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26:2-9]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열려라 에바다 2021. 8. 25. 07:53

26편 2절-9절: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2절: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참 대단하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 어떻게 생각이 되느냐? 이 말을 하는 진리성도 다윗이 교만하게 보이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지 않게 바로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는 것이 보여지느냐?

‘하나님,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라고 한 것이 교만하게 들리느냐,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왔고 바로 살려고 하는 결단성이 보여지느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자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목숨을 걸고 그 말씀을 지키고 살았구나’ 하는 신앙의 마음이 엿보인다.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한다는 게 정말 부럽다. 돋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나를 시험해 주십시오’ 그 소리가 나오느냐?

‘인격적인 면에서 어느 면이 이단인지, 어느 면이 성장을 못했는지, 어느 면이 죽어있는지, 어느 면이 넘어가 있는 건지? 옳은 진리이치로써 확실하게 뿌리가 박혔는지, 아니면 어느 면이 멍청한지?’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음이 올 적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진단을 해봐라. 병원에 가면 청진기로 진찰을 하지 않느냐?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진단을 해봐라.

내 성격상, 내 성질상, 내 신앙의 정신 사상상 어느 부분에서 단단하지 못하고 물렁 죽사발인지? 어느 부분이 부드러워야 하는 건데 굳어있는 건지? 어떤 사건에서 자기가 대립을 일으키는 건지? 어떤 사건에서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건지? 어떤 사건에서 엉엉 우는 건지?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면 ‘어떤 크고 작은 사건을 주어서 나를 시험하소서’ 라는 말인데, 이 말이 ‘나 잘났소’ 그게 아니라 사건 환경을 통과하면서 다윗 자기가 어느 쪽이 물렁물렁하고, 단단하고, 미련하고, 영리하고, 똑똑하고, 괴팍하고 한 게 드러나면 그 면을 고치기 위해서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교인들이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참 드물다. 하나님께서 사건을 들고 와서 깨닫게 하려고 시험을 하면 그 사건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고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았느냐? 이건 없고 어찌하든지 자기 주관성대로 해주면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하겠다는 식으로 되어있다. 이걸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시려고 사건을 들고 찾아오셨는데 못 고치고 그 사건과 환경과 존재가 그냥 지나가 버렸으니 언제 또 만들어질 기회가 있겠느냐?

자기에게 환경적 시험이 오면 항상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 시험에 합격이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른 채 지나가 버리니 그 사건에서 자기를 감찰하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있다가 또 다른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오면 또 그런 식으로 지나가 버리게 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거다. 통과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고 지고 넘어갔다면 언제 시험에 합격이 되겠느냐? 믿음으로 올라가려면 캄캄하구나.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진리성도 다윗의 뜻이 따로 있고, 아버지의 뜻이 따로 있느냐? 성도다윗의 뜻은 아버지 하나님처럼 온전자가 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도 역시 다윗을 향해서 ‘나처럼 온전자가 되라’ 하는 것. 똑같다.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려면 여러 가지 환난과 역경이 필요하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단련이 잘 된 사람은 추위도 이기고, 더위도 이기고, 비바람도 잘 견딘다. 그리고 잔병에 잘 걸리지도 않는다. 권투시합에서 단련이 안 되고 자꾸 넘어지는 사람은 나중에는 아주 못 일어나게 된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온전자로, 참 사람으로 바로 되려면 첫째는 진리이치의 말씀을 바로 붙잡아야 한다. 말씀을 잘못 붙잡으면, 즉 비진리요 이질적인 말씀을 붙잡으면 그 정신면은 허물어져 버린다.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못 이겨나간다. 이길 수가 없다.

조그마한 환난 고통이 와도 물러져 버린다면 이 사람은 뼈대가 없는 사람과 같아서 모든 사건 환경을 제 좋도록만 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그러냐? 자기 마음대로 좋은 것만 오라는 법이 있느냐?

사실 우리나라를 보면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은 큰 걱정이 안 된다. 장애인들에게는 나라에서 먹고 살 것을 어느 정도 주는 모양인데, 몸이 성하면서도 게으른 사람은 장애인들보다 더 힘들 게 살 수밖에 없다. 누가 몸이 성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겠느냐? 그렇다면 몸이 성해서 부지런하게 사는 게 좋겠는지, 아니면 자기도 장애인이 되어서 국가에서 주는 걸로 먹고 사는 게 좋겠는지? 이미 장애인이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하겠느냐? 사람은 연단이 되어야 한다. 정신무장이 되어야 한다.

