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사실 세 가지 (히 9:27-28)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시간에 “분명한 사실 세 가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 철학적 사고를 하지 않아도 자신을 꼬집어보세요. 내가 존재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늘 땅 사람 역시 그렇습니다.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시고 땅을 짚어보시고 사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부정할 수 없는 3가지 사실을 말씀합니다.
1. 죽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누구나 다 죽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합니다. 대구 남산동 높은 구릉에 성직자의 묘지가 있는데 이 묘지 입구에 이런 팻말이 붙어있다고 합니다.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히, 끄라스 띠비)라는 라틴어 팻말입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 차례라는 의미입니다. 무개념 인생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 때 유익합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도 전7:2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7:4에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야 영원히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하신 대로 사람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중국 진나라의 제31대 시황제가 서복이라는 방사를 시켜 불로초 불사약을 구해오라 해서 동남동녀 3,000명을 보냈지만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불사약을 구해오지 못해 형벌이 두려워 도망쳤다는 설이 있습니다.
2.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다시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니 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믿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죽어 본 다음에 믿으면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사상가요 물리학자인 파스칼은 “여러분, 저랑 내기 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는 편에 내기를 걸겠습니다. 그 내기에 이겼을 경우 나는 영원한 영생을 누립니다. 반대로 그 내기에 졌다 해도 후회스러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학자다운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임종할 때도 많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분도 여러분이고, 부르실 날짜까지 일러 주신대로 가신 분이 여러분이고, 가실 때 웃고 가신 분도 계십니다.
함평에 김0수 집사가 임종했는데 놀랍게도 다시 살아나셨어요. 그리고 자녀들을 모아놓고 영광종합병원이 들썩일 만큼 외쳤습니다. “천국을 보고 왔다. 지옥도 보고 왔다. 너희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믿을래? 안 믿을래? 믿을래? 안 믿을래?” 안 믿는 자녀들을 붙들고 얼마나 당부를 하는지 아마 천 번도 더 했을 거예요. 그렇게 결신시켜 놓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어느 날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씀입니다.
3.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28절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여기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그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얼마나 귀한 복음입니까? 예수 공로로 믿기만 해도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 믿고 자기 죄를 뉘우치고 천국에 갔지만 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을 비난하다가 지옥에 갔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예수 믿고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000권사님은 하나님의 딸이 분명합니다. 권사님은 지금 하나님의 품안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예수 믿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더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인생의 성공자가 되고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서 희망찬 내세를 살아가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례식설교] 불변의 세 약속 (사 7:14)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어느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마지막 날이 제일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참 솔직하시더군요. 정확히 말하면 살 일도 걱정이고 죽을 일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믿는다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불변의 세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비밀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말씀은 임마누엘입니다.
본문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배경을 보면 당시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유다의 아하스왕과 백성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어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라고 전하면서 하신 약속이 임마누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사나님을 믿으면 그 어떤 두려움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요16:32-33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그 험한 고통의 십자가도 지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날마다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으세요. 이건 복음입니다. 보지 못하고 체험이 없어도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입혀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에벤에셀입니다.
삼상7:12에 나오는 말씀으로 “에벤에셀”이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이 에벤에셀도 그 배경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죽고 청년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 민족회개운동을 일으킬 때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 떨 때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레를 발하셔서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셔서 그들을 치게 하시고 나머지는 저 멀리 국경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는 날 동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도와주십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46:3-4에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끝까지 도우신다는 에벤에셀의 믿음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 보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세 번째 말씀은 여호와이레입니다.
“여호와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창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100세에 난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아브라함이 사랑과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막으시고 대신 한 숫양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양으로 제사하면서 그 땅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준비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바쳤던 그 양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주 예수를 예비해 주시고, 우리의 일생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놓으셨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어떤 결핍도 다 이기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장례식 예배를 드리면서 어머니가 전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옛날 아버지께서 몸이 아파 돌아가시려고 할 때 어머니가 너무 다급해서 이렇게 기도하셨답니다. “하나님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건강해지셨는데 어느 날 일 나갔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와 달력을 보니까 그 날이 하루도 틀리지 않는 만 5년 되던 날이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임마누엘, 에벤에셀, 그리고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삼고 이 약속의 말씀을 잊지 말고 믿어 우리 모든 일생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 가운데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였도다 (마 27:50-54)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우리 성도가 인생 살다가 하나님의 부으심을 받아 가면서 최후로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함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갈라지고, 땅이 진동하며 큰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하여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도 크지만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의지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그 모습이 더 큰 기적입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 말을 예수를 못 박던 불신자들이 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표적이 있습니다.
1. 하나님 자녀의 표적은 믿음의 표적입니다.
갈3:26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요한도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요일5:1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000 권사님은 어릴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 잘 섬기시면서 성가대도 하시고 교회에 봉사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어찌 하나님의 딸이 아니겠습니까? 요양원에 계실 때도 제가 누구냐고 물으면 저는 잊었어도 예수님의 이름은 잊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2. 하나님 자녀의 두 번째 표적은 소망입니다.
벧전1:3에서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소망은 "엘피다 조산"이라 해서 죽은 소망이 아니라 "생동하는" 혹은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마음에 천국이 있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빌1:23-24에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날마다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의 얼굴은 그런 소망으로 빛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으면 이 땅에서부터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 자녀의 세 번째 표적은 사랑입니다.
벧전1:8-9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요일5:1에도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자녀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 3가지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5)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5-37)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권사님은 하나님의 딸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택하고 부르신 자는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지금 권사님은 아버지 나라에 영광 중에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더욱 신앙생활 잘하고 은혜 많이 받아 믿음 소망 사랑의 3대 표적을 가진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천상체험 간증 (고후 12:1-6)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입관하신 사랑하는 집사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은 하나님의 딸로서 천국에 입성하신 가장 복된 하나님의 자녀임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세상도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도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천상을 체험한 후 간증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잠시 살펴보면
1. 이 경험은 복된 경험이었습니다.
1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주의 환상과 계시가 무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도 무익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이걸 자랑 삼아 소개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14년 후에야 간증한 것은 자기에게 무익해서가 아니라 6절에 나오듯 사람들이 바울을 지나치게 여기고 숭배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2. 이 경험은 타인의 간증이 아닙니다.
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마치 타인의 간증을 전하는 듯한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기를 소개하는 문맥으로 보아 타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원해서가 아니라 이 체험이 철저하게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3. 이 경험은 너무나도 생생한 체험이었습니다.
2절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절에도 반복되는데 이 말씀에는 뭔가 암묵적으로 특정한 사실을 읽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자기라고 직접 거론은 못하고 이 정도 생생한 체험을 전한다면 이거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요? 이런 식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라고 소개할 때 6절 말씀과 같은 부작용이 예상되기에 특정한 소수만 알도록 힌트한 것입니다. 이렇게 꿈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었습니다.
4. 이 경험은 꼭 필요한 축복이었습니다.
4절에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 말씀에서 같은 천국을 보고 와도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꼭 필요한 것을 보게 하신다는 점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바울에게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5. 이 간증에 바울이 겸손이 돋보입니다.
5절에 “그러나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이 체험이 유익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약함 때문에 이런 체험이 주어졌으므로 나의 부끄러움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나의 완악함 때문에, 나의 무지함 때문에, 나의 절박함 때문에, 나의 환경이 너무나 어려워서 그런 체험을 안 주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주신 것이지 누구보다 위대해서가 아니라는 변호입니다. 여기서 진리에 선 그리고 겸손한 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유족 및 성도 여러분!
바울에게 이런 체험을 했다는 것은 바울이 참 성도요 참 사도임을 입증할 뿐 아니라 천국이 있다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마음에서부터 천국이 믿어지고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사님께서 예수 믿고 천국에 가신 것을 기억하시고 온 가족들 그리고 성도들은 우리 사랑하는 집사님 가신 곳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 더 잘 믿고 모두 마음의 천국과 영원한 천국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 (요 14:1-6)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천국에 거처를 예비한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시자 의심 많은 제자 도마가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당연한 질문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사후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염려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천국이 있다면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가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도마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께서 데려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밀림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 때 마침 원주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원주민에게 길을 묻자 따라오시오 하더니 어디론가 가는데 불안해서 어디가 있이 있습니까? 그러자 원주민은 나만 따라오시오. 내가 곧 길입니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마침내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믿으면 됩니다. 천국은 예수의 피, 예수 이름이면 누구나 통과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달린 강도도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주로 불렀지만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신의 죄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비웃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일입니까? 그는 인생에 단 한 번 남아 있던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악한 일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 예수가 필요 없다. 천국도 필요 없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고인은 생전에 예수를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섬기시던 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결코 어둡거나 막막한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어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영광스런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 인생 (벧전 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 시간에 “나그네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그네 인생이라고 하니까 최희준의 하숙생이라는 가요가 생각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유행가이면서도 찬송가 같은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찬송가가 될 수 없는 것은 그 가사에서 느끼는 것처럼 성도는 허무함만을 가득히 안고 사는 방황하는 나그네가 아니요,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아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라고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확실한 나그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 철학이 무엇일까요?
그 첫째는, 준비의 철학입니다. 항상 떠날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 때 장막생활을 했는데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떠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리 머무는 곳이 좋아도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면 떠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을 소중히는 여기되 너무 애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너무 애착을 가지면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19) 하셨습니다. 예수 믿어 천국 갈 준비도 잘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나그네 철학은 사랑의 철학입니다. 신10:19에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었으니 너희들도 나그네들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할 때도 나그네를 생각해서 다 추수하지 않고 남겨두었습니다. 과수원을 하더라도 10분의 1은 추수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이,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들에게 먹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형제 간에도 더 우애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나그네 철학은 기도의 철학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육신 가지고 나그네로 살 때 육신 하나 관리하는데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여야 하고, 추우면 입혀야 하고, 거처도 마련해야 하고, 아프면 낫게도 해야 하고, 사고도 날까 조심하고 육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지혜롭고 신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121:5-7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121:5-7) 했습니다.
또 하나는 두려움의 철학입니다. 벧전1:17에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 육체로 무슨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 앞에서 죄 짓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고향의 철학입니다. 히11:16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이 땅도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가는 저 천국이 고향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해야 정상입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 강에 놓으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귀소본능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늘 저 영원한 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 마음이 없다면 아직 은혜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곳이 없다면 잘못 사셨습니다. 늘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으면 천국이 그립고 하나님의 품 안이 그리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는 정처 없고 갈 곳 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하고 즐겁고 소망이 넘치는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떠나면 우주의 고아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면서 사모하는 준비철학 사랑철학 두려움의 철학 고향철학을 가지고 가장 지혜롭게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 2 (요 14:1-6)
이 시간에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이 나서 언젠가는 다 가지만 감사한 것은 우리 성도에게는 결코 그 날이 어둡지 않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천국에 거처를 예비한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시자 5절에 제자 도마가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물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사후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염려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천국이 있다면 어디에 있고 거기는 어떻게 가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도마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간단히 말하면 천국 열차이신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께서 데려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을 지나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죄인'이라고 쓴 표를 몸에 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는 천국문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밑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큰 악인은 아닙니다.' 결과는 천국 문 앞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지우고 다시 '죄인이지만 선인이 되려고 애씁니다.'라고 고쳐 썼습니다. 이번에는 통과 되겠지,, 그런데 이번에도 천국 문 앞에서 거절당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옥만은 가지 않아야 하는데 입국이 거절되니 얼마나 통탄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는 구세주 예수가 절대 필요한 죄인입니다.'라고 썼더니 천사가 반겨 맞으면 천국 문을 통과시켜 주더랍니다. 이처럼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구세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고인은 생전에 예수를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섬기시던 분이었습니다. 몸이 불편하지 않았을 땐 교회도 출석하시고 집에 계실 때도 꼭 함께 심방예배를 드리셨고 항상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고 감사하셨습니다.
