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호세아서

열려라 에바다 2023. 6. 5. 10:56

호세아서              

 

 “소예언서”라는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소예언서”는 이들 열두 사람의 예언서가 지닌 중요성이 대수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만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같은 다른 대예언서들보다 그 길이가 짧아서 붙여진 이름이다.1)
 
<소예언자들의 사역 지역별 구분 표1>

이스라엘 유   다 이방민족
호세아


아모스


미  가
 
요  엘 
하박국 
스바냐 
학  개 
스가랴 
말라기 
 
요  나(니느웨)


나  훔(니느웨)


오바댜(에  돔)

 
<소예언자들의 사역 시대에 따른 구분 표22)>

주전 8세기 주전 7세기 포로기 포로기 이후
호세아
아모스
미  가
요  나
나  훔
스바냐
하박국
오바댜(주전 6세기) 학  개(주전 6세기)
스가랴(주전 6세기)
말라기(주전 5세기 중반)
요  엘(주전 6세기 후반경)

 호세아서
 
  선지자 호세아
  호세아는 주전 8세기에 예언한 사람으로, 책의 표제에서 그는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1:1)라고 소개한다. 호세아 선지자는 브에리의 아들이요.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주전 793~753년 기간에 통치함) 웃시야가 유다의 왕으로 있던(주전792~740년)시기에 선지자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이름 ‘호세아’는 구약시대에 흔한 이름이었으며, ‘돕다’ 또는 ‘구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민 13:16의 여호수아: 신 32:44). 이 이름은 ‘구원’을 의미하는 히브리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헬라어로는 예수(Jesus)라는 이름의 형태이다(마1:21). 호세아의 예언 사역은 유다의 왕들인 요담(주전 750~731년)과 아하스(주전 735~715년)와 히스기야의 통치시기(주전 715~686년)의 어느 한 시점에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표제는 여로보암 2세의 뒤를 이은 여섯 명의 이스라엘 왕들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호세아의 시대적 상황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는 보통 북왕국 이스라엘의 ‘황금기’라고 불린다. 국가적 정치 경제의 재부흥의 근거는 여로보암의 아버지 요아스에 있었다. 그는 이미 세 번의 연속적인 원정 전투에서 시리아나 아람에 대하여 승리했으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을 외국 세력의 굴욕과 압박에서 해방시켰다.
여로보암 2세는 선친의 군사 팽창 정책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 확보했던 동북쪽 경계선3)
그러나 때가 되자, 여호와 하나님은 적절하고 ‘합법적’ 은유를 사용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셨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고발 내용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확실한 판결 내용을 선포했다(4:1-6). 부유함과 번영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속화된 그들의 이기주의와 자만, 그리고 욕심 등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타락으로 몰고 갔다(9:9). 철저한 사회적, 도덕적 부패가 뒤따른 것이다(4:2, 18; 6:8-9; 7:1).
한층 심각한 부패상은 이스라엘의 배교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동쪽 바람’-이것은 그들의 얼빠진 외교 정책을 비꼬는 말이다-을 따랐다. 또한 바알신을 따르고 음행과 ‘큰 악’을 몇 갑절이나 더 행했다(10:15 7:16; 12:2; 13:1-2).
여로보암 2세 사후의 북왕국의 급격한 쇠퇴는, 호세아의 말씀을 더욱 시급한 경고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왕위를 찬탈하고 계속 궁중 살해 사건이 일어남으로 정치는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3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6명(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의 왕 중 4명(스가랴, 살룸, 브가히야, 베가)이 혁명으로 살해되었다.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앗수르에 생포되어 갔다(왕하 17:6).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사마리아의 왕들은 “물위의 거품”처럼 멸망했다(10:7).
앗수르나 이집트, 그리고 유다에 의해 가해진 외부적인 압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리석은 동시에 필사적인 외교 정책을 취하게 했다(7:11). 다음과 같은 일련의 치명적인 정치적 실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결국 자멸을 초래하게 되었다.
  첫째, 므나헴이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조공 국가가 되도록 하여 디글랏 벨레셀에게 매년 조공을 바침으로써 임박한 침공을 피해 보려고 한 것이다(740년 B.C: 왕하 15:19).
  둘째, 유다가 앗수르에 대항하여 형성된 이스라엘-아람 동맹군에 가담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베가가 계속 유다를 침공한 것이다(B.C. 735년: 왕하 16:5-9).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는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써 디글랏 빌레셀의 도움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베가는 유다를 앗수르의 조공 국가로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아람 동맹군(734-732 BC)을 대적한 앗수르의 원정으로 그들을 단숨에 무너졌다(왕하 15:20; 16:9). 따라서 앗수르인들은 갈릴리와 요단강 건너편 지역의 모든 이스라엘 영토를 빼앗고, 여러 성읍들을 포위했으며, 상당수의 인구를 메소포타미아로 생포해 갔다.
  셋째, 호세아왕이 이집트와 손을 잡고 앗수르에 대항하려 했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가의 운명은 결정적이었다. 앗수르 군주에게 바칠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써, 왕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직접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앗수르는 이 조공 국가의 배반에 대해 이스라엘의 정치적 역사가 끝나도록 대응했다. 사마리아는 약탈되었고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은 북 메소포타미아에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철저한 속국이 되었다(B.C. 724-722. 왕하 17:1-6).
  호세아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은 여로보암 2세 말엽 및 남왕국의 웃시야 시대에 시작되어서 남왕국의 히스기야 시대 초엽에 종결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사역은 북왕국과 남왕국이 공히 팽창과 번영을 누리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앗수르는 자신의 북쪽 및 동쪽 경계선에 발목이 붙잡혀 있었으며, 아람인들 역시 약화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보통 북쪽 경계선에서 항상 존재하고 있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왕하 14:25).  호세아는 북왕국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 북왕국에서는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정치적인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 이후의 시대는 또한 앗수르가 다시 강력하고 공격적이 되는 시대였다. 이 앗수르는 먼저는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서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살만에셀 5세에 의해서 영도되었는데, 이 후자는 사실상 주전 722년의 북왕국의 완전한 패배와 병합으로 이어지는 갈등을 야기시킨 인물이다.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여로보암 2세가 사망한지 얼마 안되서 서쪽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첫 번째 침공은 주전 738년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하맛을 차지했다.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므나헴은 조공을 바침으로써 이 침략 의욕을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왕하 14:19-20).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서쪽으로 돌아온 것은 사년 후였는데, 그동안에 반앗수르적인 성향을 가진 왕위 찬탈자 베가가 므니헴의 아들 브가히야를 살해했다(왕하 15:23-25).
  베가와 시리아의 르신은 앗수르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 당시 아하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유다의 도움을 원했다. 아하스가 반 앗수르 연합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자 베가와 르신은 그가 가입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그와 전쟁을 벌였다(주전 735년경). 아하스는 디글랏 빌레셀에게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에서 구해줄 것을 간청했고, 앗수르 왕이 북왕국을 공격함(주전 733년경)으로써 북왕국의 일부 거민들이 유배를 당하였다.
  호세아의 많은 신탁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시작부분에 하나님께서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 집에”(호 1:4) 갚을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 이 신탁은 여로보암 2세의 시대,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이자 이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가 살룸에게 암살을 당함으로써 예후 가문의 종말을 고하기 직전에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왕하 15:8-12)4)
 
