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마카비 독립운동과 유대인

열려라 에바다 2022. 8. 31. 10:32

마카비 독립운동과 유대인

(마카비가문의 족복)

여호야립 가문(역대상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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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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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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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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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따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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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가띠)

시몬(다씨)

유다(마카베오)

앨르아잘(아완)

요나단(아푸스)

 

 

A. 마카비(Macabees) 전 후서

마카비 전서는 Andiochos Epiphanes(175-163)의 즉위로부터 마카비 가문의 Simon이 죽을 때까지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약 40년(175-135 B.C.)간의 유다의 종교와 정치의 해방운동의 역사적 기록이다.

알렉산더의 사후 헬라제국이 분열함과 동시에 Antichos Epiphanes는 극심한 헬라화 정책을 써서 헬라풍의 학교 경기장을 만들고 우상의 제단을 장려하고 이교적인 제의를 강화했으며, 유대인의 성전을 모독하였다. 이것이 유대인의 분노를 격화시켜 마카비 전쟁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때에 마따디아는 이렇게 탄식했다:

"아! 슬프다.

나는 왜 태어나서 내 민족과 이 거룩한 도성이

망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가!

나는 왜 여기 살다가 이 도성이 적의 손에 넘어가고,

성소가 이국인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을 보아야 하는가!

예루살렘의 영광이던 기물들이 약탈당하고

예루살렘의 어린이들이 거리에서 학살당하고

젊은이들이 원수의 칼에 맞아 쓰러져 가는구나.

이 왕국을 나누어 먹지 않은 민족이 어디 있었으며

이 나라의 재물을 약탈하지 않은 민족이 어디 있었던가.

이 왕국은 그 모든 장식을 빼앗기고

자유의 몸이 노예가 되었구나.

아름답고 찬란하던 우리의 성소는 이제 폐허가되었고

이방인의 손에 더럽혀졌구나.

이제 더 살아 무엇하겠는가!"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은 입고 있던 옷을 찢어버린 다음, 몸에 삼베옷을 두르고 슬피 통곡하였다(맠상 2:1-14).

 

유대인들과 수리아 군대 사이의 전투의 결정은 Antiochos Epiphanes가 보낸 한 장교가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의 분지에 위치한 모딘(Modin)이란 마을에 들어가 하스모니아(Hasmonia)계열의9) 애국지사로서 제사장인 마타디아스로 하여금 우상에게 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일어났다. 왜냐하면, 연로한 이 제사장이 승복하면 유대 시민이 다 승복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마타디아스가 승복하면 상당한 대우를 받게 되리라는 약속도 있었다. 그러나 마타디아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거절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뜨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 다른 지방의 한 수령이 이방신에게 제사를 들리려고 앞으로 다가오자 그는 그 자리에서 그를 때려 죽이고, 수리아의 장교, Appelles도 죽이고 그 이방신의 제단을 헐어버렸다. 그 뒤에 마타이아스는 산으로 피신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게릴라전을 준비하였다. 밤이면 산에서 내려와 도시와 마을에 있는 우상과 그 제단을 헐어버리고 유대인에게 강제로 할례를 베풀고 회당을 재건하였다. 그들의 대열은 하시딤(Hasidim)이라10) 불리우는 율법의 열성분자들에 의하여 점점 증가하였다.

마타디아스는 해방의 성업을 반쯤 이루고 죽지만,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오스(165-161 B.C.)가 투쟁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성별했다. 그후에 전쟁은 Johathan (160-142 B.C.)에 의해 게릴라식으로 계속되었고, 그는 나중에 제사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마따디아의 유언

 

임종이 가까워 왔을 때 그는 다섯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오만과 횡포가 득세한 지금은 멸망의 때요, 격렬한 분노의 때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위하여 헌신하여라.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이룬 업적을 기억하여라.

그러면 너희들은 큰 영광과 불멸의 이름을 얻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시련을 받고도 믿음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란 인정을 받지 않았느냐?

요셉은 곤경에 빠졌어도 계명을 지켜서

애굽의 주인이 되었고,

우리 조상 비느하스는 그의 큰 열성 때문에,

영원히 사제직을 차지하라는 약속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여

이스라엘의 재판관이 되었고,

갈렙은 회중 앞에서 올바르게 증언하여 땅을 물려받았다.

