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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특수적 개념(8편의 글)

열려라 에바다 2023. 5. 4. 14:11

구원의 특수적 개념(8편의 글)

구원의 개념(1)

 

구원(救援)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기독교에서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이라 할 때 그 용어 속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불난 데서 끄집어냈다.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졌다. 병든 사람을 고쳤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런 곳에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만, 사실 이럴 때 구원이라는 용어보다는 구조(救助)라는 용어를 일반사회에서는 흔히 사용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고 하는 것에도 구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며, 특별히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말은 예수님이 지옥 갈 우리를 천국에 가게 했다고 할 때 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서 천국 가게 했다고 하는 말은 원리 원칙상 맞지 않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세상을 짓기 전에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당신의 의지세계에서 당신의 마음 가운데 나를 구원의 대상자로 삼고 당신의 때에 나를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어 이 땅에 출생케 해서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했고, 이 물질세상을 거치면서 훈련 연단을 받게 해서 이 땅에서 신앙의 노력을 한 것만큼 당신의 온전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실상으로 나를 만들어 신령천국으로 보내서 당신께서 다스리고 누리고 쾌락하는 그 세계를 나로 하여금 당신처럼 누리고 느끼며 행복 가운데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구원이 지옥 갈 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나의 구원이 계획 설정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자가 이 사실을 바로 알게 될 때에 나를 향하여 녹아들어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개념은 세상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구원의 개념입니다. 일반적 구원의 개념은 구원 이전에 항상 사건이 앞섭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먼저 있고 나서, 물에 빠진 것에서 건져내주어야 만이 구원이라는 용어가 붙게 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사건이 오지 않으면 구원이라는 용어가 붙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사건이 있은 후에 구원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이 있기 전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이 설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이 있기 전에 우리의 구원이 먼저 계획, 설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설정에는 예수 믿어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성령님을 따라 살아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고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천국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누리는 것까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이 결과적 목적적인 구원은 창세 전 영원 전서부터 하나님 당신의 의지세계에서 그리스도로 통해서 이미 설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영원 전 당신의 의지세계에서 이미 설정된 하나의 과정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렇게 보지를 못하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타락을 해서 지옥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타락 후 구원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을 했기 때문에 오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이라도(따먹지 않았더라도) 어떤 모양으로 건 인간에게는 그리스도 구속이 필요한 것이냐? 즉 선악과를 따먹건 따먹지 않건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야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인간이 처음 지음 받을 때 무죄상태로 만들어졌어도 인간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완전성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로서 그 속성 성품이 하나님의 질과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런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은 타락을 했건 안 했건 구원을 얻으려면 어떤 모양으로 건 구속을 입어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영원 전서부터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설령 죄를 안 짓고 살아도(선악과를 따먹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구속을 입고 하나님 것으로 바꿔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구원의 개념을 세상 일반적 구원개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념을 가지고 신앙하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 일반적 구원의 개념은 한 마디로 사건이 앞서야 구원이란 용어가 나오는 것인데, 교회에서 성경을 보면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으므로 예수님도 오시고, 하나님이 와서 돌보고 하는 것이라는 식의 구원개념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곧 사건이 먼저 있은 후에 구원이 오는 이방사상적 구원개념과 똑같은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구원의 계획과 영능의 실력을 보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춰진 성경해석이 들어가야 하나님의 뜻에 적중한 깨달음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내 사정 어려우니 내 사정 들어 주십시오 하는 식의 신앙을 갖게 되고,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자기의 종처럼 부려먹으면서 주여 주여 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육을 염두에 두고 부르짖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나의 영적 상태를 바로 잡아주려고 이 사건 환경을 동원시킨 것이다 이렇게 깨달아야 하겠습니까?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영원 전 궁극적인 그 뜻을 깨달을 때 사람이 돼 나가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는 하지만 구원의 개념을 세상 일반적 개념으로 갖고 있게 되면 사건 환경이 오면 늘 물질개념으로 생각이 돌아가고, 하나님으로부터 육적 물질적 세상적 임시적인 면의 도움을 얻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믿는 자신이 재세기간 동안에 입어야 할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그 천국을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인 하나님의 성품을 입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의 개념(2)

 

구원이라 할 때 일반적인 개념은 먼저 사건이 있고, 그 다음에 구원이라는 용어가 붙게 됩니다. 가령 사람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있어야 그 다음에 물에 빠진 그 사람을 건져주어야 만이 구원이라는 용어가 붙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습니다.

