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5:20-28]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열려라 에바다 2022. 9. 12. 14:22

35편 20절-28절: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아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0절: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하나님과 충돌과 마찰과 대립성이 없이 구원을 잘 이루며 사는 성도를 거짓말로 모함한다는 거다.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는 성도는 참을 붙잡고 참의 생활로 하나님 앞에 바로 걸어가는 것인데, 이렇게 살면 하나님과 대립이 없이 평안히 살게 되는 거다. 여기서 평안하다는 것이 돈이 많아서, 물질이 풍부해서 평안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 의사대립이 없이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는 그 자체를 말하는 거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대립성이 없이 평안히 살고 있는 성도를 거짓말로 모해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거냐? 불타지고 없어질 세상과의 화평을 주장을 해서 성도의 마음이 정신이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흐트러지게 하는 가르침이 거짓말로 성도를 모해하는 거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안 한 것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차원을 벗어나서 성경은 영 위주로 영이 잘 되라고 주신 것이니까, 영의 깨달음이 잘 되고 영의 도덕성이 잘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니까 진리 생명 길을 가는 성도에게 세상을 줘서 그 마음이 세상 쪽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성도를 모해하는 거다. 다시 말하면 신실한 성도에게 세상교훈을 줘서 하나님과 이간질을 시키는 것, 세상을 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고 못 따르도록 이간질을 시키는 것.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뱀 속에 들어가서 이런 짓을 했다. 지금도 마귀가 거짓 종들의 속에 들어가서 이런 짓을 한다.

 

21절: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아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악한 자들이 다윗을 꾀어서 넘어뜨려 놓고는 넘어진 다윗의 탓으로 뒤집어씌우며 다윗이 죄인인 것처럼 몰아세우고, 그러면서 자기들은 의인인 것처럼 자랑을 한다는 거다. 이를 테면 신실한 성도를 넘어뜨려 놓고 넘어진 이 성도를 향해서 ‘네가 신앙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라고 하는 식이다.

 

세상에는 성도를 노리는 이런 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약점이 잡히면 안 된다. 악한 자들에게 약점이 잡히면 인격적인 수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앙사상 정신면에서 약점이 잡히면 악한 자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또한 나는 전혀 잘못이 없는데도 악한 자들이 거짓 증거인을 내세워서 의로운 사람을 완전히 악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있다. 따라서 믿는 성도는 매사에 아주 조심해야 한다.

 

22절: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온 세상 사람들의 언행심사를 다 통촉하고 계신다. 사람의 중심을 다 보고 계신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행동을 보고 증거를 삼아서 잘잘못을 말을 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불공정한 판단이 많다. 예수님을 악인으로 본 것처럼 의인이 악인으로 보일 수도 있고, 악인이 의인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 없고 봐주는 것이 없다. 이 하나님께서는 진리성도들의 억울함을 다 알고 계신다.

 

23절: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성도다윗은 억울함이 많은 모양이다. 하루 속히 여호와 하나님의 공판을 바라고 있다. 우리 모두가 자기가 악을 행해놓고서 이런 말을 한다면 논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자기의 언행심사에 대해 ‘내가 하나님이 공판을, 공의로운 심판을 바랍니다’ 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은 다 자기가 한 것에 대한 공판을 바란다. 땅의 백성들은 땅의 공판을 바라고, 하늘의 백성은 하늘의 공판, 즉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바란다. 하늘의 공판이란 ‘땅에 속한 것, 육에 속한 것이 잘 되었나, 못 되었나?’ 하고 공판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 구원에 속한 것을 가지고 공판하는 것을 말한다. 땅의 것을 가지고 공판을 할 때도 세상을 기준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성도의 이룰구원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공판을 하신다.

 

그래서 물론 신자던 불신자던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에 치우쳐서 생각을 안 하는 게 좋다. 이렇게 되면 자기 속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이 없어질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도 보통 보면 눈에 보이는 언행심사를 가지고, 특히 행동을 가지고 말을 한다. 우리는 이걸 주의해야 한다.

 

24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해 달라. 주님의 공의는 영적인 면의 판단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속 중심 판단이다. 사람의 속 중심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마음과는 다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의 기준에서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신다.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악한 자들은 무엇을 하던 영적인 구원 면에서는 전부 사망성공이다. 그래서 사실은 악인들은 기뻐할 것이 없는 거다. 그런데 이 악한 자들이 의인 다윗을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면서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심판을 받을까?’ 하며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판단해서 악인들로 하여금 자신으로 인해서 기뻐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아무리 잘했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세상기준이 아니면 인간기준이다. 다른 각도로 말한다면 민주주의 식으로 기준이 되어있다. 그러니 이들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악이요 죄다.

