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의 바른 이해
수14:12 이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산지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성경에 언급된 가나안 땅의 산지의 개념은 한국의 산과 그 의미가 다르다. 산지(Hill Country)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번역인데 그 첫째는 “깁 하”라는 뜻으로 언덕, 등성이 같은 구릉지를 의미한다.(수24:33, 사19:16,삼상11:4 참고)두 번째로는 “하르”라는 말로 산줄기, 산지(山地)인데 이는 높은 산이라는 개념보다는 높은 지역(고원)에 위치하여 도시를 건설하거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넓은 땅을 의미한다.(수13:16, 눅1:39절 참고) 단순히 산이라는 개념이 아닌 산의 국가 또는 산의 도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이스라엘 민족)은 본래 아브라함이 BC2091경 아랍지역(지금의 이라크)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여 BC2016년 (추정)까지 머물다가 그의 나이75세에 가나안땅 세겜(사마리아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부터 유목민 생활을 시작하여 족장시대(BC2086-BC1871까지)를 지나는 동안 거대한 민족을 이루어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들은 이주 정착민으로 천년이상을 사는 동안 가나안족(팔레스타인)과 많은 갈등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산지를 이용하여 마을이나 도시를 세우며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산지의 생활이 익숙해 졌을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 많이 알려진 산지는 에브라임 산지(수17:15, 18:12, 사2:9, 왕상12:25), 유다 지(수11:21, 20:7), 납달리 산지(수20:7), 암몬산지(신2:37), 길르앗 산지(신3:12, 창37:25)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자한다.
1)에브라임(Ephraim)산지
에브라임 산지(수17:15, 18:12, 왕상12:25)는 "이중의 풍작“이 란 뜻으로 애굽에서 낳은 요셉의 둘째 아들, 므낫세의 동생, 야곱의 장자의 축복을 받은 자 들이 크게 번성하여(창48:16-19)팔
레 스타인의 제일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곳이다. 에브라임에 지정 된 땅은 북쪽에 므낫세, 동쪽의 요단강, 남쪽에 베냐민, 서에는 지중해로 제일 중요한 성읍은 북 왕국의 수도였던 세겜(사마리아)지역이다. 이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을 가르치며 에발산, 그리심산 등이 있고, 수가성, 사마리아, 길갈, 아이성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에브라임 반지파와 므낫세 지파와 합하여 12지파의 하나가 되었고 후에 10지파가 르
에브라임 산지의 모습
호 보함 왕을 배반하여 북 왕국을 세운 후 에브라임은 북 왕국을 대표할 만큼 강했다. 후에 이사야와 호세아는 에브라임의 방종, 부도덕, 불신앙을 무섭게 비난하고 하나님의 형벌이 그 사치, 부패, 음모 우상으로 들어찬 백성들에게 반드시 임할 것을 예언했다.(호8:4-6) 그리고 BC722년에 에브라임은 앗 수르 살만에셀 5세와 사르곤 2세에게 사로잡혀가고 국토 에브라임 산지에는 외국인들로 가득 차는 수 모를 당하기도 했다.
유다(Judah)산지
유다는 히브리어로 “예후다”라는 말로 “하나님을 찬송하라”이며 아얄론, 기브온, 벧엘, 여리고, 라기스 기럇아르바(헤브론)등이다.
a)아얄론은 예루살렘에서 약 20Km 되는 지금의 “얄로” 지역으로 추정되며 텔아비브/욥바로 내려가는 지역으로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이 들어서 있으며 한때 르호보함 왕이 점령했다가 불레셋 과의 전 쟁에서 패전함으로 빼앗겼고,(대하11:10) 불레셋 땅에 있던 법궤가 벳세메스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지역이기도 하다.
b)라기스 성의 크기는 약 72 두남이었으며 그 성의 북동쪽에는 우물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 라기스 성을 중심으로 한 지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성 자체는 깊은 골짜기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남서쪽의 성벽은 높이가 23m였으며 북동쪽은 비탈에서36m, 남동쪽은 40m, 북 서쪽은 약 42m였다. 즉, 그 성은 남서쪽 비탈이 가장 낮은 지역이었는데 이는 남서쪽 모서리에만 지형학적인 안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서쪽에 있는 언덕과 함께 그 성은 지어진 것이다.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성벽 맞은편의 언덕은 해발 260-265m 였다. 이러한 지형학적 조건은 외부인이 공 격해 올 때 공격의 지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 것인가를 쉽게 결정하도록 만들어준다.
이처럼 라기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주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해 멸망 되기 전까지 라기스는 남부 유다에서 예루살렘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유다 지파의 성읍 (수 15:1-62)
여호수아 15장에는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유다 지파는 예루살렘을 중심 으로 남쪽에 분배가 되었는데 쉐펠라 지역과 유다 산지 그리고 사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분 배받았다. 라기스는 쉐펠라에 분배된 14 성읍 중 하나였다(수 15:39). 그러나 예루살렘은 유다 자 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였다. 여부스 족속이 거하던 예루살렘은 후에 다윗 시대에 이르러 다윗에 의해 점령되어 다윗성이라 명명하였다(삼하 5:7). 기브온(수 1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와 아이를 점령하 였으며 기브온 백성과 화친을 하였는데 이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및 기브온을 치기 위한 5 동맹국이 형성되는데 라기스는 그 중 하나였다. 이 다섯 동맹국을 형성한 사람은 예루살렘 왕 아도 니세덱 이었는데 이로 보건대 당시 예루살렘은 세력이 강했으며 라기스도 예루살렘에 못지 않는 강 한 성읍이었음을 보여준다.
