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누가복음

열려라 에바다 2022. 11. 8. 12:49

13 31-34: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1-32: 이 말씀이 첫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사역을 크게 나눠서 말씀하심인데, 특히 33절의 그 말씀 오늘 내일 모레 하는 이 말의 의미가 내가 할 일은 누가 잡으러 온다고 해서 도망을 가거나 하면서 하지 않거나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다 하는 말이다. 당신이 구원의 일을 하시는데 헤롯이 보낸 종들이 그 주님에게 빨리 피하라고 할 때 인간들 같으면 그럴 경우 오늘 할 일을 미루고 며칠 후에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렇지를 않는다. 주님은 오늘 할 일은 오늘 다 하고, 내일 할 일은 내일 다 하고, 모레 할 일은 모레 꼬박꼬박 다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다 하고 가신다는 말씀이다. 미루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주님은 역사의 주권자요 주격자라 그 말이다.

 

예수님의 일은 구원운동이고, 헤롯과, 그리고 바리새인들 유대 종교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믿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예수님의 이 일을 아무리 방해를 해도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운동에 협조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껍데기 운동을 하지 않는다. 우리교회도 이웃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껍데기 운동을 하지 않는다. 알맹이 운동이라야 한다.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질적으로 받아서 하는 일이 복음운동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말대로 도망을 갔다면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은 안 된다. 예수님은 그러지를 않고 당신의 계획대로 우리의 구원을 완전히 이뤄놓은 것이다. 그 때 당시로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그들의 모든 세력을 다 이용하여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남김없이 부족함 없이 100% 다 이뤄놓고 가시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좁혀서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우리는 그 사건 환경 존재를 구원으로 이용 활용하여 깨닫는 면으로도 이용 활용할 수 있고, 자기를 박해를 해도 그 박해의 성질을 자기의 이룰구원으로 이용 활용할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던, 좋은 사건이던 나쁜 사건이던 그걸 다 자기의 이룰구원에 이루고 간다면 참 멋있다. 우리가 그 정도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든지 잡히는 대로 다 영능의 실력으로 구원을 이루고 가는 것 참 멋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은 편안한 걸 좋아하지만 예수님을 보면 그건 심심해서 못 살 것 같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그 자람의 생태가 가만있으면 몸부림이 나서 못 견딘다. 가만있으면 존다. 졸기 전까지는 어찌든지 막 움직여야 한다. 그게 성장이다. 안 움직이면 사람이 골아버린다. 사람이 손발을 안 움직이고 가만 내버려두면 골아버린다. 몸을 움직여야 힘살이 오르고 힘이 생긴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늘 평안하길 바라는 건 성장이 없다. 물론 그런 때도 순간 있을 수 있는 거지만 뭔가가 신앙심이 정복성으로 들어있다면 늘 가서 정복을 하는 것이다. 가만있으면 오히려 병이 나는 것. 움직여서 천국을 점령을 하는 자가 차지한다. 이룰구원의 영능의 실력을 말한다.

 

예수님은 헤롯이 보낸 종들이 예수님을 죽이러 온다고 말을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또 그들의 말대로 죽이러 오는 거냐? 가만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던 안 오던 그걸 다 아신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은 꼭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말 같으나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이들이 그 일을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이 보이는 거다.

 

물론 목사나 교인들이 잘못하는 경우도 있는 건데, 이방 불신자들이 믿는 자들을 막 깎아내리면 내가 옆에서 그걸 들으면 그 욕에 나까지 포함이 되는 것이라서 내 속에서 뭐가 막 올라온다. 또 다른 면으로 보면 그럴 경우 믿는 사람이 못된 짓을 해서 욕은 자기가 먹는 거지만 또 한 면으로 보면 자기만이 아니라 전체 기독교인들에게 그 영향력이 미치는구나.

 

믿는 사람은 이걸 생각을 해야 한다. 각 개인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이룰구원에 손해가 나는 거지만 나 하나 때문에 교회 전체, 세계 기독교 전체, 창세 이후 마지막 그 날까지 전체 교회에게 먹칠을 하게 되는 거다. 개인의 이룰구원이 전체 교회에 칭찬이 가도록 해야 한다.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 세상을 따라가는 교인들과 지도자들은 이걸 모른다.

 

어느 누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구원을 말살시키고 방해를 할 수 있느냐? 방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온전으로 가고자 하는 그 구원이 설정된 걸 누가 방해를 하겠느냐? 마귀도 못하는 거다. 그런데 인간 자기가 하는 거다. 방해자가 있다면, 내 구원을 못 얻게 하는 건 인간 너다. 그래서 본인이 믿음이 적고 영능의 실력이 없고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이기고 나가려 할 때는 여기는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거는 자는 즉,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그런데 이게 안 믿어진다. 안 믿어지는 이게 문제다.

