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청년 헌신 예배

열려라 에바다 2012. 1. 20. 16:53

청년 헌신 예배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잠언 29:15-18

청년에 대해 한마디로 말을 하라고 할 것 같으면 저는 ‘이상과 꿈’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잠언 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영어 성경에서는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 민족의 양심이며 생명과 같습니다. 그것은 만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양심이 비 양심이 되고 진실성을 잃는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비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 버리면 이 땅에서는 어디서고 사랑을 찾을 길이 없게 되고 맙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 가장 중점적으로 책망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일군인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그리고 관리들이었습니다.

살아 숨을 쉬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입니다.

60년대의 대학생들은 소위 Student Power라고 하는 물결에 휩쓸러 살았습니다. 그것은 사납고 무섭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무지한 이상론을 앞세운 광기 어린 청년들의 분노였습니다. 그 앞에서 10년 독재는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70년 중반까지 계속이 되어 또 다른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시대에는 시대적 영웅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시기었습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소위 무 시대였습니다. 무관심, 무기력, 무도덕, 무신론, 무 행동, 무책임, 무 이상등 모든 것에 ‘없을 無자’를 붙였습니다.

80년대는 방황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정립되지 못하고 새로운 기운은 하나도 찾을 수 없고, 정처 없이 흐르는 물처럼 흐느적거리는 시대였습니다. 교회도 힘을 잃고 방황을 했습니다. 자꾸 비대해 지지만 그 힘을 쓸 줄 모르는 시대였습니다.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그러나 속이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90년대에 와서 우리는 처음으로 민주화를 하고 개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꿈의 시대에 왔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꿈을 가지고 새 시대의 일군으로 나서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은 이상을 가지고 있고 지도자들이 탁월한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 없으면 그것은 한낮 구호에 그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시고 그 하나님은 개혁을 그 백성들을 통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택시를 타면 택시 뒷 창문에 ‘우리가 세 시대의 주인이 되자“라든지 ’개혁에 앞장을 서자‘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오늘 제 가 말하는 말이 그들의 말과 같은 부류의 말로 들릴지 모르나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택시 기사 분들이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꿈은 교회에 집약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꿈나무인 것처럼 교회가 이 민족의 꿈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50이 넘은 사람은 시대적으로 왜정 치하에서 태여 나서 6.25, 4.19 5.16, 12.12 사태를 보며 살아 왔고 공산주의가 망하는 것을 보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해석하는 안목이 넓습니다. 즉 역사 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면 좋고 저렇게 살면 망한다’ 라는 생각을 하며 삽니다. 그런데 요세 성도나 젊은이들은 이 역사 의식이 없습니다. 모두 평균화되고 중성화되고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지 모르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틈새에 극도의 이기심과 쾌락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을 왜놈이라고 깔보지만 그 사람들은 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것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섬나라 사람들이 명나라를 치자고 전쟁을 일으키고 그 길을 빌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그런 꿈이나 꾸겠습니까? 명나라 사람이 온다면 왕이 나가 무릎이나 꿇고 아부를 하는 정도가 아닙니까?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을 통일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마까야라는 사람이 많은 군대를 대리고 오다의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겨우 3,000명밖에 안되었습니다. 오다는 이제는 죽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기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포위를 당한 3일 후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었습니다. 적들은 장군을 중심으로 7중의 벽을 쌓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다의 진중에서 한 사람이 돌격해 오니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감히 그 사람이 오다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다는 적진을 뚫고 들어가 적장 이마까야의 목을 베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적들은 지휘관을 잃고 오합지졸이 되어 크게 페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의 용기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런 전법은 없지만 이마까야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전쟁을 하고 나는 일본의 신불을 위해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신불은 그의 신을 말합니다. 신불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는 이 땅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그의 이상과 꿈을 위해 싸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상과 꿈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살 때 그것이 우리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세 정말 불쾌하고 기분 나쁜 일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빛을 잃고 세상 사람처럼 되어 영적인 중성이 되어 가고 우리 학생들은 젊음의 패기를 잃고 거세된 무엇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돈을 벌 때도 꿈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그 돈 때문에 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돈을 많이 벌어 그것을 쌓아 놓고 살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미련한고 둔한 바보 부자와 같은 것입니다.

가난해도 하나님을 위한 꿈이 있고 사람들이 볼 대 시원치 않아도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민족을 위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지가 될지언정 큰 이상과 꿈을 가진 큰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몸은 자꾸 커지면서, 교회는 자꾸 비대해 지면서 사고방식은 경직되고 왜소해져서 상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해 젓습니다.

