어둠 속에서 영원히 묻혀질 인생으로 살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자기의 실상을 건설하고 가자. 자기의 실상은 예수님으로 닮아진 것이다. 예수님으로 닮아진 것은 변화 부활 때 다 천국에 들어간다. 이건 죽는 게 아니다.
3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누구보고 하는 말이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냐?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예수 믿는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 라고 할 때 예수 믿는 내가 가만히 있을 거냐? 얼른 ‘저요. 내가 오르겠습니다’ 해야 한다.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할 때 ‘내가 서겠습니다’ 해야 한다. ‘그게 누군고’ 하는 것은 믿는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말이다. 격동시키는 말이다. ‘예, 저요’ 하는 나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여호와의 산이 어떤 산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곳이다. 구약시대에 어느 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났느냐? 시내산에서 나타났다. 그러면 이 시내산이 왜 거룩한 거냐? 지금 산을 타는 사람이 시내산에 올라가면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안 나타나면 거룩한 산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바로 그곳이 거룩한 산이다. 하나님이 나타났다가 없어진다면 거기가 거룩한 곳이라고 하며 그곳에 말뚝을 꽂아놓고 순례하러 오라고 하겠느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면 짐승이 이 산에 올라가느냐, 못 올라가느냐? 못 올라간다. 죄인이 올라가느냐, 못 올라가느냐? 못 올라간다. 아무나 올라가고 싶다고 해서 올라가지는 것이냐? 아무나 올라가면 죽는다.
4절;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느냐?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이 사람이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고 거룩한 곳에 선다고 한다. 이 의미가 뭐냐? ‘곧 손이 깨끗하며.’ 손은 일하는 손이요, 사역을 하는 손이요, 역사를 이루는 손이요, 손은 주는 손이요, 받는 손이요, 뇌물이 없는 손이요, 복음을 주는 손이요, 돕는 손이요, 신앙 양심적으로 하나님 앞에 깨끗한 손이다. 손이 깨끗한 자가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
그러면 무슨 손이 깨끗한 손이고, 무슨 손이 더러운 손이고, 무슨 손이 나쁜 손이냐? 더러운 손은 씻지 않은 손이고, 나쁜 손은 남의 호주머니를 터는 손이냐?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깨끗한 손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 깨끗한 손은 깨끗한 역사를 하는 손이다. 손은 일을 하면 역사가 이뤄지는 것이니 깨끗한 역사를 하는 손이 곧 깨끗한 손이다.
그러면 인간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깨끗한 역사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살면 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 깨끗한 역사다. 다시 말하면 죄를 짓지 않는 역사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것, 깨끗한 역사다. 손은 역사를 이룬다.
‘주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했다. 손은 주고받는 손인데 뭘 주고받느냐? 복음을 주는 손이 복된 거다. 그러면 이 복음을 받는 자는 빌어먹는 거냐? 그리고 복음을 주는 게 복된 거라고 하는데 복음을 준다는 게 ‘주님을 받아라’ 하고 주님을 손으로 주는 거냐? 복된 복음은 뭘로 주는 거냐? 입으로 통해서 말로 주는 거다.
손은 임시의 것, 물질의 것을 주기도 하고, 또 입으로 지식전달을 하는 것도 손이다. 준다고 할 때 손에 쥐어서 주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입으로도 주는 거다. 그래서 복음을 준다고 할 때는 손으로 주는 것만 의식하지 말고 영원한 복, 하나님의 말씀의 복을 입으로 전해주는 것도 손으로 주는 거다.
손이 깨끗한 자가 여호와이 산에 오른다. 다시 말하면 깨끗한 사역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높이 오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교회가 높이 오를 수 있는 역사를 이뤄야 만이 인격이 높이 오르는 거고, 마음이 높이 오르는 거고, 정신이 높이 오르는 거고, 사고방식이 높이 오르는 거다.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 그 말이다.
여호와가 나타난 산에 왜 올라가느냐? 누구를 만나려고 올라가는 거냐? 하나님을 만나려고 올라가는 거다. 아무 산에나 무조건 올라가서 있으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정신과 마음이 고차원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역사를 해야 하나님을 만나는 거다. 이게 깨끗한 손이다. 깨끗한 역사다. 죄를 안 짓는 역사다. 세상 때국물이 안 묻혀진 역사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하며.’ 청결한 마음이 무엇이냐? 죄 씻음을 받고 소원 목적적으로 죄악성과 물욕성이 들어있지 않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무엇도 숨겨놓거나 가로막힌 것이 없고 오직 진리만 들어있는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 것도 끼인 것이 없는 것이 청결한 마음이다.
거울이 깨끗하지 못하면 자기 얼굴이 반사가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반사가 안 된다. 내 마음속에 세상욕심이 조금이라도 묻혀져 있으면 나에게서 하나님이 반사가 안 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뭔가가 끼어있으면 고통이 오기 시작하고 근심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고 살면 그 인생은 결국 허무한 일생이 되고 만다. 영원한 이익이 없는 생각, 영원한 이익이 없는 목적, 즉 소원 목적이 불타고 없어질 세상 것에 목적을 둔 삶이라면 분명히 변질이 되고 불타버린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원 목적, 곧 내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것, 하나님처럼 마음이 닮아지는 이것으로 산다면 이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의 실상이 나타난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시험을 볼 때 자기의 실상이 나타난다. ‘내 실력이 이렇다’ 하는 게 나타난다. 그런데 공부는 안 하고 놀고 쏘다니면 시험을 치면 자기의 실상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부끄럽게 나타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게 어떤 거냐? 언젠가는 자기가 믿은 대로의 자기의 실상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는 자기의 가치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하나님 앞에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우습게 살다가 가는 허망한 인생이 되지 말아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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