  내용분류
  1~3장은 고멜을 다루는 호세아의 행동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으로, 이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물교육
  4~14장은 예언자의 오랜 활동 기간의 서로 다른 시기에 생겨난 듯한 설교들5)을 모아놓은 것
 
제멋대로인 아내를 회복시킴(호세아)
 
  호세아의 가정사(1:1~2:1)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하신다(2절). 이것은 하나님께 불성실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물교육이다. 여기서 호세아는 속을 뒤틀리게 만드는 이 현실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맡고, 그의 아내 고멜은 음란한 이스라엘의 역할을 하며, 자녀들은 자기 백성을 배척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이름들을 받는다.
  2절의 “음란한 여인”이란 고멜이 남편 호세아에게 불성실하게 행동한 것으로 이스라엘이 자기의 “남편”이신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실물 교육에 해당된다. 호세아의 아내가 그를 속이고 결혼 서약을 어긴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과 더불어 맺은 계약을 깨뜨렸고 영적인 간음을 행한 것이다(2:2; 4:12; 5:4).
  호세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자신과 고멜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준다(3~4절). 이 이름은 이스라엘의 왕조가 붕괴될 것임을 나타내는 징조이다. 주전 841년에 예후는 하나님과 예언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이스르엘에서 폭력적인 쿠데타로 권력을 쟁취해 주전 885년부터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이스라엘 왕조가운데 가장 악이 극에 달했던 오므리 왕조를 뒤엎는다. 예후는 아합 왕의 후계자인 요람을 이스르엘 성벽 밖에서 그의 심장에 화살을 쏘아 죽인다. 또한 왕궁 시종들을 통해 이세벨을 창밖으로 던져 말에게 밟히고 개에게 먹히게 한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왕실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합의 아들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로 가져오게 하여 성문 앞에 두 무더기로 쌓아둔다. 이번에는 예후 왕조가 그 희생물이 될 것이다. 호세아의 이 예언은 살룸이 예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네 번째 후손 스가랴를 죽인 주전 752년에 성취된다(왕하15:10).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또한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참담하게 무너질 이스라엘 군대의 파멸(5절)을 암시하는 전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예언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아람-이스라엘 동맹군을 괴멸시킨 주전 733년에 그대로 성취되는데, 아마도 이 원정 기간 동안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군사 행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아합의 집을 멸하라(왕하9:6~10)고 해놓고 왜 아합의 피 값을 갚겠다고 하시는 것일까?(4절) 그 이유는 예후가 아합의 집을 멸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다의 아하시야와 그 형제 42명까지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왕하 9:27; 10:13~14). 뿐만 아니라 예후가 바알 숭배를 주도하던 아합을 친 후에도 금송아지 숭배를 계속했기 때문이다(왕하10:28~31).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후가 이스르엘에서 흘린 피 값을 예후에게 다시 갚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고멜의 두 번째 자식을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자”를 뜻함)로 지으라 명하신다(6절).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북이스라엘과 달리 남유다 왕국은 긍휼히 여겨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름으로 구원해 주실 것이다(7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모두 언약백성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음란하게 숭배했으며, 자신의 무기와 힘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잘못하면 징계를 하되, 완전히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었다. 주전 701년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었다. 그때에 히스기야는 앗수르 군대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며, 하나님은 하루 밤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전멸시키셨다. 이로 인해 남유다는 군사력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왕하19장; 사37장).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고멜의 세 번째 자식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라는 뜻)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8~9). 이 이름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으시고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의 은총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큰 나라가 될 것이다. 한때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불리던 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장차 미래에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한 지도자, 곧 다윗계의 왕의 영도 하에 통합될 것이다(10~11절).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부정적인 의미가 새로운 의미로, “하나님께서 심으신다”는 뜻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이름들의 의미를 뒤바꿈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를 맺으실 것임을 상징한다.
 
