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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설교-장례식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열려라 에바다 2021. 10. 3. 11:33
장례식 설교-장례식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나에게 "목회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두말 할 것 없이 '설교'라고 대답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설교 중에서도 각종 예식에 관한 설교를 할 때는 더욱 긴장되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성경을 읽고 설교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며, 죄인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성경의 요긴한 교훈대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예식설교를 할 때에는 하나님 중심이기보다는 인간 편으로 편중되기 쉬운데 특히 결혼식과 장례식의 설교가 그렇다. 사람들은 틀에 박히기를 원치 않으며 틀에 박힌 것들을 또한 싫어한다. 격식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예식설교가 하나님 중심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틀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틀에 합당한 내용을 담보해야만 한다.

하나님 중심의 장례의식 설교의 틀과 내용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중심 설교의 틀인가? 어떤 예식이든지 예식을 거행할 때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의식들이 진행된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장례식은 대체로 임종식, 입관식, 출관식, 그리고 하관식 등의 의식절차로 치러지는 것이 거의 공식화되었고 또 그 의식절차마다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의식들을 기독교적 의미와 사상이 부여된 신학적 근거에 의하여 진행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소위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절차에 따라서 합당한 설교와 적절한 행의(行儀)를 내용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장례의식과 관련된 교의신학

신론 : 무엇보다도 먼저 신론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삼상 2:6; 욥 1:21,33:4; 행 17:25). 인간의 생사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이 영혼을 부르실 때 인간은 가는 것이다(마 10:28~29). 하나님은 또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며(요 3:16), 외롭고 약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주시는 자상하신 하나님이시다(사 1:17). 그러므로 장례식의 모든 의식절차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전하면서 의식들을 진행하여야 한다.
인죄론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고귀한 존재이나 인류 시조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었다(영적 죽음). 따라서 육신도 죽게 되었다(롬 5:12, 6:23). 그래서 인간은 흙에서 왔은즉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창 2:7; 전 12:7).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두고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을 인지, 수용토록 해야 한다.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하여 죽을 자에게 생명과 부활, 그리고 영생의 소망이 되셨다. 그래서 죽음에 임박한 임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를 믿고 죄사함을 받도록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말기환자들에게 마음의 위안과 소망을 주게 된다.
구원론 ; 성령님은 특별사역으로 복음의 부름인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에 이르도록 택한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하고 믿도록 하시며, 보혜사로 슬픈 자를 위로하며 진리에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임종자나 유족들을 감화하며 위로하도록 성령님의 역사에 의지해야 한다.
교회론 : 믿음으로 살다가 주 안에서 죽은 자는 지상의 전투적 교회에서 천상의 승리적 교회로 들어간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고백한자들의 공동체로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유족을 위로하며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종말론 : 장례식과 종말론은 불가분리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종말론은 개인 종말론과 일반 종말론으로 분류한다. 개인종말론은 개인의 죽음과 사후의 문제를 다루며, 일반 종말론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영원한 세계를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장례식의 모든 절차(임종, 입관, 출관, 하관)는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종말론으로 시작해서 종말론으로 마친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신학적 근거로 장례식을 진행하면서 임종자와 유족에게는 믿음과 소망 그리고 위로와 평안을 갖게 하며, 조문자들에게는 인생관을 새롭게 해주고 전도의 기회가 되며, 사역자들에게는 확실한 장례의식의 지침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신학적 근거에 따른 의식절차와 설교주제

가. 임종식에서 임관 전까지의 절차에 관한 신학적 근거와 설교주제

⑴ 운명 전 임종식
운명 전 임종식의 신학적 근거
임종식은 임종자의 운명 전과 운명 후로 나누어 진행한다. 운명 전에는 임종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임종자의 신앙 여부를 확인하며,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났다가 죽는 것은 정한 것이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였으나(히 9:27),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계 14:13).
그래서 임종자에게 말씀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를 전하여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을 떨쳐버리고 소망 가운데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에 임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론, 기독론, 구원론, 그리고 개인 종말론의 신학적 근거로 진행한다.
운명 전 임종식의 설교 주제
․하나님은 ○○○님을 사랑하십니다(요 3:16: 요일 4:9,10)
․ 강도도 구원 받았습니다(눅 23:39-43)
․ 구원의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고후 6:2)
․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두 가지일(히 9:27)
․ 구원 얻는 길은 오직 한길 뿐입니다 (행 4:12)
․ 예수님이 생명의 길입니다(요 14:6)