 

또한 구원이라 할 때 기독교에만 있는 특수적인 개념이 있는데,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보통은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타락해서 지옥에 가게 되었고, 예수님의 오심은 타락을 해서 지옥에 갈 인간을 천국으로 건져 올리려고 오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타락의 사건이 먼저 오고, 그 후에 예수님 와서 건져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구원서정 중의 일부로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에만 있는 특수적인 구원의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고 그 후에 구원이 오는 세상 일반적 구원의 개념에서 빗어나지 못하는 하나의 기독교 일반적 구원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인간을 만들기 전에, 인간이 타락을 하기 전에 먼저 구원이라는 것이 당신의 의중에서부터 설정, 계획되었다고 합니다. 즉 구원이라는 것이 먼저 목적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이 구원을 위한 사건이 전개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는 이렇게 보지를 않고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당신의 의중에서 미리 몇 명을 구원하기로 정했다고 하기도 하고(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의 인간을 향한 궁극목적은 모른 채), 또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 중에 몇 명을 뽑아서 구원해 준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인간의 타락 전에 당신의 자녀를 먼저 정해놓고 그 다음에 지옥 갈 자는 가고 아닌 자들은 결국 예수를 믿게 된다고 합니다.

 

즉 타락된 후에 몇 명을 뽑아서 구원한다는 게 있고, 또는 타락 전에 몇 명을 뽑아서 구원한다고 하는 게 있고, 그 다음에 타락 후에 믿는 걸 봐서 잘 믿으면 건져준다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에서는 자연히 인간이 타락을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이 지음을 받은 후 언제 타락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타락 전 무죄상태일 때는 죄는 짓지 않았지만 아담의 그 영이 하나님 본질과 같은 것인가?

 

하나님은 죄를 짓지도 않고 죄가 침투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죄가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를 짓지도 않고 죄가 침투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비하면 이 범죄 전의 아담 하와는 죄를 지을 수도 죽을 수도 있는 하나님과의 이질성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로, 하나님의 본질로 닮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지음 받은 후에 죄를 짓지 않았어도 아담(인간)에게는 이미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라는 것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영원 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의 구원은 없고 타락 후에 구원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구원관을 갖게 되면 항상 인간이 먼저 일을 저질러 놓으면 그 후에 예수님이 오셔서 수습하는 식의 믿음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 궁극적 구원은 당신의 백성에게 신령세계에서 실현될 게 창세 전부터 당신의 의중 속에 이미 예정 계획 목적적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세상만물을 만들기 전, 영원 전에 이미 당신의 의중에 계획된 것을 시대를 따라 내는 것이며, 그 내심대로 구원의 서정이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역사는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택자들의 구원을 위한 순서대로 그대로 진행이 되는 것이니 눈에 보이는 역사는 이 원 역사를 알려주는 껍데기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은 가견적인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 원 구원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어떻게 요동을 하건 어떤 상황이건 그 신앙이 변질이 되지 않게 됩니다. 성도가 이렇게 살면 이건 하나님처럼 만들어지는 신적 지혜지식성 신적 도덕성 신적 능력성 즉, 하나님 속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속성으로 깨달아 나가면, 이 사상으로 깨달아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걸 대처할 지혜와 능력이 나오게 됩니다.

 

이 큰 구원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살면서 닥치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갖가지 사건에 빠지고, 빠지면 거기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육 위주 세상 위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의 구원관을 보지 못하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을 자기 펀하게 천국처럼 만들어 달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즉 의지세계 구원관을 모르면 일반적 구원개념을 갖게 되고, 그러한 사상 하에서는 육적 세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구원의 서정을 통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천국 보내야겠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설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흐르는 세월 속에서 이 의지세계 구원관을 잡고 신앙의 보화를 건져야 합니다. 흐르는 가견적인 인류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궁극적인 이 구원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듣는 귀가 영의 귀입니다.