다윗은 그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영원한 왕권을 차지 하였으며

엘리야는 불타는 열성으로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하늘로 들려 올라 갔고

하나니야(사드락)와 아자리(아벳느고)와 미사엘(메삭)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불구덩이에서 살아 나왔으며

다니엘은 끝내 결백하였기 때문에

사자의 입에서 살아 나왔다.

그러므로 너희는 대대로 이것을 명심하여라.

하나님에게 희망을 거는 자는

힘을 잃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

죄인의 위협하는 말을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의 영광은 벌레가 우글거리는 똥더미로 변한다.

죄인은 오늘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도 내일이면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죽어서 흙이 되고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간다.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 굳세어져라.

그리고 율법을 굳게 지켜라.

이것이 너희들이 차지할 영광이다.

 

여기에 있는 너희 형 시므온은 내가 알기로는 슬기로운 사람이다. 항상 그의 말을 잘 들어라. 시므온은 너희에게 아버지 구실을 할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장사인 유다 마카베오는 너희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여러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지휘할 것이다. 너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모두 규합해서 네 동포들의 원수를 철저히 갚아야 한다. 너희를 학대한 이방인들에게 복수하고 율법이 명하는 것을 잘 지켜라."

 

그는 이렇게 유언하고 숨을 거두어 고향 모데인 조상의 묘지에 묻혔다. 주전 166년에 죽었다.

(맠상 2:50-70).

 

그의 사후에 그의 아들 마카비라 유다가 그를 계승하여 자기기 민족의 영예를 널리 떨쳤다.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맠상3:1-37).

 

최후에 시몬(142-134 B.C.)은 묘한 외교술을 발휘하여 그의 위치를 고수하여 종교적 자유를 얻어내는 것 뿐아니라, 정치적 독립을 가져왔다.

이스라엘은 전에 722년에 앗수르에,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이래 오랜 세월을 외국인의 지배하에 있다가, 마카비전쟁에 의하여 종교적 정치적 독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본서는 14장으로 되어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수없다. 다만 팔레스틴에 거주한 유대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쓰여진 연대는 주전 100-80년으로 본다.

마카비 후서는 176-161 B.C.의 약 15년간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마카비 젓서의 전반부와 동시대의 글이다. 본서의 전반(1:-7:)에는 팔레스틴으로부터 애굽에 있는 동포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는 구래네의 야손이라는 사람의 저작이라고 알리어져 있다. 후반 (8 장이하)은 마카비 전서와 거의 같다. 단지 다른 것은 마카비 후서에는 많은 년대의 착오가 있으며 기사가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기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으로서 주전 약 60년경으로 보고 있다.

 

B. 마카비 전쟁

Seleuchus의 수리아 왕국 지배하에 있던 유다가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쟁취한 전쟁이다 (168-141 B.C.) 수리아 왕 Antiochus 4세 Epiphanes는 주전 169-168에 애굽에 친입했으나 로마의 간섭으로 물러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였으며, 팔레스틴에 헬라화 정책을 강행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Zeus신상을 세우고 유대교의 제의를 금지시켰다. 이것이 마카비전쟁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 전쟁의 초기에는 Antiochus의 헬라화 정책에 추종자(Hellenist)들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하였으나 후에 종교적인 전쟁이 되었다. 전투원은 주로 그들에게 토지를 몰수당한 농민이11) 주류를 이루었지만, 후에는 헬라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대제사장 신분의 Hasidim (경건이라는 의미)이 합세되어 종교전쟁으로 가열 되었다. 또 한편, 대제사장 신분 사이에도 내분이 생겨, 정통 보수파는 Hellenist에 쫓겨 애굽으로 망명을 가야했고, 또한 Hellenist는 예루살렘 시민에게 쫓겨 수리아 왕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마카비가 일당은 Antiochos 4세(175-163) 및 그의 아들 Antiochos 5세(163-162 B.C.)의 군대를 파하고, 주전 165년 예루살렘을 회복하였고, 그후 Antiochos 5세를 제쳐놓고 그의 재상이 였던 Lysias 사이에 신교의 자유 조약을 맺었지만, 수리아 왕위를 계승한 Demetrius 1세(163-150)가 그들을 죽이고, 정통 보수파의 대제사장 Alcimus라는 인물을 세움으로, Hasidim파는 마카비오스 유다(Judas)파를 버리고 Alcius와 손을 잡았다.