천국은 예수의 피, 예수 이름이면 누구나 통과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달린 강도도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주로 불렀지만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신의 죄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비웃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는 인생에 단 한 번 남아 있던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 가기 어려운 사람 딱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돈이 많다고 잘 산다고 아쉬운 것 없다고 예수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 예수가 필요 없다. 천국도 필요 없다. 난 너희들보다 잘 산다. 너희들이나 천국 가라.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갈 수도 없거니와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에게는 천국 가는 밝은 길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도 내 공로로 온 것이 아니듯, 천국 가는 것도 예수님 공로로 갑니다. 예수 영접하면 마음에 천국이 있고 예수님께서 직접 데리러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여기 있는 분들 중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국 열차 되시는 예수님 믿고 다 구원 받아 영원한 복락의 세계에 들어가는 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천국 길 (요 14:5-6)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시간에 “예수님은 천국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만이 천국 가는 그 길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이 변함없이 하시는 말씀이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입니다.
고후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도 자신이 성령에 이끌려 천국을 돌아보고 온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온라인상에서 늘 만나는 어느 목사님도 신당동 중앙시장 앞에서 버스에 치어 천국을 경험하고 돌아온 분이 계십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버스에 치어 죽은 사이에 천국을 보고 왔는데 너무나 좋아서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후하셔서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최소한의 조건만은 갖추어야 합니다.
천국 갈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1. 자신이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을 지나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죄인'이라고 쓴 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는 천국문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밑에 '그러나 그다지 큰 악인은 아닙니다.'라고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국 문 앞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지우고 다시 표에다 '죄인이지만 선인이 되려고 애씁니다.'라고 고쳐 썼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가려고 하니까 이번에도 천국 문 앞에서 거절당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옥만은 가지 않아야 하는데 입국이 거절되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래서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는 구세주 예수가 절대 필요한 죄인입니다.'라고 썼더니 천사가 반겨 맞으면 천국 문을 통과시켜 주더랍니다. 이처럼 천국의 백성이 되려면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인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셨는데 왜 그럴까요? 돈이 많다고 잘 산다고 아쉬운 것 없다고 예수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 예수가 필요 없다. 천국도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갈 수도 없거니와 올 수 없습니다.
2. 나의 구주가 예수밖에 없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행4:12에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여야 합니다. 아무나 믿어도 구원 받는다는 종교다원주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 이름으로 천국 갈지 모르니 예수 공자 석가 마호메트 조상 누구 귀신이라도 함께 믿자고 여러 사진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14:12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피 흘리신 공로 믿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벧전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3. 죄를 깨끗이 씻어야 들어가는 곳입니다.
계22:14에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여기 두루마기란 우리 마음과 행실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과 행실의 죄를 예수의 피와 성령의 은혜로 씻으면 이 땅에 사는 날에도 마음의 천국이 임해 그 가운데 살아갑니다.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마음을 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천국 가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나중에 거기서 만나십시다. 거기서 예수님도 만나고 앞서 가신 고인도 만나십시다. 우리나 우리의 자손 중 하나라도 천국 길에 낙오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신이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로 나의 구주로 삼아 이 땅에서 신앙생활 충실히 하다가 천국 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강도의 복음 (눅 23:39-43)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세상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두 종류의 모습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이 이미지는 정말 100만 불짜리 이미지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 그걸 한 마디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극악한 죄인이었지만 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를 비방하고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죄인에게 우리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구원 받기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 천하보다 귀하고, 우리 죄악 헤아릴 수 없이 중해도 자신이 진실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요 예수님이 우리 구세주이신 줄 알고 예수 앞에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물리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믿음으로 당당히 자녀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녀일지 불확실이 아니라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2. 마지막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믿지 않았어도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다면 그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중요합니다. 일생 신앙 생활하다가 마지막 죽을 때 예수 부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므로 마지막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오래 아프지 않게도 기도해야 하지만 예수 믿음 끝까지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일생 남에게 해를 주고 죄 많이 지은 강도가 천국에 가다니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불공평하다면 우리 또한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넓게 보면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극악한 강도도 회개하니까 구원 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입니다. 강도도 구원 받았는데 나 역시 구원 받을 수 있다. 이건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용기 가지시기 바랍니다.
3. 선택은 쉽지만 결과는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끝까지 예수를 비방하며 부정했던 다른 한 편의 강도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긍휼까지 저버렸습니다.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소망 없는 인생입니다.
보면 그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갈란다.” 그 말을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면 누구 책임입니까? 그렇게 부모를 위해서 기도하고 애걸복걸했으면 믿어라도 줘야지 그게 무슨 고집이냐는 말입니다.
다행히 우리 성도님은 늦게나마 예수를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들의 중국선교 참아만 주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너무 성품이 온유하고 내성적이어서 사람 앞에 나오는 걸 주저한 것뿐이지 기도해 주면 그렇게 좋아하시고 평안하셨습니다. 얼마나 복 있고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강도도 예수와 함께 낙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강도와 같이 죽을 때 믿겠다.’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강도와 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우리 모두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랑하는 고인께서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것을 믿고 위로 받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3가지 사실 (히 9:27-28)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시간에 “분명한 세 가지 사실”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질병이 많지만 가장 악한 병을 들라고 한다면 어떤 병일까요? 저는 의심의 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 의심은 자기도 불행할 뿐 아니라 상대의 피를 말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 왕 헤롯이 자기 가족 친척 신하 등 수천 명을 죽였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의심병 때문이었습니다. 의심의 병이 그래서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도 의심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구원의 길을 믿지 못해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멸망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의심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자기 말고는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 000 성도의 발인을 앞둔 이 엄숙한 순간에 우리가 결코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할 몇 가지 사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분명한 사실은 죽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죽음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누구나 다 죽습니다. 혹 만에 하나 못 믿겠다 하는 분이 있다면 그럼 삶은 믿겠지요.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말을 본 따 나는 감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갈등한다 고로 존재한다. 심지어 나는 밥을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등의 수많은 파생 신조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맞는 말이죠? 이처럼 우리가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하신 그대로 사람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중국의 진나라의 제31대 시황제가 죽음을 피해보려고 서복이라는 방사를 시켜 불로초 불사약을 구해오라 해서 동남동녀 3,000명을 배에 태우고 떠났지만 그 배는 어디로 갔는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꿈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돌아왔다 할지라도 그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요? 정말 계시지요.
어떤 사람은 아니 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믿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죽어 본 다음에 믿으면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사상가요 물리학자인 파스칼은 “여러분, 저랑 내기 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는 편에 내기를 걸겠습니다. 그 내기에 이겼을 경우 나는 영원한 영생을 누립니다. 반대로 그 내기에 졌다 해도 후회스러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학자다운 말입니다.
보세요. 이 천지 만물 피조물이 존재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또 제가 체험해 보니 하나님이 계십니다. 제 기도에 응답하시고 내 마음이 평안 주시고 살아계신 체험을 해 본 것이 얼마입니까? 몇 만 번도 더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임종할 때도 많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분이 몇 분이며, 부르실 날짜대로 정확히 일러 주신대로 가신 분이 몇 분이며, 가실 때 웃고 가신 분이 몇 분이십니까?
전에 집사님 한 분이 임종하셨는데 놀랍게도 다시 살아나셨어요. 그리고 “모두 다 모여라. 내가 천국을 보고 왔다. 지옥도 보고 왔다. 너희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믿을래? 안 믿을래? 믿을래? 안 믿을래? 대답해봐. 믿어라. 믿어라” 안 믿는 자녀들을 붙들고 얼마나 당부를 하는지 아마 천 번도 더 했을 거예요. 그렇게 결신시켜 놓고 눈을 감으시더라고요.
언젠가는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입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거기서 자기 행위대로 최종적으로는 믿음대로 심판을 받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3. 분명한 사실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우리 인간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 얼마나 귀한 복음입니까?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보면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 됐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려고 잠깐 포위망을 풀어주시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계시하서 모두 피하라 하셨는데 믿고 피한 사람은 살았지만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자유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를 구주로 믿은 고 000 성도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품안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 줄 믿습니다. “저는 예수 믿어요. 제가 죽으면 꼭 교회장으로 해주세요.”라고 유언하신 것을 제 귀로 분명히 들었습니다. 가족들 중 아직 예수 영접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에 믿습니다로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고 우리의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이 분명한 사실을 모두 확신하면서 앞서 가신 고인을 천국에서 만나 보실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 인생 (히 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시간에 “인생은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라 하니까 옛날 한 동안 유행했던 노래가 생각이 나지요? 최희준의 나그네라는 노래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이란 두지 말라.” 잘 아시는 노래죠? 이 노래는 유행가이면서도 찬송가 같은 유행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도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즉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고, 대단히 중요한 것을 지적해 주는데요. 그것은 사람들이 나그네 인생이면서도 나그네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나그네 인생이니까 나그네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나그네와 같이 삽니까?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땅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13절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은 그 땅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묘지로 쓸 막벨라 굴 말고는 사놓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세상에 너무 미련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욕심, 세상 집착, 세상을 너무 사랑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기 힘들어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믿음도 이 땅, 소망도 이 땅, 사랑도 이 땅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크게 실망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늘 본향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였을까요? 유프라테스 강 건너 갈데아 우르, 그러나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본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갈데아 우르 역시 나그네길의 한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참된 본향,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항상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고 말씀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 강에 놓으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연어가 필사적으로 폭포를 타고 올라가듯 그런 천국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 아브라함은 천국에 보물을 쌓았습니다.
16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구절 속에 천국에 쌓았다는 말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성을 예비하셨다는 말씀에서 그가 천국에 쌓았다는 힌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얼마나 부자입니까? 이것이 신기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천국에다 쌓으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물론 이 땅에서 백 배 천 배로 거두게 하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살면서 너무 쥐지만 말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늘 투자하세요. 그것이 땅에서도 잘 되는 것입니다.
마6:19-20에 예수님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이 인생을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세상에 집착하지 마시고 항상 천국의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자해서 아브라함처럼 하늘의 부자도 되시고 땅의 부자도 되시기 바랍니다.
주의 날개 아래 (시 61:3-4)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이 시간에 “주의 날개 아래”라는 제목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날개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항상 그리워했습니다. 그 품안이 너무나 따스하고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23:37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은 사랑이나 보호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새끼가 엄마 품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따스하고 안전하고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병아리에게 있어서 이때보다 더 행복한 때는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법궤 위에는 금으로 만든 하나님을 모시는 구룹 천사가 둘이 서 있는데 날개를 활짝 펴고 있습니다. 이 날개가 심히 커서 지성소를 가득히 덮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로 오면 이렇게 사랑해 주시고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개는 어떤 날개일까요?
1. 보호의 날개입니다.
본문 4절에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그랬습니다. 시17:8-9에도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러므로 하나님께 피하면 온전히 피해집니다. 사람들이 피할 곳을 찾지만 하나님께 피해야 온전히 피해집니다.
2. 주의 날개는 즐거움의 날개입니다.
시63:7에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여기는 그냥 날개가 아니라 날개 그늘입니다. 나무 그늘과 같이 시원하고 상쾌합니다.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고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셨습니다.
3. 주의 날개는 인도하시는 날개입니다.
출19:4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강력한 애굽의 권세를 끊고 애굽을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온 것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해 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 오면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4. 상주시는 날개입니다.
룻2:12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만 와도 상을 주십니다. 그래서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께서는 하나님을 잊지 않으시고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꼭 교회장으로 해달라고 일찍부터 유언하셨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형편은 늘 안타까웠지만 마음에 예수를 모셨으므로 가장 복 있는 분이십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저 하나님 나라에 이르도록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그 따스한 날개 그늘 아래서 보호와 인도와 기쁨과 행복과 상을 받아 누리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장례식설교] 잊을 수 없는 세 말씀 (사 7:14)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시간 “잊을 수 없는 세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최근 연거푸 성도들을 천국 환송해드리면서 깨달은 건데 성도들이 너무나도 평안하게 임종하는 것을 보고 놀랍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만 해도 어떤 분은 함께 주무시다가 가시고, 어떤 분은 자기가 늘 소원하던 대로 병원에 눕지 않고 가시고, 어떤 분은 사흘만 아프다 갔으면 좋겠다더니 그렇게 하시고, 우리 권사님께서도 사흘만 아프고 갔으면 좋겠다더니 누구도 수고 시키지 않고 자녀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그런데 이건 개인의 믿음이기도 하지만 또한 강단에서 늘 우리 성도들 평안하게 부름 받으시라고 기도한 축복의 결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도 변함없이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은 장수하다가 평안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특별하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또 한 분의 성도를 천국환송하면서 그동안도 우리를 지켜 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잊을 수 없는 세 말씀이 있습니다.