 

구원에 대하여(3)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특수적인 개념이니 세상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과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일반적 구원개념은 사건이 먼저입니다. 사건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용어가 붙지를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개념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신령한 천국에 들어가서 그 실력대로 하나님처럼 영원히 누리게 하는 것도 궁극적 목적적 결과적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만들어지는 것도, 만들어진 대로 장차 천국을 누리는 것도 구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닮아져서 주님처럼 참 사람으로 닮아지면 그 속성은 전부 신령성이니 그 사람은 장차 변화 부활을 입어 신령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처럼 만들었으니 당신의 사람처럼 만들어서 당신의 세계로 데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나일진대 어찌 믿는 자가 세상을 살면서 땅이나 쳐다보며 짐승처럼 살 수가 있겠습니까?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영적 면에서 기능과 지능적으로 사람이 신을 닮아가니 영특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게 하는 게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요 이게 기독교입니다.

 

천하 못되고 성질 더럽고 성격이 고약하고 지지리 못난 나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당신처럼 만들어주는 이게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기초를 닦게 해주려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하나님은 세상 마지막 날 우리를 변화 부활시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걸 벗어나는 것은 아무리 기독교라 해도 다 거짓이요 이단이요 무당이요 귀신들린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가 돼 있으니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만들어 놓는 이게 기독교인데 교회가 이 일은 안 하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되어먹기를 복된 사람으로 돼 있어야 천하를 다스리라 해도 옳게 바르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다스림이 되지 사람이 귀신이 들려있는데 물질적인 복을 주면 뭘 하겠습니까?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이 온전이란 주님의 속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해주기 위해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나에게 왔다가 가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개념(4)

 

중생을 의미하는 기본구원에서 타락이 됐기 때문에 구원을 했다 라고 하게 되면 이건 사건이 앞서고 그 후에 구원이 오는 세상 일반적인 구원개념과 똑같은 구원개념이 됩니다. 성경의 특수적 구원개념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이미 영원 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계획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타락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통해 구원하는 것이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타락을 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이 되고,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되고, 이 말 안에는 에덴동산이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영원히 주시려고 하는 천국이라는 말이 됩니다. 에덴동산이 신령천국이 맞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구원을 얻으려면 타락을 했건 안 했건 어떤 방편으로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타락)하기 전의 영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가범성 가사성적인 존재이므로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과 똑같은 성질 성분 성격이라야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천국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 전 무죄상태에서 아담의 영은 하늘에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신령성인 천국은 신령성이라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인데 비록 타락 전의 아담의 영이라도 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피조 된 하나의 물질성적 존재이지 신령성은 아닙니다.

 

따라서 천국에 입국이 가능한 하나님과 똑같은 질과 성분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히는 것이니, 인간이 천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타락이 되기 전이건 타락을 한 이후에건 어떤 방편으로건 입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신인양성 일위로 도성인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대형 대행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중생을 시켜서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면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와 허물로 영이 죽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설정된 하나님의 원 구원계획인 당신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신령천국에서 당신처럼 통치하고 누리게 하려는 그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위해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었으니 일단은 죽은 영을 살려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살아난 그 자에게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인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야 합니다. 이걸 크게 말하면 다 구속이요 구원입니다.

