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이며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 초창기의 목사인 애산 김진호 목사의 설교집 <무화과 1권>이 지난 해 본인의 번역으로 금년 4월 출판한 이래, 지금 <무화과 2권>을 번역하는 중인데 1928년 당시 암울했던 우리나라의 형편 중에도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목사님의 이 부분 글이 교육적인 효과가 있을 것 같아 본인 블로그에 우선 올립니다.
『봄의 종교』
마태복음 6장 26-끝절.
(1928년) 4월 15일. 주일 아침. 체부동.
설교자 : 애산 김지호 목사(항일 독립유공자)
번역자 : 청계 조면희
지금 봄빛이 점점 무르익어가니 사람은 유쾌해지고 만물은 번성하게 되어 주님의 사랑이 충만합니다. 신자는 이때에 대체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잊지 않습니다. 대개 봄의 뜻은 부활에 있습니다. 만물이 말라서 죽고 얼음과 눈이 짓누르며 들불이 모두 태워 다시는 살 희망이 없을 때, 땅에서 지진이 한 번 일어나서 땅껍질을 흔들어 놓으면 새싹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푸르고 붉은 생명들이 각각 그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우리 신자도 역시 이와 같으므로 바깥의 수식을 힘쓰지 않고 오로지 내면적인 것을 힘써야 합니다. 생명은 안에 있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핍박하고 재앙과 우환이 괴롭혀 다시는 희망이 없는 것 같다가도 하나님의 성령이 한 번 내려와서 마치 봄바람처럼 쐬어줌으로써 인심을 감화시키고 그 기질을 변화시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주님께서는 문도들을 가르칠 때 화조花鳥를 가지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사람은 화조보다 귀한 존재인데 도리어 화조만큼 안정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저 새를 보시오. 어릴 때부터 날기 시작하여 날마다 어미 새의 가르침을 받고 자유자재로 하늘 높이 펄펄 날아다니지요.
사람이 어릴 때 배우는 것은 어른이 되어 그 배운 것을 실행하기 위하여서입니다. 부모 된 자는 마땅히 그 자녀를 교육하여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에서는 마땅히 그 국민을 교육하여 천국의 백성이 되도록 하여야 됩니다. 비록 시기를 잃어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마땅히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으며 스스로 분발하여야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성공을 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옛날 훌륭한 철학자들도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되도록 힘쓰십시오.
또한 새는 미리 준비할 수가 있어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먹고 입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지만 새는 걱정을 안 해도 먹고 사니 사람이 되어 새만도 못 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마나를 가지고 유대 백성에게 내려주어 4십년을 먹였으며, 또 꿀이 흐르는 땅을 내려주었으므로 먼저 의리를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것이 마땅한데 물질을 도리어 따르게 되었습니다.
얻고자 하면 도리어 잃는다고 한 것은 주님의 교훈입니다. 옛날 한 농부가 죽을 무렵에 그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밭에 보물이 있다라고 하였으나 어디라고 지적해 주지는 않고 죽었습니다. 그의 여러 자식들이 밭에 가서 수십 고랑을 파내었으나 보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그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은 것이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 자식들이 다시 의논하여 말하기를 밭에 숨겨놓은 보물은 바로 풍년이 든 농산물의 수확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이와 같이 헛된 수고만 하고 소득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르기를 ‘사람은 다섯 종류의 새[오작五雀?]를 귀하게 여긴다’라고 하였으나 다섯 종류의 새라고 일찍이 노력하지 않고 어찌 먹이를 얻겠습니까? 새도 역시 지혜가 있어 먹이를 얻을 수 있는데 사람의 지혜는 새보다 몇 배가 되는지 모르거늘 어찌 먹을 것이 없어 근심할 것입니까?