 

혈육에 매여서, 인정정실에 매여서, 육신이 먹고 살 것에 매여서, 자기 욕심에 매여서, 자기 체면에 매여서, 자기의 잘난 교만에 매여서, 자기가 목표로 세운 자기 세상에 매여서, 자기 계획에 매여서, 사람의 눈에 매여서, 자기의 노후대책에 매여서, 자기 것이 없어질까봐. 행여나 어떻게 될까봐. 이건 점점 올라가는 게 아니고 내려가는 거다. 자꾸 뭣 때문에, 뭣 때문에 하게 되면 자꾸 식어지는 거고, 반면에 하나님의 진노의 온도계수는 올라간다.

 

모두 자기 자신의 천국의 영능의 격차의 정신 사상을 누가 허무느냐? 자기 스스로가 허문다. 그러니 자기가 안 돼 버리고, 그 다음에 내가 그러느라고 사람에게 정신을 쏟게 되니 그 쪽 면이 또 망가진다.

 

인간 자기를 하나님이 만드신 고로 자기는 하나님의 입의 기운으로 산다. 말씀의 기운으로, 말씀으로 살도록 만들어진 게 인간 자기다. 성경에 보면 네 부모 일가친척을 천국을 위해 다 버렸다면 그 다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금세에 즉, 이 세상에서 버린 것만큼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장사를 해 볼 만 하냐, 망하느냐? 할 만 하다. 생각을 해 봐라. ‘여러 배를 받고 이게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는 이게 병이다. 안 믿어지는 병은 약도 없다.

 

여러 배를 받고 이게 안 믿어지느냐?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내가 이거 버렸습니다. 그러니 그거 주십시오 해서 바로 준다면 얼른 버릴 수가 있겠지. 눈에 보여지기 때문에. 그럼에도 금세에 이 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고 하는 이게 안 믿어지는 건 주님의 인격을 못 믿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어정쩡한 것이다. 벌떡 일어서면 좋겠는데 어정쩡하면 누구 다리만 아프냐?

 

예수 당신을 따라오라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이익을 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축복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닌데 주님께서는 세상 것도 유익되게 이익을 주려고 하신다. 그런데 바로 안 믿는 사람들이 주일을 어기면서까지도 돈을 벌고 해서 잘 되는 것 같으니 그만 거기에 속는다.

 

이 세상이 아무리 자기 눈에 잘 돼 보여도 이건 잠깐이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나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믿음을 자꾸 약을 올리는 시험이다. ‘주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을 눈으로 보이는 걸 갖고 와서 시험을 하는 거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되 바로만 믿으면 믿을 만하다. 손해는 없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하다가 손해 본 사람이 있느냐?

 

예수를 믿으면 손해를 안 본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볼지언정 난 절을 안 한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 믿음이 더 좋으냐? 예수 믿는 건 간단히 말하면 예수가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 그것이다. 믿어지면 앞으로 가는 거고, 안 믿어지면 서 있는 거다. 그러면 서 있다고 해서 믿어지느냐? 서 있다고 해서 이뤄지느냐? 그건 안 되는 거다.

 

예수님은 오늘 내일 모레 당신의 길을 목숨을 걸고 겁도 없이 걸어간다. 영의 눈으로 보면 구원을 이루는 그 면에 육신의 목숨이 겁도 없이 걸어간다. 그러니 세상이 그 목숨을 감당을 못한다.

 

여기에는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의 인격을 믿고 자타의 이룰구원, 자타의 이룰구원은 자기부터가 말씀대로 걸어가는 게 들어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죽일 테면 죽이라 하고 걸어간다면 누가 와서 쳐 죽이겠느냐? 쳐 죽이는 것은 세상 법이 허락지를 않는다. 타락된 법이지만 나를 상해한 그 사람을 세상 법이 와서 잡아간다. 그러니 멋있게 걸어가 봐라. 그러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을 따라 1 10 20년을 가다가 보면 인생의 세월은 다 가고, 신앙 믿음의 열매는 없고, 그렇다고 세상에서 유별나게 이름 있게 해 놓은 것도 없고, 결국은 두 눈에 눈물만 흘리고 가게 된다. 서글프다.