 

구속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화구원이라고도 하는데 이 성화구원은 말만이 아니라 이론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판단 이해타산 평가성 소원 목정성 취미성 지향성 추구성이 성령님을 따라 이 땅이 아닌 천국에 놓고 모든 언행심사가 진행이 될 때 이성과 몸에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해석은 물론이고 자신의 삶의 모든 결과를 이 땅에서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이 아닌 영원 궁극적 그 나라에서 실상적으로 나타날 그 열매를 바라보고 그 나라에서의 결산을 목적으로 하고 살아갈 때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의 교회의 현실은 대부분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고, 믿는 사람이 자기 건강을 위해 담배나 술을 끊거나 일반 윤리도덕적인 면의 개선이나 나쁜 습관 등을 고치는 등의 그 자체로 성화구원인 줄 알거나, 성화구원을 말은 하지만 신앙하는 속을 보면 그 소원 목적이 세상에 내려져 있으니 실질적인 성화구원은 요원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 속의 정신과 사상과 목적이 예수님의 정신 사상 목적과는 엄청나게 반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지는 않고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부린다고 해도 성화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화의 의미는 나의 이성과 몸을 질적으로 사고방식 가치판단 평가성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하나 하나 하나님의 것으로 바로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하여(5)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에 하나가 구원이라는 용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내용 면에 있어서 제각기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여러 분파로 나눠진 제일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구원에 대해 주장하는 바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 교파마다 다 제 나름대로 성경을 보고 구원에 대해 주장을 하는 것이겠지만 거의가 일치하는 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을 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구원해준다고 하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구원이라는 개념이 일반세상은 늘 사건이 먼저 앞서고, 그 후에 그 사건에서 누가 건져줘야 구원이라는 용어가 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이 먼저 설정이 되었고, 그 후에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타락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구원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성화를 이루고, 장차 신령천국에서 누리고 하는 것은 그 궁극적 목적적인 구원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예정했다고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이라 할 때 예수 믿어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거치면서 그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실력, 누림의 천국, 천국에서의 영생, 이것도 일종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이란 그냥 안 죽고 오래 산다가 아니라 기쁘고 즐겁고 실력대로 누리고 하는 누림천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라는 것은 그렇게 누릴 장소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장소에서 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통은 세상이 먼저 있고, 인간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건 천국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을 통해서 보면 우리의 누림의 천국이 있기 때문에 이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하려고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들었고,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영원히 누림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인간으로 하여금 누릴 수 있도록 누림의 준비를 위한 장소로 이 세상을 만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을 거치면서 할 일은 주어지는 현실 속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인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일입니다. 이 삶을 성공적으로 이룬 후에는 이 세상을 지나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 되고 예정된 구원이 즉, 천국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걸 모른 상태에서 예수를 믿게 되면 세상 일반적인 구원개념으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 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그리스도로 통해 설정된 구원목적을 가지고 살면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건 환경 마찰 충돌 대립 등을 예수님의 능력을 빌어 없이해보려고 한다거나 밀어내려고 하지를 않고 천국의 누림의 실력을 쌓으라고 이 사건 환경을 주시는구나 하고 목숨을 내대고 담대히 그 사건 환경을 이기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정신을 가진 자는 기도를 해도 자기 육이, 세상이 좋도록 해달라고 하지 않고 장차 누릴 영능의 실력을 염두에 두면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 사건 환경에서 육으로 세상으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이 진하게 입어질 수 있도록 건저 주옵소서. 내가 죄악 가운데 빠졌나이다. 내 주위에 악이 많나이다. 나를 건저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원 전 자기에게 설정된 구원을 염두에 둔 기도입니다. 자신이 사건을 만나면 자기의 연약성 무능함이 다 드러나는 것이니 몸이 아플 때도 영원 전 구원에 관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가 원치 않는 사건이 왜 왔느냐? 영원 전 나에게 설정된 구원에 대해 등한시 했거나, 몰랐거나, 이 면에 대한 자기 다스림 없었거나 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약을 써도 영원 전 구원을 염두 두고 그 면을 위해 정신적 육적 건강을 위해서 약을 쓰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건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영원 전에 예비 된 그 나라의 누림을 위한 실력을 쌓기 위한 재료인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면에 대해서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일반세상은 육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아무런 어려운 사건이 없이 편안하게 행복하게 몸 안 아프게 가난하지 않게 부자로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삽니다.