납달리(Naphtali)산지
라 헬의 시녀 빌하의 둘째 아들이요 야곱이게는 6번째 아들이었다.(창30:7), 이들이 받은 지역은 갈 리릴리 지역이다. 갈릴리 지역에는 예수님 당시 갈릴리 호수 주변으로 나사렛, 가나, 티베리아스 등 많은 도시들이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주로 여기에서 지내셨다.
납 달리 지파는 갈릴리 산지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매우 민첩하고 용맹스러운 족속이 되어 야빈왕 을 무찌르는 등 가난안 정착 초기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가나안족 멸절에 열심을 내었다. 그러 나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거주함으로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다
이 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왕하 15:29,)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렘11:11)
암몬(Ammon)산지
요 단강과 사해 건너 동쪽의 성읍이고 얍복강 언덕의“랍받암몬”이 그 수도로(신3:11절)지금의 요 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확인되었으며 남서쪽으로 에돔 산지와, 아르논, 마케루스, 케락성, 마다바, 모 압산지, 느보산 등 수많은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는 지역으로 해발 약800-900M의 산지로 이루어 진 지역이다. 다윗도 랍바를 정복하고 암몬족속을 지배하였었다.">모압 지역의 경계는 서쪽은 사해, 동쪽은 사막지대, 남쪽은 세렛 강, 북쪽은 아르논 강이나, 성경은 종종 모압 북쪽의 여리고 맞은편 평지를 일컬어 '모압 평지' 라고 부른다. (민:21:12-14, 20, 22:1, 수13:32) 산지는 주로 해발 900 미터 이상 되는데, 이러한 고산 지대는 겨울철에 풍부한 습기로 인해 포도와 농사에도 적절할 뿐만 아니라, 좋은 목초지를 형성하여 목축에도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모압 땅의 환경으로 인해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로, 모압의 조공은 해마다 새끼 양 털 10만과 수양의 털 10만을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바쳤다(왕하3:4).암몬 은 롯의 후손(창 19:38)들로서 '나의 백성의 아들(벤 암미)' 이라 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가나안 진입과 관련하여 암몬 자손의 땅 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민 21:24-35, 신 2:19-37) 이 시기에 암 몬은 이미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으며 그 경계는 견고하였다. (민 21 :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를 갓 자손에게 분배하였다. (수 13:24-28)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 아에서 사울 왕까지 이르는 사사시대 동안(1,200 - 1.025 B.C.) 암몬 족속들은 모압의 에글론왕과 동맹을 맺고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여리고를 18년 동안, 에훗에 의해 퇴각될 때까지 점령 하기도 하였다. (삿 3:12-30)
사사 입다의 시기(삿 10:6-12:6)에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사울왕 때(기원전 1,025년경)에 암 몬왕 나하스는 요단강 서편지역 '야베스 길르앗'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삼상 11) 다윗의 암몬 정벌 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삼하 10:1-14) 솔로몬(c. 970-945 B.C.)은 그의 후비와 빈장들 중에 암몬 여인을 취했고, 그들의 영향으로 암몬 사람의 가증한 몰렉을 쫓고,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신전을 지었으며, (왕상 11:1, 6, 7)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 즉 르호보암 왕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로 암몬 사람이었다. (왕상 14:21) 여호사밧 왕(876-849 B.C.) 때, 모압과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 엘을 공격하였고, (대하 20장) 웃시야왕(785-740 B.C.) 때에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 (대하 26:8) 요담왕 때는 암몬을 다시금 정벌하여 통치를 강화하였다. (대하 27:5)
길르앗 산지/아즐룬(Ajlun)
암 만에서 77㎞ 지점으로 고대 로마 도시의 한 곳이다. 성경의 길르앗 산지에 해당되는 곳이다. 아즐 룬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1189년에 살라딘의 조카가 십자군을 대항하여 세워 건설한 깔라트 엘 라밧 성채-뒤에 파괴되었다가 마물루크 왕조 때 복원되었다. 이 성채는 오늘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사라센 군사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맑은 날 이곳에서는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길 르앗 땅과 요단 골짜기 지역을 살펴볼 수 있다.(창 37:25, 신3:12) 이곳의 또다른 인상적인 유적은 중세기에 교회 건물 터위에 지어진 주후 6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미나렛(첩탑)을 지닌 이슬람 사원이다.길르앗: 아 즐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나무가 우거진 지역이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는 지역이다. 1880년대 이 지역을 방문한 여행자들의 경우 이곳에서 거대한 나무를 목격했다 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이후에 2/3이상이 잘려 나갔다.(삼하 18:6-15) 그릿 시냇가: 그 릿 시냇가는 아벨 므홀라가 위치한 텔 아래쪽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 1킬로미터쯤 하류로 내려가면 와디 엘 야비스의 상류와 합류 지점이 나온다. 그곳 시내가 성서상의 그릿 시내이 다.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중간 지점인 성죠지 수도원이 있는 와디 켈트의 한 지역을 그릿시냇가로 언급하기도 한다. (왕상 17:3, 왕상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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