  철저한 징계는 철저한 변화를 가져옴(2:2~23) : 징계와 회복
  하나님의 심판(2:2~13)
  하나님께서 2절에서 자녀들에게  자기들의 “어머니”를 책망6)7)
 
  회복에 대한 약속(2:14~23)
  음란한 아내(이스라엘)에게서 연인들(우상)과 복을 떼어내는 것은 그녀(이스라엘)를 되찾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스라엘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 후, 거친 들(광야)로 데리고 가서 위로하고 타이를 것이다(1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언급은 그 나라의 사로잡힘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야”(거친 들)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단 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농사를 다시금 번성하게 하실 것이요(“포도원”이 이를 상징함) 그들은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15절). 그때에 하나님은 “아골8)
 
  아내를 되찾아옴(3:1~5)
  “우상의 제물인 건포도 떡을 즐겼다”는 말은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면서 우상에게 드린 제물인 건포도 떡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 것처럼, 호세아에게 제멋대로인 아내 고멜을 되찾아와 사랑하라고 지시하신다(1절). 이것은 고멜과의 관계를 새롭게 함으로써, 그리고 그녀와 다시 사랑에 빠짐으로써 호세아는 우상숭배 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실물교육이다.
  2절은 고멜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다른 간부를 따라 도망하여 살다가 빚을 지게 되었고, 그 빚을 갚을 수 없어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9)10)
 
  깨뜨려진 계약(4:1~19)
  계약 위반(1~5)
  호세아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제부터 전할 “여호와의 말씀”, 하나님의 정식 고발을 들으라고 말한다(1절).
  하나님은 “이 땅에 진실과 인애가 사라졌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과 다투었는데, 이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런 반역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남을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낮에 넘어지고, 그들과 함께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밤에 비틀거리게 될 것이다. 당시 북 이스라엘에는 우상과 왕을 경배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는데(왕상22:6~8), 그들은 계시를 받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되어 밤에 보지 못해 비틀거리는 것 같을 것이다. 그리고 “네 어미”, 즉 이스라엘 민족을 멸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상을 섬기고 영적 소경인 거짓 선지자의 인도를 받는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는 말이다(5절).
 
  제사장의 죄(6~10)
  하나님은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의 죄를 지적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인데, 그것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가르치는 책임을 태만히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 알기를 거부했다. 그러므로 태만한 제사장들의 직분을 빼앗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도 율법을 잊어버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실 것이다(6절).
  호세아(여로보암 2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구가 증가하고 나라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번영하고 인구가 증가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말씀을 저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광을 수치가 되게 하실 것이다(7절).
  또 제사장들은 백성의 죄를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8절). 이것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악을 즐거워하고 마음으로 그들의 죄를 선동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죄를 많이 지을수록 더 많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와서 속죄 제사를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해 많은 수익을 얻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들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율법을 가르치지 않아  백성들이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많은 재물을 가져와 속죄 제사를 드리게 하므로 속죄 제물로 그들의 탐욕을 채웠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제사장들이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먹을 것이 많이 있어도 탐욕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11~19)
  이스라엘이 관여하던 이방종교의 풍요 제의를 보면,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 여신의 은총을 얻기 위해 가나안 족속은 “거룩한” 창기 제도에 관여했다. 이 제도는 “거룩한” 창기들과의 성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의례 행동은 독한 술을 마시고 점술을 통하여 이방 신들에게 묻고 희생제사를 드리는 등의 행동을 포함한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들의 승인을 받고 인구 증가를 위해 자기들의 딸들과 며느리들에게 성소들을 방문할 것을 장려하였는데, 이는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제의적인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신들이 그들에게 많은 자녀들을 주었으면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남자들도 역시 성소들을 방문하여 그들 자신의 생명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여사제들과 성관계를 가졌다(13~14).
  북왕국이 이렇게 타락한 탓에 이웃에 있던 남왕국 유다 역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유다에게 북왕국의 사례를 따라가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향한 비난을 중단한다(15절). 그리고 호세아는 유다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부정한 예배 중심지들을 멀리하라고 한다. 호세아는 유다에게 “길갈12)로 가지 말고, 벧아웬13)으로도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14)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 이스라엘은 멍에(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지 못해서 다루기 힘든 암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16절),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지속적인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강한 바람을 활성화 시킬 것이다. 그래서 그 바람은 에브라임(이스라엘)을 휩쓸어 포로로 사로잡혀가게 할 것이다(16~19절).

