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삼하6:1-11)

열려라 에바다 2022. 7. 30. 08:31

오벧에돔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 :사무엘하6:1-11(권호만 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성인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합 왕이 되었을 때 여부스 사람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빼앗고 그 성을 통합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게 됩니다.

그 다윗성에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려고 했던 것인데 법궤는 처음에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있었던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한 다윗의 준비는 아주 웅장하고 철저했습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에서 뽑은 3만 명을 준비했습니다.

법궤를 모시기 위해 새로운 마차도 준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기를 가지고 여호와 앞에서 즉 법궤 앞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법궤를 실은 마차 앞에는 아비나답의 아들인 아효가 섰고 뒤에는 웃사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마차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법궤가 떨어질 것 같으니까 뒤를 따르던 웃사가 반사적으로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웃사가 죽임을 당했고 법궤를 옮기는 행사는 한 순간에 중단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흩어졌고 다윗은 자기 성에 법궤를 모시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대신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있을 때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다윗은 다시 두 번째로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법궤를 다윗이 준비한 장막에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법궤의 운반과정에서 우리는 3명의 대표적인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아비나답, 오벧에돔, 그리고 다윗입니다.

이들은 각기 법궤와 관련하여 여호와의 처분을 받게 되는데요,

①먼저, 아비나답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비나답은 하나님의 법궤를 20년 동안이나 모셨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일에 아들 둘을 보내 헌신하게 합니다.

법궤를 실은 마차를 두 아들이 몰게 하는데 아효가 앞에 서고 웃사가 뒤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뒤따르던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20년 동안이나 법궤를 모셨고 마지막으로 법궤를 옮기는 일에도 아들 둘을 통하여 헌신하게 했는데 결과는 아들의 죽음이었습니다.

 

②두 번째로,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벧에돔은 웃사의 죽음으로 법궤를 옮기는 일이 중단되었을 때 자의든 타의든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시게 됩니다.

법궤로 인하여 웃사가 죽었는데 그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신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추측하건데 오벧에돔도 그렇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없나’ 그 집을 주목하여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석 달 동안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복을 베풀어줍니다.

 

③세 번째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는 일에 처음에는 실패합니다.

첫 번째 법궤를 모시는 일에 다윗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새로운 마차도 만들고 악기를 동원해서 법궤를 모시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아비나답의 저주는 곧 다윗의 저주였습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의 집이 축복받는 것을 보고 다윗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냅니다.

첫 번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법궤를 자기성에 모시게 됩니다.

법궤를 자기 성에 모심으로 다윗성은 명실 공히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다윗정권은 더욱 튼튼하게 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법궤와 관련된 3명의 사람들이 받은 축복과 저주를 살피면서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법궤를 모시면서도 저주를 받은 일이 있어서 안 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저주를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모시면서 축복을 받은 오벧에돔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축복받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의 축복과 아비나답과 다윗의 저주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1. 먼저는, 법궤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어서 복과 저주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법궤는 십계명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광야에서 내렸던 만나를 담아놓은 궤였습니다.

그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지성소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법궤 자체에 어떤 힘과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벌였는데 전쟁에 패한 이스라엘이 법궤를 생각합니다.

법궤를 가져오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왔습니다.

법궤가 들어왔다는 말에 처음에는 사기가 올라갔지만 전쟁은 법궤를 가져온 후에도 패하게 됩니다.