 

요나단(160-142)

수리아 전쟁은 재개되어 Judas(유다 165-161)는 전사하였다. 이를 계승한 그의 동생 Jonathan(161-142)은 게릴라전을 수행하여 예루살렘만 남겨두고 중요한 요새를 수리아군으로부터 하나씩 탈환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7년간 수리아의 통치와 친 헬라파 유대인의 손에 있었으며, 그 동안 요나단은 사소한 전투만 수행하였다. 그러나 주전 153년에 일어난 수리아에서의 반란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요나단의 목표달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수리아의 왕위계승권을 위하여 경합한 두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미 왕위를 획득한 Demetrius 1세(163-150)였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나선 Alexandoros Balas 1세 (150-145)였다. Balas는 Cappadocia(가바도기아)와 Pergamum(버가모)의 지원을 받았을 뿐아니라 로마와 애굽의 지원도 받았다. 애굽과 로마를 포함한 이웃 왕들은 수리아의 국내 문제에 끼어들려하던 참에 이번 기회는 절호의 기회였다.

Demetrius 1세와 Alexandoros Balas는 Jonathan의 군사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그에게 많은 특권을 제의하였다. Demetrius의 제안이 매우 관대하였지만, 요나단은 그를 신뢰하지 못하고 발라스의 제안을 받아드렸다. 두 경합속에서 결국 데메트리우스 1세가 패배하여 살해당하였다.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는 자기를 지원하였던 보답으로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를 "왕의 친구"로 불었으며, 그에게 자주색 옷과 금관을 보내었다. 그리하여 요나단은 팔레스틴에서 왕과 제사장을 겸하게 되었다.

 

시몬 Simon(132-134 B.C.)

요나단이 죽은 후 그의 동생 시몬이 계승하였다. 시몬은 마카비 일가의 지도자였던 마타디아스의 둘째아들로12)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아들이었으며,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마카비 1서 13장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나와 나의 형제들과 그리고 우리 가문이 율법과 성소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한 사실과 우리가 치른 전쟁과 고통이 어떠하였는가는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위해 죽었고 살아 남은

사람은 나 하나 뿐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

대로 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형제에 비해 조금도 나은

점이 없습니다. 나는 내 민족과 성소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의 처지를

위하여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지금 우리를 없애버리려고

증오심에 불타 모여 있습니다."(맠상 13:3-6).

 

이 연설을 들은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웨첬다. 그래서 백성들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 동생 유다와, 요나단의 대를 이은 우리의 지도자

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지휘자가 되어 싸워주십시오. 당신의 명령

이면 무조건 복종하겠습니다."(맠상 13:7-9).

 

시몬의 업적 중의 하나는 유대의 적대적인 세 파벌의 통합이었다. 즉 헬라파, 하시딤, 마카비파의 통합이다. 시몬이 지도자가 되자 바로 수리아의 합법적인 왕 데메트리우스 2세(145-140)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수리아왕은 유대인들을 모든 조세에서 면제시키고 정치적 독립을 허락하여 독립적 동맹국으로 인정하였다. 마타디아스와 그의 네 아들이 그들의 생명을 바쳐서 추구하였던 목적이 시몬에게서 달성되었다. 이 일이 Demetrius 2세 때, 주전 142년에 생긴 일이며, 유대인들은 이날부터 독립일은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게젤 요새 점령

"그 무렵 시몬은 게젤 요새를 향하여 진을 치고 군대를 그 요새 뒤에 배치, 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만들어 요새 가까이에 장치하였다. 그리고 요새의 탑 하나를 맹렬히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병사들은 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타고 올라 가 성 안으로 돌격해 들어 갔다. 성 안은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성 사람들은 모두 처자를 데리고 성벽 위로 올라가 옷을 찢으며 큰 소리로 시온에게 화평을 청하였다. '우리가 저기를 악행을 벌하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시몬은 그들이 청을 들어 주고 전투를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주민들을 그 성에서 내쫓고 우상을 모셨던 집을 깨끗이 한 다음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입성했다. 그는 온갖 부정한 물건을 다 성 밖으로 던져 버리고 오직 율법을 지키는 자만을 그 곳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성의 방위를 굳건히 하고 자기가 살 집을 그 안에 지었다."(맠상 13:43-48).