⑵ 운명 후 임종식
운명 후 임종식의 신학적 근거
운명 후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하여 비통해 하는 유가족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주 안에서 믿음으로 위로 받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 경우엔 신론과 일반 종말론을 근거로 하여 의식을 진행하며 설교한다.
운명 후 임종식의 설교 주제
․ 인간의 생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마 10:29~30; 욥 1:21)
․ 권고하시는 하나님(창 50:22~26)
․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살전 4:13~18)
․ 화액 전에 부름 받으셨습니다(사 57:1~2)

나. 입관식에서 출관식 절차에 관한 신학적 근거와 설교 주제

⑴ 입관식 출관식의 신학적 근거
초상이 나면 교회에 광고하여 온 교회가 슬픈 자를 위하여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장례의식에 적극 참여하도록 한다. 그리고 고인을 지상 전투교회에서 친상의 승리교회로 옮겨갔으며, 남은 유족과 교우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로서 유기적 관계임을 알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때는 의식절차를 주로 교회론적 근거에서 진행한다. 그러나 설교나 찬송, 그리고 위로의 말 등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장례식과 관련된 모든 신학적 이론을 근거하여 진행하여야 한다.

⑵ 입관식과 출관식의 설교주제
입관식 설교 주제
․ 유해 앞아서 받을 교훈(왕상 2:1~3)
․ 하나님이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시는 이유(시 116:15~16)
․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되다(계 14:13)
․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살전 4:13~18)
입관식 설교 주제
․ 인생의 승리자(딤후 4:6~8)
․ 성도의 생사관(빌 1:20~24)
․ 의인의 죽음(민 23:10)
․ 성도의 본향(히 11:14~16)
․ 공수래공수거의 인생 (전 5:13~17)

다. 하관식 절차에 관한 신학적 근거와 설교 주제

⑴ 하관식의 신학적 근거
하관식에서는 다른 의식절차만큼 시간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이 시간은 장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족들은 관이 광중(壙中)으로 내려지는 것을 보고 같이 따라 들어가려고 할 만큼 비통해 한다. 이때 집례자는 무덤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설교하여 유족에게 부활 신앙을 고취하며, 예수님 재림 때에 상봉케 될 것을 소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때는 일반 종말론의 신학적 근거에 의하여 설교한다.

⑵ 하관식의 설교 주제
․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창 3:19, 전 12:17)
․ 장막과 영원한 집(고후 5:1~4)
․ 부활의 소망(요 11:25~26)
․ 열려질 무덤(마 27:50~53)

라. 화장의 문제와 설교 주제

⑴ 화장의 문제
출론 성경에서는 "흙에서 왔은즉 흙으로 돌아가라"(창3:19: 전 12:17)고 하였으니, 매 장이 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화장은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실정으로 보아서 앞으로 머지않아 국가가 정책적으로 화장을 법으로 시행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때를 대비하여 화장할 때의 기독교 장례의식도 미리 고려해두어야 할 것이다. 매장으로 씩어 흙이 되는 것이나 화장으로 재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순교자들이 화형을 당한 예도 있거니와 화장이 교리적으로나 신앙양심으로도 거리낄 것 없다.