 

성경은 영원 전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믿는 사람이 예수 믿으면 세상 부자 된다. 만사형통 된다 라는 사고방식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세상 일반사람의 구원의 개념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자기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영능의 실력 면도 모르고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육적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게 되니 이런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하나님의 성품은 입혀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축소시켜 성령감화로 기록을 해놨으니 우리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영원 전 구원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깨달아 나가야 하는 것인데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세상만사를 세상 일반개념으로 생각을 하니 예수 믿고 만사형통만 알았지 머릿속에서 이치적으로 자신에게 사건이 왜 왔는지에 대한 깨달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자기 고치고 만들어지라고 주신 사건임에도 이 하나님의 의도성과 자신의 의도성과는 자기 속에서 팽팽하게 대립이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너 고치자. 생각이 열리고 지혜롭게 만들어져라 하고 사건을 줬는데 자기는 그 면은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적으로만 들어있으니 이러한 일반적 구원의 개념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남 원망 세상 원망 환경 원망이요, 자기 좋도록만 해달라고 하게 됩니다.

 

사건이 내가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는 것입니까? 사건을 피해 도망을 가면 되는 것입니까? 요나처럼 도망을 가면 거기도 큰 고기가 입을 벌리고 잡아먹으려 하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 듣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네가 생명적으로 살아나느냐, 사망적으로 죽어 들어가느냐?’ 하는 게 설교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망 길과 생명 길 두 길밖에 없습니다. 생명과와 선악과밖에 없습니다. 사고방식, 교훈의 질도 둘밖에 없습니다.

 

네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영원히 사함이 없다는 것은 사건을 잡고 오는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의 그 뜻을 거부하면 너에게는 이룰구원 성화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해석은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는 되지를 않습니다. 성경해석은 영원 전 구원의 개념을 가진 지식, 예수님처럼 닮는 지식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궁극적인 목적과 뜻에 정확히 맞게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땅의 지식이 아닌 하늘의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육으로 세상으로 해석이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마귀 말이 됩니다.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입니다. 신비주의 구복주의 사회주의도 다 일반개념의 구원입니다. 여기에는 영원 전 구원개념은 없습니다. 영원 전 구원의 개념은 교회간판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질을 보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하여(6)

 

기독교 일반적 구원의 개념인 인간이 타락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해준다고 하는 구원의 개념이 아니라 세상을 짓기 전, 인간이 지음 받기 전, 인간이 타락하기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의 구원이 설계되어 그 설계대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고 하는 특수적 구원의 개념은 구원에 대해 색다른 또 다른 하나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개념과 사상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보다 더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 개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만사를 모두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재료로 이용하고 응용하고 활용을 할 수 있는 영력이 생겨서 세상을 살며 겪는 모든 사건 환경 가운데서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온전히 덧입는데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이라 할 때 원리 원칙적으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 하나밖에 없는 것인데 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진다는 면에 있어서 다각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다각적인 면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니,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이 이뤄지도록 하려니 사람은 듣고 깨닫고 써먹는 데서 실력이 되어지는 것이므로 이 물질세상을 만들어 놓고, 즉 구원을 위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성도에게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만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인간 속에는 도덕성이 들어있습니다. 믿는 자가 가진 도덕성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 후에 나온 도덕성이 아니라 생명과 먹은 도덕성으로, 믿는 자가 이 신적 도덕성으로 다른 사람과 연관을 지어나갈 때 자타가 그 도덕성이 자라고 신의 성품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가정적으로도 남녀노소가 있고, 사회적으로 부요 빈곤 강약이 있고, 각이한 사건 환경이 교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세상에 살면서 만사를 나의 영능의 실력을 쌓으라고 준 것으로 받아들이며 매사에 자타의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타락된 세상은 무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정복을 하지만 우리는 진리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정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영적으로 많이 살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생명적 영생적 정복을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천국에서의 그 사람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운동을 하는 면에 물질도 시간도 행동도 활동도 다각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사회적 법이 금하는 죄를 짓지 않는 한 이생에 있는 동안 부절히 이 일을 하는 것이 믿는 우리의 도리입니다.