 
  덤벼들 준비가 된 사자(5:1~15): 심판선언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상대로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제사장과 왕족들이 따로 언급되고 있지만 말이다. 1절에 사용된 세 가지 동사, 즉 “들으라(솨마)”, “깨달으라(카솨브)”, “귀를 기울이라(아잔)”는 말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주의 깊게 들을 것을 강조한다. “미스바와 다볼15)16)
  이스라엘은 영적인 간음을 행한 탓에 “더럽혀지고” 말았다(3절). 여기서 “더럽혀지다”는 낱말은 민수기 5:20, 27~28절에서 간음하는 여인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방종교의 풍요 제의에 참여하여 사생아를 낳았다(7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양 떼와 소 떼를 몰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6절).
  5절의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진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은 본래 하나님을 자랑으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권세와 부귀를 자랑하며 교만해졌다. 여로보암 2세 때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하맛어구에서부터 아라바까지”라고 했으니(왕하14:25), 솔로몬 시대의 판도와도 같은 것이었고(왕상8:65), 또 모세를 통하여 약속되었던 이스라엘의 최대 영역이었다(신32:36). 그래서 여로보암 2세의 왕국은 팔레스틴의 영역을 넘어서는 주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국이었다. 그러므로 호세아 13:1에도 “에브라임이 말하면 사람들이 떨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당시 그들의 권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도 말하기를,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사9:9~10)고 호언장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교만은 그들 스스로의 얼굴에 증거(멸망의)가 되었다. 이러한 교만, 즉 그들의 은과 금과 권세와 화려한 우상을 자랑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실 것을 거듭 말씀하신다(6절).17)
 
  회개를 촉구함(6:1~3)
  예언자는 1~3절에서 “이제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let us return) 그리고 그의 얼굴 앞에서 살자!(let us live) 그리고 힘써 여호와를 알자!(let us know)18)
 
  충성심이 없음(6:4~11a)
  인애와 지식이 사라짐(4~6)
  하나님께서 격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신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4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헌신을 요구하시지만, 그들이 보여줄 충성심은 아침 안개나 풀잎의 이슬처럼 금방 없어져 버린다(4b).      “사랑(헤세드)19)
 
  이스라엘의 범죄행위(7~11)
  하나님의 심판은 제사장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 흘리는 죄(살인죄)를 범함으로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출20:13)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피 흘리는 죄는 여호수아에 의해 도피성으로 지정된 최후의 보루인 라못 길르앗과 세겜과 같은 성읍들에서 발생한다. 당시에 길르앗 사람 50명이 베가의 반역에 동참하여 브가히야를 살해하기도 했다(왕하15:25). 그래서 길르앗은 유혈과 살인으로 얼룩졌으며, 살인자로 가득 찬 곳이 되고 말았다. 또한 제사장들은 세겜 길을 점거하고 세겜에서 제사드리기 위해 벧엘로 가는 순례자들을 죽이며 강탈하는 강도 행위를 자행하였다(9절). 이스라엘은 살인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향한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다(10절). 그런데 유다도 에브라임의 도덕적인 발자취를 그대로 따른다(5:5). 그 결과 유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1절). 그 심판은 추수에 비교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수확처럼 특정 시기에 정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팎의 소용돌이(6:11b~7:16)
  회개의 기회를 거부(7:1~3)
  하나님은 기꺼이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고 치료하고자 하시지만, 이스라엘의 죄악이 화해를 막는다(1~2). 이스라엘은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사기와 거짓 증언을 행했으며, 남의 집에 들어가서 도둑질하고, 밖으로 나와서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했다(1절). 그러나 이런 악을 자행하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알지 못하며, 이에 대한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악을 기억하시고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왕들과 지도자들도 이런 백성들의 폭력과 악을 바로 잡기는 커녕 방종을 넘어 그들의 죄를 즐겼고, 백성들은 거짓 아첨으로 타락한 지도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3절). 이로 인해 그들의 주변은 온통 그들이 행한 죄악으로 둘려 쌓여 있었는데, 이런 죄악들은 하나님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났다(2절). 
 