진리이치를 버리면, 말씀의 이치를 버리면 바른 지혜지식자도 안 되고, 안 되니 미련퉁이가 되고, 미련퉁이가 되니 단련도 안 되고, 이러면 도덕성적인 면에서 온전도 없다. 그러니 자기 고통의 연속이다. 원망과 불평이 많은 사람은 진리를 버린 사람인고로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나를 온전케 만들어 주려고 주신 거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운 사건 환경 고통이 오더라도 거기에서 자기의 부족성을 깨닫고 마음을 바로 잡아라. 안 그러면 스스로 시험에 들고,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스스로 죽는다. 그러면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거겠느냐? 다른 사람은 나보다도 더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데 내가 이까짓 걸 못 이겨서야 되겠느냐?

가만 보면 사람이 편하게 살다가 어려워지면 ‘어찌 살꼬’ 하는 염려 걱정이 된다. 그러나 거지는 항상 없이 산 사람이라서 ‘없으면 또 얻어먹으면 되지’ 라고 한다. 그 마음이 참으로 편하지 않느냐?

성도에게 부딪히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 환경은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라고, 단련이 되라고, 성장이 되라고 준 거다. 그래서 이걸 아는 다윗은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라고 기도를 하는 거다. ‘나에게 부딪히는 모든 환경에서 내 뜻과 마음을 단련하소서.’ 참 멋있는 기도다. 많은 사람들은 환난과 역경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다윗은 환난과 역경을 주어서라도 자기를 단련시켜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해 달라는 소원기도를 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소원기도를 해야 한다.

3절: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진리성도 다윗이 짧은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사건 환경과 역경 가운데서도 진리의 말씀을 붙잡으니 넘어지지 않고 정금 같이 연단되어 나온 것을 체험하고, 이는 오직 주의 인도하심과 변치 않는 사랑임을 발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을 굳게 결심을 하는 마음이다.

믿는 사람이 진리대로만 걸어가면 늘 주님의 인도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앙의 선조들이 말씀대로 걸어갈 때 이걸 다 경험하고 체험을 해서 증거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이상하게 이게 잘 안 믿어진다. 이게 참 희한하다. 안 믿어진다는 게 희한하다. 다윗도 사람이요 우리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걸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4절: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허망한 사람’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여서 넘어지게 하는 자인데, 그런 말을 듣고 앉아있는 사람 역시도 참으로 멍청하고 허망한 사람이다. ‘간사한 사람’은 언행심사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다. 신앙 면에서 허망하고 간사한 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불에 타서 없어질 세상 것에 욕심을 내게 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신앙하는 사람들이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바꿔쳐서 성경을 전부 임시성에 붙여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사한 말들이다. 사람을 속이는 간사스런 말이다. 이런 자들과 같이 앉는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진리로 걸어가는 자는 허망하고 간사한 자들과 같이 앉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 안에 허망하고 간사한 사람들이 많다.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행악자’란 사람을 해치는 자들이고 재산을 뺏어가는 자들이다. ‘행악자의 집회’란 세상소원 목적을 가진 모임들이다. 세상성적인 교회라. 세상 속화된 교회라. 다윗은 그 집회를 미워한다는 거다.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들도 능히 알 수 있는 악한 자들이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면 이건 일반 사회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거다. 일반적인 면으로 보면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은 강도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기꾼이나 강도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우리 도둑질 합시다. 사람을 많이 죽입시다. 빼앗아 가집시다’ 하는 집회를 한다면 세상법관이나 경찰이 그냥 내버려 두겠느냐? 그러니까 이런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행악자의 집회를 보는 게 아니라 ‘행악자의 집회’란 세상 속화된 교회를 말하는 거다.

처음에 누구든지 들을 때는 호감이 가도록 반하도록 만들어 놓고 그 결과를 쓰게 만들어 버리는 모임이 세상에는 허다하다. 특히 다단계 판매가 지금도 많이 있는데 거기에 빠지면 못 나온다. 자식이 은행에 다니다가 다단계 판매에 빠져서 가정이 파탄이 나고 어디에 가서 사는 지도 모르는 일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법을 빙자해서 합리화 시켜 놓으면 사람이 망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걸 법도 못 말린다. 집이 망가지고 사람이 다치는 것을 보면서도, 가정이 파탄되는 것을 보면서도 못 말린다. 그러면 그런 곳에 빠지는 사람들의 머리가, 그들의 소원 목적이 무엇에 가서 붙은 것 같으냐? 돈에 다 가서 붙어 있다. 돈을 좋아하고, 돈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게 되면 틀림없이 집을 나가게 되어있다. 돈 따라 가는 거니까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다 버리고 돈 따라 가게 되어있다.

