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열려라 에바다 2023. 10. 10. 09:07

누가복음 20 9-26: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9-18: 돌 위에 사람이 떨어지면 가루가 된다. :에 보면 우상이 사람이 던지지 않은 돌에 넘어져서 깨져서 가루가 되어 바람에 다 날려간다고 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거다. 사람 위에 돌이 떨어지면 사람은 가루가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자기 머리 위로 누가 돌을 던졌겠느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박살나고 타락된 요소가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더라면 하나님의 그 심판을 피할 수 있었겠지? 이건 자기 머리가 문제이고 조직의 장들이 문제이다. 교회라 할 때 목회자가 큰 문제가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나 선지자를 보내는 것은 깨닫고 심판을 받지 말라는 뜻이 들어있다. 어떤 인간이던 어느 족속이던 어느 나라이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19-26: 그들이 아무 잘못이 없는 예수님을 왜 잡고자 할까?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가 자기들을 염두에 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비유가 옛날 하무라비 책이나 다른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책을 한 번씩 읽어보고 있다가 생각이 나서 그걸 들어서 적절하게 비유를 하는 것이냐, 예수님의 하시는 비유는 그 때 그 때마다 나오는 것이냐? 후자다. 예수님은 누가 한 말을 들어서 누가 이렇게 했다네 이런 건 없다.

 

우리가 성경을 이치적으로 많이 깨닫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일반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깨달은 사람은 일반세상에 있는 것을 그 때 그 때에 다라 즉시 즉시 깨달음에 쓸 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설교를 하면서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다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다. 왜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그들의 말을 갖고 와서 성경 하나님의 말씀과 대등한 뜻으로 쓰느냐? 이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예화 책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많이 있는데 목사님들이 그런 예화를 쓸 필요가 없는 거다. 그건 죽은 말이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 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철학자나 도인들의 말을 많이 쓴다. 교회에서도 그런다면 이건 우리 입장에서는 잘못된 거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유식한 것으로 알아주지만 그건 전부 활동적인 측면에 들어가 있다. 그런 게 일반인들에게는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영적 계시의 깨달음에서 이치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그 안에는 사람을 바로 세우는 기초가 깔려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씨앗이 돼서 사람 속에 떨어지면 그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깨달아지고 생각이 나고 하는 거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잘못된 줄 알면 회개를 하고 고쳐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는 것. 정신 사상을 거기에 맞추고, 그 다음에 언행을 고쳐나가야 한다. 따라서 먼저 바른 신앙의 노선에 들어서지 못하면 회개가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 따로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따로 있는 거냐, 아니면 그 길이나 저 길이나 똑같은 거냐? 확실히 다른 거다. 질적으로 다르고 근원적으로도 다르고 성장적으로도 다르고 개념적으로도 다르다. 개념은 목적과 같이 들어간다. 목적이 다르면 밥 먹고 일을 하는 행동은 비슷하다 할지라도 이해타산 평가성을 갖는 것도 다르다. 따라서 근원이 문제다. 그 정신 사상이 문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옳은 이치를 알았다면 내가 옳은 진리이치대로 바로 살아야 할 텐데 하면서 나는 연약합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라도 성령으로 감동시켜서 바른 길로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나가는 거다. 그런데 바른 이치를 던져주면 깨달아져야 할 텐데 대뜸 나오는 마음이 사람이 그래서야 어떻게 세상에서 사나 한다면 이건 회개를 하겠다는 감화냐, 안 하겠다는 감화냐? 안 하겠다는 감화다. 말 한 마디 속에 어떤 감화성이 작용하고 있는지가 나오는 거다. 감화성대로 사람의 말이 나온다. 잘못된 줄 알면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개인 대 개인의 일반적인 감정으로 하시는 게 아니다.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두고 나오는 희로애락의 감정이다. 사람이 진리에 많이 절여있으면 희로애락의 감동 감화성이 궁극적 결과적인 그 본질로 들어가는 거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대국적인 큰 구원이 있는데 세계 인류 인간이라면 하나님의 이 구원목적에 다 들어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심도 인간의 구원목적을 위해서 활용적으로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도 구원목적에 들어있어야 한다. 자식이 거기서 반발을 하거나 피하거나 도망을 가게 되면 만물이 그 자를 가만두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이 안 되면 자기에게 심판성으로 그게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유대 종교인들이 자기를 구원할 예수님을 죽이려고 앙심을 품고 있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누구 때문에 자기들의 일이 잘 안된다고 보고 있느냐? 예수님 때문에. 그래서 죽이려고 하는 거다.