1. 임마누엘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가 주어진 역사적 배경이 이사야서 7장에 나옵니다.
즉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자 유다의 아하스왕과 온 유다 백성들은 사시나무 떨 듯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어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면서 하신 약속이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임마누엘하시면 그 어떤 두려움도 다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요16:32-33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십자가상에서까지 함께 하셨기에 온전히 승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거르므로 여러분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일을 만났고 또 만나겠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온전히 함께 하시면 조금도 두렵지도 떨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렵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의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잊을 수 없는 말씀은 에벤에셀입니다.
삼상7:12에 나오는 말씀으로 에벤에셀이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이 에벤에셀도 그 배경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죽고 청년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될 때 미스바에 모여 민족회개운동을 회개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이 이 때다 하고 쳐들어왔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 떨 때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레를 발하셔서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셔서 그들을 치게 하시고 나머지도 멀리 국경 밖까지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그 물리친 곳에다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때라도 거기가 어디든 거기까지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러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46:3-4에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업을 것이요 니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도 여러분을 거기가디도 오우시는 에벤에셀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잊을 수 없는 말씀은 여호와이레입니다.
여호와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창22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100세에 난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아브라함에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대신 한 숫양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양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그 땅을 이름 하여 “여호와이레”라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양은 하나님의 예비양으로 장차 만민을 위해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의 화목의 제물이 되실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일생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지 않으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답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믿고 기도하면서 찾아보면 있어요. 그래서 저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공급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임마누엘, 에벤에셀, 그리고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시오, 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삼고 어떤 두려운 순간에도 이 말씀을 잊지 않고 믿어 우리 주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받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눅 8:49-56)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 시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이 오늘 말씀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아주 죽은 줄로 압니다. 당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습니다. 혹시 가족들, 입관에 참여해 보시면서 슬픔 가운데 계십니까?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럼 잔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1. 평안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사57:2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여기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는 말씀은 악인의 목전에서 잔치를 베푸시듯이 영광스런 옷을 입혀 황금 수레에 태워 보라는 듯이 영광스럽게 차출해 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침상에서 쉰다는 것은 잔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인데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잘 때 얼마나 평안합니까? 잠은 최고의 휴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휴식처럼 최고의 휴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2. 잔다는 말씀은 맡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자는 사람도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마6:34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잠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을 어떻게 가나뇨?" 교사는 예수 믿음으로 간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죽어야 갑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듣고 와 하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맞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죽으면 갑니다.
그런데 육체의 죽음 말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내가 죽으면 살아생전에 천국을 경험하면서 삽니다. 그러므로 내 염려 내 욕심 내 죄악 내 불순종 내 고집 교만 이런 것에서부터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일생 잠을 통해서 그 죽는 연습을 시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생은 일어나서 다시 문제를 걸머쥡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살든지 죽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를 세상과 완전히 결별시키는 신령한 은혜입니다.
죽음이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란 말입니다. 나쁘다면 왜 아버지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부활이 있어야 새로운 몸 영광스러운 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성화의 강력한 방편입니다.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육체를 벗는 순간 몸은 지극히 자유롭고 평안하고 빛나며 고통도 사라지고 천국의 놀라운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3. 잔다는 말씀은 깨어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잔다고 말씀하실 때는 깨워주시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54-55절에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살려주셨습니다.
고전15:51-52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잔다 하시며 살려주신 예수님께서 여기 누워 있는 주님의 딸에게도 잔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는 분 깨우는 것 아닙니다. 푹 주무시게 놔두세요. 중환자실에서 자면 또 살리고 자면 또 살리고 그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우리 권사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말씀으로 위로 받으시고 매일매일 예수 안에서 죽어져 여러분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죽음 (창 50:1-3)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사람의 죽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입니다. 아프리카 최대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8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우간다에 전해지자 온 백성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였습니다. 축제를 벌였습니다.
우간다 정부도 대략 이런 내용으로 공식 성명을 냈습니다. <아민의 죽음은 좋은 일이다. 그의 죽음과 장례는 나쁜 과거의 종말을 의미한다. 잘 죽었다> 왜 그랬을까요? 살아생전에 구테타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폭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반대되는 죽음이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입니다. 야곱이 죽자 애굽의 바로왕의 호의로 아들 요셉은 몸을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미이라로 만들었다는 것은 최고 대우입니다. 또 향 재료를 야곱 몸에 넣었는데 40일이나 걸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70일 동안 애곡하였습니다. 3일장을 지내고도 지치는 데 감히 10주 동안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만큼 고인을 예우하고 사랑했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모두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야곱이 그렇게 아름답게 죽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적으로 요셉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야곱이 애굽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은 아들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감옥에서 관원장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그들의 꿈을 해몽함으로 인정받아 나중에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고 그래서 요셉이 흉년에서 애굽 왕을 돕고 애굽을 구원해주었기 때문에 애굽의 영웅이 된 것이죠.
이처럼 우리의 공로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기 되었기에 우리의 마지막은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천사들이 대거 환영하고 예수님께서 친히 마중 나오시고 온 천국의 의인들이 우리를 환영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약속하셨습니까? 요14:1-3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님의 육신은 마포에 싸였지만 그 영혼은 지금 천국에 입성하여 온갖 기쁨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집사님 살아계실 때 생각이 늘 납니다. 집사님은 기도응답이 체험을 많이 가지신 집사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제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고 간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큰 믿음 주시려는 은혜와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온 가족들과 성도들도 신앙생활 잘하여 저 하나님 나라에서 서로 만나 옛날을 이야기하며 즐겁게 웃을 수 있도록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 (고전 13:13)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시간에 “세상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장례식을 맞을 때마다 가장 부러운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인 된 성도가 가장 부럽습니다. 이 죄악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그 모든 수고와 고통은 끝나 무거운 짐 벗고 이제 인생의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장한 것입니다.
집사님에게 물을 수만 있다면 묻는다면 “그러하다.”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세상에 다시 돌아오고 싶으세요? 묻는다면 노 노 노를 연발하실 것입니다. 그 귀한 영생복락에서 돌이키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죽음에게 진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음을 이긴 자라.
왜냐하면 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품에 안긴 고인에게는 언제 어떻게 부르심을 받든지 더 이상 수고도 고통도 슬픔도 불행도 없고 행복과 영광과 영생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이미 가신 분이 아니고 아직 남아 세상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님께서 오셨습니다.
히2:14-15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
그래서 본문을 보면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음 세 가지를 항상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걸 기독교의 삼보라고 하는데 이 보물만 꽉 쥐고 있으면 우리의 남은여생 영육 간에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그 첫 째는 믿음입니다.
믿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일상생활에 믿음이 없으면 살기가 어렵습니다. 옛날 중국 땅에 기(杞)나라가 있었는데 그 백성들은 허구헌날 땅이 꺼질까 걱정했고 하늘이 무너질까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근거 없는 근심걱정을 ‘기우(杞憂)’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기우를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니 든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 보세요. 시46:1-3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담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다음은 소망입니다.
소망은 마치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찾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 본향을 향한 강렬한 소망의 은사가 있다면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망이 있으면 현재의 고난이 많을지라도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조금만 고생하면 큰돈이 나오고 조금만 고생하면 웃을 날이 나온다면 현재의 수고가 무슨 고통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울고 있는 때 나는 웃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희망이 없기 때문에 절망하고 목을 매고 투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찌질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잃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품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마지막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왜 그럴까요? 사랑하면 믿음도 생기고 소망도 생기고 가장 보람되고 행복하고 세상 살면서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천국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요 14장에 예수님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다 하셨는데 벌써 오셔서 함께 사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임마누엘이 바로 구원이요 영생이요 능력이요 승리요 형통이요 복입니다. 그보다 더 행복도 완전한 삶도 없습니다.
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사랑할 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은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사람들을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값진 보물입니다. 이 세 가지의 보물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그 인생 삶의 질은 달라집니다. 앞서 가신 집사님은 이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셨습니다. 최후엔 연약하여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셨지만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들어주셨음을 믿으시고 우리 모두 그 믿음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죽음 (창50:1-3)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이 시간에 “성도의 죽음”이라는 제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죽음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문의 야곱의 죽음에서 살펴보게 됩니다.
야곱이 죽자 애굽의 바로왕의 호의로 애굽의 총리인 아들 요셉은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미이라로 만들었다는 것은 최고 대우입니다. 이건 왕에게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미라에 쓰이는 향 재료를 넣는데 40일이 걸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70일 동안 애곡하였습니다. 그만큼 당시 총리 요셉의 명성과 왕의 총애가 대단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야곱의 입관 절차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1. 미이라를 만든 데서 영생의 소망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 왕들이 죽으면 미이라를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피라밋에 가보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실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미이라 자체는 시체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죽지만 천국의 소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1:25-26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셨습니다.
2. 몸에 향 재료를 넣는 데서 부활의 소망을 봅니다.
몸에 향을 넣는데 이 향들은 썩지 않게 하는 향들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다시 사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영으로만 아니라 육으로도 다시 살 날이 옵니다.
고후5:1-2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 부활의 영생할 몸이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3. 70일간 애곡함에서 성도는 사랑 받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3일도 지치는데 70일간, 온 국민들이 애곡했습니다. 이로 볼 때 그 아들 요셉이 얼마나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7년 흉년에서 그들과 그 가족의 모습을 살린 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백성도 그렇지만 왕도 훌륭합니다. 자기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보통 죽이는 것이 통례인데 그토록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이 왕에게 잘했고 지혜로웠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상 떠나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 천사 앞서 간 성도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사랑을 받으려면 잘 죽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내가 잘 죽어야 합니다. 내 죄가 죽고 내 교만이 죽고 내 고집이 죽고 내 잘못된 습관이 죽고 죽어야 할 것이 많아요. 잘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께 사랑 받고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시116:15에 여호와께서 성도의 죽는 것을 귀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떻게 죽든 복된 존재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수를 구주로 믿은 성도의 관 앞에서 영생의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예수 믿고 있지 않다면 이 기회에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 앞에 예수님의 말씀 (눅 8:49-56)
이 시간 “죽음 앞에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입니다. 고 000 집사님의 입관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신 사건을 통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5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거나 아주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용감한 사람은 없습니다. 두렵지 않다면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장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두려워말라고 하실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두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두려움을 다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히2:14-15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어떤 두려움도 다 물러가게 됩니다.
2. 주님은 죽음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52-53절에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사람들은 이 아이는 이제 끝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호흡이 멈추고 심장도 멈추고 체온은 싸늘해졌으니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 앞에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잔다고 하셨습니다. 잔다는 말은 깰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평안함 가운데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처럼 죽으면 평안합니다. 육체의 죽음도 그렇지만 자아의 죽음도 그래요. 내가 죽어 보세요. 평안해요. 내가 살았으니까 염려 걱정 욕심 다툼 시기 분쟁 불안 초조한 것이지 죽으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육체도 내 자아도 잘 죽어야 합니다. 평안하게 되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52절에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살려 주실 텐데 왜 우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 갔는데 왜 웁니까? 부모를 보내고 울면 효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울지 않습니다. 부모를 보내고도 자녀를 보내고도 울지 않아야 합니다.
살전4:13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돌아가신 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우리보다 더 좋은 곳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 많은 여인들이 따라가며 울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울려면 아직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해서 “하나님,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 모두 예수 믿고 천국 가게 해주세요. 하나님 일에 충성하게 해 주세요. 죄짓지 않고 살게 해주세요. 내가 죽게 해주세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이렇게 날마다 울어야 합니다.
훈련소에서 흘리는 땀 한 방울은 전쟁터에서 흘리는 피 한 방울보다 더 귀하다고 합니다. 날마다 우세요. 그러나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는 울 필요가 없습니다. 고인 집사님이 살아계실 제 제가 많이 울어드렸습니다. “하나님, 평안히 가게 해주세요. 주님 잊지 않고 꼭 천국 가게 해주세요. 좋은 날 하나님의 부름 받게 해주세요.” 그런데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있으면 설 대목이 아닙니까? 살아 있을 때 많이 울며 기도하세요. 그러나 고인은 더 좋은 곳에 계시니 위해서는 울 필요 없습니다.
