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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의무와 책임(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

열려라 에바다 2023. 5. 4. 14:15

성도의 의무와 책임(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

.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

 

하나님께서는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무슨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아무 목적이나 뜻도 없이 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도 여러 만물들을 짓다보니 그 만물 가운데 인간도 있어야 하겠기에 그 만물들 중에 하나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특수하고 분명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 하에서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1. 인간창조의 원인(原因) - 사랑.

하나님께서는 절대자요 완전자요 선성(善性)과 애성(愛性)이 충만한 분이신데 이 선성과 애성은 그 속성(屬性)상 상대성(相對性)을 가지는고로 이 애성은 필연적으로 상대성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애성의 인격적 속성에 의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누리시던 쾌락과 향락의 극치인 천국을 당신과 함께 누릴 존재를 만들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니 하나님께서 애성적 인격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인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인간창조의 동기(動機) - 천국.

자존자요 독존자요 영원자요 생존자요 인격자요 무한자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나라는 무한한 곳이요, 영원히 새로운 곳이요, 완전한 신령계로서 하나님께서 그곳을 최고의 극치의 쾌락과 향락을 완전하고도 충만하게 누리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 혼자 그곳을 누려도 족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인 애성과 선성의 발작으로 인해 그 좋은 신령계를 당신 혼자 누리길 원치 않으시고 타 존재와 함께 인격적 애정적 수수 관계적으로 누리고 싶으셨으니 그 대상자로 인간을 짓게 된 동기가 된 것입니다.

 

3. 인간창조의 목적(目的) - 천국의 누림.

대개는 인간타락 후부터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본격적으로 된 것으로 보는데 이렇게 주장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좀 모자라는 인격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굳이 인간이 타락 후에 구원사역을 할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에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인간이 타락하지 않도록 지었다면 복잡하고 힘들게 두 번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인간이 타락할 것을 하나님께서 예상하지 못하고 지어놨는데 인간이 그만 타락을 해서 할 수 없이 구원사역을 다시 수행하셔야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은 만물을 짓기 전, 인간타락 이전, 영원 전서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자요 완전자요 세밀하신 분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시던 목적이 없는 일을 행하실 리가 없습니다. 인간창조 역시도 분명한 목적 하에 하신 것입니다.

 

(1) 후사()를 삼으려고(1:5, 3:6-).

하나님은 모든 면에 완전 무한 충만하신 분이므로 신령계에서 독존자로 계신다고 해서 부족이나 불행이나 고독함이나 쓸쓸함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격성과 애성과 선성으로 인해 그 좋은 천국을 당신 혼자 누리시기에는 인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너무나 좋고 아까워서(?) 함께 누릴 어떤 상대를 지어서 그로 하여금 그 나라를 당신과 함께 누리고 다스리고 즐거워할 수 있는 후사로 삼아 당신이 현재적으로 그 나라를 통치 지배 활용 사용하며 누리는 것처럼 당신의 애성의 상대자도 함께 누리도록 하려고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하나님의 , 주권, 소유권, 활용권을 줘서) 여기서 후사라는 말은 하나님 당신이 죽고 나면 대를 이어 어떤 일을 맡기신다는 의미에서의 후사가 아니라 당신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2)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를 삼기 위해서.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각이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아가페 사랑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단어학 사전학 원어(原語)학적으로는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이라고 하지만 성경이 계시하는 아가페는 생명적 무조건적 다양적 복합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에게서 이런 여러 사랑의 맛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이 사랑을 입은 성도가 천국에 가면 부모 형제 친구가 필요 없이 모두가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관계로 신령계에서 주님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로써 극치의 기쁨을 영원히 누리게 해 주실 목적으로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4.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도모 하에 지어졌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분명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 하에서 인간을 지으시되 다른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지으셨는데, 성경에 계시한 대로 보면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특별도모가 없이 지었지만 인간을 지으실 때는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특별도모(圖謀) 하에서 지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직접 천국에서 지어서 그 천국을 당신과 함께 영원히 누리도록 하시지 않고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지어 이 땅에서 살도록 하신 후에 그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인간이 보기엔 번거롭고 불필요한 일 같지만 완전한 분이요 선이요 사랑이신 분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천국에 데리고 가서 살게 하시는 것이니 만큼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요, 인간에게 가장 유익이 되므로 이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독존하시던 그 신령계를 인간에게 영원히 유업으로 주셔서 그 인간이 하나님의 자권(子權)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적 총애를 받으며 천국을 마음껏 누리며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선하고 좋기 때문에 이 방법을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1)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신 이유.