⑵ 화장할 때의 설교 주제
․ 죽음을 통해서 깨닫는 인생관(약 4:14~15)
․ 순교자들을 생각합시다(히 11:33~35)

장례의식 설교의 예

운명전 임종식의 설교
제목 :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두 가지일
성경 :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죽는 일입니다. 다윗은 죽음에 대하여 이르기를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왕상 2:2; 수 23:14). 죽음의 길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다 갑니다. 불로초 불사약을 구하던 진시황도 갔고, 여기 있는 우리도 언젠가 다 갈 사람들입니다.
어느 부자집 머슴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새경은 덜 주셔도 좋으니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고 간청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자네가 정 원한다면 허락하겠네 마는 세상에 자네처럼 미련한 사람 처음 보겠네. 늙어 장가도 못간 주제에…자네보다 더 미련한 사람 보거든 이것을 넘겨주게" 하고 짤막한 막대기를 하나 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주인이 중병에 걸려 다시 일어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머슴이 문병을 하인서 "주인 어른, 갈 길을 준비하셨습니까?" "갈 길 준비라니…?" "하룻길을 떠날 때도 준비가 필요한데 어찌 영원한 길을 떠나시면서 준비가 없다니요, 주인 어른보다 더 미련한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하고 그 막대기를 돌려드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갈 길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또 한가지 피할 수 없는 것은 사후의 심판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도 바로 그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세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은 사람은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께로 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무서운 지옥에 가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합니다.
지금 이 시간 ○○○님도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운명 후 임종식의 설교
제목 : 화액 전에 부르시는 섭리
성경 : 이사야 57:1~2

사랑하는 이를 앞서 보내게 된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미쳐 헤아리지 못하므로 슬퍼하게 되나, 그 섭리를 알게 되면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첫째, 고생을 면하게 하시려는 섭리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애석하지만 하나님은 ○○○님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시려고 데려가신 것입니다.
둘째는, 환난을 면하게 하시려는 섭리입니다. 우리는 앞날에 있을 일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님을 불러 가신 것은 장차 임할 기근, 전쟁, 지진 등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루동안에도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릅니다. 비참한 교통사고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평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섭리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 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계 21:4).
이제 고인은 괴롭고 죄 많은 세상, 환난과 문제가 있고 아픔과 눈물이 있는 세상으로부터 평안의 세계 곧 하나님나라로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그곳은 아름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복락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부름 받으셨음을 알고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입관식의 설교
장의절차를 따라 한차례씩 고인의 모습이 가리워진다. 그럴 때마다 유가족은 비통해 한다. 수의를 입히고 입관할 때 슬퍼하는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은 역시 종말론적인 소망뿐이다.

