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알렉산더와 유대인

열려라 에바다 2022. 8. 28. 21:01

알렉산더와 유대인            

서 문 :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에서 구약성서와 관련해서 볼 때 새로운 역사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봉 왕 헤롯, 바리새인과 세리, 갈리리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들에 관한 기사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들을 볼 수 있다.  ‘ 이 세상’과 ‘도래하는 세상’과의 대립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간사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의 단절된 공간을 메워 주며,  유대교가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 예수와 사도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과 정신적 발전을 보여준다.


           베르터 푀르스터, 문희석 역, 신구약 중간사, 포로시대부터 그리스도까지
                                        (서을 컨콜디아사,  1981), p. 29.


I.   알렉산더와 유대인




    역사적 배경
   
   기독교와 깊은 관련을 가진 고대 문화의 두 큰 강 줄기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일 것이다.  
  헤브라이즘은 히브리 민족을 중심한 선민 사상과 신정정치 혹은 신권통치를 통한 인류의 복지를 내세웠고,  헬레니즘은 헬라인을 중심으로 한 철인통치 사상을 통한  인류의 복지를 꾀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종교의 우위성이요 후자는 철학의 우위성이다. 각각 특이성이 있으나 예수시대에 이르는 과정 속에는 이 두 강줄기가 합쳐서 세계를 하나의 복음의 무대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지난 날 눌리고 소외된 반 유목민을 선택하여 언약을 맺었고, 때로는 그 언약을 이스라엘이 경히 여기고 파괴함으로 징벌도 받았으나, 그러나 그 언약을 마음에 간직한 그들을 바벨론과 Greek-Roman 세계로 흩으시고 그 무대의 배후에  숨겨두시고 당신의 계획을 은밀히 실천하는 역사를 하시었다.   
   그런 견지에서 유다의 일차 유수인 주전 596년에서,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한 주후 70년 사이의 이스라엘의 역사성은  유대교를 창출해 내는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주권은 상실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은 지상의 통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통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작업을 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영웅들(고레스, 다리오)과 헬라의 영웅(알렉산더), 로마의 영웅들(콘스탄틴)을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온 세계의 무대 위에 꽃피워 가는 작업을 하시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 한국 이민자들도 이 광활한 세계의 무대 위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무대위에 놓여져 있는 높은 소명의식을 확립하는 것이 이스라엘사를 연구하는 意義라고 생각하게 된다.
   
   가.  복음을 위한 준비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후 그들을 가나안에만 가두어 두지 않고,  넓은 세계 무대에 분산시키는 작업을 하셨다.  요즈음 미주 한인 교회들이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를 삼고 있지 않는가.  선의로 말하면 이민이나 수유는 패배가 아니고 다른 정복이다.  뻗어 나가는 작업이다.  
   그 과정은 인근의  끊임없이 성쇠하는 신흥 대국의 세력의 무대를 타고 세계화해 갔다.   이스라엘의 환난은 항상 새로운 가치 창조의 문턱이었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과정의 몇단계를 생각할 수 잇다.  
        (1) 가나안을 정복을 통한 형성기
        (2) 바벨론 포로시대를 통한 발전기 즉  586년 예루살렘이 몰락된 이후 약 70년 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의 배타적인 종교가 세계화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열게되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 바벨론 유수에서 유대교를 발전시켰다.  그 유대교의 소이 세 기둥은:
   첫째는 경전이다(the Cannon).  이것은 유대종교의 기초이다.
       포로기의 예언자 에스겔은 20장에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열쇠가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했는가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시기에 활약한 신명기 학자들의 공헌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사 42:9; 48:3; 슥 1:6 참조).  시편 78편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회고록이다.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 백성을 또 칼에 붙이사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저희 청년은 불에 살아지고 저희 처녀에게는 혼이 노래가 없으며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시 78:60-64).


  느헤미야는 이스라엘과 계약 사상을 갱신하고 신성한 율법과 역사를 계속 회상시켜, 불순종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여 유대 공동체를 율법으로 강화하였다(왕하 23:1-3; 느 9:32-10:29 참조).  이러한 필요성에서 경전을  만들어야 할 내적인 동기가 일어났다.