패하는 것 뿐 아니라 법궤 자체를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여러분, 법궤 자체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었다면 법궤를 가져갔을 때 전쟁에서 승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에서 패하였고 법궤자체를 빼앗겼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에 힘이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법궤에 어떤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물에 들어갔을 때 내려오던 물이 그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성을 돌았을 때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법궤의 힘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사실 이것은 법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말씀하기를 자기는 자기 머리맡에 성경책을 늘 놓아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양계를 하면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틈틈이 성경을 읽기 위해서 머리맡에 성경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머리맡에 두면 편하게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머리맡에 두면 잘 잔다는 것은 심리적인 안정감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에 어떤 능력이나 효능이 있어서 잠이 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저 거룩한 책일 뿐 성경 자체에 어떤 능력이나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법궤에 어떤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힘과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법궤에 어떤 힘과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그것이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또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광야시대에 백성들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서 징계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구하였을 때 하나님은 처방을 내려주시는데,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달아놓고 불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쳐다보면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봤을 때 정말 거짓말처럼 병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럴 때 얼마나 신기했으며 구리 뱀에 대한 환상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 후 그들은 구리 뱀에 무슨 능력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그것을 섬기기 시작했는데 무려 700년동안 섬겼습니다.

그 구리 뱀의 우상을 없애버린 왕이 히스기야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트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4절)

여기에서 느후스단이라는 말은 놋 조각이라는 뜻입니다.

구리 뱀은 그저 놋 조각에 불과하지 그것에 어떤 능력이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구리 뱀을 섬기거나 법궤를 섬기는 우상숭배를 조심해야 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복을 가져다줍니다.

 

아비나답이나 다윗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한 가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4장에 보면 법궤를 옮기는 방법이 나와 있는데요,

첫째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은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들이 할 일이라는 것이고

둘째로,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에는 채를 꿰고 어깨에 메어서 옮기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궤는 절대로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과 아비나답이 법궤를 옮기는 모습을 보면 전혀 이 말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 귀한 일을 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매사에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던 다윗이 이 일에는 기도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일을 제사장들과 상의하지 아니하고 천부장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을 합니다.

군 지휘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레위자손들이 메어 옮겨야 할 법궤를 새 수레를 만들어 옮기도록 했습니다.

결국 이런 불순종이 저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는 인간적인 면에서 정말 최선을 하였습니다.

전국에서 3만 명의 사람들을 모았고 새 수레를 만드는 수고를 하였고 각종 악기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런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아비나답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에 어긋나게 수레를 동원하였고 법궤를 만졌다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법궤를 모시는 신앙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그것이 절대 우리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법궤를 20년 동안 모시고 있어도 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열심을 내고 정성을 드려도 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여 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합니다.

 

사사기 1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본토인을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요,

하나는, 그들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둘째는, 더 이상 전쟁을 하는 것이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모시고 7년여 동안 전쟁을 했는데 또 전쟁을 하려니까 슬슬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들을 쫓아내거나 죽이는 것보다는 살려두어서 노역을 시키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합리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진멸하라는 것이었고 그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최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사람들이 나중에는 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는 것이 사사기의 내용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힘들어도 때로는 귀찮아도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비합리적인 말씀같이 생각되어도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3.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오벧에돔이 복을 받은 내용을 보면,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11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신 분은 ‘여호와’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궤가 복을 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왜 그와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을까요?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고 여호와께서만 아시는 비밀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옮기기 위해 3만 명을 동원했고 각종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했고 새 수레를 만들었고 아비나답은 법궤를 20년 동안 모셨습니다.

아효와 웃사는 앞뒤에서 법궤를 살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모두가 법궤에만 관심이 쏠려있고 법궤가 중심이 되는 모습입니다.

자연스럽게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법궤만 모시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법궤를 자기 성에 모시면 나라가 튼튼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법궤를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법궤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벧에돔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억지로 떠맡았을 가능성이 많았고 그것도 석 달 동안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법궤를 모셨습니다.

법궤 자체가 복을 준다면 오벧에돔은 그렇게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셨습니다.

법궤를 모셨다고 법궤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법궤를 중심한 신앙생활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법궤, 보이는 건물, 보이는 숫자, 보이는 조직이 중심이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연조가 오래 되고 귀한 직분을 받아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석 달 동안 짧은 기간 동안 법궤를 모신 오벧에돔을 축복하셨습니다.

보이는 연조에 따라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되지 않았얻 얼마든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벧에돔과 같은 초라한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얼마든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법궤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겉모양의 보이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진실한 마음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해 나갈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202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