 

33: ‘오늘과 내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참 멋있다. 사도바울도 자기가 갈 길을 다 갔다. 사도바울 자기 갈 길이 어떤 것이냐? 사도바울이 유구라파로 여행을 다 다녔다는 말이냐? 어느 곳에 가든지 복음을 들고 가는 그 발걸음, 그 걸음걸이, 그 전도자의 발걸음 속에 구원이 담겨있는 그 사상, 그 인생의 걸음걸이, 그 사상으로 갈 길을 다 갔다. 참 멋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걸 얘기하는 거다. 이걸 느낄 수 있겠느냐?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디서 죽었느냐? 가룟유다는 예루살렘의 고목나무에 목매달아 죽었으니까 예루살렘 안에서 죽은 셈이다. 다른 사도들은 다 외국으로 가서 죽었다. 그러니 지역적으로 용어적으로 보면 그들이 죽은 곳은 예루살렘 밖이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안에서 거의 죽지를 않았다.

 

전해오는 말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여자의 빨래 방망이로 맞아죽었다고 한다. 여자가 때린 건 아니고. 또 기름 가마에 넣어져서 죽은 사람도 있고, 톱으로 켬을 당한 사람도 있고. 사도들을 보면 거의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했다. 이건 뭐가 틀리지 않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권, 라인. 하나님의 사랑권 애정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권, 말씀통치를 받는 권을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지어지는 이걸 느낄 수 있느냐?

 

바리새교인들과 헤롯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영원 전서부터 설정 계획하신 대로 오늘도 내일도 유유히 걸어가는 분이로구나. 그런데 인간 자기는? 정신적으로 오늘 발걸음이 다르고, 내일 발걸음이 다르고, 모레가 다르다. 그러니 이룰구원에서 자기 구원이 어떻게 되겠느냐?

 

예수님의 33년의 인생의 걸음걸이 속에는, 하루하루 사는 걸음걸이 속에는 우리의 기본구원을 이루심이 들어있고, 두 번째는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이어서 걸어가야 할 이룰구원이 또 들어있다. 예수님의 삶에서 기본 기초 터가 있고, 그 다음에 나도 예수님처럼 걸어가면 예수처럼 성장되는 것이 그 안에 또 들어있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우리의 이룰구원에는 신앙실력 영능의 실력의 격차와 차등이 있음이 또 들어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자기가 예수 믿고 작년 재작년 올해, 또 앞으로 미래를 볼 때 과거적으로 걸어온 걸 보면 이룰구원으로 걸어온 것이냐, 뒤를 돌아보면 다 죽어버렸느냐? 사망적으로 살아온 게 분명하냐? 이것이 오늘날 각자의 신앙의 태도고 모습이 그 모양이다. 정말 말씀대로만 돼 왔다면 오늘날 자기 차원보다 훨씬 울라갔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 세월동안 내가 잘못 믿었구나 한다면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 이게 과부의 끈질긴 기도 속에 들어있는 뜻이다. 사람이 쓸개가 있다면 그걸 갚을 줄을 알아야 한다. 남에게 속는 것도 분이 나지만 내가 나에게 속아왔으니 마귀가 얼마나 그런 나를 놀렸겠느냐? 그래서 그 자기가 미우냐, 예쁘냐? 무슨 수로 그 원수를 다 갚느냐? 그런데 그 면에 너무 사랑이 많아서 용서를 잘 해 주고, 자기가 그렇게 살아왔는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니 사람이 깨닫는 면이 둔감해진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느냐? 못 받는다. 자기가 아무리 계획을 세워놔도 하나님이 휙 불어버리면 끝나는 거다.

 

예수님 당시 때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외식적인 신앙사상을 가졌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도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망권 죄권 마귀 세상을 이기고, 유혹 미혹을 모두 이기고 걸어가신 것처럼 세상 모든 유혹 미혹을 이기고 나가야 한다.

 

