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열려라 에바다 2022. 11. 8. 12:50

3 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사랑하사란 뭘 말하는 거냐? 누구를 보내는 게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건데, 이 예수님은 인간 편에서 보면 나를 대신해서 죽으러 왔고,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네가 가서 죽어야 되겠다 이렇게 되는 거니까 예수님과 인간 나를 가치 평가적으로 비교하면 누가 더 높은 거냐? 내가 더 높다.

 

인간 내가 예수님보다 높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한다는 뜻이요,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실지로 신령천국을 주겠다는 목적을 놓고 하는 말씀으로 아들로 통해 천국의 누림의 영생을 주시겠다는 거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이 감화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 이 감화성이 있다면 나의 온 몸이 입이라고 해도 그 감사를 말로 다 할 수 없고, 남을 쳐다보며 원망 불평할 새가 없는 거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영이 하나님과 끊어져 있었다. 즉 하나님의 인격적 통치를 받는 생명성의 교제가 영원히 끊어져 있었다. 이게 영적 죽음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더라도 영적으로 하나님과 끊어져 있다면 영적으로는 죽은 거다. 이렇게 되면 육신은 점차적으로 죽어가게 된다. 인간이 영이 죽으면 그 즉시로 육신도 죽으면 이 말이 마음에 확 닿겠는데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끊어져서 영적으로 죽었어도 육신은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이걸 잘 못 믿는다.

 

그러면 영이 죽었는데 왜 육신은 살게 하는 거냐?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 즉 예수님의 구속을 입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룰구원 차원에서 진리와 끊어지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주님과 의사단일의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멀어지면 하나님의 애정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고와와 같고, 과부와 같고, 버려진 것처럼 된다. 이러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는 죄대로 짓고, 죄에 밟히고, 죄에 이용을 당하게 되니 이걸 정신적으로 보면 죄에 노예상태로 있는 거다. 다윗이 시편에서 영적으로 자신의 이런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 게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육신의 면만 두고 기도를 한다.

 

인간이 죄와 허물로 영이 죽은 상태로 살다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있는 자로 설정을 하셨고, 선지자도 보내주셨고, 신실한 종들도 보내주셨지만 타락한 인간들이 이걸 믿지 않았고, 결국은 마지막으로 당신의 독생자까지 보내주셨다. 그러니까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행여나 깨닫겠지 라고 하시면서 1, 2, 3차로 보내신 거다.

 

예수님께서 도성인신으로 이 땅에 오심은 죄인은 죄인을 풀어내지 못하고 의인이라야 풀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서 오신 거고, 무죄인이라야 인간의 죄를 대신 사해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모혈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고, 그래서 성육신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되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고, 그리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33년의 삶으로 다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대속의 주가 되신 거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다시 에덴동산에 들어가서 생명과를 따먹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이 안 된다. 설령 따먹는다고 해도 생명과를 먹는 효력이 없다. 왜냐? 이미 영이 죽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따먹고 영생이 된다고 해도 천국에서가 아닌 지옥에서 영생밖에 안 된다. 당신의 백성이 지옥에서 영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목적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의 독성을 받아서 지옥에 가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다. 예수님의 33년의 삶을 통해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날까지의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언행심사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거고, 이 의가 아닌 것은 다 죄가 된다. 주님께서 이루신 이 의는 가짓수로 말하면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 그 깊이와 높이와 진함도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이걸 우리에게 모두 입혀주셨고, 입혀주길 원하신다. 우리는 이걸 느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하늘나라에서 물건을 툭 떨어뜨리는 것처럼 오심이 아니다. 우리는 오시는 그 마음과 정신을 생각하면서 주님처럼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하는데 죄인이라서 그렇게 살 수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내 대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셔서 그 의행과 선행을 나에게 입혀주신 거다. 즉 나의 죄를 없이 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말씀에 합격된 선행과 의행으로 나에게 그 의와 선을 입혀 주셨으니 우리가 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가 사는 게 초막이면 어떻고, 들판이면 어떠랴? 그런데 불평불만이 많다.

 

죄인 내 대신 당신이 죽으셨고,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입히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사셨고, 또 나를 부활시키려고 당신이 부활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를 살려놓고 부활을 시키려니 당신이 죽는 속에는 부활성이 들어 있어야 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성이 진짜 실상이다. 그래서 나를 당신처럼 죽지 않는 주님을 닮은 실상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33년의 사심이 부활성의 성질로 사셨다. 즉 안 죽는 정신, 사는 정신으로만 살았다. 예수 믿는 게 복잡하냐? 아니다. 한 이치 한 이치 깨달아 나가면 여기에는 성령님이 역사를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게 편하다.

 

우리를 영원히 산 자로 부활시키려고 당신이 부활해야만 했고, 죽지 않을 교훈을 하셨고, 죽지 않는 이건 부활성이다. 또 예수님께서 재림으로 오시기까지 우리를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주셔서 이룰구원을 위한 훈련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말한 것 위에 성장만 하면 된다.