세상에는 법망을 피하고, 때로는 합법화 시켜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행악자들이 많이 있다. 악한 자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적으로 볼 때도 영의 눈으로 보면 기독교 종교계 안에도 그런 집회가 많다.

공부하러(주-수원 궁극교회와 안양 포도원 제일교회에서 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김경형목사님과 김정학목사님이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 오는 목사님들에게 부흥협회 만들어서 활동하는 사람은 나오지 말라고 했다. 집회를 인도할 때 ‘이 교회는 교인이 몇 명이니 강사료가 얼마다. 얼마다’ 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라 강도다. 이건 ‘그 이치가 어떻게 돌아가면 이건 거짓이고 강도다’ 하는 걸 전혀 모르는 거다. 예수이름을 가지고 자기 주관대로 뭐든지 하면 복음인 줄 아는 거다. 보통 큰 일이 아니다.

영에 속하는 건지, 육에 속하는 건지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내가 앞으로 목사가 되어야지’ 라고 생각을 해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공부를 많이 한다면 그 생각이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냐? 그리고 ‘내가 앞으로 돈 많이 벌어서 사장도 되고 부자가 되어야지’ 한다면 이건 육의 생각이냐, 영의 생각이냐?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목사간판을 따서 목회를 해야지’ 하는 거는 육의 생각이냐, 영의 생각이냐? 다 육의 생각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게 아니라 목사가 되겠다고 할지라도 육의 생각이다.

그러면 어떤 게 영의 생각이냐? 인간 자기가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고 ‘이 사람을 복음의 종으로 써야 되겠다’ 하는 게 있는 거다. 이건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목사가 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 종잇장 하나 차이로 육의 생각이 될 수도 있고, 영의 생각이 될 수도 있는 거다. ‘내가 죽던 살던 나는 오직 주님의 뒤만 따라가야지’ 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의 전 삶을 거기에 맞춰서 살아간다면 이 사람은 ‘내가 목사가 되어야지’ 라고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성장되는 그 사상이 벌써 목회자의 자질이 딱 들어있는 거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목사로 쓰시면 목사가 되는 거고, 다른 면으로 쓰시면 그 면에서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신학교는 의례히 목사가 되려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들을 한다. 이건 큰 잘못이다. 이건 먼저 목사간판부터 따서 목회를 하겠다는 식이다. 누구 마음대로? 간판부터 따려니까 인간의 수단 방법이 막 들어가는 거다. 그렇게 해서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으면 ‘이제 일을 하자’ 라고 한다. 무슨 일이냐? 종교사업이다. 이게 복음이냐? 아니다. 복음은 뭐냐? 먼저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복음운동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목사가 된 사람이라면 이 목사가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있겠느냐, 영의 생각을 가지고 있겠느냐? 간판을 따서 일을 하자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종이 아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이건 종이 아니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영능의 실력이 없는데 성령님이 어떻게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하겠느냐? 진리이치로 깨우쳐서 속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인데 성경을 모르는데 성령님이 어떻게 그 사람을 붙잡고 일을 하겠느냐?

참 종 거짓 종, 거짓 신자 참 신자, 참 신앙 거짓 신앙의 성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볼 줄 모르면 자기 스스로에게 속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속는다. 반드시 속게 되어있다. 물질적 임시적인 것에 소원 목적을 둔 집회는, 즉 ‘물질부자 되자. 축복 축복’ 하는 집회가 많은데 모두는 영원 궁극적인 결과성을 미리 염두에 두고 볼 때 행악자의 집회로 볼 수 있다.

물질에 관한 부요성을 말하면 사람들이 혹한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고, 속화된 교인들도 혹한다. 그래서 그런 곳에는 사람이 많은 거라.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여 영인성장 면에서 죽게 만들고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성의 깨달음이 없이 만들어 놓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사단 마귀의 방법이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를 지옥으로는 못 끌고 간다. 다만 이용해 먹고 차버린다.