  이스라엘의 상징들(4~16): 달궈진 화덕, 뒤집지 않은 전병, 어리석은 비둘기, 속이는 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우상을 섬겼고, 육체적으로도 음란한 행동을 했기에 “간음하는 자”라고 한다(4). 하나님은 그들이 마치 빵 만드는 자가 사용하는 “달궈진 화덕”과 같다고 말씀한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빵 만드는 자에 의해 뜨겁게 달구어진 화덕처럼 음란한 정욕으로 뜨거워져 있었다. 빵을 만드는 자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그것이 발효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발효되면 즉시 화덕을 달구어 그 위에 반죽을 놓고 빵을 만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을 하고, 그 성욕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잠시 쉬었다가 성욕이 일어나면 또 다시 음행을 자행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에게 음행을 하지 않는 시간은, 다음 음행을 하기 위해서 잠시 휴식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4절). 또한 호세아는 이스라엘 왕의 생일이나 축제일에 관리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열병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왕은 오만한 자들, 즉 하나님과 이웃을 경멸하는 자들과 교제의 악수로 한 통속이 되었다(5). 간신들은 자기의 탐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악한 음모를 숨기고 있다가 때가 되면 아침에 화덕의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 야욕을 드러냈다(6절). 또한 음모자들의 탐욕과 욕정은 때가 되면 뜨겁게 달구어져서 재판장들을 삼키고 왕들을 엎드러지게 했다(7절). 이 일들은 여로보암 2세 이후에 반역과 시해 사건들이 끊어지지 않고 일어났다. 살룸은 스가랴를, 므나헴은 살룸을, 브가히야는 므나헴을, 베가는 므나헴을, 호세아는 베가를 살해했다(왕하15:10, 14, , 25, 30). 이스라엘은 계속된 반역과 살인 사건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원과 도움을 구하지 않고 점점 더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에브라임은 여러 민족과 혼합되어 이방민족의 풍습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이교도의 우상을 섬겼으며, 또한 이방 민족들과 정치적인 동맹을 맺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써 하나님만 섬기고 율법을 따라 살아야만 했지만, 이방 우상을 섬기고 그들의 풍습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특성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가리켜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다고 하신다. “뒤집지 않고 구운 떡”은 한 쪽만 타고 다른 쪽은 밀가루 반죽 그대로 남는다. 이러한 떡은 먹을 수 없고 쓸모가 없기에 버려지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혼합주의에 빠져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8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든 것이 삼키워져 버렸지만 깨닫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왕 므나헴은 앗수르의 공격을 벗어나기 위해서 은 일천 달란트의 조공을 바침으로 나라의 재정을 소모하기도 했다(왕하15:19~20).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침입으로 인해 과도한 재정을 소비함으로, 또 정치적 주권을 상실함으로 백발이 무성할 정도로 노쇠하여 곧 멸망당할 상태에 놓였다(왕하17:3). 문제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들의 코앞에 다가왔어도 전혀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된 재난과 황폐함에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국가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이방 나라들과 동맹을 맺기에 급급했다(10절). 
  하나님은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이 “어리석은 비둘기”와 같이 지혜가 없다고 탄식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리석은 비둘기가 자기를 잡으려고 쳐놓은 그물을 보지 못하고 날아드는 것처럼 어리석다고 하신다. 그것은 에브라임이 앗수르나 애굽에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해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비유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침략이나 압박을 받을 때에 앗수르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조공을 바치는 노력까지 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는 그 시선을 애굽에 돌려 애굽의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대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이를 중단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가 결국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왕하17장). 비둘기가 보금자리를 떠나 길을 잃고 헤메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그들의 보금자리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떠나 앗수르나 애굽으로 길을 잃고 헤메는 것은 결국 파멸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단지 침상에서 슬피 울부짖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팔을 연습시켜서 그들을 강건케 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악을 도모했다. 또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셨지만,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숭배했으며, 앗수르와 애굽에게 도움을 받으려 할 뿐 아무리 징계를 받아도 돌아올 줄 모른다(1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속이는 활”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과녁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방백들이 혀의 거친 말로 인해 칼에 엎드려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방민족의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애굽을 믿고 애굽으로 도망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애굽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예언대로 그들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했고, 의지했던 애굽에서도 조롱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은 “속이는 활”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장차 만인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16절).
 
  심은 대로 거둠(8:1~14)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제거됨(1~6)
  하나님께서는 정체불명의 파수꾼(호세아)에게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라고 명하신다(1절; 5:8절). 왜냐하면 강한 독수리(앗수르 군대를 상징함)가 이스라엘을 덮쳐서 그 강한 발톱으로 채가려고 이스라엘 위를 맴돌기 때문이다(1절).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충성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의 법을 어김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원수를 보내도록 행동했기 때문이다(1~3).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의 뜻대로 계속해서 왕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의 송아지 우상을 포함한 각종 우상들을 섬겼다는 점이다(4~6). 여기서 “사마리아”는 북왕국 전체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은 이 우상을 특히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파괴하겠다고 말씀하신다(6절).
 
  열매를 맺지 못하고 국력이 쇠함(7~11)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통하여 “바람”을 심었다. 여기서 “바람”은 실체나 가치가 없는 것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광풍”을 거둘 것이다. 여기서 “광풍”은 파괴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시83:15; 사29:6). 하나님께서는 심고 거두는 표상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우상에게로 방향을 돌이켰을 때 이미 파멸의 씨앗을 심었음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우상숭배를 통해 번영을 누리려는 이스라엘의 노력은 곡식에 비유되는데, 마치 알곡 없는 쭉정이처럼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 설령 이스라엘의 노력이 약간의 “알곡(번영)”을 얻는다 해도, 이방 나라들이 그것을 삼킬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영을 위한 노력은 “바람”을 심는 것처럼 헛될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을 뿐 아니라 에브라임은 돈(조공)을 주고 연애할 대상(동맹국)을 찾았다(9절). 이스라엘은 홀로 사는 들나귀처럼 미련하고 고집스러워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사모하여 도움과 원조를 청했으며, 애굽의 원조를 받으려고 뇌물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도리어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9~10).
 
  다시 노예가 될 것(12~14)
  이스라엘은 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러운 태도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다(11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까닭에(12절),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죄악으로 가득 찬 위선으로 간주하시며(11절), 그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13절).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지으신 분”, 곧 그들을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여 한 민족으로 만드신 분을 잊어버렸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속박 당하게 만드실 것이다(13~14). 이스라엘은 다시 “이집트(노예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포로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에게까지 흘러넘칠 것이다. 유다가 자기들을 침략군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견고한 성읍들”을 많이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심판의 불을 보내실 것이다(14절). 이 예언은 주전 722년에 있을 이스라엘의 파멸과 사로잡힘을 예고함과 동시에, 산헤립이 유다의 46개의 “강한 성읍들”과 “성벽을 가진 요새들”을 정복한 앗수르의 유다 침공(701년)을 예고하고 있다.
 
