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2(히4:14-5:10)
히브리서 5장 전반부에서는 아들과 구약의 대제사장을 연결하고(1-4절)
후반부에서는 아들과 멜기세덱 제사장을 연결한다(5-10).
이러한 연결은 율법 아래의 일과 아들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다윗이다.
다윗은 하나님의대리왕이면서 제사장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 왕이시며 대제사장인 것과 같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모세의 언어와 성전제도를 따라 아들의 위대함을 설명한다.
성전제도의 설립자는 모세이다.
이러한 모세의 일을 시행하는 자들이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보자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제사하였다.
그들의 형제인 이스라엘의 대표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과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휘장 밖의 영역에 세워진 제사장,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한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래로부터 나서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다.
하나님 언약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는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다.
제사장과 백성은 하나이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와 예물을 드린다(히5:1, 9:1).
그래서 히브리서는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다”
라고 말한다(히5:1).
대제사장은 무식하고 연약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다.
이는 대제사장 자신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히5:2).
무식하고 연약하다는 것은 엣 백성들이 죄 아래에 세워졌음을 말한다.
옛 백성이 무식하고 연약한 것은 여호와께서 휘장으로 가리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약에 싸여 있다는 말은 죄 아래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린다(히5:3).
성소 밖에 있는 백성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하여 제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대제사장의 존귀함은 아무나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만이 가능하다(히5:4).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만이 가능하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장들은 휘장 밖 죄 아래에 세워진 자들이다.
그들은 아래로부터 나서 육신에 속한 제사장이다.
그들이 봉사하였던 성소는 하늘의 성소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성소이다.
이는 휘장 밖의 영역인 죄가 지배하는 가나안땅에 세워진 성소라는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과 대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시편 2편과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확증한다.
시편 2편은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도다”
라고 말한다(시2:7).
이는 이스라엘 왕으로 취임하는 다윗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왕좌에 취임하는 대리왕이기 때문이다.
또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110편을 인용한다.
시편 110편에서는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기록한다(시110:1-4).
시편 2편의 말씀은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에서 읊던 노래이다.
아버지를 이어받아서 아들이 왕좌에 취임하면 시편 2편을 읊어서 축하하였다.
이는 구약에서 다윗과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앉는 왕좌는 여호와의 왕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통치를 시행하는 대리왕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경영하는 대리 통치자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다윗과 그의 아들을 가리킨다.
이는 그들만이 여호와의 왕좌에 앉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점층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편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각한다.
예수께서 다윗의 보좌를 이어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 시편 110편을 통해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대제사장임을 강조한다.
아들은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임을 강조한다.
이는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며 족보도 없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제사장이기 때문이다(히7:3)
시편 2편은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고 말한다(시2:7-8).
시편 2편은 다윗과 그의 아들들이 왕위에 취임할 때 불리는 노래이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 아들은 다윗과 그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다윗과 그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왕좌에 앉은 대리왕이다.
옛 백성과 옛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율법통치를 대리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편을 아들에게 인용한다.
이는 예수께서 진정한 다윗의 아들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다윗의 혈통을 따라 사람으로 오신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부각하기 위함이다.
다윗과 그의 아들은 여호와의 왕좌에 앉아서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다.
그러나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이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으로 오심이다.
그런데 아들은 여호와의 대제사장이기도 하다.
이는 다윗이 왕이면서 하나님을 제사하는 제사장인 것과 같다.
다윗은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아론을 좇는 제사장이 아니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시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시편 110편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는 구절을 인용한다(시110:1-4).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왕이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다윗의 왕직과 제사장직이
종말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통해서 온전케 되었음을 말한다.
모세율법 아래에서 시행되었던 은혜의 일들이
종말에 보내신 아들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일로 온전케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 아래의 일을 대비하여 아들을 굳게 붙들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왕의 자리에 취임하셨는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종말에 자신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아버지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경외하심 인하여 들으심을 입었다(히5:7).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가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말한다(롬1:17).
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말한다(롬3:21-22).
로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이는 개혁신학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지고한 뜻이나 구원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언약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이 무엇인가?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을 생각해 보라.
언약의 내용은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이다(창17:7-8).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여호와께서 언약 당사자로서 충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불신실하여 죄를 범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이다(롬1:17, 3:21-22).
그런데 개혁신학은
“율법은 하나님의 지고한 뜻과 구원의 기준이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이는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인간의 자리에서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셔서 얻은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신다.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의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세가 구원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그 증거이다.
예수께서 사형에 합당하고 판결한 죄목이 그 증거이다.
히브리서도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라고 말한다(히7:16).
그러면 예수께서 순종하신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이는 예수 자신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셨는가?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갈4:4).
율법 아래에 보내심은 죽음의 자리에 보내심이다.
이는 율법이 죄의 울타리 안에서 시행된 경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율법을 지키더라도 율법으로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히10:4, 11).
율법은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한다(히9:9, 10: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에 보내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
자신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아버지를 향한 온전한 신뢰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을 향하여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셨다.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아버지에게 심한 통곡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경외하심으로 인하여,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행동으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히5:7).
들으심을 얻었다는 것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히5:8-9).
그리하여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히5:9).
따라서 신약시대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시작이 된다.
이것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롬1:17).
이는 온전한 믿음의 근원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구약 시대를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로 구분한다(갈3:23-29).
하늘에 속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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