아프리카 주에 공작새가 있어서 몸집이 크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데 그는 깊은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먹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조류 중에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까마귀, 자식을 기르는 제비, 벗을 부르는 꾀꼬리, 형제간에 우애를 상징하는 할미새[鶺鴒] 등이 있으며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순하기는 집비둘기[鴿] 같다’하였으니, 이것은 어떤 새들이라도 다 사람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중국 남부인 강회江淮 지방의 송골매[鶻]는 포식조류이지마는 자기에게 잡힌 새가 애걸하며 울면 놓아주는데 동쪽에서 놓아주면 그날은 동쪽에 가서 사냥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꽃을 보시오. 지금 저렇게 붉고 아름답게 피었으나 겨울이 되면 생명을 땅 속에 묻어 마치 무생물과 같아집니다. 그렇게 견디는 겨울 동안의 곤란과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여름과 가을에 이르러서도 고통은 역시 있으니 뜨거운 태양이 내려 쬐고 폭우가 휩쓸고 가니 그 생명을 피우기 위하여 얼마만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 왔겠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마침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 인간의 노고도 이와 같습니다. 언제 우리의 생명을 꽃피울 수 있을까요? 만일 생명이 없다면 지금 아무리 곤란과 고통을 견디더라도 뒷날 영광스런 생명의 꽃을 피울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스스로 반성하기를 ‘우리가 오늘 하는 일에 과연 생명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생명이 없는 빈 껍질만인가?’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람에 불려 날아가는 쌀겨를 보지 않았습니까?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무게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성해야 합니다.
저 꽃봉오리는 만일 태양을 받지 못하면 피어나지 못합니다. 날씨가 추우면 꽃잎이 닫히고, 해가 따뜻하면 꽃술이 터집니다.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마음에 감동을 주면 내 마음의 여러 모양의 미덕이 밖으로 드러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하도록 할 수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꽃들이 입은 옷이 솔로몬의 옷보다 낫다고 이르는 것은 꽃의 영광을 사람이 만들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는 영화는 잠깐이지만 하늘이 주는 영화는 영원합니다. 참된 영광은 하늘에 있으니, 사람이 주는 영광과는 결코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조선인은 먹고 입는 걱정이 유대인보다 더 심하여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조선朝鮮의 마음은 죽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싹을 틔우려고 합니다. 이미 눈과 얼음이 짓누르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숫돌상인인 고창한高昌漢씨는 십만 엔을 대동학원大東學院에 기부하였습니다. 경제가 이렇게 무너져서 가난한 상인들이 돈을 벌기 어려우므로 마음이 얼마나 인색한데 지금 십만 엔을 아끼지 않고 내어 놓는다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구에 사는 기생妓生 아무개는 겨우겨우 어렵게 번 돈 몇 천 엔을 역시 교육기관에 기부하였고, 평양의 백과부白寡婦도 역시 기부를 하였으니, 이것이 조선에 봄이 옴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이뿐 아니라 경성 도서관에 조선인의 독서 수가 일본인의 세 배나 된다고 합니다. 이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그렇다고 합니다. 간혹 중간에 폐단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 역시 기이한 현상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자유로 만들어 줍니다. 남의 밑에 있는 자는 자유가 없어서 먹고 마시는 의식 생활이나 권리를 윗사람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앉으라고 하면 앉고 서라고 하면 서야합니다. 지식이 있어야 남에게 의지하는 일을 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자유를 누리려고 하면 부지런히 독서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부모도 의지하지 말고 또 처자식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히 독서하여 지식이 넉넉하게 된 뒤라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의 봄은 올 수가 있습니다.
또 졸업생을 봅시다. 학업을 끝낸 뒤에 모두 도회에 나와서 취직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좋은 직책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도회지에만 몰려드니 도회지는 봄빛이 왔습니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에는 아직도 깊은 겨울입니다.
지식을 가진 학자들이 농촌에 들어가서 머리에 수건 동여매고 손에 호미 들고 농부들과 함께 농촌 생활을 즐겨야 문화가 일어납니다. 전도하는 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모이는 연회시年會時에 전도인傳道人들은 큰 교회로 파견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이 원한 대로 파견시키고 난 뒤에 그들의 지위를 보면 마치 고등관과 같이 위엄을 가지고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호화스러운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봉급도 나오지 않습니다. 실정이 이러하니 궁벽한 시골에는 봄이 어느 때나 오겠습니까?
미국이나 조선의 전도인들도 모두 이와 같은 그릇된 이해 속에 삽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세상에 조그마한 이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원문탈초原文脫草
四月十五日主朝, 體府洞, 春의 宗敎, 太六章二十六至끝, 今春色漸爛, 使人愉快, 萬物欣欣, 主愛充滿, 信者於此時盖不忘神之至愛也. 盖春意其復活. 方其萬物枯死, 氷雪壓之, 野火燒之, 無復有希望, 地雷一動, 破地殼而出頭, 或靑或紅, 各顯其生之能力. 吾信者亦然, 不務外飾, 惟務內的, 生命在內不在外, 故世人逼之, 禍患迫之, 無復有希望者, 然聖靈一降, 如春風之吹, 感化人心, 變其氣質, 顯其天父之愛矣. 故主諭門徒, 以花鳥爲諭, 人貴於花鳥, 而反不若花鳥之安定何也? 相彼鳥矣, 自幼有飛, 日受母鳥之訓, 翻翻飛上于天空, 自由自在. 人幼而學之, 欲壯而行之, 爲父母者, 當敎育其子女以成天父之志, 爲政府者, 當敎育其民以成天國之民可也. 雖失時不學, 當自奮發, 不眠不休, 自可成功, 自勉成功, 先哲皆然. 僉位念之哉!