 

그런데 그들이 백성들이 무서워서 죽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볼 때도 그들이 백성들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잡혀주고 안 잡혀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알아서 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건지? 후자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무리만 없으면 예수를 잡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잡혀주고 안 잡혀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없고 와는 상관이 없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 당신의 구원설계에 의해서 잡혀주고 죽어주고 하는 것이다. 당신의 죽고 사는 것은 당신의 설계 속에 들어있다. 사람 편에서 보면 아무도 없을 때 예수를 잡자 이렇게 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계획에 걸려드는 게 아니다. 잡히고 죽고 하는 것은 당신의 설계 속에 들어있다.

 

이것을 들어서 믿는 우리에게 적용시켜 말을 하자면 내가 진리대로 나갈 때 일가친척 부모형제들이 그런 자기를 매장시킬 것 같고 자기를 외톨이로 만들 것 같으나 진리가 들어있는 성도는 주님 당신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시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너는 무리들을 무서워하지 말아라.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권이 들어있다.

 

믿는 나에게는 옳은 것을 전해야 하고, 옳은 것을 말해야 하고,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말해야 할 권이 들어있다. 성도가 이 권을 나타낼수록 자기의 권은 올라간다. 안 타나내면 못 올라간다. 예를 들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 내가 횃불을 높이 들면 자기 뒤로 많은 사람이 따라온다. 횃불을 안 들거나 꺼뜨리면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거다.

 

거짓된 인도자들은 사람들을 무서워한다. 그러니까 이들처럼 사람들의 비위나 마음을 사려고 한다면 그는 신실한 종이냐, 거짓된 종이냐? 거짓 종이다. 거짓된 종은 무리 쪽으로 자기의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다. 따라서 종교계의 지도자라 해도 큰 건물과 교인들의 숫자개념으로 말을 한다면 이 목사는 거짓목사로구나 하고 금방 나오는 거다. 본질에 의해 볼 때 네가 거짓목자라는 걸 네 입으로 말했다 이렇게 되는 거다.

 

말 표현 자체를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이 질을 말하고 있는지 양을 말하고 있는지, 없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지 영원히 갈 것을 말하고 있는지 하는 것이 본인의 말에 의해 분별이 되는 것이다. 이 잣대를 가져야 그 사람의 인격이 고상해진다. 하나님의 가치판단과 같은 성품의 사람이 고상한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다. 또한 해와 같은 사람이요 등불 같은 사람이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종이다.

 

거짓된 인도자들은 사람을 무서워한다. 왜 무서워하느냐?? 자기들의 일을 위해서. 자기들의 일이 안 되니까. 이를 위해 교인들의 비위를 맞춰주느라고 용을 쓰는 이건 거짓 목자다. 이단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예수님 당시의 그들을 보면 자신들이 진리에서 이탈된 줄을 모르는구나. 자기들의 신앙사상 소원 목적이라는 것이 진리에서 이탈된 줄을 모른다.

 

그들이 자기들의 뜻대로 안 되니까 또 어떤 방법을 쓰느냐? 예수님을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걸려들게 하려고 한 꾀를 낸다. 예수님께 정탐꾼들을 보내서 자신들이 의인인 체 하면서 예수님을 자기들의 꾀에 말려들게 하려고 한다. 자신들이 신분적으로 예수님 앞에 의인인체 하려면 즉, 자기들이 유식한 것처럼 하려면 예수님을 칭찬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척 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의 마음을 살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자기를 안 믿는 사람이나 이단자들이 와서 높인다면 높이는 그 바람을 타지 말아라. 올라가다가 떨어진다. 씨름선수가 상대방을 높이 올릴 때는 상대를 높여주려고 올린 거냐, 땅으로 내리꽂으려고 높이 올린 거냐? 그 수법이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그러는 그들의 마음을 모르실까? 안다. 우리의 마음도 다 아신다. 호응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이것은 사단 마귀의 짓이다.

 

의인인 척 하는 것은 두 번째는 변장이다. 즉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다. 옷을 어떻게 입는다든지 하는 것은 변장술인데 우리가 그걸 잘 알아야 한다. 요즘 목회자의 가슴에 십자가 배지를 달기도 하는데 그건 자기의 신분을 나타내려고 하는 거다.