경영학에는 80대 20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모든 분야에 적용이 되는데 어느 시대나 이 사회의 구조는 피라밑형입니다. 위에 속한 20%의 사람들이 부와 명예와 아름다운 지위를 차지합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100가정을 어떤 특수한 곳에 집단 이주시켜 똑같은 농토를 주고 같이 일을 시작하게 했는데 5, 6년 후에는 그 중의 20%에 해당되는 사람이 80%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한 교훈이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층에 속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 역사적 사실은 이 세상 끝까지 계속이 될 것입니다. 20%에 속한 사람은 창조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은 뒤를 따라가며 사는 사람입니다. 20%의 사람은 생각을 하며 지금은 어려워도 내일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80%의 사람은 현실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배부르고 편안한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배고프고 고달프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세상을 빛나게 살아야 합니까?

월리임 패더라는 사람이 쓴 글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글이 있습디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길을 가다가 5달러(4,000원)짜리 돈을 주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그 돈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돈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그때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보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길바닥을 보고 다니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주었습니다. 그가 평생에 주운 것들은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수천 개의 동전들은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가 되지 못했고 그것들을 줍느라고 아름다운 하늘도, 땅의 꽃과 새들과 푸른 초목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넝마주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돈을 줍는데 평생을 바치다 넝마주이가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넝마주이가 오늘 얼마나 많은 세상입니까?

작년에 제가 미국을 갔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몇 곳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디즈니랜드입니다. 이곳은 용인의 자연 농원과 비슷한 넓이의 위락 시설이 가득한 놀이터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는 것이 우리들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놀기는 노는데 과거의 동화 속에서 놀고 현실의 이상 속에서 놀고 미래의 꿈속에서 놀았습니다. 정오가 되면 넓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놀이를 펼치는 팡파르가 있는데 미국의 개척 시대로부터 우주 시대까지를 극화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그런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라스베가스를 가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쇼를 구경했습니다. 쇼라고 해서 우리 나라 티비에 나오는 그런 쇼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물른 춤도 추고 마술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연극화한 쇼입니다.

셋째 그들은 가는 곳마다 관광 단지를 조성을 했는데 그 모든 관광지가 한결같이 미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 주는 꿈이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하와이의 진주만 에도 그것이 진열되어 있었고, 우리 나라 민속촌 같은 하와이 포르네시안 민속촌도 그랬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할 대상이 없어 울었습니다. 그는 땅이던 사람의 마음이던 무엇인가 정복을 해야 사는 20%에 속하는 지배 계급입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론티어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알렉산더 대왕이 한 말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뉴 프론티어의 정신을 자기의 일생의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꿈은 온 세계가 질서를 지켜서 힘께 잘 살아 보자는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전쟁을 했지만 그의 전쟁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질서 속에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33세에 죽었지만 그의 꿈은 거의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징기스칸도 영토욕을 가진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세계 통일의 꿈을 가진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정복자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를 창시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자랑입니다. 그는 유럽 통일이 꿈이었습니다. 유럽을 통일하여 세계를 하나로 하는 통일 국가를 이루는 꿈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유럽의 정치 경제, 사상을 지배하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끝내 사형을 당했지만 그는 꿈의 사람, 이상 속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에 존재하는 힘이 비슷하면 서로 싸우게 되니 그것들을 훨씬 능가하는 힘이 있어 모든 것을 하나로 집약시켜 평화의 유럽을 만든다는 꿈을 가진 것입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3만의 군대를 꿈과 이상을 주어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꿈을 가진 그 패잔병들은 놀랍고 막강한 군대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군대로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어떤 목공을 하시는 분이 평생에 번 돈을 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잘했다 싶지만 한편 바보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가 똑똑해서인가 죄인이어서 그런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꿈과 이상입니다. 예수님 이상의 비전이 있을 수 없고 예수님 이상의 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빌 부라 박사는 10달러의 모금 운동을 했습니다. 1달러로 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10억 인구를 구원한다는 꿈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이 일을 했습니다. '주여 나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내게 어떤 사업을 하고자 하는 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의 꿈입니다. 당신이 나의 진로입니다.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 시대에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꿈입니다. 우리가 새 시대에 살면서 늘 꾸어야 할 꿈은 예수님에 대한 꿈이어야 합니다. 24시간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 그것도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새 시대의 20%가 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모세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금식 기도를 하던 에스더의 꿈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동족이 구원 얻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지는 일이 있어도 좋다는 천국을 건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꿈은 우리들의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했던 하나님의 일을 우리 자식들이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길이요 꿈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망하는 길입니다.

요셉처럼 꿈을 꾸는 사람들이 됩시다. 하나님의 꿈, 예수님과 같은 꿈, 성령께서 꾸게 하시는 꿈을 꿉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드리는 청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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