  자녀들을 위한 울음(9:1~17)
  이방에서 부정한 삶(1~10)
  이스라엘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면서 기뻐할 수 없는 것은 양식을 위하여 바알을 찾은 까닭에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1~2).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는 창기의 행동에 비교된다. 그들은 “음행의 값”, 곧 바알이 제공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농업의 번영을 얻기 위해 자신을 바알에게 바친다(2:5). 그러나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이 텅 비게 될 것이,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3절). 여기서 호세아는 이집트(이스라엘이 한 때 종살이를 했던 곳)와 앗수르(장차 사로잡혀 가게될 곳)를 똑같이 언급함으로써 상징과 현실을 뒤섞는다. 이스라엘은 이방 땅에 갇힌 채로 절기 때마다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요(겔4:13). 또한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종교 절기들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4~5). 또한 설령 누군가 앗수르에 의한 재난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한다하더라도 애굽인들이 도망쳐온 이스라엘의 피난민들을 다 모아 멤피스20)21)
  예언자는 외친다. “보응하는 날”이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보응의 날”은 “심판(형벌)의 날”이 될 것이다. 그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시는 날”이다. 그러나 그날은 이스라엘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날이다(7절).22)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적대감은 아마도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배척한 것에서 분명히 나타난다(7~8절).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임박한 파멸을 경고하도록 보내신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을 제정신이 아닌 바보들로 간주하고서 폭력으로 위협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적대감이 사사시대에 기브아에서 발생한 무서운 죄와 같다고 비교하신다(9절). 사사기 19장은 베냐민 지파가 밤을 보내기 위해 자기들의 성읍을 찾아온 한 레위인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기록하고 있다.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은 불만족스럽지만 한 레위인의 힘없고 연약한 첩을 데려다가 밤새도록 윤간하며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항상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교제 초기에는 큰 기쁨을 가지고서 그들을 보살피셨다. 마치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함과 같이, 또 무화과나무에서 이른 열매(지극히 맛있는 것)를 발견한 자처럼 말이다(10절).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금방 변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알브올23)
  이스라엘은 이런 죄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바알이 무수한 자녀들을 낳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엄하게, 그러나 적절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자녀를 낳지 못하고 떠돌이가 됨(11~17)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 주신 영광을 새처럼 날아가게 하실 것이다. 여기 “에브라임”은 “창성함”, “두 배로 결실함”의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인해 영광을 어느 한 순간에 새가 날아감 같이 잃게 될 것이며, 여인들은 자녀를 낳지 못하게 될 것이다(11절). 혹시 여인들이 자녀를 낳아서 기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일찍 죽게 하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상과 하나가 된 이스라엘을 떠나실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복 대신 화가 임하게 된다(12절). 그리고 호세아는 이스라엘 여인에게 임신하지 못하는 태와 젖이 나오지 않는 유방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것은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에 큰 살육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여인들이 아이를 갖지 않는 편이 더 고통을 당하지 않고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1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며, 그래서 그들을 미워하셨다고 한다(15절).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의 첫 정착지였고,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하는 곳으로 선지학교가 있었던 곳이며, 거룩한 땅이다. 또한 “길갈” 자체는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 소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벧엘과 함께 길갈은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말았다(4:15). 따라서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뽑아 좇아낼 것이기 때문에 뿌리가 말라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되고 말 것이다(16절). 이스라엘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고, 그들을 열국 가운데 흩으심으로 유리하며 떠도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17절).
 
  죄의 멍에와 심판(10:1~15)
  왕이 없어짐(1~3)
  호세아는 향수에 젖은 채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포도나무 가지처럼 퍼져나가면서 번성했던 모습을 생각한다. 그러나 호세아가 다시금 배은망덕하고 위선적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는지 생각할 때 금방 현실이 눈앞에 들어온다(1절). 여기에 언급된 제단들은 이스라엘 종교를 특징짓는 공허한 형식주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이스라엘의 공허하고 불성실한 노력은 위선(두 마음)의 죄를 낳는다(2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세운 제단들과 거룩한 돌들(주상들) 모두를 쳐서 깨뜨리신다(2b절).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은 왕이 상징하는 국가적인 독립을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갈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갈 때에 백성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심판을 겪고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3절).
 