 

구원의 개념(7)

 

믿지 않는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 측면의 구원의 개념은 물에 빠지거나 어려운 사건을 만나서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았으면 그 다음에 구원을 받았다 그런 말을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먼저 있은 후에 거기서 건짐을 받았다면 그 다음에 구원이라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보면 단순히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을 예수님이 건져 주었다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안 믿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교회에서도 일반적으로 그런 수준으로 생각을 해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지옥에 가게 생겼기에 이런 인간을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올려주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 인간을 대속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틀렸다 라기 보다도 성경을 역사적 표면적으로 보고서 일반적 구원의 개념으로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언가 부족한 깨달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해 이처럼 말을 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인간은 타락이 안 되고, 따라서 죽지도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고, 대속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즉 일반적인 개념으로 구원을 생각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는 이론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건이 먼저 있고, 그 후에 거기에서 건져주는 식의 구원의 개념은 인간의 구원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된다고 하는 성경말씀과는 배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타락 후에 구원을 해준다고 하는 그 서정이 틀렸다거나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게 되면 인간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영원 전서부터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신 그 일은 빠뜨리게 되니 이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해 가지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대해 희미하게 되고, 하나님의 속성이나 애성이나 우리의 구원의 촉구성이나 효율성에 미흡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룰구원에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이로 인해 지옥에 가게 되었고, 여기서 구원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해서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중생을 시켜 천국에 가게 해주고 하는 이 구원의 서정은 마치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획에도 없던 선악과를 따먹는 일을 저질러 놓으니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다른 방편을 동원하시는 무지무능의 하나님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하기 그 이전, 인간을 만들기 그 이전, 영원 전 하나님의 의중에서부터 당신이 누리시던 그 신령한 세계를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영원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 당신과 같은 인격(모형적)(인간)를 지어서 이 존재로 하여금 이 땅에 살면서 선악과를 따먹는 타락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계획과 설계가 들어있는 것이고, 영원 전에 이미 예정 계획된 그 과정과 순서대로 일호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니 이로 인해 당신의 백성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부랴부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을 하기 그 이전 영원 전서부터 당신의 의중 속에서부터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리시는 그 천국을 당신처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그 목적을 위해 인간을 이 땅에 지어서 타락을 허용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이 땅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사건과 환경을 겪으면서 천국을 하나님처럼 다스리고 누리고 쾌락할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해서, 하늘나라에 데리고 올라가서 그 실력대로 하나님처럼 그 나라를 누리고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예정 계획 설계 결과까지 다 설정을 하신 것이고, 그 설정대로 마지막 날까지 그대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계획한 그대로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처럼 만들어져서 신령천국서 누리는 것까지를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를 한 마디로 대국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게 다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것이니 내가 이렇게 되는 그 설계가 그리스도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실력적으로 그리스도로 만들어지도록 설계가 되어 있고,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이치나 과학적인 법칙 등 모든 게 그리스도로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건 만물이 돌아가는 게 그리스도의 설계를 떠나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쳐다보면서 거기에서 영적 도리와 이치를 깨달아 나가면 그리스도의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이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예정 계획 설정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건이 아무리 복잡하게 돌아가도 거기에는 주님처럼 만들어지는 그 설계 그 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안 믿으면 벌 받는다 할 때 벌을 받는 것은 단순히 안 믿어서만이 아니라 네가 그리스도의 설계대로 안 만들어졌으니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안 믿는 자도 믿는 자들의 이룰구원을 위한 보조물로서 그리스도로 통한 설계대로 일반은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구원사역이 끝이 나면 이 세상을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원칙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자를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되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그 사람 그 기준 그 위주로 세상은 돌아가고, 사건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사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전부는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온 천하 만물의 사건이 당신을 위해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이 주후 2012년인데, 말하자면 이게 예수님의 나이이니 이 세상은 이 예수님을 기준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덩달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위해서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보고 말씀했습니다. ‘등불을 켜고 돌아봐라. 의인 하나가 있으면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바싹 따르며 믿는 성도를 위해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고, 대한민국도 그런 성도가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고, 저 이북도 믿는 자들로 인해서 먹고 마시는 혜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그렇게 사는 기준, 이렇게 진행이 되는 역사의 기준, 진리를 깨닫는 이 기준을 알고 믿고 있습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영적인 이 도리를 모르면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망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개념(8)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먼저 사건이 선행이 됩니다. 그러니까 에를 들면 사람이 물에 빠졌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와서 물에 빠진 그 사람을 건져주었을 때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지옥에 가게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건져서 천국에 가게 했다고 하는 이 구원 역시도 먼저 사건(선악과 따먹는 사건)이 있고 난 뒤에 거기에서 구원해주는(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피공로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져낸 것) 것이니 이 역시 세상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건이 먼저 있고 난 뒤에 그 후에 구원을 해주는 그 구원의 개념과 이치가 똑같은 것입니다.