 

21절로 보면 그들이 예수님께 간사스럽게 하는 말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는 입에 붙은 말뿐이다. 예수님은 어느 시대 어느 누가 봐도, 천군천사가 봐도 절대 옳음이다. 그들도 이렇게 말을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 옳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옳은 분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상대를 안심시켜 놓고 죽음으로 걸려들게 하려는 계교가 들어있는 거다.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요, 옳은 사람을 헐뜯는 것은 사단의 짓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노니.’ 입에 붙은 말일 뿐이지 그들이 알긴 뭘 알까? 예수님 당신은 늘 바르게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면 그 말씀에 따라야지 되는 거지 옳다고 하면서 안 따른다는 것은 거짓말쟁이다. ‘당신은 바르게 말씀하십니다 했는데, 우리가 볼 때도 예수님은 언제든지 옳은 이치로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서는 바르게 가르치신다고 한 말이 자기들이 옳은 이치를 알고 하는 말이냐,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하는 말이냐? 후자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세상 것을 가지고 그것을 기준을 삼아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는 말인데, 이것을 예를 든다면 세상학문이나 재산 권세 명예 등등을 기준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를 않다. 말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처럼 하면서도 그들의 행위는 그렇지를 않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칭찬을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을 외모로 취하고 있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재산의 조건이나 학위 등 세상이 알아주는 것이 있다거나, 어떤 조건이나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큰 예배당이나 사람숫자로 옳은 종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할 때 외모로 기준을 세워서, 세상의 조건성을 기준으로 세워서 뽑았느냐? 안 그렇다. 무식한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서 세상의 지혜자보다 더 지혜자로 만들었다. ‘세상 지혜자들을 부끄럽게 하겠다 하는 것은 당신의 종들을 얼마나 차원 높게 무장시키고 영적 기능 지능 면에 얼마나 월등하게 만드신다 함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다.

 

산 위의 엘리야를 군대 50명이 와서 내려오라고 했다. 이건 건방진 거다. 왜냐? 차원이 올라가야지 왜 내려오라고 하느냐?

 

목사님들 세계에서 서로가 의논이 안 맞아서 헤어졌는데 그 후에 전화를 해서 우리 한 번 만나서 식사합시다 하는 게 있는데 이런 일은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건 신앙사상 정신이 벌써 틀린 것이다. 그러니까 그 속에는 인간적인 주관이 그대로 살아있는 거다. 이건 옛사람이 안 죽은 거다. 잘못됐으면 본인이 와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할 때 재회의 길이 열리는 것이지 멀리서 전화로 그러는 것은 안 되는 거다. 본인은 그런 뜻이 아니겠지만 자기가 만들어진 대로의 소리가 나오는 거다. 사람 되고 안 되고 하는 됨됨이 속에서 그게 나오게 된다.

 

산 위에 있는 선지자를 내려오라고 하니까 엘리야가 내려왔느냐? ‘너희들이 나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아느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질 것이다.’ 그 말대로 그들은 번갯불에 다 구워졌다. 또 청년들이 그랬던 것 같은데 엘리사를 보고 대머리여, 올라가라. 올라가라 하니까 숲에서 곰이 나와서 찢어 죽였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끌어내리는 것은 자기에게 저주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물질적 환경적 조건을 보고 사람을 대우하면 안 된다. 사람이 속에서 어느 정도 되어가고 올라가고 있는 건지, 얼마나 바로 믿으려고 마음이 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진리를 도외시 한 채 세상으로 자꾸 나가려는 성질이 들어있는 건지 그걸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교인 간에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보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타락이다. 이건 너부터 문제다. 다른 사람을 볼 때 항상 신앙심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옳다. 상대방의 구원을 염려해서 하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되는 거다.

 

거짓된 교회의 인도자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조직이 큰 거나, 사회적 명예 교권적 권위나, 명예 물질적 조건 이런 걸 가지고 사람을 취한다. 말하자면 나이 많은 목사는 연로하니까 시골로 쫓겨나고, 젊은 사람들은 박력 있게 할 테니 교회 안을 다 차지해서 세단 차를 타고 노회에 나오면 그 목사는 노회에서도 올라갈 것이다. 기준을 그렇게 가지고 본다 그 말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했다. 그들이 이걸 안다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살고 옳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고 그들의 속에는 마귀의 계략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된 자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자들을 주의를 해야 한다. 이웃이 왜 자기를 높이느냐? 높이는 척 하면서 뭘 얻어가려는 거냐, 뺏어가려는 것이냐, 도둑질을 하려는 거냐? 그게 있는 거다.