 

25절: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교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여 놓고 자기들의 소원이 성취된 것처럼 느꼈을 거다. 기분이 좋아서 서로 오고 가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제압한 것처럼 느꼈을 거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께서 갑자기 부활이 되고 승천으로 이어지니 예수님을 죽인 악한 자들이 두 손을 들고 말았을 거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천국에 속한 의인을 영원히 삼키지 못한다. 사망성은 생명을 근본적으로 삼키지 못한다. 쉽게 말하면 죽은 자가 산 자를 영원히 죽이지 못한다. 이 이치가 분명한 것임에도 표면적으로 볼 때는 영이 산 자(구원 얻은 자)나 영이 죽은 자(구원 받지 못한 자)가 다 몸과 이성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자꾸 육신으로 치우쳐 살고 있다. ‘세상이 다 그러는데. 많은 사람이 다 그러는데’ 이게 뭐냐? 이건 벌써 기준이 죽은 자의 판단으로 되어있는 거다. 이 판단은 살아있는 판단이 아니다.

 

‘많은 교인들이 다 그러는데’ 이 말의 이치를 캐고 들어가면 이 말의 기준이 세상인지, 천국인지가 금방 나눠지는 것임에도 교인들이 혼돈을 하는 이유는 이치를 캐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치의 신앙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이치에 밝은 사람은 죽은 것과 산 것을 아는 거다. 이 면이 진하지 못하니까 자꾸 혼돈을 하고, 갈피를 못 잡고, 고민을 하는 현상이 생기는 거다.

 

26절: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다윗이 왜 해를 당하고 있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의행을 하고자 하니 해를 당하는 거다. 이런 다윗이 해 당함을 고소하게 여기고, 빈정대고, 기뻐한다면 이 자는 악한 자임이 분명하다. 이런 자들은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고, 낭패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인이 악인들 틈에 살면서 해를 당하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영적인 성장 면과 영능의 실력을 위해서 의인을 악인들 틈에 두어서 훈련과 연단을 시키는 거다. 이 훈련과 연단은 여호와 하나님의 예정된 기간 안에서 진행이 되는 거고, 이 기간이 지나면 악인들을 모두 처치해 버리신다. 그러니까 악인들의 존재의 여부는 ‘의인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판단이 나는 거다.

 

집을 지을 때 아시발(비계)이 언제 없어지느냐? 집이 완전히 지어지면 치운다. 아시발은 집을 완전히 지을 때까지만 있는 거다. 그런 것처럼 악인들은 성도 자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있는 거다. 모든 성도가 주님 앞으로 가게 되면 악인들을 다 처치해 버린다. 교인들 세계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진리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아시발처럼 껍데기 노릇을 하다가 가게 되는 거다. 주님의 왼손에 쓰임이 되는 자가 되는 거다. 그럼에도 자기가 껍데기 노릇을 하고 싶으냐?

 

남을 깎아내리고, 쑤시고, 빈정대고, 모욕을 주면 어떻게 되느냐? 이런 사람이 올라가겠느냐, 내려가겠느냐? 내려간다. 자기 위치는 떨어진다. 자기 위신은 깎인다. 그런데 악한 자들은 이것을 모른 채 의인이 넘어지고 고통 받는 것을 좋아하고 깔깔거린다. 이런 자는 결국은 의인에게 이용을 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인데도 이걸 모르고 있다.

 

인간이 악한 생각을 가질 때는 세상천지 어디를 가던 자기는 이용물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 바로 못 서면 하나님께서는 이 자가 자기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하게 하면서 비구원 건설적으로 이용을 해 버린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인간은 이것을 모른 채 항상 자기 위주로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비구원 건설적으로 이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자기를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자들과 같이 의인을 비꼬고 공세를 하면 너도 이용물이 된다. 그러니 자기보다 좀 못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깎아내리지 말아라. 헐뜯지 말아라.

 

그런데 우리가 자기 감정에 속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옳은 말을 하는데도 상대가 이 말을 안 들으면 그만 감정이 푹 솟아나서 마음이 상하는 때가 있다. 이거 참 주의해야 한다. 옳은 말을 하는데도 상대가 안 들으면 내버려 둬라. 가다가 넘어져서 코도 다치고, 무릎도 깨지고, 얼굴이 깎여야 깨닫는다. 이게 인격의 수치다.

 

인간이 악한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 자는 어디를 가던 이용물이다. 비구원 건설적으로 이용물이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협조와 동참을 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선용을 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옳고 선한 일에 선용을 당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 거고, 이 사람의 마음은 기쁘고 복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복지관이나 노인들이 있는 곳에 가서 장애인이나 노인들을 씻겨주고 돌봐주고 하면 돈을 받지 않고 그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기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거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협조 동참을 하게 되면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거지만 이게 없다면 이 면에서의 기쁨은 없다. 우리는 생명과를 따먹는 일에 협조 동참을 해야 함은 물론이고, 생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일반과인 이웃에 대한 일반적인 선행도 해야 한다.

