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인간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열려라 에바다 2023. 10. 10. 09:03
인간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사야 53:6-12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부패한 인간의 특징은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는 증거는 자기 멋대로 제 길로 가는 것으로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 행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이 첫 번째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아담은 자기 멋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 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류는 한결같이 우리를 떠난 양 같이 그릇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각기 멋대로 제 길로 갔습니다.
 
이처럼 첫 번째 하나님의 양인 아담이 목자를 버리고 제 멋대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떠나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목자 없는 모든 인간은 양처럼 어리석어졌고 마음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우리에서 떠나 방황하며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각기 제 멋대로 제 길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부패한 상태이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각자 기준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 길이 옳다고 믿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길과 우리에서 떠난 길 잃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 오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영원한 멸망과 비참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의 죄악은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정해주신 율법을 존중하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도 없고 감사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부패한 인류를 우리에서 이탈한 양으로 비유한 것은 모든 인간의 수치스런 타락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감시와 제지가 없으면 길을 잃으며, 양떼에서 분리된 양은 신기하게도 우리로 돌아가기보다 점점 더 우리에서 멀어집니다. 그것이 각기 제 멋대로 행하는 양의 특징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길을 잃고 각기 제 멋대로 행하는 상태를 구원 받기 전의 상태로 묘사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즉, 바울에 의하면 “길 잃은 양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상태”가 바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로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의 영에 조종 당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납니까?

첫째는, 향락을 구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돈과 시간과 건강만 있으면 재미를 찾는 삶입니다. 그들은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과 한 통속이 되어 더 자극적인 향락을 구합니다. 이때 향락은 주로 술이 있고 여자들과 남자들이 함께 키득거리며 성적으로 타락하는 것이 있습니다. 향락을 추구하는 삶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삶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에게는 돈과 시간과 건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돈과 시간과 건강을 챙깁니다. 그러다가 돈과 시간과 건강이 충분하면 향락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삶은 자기 멋대로 자기 길을 달려가는 허망한 삶으로서 회개하지 않으면 이미 멸망이 정해진 죽은 삶입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삶을 방탕한 삶이라고 부릅니다.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으로 …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 너희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기며 비방하리라]

(벧전 4:2-4)


[17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느니라](엡 4:17, 19)

이처럼 향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삶이 “각기 제 길로 달려가며 그릇 행하는 양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현상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세속에 물들어 속물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불신자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혹시 교회에 다니더라도 그들은 세상 영광을 추구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도다”(딤후 4:10).

그들의 매일의 삶은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27-28, 30, 32)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각기 제 길로 달려가던 자들은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느라 부지런히 살았지만 결국 멸망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향하는 탐욕은 불신자들의 특징이며 성경은 이를 탐심이라고 부릅니다. 탐심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은 우상 숭배의 죄와 다를 바 없는 무섭고 사악한 죄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4:25).

“죄가 기회를 타서 … 내 속에 온갖 탐심을 이루었도다”(롬 7:8).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므로 인생을 사는 동안 신자의 의무는 끊임없이 탐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골 3:5-8)

그리고 이미 언급한 것처럼 탐심과 향락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은 돈을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다가 돈이 우상이 되어 돈을 쌓기만 하다 세상을 떠나는 어리석은 부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돈을 주인삼지 않으며 결코 돈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지 않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더라”(눅 16:13-14).

이렇게 향락과 세상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바로 마귀의 조종을 받으며 죄 가운데 사는 죄인들로서 각기 제 길로 가는 불신자들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세상 풍조를 따르며 오직 부패한 마음과 생각과 욕망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았던 모세처럼 이제는 세상 풍조를 거슬러 살고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셋째는, 자기 의를 구하는 현상입니다. 불신자들은 종교성 및 자기 의를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형식 및 전통을 지키는 것이 위선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그 길을 택합니다.

자기 의를 구하는 불신자는 돈의 노예가 되거나 방탕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는 삶을 택합니다. 사납고 무질서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경건의 모양을 따르며 자의적 숭배와 겉으로 보이는 겸손과 고행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종종 종교를 취하고 종교적인 의무를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가르치기도 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깊은 마음속에는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얻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명성과 존경을 얻기 위해 자기 의를 추구합니다. 이런 부류의 불신자들 역시 각기 제 길로 행하는 자기 중심적인 죄인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에 따르면 이 땅의 모든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아래에 있습니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문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 모두가 길 잃은 양처럼 그릇 행하며 하나님의 우리 안에서 벗어나 각기 제 길로 갔으며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하고 완고한 상태로는 오직 간교한 마귀의 손아귀에 이용 당하며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지 않으시면 인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원한 멸망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의 택한 양 떼를 찾아내어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들이 제 멋대로 행한 모든 죗값을 메시야가 대속하여 주고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 후반부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사랑하는 여러분!
각기 제 길로 가는 양떼와 같은 우리 인간들은 오직 선한 목자의 보살핌 아래 있게 될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가 그들을 찾아서 구원하시면 구원 받은 양 떼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의 발걸음을 따르고 그의 목초지에서 먹이를 먹으며 그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가 그들을 찾아서 구원하려면 그들이 지은 죄악에 대해 속량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갚을 수 없는 율법의 죗값을 선한 목자가 대신 치러야 합니다. 이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하시기로 하나님 앞에서 동의함으로 하나님은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가 양 떼의 죗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그(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하나님)가 사랑하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3-7)
 