마귀는 내가 신앙실력으로 달려가는 믿음성을 가지면 자꾸 그걸 허물려고 한다. 외식적인 신앙은 그걸 허무는 신앙이다. 우리 입장에선 그걸 이기고 걸어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기는 것이 영능의 실력이다. ‘이겨야지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의 전폭이 그렇게 들어가야 만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음식을 먹는 것에도 이기고 지는 게 들어있다. 무슨 말이냐? 어느 정도 음식이 들어가면 더 이상 먹지 않고 멈추면 속이 편하고 좋은데, 그런데 맛있다고 해서 남이 먹던 것도 아깝다고 다 주워 먹고는 아이고, 배불러 죽겠다 한다. 이건 뭐냐? 네가 너에게 진 것이다. 이건 탐식가는 아닌데 탐식가 식이 된 거다. 자기의 육성적인 그걸 이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러면 이룰구원 차원에서 진다. 그러면 네가 피해를 본다. 이건 육의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이 어둡고 죄악 많은 세상을 예수님을 따라서 가야 이길 수가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뒤를 따라야 자기 구원이 되는 거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으로 가셨듯이 우리도 그 예수님을 따라서 그 길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다. 말씀의 뒤를 따라서 연속으로 그렇게 가다가 올라가야지, 말하자면 자기의 신앙정신이 저기 가서 한참 뛰놀다가 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가지겠느냐?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이 말씀의 뜻은 첫 번째는,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 성읍 하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말한다. 선지자는 바로 이 예루살렘 성읍 거민들에게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세 번째는 선지자는 아무리 환난 핍박이 와도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슴에 품고 죽는다. 에루살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냄을 받은 선지자니까 이런 선지자가 죽게 된다면 그 안에서 죽어야지. 돌로 침을 받던, 십자가에서 죽던 환난 핍박을 받던 그 안에서 받고 죽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바로 믿으라고 하는 외침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치적으로 신앙의 질적 면에서도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죽는다는 이게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안으로 보냄을 받았으니 예루살렘 거민이 잘못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된 죄를 지적해주는 여기에서 핍박을 받아서 죽어야 하는 건데 예루살렘 밖 이방인에 가서 떠들다가 맞아죽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선지자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찾고 가르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런데 선지 사도들이 이방 세상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이방인들에게 가서 외치는 거다. 그러다가 얻어맞아 죽어도 그거는 순교는 아니다. 다른 뜻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지 말아라. 믿는 사람이 하나님도 모르고, 맨날 세상만 말하는 나라에 가서 정치가 잘못되고 자유가 없다느니 하며 가르치다가 맞아죽으면 그건 순교가 아니고 개죽음이다. 선교하러 나가는 사람은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34: 이 말씀처럼 오늘날 자기가 어떤 환경에서나 어떤 일을 당했거나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 음성을 느껴본 일이 있느냐?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솔개가 위에 뜨면 어떻게 알고 병아리들이 엄마 날개 속으로 싹 들어간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런 것처럼 자기 속에서 진리의 깨달음이나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면서 자기를 보호해 주려고 하는 어떤 깨달음이 자기에게 온 것을 느끼느냐?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는 것을 보니 인간의 교만성과 주관성이 보인다.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큰 환난과 고통이 오는 것을 미래적으로 보고 가슴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슬픈 마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참 인도자는 믿는 자들의 정신 사상 속의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바로 믿는 자는 상대를 보고 그의 미래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저런 신앙으로 가다가는 어떻게 될까 이런 거. 예를 들면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막 갈지자로 운전을 하며 간다면 미래가 어떻게 보이느냐? 사고가 보인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정로로 안 가고 갈지자로 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뻔할 뻔자도 있느냐? 자기가 신앙을 해 오면서 품는 정신 사상이 갈지자로 계속 살아왔다면 미래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가만 계시겠느냐?

 

그런데 이런 게 있다. 옳은 진리도 알고,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사는 건 아닌데 무슨 일로 예수 믿는 일을 뒤로 미루면서 바빠서 이런 변명을 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자기의 이룰구원에 상당히 지장을 받는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개인적으로 얻어맞고 이런 게 있다.

 

그런데 예수는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 자꾸 세상 소원 목적으로 흔들린다면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겠느냐? 이룰구원이 되겠느냐? 안 된다. 신앙하는 사상의 걸음걸이가 왔다 갔다 하다가는 얻어맞는다. 계속 이런다면 이건 망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그 정신은 세상으로 나가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바로 믿어야지 하는 그것마저도 없는 거다.

 

자기가 현재 신앙실력이 없어서 양심이 부끄러우면서도 어떤 대외적인 사건에 자꾸 넘어지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고, 깨달으려고 하면 건져주신다. 그런데 사람이 한 번 넘어지면 두 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지면 세 번 넘어지고, 넘어지는 것도 숙달이 되면 이제는 그 마음이 널널해진다.

 

예루살렘 성읍은 구약시대 다윗 왕이 진리통치 말씀통치를 하던 성읍이었는데 왜 그 성읍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그렇게 죽였느냐? 그것은 다윗 왕이 죽은 후에 비진리로 나가는 세상이 좋아하는 왕을 세웠다는 것이다. 진리로 나가는 지도자가 아니고 세상을 향한 지도자를 세웠다. 쉽게 말하면 세상 정치적으로 보면 목사가 정치를 참 잘 한다 그 말이다.

 

돌을 들어서 선지자를 죽이는 것은 예루살렘 거민이 세상을 좋아하는 왕을 세웠다는 말이요,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호는 싫고 세상보호 물질의 보호가 더 좋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복된 소식은 듣기 싫고 불에 타질 세상이 더 좋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외식자인 이 유대 종교인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을 훤히 내다보고 말씀을 하셨다. 우리도 그 눈을 가지게 되면 자신을 보게 되고, 가정을 보게 되고, 교회를 보게 된다. 그런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해 놓은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