  심판이 정해짐(4~11)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속임수가 깊이 퍼져 있어 약속들을 깨뜨리며, 자기들이 맹세한 것들을 무시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들은 무수한 재판24)25)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곡식 밟기를 위해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는 암소에 비유한다. 에브라임이 처음에는 율법과 계명을 통해 잘 훈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에 이스라엘은 소가 곡식을 밟으면서 곡식을 자유롭게 먹는 것처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아무 짐도 없이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장차 그들의 목에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실 것이며, 그들은 등에는 사람을 태워 불의의 길로 가지 못하게 통제할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신실치 못한 태도로 인해 이방인의 포로가 되어 압제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북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남유다도 다 포로의 날을 피할 수 없음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11절).26)
 
  회개의 촉구와 심판선언(12~15)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묵은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림같이, 너희의 마음 밭을 갈아엎음 같이 회개하여 공의의 씨앗을 심고 인애의 열매를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단비를 내려 “무한한 사랑”을 수확하게 하신다고 말씀한다(12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으로 밭을 갈고 죄의 열매를 거두었으며, 거짓으로 거둔 열매를 먹었다고 책망한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한 것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지혜와 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13절).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송아지를 섬겼으며, 앗수르나 애굽의 군대를 의지하여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이 전쟁에 빠지므로 두려워서 소리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산성들은 모두 무너지는데, 살만27)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28)
 
  하나님의 큰 긍휼(11:1~11)
  하나님의 사랑과 목이 곧은 이스라엘(1~7)
  하나님은 다시금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회상하신다(1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의 특별한 대상인 “아들”이었다. 그런 하나님께서 보이신 최고의 사랑은 출애굽 사건이었다. 그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불러내신 후 그와 더불어 계약 관계를 맺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보호하시고 보살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들, 특히 바알에게로 방향을 돌렸다(2~4절). 이러한 이스라엘의 반역은 심판을 자초하였다. 이제 그들은 앗수르에게 정복당할 것이요,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다시금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으로 상징됨, 5절). 따라서 앗수르의 칼이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내리칠 것이요, 그들의 자랑스런 계획들이 순식간에 무산되게 할 것이요, 그들을 심판 앞에서 무기력하게 만들 것이다(6~7).
 
  회복에 대한 약속(8~11)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의 심판을 자비로 누그러뜨리고자 하신다(8절). 하나님은,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29)
  사람들은 때때로 분노로 가득 찬 나머지 복수를 꾀할 때 자신의 복수에 어떤 제한을 두거나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거룩하신 분”이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자신의 감정을 완전한 균형 속에 잡아두실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 긍휼의 마음으로 진노를 누르고 자기 백성을 지켜주실 것임을 선언하신 후에 그들이 금방 자기를 따르기를 기대하신다(10~11).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갈가리 찢을 힘센 사자로 묘사하셨지만(5:14), 이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는 사자처럼 포효하실 날이 올 것이다.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중에 그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이요,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낭꾼의 올무에 빠지는 어리석은 비둘기로 묘사했지만,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비둘기 이미지를 전혀 다르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장차 고국으로 돌아올 이스라엘을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비둘기에 비유하신다.
 
  과거로부터 배우는 교훈들(11:12~12:14)
  이렇듯이 잠시 동안 미래의 세계로 떠나가신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냉혹하고 힘든 현재로 돌아오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똑같이 자기들의 왕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짓으로 가득 찬, 그리고 공허하고 자기 파괴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한다. 그것을 호세아는 “바람”을 먹는 것에 비유한다. 바람을 먹는 것은 결국 사람을 굶어죽게 만드는 것이다(12:1a절). 사회적인 불의인, 거짓과 폭력은 이스라엘 땅을 괴롭히고,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찾아 안전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강대국(애굽, 앗수르)과의 동맹관계 안에서 안전을 찾으려고 한다(12:1절).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를 정식으로 고발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적발하신 후에 그들의 범죄 행동을 벌하실 것이다(2절). 그 절차는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과 더불어 시작된다(3~5). 속이기를 좋아하는 하나님의 백성(11:12~12:1)은 그들의 조상인 야곱과도 같다. 야곱은 자기 생애 초기에 하나님과 흥정했지만(창28:20~22), 나중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창32:26). 속이기 좋아하는 야곱의 후손들은 그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사회 정의를 장려하며 안전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12:6절). 그러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제 활동은 부패해 있었고, 왕실 관리들은 그들의 재산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8절). 만일에 변화가 곧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으로부터 옮기실 것이요,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마치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후에 광야 40년을 살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초막절을 지킴으로써 과거의 경험을 기념하게 했다(레23:33~43). 그런데 과거 광야 유랑이 다시금 포로생활로 현실화되면서 이제는 그러한 경축 행동이 가혹한 현실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예언자들을 보내어 자기 백성을 경고하게 하셨지만(10절),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범하였으며, 길갈(우상숭배 장소)같은 곳의 위선적인 예배에 참여하였다(11a절). 다가올 심판은 당연히 그러한 성소들에 있는 제단들을 “돌무더기”로 만들어버릴 것이다(11b절).
  만일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 야곱의 경험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야곱은 에서를 속인 후에 약속의 땅을 떠나야만 했으며, 외삼촌의 집으로 여행해야만 했다. 거기서 그는 아내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12절). 나중에 야곱과 그의 가족이 기근으로 인하여 이집트로 떠난 후,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셨다(13절).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무시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종종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도구들이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10절, 9:8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으로부터 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폭력적인 언행을 통하여 그를 진노케 한 까닭에, 이제는 죄의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14절).
 