세상과 세상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이뤄야 믿음이 있다고 하는 집회는 영과 육, 천국과 세상의 것을 구별할 수 없는 집회다. 이런 집회는 혼돈스럽고 혼잡하고 혼란하고 혼성적인 집회다. 구별이 안 된다 그 말이다. 세상과 천국이 나누어지고, 흑과 백이 나누어지고,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의와 불의가 나누어지고, 생명과 사망이 나누어지고, 영원과 임시가 나누어져야 하는데 이게 하나도 나누어지지 않는 것은 혼합과 혼돈이다. 구별이 없다 그 말이다.

진리이치가 없으니 구별이 없고, 진리이치가 없으니 그 속에서 마귀가 얼마든지 노략질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장난질을 한다. 이런 곳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 펄펄 뛴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진리이치로써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깨닫게 해서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한다.

세상을 가지게 하는 것 같으나 결국 세상도 놓치고 천국의 것도 놓치게 만드는 것이 악한 자들의 집회다. 이런 곳에는 성령의 열매는 없고 사람이 나이만 먹고 빈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런 곳에서는 수 년 수십 년을 예수를 믿어도 깨달은 것이 하나도 없다. 가졌다고 하는 것은 결국 다 불에 타질 거다. 이것이 행악자들의 집회요 귀신들이 거기에 모인다. 행악자들의 집회를 모르면 거기에 참석자들은 사지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셈이다. 그 밥 먹고 그대로 죽는 거다.

행악자들의 집회를 일반에서 찾는 자들은 영적 소경들이다. 성경말씀을 가지고 일반적인 개념으로 말한다면 영적 소경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하고 저주해야 한다. 다윗이 그러고 있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 하리이다.’ 그런 집회에 가지 말아라. 부흥회만이 집회냐? 아니다. 예배도 집회다. 행악자들의 집회에는 가지 말아라.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성경에 보면 제사장들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다. 먼저 자기 자신부터 훑어보고 죄를 회개하고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거다. 씻을 때 더러운 것을 만진 것, 죽은 것을 만진 것, 옮아진 것, 묻어진 것이 다 씻겨진다. 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씻겨진 후에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는 이치를 말하는 거다.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그랬는데, 죄가 있어서 주의 단에 두루 다닌다고 하면 ‘이게 어디라고 두루 다니느냐?’ 한다. 죄가 없어야 주의 단에 두루 다닐 수 있는 거다. 제사장이 전 안에서 다니는 것은 예배의 행위다. 주님의 집에서 봉사의 행위다. 즉 제단 주위로 피를 뿌리는 행위를 말함인데, 이 행위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바쳐드리는 충성스런 성도의 삶을 말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 사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그냥 법 먹고 산다’ 그게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예배가 되어야 한다. 즉 말씀대로 사는 게 예배의 행위라 그 말이다. 교회에 나와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만이 예배라고 생각지 말아라.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린 그 정신 사상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그대로 사는 것도 예배다. 이게 예배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거다.

7절: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거룩한 성도는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들이 많다. 물질축복이나 어떤 어려운 사건을 해결해 주었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성품과 인격에 관한 일로서, ‘내가 사망성 세상성에 얼마나 정복이 되었느냐, 아니면 정복을 했느냐? 내가 거룩성 진실성으로 얼마나 구별되고 성장되어 나왔느냐?’ 이런 면에 대한 주의 기이한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감사요, 이것을 증거를 하면서 살겠다는 거다. 즉 이룰구원에 대한 증거라.

‘내가 이런 이런 어려운 사건 환경이 왔는데도 말씀을 붙잡고 바로 사니까 그것을 통과하게 만들면서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더라’ 하는 이게 증거다. ‘내가 기도를 했더니 꿈에 어디 가서 땅을 사라고 하더라. 가서 보니 그 땅이 아주 싸더라. 사 놓고 보니 그곳이 개발이 되어서 큰돈을 벌었다’ 이런 게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는 자기의 영과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는 면에 해당이 되는 거다.

8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란 물론 신령한 하늘나라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나 또한 하늘나라의 모형인 교회이기도 하다. 거룩한 교회는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가 있으니 주님이 계신 집이요,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란 주의 영광이 나타남을 말함인데, 곧 성도 자신에게 주님의 성품이 입혀지니 그 성도로 인하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 말이다.

성도 자기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옳은 이치로 나타난다. ‘네가 말하는 게 참 옳다. 진짜다’ 하게 된다. 마음이 감화 감동이 되고 사람이 만들어지는, 성품이 만들어지는 그 역사가 일어난다.