 

앞에서 말한 것을 간단히 정리를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대형과 대행으로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셨다. 이 몇 마디 속에는 예수님의 33년의 삶이 다 들어 있다. 당신이 의인이라야 인간을 대신해서 죽을 자격이 있는 거다. 당신이 죄를 지으면 우리도 못 살고, 세상도 통째로 날아가 버리게 된다. 즉 창조의 목적이 무효가 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영은 죄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상태이지만 그러나 원형이요 본질인 하나님의 영에 비하면 이질이다. 이 이질이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이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원형이요 본질인 하나님의 영(생명)에 비해 피조물이요, 가범성 가사성적인 영이라는 면에서 이질이다. 그러나 기본구속을 얻어서 중생된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입은 것으로, 이 생명은 본질과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같다. 그래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중생된 이 새 생명은 영원히 안 죽는다. 하나님이 죽지 않는 한 영원히 안 죽는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게 얼마나 좋으냐? 인간 편에서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동시에 이 새 생명이 나에게 들어온다. 이게 돈으로 환산이 되는 거냐? 은혜로 거저 주시는 거다.

 

중생이 된 새 생명은 믿는 사람의 이성과 몸이 죄를 지어도 안 죽는다. 기본생명, 기본부활, 기본능력이 있는 이 새 생명은 영원히 안 죽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만 믿는 내가 죄를 지으면 학생으로 비유를 한다면 어느 과목을 공부를 못하면 그 과목의 점수가 안 나오는 것처럼 이룰구원 면에서 성장이 안 된다. 그래서 인도자들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주어야 하고, 성도들은 말씀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이룰구원을 못 이루고 천국에 가면 천국을 누리는 면에서 실력적으로 만고의 멍청이가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 건 뭐고, 죄를 안 짓는 건 뭐냐? 죄를 안 짓는 것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이 닥칠 때 말씀을 붙잡고 깨달아서 적용시켜 나가는 거다. 이게 이룰구원이요, 영능의 능력이요, 자기의 실력이 된다. 모르면 예배당만 밝을 뿐이지 이룰구원이 안 된다. 이룰구원에서 영능의 실력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은 다 죄로 들어간다.

 

바로 믿는 사람은 환경에 붙잡히지 않고 그 환경을 자타의 구원에 역이용한다. 이렇지 못하고 환경에 붙잡힌 자는 날마다 원망불평이다. 이건 환경의 노예다. 믿는 사람이 자기에게 좋은 환경이 오면 웃다가 어려워지면 울 거냐? 우리는 모든 사고방식과 언행심사가 사는 것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의 정신과 생각이 펄펄 뛰는 고기처럼 싱싱해야 한다. 이러면 영능의 실력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힘 있게 살아가게 된다. 이건 하나님의 신, 성령으로 되는 거다. 예수 믿는 속에는 이런 게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안 죽는 생명을 주셨는데, 예수님 외에 누가 이런 생명을 주겠느냐? 부모가? 형제가? 일가친척이? 국가가? 공자가? 석가가? 소크라테스가?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은 것을 사용하는 거지 그런 것을 석가가 만들었느냐? 공자가 만들었느냐? 소크라테스가 만들었느냐?

 

예수님께서는 믿는 우리들에게 성장하고 자랄 수 있는 기초, 또는 바로 서고, 바로 앉고, 바로 도전할 수 있는 반석을 주셨으니 우리는 집을 짓듯이 이 반석 위에 신앙정신 믿음정신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 말씀이치를 못 깨달으면 믿음의 건설을 알지도 못하고, 건설도 안 된다. 믿음건설 믿음생활로 건설을 하는 게 이룰구원이다. 이건 신령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나의 존귀영광이 된다. 세상의 어떤 종교가 이런 도의 가르침을 주느냐?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세상에 있는 성도, 즉 사람을 말하는 거다. 사람의 구원에는 신령성이 붙어 있다. 천국이 붙어 있다. ‘세상이란 물질세상을 말하는 건데, 이 물질세상에 인간이 없다면 물질세상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이란 인간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은 우리를 정죄, 즉 심판으로 멸망시키려는 게 아니라 세상(인간)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인간이 구원(이룰구원)이 되려면 하나님의 본질대로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세상이 생겨난 날이 있듯이 세상이 없어지는 날이 있고, 자기가 출생한 날이 있으니 죽는 날이 있다. 이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이걸 어떻게 거스르겠느냐? 그러나 거스르는 유일한 방법이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이뤄가는 거다. 즉 예수를 믿으면서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면 된다.

 

이 생명 길,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는 거다. 교파나 교단에 맞추는 게 아니라 여럿이 믿던 혼자 믿던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는 거다. 이게 영생의 길이다. 이 길에서 이탈이 된 채로 그 어떤 이력과 공력을 많이 남겨도 끝에 가서는 멸망이고 심판이다. 생명 길, 하나님의 본질대로의 의사단일의 길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이다. 이게 아닌 것은 전부가 심판이다.