제목 :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성경 :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사랑하는 가족을 사별(死別)한 슬픔을 어디에다 비하겠습니까마는, 우리 성도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믿음으로 위로 받을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다시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에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라는 말씀대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무덤에 있는 자들이 다 부활하고 그때까지 살아 남은 자들도 마찬가지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고인이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고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본문에 "소망 없는 다른 이"라고 했는데, 여기 '다른 이'는 믿지 않는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암담하여 마냥 슬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 안에서 돌아가셨으니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얻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믿음 없이 주 밖에서 돌아가셨다면, 정말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인의 구원을 생각하고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슬퍼하지 말고 믿음으로 고인의 뒤를 따라갑시다. 생전에 고인이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살라" 또는 "교사로 주일학교에서 봉사하여라" "성가대에 앉으라" 등등 일러주시던 말씀을 기억하고 고인이 살아 계실 때 교회를 섬기던 것을 본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충성함으로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다하시어 장차 고인을 기쁨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관식의 설교
출관식은 그 규모에 따라서 다른 장의절차보다 순서와 절차가 다양하며 시간이길 수도 있다. 장소도 다르다. 주로 상가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당, 병원 또는 학교 강당이나 운동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출관식에는 다른 장의절차에서보다도 조문객이 많이 모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설교자는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여 하나님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어지도록 하여 유가족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위로를 받으며, 조문객들은 구속의 사랑과 종말론적 진리를 깨닫고 고인의 신앙과 덕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제목 : 인생의 승리자
성경 : 디모데후서 4:6~8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하기를 "잘 산 하루가 행복한 잠을 자게 함같이 잘 산 일생은 행복한 죽음을 맞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읽은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인생 말년에 이르러 살아온 과거를 회고하며 또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면서 선언한 승리의 개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인생의 승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생을 잘 산 사람입니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 않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했습니다(히 2:15).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째서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죽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으며, 성령의 역사로 중생 하여 장차 부활한 다음에 하나님나라에서 영생할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인생의 승리자인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엘리자벳 퀴브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의 단계를 다섯 단계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며 둘째는, 노여워하며 넷째는, 우울에 빠지며, 그 다음에는 흥정을 하려고 하며 다섯째 단계는, 할 수 없이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심리입니다.
일본의 어느 의사의 경험담입니다. 병원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어 말했는데, 그 첫째가 끝까지 그 가족과 함께 '선생님, 살려 주세요' 하다가 숨져 가는 사람이랍니다. 그 다음은 '나라를 위해서 장렬하게 목숨을 바치지 못하고 부녀들의 울음 속에 병상에서 죽어가다니…' 하며 죽는 무사적 죽음이고, 셋째는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는데…' 하면서 체념적으로 죽음을 대하는 철학자적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하고 찬송을 불러주기를 원하며 기쁨으로 죽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둘째로, 살아온 과거를 만족하게 회고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후회 없이 만족히 여길 수 있는 짧을 산 사람이면 승리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가지 점으로 그의 과거를 요약했습니다. 먼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의 악조건과 싸워야 하며, 또 인간 사회에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영의 세력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싸움에서 선전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또 한가지는 "달려 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道理)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사람 몫의 삶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경우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말합니다. 또한 중요한 길은 신앙 노선의 길입니다. 바울은 그가 마땅히 가야 할 이 길을 달려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믿음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저 교회생활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쳤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아야했던 것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숱한 괴로움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승리적 과거를 회고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만족히 과거를 회고할 수 있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셋째로, 미래를 내어다보고 의의 면류관을 확실히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면류관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광이며 상입니다. 바울에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나타남을 사모하는 자들은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달리며 믿음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돌이켜볼 때 고 ○○○님도 사도 바울과 같이 승리적인 인생을 살으셨습니다. 남은 우리도 언젠가 고인의 뒤를 따를 것인데, 그 가르침과 그 믿음을 본받아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관식의 설교
하관식은 장례식의 마지막 의식절차이다. 고인의 관마저 지하에 묻히고 유족은 오열하며, 산역(山役)으로 주변은 어수선하고 주의가 매우 산만해진다. 그러나 분위기는 아주 무겁다. 그러므로 이때의 설교는 길지 않으면서도 강한 종말의식(終末意識)을 가지고 주의 오심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 것을 호소하는 설교를 해야할 것이다.

제목 : 부활의 소망
성경 :요한복음 11:25~26

시인 롱펠로우는 그의 인생 중에서 "인생은 참이다. 진실이다. 무덤은 인생의 종국이 아니니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했고, 벵겔(Bengel)은 "경건한 자의 죽음은 하늘나라의 방언으로 잠듦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죽음'을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잠든 자'가 다시 깨어나듯이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고전 15:19).
오늘 우리가 여기에 고인을 장사하면, 이 세상에서는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은 영결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것은 '영원한 작별'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인간의 삶이 무덤으로 끝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으며 남과 같이 자유롭게 살지 못했습니다. 무덤이 인생의 끝인 줄로 알았다면 마음내키는 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이 인생의 종국이 아닙니다.
둘째로,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시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 예수님은 친히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부활(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를 믿으며, 또 그렇게 부활할 것을 소망하고 믿는 자들을 부활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눅 20:36).
끝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영생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모든 무덤이 열려질 것인데, 우리가 진정으로 바랄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심판의부활로 부활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 ○○○님의 시신을 여기에 안장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 부활할 것을 믿고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화장식 때의 설교
화장을 마치고 분골이 나을 때 유족들의 마음은 심히 슬프기도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한줌의 재밖에 남지 않는구나' 하는 허망한 생각에 잠시 멍해지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영혼을 불러 가셨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가치관이 흔들려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매장을 해야 하는데 화장을 하게 되어서…" 하면서 거리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목회자는 화장장에 꼭 함께 가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인생관을 지도해주어야 하는데, 설교로써 다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장이 끝나는 동안 유가족을 조용한 곳으로 모아놓고 기도하고 충분히 설명하며 위로해주어야 한다.