세상 많은 교인들이 ‘예수 믿어 부자로 살자’ 하고 있는데 ‘예수 믿는 거는 바로 이런 거다’ 하고 영적 이치의 말이 나갈 때 거짓적인 자들이 그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이게 영광이라. 학생 같으면 시험을 치는데 다른 학생들은 하나도 답을 못 썼는데 자기만 답을 썼다면 아는 것으로 자기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다. 옳은 것으로 영광이 나타나는 거다.

여러 가지 사건 환난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넘어가고 바람에 불려가고 하는데 자기는 진리말씀을 붙잡고 그걸 이겨 나오고 넘어지지 않는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다. ‘야, 저 사람 대단하다. 어떻게 그걸 이겼지?’ 하는 게 영광이다. 말씀을 붙잡으니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를 하는 건데, 그 능력에서 지혜지식이 나오는 거고,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나오는 거고, 그러니 안 넘어지는 거다. 이게 영광이다.

또 쉬운 예를 하나 더 든다면 거의 모든 교회가 추도식에 넘어갔는데 자기는 안 넘어가고 그걸 못하도록 하고 이기고 나와서 진리를 들었다면 이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거다. 의사성이 옳고 지식성이 옳은 거다. 알지를 못하면 이게 안 되는 거다. 미련하면 안 되는 거다. 물렁 죽사발이면 안 된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는 너는 일반적인 생활도 희미하다.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진 그 성도로 인해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더라.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안 믿는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줘서 안 믿는 사람이 칭찬을 하니 그게 영광이라는 거냐? 그런 게 아니다. 사람 됨됨이, 옳은 말을 하니까 이게 그 사람의 영광이요, 곧 하나님께 영광이다. ‘저 사람이 말하는 게 정말 옳다’ 하는 이게 영광이다.

옳게 살려고 하는 성도들 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넘어지면 영광이 안 나타난다. 이겨야 영광이 되는 거지 지면 무슨 영광이 되겠느냐? 주님은 이기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이스라엘의 다윗 왕을 통해 말씀을 하는 거다.

9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죄인’이 누구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자가 죄인이요, 죄인의 그 영은 죽어있다. 그러나 성도 다윗의 영은 주님의 구속의 보혈로 중생이 되어있다. ‘살인자’는 어떤 자냐?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또는 재산도 빼앗아간다. 원한이 있어서 죽이기도 하고,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신앙 면으로 영적 살인자는 성도의 이룰구원, 성장적인 생명을 죽이는 활동을 하도록, 노력을 하도록 해놓고서 거기에서 이익이 오는 것을 다 빼앗아 가는 자다.

진리성도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속받은 영을 가졌고, 또한 성도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인들의 신처럼 여기지 아니했고 인격적으로 믿었다. 인격적 관계성으로 살았다 그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처럼 만들어 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과 자기와 인격적인 관계성으로 맺어가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성도다윗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따라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따랐고, 이방의 신들을 정복하며 살았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랑을 했다. 죄인과 살인자들은 자기의 몸을 악의 병기로 쓰며 살지만 진리성도 다윗은 자기의 몸을 의의 병기로 쓰며 살았으니 다윗은 악인들의 정신적 사상과는 근원도 다르고 성질도 다른 전혀 별개의 사상과 정신이니 절대로 악인들과 같이 취급을 할 수 없다.

주님의 삶과 죽음은 이방인들과 같은 그런 취급을 할 수 없고, 주님과 같이 죽은 강도들과 같이 취급을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반적인 가치로 여기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교인들이 일반세상의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반적으로 취급하는 증거가 되는 거다. 교인이 이렇게 되면 자기의 신앙도 세상 일반적인 신앙임을 증명을 하는 거다. 그러니 이런 자들은 자기가 주님을 일반차원으로 끄집어 내린 것이니 자기도 이방세상 불신세상과 같이 예수 믿는 자로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건 자기에게 앙화다.

오늘날 자기의 신앙이 일반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수준을 일반인간 차원으로 끄집어 내린 것이니, 하나님이 일반이 돼버렸으니 결국 예수 믿는 자기도 특수가 되어야 하겠는데 특수가 아니라 일반화 돼버린 거다.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돼버렸다. 이게 자기에게 앙화다. 그러니까 영적 차원에서 죄인이요 살인자들과 같다 그 말이다.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취급을 했으니 앙화다. (계속)

김경형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