4. 주님은 죽은 자의 손을 꼭 붙들어주셨습니다.
54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죽은 아이의 손을 꼭 붙잡으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천국 갈 때 우리 손을 꼭 붙잡아주십니다.
요14:1-3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상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님은 더 나타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고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세상 수고 다 마쳤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 일 많이 하다가 천국에서 함께 만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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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요 10:27-29)
이 시간에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도 자기 자녀를 버리지 않는데 어찌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버리시겠습니까? 설혹 부모는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이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시27:10).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1.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10:28에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 주신 생명은 보통 생명이 아니에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원히 살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만약 내가 받았다는 영생이 어떤 이유에서건 중간에 끝을 맞는다면 그것은 말로만 영생이지 애초부터 참 영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생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요5:24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다시 잃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6:39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한 마리의 양이라도 잃지 않도록 찾고 찾으십니다.
2.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도장 찍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엡1:13-14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님에 의해서 영원한 인침을 받은 존재입니다. 엡4:30에 보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했어요. 여기 "구속의 날"이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부활의 날입니다.
아주 너는 내 것이라 하고 도장 찍어 놓으셨어요. 그래서 사43:1-3에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도 불 가운데로 행할 때도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노년이 되어 망각증세가 와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습니다. 몇 달 전에 우리 최 집사님에게도 “하나님 잊지 마세요.”하고 기도해 드렸는데 하나님 잊지 않으셨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혹 나는 주님을 잊었어도 주님은 나를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요14:17에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 성도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이 약속입니다.
시37:28에 “여호와께서 -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일단 자녀로 태어나면 그 자녀가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그 자녀를 위해 부모가 일생을 헌신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자녀도 한 번 나면 버릴 수 없는데 어찌 하나님 자녀가 버림이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존재보다 자기 자녀들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사9:6에 “그의 어깨(shoulder-단수)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랬는데 여기 정사를 멘 어께는 단수입니다. 그러나 눅 15장의 잃은 양을 찾아 어께(shoulders-복수)에 멘 그 어께는 복수로 나와 있어요. 즉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우주보다 더 견고하게 메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보다 우리를 천 배 만 배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4:18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늙어 아무 쓸모 없게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지 않아요. 그래서 사46:3-4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마지막까지 책임져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야 해요. 아직 주님 앞에 나오지 못했다면 꼭 이 시간에 영접하시고 천국의 소망 가지고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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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 (행 16:31)
이 시간에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심히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큰 이익을 얻기 위함입니다. 커도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아주 큰 복입니다.
그럼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무엇일까요?
1. 믿는 자에게 구원 받는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죄에서 구원, 저주에서 구원, 사단에서 구원, 절망에서 구원, 지옥감에서 구원, 율법에서 구원 등 다양한 구원입니다. 예수 잘 믿어 보세요. 이 건져주시는 구원의 감격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2.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요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세상의 왕의 아들 왕자만 되어도 놀라운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라니 상상이라도 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특권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한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좋으신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왜 좋으신 것으로 주시지 않겠어요? 가장 좋으신 것으로 주십니다.
3.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막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침범치 못합니다. 사람들이 미신을 믿고 두려워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아무 염려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4. 믿는 자에게는 천국의 복을 주십니다.
요12:26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셨습니다.
어떤 마을에 한 사나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둘도 없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첫 번째 친구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소중히 여기고 가까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이래라 저래라 요구만 하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친구지만 될 수 있으면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왕궁에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왕이 법정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제일 친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 친구에게 동행해 줄 있느냐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첫 번째 친구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하소연을 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친구가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같이 가주기는 하겠는데 왕궁의 문까지만 같이 가겠다. 그 다음은 너 혼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크게 실망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에게 갔습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세 번째 친구가 두말없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물론이지. 내가 함께 가주지. 내가 왕에게 가서 자네가 틀림없이 결백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네."라고 하면서 따라나섰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왕의 법정은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누구나 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친구는 물질입니다. 아무리 물질을 좋아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물질은 절대로 같이 따라가 주지 못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우리의 부모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무덤까지는 따라와 묻어주고 애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럼 세 번째 친구는 누구일까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면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하나님의 딸은 하나님 나라에 가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잘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능력과 권세 받고 천국의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는 가족과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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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음의 의미 (계14:13)
이 시간에 [성도의 죽음의 의미]라는 제목입니다. 요즘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들어보셨죠? 웰빙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지향하는 삶의 유형을 가리키는데 간단히 말하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습니다. 잘 먹고 잘 살뿐 아니라 잘 죽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세의 소망 없이 산다면 어찌 웰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 외에는 이 세상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죽음의 두려움도 공포도 없는 이생 뿐 아니라 내세가지 진정한 인생의 행복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잘 알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럼 성도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성도의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복된 것입니다.
계14:13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죽음이 저주라면 독생자까지 주시면서 사랑하신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는 죽음을 면제해 주셔야지 허락하셨을까요?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추한 육신 이대로 영원히 사는 것이 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귀한 것을 이루시고 주시기 위한 한 과정일 뿐입니다.
2. 성도의 죽음은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눅8:52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습니다. 잔다는 것은 그만큼 편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시 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음은 자는 것과 같답니다. 천국에 입신한 썬다씽에게 천국성도가 한 말이 죽음은 잠과 같고 이 죽음을 넘어가는 데는 아무런 고통이 없다고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자기 죽은 줄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것은 성도에게는 천사와 성도들이 나타나 천국으로 인도해 주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마귀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3. 성도의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 기쁜 것입니다.
이 날은 천국의 빵빠레가 울리고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수많은 천사들과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영접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8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했고, 또 빌1:23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왜 죽음이 불행하게 보이고 슬프게 보입니까? 그것은 신령한 눈으로 보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내가 가도 울지 말라. 찬양하라고 유언하는 것을 봅니다.
4.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의 영원한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어요. 저는 임종하시는 성도들을 지켜보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잠시 죽어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살아나 가족들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보았고, 어떤 분은 천사가 황금 수레를 대기해 놓고 모셔가려고 한다고 글로 써 준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다니엘 수양관의 박영문 장로는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하나님의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박용규 목사님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습니다. 여러분도 한 분도 빠짐없이 천국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고인들의 최고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세요?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나오듯 자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국 오는 것이랍니다. 또 한 사람이라도 지옥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고통스런 지옥에서도 죽은 자의 한결같은 소원은 지옥 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두 천국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나의 행복이 되고 부모에게도 효도하는 것입니다.
5. 성도의 죽음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요14:2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환영단을 이끌고 데리러 오십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크게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의 죽음은 결코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비극이 아닙니다.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고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딸임을 먼저 감사드립니다. 우리들도 고인을 본받아 신앙생활 잘하고 좋은 일 많이 하다가 장래에 천국에서 함께 만나는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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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떤 곳일까? (계 21:1-4)
이 시간에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이라는 제목입니다. 성도에게도 죽음이 있지만 슬프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하늘 집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곳인지 필설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여기에 대해서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1. 계 22:5에 천국에는 밤이 없다 했습니다.
밤이 없습니다. 밤이 없다는 것은 어둠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은 빛만이 있어요. 마음에 어둠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은 항상 밝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셨어요. 이렇게 천국은 좋은 곳입니다.
2.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거기서는 아픈 사람을 볼 수 없어요. 모두 다 건강하고 모두 다 젊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질고나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상처도 다 치료 되어 기억할래야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3. 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계 21:3-4절에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했습니다.
4.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입학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만사를 주님이 책임지시니 우리가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5. 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죄가 많습니까? 그러나 천국은 좋은 사람만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에서는 죄를 질래야 질 수 없습니다. 죄가 지어지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6. 바다가 없습니다.
본문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는 얼마나 고달프고 무섭고 시달리고 때로는 침몰되어 죽기도 합니까? 천국에는 환난이 없다는 말입니다.
7. 천국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것은 다 변합니다. 바벨론도, 로마도, 애굽도 다 멸망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다 변하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영원히 변함이 존재할 것입니다.
8. 그런가 하면 천국은 아름다운 성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살 황금길과 보석으로 빛난 집이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 성을 문자 그대로 계산한다 해도 그 규모가 얼마나 크든지 한 사람 당 천 평 만 평짜리 아파트보다 더 크고 아름답습니다.
9. 천국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슬픔과 근심 대신에 기쁨과 행복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 강가에는 온갖 생명 과일이 다달이 열매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것의 천 배를 더해도 천국의 기쁨과 행복만 못합니다.
10. 천국에는 아름다운 내 개인의 집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충성했는지 거기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11.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 온갖 아름다운 것이 가득해도 사랑하는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가장 귀한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성도와 구원 받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유족 및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만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해도 천국 가지 못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어도 천국 간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천국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죄를 대속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만 들어갑니다. 유식하다고 고상하다고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든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부디 모든 유족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구원자 예수 믿고 천국이 영광스런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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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은 강도 (눅 23:39-43)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두 종류의 모습을 축소한 모습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구원 받은 모습이고 하나는 스스로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그럼 두 사람이 모두 죄인이었지만 어떻게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41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렇게 한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최소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기초가 잘 놓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였습니다. 죄인인 주제에 자기가 의롭고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알지도 모르면서 비판합니다.
그러자 다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책망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2.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41절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그 강도가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다고 보기 어렵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그는 비록 최후의 순간에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요 왕이시며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죄인들을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분이 예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몰라도 나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나의 아버지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이것을 모르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3. 강도는 자신을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42절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강도가 구원 받는 영광스런 순간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어떤 죄인도 자기 공로 없어도 예수 공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공로 말고 다른 것을 거기 덧붙일 수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이래야 한다는 다른 것을 덧붙이면 이단입니다.
사랑하는 000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온지는 불과 2-3년 되지만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살아생전 우리는 이 분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했지만 그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 000님 성도께서 딸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도가 하나님의 딸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유가족 그리고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를 구원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강도와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손을 잡고 저 천국에 함께 가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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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3대 질문 (벧전2:11)
오늘 본문에 우리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어디로 가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3대 질문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사며, 어디로 가는가? 이 3대 질문만 제대로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인생은 어디서 왔습니까?
창1:26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과정상 보자면 어떻게 왔습니까? 부모에게서 왔습니다. 그럼 부모는 어디서 왔습니까? 조부모에게서 왔습니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증조, 그럼 증조는 어디서 고조, 고조는 어디서 그 위에 그 분은 또 그 위에,,, 그렇다면 맨 위에는 누구시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이라고 합니다. 그럼 단군은? 곰의 자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개국 신화이고 그 위에 사실은 할아버지가 계실 것이고 결국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처럼 원숭이에게서 났다면 이 시간 재론할 가치조차도 없지만 그럼 그 원숭이는 어디서 났겠습니까? 거슬려 올라가면 보이지 않는 작은 아메바라면 그 아메바는 어디서 왔습니까? 그리고 이 지구와 우주는 어디서 왔습니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머리 좋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이 고도의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생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중국 어느 마을에서 부친의 비문을 세우는데 쓸 말이 없어서 "먹다. 죽다"라고 써서 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래서는 불효이지요. 그러나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자들은 다 이런 인생입니다. 잘해야 먹다. 낳다. 일하다. 죽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야 썩어져 없어질 것만을 위해서 산다면 어리석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삶의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전12:13에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 경외하며 사는 것이 목적일까요?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래야 우리 인생이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좋으시겠지만 우리가 복이 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그래야 형통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야 자손이 잘 됩니다.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안 될 것이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잘 될 것입니다.