 

예루살렘 요새 점령

"그 동안 예루살렘 요새 안에 있던 자들은 시골을 왕래하면서 물건을 시고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몹시 굶주려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시몬에게 화평을 청하였다. 시몬은 그 요청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들을 요새에서 추방하고 요새의 온갖 더러운 것을 치워 깨끗이 했다. 백 칠십 일년 이월 이십 삼일에13)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소리도 드높게 비파와 꽹과리와 거문고소리에 맞춰 찬미와 노래를 부르면서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민족의 큰 적이 참패를 당하고 이스라엘 땅 밖으로 쫓겨 간 것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시몬은 매년 이 날을 경축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요새 가까이 있는 성전 산의 방비를 더욱 굳히고 부하들과 함께 그 안에 살았다.

시몬은 자기 아들 요한이 성인이 된 것을 보고 그를 모든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요한은 게젤에 주둔했다."(맠상 13:49-53).

 

유대인들은 시몬에게 절대군주의 지위를 제공하고 국가 통치자의 직위를 그의 가문에서 세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의 영웅적인 노력과 계획의 열매들을 즐길만큼 오랫동안 살지 못했다. 그도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최후를 당하였다. 주전 135년 시몬이 여리고 평원의 독(Dok)이란 요새를 시찰하면서 환영 만찬에 참석했을 때 그의 두 아들의 왕위 계승을 노리던 그의 사위 Ptolemy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시몬의 부인은 한동안 인질로 잡혀 있다가 얼마 후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마카비의 다섯 형제가 영웅적인 헌신으로 경주한 30년의 가운은 시몬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형제의 무덤은 유다가 세운 Modim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무덤에 묻혔다.

30년 동안의 마카비가의 독립운동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재연하였고 예루살렘이 통일된 왕국으로 성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성전을 모든 이교도의 우상숭배와 불결한 행위로부터 정결케 하였다. 마카비 가문의 뒤를 이은 하스몬(Hasmon)가는 세습왕조로서 헤롯에 의하여 무너질 때까지 유대의 성속양권(聖俗兩權)을 모두 장악하고 대제사장의 주위를 보지하고 있었다.

마카비 전쟁은 최초엔 유다 마카비우스의 지도하에 종교전쟁의 색채를 띄운 농민 전쟁으로서 수행되었으며, 따라서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 찬동한 하시딤(Hasidim)의 동조를 얻었으나, 유다스 및 그의 일당이 예루살렘을 회복한 후에는 세속적 유력자로서의 하스몬(Hasmon)가문은 대제사장직을 겸한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종교를 정치에 이용한 셈이다.

하시딤의 이탈은 이에 대한 소극적 반항의 표현이 였다. 이후, 성속양권의 보지를 주장하는 하스몬가와, 종교적 순수를 주장하는 하시딤(그 후속자가 바리세인 파)과의 싸움은 그후부터 계속하였다.

 

======= 주

9)요세퍼스에 의하면 Hasmon(Ασαμωναιο?)이란 이름은 마카비서에는 나오지 않는데, Mattathias의 증조부의 이름이다. 이 이름이 등장한 것은 아마도 Heshmon(수 15:27; 유다남쪽 알 수 없는 동네) 이라는 지방명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

10) Hasidim은 히브리 어의 '????????????' 즉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11) 조공을 위해서 과다한 세금정책을 써서 이에 감당치 못하는 사람은 노예로 팔리어 가기도 했고, 토지를 몰수당하기도 했다.

12) 1. 요한, 2. 시몬, 3. 유다, 4. 엘르아살, 5. 요나단이다.

13) 기원전 141년 7월 초.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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