이에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언약 관계에 있는 “우리 모두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 길만이 우리를 떠나 길을 잃은 양 떼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셔서 대속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이신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기기 위함이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눅 19:10; 막 10:45).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과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비참과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겪는 고통과 슬픔은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그 어떤 고난 및 슬픔과도 비교될 수 없는 무한하고 깊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메시야는 친히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십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지금 7절의 강조점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담당시키셨고,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면, 7절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며,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라고 되어 있고, 8절에서는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러 끌려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개역 개정은 7절과 8절에서 ‘곤욕’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원어로는 서로 다른 두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7절의 (아나ㅎ)는 괴로움을 당하는 곤욕이라는 뜻이고 8절의 (아차르)는 체포되어 구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7절과 8절 모두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여 곤욕 및 체포 상태로 들어가시는 것을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군병에게 체포되실 때 주님은 자원하여 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잘라버린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52 …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만일그렇게하면이런일이있으리라한성경이어떻게이루어지겠느냐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마 26:52-54, 56)
 
또한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십자가 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자기 백성을 위해 자원하여 받는 율법의 저주이기에 그 저주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막 15:2-5)
 
그러기에 본문 8절은 반어법을 사용하여 메시야가 십자가의 저주를 자원하여 받으심을 강조합니다.
“누가 그가 이 땅에서 끊어짐은 형벌 받아 마땅한 그의 백성의 허물 때문인 것을 알았으리요!”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자신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원하는 마음에서 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사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속의 사명을 자원하여 감당하심으로 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명이요, 이에 하나님의 아들은 자원하여 그 일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은 목적이 있습니다. 즉, 메시야께서 주의 백성의 죗값을 대속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백성이 죄 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생명을 얻어 의로운 성품과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앞에 세우고자 하셨도다( 1:22).
 
친히 나무에 달려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이처럼 의에 대하여 살고  과정에서 거룩하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우리  예수께서 자원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 속량을 치르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고난 받으실 죄와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사랑 때문에  잃은 주의  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며 그들의 대속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죄의 저주인 죽음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생을 주셔서 의롭고 거룩한 삶과 성품을 살아감으로 마침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유대인들은 이사야 53 3절이 예언한 것처럼 예수께 죄가 많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물론 자기 백성에게도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당하다고 따지거나 억울하다고 분노하지 않으시고 잠잠히 묵묵히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한편, 8절에서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요절(夭折)하셨다는 뜻입니다. , 세상 사람들이   우리 주님은 갑자기 삶이 끊긴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9절에서 또 다시 강조하는 것은, 메시야께서 요절하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악 때문인 것을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으셨도다.”


강포라는 것은 악하고 그릇된 마음으로 사람들을 악하고 거칠게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한 포악한 범죄 행동을 강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로마 군병들에게 강포를 당하실 만한 그 어떤 강포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의 입으로도 죄를 범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가장 강포를 행한 강도처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강포로 가득한 강도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눅 22:32-33).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강도와 함께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시신은 악인들의 시신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12절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리고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그는 이렇게 죄인 중에 극악 죄인으로 간주되어 죽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눅 22:37).
 
하지만 9절에서 반전이 시작됩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줄거리를 이사야 52장에서 이미 살펴보고 알고 있습니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사 52:15).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비천의 상태에서 지극히 높으신 영광의 자리로 오르기 시작하신 때는 예수님의 시체가 십자가에서 내려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안착되어 소중하고 영광스럽게 다루어진 때입니다. 구약에서 어떤 시체를 정중하고 정성스럽게 다룬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해 귀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관습이었습니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눅 23:54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마 27:57-60; 눅 23:54)
 
그리고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새 무덤에서 우리 주 예수님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 가운데 최초의 사건으로서 첫 부활이며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이후로 영원히 살아계셔서 지금도 그리스도의 중보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나아가 지금 우리 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시며 또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마음에 내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본문 10절부터 12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속량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여 줍니다.
 