 

27절: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자기의 의로 삼고 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의’란 옳음을 말하는데, ‘의’라고 할 때 지식의 의, 지혜의 의, 선의 의, 사랑의 의, 진실의 의, 거룩의 의가 다 포함이 된 거다. 말에 옳은 것, 행동에 옳은 것, 생각에 옳은 것이 다 들어간다. 그냥 말만 듣고 ‘네가 옳다. 그르다’ 이런 면만 보지 말아라.

 

‘의’에는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가 다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사랑 속에도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의가 다 들어있는 거고, 지식 속에도 사랑을 포함해서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의가 다 들어있는 거다. 선 속에 사랑도 들어있다. 사랑 속에 지식도 들어있다. 지혜도 들어있다. 다 들어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움직인다고 하면 그 속에는 다른 여러 속성들도 다 같이 움직이는 거다. 선이 움직인다고 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성품이 다 같이 움직이는 거다. 다만 ‘하나님의 성품 중에 어느 면을 부각시켜서 말을 하느냐?’에 따라 ‘선이나, 사랑이나, 거룩’ 등으로 말을 하는 것뿐이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좋아하고, 사모하고, 이 의를 선포하고, 자체화 시키고, 이 의로 통치하는 자를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해 주신다.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주의 종의 형통성’이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통과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을 입어나가는 것을 말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형통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여호와는 광대하시다고 하는 것을 항상 말하게 해 달라는 것은 항상 그 구원을 선포하게 해 달라는 거다. 다윗이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니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사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구원해 주시는 것을 다윗이 보았기 때문이고, 그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나의 의’란 누구의 의를 말하는 거냐? 지금 이 기도를 누가 하는 거냐? 다윗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나의 의를 기뻐하는 자로’ 라고 했으니까 다윗의 의를 기뻐하는 그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기쁘게 해 달라는 거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나의 의’ 라고 한 이 의가 누구의 의냐?” 하는 것을 분별하고 들어가야 한다. 다윗의 의는 하나님의 의다. 성도가 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으면 자타의 구원에 유익이다. 다윗은 이 체험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이 의를 자기의 의로 삼은 거다. 그래서 ‘나의 의’ 라고 한 거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뭐냐? ‘의’란 하나님의 옳음을 말하는 거고,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일 전부는 의라고 하면 의고, 선이라고 하면 선이고,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이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옳은 것을 체험을 했고, 가진 거다. 이 구원을 받은 거다. 하나님의 이 의 속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 즉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다 들어있는 거다. 다윗이 이 하나님의 의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있지도 않은 채 자기가 하나님의 그 무엇을 체험했다고 한다면 무엇을 체험한 거냐? 벌벌 떠는 거? 예언 방언하는 거? 이런 건 구원과 별로 관계가 없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의 것이 얻어진 것,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화 된 것, 하나님의 것이 자기 것으로 된 것, 이게 구원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에게 되어서 그 역사가 자기 속에 들어있고 자기 것이 된 이게 구원이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하나님의 의를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자를 부르시고 기쁘게 해 달라는 것은 다윗 자기가 하나님의 의를 가져서 그런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를 부르시고, 기쁘게 하시고, 형통케 하시고, 이 형통을 기뻐하신다는 건데, 종의 형통이 뭐냐? 앞에서 뭘 형통이라고 했느냐? 경험이 되고 거쳐 나와야 만이 형통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거다. 진리말씀 속에는 직접적으로 글로 쓰여 있지 않았을지라도 사건이 축소가 되어있고 하나님의 뜻이 함축이 되어있다. 그러니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해석이 되겠느냐? 안 된다.

 

‘형통’이 뭐냐? 사건 환경을 겪은 후에 오는 이익이다. 그러니까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라고 하게 해 달라는 것은 성도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이룬 것을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시니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여호와를 높이고 찬양하게 해 달라는 거다.

 

본 절에 다윗이 나왔고, 이 다윗의 의를 찬양하는 사람이 나왔고, 그리고 이 사람들이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만사형통으로 만들어져 나왔다. 그리고 또 이것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은 광대하시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의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다윗의 사사건건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 다윗을 건져주셨고,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고 외친 사람을 보았으니,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도 하나님은 광대하시다고 외치게 되는 거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다윗의 이 기도 속에는 이 성경을 보는 우리도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다윗의 사건을 보고 다윗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거다. ‘이런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고 말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도 다윗과 같은 체험으로 또 들어가는 거다. 남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가 다윗이 하나님의 의를 자기의 의로 삼고, 이것을 보는 자가 또 하나님의 의를 자기의 의로 삼았더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어떻게 역사를 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을 알고 있는 지금의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의를 자기의 의로 삼고, 선포하고, 자체화 시키고, 이 의로 자기를 통치해 나가고, 이런 나를 보고 하나님의 의를 좋아하고 사모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또 기꺼이 부르고, 도와주고, 즐겁게 해 주시는 거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 이 의가 좋아서 받아들이고, 모여지고, 그리고 이 의로 자체화 시키고, 선포하고, 가르치며 나가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해 주시는 거다.