  둘째는 (Synagogue)의 설립이다.  바벨론 유수자들은 이제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지역별로 그들이 함께 모이는 일들이 생겼다.  그것이 곧 회당의 동기이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지난 날을 회고하며, 구전을 수집하며, 역사를 되새기며, 율법을 다시 수집하였다.  이러한 일이 바탕이 되어 회당이 생기기 시작했다.   


  셋째는 랍비(Rabbis)이다.  회당이 생기는 곳에는 랍비가 필요하였다. 즉 이들은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이 되어 있을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일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평신도들에게서 회개운동과 말씀 연구와 율법의 묵상이 전개되었다.  
   의식과 형식적인 제사행위에서, 말씀의 종교 즉 Torah로 발전하였고,  관료적인 종교 즉 궁중관료 제사장 제도에서 평신도의 신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즉 제사에서 랍비에로의 지도자 상이 바꾸어지고  있었다.  즉 신앙은 성전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과 영적 향상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다른 모든 지주(支柱)들이 다 쓰려질 때에도 유대교를 받치고 있던 것은 이 세 기둥들이 었다."1)
  


       1.  파사시대의2) 고레스 대왕(559-529 B.C.)과 유대인
           고레스는 파사의 창시자며, 지혜롭고 관대한 통치자였다.      그는 유대인으로 하여금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했다.
     (1)  성서에서는 학개와 스가랴가 파사시대의 초기를 반영하고 ,
    (2)  에스라 느헤미야 등이 파사의 전성기를 대변하고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결여되어 구체적인 사건의 재구성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나서도 유다 공동체는 단합이 되지 않고, 전통에 입각한 엄격한 규율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말라기서에도  그렇거니와 그후 에스라-느헤미야에서도 여전히 커다란 사회적 및 종교적 문제로 대두된 것이 소위 이방 결혼문제 이다. 헤르만은 주로 유다의 상류 계층, 즉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이웃 지역의 부유층 딸들과 이방결혼을 맺게 된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고 본다.3)  그러나 이것은 민족의 주체의식을 좀먹는 행위로서  에스라-느헤미야의 종교개혁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파사에서 온  지도자들은 파사에서 국록을 먹었을 망정  유다의 전통과 주체성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들 때문에,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조그만 공동체가 새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놓게 되었다고 본다.4)
    에스라-느헤미야 이후의 파사 시대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5)
  
구약성서에는 어느 곳에서도 알렉산더 대왕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주전 333년 이수스(Issus) 해전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335-331)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6)  알렉산더는 곧 바로 애굽을 정복하고 이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함으로 페르시아의 대제국은 막을 고하고 희랍제국의  시대가 전개된다.