3.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세월이란 고속열차를 타고 무덤이란 종착역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잘 알아야 합니다. 잘못 알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후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요즘은 과학자들도 영혼의 실체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영혼 떠난 몸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등 여러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과학자들도 이 지구의 북쪽으로 우주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미 성경이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영원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만 지으며 자신의 소욕대로만 산 사람들은 천국에 못가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잘 아시죠. 부자는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유황불이 펄펄 끓는 음부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거지였지만 마음에 예수님을 모셨기에 천국의 백성이 되어 영광중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저는 찜질방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천국체질이지 지옥체질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보다 더 뜨거운 지옥에서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어떻게 이 뜨거운 곳에서 1시간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천년만년 영원토록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잘 믿어 나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체질로 살아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 여러분!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 하나님의 품으로 갈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둠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 모두 이 엄숙한 순간에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삶을 결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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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주는 자유 (빌1:20-24)
474. 231장
먼저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과 영으로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죽음의 자유”라는 제목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 하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본문의 바울은 지상의 영화로운 삶보다 육신을 떠나 천상의 삶을 더 사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먼저는 죽음은 우리에게 한없는 자유를 선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1. 죽음은 현세의 모든 악을 제거해 줍니다.
죄 얼마나 사람을 범죄케 하고 갈등과 시련을 줍니까? 그러나 죽음은 죄와 상관없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 살면서 늘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케 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 방법은 지상에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범죄하지 않으려면 주님의 공로를 믿고 성령으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이 가져다 주는 유익입니다.
2. 죽음은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계21:4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다시는 고통과 슬픔이 없어요. 영원한 기쁨과 찬송만이 있습니다.
3. 죽음은 최고 행복의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낙원이란 즐거운 곳입니다. 거기에는 행복의 모든 조건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만족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곳에는 기화요초 만발하고 아름다운 생명 과실과 생명강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성도들과 천사들이 있는 곳입니다.
4. 죽음은 영원한 안전의 자유를 줍니다.
지상에 있을 때는 주님을 믿다가 부인하거나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느 누구도 죽음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 신원의 영원한 안전장치입니다.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을 믿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유와 행복의 천국에 들어가신 성공적인 삶을 사신 집사님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지 마시고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믿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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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는 사람 (롬8:28)
고 000 집사님의 장례식예배에 제가 유족들과 성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께 사랑 받고 살자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셨기 때문에 아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사랑 받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늘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1. 마음에 안식을 주십니다. 시127:2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했습니다. 잠을 주신다는 것은 평안함과 안식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살이에서 고달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면 형통함을 주십니다. 본문 롬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잘 되도 잘된 것이고 못 되도 더 잘되게 결과를 주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약1:12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즉 생명으로 왕노릇하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겠다는 축복입니다.
4.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나라를 주십니다. 약2:5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셨습니다. 성도는 지상에서 살면서 천국을 누려야 정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5. 하나님을 사랑하면 보호하여 주십니다. 시145:20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했습니다. 사43:2에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 -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진정 사랑하면 이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자굴에서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6.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잠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요일4:12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7. 하나님을 사랑하면 재물의 복을 주십니다. 잠8:21에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성경에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모두 하나님 경외하는 자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욥도 다윗도 야곱도 다 부자였습니다.
8.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사랑 받고 또 하나님이 함께 사시는 사람이 됩니다. 요14:23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9.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됩니다. 고전8:3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10. 하나님을 사랑하면 천대에 이르러 복을 주십니다. 신5:10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이렇게 놀라운 복을 약속하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예배하고 기도하고 충성하며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드린 안식과 형통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와 보호와 사랑과 재물과 함께 하심과 아심과 체험과 천대까지 이르러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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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떤 곳일까? (계 21:1-4)
이 시간에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이라는 제목입니다. 성도에게도 죽음이 있지만 슬프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하늘 집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곳인지 필설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여기에 대해서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1. 계 22:5에 천국에는 밤이 없다 했습니다.
밤이 없습니다. 밤이 없다는 것은 어둠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은 빛만이 있어요. 마음에 어둠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은 항상 밝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천국은 좋은 곳입니다.
2.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거기서는 아픈 사람을 볼 수 없어요. 모두 다 건강하고 모두 다 젊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질고나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상처도 다 치료 되어 기억할 래야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3. 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계 21:3-4절에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했습니다.
4.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입학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5. 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죄가 많습니까? 그러나 천국은 좋은 사람만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에서는 죄를 질래야 질 수 없습니다. 죄가 지어지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6. 바다가 없습니다.
본문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는 얼마나 고달프고 무섭고 시달리고 때로는 침몰되어 죽기도 합니까? 천국에는 환난이 없다는 말입니다.
7. 천국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것은 다 변합니다. 바벨론도, 로마도, 애굽도 다 멸망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다 변하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영원히 변함이 존재할 것입니다.
8. 그런가 하면 천국은 아름다운 성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살 황금길과 보석으로 빛난 집이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 성을 문자 그대로 계산한다 해도 그 규모가 얼마나 크든지 한 사람 당 천 평 만 평짜리 아파트보다 더 크고 아름답습니다.
9. 천국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슬픔과 근심 대신에 기쁨과 행복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 강가에는 온갖 생명 과일이 다달이 열매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것의 천 배를 더해도 천국의 기쁨과 행복만 못합니다.
10. 천국에는 아름다운 내 개인의 집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충성했는지 거기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11.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 온갖 아름다운 것이 가득해도 사랑하는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가장 귀한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성도와 구원 받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유족 및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만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해도 천국 가지 못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어도 천국 간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천국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죄를 대속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만 들어갑니다. 유식하다고 고상하다고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든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부디 모든 유족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구원자 예수 믿고 천국이 영광스런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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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나자(눅17:20-21)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하고 가장 큰 소망은 바로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임종하시는 성도들을 지켜보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잠시 죽어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가족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보았고, 어떤 분은 천사가 황금 수레를 대기해 놓고 모셔가려는 것을 글로 써 준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 진봉교회에서도 어느 집사님께서는 임종한다고 가족들이 모였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며칠 날 오너라 해서 꼭 그 날자 12시 땡 하고 지나니까 몇 분 안되 운명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다니엘 수양관의 박영문 장로는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하나님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다는 성경의 증언은 모두 진실입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 놀라운 생명체인 지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믿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천국을 갑니다. 그런데 성도의 천국 경험은 약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영적으로 누리는 현세천국입니다.
눅17:20-21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천국이 바로 마음에서 누리니 심령천국이요,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므로 현세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그 마음에 이 천국이 성령으로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적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잘 경외하면 마음속에서 풍성한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흐르고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삶의 형통과 능력과 승리와 축복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상에서 예수 잘 믿어 이 천국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2.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내세천국이 있습니다.
고후12:2-4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입신이라고도 합니다. 육체이탈은 아니지만 영혼만 갔는지 몸까지 갔는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생생한 체험이 됩니다. 어떤 경우는 질고나 사고 등으로 육체이탈을 해서 잠시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볼 때 이런 것이 결코 비성경적이 아니고 가능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어릴 때 황두연 목사 집회 시 간증하던 옥화라는 자매의 입신경험을 녹음으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천국에서 천사를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목사 썬다씽도 이런 입신을 자주 경험하여 그 때 주님과 대화한 기록을 책으로 냈습니다.
우리 교단 박용규 목사님도 임종예배 드릴 만큼 사경 속에 있을 때 천국을 보고 돌아왔니다. 그는 천사와 함께 이 지구를 떠나 몇 분 안에 북극 위로 올라가서 황금길을 통해 천국 가서 온갖 아름다운 것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주시는 것은 모든 백성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참된 믿음을 갖도록 하심입니다. 이 경험들이 바로 내세 천국을 지상에서 경험하는 은사적 경험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 경험이 가능합니다.
3. 내세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갈 천국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계21:1-4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이 내세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천국입니다. 여기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는 없습니다. 중간 지점은 없어요. 우리는 모두 거기서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만나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사랑하는 유족들은 앞서간 고인이 거기서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서 가족들이 하나님 잘 섬기는 것을 학수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곳은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영생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상의 복락원입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이 말씀 들으시고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섭섭하지만 소망을 가지시고 위로를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고인은 천국에 가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마음의 천국 내세적 천국 누리고 더욱 충성하여 하나님께 큰 칭찬과 상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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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직한 고백 (눅 23:39-43)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두 종류의 모습을 축소한 모습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구원 받은 모습이고 하나는 스스로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두 사람이 모두 죄인이었지만 어떻게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41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렇게 한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최소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인죄론의 기초가 잘 놓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였습니다. 요즘에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 별로 못 봅니다만 옛날에는 많았습니다. 그 때 생각에 ‘참 어리석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안다면 그런 일이 없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책망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2.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41절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그 강도가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다고 보기 어렵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그는 최후의 순간에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요 왕이시며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다 몰라도 나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아야 합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함께 달리는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이 누군지 발견했는데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어찌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3. 강도는 자신을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42절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강도가 구원 받는 영광스런 순간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어떤 죄인도 자기 공로 없어도 예수 공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공로 말고 다른 것이 거기 덧붙일 수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이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다른 덧붙임이 있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인생의 목적은 있지만 오직 구원은 예수 공로로 받습니다.
사랑하는 유가족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기 복된 강도와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님이 누군지 아십시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강도와 같이 예수님의 손을 잡고 저 천국에 가실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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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관의 신령한 의미 (창50:1-3)
창50:1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입관이란 시신을 관에 넣는 예식입니다. 이 모든 예식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후손에게 남겨진 의무로서 이 일은 조상에 대한 자손의 예의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처리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본문과 같이 일부 성경의 기록에서 입관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으로도 그런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죄에 대해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장례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 하면서도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자가 있는데 그것은 장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사가 무엇이냐? 세례가 장사입니다. 골2:12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장사를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세례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야곱의 입관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장사지내지기 위하여 영적 입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2절 말씀대로 향재료를 넣어야 합니다.
향재료가 무엇일까요? 계8:3을 보면 기도를 향이라 했어요. 더 자세히 말한다면 기도와 찬송과 말씀 등의 예배가 향입니다. 이 향이 없이는 우리의 추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변화 받기 위해서 예수 믿고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2. 향재료 넣는데 40일이 걸렸습니다.
40은 훈련의 수요 연단의 수입니다. 즉 예배생활이 잘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루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향이 시신에 충분히 배려면 40일이 걸렸듯 신앙생활이 아주 우리 몸에 배여야 합니다.
3. 70일간 애곡했습니다.
이것은 고인을 온전히 떠나보내는 마음인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생각과 마음까지도 온전히 변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인의 시신을 입관함에 대한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여 온전히 입관하여 성령으로 장사지내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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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죽음 (창50:1-3)
사람의 죽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입니다. 아프리카 최대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8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우간다에 전해지자 온 백성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였습니다. 축제를 벌였습니다. 우간다 정부도 대략 이런 내용으로 공식 성명을 냈습니다. <아민의 죽음은 좋은 일이다. 그의 죽음과 장례는 나쁜 과거의 종말을 의미한다. 잘 죽었다> 왜 그랬을까요? 살아생전에 쿠테타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폭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반대되는 죽음이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입니다. 야곱이 죽자 애굽의 바로왕의 호의로 아들 요셉은 몸을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미이라로 만들었다는 것은 최고 대우입니다. 또 향 재료를 야곱 몸에 넣었는데 40일이나 걸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70일 동안 애곡하였습니다. 3일장을 지내고도 지치는 데 감히 10주 동안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만큼 고인을 예우하고 사랑했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모두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야곱의 입관 절차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1. 미이라를 만든 데서 영생의 소망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미이라를 잘 만들어 피라밋에 가보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실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미이라 자체는 시체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죽지만 천국의 소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몸에 향 재료를 넣는 데서 부활의 소망을 봅니다.
몸에 향을 넣는데 이 향들은 썩지 않게 하는 향들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3. 70일간 애곡함에서 성도는 죽음을 통해서 모두의 사랑을 받음을 보여줍니다.