 

오늘날 예수를 자기 식대로 믿는 자가 많다. 이건 하나님 공의에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 모든 사건, 모든 환경, 모든 존재가 자기에게 대적이 된다. 이러면 괴로워서 못 산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 되지 않은 것은 자동적으로 정죄성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재림 때는 자동적으로 정죄가 된다. 예를 들면 자기가 틀린 답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정답이 오면 정죄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인격화 성품화 되지 않은 것은 심판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본질에서 불합격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공의에 맞아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에서는 공의의 깨달음을 줘야 하고, 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지혜지식성 도덕성은 하나님의 공의다. 이걸 안 쓰면 안 쓰느니만큼 자기 축소가 된다. 본 절을 풀어헤치면 이런 정신 사상이 다 나온다.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인간을 구원하려 하심인데, 말세의 교회들이 주님 오신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공의에 맞추는 것은 모른 채 교인들에게 세상의 소원 목적을 불어넣고, 세상바람이 들게 하고 있으니 이건 다 불의요, 하나님의 심판이요, 정죄다. 그러니까 이건 복음이 아니다. 세상 넓은 길로 가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예수를 믿는 거다.

 

:에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대로 다 했다고 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고 하셨는데, 이런 일은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교회 전체적으로도 있을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의 구원에 손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매사를 말씀의 이치로 깊이 생각을 하면서 이치를 벗어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룰구원에 실력이 되게 믿는 건지를 심사해야 한다.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정죄를 받았다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님을 안 믿는 사람은 주님의 재림 때 정죄를 받는다는 것을 다 아는데, 현재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룰구원 면에서 재림 때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로 사는 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룰구원 차원에서 정죄를 받는 믿음이 있고, 정죄를 받지 않는 믿음이 있다는 거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은 오늘날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봉사 하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 본질에서 이탈된 교훈이 많고 충성봉사가 많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난 너를 모르겠다 라고 하시는데도 거짓 교회에서는 자꾸 충성봉사를 강조한다.

 

독생자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교훈적으로 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게 예수님의 교훈이고, 예수님의 이 교훈에는 사람을 영원히 살리고 고치는 게 들어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성품적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온전이요, 인격적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실상이다. 성육신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런 역사를 하셨다. 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도성인신 하셨을 때 그 분의 말씀을 안 받은 자는 형벌을 받았고, 주님 부활하신 후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안 받는 자는 형벌을 받게 된다. 반대로 주님 부활 후에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산 자들은 그 말씀의 효력을 보고 갔다.

 

예수님의 육신이 실상이냐, 가상이냐? 즉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몸이 존재적으로 비유냐, 비유가 아니냐? 비유적으로 오신 거다. 오셔서 영원히 가는 교훈을 남긴 게 복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머리털 색깔이 어땠을까?’ 이런 걸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교훈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외모 외형은 시간 속에 속하는 비유와 비사다. 그래서 예수님의 33년의 삶은 시간 속에 속하는 거지만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33년간의 삶 속에는 우리의 구원이 들어 있다.

 

만일 자기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서 천국에 가지고 들어가서 이 사진을 본다면 천국에서 보여지는 자기의 얼굴과 같겠느냐? 보톡스를 맞은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서 천국에 가지고 가서 보면 천국에서 보여지는 자기의 얼굴과 같겠느냐? 뭘 말을 하려는 거냐? 우리는 실상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예수님의 외모 외형을 아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인격의 실상이 믿는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도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의 모양새보다 그 사람의 아름다운 심성이 떠오른다면 이게 그 사람의 실상인 셈이다. 그 사람의 모양새가 아닌 아름다운 심성을 보고 대화도 하고, 사귀기도 하고, 돈을 빌려주기도 하게 되는 것이니 그 사람의 심성의 아름다움이 그 사람의 실상이 되는 거다.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마귀처럼 생각이 된다면 이 사람과 사귀고 싶어지겠느냐?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존이라는 것을 말하는 건데,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표현을 하려면 이것 이상으로 표현을 할 용어나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독생자라고 하신 거다. 그러니까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 분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인간을 독생자처럼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인데, 자기는 이 분으로 통해 독생자처럼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거다.

 

이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거다. 이 분을 믿지 않는 것은 한 마디로 주님의 소원 목적, 그 성품대로 살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쉽게 말하면 나는 참 인간으로 만들어지지 않겠다. 나는 그렇게 안 살겠다 라고 선언을 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본질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전에 이미 정죄가 들어가 있는 거다. 예수를 믿으면서 정죄가 되는 예수를 믿으면 되겠느냐?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모른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만 믿는다면 예수님으로 성품화 실상화 되는 게 없다. 이러면 믿는 효력이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곡처럼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성품적 실상을 가진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과 같고,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과 같다. 무엇을 하던 실력 면에서 열매가 알곡처럼 가득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 자기를 알고, 타를 알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아서 이 목적을 잡고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