제목 : 죽음을 통해서 깨닫는 인생관
성경 : 야고보서 4:14~15

우리는 이 시간 고인이 남기고 간 유해를 처리하고자 하여,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를 다 모릅니다. 그러므로 계시하여 주신 말씀으로 죽음과 관련된 인생관을 깨닫고 위로 받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은 육신의 생명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구성요소는 육신과 영혼입니다. 육신은 눈에 보이지만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르기를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고후 4:18). 그리고 성경은 육신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은 무상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보이는 육신 만이라면 인간은 참으로 허무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신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영혼을 부르실 때(눅 12:20), 육신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살은 썩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화장함으로 재가 됩니다만 그 역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은 보이지 않으나 영혼은 영원합니다.
둘째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의 의지적 결단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았습니다(물론 자살이라는 비정상적인 죽음을 제외하고).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며 또 취하시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죽은 자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입니다.
매장으로 육체가 부패하는 것이나 화장으로 재가 되는 것이나 그 존재가 우리 시각에서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본래 무에서 유를 존재케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다 부활시킬 것입니다. 속담에 "팥죽이 풀어져도 솥 안에 있다'고 함과 같이 물체를 불에 태워도 그 원소는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이미 하나님이 불러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유해를 처리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사람을 보이는 육신만으로 알고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에서 유를 존재케 하신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으시고, 주님의 재림의 날에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지고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장례식 후의 의식들과 설교

장례식의 모든 의식절차는 하관식으로써 모두 끝난다. 그러나 교우관리자는 목회적 입장에서 보면, 슬픔을 당한 유족을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따뜻이 보살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을 마치고 교우들과 함께 상가로 돌아와서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회자의 장의 사역을 끝맺는 것이다.

귀가하여 드리는 예배와 설교
(1)귀가하여 드리는 예배
속담에 "든 사람 표는 안 나도, 난 사람 표는 난다"는 격으로,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온 집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함을 느낀다. 그리고 장례 기간 동안 밤잠 못 자고 긴장되었다가 이제 큰 일을 마쳤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한꺼번에 허탈감과 온몸의 피로를 겪게 된다. 그래서 목회자는 유족을 위로하며 새 출발을 위한 용기를 갖도록 돕는다. 하나님을 의논의 대상으로 삼고 성도의 교제와 교회봉사 등 신앙을 삶의 구심점으로 삼고 살아가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자녀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부모님이 생전에 그토록 원하시던 대로 신앙생활 잘하고 형제끼리 우애 있게, 화목하게 지내도록 당부한다.

(2)귀가하여 드리는 예배와 설교
제목 : 천국이민
성경 : 골로새서 1:12~14
요즘 우리나라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으로 이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영원한 이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천국이민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곳은 영원히 정착할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민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늘나라 옮기는 것입니다.
첫째, 천국이민은 사랑의 나라를 옮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흑암의 권세' 곧 사단이 지배하는 곳으로서 끊임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원망, 그리고 살상이 가득 찬 곳입니다. 전쟁과 천재지변도 있습니다. 이제 고인은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이 넘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곳은 미움이 없고 사랑만이 있습니다. 시기가 없고 존경이 있습니다. 교만이 없고 겸손이 있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서로가 믿습니다. 불평이 없고 감사가 있습니다.
둘째로, 천국시민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로의 이민입니다. 세상은 어디나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슬픔과 눈물로 얼룩져 있습니다. 흥청거리고 노래하고 춤을 추지만 진정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은 없습니다. 근심, 걱정, 우수, 사려가 안개처럼 짙게 끼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치는 나라로 옮김을 받았습니다. 영생복락을 누리는 아들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셋째로,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천국이민이 허락됩니까? 본문에 보면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얻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천국이민은 아들 안에서 죄사함을 받은 자만이 가능합니다.
고인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죄사함 받았으니 하나님 아들의 나라, 곧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장차 우리도 천국으로 이민될 것이니 고인을 천국에서 만날 소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새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첫 성묘와 설교
⑴ 첫 성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묘는 묘역을 돌아보고 무너진 데가 있으면 고치고, 잡초가 우거졌으면 깨끗이 정리하며 손질하는 것이다. 장사 지낸 후 첫 성묘는 굳이 3일만에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제외하고 편리한 날을 정해서 가면 된다.