且鳥能豫備, 不農而猶有食, 人之憂衣食急急, 鳥不憂而得, 可以人而不如鳥乎? 神以마나賜猶大之民, 食之四十年, 又使流蜜之地與之, 當先求義與國, 而物反隨之也. 欲得反失主之訓也. 昔一農夫臨終, 言于子曰 田中藏寶矣, 終不言某田而終, 其諸子往田, 爭掘數十頃, 掘之盡而無寶, 當年播種益豊矣. 諸子更曰 田寶之藏果是矣. 不從眞理則徒勞無益也. 主曰 人貴於五雀, 雀何不勞而得? 鳥亦有智, 可以得食, 而人智不知幾倍於鳥, 何憂無食哉? 阿弗利加洲有孔雀, 有長有綵, 嘗採食深林之中. 不寧惟是, 鳥類中, 有反哺養之烏, 有養子之燕, 喚友之鶯, 有呼兄之鴒, 主亦言順如鴿, 此何鳥類可以戒人者. 江淮之鶻, 攫食鳥類, 有一鳥哀鳴則放之, 放之東則是日不向東, 看彼花矣, 今綽約如彼, 而至冬日, 生命埋于地中, 而視若無生者然, 其困苦不可形言, 至夏秋亦然, 太陽曝之, 暴雨降之, 欲放其生命, 而忙碌不休. 至時乃放燦然之花. 今吾人勞苦若是, 而何時能放吾生命也? 若無生命, 則今雖困苦, 後必有榮生之日也. 故今吾自反曰 吾今日之事, 果有生命乎? 果是虛殼乎! 不見風揚之糠乎? 無生命故無重量也. 吾等當自省. 彼花蘂若不向太陽, 則不能綻蘂, 天寒則合, 日暖則綻者花蘂也, 神以大愛感心, 則吾心之各樣美德, 發顯于外, 能令人悔改, 能令人向善也. 其所衣者, 猶勝於索羅門(솔로몬)之衣云者, 花之榮光人不能造焉. 惟神造焉. 人與之榮暫也, 天與之榮永也. 眞榮在天, 與榮決無比也. 今朝鮮人憂衣食, 甚於猶人, 而似無希望, 然更思則朝鮮之心不死也. 始欲發芽, 已過氷雪之期也, 何以証之? 슛돌商 高昌漢氏, 以十萬円寄付于大東學院也. 經濟如是墮落, 貧商聚金之心, 何等吝嗇, 而今不惜十萬円者, 甚不易之事也. 大邱妓生某, 僅僅得金, 至爲幾千円, 亦寄付于敎育機關, 平壤白寡婦亦然, 此朝鮮之春也. 不寧惟是也. 今京城圖書館, 朝鮮人讀者, 三倍於日人, 非但男, 女子亦然云. 或不無中弊, 然此亦奇顯狀也. 知識使人自由, 在人下者, 無自由, 賴其衣食, 賴其權利, 坐云坐, 立云立, 有知識免賴也. 今靑年如欲自由, 勤勉讀書, 幸勿依父母, 又勿依妻子, 勤勤讀書, 知識有餘然後, 可自由也. 其時諸君之春可來矣. 又看卒業生, 畢業後皆欲就職于都會, 欲望顯職, 如是高等之人輻湊于都會, 都會則有春光, 然僻村窮鄕則尙是窮冬也. 知識的學者入農村, 頭巾手鋤, 與農夫共樂, 於是文化起焉, 傳道亦然, 年會時傳道人, 欲被派于大敎會, 派送之後, 看其地位, 儼若高等官, 更外有豪華之貌, 而其內容則俸給不發, 然則窮村之春何時來到也? 美國及朝鮮傳道人, 幷在此誤解中, 基督敎毫無有益於世也宜矣.
*원문초고原文草藁
*붉은 색 글씨는 의문이 있음을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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