어떤 사물을 보고 기쁨과 만족을 누린다거나,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추진하는 것은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인격자만이 가능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 인격성(神格)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곳을 통치하고 누리고 기뻐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당신이 속성적으로 가지신 선성과 애성에 의해 인간을 지으시되 이 인간이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천국을 당신과 같은 차원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신과 같은 인격자로 지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 천국을 돼지에게 준다고 하면 이 돼지에게는 천국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적응이 되지 않아 온통 고통뿐인 것처럼 인간을 지어서 천국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그 천국을 만드시고 통치하고 누리시는 하나님의 그 인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인간에게는 천국이 아무런 기쁨도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천국을 하나님 당신처럼 다스리고 누리고 통치하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가지도록 하려면 하나님 당신의 그 인격성을 닮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인격성을 닮은(닮을 수 있는) 인격성자로 지으신 것입니다.

 

(2) 인간이 이 땅을 거쳐서 천국에 가는 이유.

인간을 인격자로 지어서 이 땅을 거쳐 가도록 하신 것 역시 당신의 선성과 애성에 의해서인데, 모든 인간을 똑같이 지어 바로 천국에서 살도록 한다면 그 인간에게는 천국의 기쁨성 쾌락성이 축소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애성과 선성의 속성상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지으시되 이 땅에 살면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닦아 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자로 짓게 되면 자연적으로 격차성(格差性)이 생기게 되는데 이 격차성은 조물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쉬운 예로 든다면 남이 그냥 줘서 얻는 것보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게 더 기쁘고 보람을 더 느끼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모두가 100점을 받아 다 같이 1등상을 타는 것보다는 내가 남보다 더 노력을 해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최고 점수인 100점을 받아서 여러 사람 앞에서 나 혼자서 1등상을 받는 것이 더 기쁘고 보람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천국을 누리되 가장 극치로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을 인격자로 지었고, 이 땅에 살게 했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서 신앙의 격차가 생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앙싸움을 싸우지 않아 남보다 주님을 많이 닮지 못했고, 그 결과로 천국에서 다른 성도들보다 천국의 누림성 면에서 뒤떨어진다 해도 남 탓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본구원, 즉 중생에 관한 말이 아니고 중생한 자로서 성화구원 면에서의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특수한 목적이 있으셔서 특수도모로 지으셨는데 특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격자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격성 중에도 특별한 것은 인간이 성품과 속성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을 닮게 되고, 마귀를 가까이 하면 마귀를 닮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감염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닮든지, 마귀를 닮든지 하는 그 관건은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면서 닥치는 모든 사건 환경 속에서 내가 하나님 쪽을 택하느냐, 마귀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자에게 있어서 옳은 교훈을 받고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천국에 간다고 무조건 그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만드시고 통치하고 100% 누리시는 그 하나님을 닮아야 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처럼 그 세계를 누리고 다스리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며, 많이 닮으면 닮을수록 그 기쁨은 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먼저는 예수님을 믿고, 늘 하나님 쪽을 택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이유.

이런 인간으로 창조하셔서 아무 곳에서나 살게 하지 않고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거기에서 살도록 하시고, 앞에서 말한 바대로의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목적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의무와 책임을 주셨는데 이렇게 하심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게 하려 하심도 아니고, 또한 인간을 부려먹고 이용해먹고, 당신이 영광이나 받아먹으려고 하신 것도 아니고 이 에덴동산에 살면서 신령계인 천국을 하나님처럼 마음껏 누리고 다스리며 하나님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실력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라고 했으니 지상 최고의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곳에 살면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텐데 그것은 모른 채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겠지 하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그렇게 생각하는 세상 그곳(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곳)이 하나님께서도 최고의 좋은 곳이냐 하는 점입니다. 아담 자기 생각에 최고의 곳일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그 에덴동산이 영원한 신령계를 계시적으로 가장 잘 깨달을 수가 있는 최고로 좋은 곳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 내가 누리기에 좋은 곳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대로의 인간이 최종적 궁극적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깨닫고 얻고, 그 나라를 준비할 수 있는 장소로써의 최고로 좋은 곳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신 것입니다. 옛날 아담에게만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최고로 좋은 곳을 다 주었으니 우리들에게 있어서 에덴동산은 곧 자기의 모든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면 그곳이 에덴동산이니 나의 모든 현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곧 에덴동산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불행한 사건이요 현실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세상 어느 곳이건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그곳이 곧 에덴동산입니다.