⑵ 성묘할 때의 설교
․ 제목 : 믿음을 이어받는 경건한 후손
․ 성경 : 디모데후서 1:3~5
오늘 우리는 고인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고인의 후손으로서 찾아왔습니다. 앞서 가신 분의 은공과 덕을 기리며 후손 된 도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면서 디모데를 가리켜 역시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조상적부터 신앙는 이어받은 경건한 자손들이었음을 감사하며 귀하게 여겼습니다.
첫째, 신앙을 자자손손 계대(繼代)하는 놀라운 복을 감사하십시다. 하나님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 때에 온 세상을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말2:15).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믿음의 후손 곧 경건한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믿음의 자손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후손일 된 것을 복되게 여겨 감사하십시다.
둘째로, 믿음을 전통적으로 계승하는 가문이 되도록 결의를 새롭게 합시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잠 15:16). 우리 가문은 후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삼도록 합시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버리는 자가 있다면, 그는 가문의 전통을 더럽히는 자가되는 줄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모인 가족들은 우리 가문의 전통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신앙 안에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추모식과 추모식의 설교

⑴ 추모식

어떤 이는 '왜, 안 믿는 사람들이 제사지내는 것처럼 추모식을 하느냐' 하면서 반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 앞서가신 믿음의 선진들을 흠모하며, 그들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민 23:10; 히 13:7). 그런데 꼭 유념할 사항은 고인을 추모하는 데서만 그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선진들을 흠모하게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도록 하였다(히 11:1~12:3, 13:7~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추모식은 기독교 추모식으로서는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이다.

(2)추모식의 설교
제목 : 의인은 영원히 기념되리라
성경 : 시편 112:1~10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다가 갔지만, 후세의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념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 악인을 기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간은 고인의 주기를 기념하며, 또 고인을 추모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의인은 영원히 기념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는가를 살펴보십시다. 로마서 3장 10절을 보면,"의 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성경에서 '의인'(겔 14:14)이라고 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노아를 의인이라 했고, 아브라함과 욥,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요셉을 의인이라 했으며 사가랴와 엘리사 및도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을 의인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의인입니까? 성경 가운데 언급된 의인이란 그 세대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시고 그래도 나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뜻을 살펴보십시다.
1)믿음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의인(1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입니다. 그리고 진실 되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사람 치고 상습적인 법죄자나 불의를 행하는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2)정직을 행하는 의인(3~4절). 본문에 보면 정직한 사람을 "자비하고 의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정직을 삶의 신조로 삶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걸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진실함과 정직함을 원하십니다.
3)남에게 은혜를 베풀며 어려운 사람을 잘 돕는 의인(5,9절). 예수님도 마태복음 6장에서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에 관한 교훈을 하시면서 그것을 '의'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언급한 '의'가 바로 구제입니다. 본문 9절에도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의이며, 또 그 의가 영원히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남에게 베풀어주는 그 의는 영원히 기념케 됩니다.
이상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급된 의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인격에 관한 의이며, 세 번째는 남과의 관계 즉 사회적인 의입니다. 우리가 앞서 가신 고인을 생각하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과 남들 앞에서 흠없이 살려고 힘쓴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십시다. 첫째, 영원히 기념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6절 이하).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외식하지 않고 중심이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을 기뻐하십니다(삼상 16:7). 또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를 기억하시며(행 10:4), 나드 기름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여인의 행한 일이 복음과 더불어 영원히 기념케 되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후대가 복되고 강성해진다고 하였습니다(2절 이하). 시편 37편 25절에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이 일시적으로, 잘 되는 것 같으나 장구하지 못합니다. 앞서 가신 고인이 자식을 위해 구한 기도가 어디 가겠습니까?
끝으로 우리는 어른의 공덕을 기리면서 어른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보십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었으며,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감복하고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의롭게 살도록 힘을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