무슨 뜻인가? 육신의 죽음도 그렇지만 내 자아가 죽어지는 것입니다. 내 죄가 죽고 내 교만이 죽고 내 고집이 죽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 따라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 천국도 가지만 살아서 예수 안에서 천국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의 죽음 앞에서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다. 나는 언제 부름을 받아도 순종할 준비되어 있는가? 그리고 육체의 죽음 이전에 죄에 대해서 죽는 진정한 회개가 있는가? 이 죽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정 사랑 받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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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게 하는 은사 (고후12:9-10)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고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었으므로 영원한 천국에 가셨습니다. 인생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을 되돌려 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고인이 아니라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은 이 세상을 어떻게 승리하며 사명 잘 감당하고 살아가느냐가 남은 과제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 살아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능력 있게 하는 은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 믿음입니다.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요일5:4에도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란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의 힘은 해도 멈추고 달도 멈추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 100세지만 믿음으로 아들을 낳고, 모세는 홍해가 앞에 가로놓여 있었어도 믿음으로 홍해를 가르고 건넜고,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칠 일간 돌다가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 믿고 할 수 없다 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선천적 후천적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을 받으면 훌륭해 질 수가 있습니다. 이 능력이 얼마나 크든지 고전1:27-28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성령의 능력을 받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성경 66군 모든 말씀은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내 말씀으로 붙드시기 바랍니다. 기록된 말씀은 소리도 없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도 없이 조용하지만 그 말씀을 믿는 자에게 반드시 성취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믿는 성도들을 돕습니다. 시103:20에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늘 하나님의 말씀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4. 기도가 우리를 능력 있게 합니다.
마18:19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세요. 엘리야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기도만 들어 주시는 것 아닙니다. 약5:17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고후12:9-10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부족하고 나약하고 어려움도 하나님의 은사라는 점입니다. 혹시 기도해도 물리쳐 주시지 않는다면 이것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믿으시고 불평하지 마시고 더 겸손히 더 주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크고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귀한 은사입니다.
사랑하시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이 험한 세상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온전히 승리하며 살아갑시다.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은사입니다. 말씀입니다. 기도입니다. 연단입니다. 우리 모두 능력 받아 저 나라에 이르도록 승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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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나자(눅17:20-21)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하고 가장 큰 소망은 바로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임종하시는 성도들을 지켜보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잠시 죽어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가족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보았고, 어떤 분은 천사가 황금 수레를 대기해 놓고 모셔가려는 것을 글로 써 준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 진봉교회에서도 어느 집사님께서는 임종한다고 가족들이 모였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며칠 날 오너라 해서 꼭 그 날자 12시 땡 하고 지나니까 몇 분 안되 운명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다니엘 수양관의 박영문 장로는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하나님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다는 성경의 증언은 모두 진실입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 놀라운 생명체인 지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믿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천국을 갑니다. 그런데 성도의 천국 경험은 약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영적으로 누리는 현세천국입니다.
눅17:20-21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천국이 바로 마음에서 누리니 심령천국이요,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므로 현세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그 마음에 이 천국이 성령으로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적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잘 경외하면 마음속에서 풍성한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흐르고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삶의 형통과 능력과 승리와 축복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상에서 예수 잘 믿어 이 천국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2.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내세천국이 있습니다.
고후12:2-4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입신이라고도 합니다. 육체이탈은 아니지만 영혼만 갔는지 몸까지 갔는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생생한 체험이 됩니다. 어떤 경우는 질고나 사고 등으로 육체이탈을 해서 잠시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볼 때 이런 것이 결코 비성경적이 아니고 가능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어릴 때 황두연 목사 집회 시 간증하던 옥화라는 자매의 입신경험을 녹음으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천국에서 천사를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목사 썬다씽도 이런 입신을 자주 경험하여 그 때 주님과 대화한 기록을 책으로 냈습니다.
박용규 목사님도 임종예배 드릴 만큼 사경 속에 있을 때 천국을 보고 돌아왔니다. 그는 천사와 함께 이 지구를 떠나 몇 분 안에 북극 위로 올라가서 황금길을 통해 천국 가서 온갖 아름다운 것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주시는 것은 모든 백성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참된 믿음을 갖도록 하심입니다. 이 경험들이 바로 내세 천국을 지상에서 경험하는 은사적 경험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 경험이 가능합니다.
3. 영원한 내세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갈 천국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계21:1-4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이 내세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천국입니다. 여기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는 없습니다. 중간 지점은 없어요. 우리는 모두 거기서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만나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사랑하는 유족들은 앞서간 고인이 거기서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서 가족들이 하나님 잘 섬기는 것을 학수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곳은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영생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상의 복락원입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이 말씀 들으시고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섭섭하지만 소망을 가지시고 위로를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고인은 천국에 가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마음의 천국 내세적 천국 누리고 더욱 충성하여 하나님께 큰 칭찬과 상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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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닫자 (계 16:1-21)
이 시간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닫자”라는 제목입니다. 제 특별히 이 제목으로 말씀하는 이유는 고인의 생전에 소원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문 집사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항상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교회 가까이에 집 있는가 보세요.” 교회 가까이 집을 사서 항상 하나님을 가깝게 섬기고 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평생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실로는 이루지 못했지만 이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셨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마음만은 기쁘시게 받으시고 상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특별히 우리를 위해 고난의 잔을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 깨닫는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우리 믿음을 크게 하며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였습니다.
본문에 대접이 나오는데 대접이 무엇일까요? 대접은 고난입니다. 인은 인침이고, 나팔은 복음이고, 대접은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부어지는 일곱 대접 재앙은 문자적으로는 말세의 재앙이자만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의 대접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즉 고난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다가오는 마음의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을 때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1.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 견딜 수 없게 됩니다.
2절에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했습니다. 종말에 짐승의 표 받은 사람이 따로 있겠지만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 짐승이 따로 없고 우상숭배자가 다로 없습니다. 제가 욕망대로 본능대로만 산 짐승이요, 세상을 사랑한 우상숭배자입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죄송해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아버지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2.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그 사랑에 감동되어 녹아집니다.
3절에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했습니다. 이젠 죄악을 깨닫고 마음 아파할 정도가 아니에요. 십자가 사랑에 감동될 때 온통 마음이 보혈의 바다가 됩니다. 그리고 내가 죽고 예수만 살아요.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3.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생각과 계획과 목적까지도 바꿉니다.
4-7절을 보면 대접이 부어져 강과 물 근원까지 피가 되고 그 피를 마십니다. 피의 역사가 더 세부적인 데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젠 감동 정도가 아니에요. 좀 더 깊이 생각과 계획까지도 바뀝니다. 그래서 생각과 계획과 생애의 목적까지도 주님을 위한 것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이 이렇게 바뀝니다. 그래서 여기 하나님의 원수들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4.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나를 잊고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8-9절에 보면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아 그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그런데 아직 덜 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훼방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힌트가 있어요. 이 재앙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재앙이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달으면 나를 불태우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5. 주님의 사랑을 더 깨닫게 되면 주를 위해 몸부림칩니다.
10-11절에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이 말씀은 적그리스도 권세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역시 재앙의 주제가 회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짐승의 정권에 고통과 거역이라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때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의 본성을 생각하며 애통하며 몸부림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훼방꾼이 내 안팎에 있으니 이 얼마나 아픔이요 고통입니까? 이것이 주의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갖는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6. 더욱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두려운 사선을 마다않고 수없이 넘나들며 주님을 사모합니다.
12-16절 내용입니다. 미혹의 영들이 왕들을 꾀여 유브라데강을 건넙니다. 누가 그 죽음의 전쟁터로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미혹 당했기 때문이 갑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어서 속히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을 동원하여 죽음의 사선을 넘어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 언제 오시렵니까? 아직 오지 않으신다면 주님 제가 언제 주님께 갑니까?”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가고 싶어 갈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을 붙잡고 떠나기 싫어 안달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으로 천국을 침노하며 바울과 같이 지상과 천상의 사이에서 어느 편을 택할지 모르는 마음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주와 함께 따로 거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인 것입니다.
7.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그 무엇도 초월하며 예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17-21절 내용입니다. 지진으로 무너지고 만국의 성도 사라지고 거대한 우박이 사람에게 떨어집니다. 아래에서 흔들리고 위에서 떨어지고 그러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재앙의 해석의 키가 21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재앙으로 조금 남은 사람들이요 계속하여 죽을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진정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으면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욕을 먹어도 좋아요. 그 일로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니 말입니다. 매를 맞아도 좋아요. 역시 그 일로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니 말입니다. 다 잃어도 좋아요. 아파도 좋아요. 억울해도 좋아요. 죽어도 좋아요. 내가 예수와 죽고 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감사요 영광입니다.
이 수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빌1:21-22의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했던 그 말씀과 같습니다. 이렇다고 믿고 저렇다고 안 믿고 그런 어린이가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장성한 성도가 됩니다(엡4:1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음이 대접같이 부어지고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유족들과 성도들 고인을 따라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며 천국에서 다시 만나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의 사랑 안에서 더욱 장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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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지혜 (마 24:15-20)
오늘 사랑하는 성도님을 입관하고 예배하면서 육신의 정으로는 섭섭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싶은 것은 고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셨기 때문에 천국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가실 때 편히 가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 분은 복이 많으신 분이세요. 자녀들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또 목사님들을 비롯하여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길에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사실은 성경의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죄악 많고 환난 많은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환난의 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1. 16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적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산이 많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전에 속히 산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났을 때 피할 수 있는 산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처럼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피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피해집니다.
며칠 전 성도님이 고난 가운데 계실 때 많은 분들이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저도 고인의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을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평안함을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잠이 오면 편히 주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 주실 줄 믿고 한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돌아와서도 “하나님 한 번만 이 성도님이 웃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데 그날부터 점점 좋아져서 다음 날에는 숨소리도 평안하고 연방 주무시기만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피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살 때 늘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17절에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가지 말라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만큼 사태가 촉박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포위된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곧장 피해야지 머뭇거리면 잡힙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 때 육신의 일에 메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까? 너무 거기에 매여 살면 불행합니다.
사람들이 일생 화장실만 구하다가 마친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화장실이 밖에 있는 사람은 화장실이 안에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그래서 집을 샀는데 이제는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그 다음에는 세 개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하다가 일생 마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비참한 마음 품고 살도록 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세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자유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입니다.
3. 18절에 밭에 있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돌이키지 말라 하셨습니다.
너무 급하니 겉옷을 챙겨 입으러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격식에 매이지 말고 활발하게 신앙 생활하라는 교훈입니다. 속으로만 아니라 늘 활발하게 신앙생활하세요. 그러면 시험도 물러갑니다. 죄악도 물러갑니다. 사단도 물러갑니다. 고난이 와도 견딜 수 있어요. 세상을 다 이길 수 있어요.
4. 19절에 아이 밴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시 가장 어려웠던 사람들은 임신과 수유기간에 있는 여성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살이에 우리 믿음이 어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어리면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두려움 시험이 떠나갈 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크면 세상을 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도 돕고 남도 도우면서 살 수 있습니다.
5. 또 젖먹이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달콤한 축복만 추구하지 마세요.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고 용서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닮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의 일에 동참할 뿐 아니라 이웃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가장 행복한 자가 됩니다.
6. 20절에 도망하는 날이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겨울은 비가 많아 도피하기 어려운 계절입니다. 그래서 겨울 닥치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차가운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차가울 때 시험이 오면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항상 뜨겁게 신앙생활하면 어떤 역경도 불행도 슬픔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7. 그리고 안식일이 되지 않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2,000규빗(약 1키로) 이상은 움직이지 못하게 발목 잡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무슨 의미냐면 신앙을 제한 억제하는 이런저런 잘못된 전통과 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전통은 살려나가지만 믿음의 발목 잡는 전통에는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이런 것 저런 것에 매이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습니다. 이 환난 많고 죄악 많은 이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저 나라에 이르기까지 승리하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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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입관 (창 50:1-3)
창50:1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이 시간에 “야곱의 입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입관이란 시신을 관에 넣는 예식입니다. 이러한 절차는 지상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중요한 의무입니다. 부모가 우리를 낳을 때 수고한 것처럼 이제는 반대로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서 간호하고 마지막 임종까지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본문에 입관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는 이렇게 미라를 만드는 것이 애굽의 풍습이었고 또 우리에게 영적으로도 그런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으로 보면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해 죽었지만 철저히 장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사가 무엇이냐? 세례가 장사입니다. 골2:12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온전한 장사입니까?
1. 향재료를 넣어야 합니다.
2절 보니까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놓게 하매” 그랬습니다. 계8:3을 보면 기도를 향이라 했어요. 늘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죄악의 더러운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2. 향재료를 충분한 기간 동안 넣어야 합니다.