    
       2.  파사왕  다리오          


 이 이름은 구약에 약 25회나 나온다. 세 군주의 이름이다.
  (1). 다리오 1세(큰 다리오)(522-486), 파사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서 그의 사적은 역사가 헤로도터스와  다리오 자신이 "하마단" 근방에 있는 "베히스턴" 절벽에 세 나라 말로 새긴 자기의 승전기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역사상 대 군략가 중의 한 사람이다.  전승한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는 발칸의 고지를 넘었으며, 서남쪽으로 아프리카 북쪽 해안까지 침입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인더스 강 평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희랍 원정군은 주전 490년 마라톤에서 패하였다.  세계사는 여기에서 바뀌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그는 유대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고레스의 정책을 답습하여 바벨론 유다 포로에게 관대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도 계속시켰다.  학개와 (1:1, 2:10)와 스가랴(1:1 7:1)는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권하고, 수리아 총독 다드내와 다른 사람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했으나, 다리오가 고레스의 조서를 찾아(스 6:1)보고 , 성전 재건을 방해하지 말고 도와 주라는 조서를 내렸다.  다리오 왕 제 6년에 준공을 보았다. (6:15).
  (2). 둘째 다리오는 느헤미야 12:22에 나오는 다리오로서 파사의 마지막 왕, 고도마너스(336-330)라는 견해가 있다.
  (3). 다니엘 11:1에 나오는 메대왕 다리오는 아하스에로의 아들이요(단9:1), 벨사살의 뒤를 이어 바벨론 왕이 되었다(5:31)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틀린다"7)  이 다리오가 누구였던지 히브리 사람 다니엘을 가장 높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6:1). 다니엘의 굉장한 인기는 그를 사자 굴로 인도했으며(6:7),  그 결과 다니엘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6:26). 2400년 전에 새긴 베히스턴의 세 나라 말로 새긴 비문은 서부 아시아의 글과 "아후라 마즈다"숭배의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8)
   다리오는 희랍반도를 치러다가 490년 마라돈(Marathon)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그의 아들 세록세스9)(Xerxes, 486-465)(개혁성경에는 아하스에로로 표기됨)가 평생 희랍과 전쟁을 했으며, 이짚트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아하스에로왕이 암살당한 뒤 그 아들 아르타세륵세스(Artaxerxes, 465-429)(개혁성경에는 아닥사스다로 표기됨)가 뒤를 잇게 되었으나, 다리오와 아하스에로 시대의 유다 형편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나. 알렉산더와 유대인
        알렉산더(356-323 B.C.)(그의 재위는 336-323)는 Macedonia의 왕이요 세계역사에서 위대한 왕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문명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나라에 헬라사상을 이식시켰고 헬라식 생활 방식을 도입시켰다. 그는 최대한 헬레니즘의 문화를 꽃피운 사람이었다.
     한편 Xerexes(486-464) 이래로 헬라 국가들의 세력이 점차로 증가해갔지만 그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제국을 형성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의 빌립의 주도하에 헬라 동맹(Hellenic League)를 점차적으로 형성해 갔으며, 이는 후에 Perusia 제국을 정복하는데  하나의 힘이 되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빌립은 헬라문화에 대한 대단한 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Symmachus를 통하여 호머의 Iliad를 읽혔고,10) 13세 때에 희랍의 대철학자 Aristoteles에게 사사를  받게 했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소년시절에  헬라의 문학과 예술과 철학을 배웠으며, 헬라의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꿈꾸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나이 20 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비상한 전략가로서 헬라의 일련의  전쟁에서 헬라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였다.11) 그의 전력은 B.C. 335년에 Thebes를 정복하고 헬라 동맹체의 본보기와 경고로서 그 도시민들을 학살하는 위협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  주


1) 푀르스터 W. , 문희석 옮김, 신구약 중간사 (서울: 컨콜디아사, 1981), p.26.
2) 파사시대란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536년부터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틴 일대를 정복한 333년까지 약 200년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역사에 파사 시대의 역사적인 기록은  오히려 앗수르나 바벨론에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3) Siegfield Herrmann, A History of Israel in Old Testament Times(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p. 307.
4) Ibid., p. 318.
5) 단편적인 것으로는 1906-1908년에 발표된 애굽 나일강의 요병들이 예루살렘과 교류를 유지하며, 야웨 종교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서는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이 문서에 표시된 최초의 연대는 다리오 1세 27년, 즉 495년이며 최종 연대는 399년으로 되어있다.
6) Noth, The History of Israel, p. 346.
7) 성서사전, 유형기편, P. 167.
8) Ibid.
9 다리오 후스타스페스와 고래스의 딸 아돋사의 아들. 다니엘 9:1절에는 메대왕 다리오의 아들이라고 기록됨. 486년 살라미에서 희랍 함대에게 패했다. 느헤미야의 원수들이 그에게 상소한 일도 있다(스 4:6).
10)  일리아드는 희랍시 중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책이다.
전설에 의하며, 고대 희랍의 시인 호머가 주전 700년경에 편집했다고 전해진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트로이와 헬가간에 있었던 사건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 전쟁은 헬라가 주전 1184년, 트로이를 점령하기까지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대개의  고고학자들은 그 전쟁은 주전 1200년 중간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믿는다. 일리아드에 나타난 어떤 사건들은  실제적으로 그 시기에 발생했던 사건들을 토대로 기록된 것이다.


11) 그의 소년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거느린 준마, Pusephalus라는 싸나운 말을 잘 길드리는 일이었다. 후에 이 말은 그를 인도까지 태워갔으며 그 말은 여기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애마를 기념하기 위하여 Hydaspes 강변에  Buchephala라는 도시를 세웠다. 그의 아버지 필립은 아들이 그 말을 타는 것을 보고 "O My son, seek out a kingdom worthy of thyself, for Macedonia is too little for thee."라는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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