 

성경으로 보는 구원의 개념은 인간을 만들기 그 이전, 인간이 타락하기 그 이전에 먼저 하나님처럼 만들어진 사람으로서 천국에서의 누림 이게 딱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먼저가 아니라 목적이 먼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 나를 만들기 이전에 장차 나를 지어서 당신처럼 천국에서 당신과 함께 누리게 하려는 그 목적이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천국에서 독존하시는 하나님의 의중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놓고 앞에서 말한 것을 대비시켜 보면 교회 안에는 기독교 특수적인 구원의 개념이 있고, 또 하나는 기독교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의 개념이 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지옥에 가게 되었으니 거기에서 예수님의 피공로로 구원해서 천국에 가게 한다고 하는 기독교 보편적인 구원의 개념은 일반세상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구원의 개념을 세상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과 똑같이 갖고 있는 사람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영원 전서부터 설정되고 진행이 된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구원이라는 이게 딱 잘려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시간과 상관이 없는 영원 전에 설정이 된 목적적인 구원이 있고 또한 마지막에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는 구원이 있는데, 이 두 구원 사이에 창조,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시간 속에 들어있는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원 사이에 들어있는 사건들은 궁극적 최종적 목적적 결과적인 구원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어라 하는 건 구원의 시작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과정입니다. 이 궁극적인 구원을 전제로 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영원 전 설정한 그 구원이 마지막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되 이렇게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가지셨던 하나님의 그 마음을 성경에서 보고 그에 맞게 성경을 해석을 하고, 이 세상도 그에 맞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가지셨던 나를 위한 궁극적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그러지를 않고 성경의 부분적인 것만 갖고 말을 하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하건 하나님의 영원 전에 계획하고 목적한 걸 모르게 되고,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떠들어도 영원 전서 된 걸 모르고 믿으니 지옥에 가게 생겼는데 천국에 가게 한다고만 얕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을 했으니 구원해준다고 아는 것과, 영원 전서부터 나의 구원이 설정이 돼 있고 그 설정과 계획대로 세상역사는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신앙하는 것과는 그 결과가 천지차이가 됩니다.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신앙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오셔서 병자도 고치고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한 것들에 대해 해석을 할 때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으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신앙에서는 이룰구원으로 들어가 있는 현재에서 자신이 예수님으로 실상화 자체화 돼나가는 하나님의 온전은 다 까먹고 말게 됩니다.

 

앞의 과정은 모른 채 중간의 과정만이 전부인 것처럼 말을 하게 되면 선악과와 생명과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이 죄를 짓게 했느냐 하고 자꾸 이유가 붙게 됩니다.

 

이룰구원의 실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들의 말대로라면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과를 계속 먹었으면 인간은 그 에덴동산에서 안 죽고 계속 살 것이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는 이론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구속사적 구원론의 관점으로 볼 때 얼마든지 이단성이 들어있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영원 전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이 구원의 개념은 그동안 남들이 주장하지 않던 어떤 이론을 새롭게 펼치는 하나의 새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해 가지신 궁극적인 뜻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깨달음이며, 또한 그 하나님의 뜻에 보다 더 적중하게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효과적 효율적 효력적 능률적으로 이뤄갈 수 있는 귀한 교훈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