3절에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그랬습니다. 40일간 넣은 이유는 방부재가 충분히 배여서 썩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40은 연단의 수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 아주 우리 몸에 배여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때 항상 성령의 충만 속에 살게 됩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3절에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애곡한 것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애석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애굽은 세상이요, 70은 완전수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랑하는 마음이 온전히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때 풍성하고 항구적인 성령의 은혜 속에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 남은 사람들이 고인을 입관함과 같이 우리들도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여 성령으로 충만하여 온전히 입관하여 옛 것은 죽고 새 것으로 사는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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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의 승리 (창 28:20-22)
이 시간에 “세상살이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의 세상살이는 마치 형 에서에게 쫓겨 광야 길을 가는 야곱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피곤하고 고독하고 불안합니다. 쫓기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뒤로 되돌아갈 수 없고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장이 없고 암담하기만 합니다.
이 때 20절에 야곱의 기도를 보세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그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장 속에 평안히 살다가 천국 아버지 집에 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요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 돌아가리라는 복입니다. 이 세상이나 저 내세에서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확신해야 할 약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21절에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했습니다. 여호와로 나의 하나님을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예수를 나의 주로 믿으면 됩니다.
요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미국 가려면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그런데 나 혼자 갈 수 있다고 태평양에 뛰어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 닦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살이의 방법이요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서원해야 합니다.
2. 예배해야 합니다.
22절에 야곱은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는 동안 항상 잊지 않아야 할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은 결코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는다면서도 예배생활이 부족하면 인생이 초라합니다. 도움 없고 망신만 당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돌아올 때 세겜의 풍성한 풀밭이 욕심나서 거기서 머물다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 딸이 이방인에게 추행을 당하고 얼마나 망신과 열국의 두려움을 당했습니까? 세상 것에만 치중하느라 예배 생활 부족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행복이 없어요. 두려워요. 자신이 없어요. 평안하지 않아요.
어떤 성도는 집사까지 되었으나 예배드리는 것에 열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일 아침만 되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예배를 드리지 않을 궁리를 찾았습니다. 하루는 “여보, 오늘 우리 두 사람 중에 당신이 대표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구려”라고 하면서 집에 혼자 남아 낮잠을 잤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천국 문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들이 “두 사람은 부부지요? 그럼 대표로 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깬 남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예배 등한히 한 죄를 회개하고 이후로 예배에 빠지지 않는 착실한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명재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 “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공식예배는 물론 매일 찬송하고 기도하는 생활이 많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세상 삶이 영육 간에 복되게 될 것입니다.
3. 아버지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22절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축복의 씨앗입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살려면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 나라에 쌓는 길입니다.
그런데 십일조의 중요한 의미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를 나의 주인 삼고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을 나의 사장으로 삼고 일하고, 생활할 때도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매사에 도우셔서 복되게 해주세요.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매사에 하나님께 물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하는 일마다 도움 주시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고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가셨습니다. 성공하는 인생이 되셨습니다. 문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생에서도 승리하고 저생에서도 성공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옥의 불 속에는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야곱처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삼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서원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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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소망 사랑 (고전 13:13)
이 시간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은 전부가 아니며 우리의 본향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 당시 인생의 나이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했는데 요즘은 더 늘어 강건하면 90도 되고 100도 된다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할 인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국 갈 인생준비 잘해야 합니다.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일생 신앙생활하다가 마지막에 나 하나님 몰라 이렇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영원히 변치 않는 세 가지로 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 보니까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믿음으로 합니다.
요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어 천국 티켓만은 끊어놔야 합니다.
우리 인생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알에 비유한다면 유정란인생과 무정란인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있는 인생이 있고 없는 인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생의 씨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요 이기는 생명입니다. 죄도 이기고 저주도 이기고 환난도 이기고 죽음도 이깁니다.
이 생명은 죽음의 공포 그것도 이깁니다. 히2:14-16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예수 믿어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 이기시는 예수의 생명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소망으로 합니다.
빌1:23-24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천국소망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천국을 다녀온 후로 너무도 좋고 그리운 나머지 속히 몸을 벗고 하나님 나라에 가 살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인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끌려가는 인생과 같아요. 인생사는 것 자체가 비극입니다. 반면 소망이 있으면 멜로디에 발맞추어 걸어가듯 흥겨운 인생이 됩니다.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간답게 살려면 소망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소망이 있으면 세상에 미련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언제 세상 수고 끝내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계시는 천국에 갈까 이런 마음이어야 정상입니다. 소망의 은사 꼭 구해야 합니다.
연어의 회귀의 본능을 아시죠. 일생 바다에 살던 연어가 태어난 곳을 기억했다가 다시 강을 거슬려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회귀본능이 얼마나 강하든지 목숨을 걸어요. 물살도 이겨내고 보도 뛰어넘어 고향을 찾아옵니다. 이와 같이 소망의 은사를 받으면 본향 천국을 향한 그런 회귀본능을 가지게 됩니다. 소망의 은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한 인생 준비입니다.
3. 사랑으로 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어요. 고후5:8-9에도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에너지처럼 강한 것은 없어요. 옛날 남녀가 사랑했는데 부모가 결혼을 반대 하니까 둘이서 죽음을 택했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사랑이란 대체 뭘까요? 사랑 안에는 죽음도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평생 죽음만 생각하면서 삽니다. 요단강이 보입니까? 성도는 요단강은 보이지 않고 그 너머만 보여야 정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 없는 요단강을 건너갔지 물 있는 요단강 건너가지 않았어요. 그 순간만은 요단강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죽음이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미래를 생각할 때 천국보다 요단강이 더 보이면 신앙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천국 가서 스데반 집사에게 물었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가 돌에 맞아 죽으실 때 얼마나 아프셨어요? 그러자 스데반 집사는 보좌에 계신 영광스런 주님을 보느라 돌에 맞은지도 몰랐답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요단강 너머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기다리시고 신랑 되신 예수님이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유족 그리고 성도 여러분!
믿음 소망 사랑만 있으면 우리 인생 준비 끝입니다. 인생 준비 되셨습니까? 그게 유비무환의 인생일 뿐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동안도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주님은 내가 먼저 가서 처소를 예비한 후 너희에게 와서 내게로 영접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권사님은 다들 예수 잘 믿고 거기서 만나자고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어 영생 얻고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살며 사랑으로 온전하고 복된 인생준비 잘하여 후회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잔칫집보다 나은 집 (전 7:1-4)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성경은 “잔칫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일이고 우리 인생에게 주는 교훈이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상집은 그것을 잘 가르쳐줍니다. 잔칫집은 이 땅을 생각하게 하지만 초상집은 영원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잔칫집은 이 땅에 치중하지만 초상집은 영원에 치중하게 합니다. 잔칫집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지 못하지만 초상집은 인간으로 겸손하게 합니다. 그리고 잔칫집은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지 못하지만 초상집은 인간이 유한한 줄 깨닫습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는 이 땅이 전부였습니다. 날마다 잔치하고 먹고 마시며 호화로이 연락했습니다. 그 결과 미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겠습니까? 신앙을 제대로 했겠습니까? 그 결과 그 인생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 대문 밖의 거지 나사로는 날마다 생의 위험 속에서 날마다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인생을 생각했고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자가 사람들과 말하고 웃는 동안 거지는 인생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간 것을 보면 그가 고난 속에서 인생 공부를 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 세상도 인생도 아무 것도 아니고 허무하구나. 이걸 깨달으면 대단한 도를 깨우친 것으로 아는데 이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비참할 뿐입니다. 하나님까지 구세주까지 내세까지 천국까지 깨달아야 진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집은 우리에게 인생공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2. 이 땅보다 내세가 더욱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목표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이 땅은 허름한 여관과 같습니다. 잠시 왔다가 가는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벧전2:11)고 말씀합니다.
최희준이 부른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그네라는 것은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까? 잔칫집에서는 모릅니다.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유족 및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고인의 입관식에서 인생의 이 귀한 것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됨을 감사합니다. 우리 유족들과 성도들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고 이 땅보다 더 귀한 곳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깊이 기억하고 이 땅에서 충실하실 분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 (롬 8:37-39)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시간에 “죽음보다 강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있을까요? 죽음을 이기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옛날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 그것은 한 뼘의 길이도 되지 않습니다. 마치 아침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 그것은 베틀의 북과 같은 것입니다. 그만큼 빠릅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빠릅니다.
그래서 시편 90:10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1. 사랑입니다.
아8:6에“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 했습니다. 예수님 보세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음도 불사하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8:37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랬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일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사랑이 두려움을 쫓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 아시죠? 두 앙숙의 집안의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셰익스피어는 그 작품에서 사랑은 미움도 원수도 죽음도 초월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소망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1:23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죽는 것이 더 좋다는 고백입니다.
소망은 닻과 같습니다. 소망은 천국의 고속도로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어떤 고난도 이겨냅니다. 그래서 롬5:3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였습니다. 이별은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으면 슬프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조만간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믿음입니다.
요일5:4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믿음 외에는 없습니다. 홍해 앞에서도, 태산 앞에서도 “믿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깁니다.
기도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어려운 일 당하면 기도하세요. 당하기 전에 기도하면 더 좋아요. 믿음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미래의 일을 끌어와서 염려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누구도 죽음을 이겼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죽음과 그 공포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우리 집사님과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믿지 않는다면 진실로 믿음을 결심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 받고 죽음보다 강한 믿음 소망 사랑의 신앙으로 무장하여 온전히 가뻐하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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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인생관 (약 4:13-14)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시간 「성경적 인생관」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적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1. 인생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습니다. 사실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더 축복입니다. 만약 불필요하게 미래를 안다면 그 스트레스가 대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내일 일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내일」이라는 날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면 나의 날이 될 수 있지 하나님께서 내일을 나에게 주시지 않으면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하나님 앞에 갈 것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2.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14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끼었어도 해가 뜨든지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시90:10에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 이라도 ...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고 하였습니다.
벧전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는 말의 “가까왔으니”는 원문 헬라어 “엥기겐”(ηνϫίκϱν)는 바로 「내 옆에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3. 성경적인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13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 말씀은 자기 생각대로 다 되는 줄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루 하루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후회함이없는 행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권사님은 갑자기 부르심을 받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영원한 천국의 백성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신부 (아 8:14)
아8: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이 시간에 “예수님의 신부”라는 제목으로 입관예배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가서는 신랑인 주님과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잘 서술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아가서의 최후 결론이 방금 읽은 말씀입니다. 의미를 한 마디로 말하면 “빨리 와 주셔요. 예수님” 그런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오리라.” 이 약속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은 그 약속대로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시고 또 더욱 충만히 임하시길 원하며 그리고 장차는 온전히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갈망하는 이유는 주님이 임하시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영으로만 임하셔도 죄를 이깁니다. 사탄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깁니다. 무지와 약함을 이깁니다. 지옥을 이깁니다. 사망권세를 이깁니다. 장차는 육체까지도 영생체로 살아납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답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주님이 임하시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날마다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려면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온전히 모시려면 예수님의 신부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신부에 합당한 자는 어떤 자일까요?
1.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14절 “내 사랑하는 자야”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요? 아가서에서는 신랑과 신부를 부르는 표현이 다릅니다. “내 사랑아” 이것은 신랑이 신부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자야.” 이것은 신부가 신랑을 부르는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해야 하는데 주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가 신부의 자격이 있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격미달입니다. 시91:14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하시고, 잠8:17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고 하셨습니다.