 

앞에서 생각해 보았듯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게 하려고 한 것이 인간창조의 본래 목적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그러했었는데 인간에 의해 그것이 파괴되었다면 하나님의 전지성과 완전성 역시도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만도 못한 하나님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도록 하신 것은 후대 모든 인간에게 주실 계시목적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본래의 그 목적을 바로 알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의무와 책임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의 의무.

 

에덴동산을 막연히 주신 것도 아니고, 막연히 살라고 한 것도 아닌 거주함에 있어서 의무가 있는데 인간이 이 의무를 모르면 낙원과는 영원히 상관이 없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의무성을 깨닫고 이 의무대로 살면 그것이 자기의 현재적 미래적 낙원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살게 될 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천국을 하나님처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실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 목적대로의 삶인 것입니다.

 

1의무: 은밀계시를 잡고 살아라(목적성).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성문계시(성경)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즉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나를 왜 여기에(이 세상에) 살게 했는가 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누릴 목적으로 살라는 말인가,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라는 말인가, 나의 영적인 기능 지능 인격적 온전을 위해 살라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에덴동산을 주셨는가, 왜 이 현실을 주셨는가 하는 이것을 아는 것이 은밀계시를 아는 것인데 그것은 구원을 이루라고, 영적 실력을 배양하라고,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닮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는 나에게 처해진 현실이 나의 믿음실력을 키우라고 준 것임을 몰라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그를 좋아했고, 미워하는 사람이 오면 원망 불평했고, 현실이 내 마음에 안 맞으면 원망 불평이 나오고 남에게 탓을 돌리고 했었다면 예수 믿는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건 환경이 오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 즉 나를 하나님을 닮게 해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최고의 극치의 기쁨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적 실력을 키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그 은밀하신 뜻은 모른 채 나 좋도록, 내 계획대로 사건 환경을 바꾸어 주고, 갖다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잡지 못한 것이고, 하나의 패역일 뿐입니다. 오늘날 기독자들 대부분이 이런 식의 신앙을 지지하고 있고, 이런 식의 신앙이 교회 안에 팽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2의무: 거처의 의무.

이 낙원(자기의 현실)은 구원을 이루기에는 세계 어느 곳보다 가장 좋은 곳이므로 이 현실 속에서 자기의 현실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제 1 의무인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잡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밀계시(의지계시)를 저버리면 불만이 나오게 됩니다.(누리자는 주의) 아담은 첫째 의무(은밀계시를 잡고 살아라)를 저버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두 번째 의무도 저버리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현실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입어가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누리는 목적으로 살다보니 현실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정적인 동기는 인간으로서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사는 것에 대해 만족이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여기(에덴동산)에서 살아라 한 것은 영원히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온전자가 되어 천국에 오라고 하는 은밀계시가 있는 것인데 이 은밀계시를 모르고 버리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까 하고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나온 것이고, 이에 따라 현실불만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계시적인 면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서는 심신(心身)이 하나님의 영에게 결합이 되어 살아야 하는 것인데 몸은 에덴동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에덴동산을 떠나 다른 곳에서 만족을 누리려 한다면 이는 제 2의 의무수행을 어긴 것입니다.

 

오늘날 나에게 마련해 주신 이 환경, 현실이 에덴입니다. 여기에서 은밀계시를 붙잡지 못하고 마음이 이탈하면 에덴에서 살 자격박탈입니다.

 

현실불만 죄, 이것은 죄가 최초로 들어온 과정이요 순서입니다. 이것을 통해 범죄의 과정의 순서를 깨달아 사전에 죄를 차단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의 기원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사건으로부터가 아니고 그 이전에 하나님의 은밀계시(의무성)를 버린 것에서부터입니다.

 

거처의 의무를 다하라는 말은 현실에 대해 만족하라는 것인데 자기 자체에 대한 만족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현실에 대해 은밀계시를 깨달아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환경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그 현실은 각자에게 가장 잘 맞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데는 현재 처해진 그 현실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 은밀계시를 붙잡고 자기 자체를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하나님의 성품을 닮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왜 이 환경을 나에게 주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던, 어떤 일을 만나든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 현실에서 맺을 게 다 날아갑니다. 마귀의 속셈은 현실을 다 날려버리는데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주어져 있으니 그것은 천국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체적 자기를 잘 만들어 오라는 것인데 그것을 다 까먹게 하는 것입니다.