 

22: 23-26절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성을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이 표식이 누구의 화상과 글이 박혔느냐?’ 했다. 이에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했다. 이에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우주의 모든 세상만물은 다 하나님의 지으심이다. 모든 인류 인간도 하나님의 지으심이다. 가이사도, 그들의 하수인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다 하나님의 지으심이다.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 일반은혜로 은총으로 살고 있다.

 

가이사 황제가 하나님의 지으신 것을 가지고 자기 수하에 있는 수공예 공작을 잘하는 사람을 시켜서 돈에 자기 화상과 글씨를 넣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고 한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들은 가이사로부터 하루 품삯을 받는 자들이구나 하는 게 들어있다. 그리고 또한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야지 하는 뜻도 들어있는 거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는 것은 신앙정신 사상의 태도를 분명히 확실히 똑바로 가지라 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정신 사상의 태도를 똑바로 가져라.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물질도 자기가 신앙정신으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게 아닌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고 그 세상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감사의 예물이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 면에서 자기 마음속에 누구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면 그 쪽으로 내는 것이다.

 

그들이 쓰고 먹고 마시고 하는 것 전부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인간들이 수공물로 조작해서 쓰는 것이다. 전부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입이 막힌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 일을 해서 십일조를 내기는 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십일조를 자기가 전에 다녔던 교회가 가난하거나 하면 그 쪽으로 보내는 교인이 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 마음속에 그 교회의 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 그 교회에서 받은 것이냐? 그건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본이다. 쉽게 이해를 하자면 대한민국 백성은 백성으로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은 기본이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는 건 기본이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구원 얻은 백성입니다 하는 이건 기본이다. 그 다음에 자기가 예수를 믿고 말씀을 받아나가면서 한 이치라도 깨달으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히 자기를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감사헌금이다. 그런데 어느 교회는 십일조만 있고 감사헌금은 없다고 하는데 이건 문제가 있다. 예수 믿고 살면서 감사할 일이 전혀 없는 거냐?

 

한 이치가 트이지를 않으면 그 다음의 깨달음은 안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것은 한 이치를 깨달으면 다음 것은 자동적으로 깨달아진다는 의미이다. 이치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정신 사상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서 자기의 미래가 나오는 건데 자기의 이 미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감사 속에는 이게 들어있는 건데 감사헌금을 안 하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구나.

 

그런데 하도 못 깨달아서 그런 건지 성경에 하나님의 전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왜냐? 우리 입장에서 보면 진리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이치를 가지면 자기의 생활에서 지혜가 나오고, 세상살이의 지혜가 나오니 이것은 돈으로 환산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인데도 감사헌금이 없다?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그래, 네 마음이 그러냐? 그렇게 따지고 싶으냐? 그러면 나도 너를 따져서 그대로 대우해 주마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교인에게는 감사할 일이 없는 거다.

 

사람이 감사가 되면 마음속에서 즐겁고 기쁘고 이치가 깨달아지고, 그렇게 되니까 그 감사를 또 자꾸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자꾸 은혜의 부으심이 오는 거다. 그럼에도 감사가 없는 것은 감사할 마음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은 감사가 뭔지 모르는 거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물질적인 수입이 많아지거나 자기도 모르는 돌발적인 무슨 좋은 일이 생겼다 하면 감사합니다 할 것이다.

 

병이 들어서 죽는 사람이 감사하냐, 감사 안 하냐? 병이 다 나아서 병원에서 나올 때는 감사하냐, 안 감사하냐? 병원에서 죽을 때는 감사가 안 되는 거냐? 감사다. 왜냐? 고통스런 이곳에서 행복하고 고통도 없고 죽음이 없는 곳으로 빨리 데리고 가시니 감사다. 그렇게는 생각을 못 하느냐?

 

죽으면서 감사헌금을 하는 사람을 봤느냐? 그런데 OOO집사님 동생이 장애인인데, 죽을 때 감사헌금을 하고 죽었다. 병이 나으면 그 병이 나으려고 병원에 돈을 수없이 갖다 주는 것은 많이 봤지만 죽으면서 감사를 하고 죽은 사람은 그 사람밖에 못 봤다. 가슴이 뭉클하다.

 

태어나는 것만 감사냐? 죽는 것도 감사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데리고 가는 것도 감사다. 우리에게는 감사를 안 할 게 없다. 전부는 감사다. 그냥 감사냐? 아니다. 개달음을 주고,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더 큰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니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모른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