2. 주님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다시 14절 “너는 빨리 달리라” 마음으로만 사랑하면 되나요? 함께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마음에 다른 세상 것이 함께 있길 원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함에 순수하지 못합니다. 마음에 세상 욕망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3.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도하는 자입니다.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 환경이 좋아지면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좋아합니다. 소들도 질척한 자리를 긁어내고 새 것을 깔아주면 좋아서 껑충 껑충 뛰어다닙니다. 노루도 그런다는 말입니다. 향기로운 들판을 만나면 좋아서 펄쩍펄쩍 뜁니다. 어린 사슴이 나오는데 어린 사슴은 더합니다.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합니까? 우리 주님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함께 하시기 위하여 갈망하면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맨 마지막에 나오는 기도와 같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도하고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약속대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이 복은 오셔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주님께 가면 됩니다. 지금 우리 권사님은 영광스런 하늘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 가운데 계십니다. 이 귀한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욱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0-31)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거늘
이 시간에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제목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요 종교개혁자인 칼뱅(Jean Calvin ; 1509∼1564)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이 가장 중요하다. 이 구원은 창조보다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 사건보다도 우리가 구원받았느냐 구원받지 못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구원을 받는 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신 대로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상에서 성공했어도 천국 가지 못한다면 실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우리 집사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도는 언제 어떤 형편에서 부름 받아도 하나님의 품안으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집사님의 일생 중 잘한 일이 많겠지만 일생 일대 가장 잘한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믿는 가족과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가서 도와주었지만 우상을 척결할 때 참으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집사님은 교회 나와 열심히 예수 믿고 날마다 기도하며 그동안 가문의 모든 고통은 나의 선에서 중지되고 자손들에게는 결코 저주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것이 집사님 생각이었습니다. 신앙의 체험도 많이 했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할 때면 찬송하고 기도하면 평안을 얻었습니다. 교회 예배를 마치고는 꼭 제 손을 잡습니다. 왜 잡느냐 했더니 목사님의 손을 잡으면 신기하게 몸의 무거운 것이 싹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집사님은 분명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 1623∼1662)은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 마음이 평안을 얻고 믿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파스칼 허튼 소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마음에는 천국이 있고 평안이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이 없습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구원은 자기 공로로도 돈으로도 노력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 예수님의 공로로만 얻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주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기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고 또 읽었더니 계속해서 성경에는 세 단어만 반복해서 나오더라고 말했습니다.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하나님''이고, 두 번째로 ''인간''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구원''이란 단어였습니다. 인간이 죄를 졌다 할지라도 불의하며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과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전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에게 전도한 말씀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질문하는 간수에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믿으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즘 보면 사람이 돈 좀 벌고 출세한 사람들은 잘난 척하는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강도들이 달렸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를 끝까지 욕하며 죽었지만 한 강도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그 때 주님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둘 중 하나라면 어느 편에 속해야 할까요? 구원 받은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천사도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몇 분이 임종하실 때 앞으로 며칠 후에 예수님이 데리러 오신다고 말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정확히 그날 자정이 지나고 운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맞으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간증하신 성도도 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시고 천국이 있다는 걸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유족 그리고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집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지금 천국에 계십니다. 집사님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자나 깨나 가족구원입니다. 다 천국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남기신 육신 앞에서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을 따르기로 다집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 깊이 기억하시고 온 가족 다 예수 믿고 집사님 계신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예수 믿어야 하나 (롬 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시간에 “왜 예수 믿어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 예수 믿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오지만 예수 믿는 동기는 각각 다를 것입니다. 권유에 의해서, 건강을 때문에, 자녀 성공을 위해서, 사업 상,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마음을 의지할 데 없어서,,,
처음 믿는 동기야 다 그럴 수 있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표를 얻기 위해서, 혹은 그보다 더 저급한 동기로 교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예수 믿어야 하는 이유는
1.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롬3:10-13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 무언 줄 아십니까? 거짓말대회에서 금메달 받은 거짓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거짓말한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 비슷한 말씀이 성경에 있어요. 요일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 내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믿든 안 믿든 상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삶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세를 말씀합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막9:47-49에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거기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지옥만은 가지 않아야 합니다.
3. 예수만이 우리 인생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살길이 있다면 예수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길은 없습니다. 예수 믿어야 사는 동안에도 천국이 임하고 장차 천국 가는 것입니다.
어느 전쟁터에서 군함이 파선되어 모두가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군목이 허우적거리는 병사를 보고 물었습니다. “자네 예수를 믿는가?”, “아니요.”, “그럼 이 튜브를 자네가 가지게.”, “목사님은 어떻게 하려고요.”, “나는 예수 믿으니 지금 죽어도 천국 가네. 자네는 지금 죽으면 지옥에 가. 내가 이 구명튜브를 주고 죽을 터이니 자네는 살아나거든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나세.” 그리고 군목은 익사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후에 예수를 믿고 자기 대신 죽은 군목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살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다 잠깐이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마치 바닷가의 모래성과 같이 해지는 줄도 모르고 집을 짓고, 가게도 만들고, 공장도 짓지만 잠시 후 조수가 밀려와서 다 쓸어가 버리고 마는 것처럼 사람은 시간이라는 모래위에 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000 집사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하나님의 참 자녀입니다. 세상 수고 다 끝났습니다. 지금은 아버지 품 안에서 가장 행복하게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크게 성공하신 분입니다. 자손들이 이렇게 다 하나님 섬기면서 살고 있으니 성공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인간은 죄인이요 내세가 있고 예수만이 하나님이 내신 구주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영원히 변함없는 믿음 가운데 살아가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생명이요, 부활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이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집사님을 떠나보내기 심히 섭섭하지만 그의 영혼을 더 좋은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셨음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이 세상에 취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특히 온 가족 친지들 위로해 주시고 모두 다 빠짐없이 예수 믿어 천국백성이 되어 함께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모두 신앙생활 잘하여 성령의 은혜를 받아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기고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고 천국에 이르도록 성령으로 주장해 주시기 원합니다.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절차를 주님께 의지하옵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장례식 설교] 복된 성도 (엡 1:3-7)
이 시간에 [복된 성도]라는 제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는 누구일까요? 부자일까요? 왕일까요? 누구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는 왕도 부자도 어떤 누구도 아니고 구원 받은 성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눅 16장을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그토록 호화로웠지만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지만 나사로는 거지였지만 천국의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생복락의 온갖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왜 성도가 그토록 복된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썩고 없어질 왕자로만 태어나도 대단한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의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2. 성도는 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어요.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용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담당해 주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 공로를 믿는 자를 죄 없다 인정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악한 죄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인이 아닙니다. 의로운 백성입니다. 그래서 마13:43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루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언제나 실망스러웠습니다. 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한계를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꿈에 흑판 하나가 나타나는데 거기에 루터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의 목록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죄가 많아 셀 수조차 없었습니다. 루터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나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어디선가 팔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 죄의 목록 맨 위에다 글을 쓰는데 “그 아들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기록하는 사람의 손에는 못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못 자국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면서 칠판에 기록된 모든 죄의 목록을 깨끗이 지워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죄 사함을 받은 복된 사람입니다.
3. 성도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14:2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예수 안에서 마음의 천국을 누리다 죽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 진정한 행복과 안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 잠시 죽었다 살아난다든지 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많아요.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고후12:2-3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천국이 좋았으면 일생 천국을 그리워하며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고후5:8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했고, 또 빌1:23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부름을 받든지 이 날은 천국의 종이 울리고 빵빠레가 진동하고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수많은 성도들과 천사들을 거느리고 나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가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불못에 한 번 가면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고인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지금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계신단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유족들,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하나님을 모르신 분 계신다면 꼭 예수 믿으시고 우리 모두 함께 천국 갈 수 있는 귀하고 복된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장례식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생명이요, 부활이신 하나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신 주님, 고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었기에 내 아버지 집에 가신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 살면서 고난도 고통도 많았지만 지금 아버지의 나라에서 고통도 슬픔도 없이 영원히 기쁨과 행복 가운데 즐거워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유족과 성도들 다 예수 믿어 영원한 하나님 백성 되어 천국의 약속을 보장 받는 귀한 은혜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이 땅에 남겨진 가족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모든 장례 절차가 마칠 때까지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며 교회의 집례에 모두 협조하고 따를 수 있게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화장식 설교 후 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저녀된 고인은 이미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 중에 있는 줄 믿습니다. 이 땅에 남겨진 유족과 친지들을 끝까지 위로해 주시고 신앙생활 잘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도 언젠가는 이렇게 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잘할 수 있도록 다짐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후의 모든 절차를 주님께 맡기옵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 27:50-54)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여기 54절에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갈라지고, 땅이 진동하며 큰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하여 일어난 것을 보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랬던 더 큰 증거는 예수님께서 운명하기 전에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축복하신 인자하신 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더 큰 증거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런 표적이 있습니다.
1. 첫째 그 표적은 믿음의 표적입니다.
고전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안 보인다고 모르겠다고 하는데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어지고 천국이 믿어지고 성경이 믿어지고 함께 하심이 믿어진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갖는 내적 표적입니다.
2. 두 번째 표적은 소망입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여기 소망은 "엘피다 조산" 즉 "생동하는"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소망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때문에 천국소망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런 소망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빌1:23에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했습니다.
3. 세 번째 표적은 사랑입니다.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벧전1:8-9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 소망 사랑을 혼자만 간직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더욱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개를 보니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고 나도 믿자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권사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평생, 그토록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던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신 것처럼 해처럼 밝게 사시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유족들과 성도들도 권사님의 믿음을 따라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나 모두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해처럼 밝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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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가 많은 묘지에서 예배 시 )
최고의 명당 (시 125:1-3)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사람들은 가문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 명당을 찾아다닙니다. 이것을 풍수지리라고 하는데 풍수지리는 산수의 형세와 방위 등의 환경적인 요인을 인간의 길흉화복과 관련지어 좋은 터전을 찾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터를 잡을 때는 약간 참고할 만하다 할 수 있겠지만 장지라든지 이런 부분은 100%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어떤 장소나 무엇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세상에서 최고의 명당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 보니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1-2절)
풍수에서는 좌청룡 우백호라 하지요. 큰 산을 뒤로하고 좌우에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을 말하는데 이것이 우리 인생을 보장해 주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둘러주시고 영원까지 지켜주십니다.
3절에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떤 악한 세력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본문 시편 125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는 불안한 상황에서 주신 하나님의 시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갈 때 그런 어려운 일이 생길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내릴까 합니다. 반석되신 예수님이 명당입니다. 하나님을 터전 삼고 살아가는 자손들에게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떻게 흐르고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되 더욱 기도하며 사랑하시기 바라며, 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손들에게 믿음을 가르쳐서 대대로 신앙을 이어가는 복된 가문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 (계 21:1-4)
성도에게 죽음이 있지만 슬프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1987년 12월 19일 우리 한국교회의 최고의 교회사가인 박용규 목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잠시 죽었을 때 그는 사람들이 그토록 궁금해 하던 천국과 지옥을 예수님과 천사와 함께 체험하고 돌아온 사건은 책으로 나오는 등 유명합니다.
역사학자니까 사람들을 많이 알겠지요. 그는 지옥과 천국이라는 세계에 극명하게 갈라져서 영광 혹은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에 살 때 꼭 예수 믿어야 하고, 신앙생활해도 함부로 악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정말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천국은 밤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 백성은 해처럼 밝게 살아갑니다. 그 나라에서는 내성적이거나 우울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음은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계21:3-4에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어떤 상처도 질병도 다 치료되어 기억할래야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다 책임져 주시니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고 만사형통입니다.
죄도 유혹도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죄를 질래야 질 수 없습니다. 마귀도 없고 기쁨과 행복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아름다운 찬양이 흘러나오고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것의 천 배 만 배 보다 더 천국의 기쁨이 큽니다.
더 감사한 것은 천국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 그리고 앞서 간 성도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천사들을 만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기서 다시 만납니다. 성도는 황금 보석 빛나는 집에서 영원히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했던 충성에 따라 하늘의 영광과 상도 달라집니다.
불멸의 최고의 찬송가로 알려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305장 찬송의 저자 죤 뉴톤 목사는 부름 받기 얼마 전에 자신이 천국 가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먼저는 천국에 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 놀랄 거고, 다음은 천국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누추한 사람들이 와서 그 영광을 누리는 걸 보고 놀라고, 다음은 자신이 천국에 와서 주님의 품에 안긴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장차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 믿고 천국 가서 우리 하나님의 품에 안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만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내 공로가 아닌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공로로만 들어간다는 것을 믿으시고 우리 모두 예수 믿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국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례식 설교 후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평안함과 위로함을 받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들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헛된 세상에 마음 두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 없도록 붙들어주시고 우리 모두 함께 장차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절차를 주님께 부탁드리옵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료 더보기 = http://cafe.daum.net/agaser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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