첫째, 10절을 보면, 메시야가 상함을 받고 질고를 당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며, 메시야의 이러한 십자가 희생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속건제물이라고 알려줍니다. 속건제물이 무엇입니까? 속건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의 빚을 갚아주거나 또는 부과된 죗값을 대신 치름으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속죄 제물이었습니다(레 5:15). 그런데 속건제물을 받으신 주 여호와께서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왜 기뻐하십니까? 죄로 멸망할 주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바치시는 속건 제물로 인해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1 하나님이죄를알지도못하신이를우리를대신하여죄로삼으신것은우리로하여금그(그리스도) 안에서하나님의의가되게하려하심이라](고후 5:19-20)
 
10절에서 중요한 표현은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인데 누가 속건제물을 드리는 것입니까? 한편, 여기서 개역 개정이 ‘영혼’으로 번역한 원어는 (네페쉬)인데 이 문장에서의 뜻은 살아있는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신성에는 목숨이 없습니다. 오직 인성에 목숨이 있습니다. 그 목숨을 속건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속건제물을 드리는 것입니까? 그리고 속건제물로 무엇을 드리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속건제물로 드리는 분은 대제사장 메시야입니다. 즉, 메시야가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속건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목숨을 속건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렛 예수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목숨을 영원한 속건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사도는 매우 정교하게 진술합니다.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도다](히 10:5-7, 10-12)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속건제물로 바치신 이 사건은 유일 무이(唯一無二)한 제사로서 다른 모든 짐승 제사의 원형이며 실체였습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여기서 “세상 끝”은 지금 세대와 오는 세대의 최고 절정의 중간 지점으로서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속건제물로 드리신 때를 말합니다.
 
이제 다 이루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 사이에 언약으로 맺어진 구속 사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고 지극히 영화롭게 하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모든 자녀와 백성을 그리스도에게 신부로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신부를 “씨”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함께 하는 모든 지체들을 말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인 주의 백성을 뜻합니다. 그들은 거듭난 자녀들로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씨”입니다. 구약 배경에서는 메시야를 앙망하면서 많은 자손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께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한없이 주십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들처럼 많이 주십니다.
 
또한 메시야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를 구약의 표현으로 “그의 날은 길 것이요”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시는 부활하신 메시야를 잡아 삼킬 수 없습니다. 
 
이제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성취하신 일을 뒤돌아보십니다. 11절을 보니,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구속 사명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 완성과 결실을 대하실 때 얼마나 한없는 만족을 느끼며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여호와께서 친히 여호와의 종 메시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여기서 “자기 지식”은 메시야가 가지신 지식입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가 되기 전부터 성삼위 하나님 사이에 맺으신 언약에 따라 창세전부터 갖고 계신 지식입니다.
 
그 지식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로서 복음입니다. 그 지식은 예수께서 십자가 속량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셨을 때 성령으로 알게 되는 복음의 지식이었습니다.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즉, 예수님은 복음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택한 백성의 죗값을 친히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고, 또한 나실 때부터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완전한 의를 성취하셔서 영생을 얻어내시고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및 의롭다 칭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전가된 의와 함께 약속대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영생은 아담에게 조건부로 주어졌던 생명이었지만 그는 죄를 범함으로 영생을 얻지 못했으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으며 그 생명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나아가 주께서 주실 영원한 기업, 즉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영생은 가장 영광스런 완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 여호와 하나님은 위대하고 영원한 경륜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대속의 사명을 맡기신 것이고, 그리고 그 일을 다 이루신 아들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장 위대한 선물을 뜻하는데 바울은 그것을 성령이라고 알려줍니다. 즉, 하나님은 대속의 사명을 완수하신 메시야에게 성령과 및 그의 모든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성령과 및 그의 은사들을 누구와 나눕니까? 자기 씨, 즉 주의 백성들과 나눕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나누어 주시면 주의 백성은 어떤 복을 누립니까?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죄를 넉넉히 물리치고 의를 이루며, 지혜와 거룩과 사랑 가운데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면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복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함으로 죽음과 마귀에게 승리하셨고 이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승리의 선물, 즉 성령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의 자녀로 구성된 교회에 부으시는 것입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성령으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7-10)
 
이처럼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면서 이루어 내신 십자가의 속량 때문에 이제 부활하셔서 영광에 이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피로 많은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 덕분에 죄로 인해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 의를 위해 살게 되고, 어둠에서 빛의 나라로 들어온 거듭난 주의 자녀들은 주의 중보 기도 덕분에 계속 회개와 믿음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온전히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히 7:25-2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러한)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시고, 나아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항상 인격적으로 의식하면서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늘 주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