 

3의무: 통치하라(다스려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 순종도 의존도 동화도 지배도 받지 말고 통치하라고 했습니다. 통치하라고 할 때는 통치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 것입니다. 이 통치를 하는 것이 순종이요, 반대로 통치를 받는 것은 불순종이요 죄입니다.

 

하나님의 온전성을 입어 가는 데는 이 낙원동산(주어진 현실) 이상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통치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은밀계시를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모르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나오게 됩니다.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의존적 피동적으로 살면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게 통치를 받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다스리라고 했지만 현실에 대한 불만이 나오면 그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순서로는 (1)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2) 몸을 다스리고 (3)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됨 (4) 이렇게 되면 만물을 다스리게 됩니다.

 

(1) 마음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자기가 자기를 다스려야 하는 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만 다스리면 딴 것은 다스리기가 쉽습니다. 이게 안 되면 남을 못 다스립니다. 자기 마음을 가만 내버려두면 자기 몸은 막 돌아다닙니다.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능력자요 유능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진리를 따라야 하는데 돈을 따라다니고(목적이) 세상을 따라다니면 우리 마음은 쓰레기통이 됩니다.

 

(2) 몸을 다스려라.

눈 코 입 손 발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안 다스려 놓으면 마음이 몸보고 가자고 합니다. 눈도 발보고 가자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입을 징발(徵發)하고, 귀를 징발하고 자꾸 죄 짓는 대로 나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행동 이전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만물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4의무: 지켜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통치만 하게 한 것이 아니고 또 수호적(守護的) 의무를 명령했습니다.

 

(1) 외계의 것이 내계로 침범해서 들어오는 것을 막.

 

(2) 내계의 것이 생명권 외계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자기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통치하게 되면 염려가 없으나 이 일이 중단이 되면 지킬 힘도 없어지고, 통치권도 박탈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들어와서는 안 될 그 어떤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는데, 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못 했습니다. 지키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죄입니다.

 

내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내 소원 목적 취미 모두는 생명외계로 탈출을 하게 되니 이것이 나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자기의 자체의 것이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외부의 잡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특히 정신적 신앙 면에서 옳은 신앙정신이 나를 다스려야 하고, 또한 내 속의 옳은 것이 나를 떠나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밖의 잘못된 정신 사상 소원 목적(세상 것)이 내 속에 들어와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내 속에 진리말씀이 충만하고(은밀계시) 그것으로 만족해야 인격 면이 고상하고 깨끗해집니다.

 

5의무: 따먹어라(생명과).

하나님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부터 말씀을 합니다. ‘다스려라 따먹어라 하는 것은 긍정적 적극적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구원 까닭입니다. 생명과와 일반과를 먹고, 신앙양심에서 나온 아름다운 생각 미덕 행동을 하라는 말입니다.

 

 1 의무를 지키면 2, 3, 4, 5의 의무는 자연적으로 지키게 됩니다. 내가 먹기 좋은 과실을 먹을 때는 영이 진리가 양심이 방해치 않습니다. 기독자가 영원히 먹을 것은 생명과입니다. 우리는 나의 영에, 나의 양심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 영이 찬성하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이 자라나고 튼튼해지고 지혜지식의 깨달음이 자라게 됩니다.

 

6의무: 먹지 말라(선악과).

이 과실은 선과 악이 함께 들어있는 과실도 아니고, 과일 자체 속에 선이 들어 있다거나 악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과일을 따먹으면 그 결과가 선을 아는 일에 주관적이요, 자율적으로 되는 것이니 이 열매는 과연 금단의 열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보다 따먹기 이전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린 그것이 죄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에덴동산에 두신 목적을 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리고 나면 현실을 왜 주었는지를 모르게 되니 현실에 대한 불만이 나오게 됩니다. 불만이 나오는 것은 현실에서 누리려고 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현실불만은 현실태만이 되는 것입니다. 다스리지 못하면 지키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지면 뱀(마귀)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여자가 다스리게 되고, 여자는 뱀에게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스려야 할 자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아담에게 주었는데 그 때 아담은 어디 가서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아담이 딴 데 안 가고 하와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옆에 있었던 없었던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하게 있었다면 하와가 주는 것을 받아먹었겠습니까? 결국 선악과를 따서 건네준 하와 탓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주는 것을 받아먹은 아담 자기 탓입니다.