  죽음을 청함(13:1~16)
  북왕국의 가장 뛰어난 지파인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에서 지도권을 행사하고 크게 존중히 여김을 받던 때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 1세는 에브라임 출신이었다(왕상11:26, 12:25). 그런데 그때 에브라임은 바알 숭배로 돌아섰으며, 그로 인하여 “죽음(망하다)”을 맞이하고 말았다(1절). 이스라엘은 백성이 계속해서 죄를 범하면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바람에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간다(2절). 따라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곧 역사의 무대로부터 사라질 것이다(3절). 그것을 호세아는 네 가지 은유를 통해 묘사한다. 첫째는 햇빛에 사라지는 아침안개, 둘째는 금방 증발하는 새벽이슬, 셋째는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 넷째는 창문을 통하여 빠져나가는 연기 등이다. 이 은유들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지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이 안정된 삶을 가능케 하는 영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못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셨으며, 자신이야말로 그들의 예배를 받아 마땅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4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그들을 보살펴 주셨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땅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셨다(5~6a절). 하나님께서 친절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6b).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러한 배은망덕함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친 들짐승과도 같이 그들을 공격하실 것이요, 그들을 갈가리 찢으실 것이다(7~8절). 이스라엘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자가 그들의 대적이 되었고, 그들의 왕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했다(9~10절). 11절은 북왕국을 어떻게 하나님이 다루어 오셨는지의 전 과정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에서 불순종하는 왕이 계속해서 등장하였다가 사라졌다. 이러한 상태는 현제의 왕에게서도 그대로 되풀이될 것이다(10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난은 근거 없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문서철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문서철은 적절한 때에 언제든지 증거로 제출될 수 있다(12절).
  하나님의 심판의 초기 단계는 이미 분명하게 시작되었는 바, 그것은 한층 가혹한 심판이 뒤이을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자녀 출산에 뒤따르는 진통에 비유하신다(13a절). 이어서 하나님은 이 은유를 확장하여 이스라엘을 출생의 때가 이르렀는데도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기에 비유하신다(13b절). 이 은유는 이스라엘이 지혜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자기들에게 임했는데도 그들은 “벽에 쓰인 글씨”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감증을 드러내신 후에, 의인화된 죽음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도구가 될 것을 요청한다(14절).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는 것에 대하여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긍휼이 내 눈 앞에서 숨을 것이다”(1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심판을 실행하시면서 긍휼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14b절). 그러나 이처럼 심판을 내리겠다고 결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약간의 긍휼을 베푸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징계하리라는 결심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1:8~9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심판은 자비로써 부드럽게 만드실 것이요, 그것이 적정선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진정되기는 했어도 그 심판은 여전히 가혹할 것이다(15~16절). 호세아는 이 심판을 광야에서 불어와서 모든 물의 근원-지하로 흐르는 물까지도-을 말리는 뜨거운 동풍에 비유한다. 침략군들이 이스라엘의 창고들을 약탈할 것이요, 심하게는 아이들과 임산부까지도 살육할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반항적인 범죄자들을 향한 심판의 증거로 유아들을 죽이기도 하신다(16a절). 이러한 사법적인 살인은 유아들을 포함할 때조차도 온 우주의 도덕적인 권위를 대표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정당한 것이 된다.
 
  마지막 회개 촉구(14:1~9절)
  유아들이 땅바닥에 내던져지고 임산부들의 배가 갈라지는 섬뜩한 모습은 이제 뒷전으로 사라지고 마지막 회개 촉구의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난다(1절). 호세아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촉구한다. 호세아는 심지어 이스라엘에게 죄를 고백할 때 사용할 모범적인 기도문을 제공하기까지 한다(2~3). 만일에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여 얻는다면, 그들은 올바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과의 동맹관계와 거짓 신들을 거부하고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도움의 근원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제멋대로인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다. 만일에 이스라엘이 회개한다면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돌이키고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사랑을 펼치시겠다고 약속하신다(4절). 자신을 이슬에 비교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소생시키겠다고 약속하신다(5~7절). 이스라엘이 백합화 같이 필 것이요(아2:2), 레바논의 거대한 백향목들 중 하나처럼 깊이 뿌리가 박힐 것이다. 이러한 은유는 이스라엘이 매력과 안정을 되찾을 것임을 암시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은유들을 통해 이스라엘은 감람나무처럼 울창하게 될 것이요, 백향목처럼 향기로워질 것이요, 포도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처럼 힘찬 식물의 생명은 회복될 하나님의 복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생명력의 근원임을 상기시킨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들을 보살필 것을 약속하신다(8절). 범죄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표범과도 같으신 하나님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는 이스라엘은 그를 돌보시는 보호자로 만나게 될 것이다.
  호세아는 격언적인 메시지로 마무리 한다(9절). 호세아는 지혜로운 자들이 3가지 원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첫째로 “하나님의 길들(그의 계명들)은 올바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둘째로, “경건한 자들은 기꺼이 그 길들로 다닌다(순종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범죄자들은 그 길들이 자기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여 파멸에 빠뜨릴 것임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호세아서를 마치며...
  아모스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불의와, 가난한 자들이 소수 권력층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외친 예언자라면, 호세아는 하나님께 대한 인애(충성)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탄식한 예언자이다.
  호세아의 메시지의 핵심은 왜 이스라엘이 죽을병에 들었는지 깊이 진단한다. 이스라엘이 중병에 걸린 이유는 그들의 불신실함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눈앞에 올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실 것을 소망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참상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의 예언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과연 누가 알겠느냐?”고 부르짖었다.
    
 
   8조의 질문: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인애)이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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