 

28절: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역사는 의가 아닌 것이 없다. 주의 의는 그 효력성이 영원히 간다. 주님의 의는 교리적으로 보면 죽은 영을 살린다. 주님의 의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무엇으로? 의로운 교훈으로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사람은 옳은 소리를 자꾸 들으면 옳은 정신이 들어가고 옳은 마음으로 되어진다. 하나님의 의로운 의는 말하지 않고 맨날 세상 것으로만 교훈이 되면 이 교훈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으로 되겠느냐? 세상화 돼버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왜 이 이치를 모를까? 하나님의 의를 한 번만 듣고 마는 게 아니라 두 번 듣고, 세 번 듣고, 날마다 들음으로써 자기 속에서 자꾸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게 되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되는 거지 딱 한 번만 듣고서 평소에는 늘 다른 곳에서 세상 것만 듣는다면 자기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의대로 살아야지’ 하는 게 나오겠느냐? 안 되는 거다.

 

주님의 의는 사람을 영능의 능력자로 만들어 준다. 의로운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준다. 사람을 영원히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준다. 주님의 의는 미련하고, 아무 것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흑암에서 건져준다. 건져준다는 게 뭐냐? 알게 하고, 나오게 한다는 거다. 사람이 흑암 가운데 있으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으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흑암 가운데 들어있었다는 걸 아느냐, 이것도 모른 채 예수를 믿어왔느냐? 모른 채로 믿었다면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하는 거다. 자기의 노력도 다 빼앗기고, 충성봉사도 다 빼앗기고, 자기의 물질도 다 빼앗기고, 자기 일생의 시간도 다 빼앗기고 전부가 사망으로 돌아가 버렸음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이다. 이제 와서 진리교훈을 받고 이걸 알게 되니 이런 것이 판단이 되는 거다.

 

판단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벌써 흑암 가운데서 나왔다는 거다. 얼마만큼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온 거다. 뭘로 이렇게 된 거냐? 깨달음으로. 바른 가르침을 받으니 아는 지식이 들어가는 거다. 모르는 가운데서 어떻게 예수를 바로 믿겠느냐? 사람이 깨달음이 없으면 자기 기준대로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이게 흑암이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봐라. 자기는 죽고, 죽는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는 이런 사망적인 정신과 사상에서 이겨야 한다. 죄와 불의한 것에서 나오는 것도 이기는 것이고, 그런 곳에서 탈출하는 것도 이기는 것이고, 그런 정신과 사상을 정복하는 것도 이기는 것이고, 그런 정신과 사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이기는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상대를 잡고 싸워서 상대를 정복해 버리는 것도 이기는 것이고, 자기 속에 사망적인 정신과 사상이 감염이 안 되려고 탈출해 버리는 것도 자기 속에서 싸워서 이기는 거다. 죄와 불의에 진 사람은 주님의 의를 말할 수 없는 거다. 이긴 자라야 말을 하는 거다. 또한 이긴 것을 본 자가 말을 하는 거다. 우리는 다윗이 증거하는 이 말에서 주님이 승리하신 그 의를 보고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말이 아침밥 먹고 찬송하고, 점심밥 먹고 찬송하고, 저녁밥 먹고 찬송한다는 말이냐? 자기 속에 주님의 의로 충만해져서 이게 기쁨으로 나오는 걸 말하는 거다. 종일토록 찬송을 하는 것은 속에 기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찬송이 나오는 거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기쁜 거냐? 기본구원을 주신 것이 기쁘고, 이룰구원에 대한 재료를 주시니 기쁘고, 무궁한 존귀 영광성이 있으니 기쁘고, 이 영광을 미래적으로 받으니 기쁘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확실히 아니 기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날마다 슬프다. 왜 슬플까? 자기에게 세상 것이 없어서 슬프고, ‘저 사람은 부자로 사는데 나는 왜 가난한가?’ 이러면 슬퍼진다. 세상을 가지려고 해도 세상이 안 잡히니 슬프고, 몸이 아프니 슬프고, 가정문제 때문에 슬프고, 직장문제 때문에 슬프다.

 

이게 다 뭐냐? 세상에서는 절대로 기쁨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거다. 선악과 따먹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무슨 기쁨을 기대하겠느냐? 그럼에도 자기를 이런 세상에 두고 예수를 믿게 한 것은 나의 믿음성장을 위해서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믿음이 커갈 수 있는 재료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거다.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니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