 

내가 세상 사는 목적을 선악과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을 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세상 것을 취하면 나의 삶의 기준과 척도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아담 타락 이후의 인간의 타락된 주관에서 나온 하나님과는 이질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게 되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려 자기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이나 영광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5대 의무를 수행치 못하면 필연적으로 제 6대 의무인 생명과를 따먹는 대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이것은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한 성문율(成文律)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문율을 어기는 물행(物行)만 죄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에 비추어 무형행(無形行), 심행(心行)에서부터 죄가 되는 것임을 알고 그 죄를 짓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생명과를 따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 에덴동산에 거처하라, 다스려라, 지켜라 하는 것은 모두가 성문계시입니다. 이 성문계시 이면에는 은밀계시가 있습니다. 이 은밀계시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성문계시를 표면적으로 지킨다고 해도 바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문계시 이면의 은밀계시를 붙잡고 성문계시를 하나하나를 지켜 나가면 은밀계시를 지키게 됩니다.

 

보수계열에서 흔히 성경에 기록된 액면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성경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액면 그대로 지키려면 지금도 그 치수대로 방주를 지어야 합니까? 오른 손이 범죄하면 손을 잘라야 합니까? 고로 우리는 성문계시 이면의 은밀계시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은밀계시를 지켜야 합니다.

 

. 에덴에 흐르는 네 강.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으로서 이 6대 의무를 다 행하게 되면 이제 그 앞에는 강()이 있으니 이 강을 통하여 수입(은혜)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네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을 기록한 것은 지형적 위치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며, 낙원의 위치를 가르칠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계시목적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계시적으로는 조금도 오류가 없이 가장 적합하게 기록이 되었지만 역사적 지리적 사회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 중 8절에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아마샤가 웃시야를 낳았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는 맞지 않으나 계시적인 면으로 기록을 하자니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1. 비손강(쏟아진 물, 즉 풍성하게 흐른다는 의미): 이 강 바닥에는 정금 베들리엄 진주 호마노 등의 귀중한 보배들이 있지만 그 위로는 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바닥에 있는 그 보석들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는 그 강 속에 있는 보배를 채취할 것입니다. 이 강을 그냥 보면 하나의 흐르는 강일뿐이지만 그 흐르는 물속에서 이 진주를 캐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손강의 이 보물은 6대 의무를 다 마친 자가 가지게 됩니다. 흐르는 세월, 흐르는 사건 속에 정금 진주 호마노가 있으니 이것을 무진장 캐내서 자기의 황금보석 진주 집을, 즉 믿음건설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사건 환경 속에서 강물이 흐르듯이 세월이 흐르는데 이 세월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금이라고 하는 것은 값도 비싸고 인간들이 최고로 치는 것으로 이 금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은 큰 수입을 보는 것처럼 강처럼 흐르는 이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통치하라고 하신 6대 의무를 잘 행하고 나가면 자기가 최고의 신앙의 수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가 은밀계시를 잡은 자입니다.

 

2. 기혼강(분출하다):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분천으로 지금의 아프리카에 있는 에티오피아 지역입니다. 지금은 이 기혼강은 없어졌으나 나일강이 기혼강의 지류로 남아 흐르고 있습니다.

 

이 강은 굴곡이 많아서 강물이 급류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물이 맑지 못하고 많은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따라서 강물에 오물이 떠내려가다가 강굽이에서 걸리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가라앉아 썩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썩은 것, 썩을 것이 없습니까? 내 속에 썩은 것(세상적인 정신 사상)이 들어 있는 채로 종교생활을 잘 하고, 교회 일에 열심이고, 충성봉사를 잘 하면 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칭찬을 할지라도, 그래서 믿음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어둠침침하고, 냄새 나고, 썩은 것들뿐입니다.

 

내 속에 세상정신과 사상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나에게 종교적인 명예와 세상명예 영광 부요 권세를 갖다 주었다 할지라도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상 것이요, 물질적인 것이요, 언젠가는 불타고 썩고 냄새나고 없어질 것들이므로 천국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내 속에 있으면 모두 걷어내 버려야 합니다.

