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말씀

역사에 남을 만한 두 아이

열려라 에바다 2022. 8. 17. 08:15

 

역사에 남을 만한 두 아이   

      

역사에 남을 만한 두 아이가 1889년과 1890년에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은 사촌 남매인 불법부부였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했고, 어머니는 주부로서나 엄마로서의 일에는 흥미가 없고, 바깥 사교 생활에만 흥미를 느껴 나다니기만 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났습니다. 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결국 독일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그는 정치계에 투신하여 극렬분자가 되었습니다. 반란 음모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다시는 정치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감형 출옥의 혜택을 받았으나 더욱 맹렬히 정치 활동을 했고, 마침내 1933년에 독일 국민의 절대 영도자인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1889.4.20~1945.4.30,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입니다. 그로 인해 독일과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렸고, 그 후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인류가 이 아이가 내뿜은 독기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다음 해에 다른 한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흡족히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과 콜럼비아대학교 총장에 이어 나토 군 최고사령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0.14~1969.3.28)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부모는 독일에서 이주한 신앙심 깊은 개신교도들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데리고 캔자스 농촌으로 이사했는데, 그 이유는 농촌 생활이 아이의 신앙 교육에 유익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성경을 즐겨 읽고, 주일 성수를 철저히 실천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전해 주었고, 가족 모두가 교회의 가장 적극적인 봉사자로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어머니의 두 팔에 안겨 간곡하게 기도하던 매일 저녁의 일과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944년 이들 두 사람은 전투에서 대면하였습니다. 11개월에 걸쳐 히틀러는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와 싸웠습니다. 패전한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 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소식을 접한 전 세계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히틀러보다 25년을 더 살았고, 1953년(만 63세)에 미 대통령에 취임하여 재임하였습니다.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으며, 그의 죽음을 전 세계가 애석해 했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여했던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주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기도하며 상륙작전에 임했던 아이젠하워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작전 개시 이후 24시간 내에 벌어진 사건들은 내 인생에서 전능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지독했던 날씨가 갑자기 개면서 대공습을 감행할 수 있었고 피해는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었습니다.”라고 간증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으며, 급성패혈증으로 다리 절단의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였습니다. 전쟁 중에도 늘 성경을 휴대하고 읽었던 그의 신앙심, 군 입대 후 14년간 진급이 안 됐을 때에도 철저히 인내한 그의 가치관, 유럽군 총사령관 시 처칠, 몽고매리, 드골 등 까다로운 리더들과 소통하였고, 대통령 재임 8년 중에도 철저히 주일성수를 지킨 감동적인 모습을 진실하게 보여줍니다. 
 
그가 얼마나 철저히 주일성수를 지켰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소련수상이었던 후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주일이니 같이 교회에 가기를 요청했지만 후루시초프는 거절했습니다. 혼자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젠하워에게 화가 난 후루시초프는 ‘예배를 마치고 와서 내게 무슨 핑계를 댈까?’라고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아이젠하워는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당신을 제가 초청했지만, 귀한 손님이라 하더라도 예배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주일성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그는 군에 가서 소위가 되어도 아이들을 주일이면 꼭 데려다가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말씀을 지키려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한 국가와 개인의 성공은 기도와 주일성수에 달려있다는 점을 철저히 알고 지켰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였으며, 모든 장관이 크리스천이었고,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으며, 주일이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온 가족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각급 학교는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아이젠하워의 리더십은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리더는 히틀러와 같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리더는 아이젠하워같이 온화하고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아이젠하워 역시 스스로 “리더는 앞에서 끌면서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짐승은 뒤에서 몰아도 되지만 사람은 앞에서 인도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훌륭한 리더십으로 인해 그는 대통령 퇴임시에도 재임 중 지지율을 유지한 전무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고, 훗날 크리스천 최고의 리더로 평가받게 됩니다. 


절대 권력을 유지하고 화려하게 살 수 있었던 그였지만, 말년에 거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낡은 포드자동차 한 대와 하루 3끼 식사가 가능한 정도의 재산만 남기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평소 유언대로 사병이 죽었을 때 묻히는 평범한 관에 잠든 채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검소한 장례식을 치르며 인생을 마감할 정도로 ‘무소유’를 실천했습니다.

'예화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을 적고 있는가  (0) 2022.08.18
습관에 대하여  (0) 2022.08.18
진짜 노력을 하라  (3) 2022.08.16
들을 수 있는 귀  (0) 2022.08.16
가장 무서운 병균은 절망  (0) 202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