 

3. 힛데겔강(티그리스강)(‘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는 의미와 척박하다, 방해하다는 의미): 오늘날의 터키지방에서 발원하여 이라크지역을 흐르고 있는 강으로, 이 강은 바벨론 평원을 흐르며 그 부근을 윤택케 하며, 유브라데강과 병행해서 흐르다가 190킬로 지점에서 두 강이 합류해서 바사만(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갑니다. 이 강은 유브라데강과 더불어 메소보다미아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이름처럼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로 갈라진 이스라엘이 이 힛데겔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앗수르와 바벨론 나라에 의해 각각 멸망을 당하게 돼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이스라엘 땅은 황폐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강은 급류로 흐르는 강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이 강에 빠지면 전부 강물에 떠내려가기 마련입니다. 인생의 6대 의무를 다하여 비손강으로 살지 못하는 인생은 그의 시간도 정력도 경제도 자기의 모든 소유도 힛데겔강처럼 세월의 급류에 다 떠내려가니 자기의 영광된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나의 보석들이 빠져 달아나는 것은 영원히 사망계로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류로 흐르는 물에 무엇이던지 빠지면 건지지 못하듯이 한 번 세월에 떠내려간 것은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간도 정력도 경제도 흘러가고 다 떠내려갑니다. 마지막에는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6대 의무를 지켜 나가면 흐르는 세월 속에서 금을 캘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열두 진주문의 믿음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옳은 말씀의 깨달음을 받으면 떠내려가지 않게 되지만 잘못된 곳에 들어가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되면 자기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충성봉사한다고 하지만 충성봉사하는 그 지식이 빈약하고 이치가 틀리므로 자기가 한 모든 충성봉사는 다 도둑을 맞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열심히 충성봉사하는 그 자체는 좋은데 교회와 교훈을 분별하는 지식이 없으므로 자기는 한다고 했는데 그 나라에 가서 보면 전부 다 사망계로 흘러가 버린 것을 알고 자기 가슴을 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한 후회만 있을 뿐 그 나라에서는 다시 회복할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4. 유브라데강(맛이 달다, 풍요라는 의미): 오늘날유브라데스라고 부르는 강으로서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터키, 시리아, 이라크를 흘러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앞서 살펴본 힛데겔강, 즉 티그리스강과도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서 오늘날 이 강을 티그리스 유브라데스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브라데스강이 본문에 나오는 유브라데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유브라데스강은 그 이름의 의미처럼 티그리스강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강은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언약으로 주신 경계의 강입니다. 이 강을 표준하여 이남(以南)은 이스라엘이고, 이북(以北)은 이방나라 앗수르입니다. 그래서 이 유브라데강은 분명히 하나이지만 이름도 둘이며 소유자도 둘입니다. 그러니까 이 강은 이스라엘 강도 되고 앗수르 강도 되지만 두 나라를 경계하고 있는 강이므로 어찌 보면 두 나라의 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범죄를 하면 그 백성을 강 건너에 데려다 놓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를 하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해서 70년간 종노릇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천국과 세상, 영과 육, 영원과 임시, 참과 거짓을 명확히 가르고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행동적으로 죄를 짓기 이전이라도 사상과 정신적인 면에서 명확히 가르며 살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을 죄로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강은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지으라고 하는 강입니다. 이 경계가 뚜렷하지 못하면 이방세력에 잡아먹힙니다. 혈통은 유대인인데 겉으로는 이방인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뚜렷한 경계를 짓고 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예수 믿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의 정신 사상 습관 전통을 보면 불신자와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내가 만물을 다스려야 하는데 범죄를 하게 되면 만물이 나를 다스리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우주만물을 발로 밟고 살아야 하는데 만물이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다스리게 되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형국이니 이런 나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적으로는 우리의 머리는 하나님이요, 만물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데 이용하는 발등상이고, ()적으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이웃의 구원을 이루는 면으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인데 순서적으로나 순위적으로 이것이 바뀌거나 경계가 희미해지면 타락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바로 지으며 살아야 합니다.

 

. 결론.

 

이상과 같이 인간 모두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자신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고, 이를 위한 의무와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인간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목적을 바로 알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행복한 삶이요, 영원한 미래를 바로 준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해야 할 일도 바로 이것을 알려주고 선포하고, 목적적으로 이 일을 위해 모든 가견적인 활동이나 사역들이 진행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닌 것은 모두가 거짓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 종교계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을 받고 이름을 날렸다고 해도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모두는 언젠가는 반드시 날아갈 것들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그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대신 언젠가는 반드시 배신을 하고 자신을 통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