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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받는 자세

열려라 에바다 2023. 10. 11. 09:55

봉서방추천 2조회 3623.10.11 03:38댓글

 

“나를 가까이 하는 자에게서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레10:3)

심령의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도록 우리 영혼이 올바로 행해야 할 또 다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의 온유함으로 받는 일입니다. 약1:21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온유함으로 받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구절의 전반부는 영혼의 준비와 관련해서 언급했던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서두름이 없이 여러분의 영혼에 고요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말씀을 듣고도 유익을 얻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못하게 되는 일이 많이 있는데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그 사람들 가운데 양면적으로 격양된 마음의 상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의 측면은 양심에 어떤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격양된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고, 또 자기들이 원하는 위로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이 불만족스럽고 비뚤어진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 이것이 도무지 그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거나 또는 이를 통해 즉각적인 위로를 얻지 못하게 되면 그들의 심령이 곧 언짢아지고 뒤집혀져서 말씀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좀 불편한 것이 나오기만 하면 그들의 심령 속에서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말씀이 그들에게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이건 나하고 상관없어’하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양심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그 심령의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조용히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에 평화를 일러주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이 오늘 이 시간에 나에게 맞지 않는다 싶어도 다음 언젠가는 맞게 될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귀를 기울이십시오.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말씀은 내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선하다 하여도 종국에는 말씀으로 선해져야 합니다. 양심의 문제를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온유한 심령으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격양된 마음 상태를 가지게 되는 또 다른, 더 나쁜 경우는 자신들의 양심에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죄와 관련해서 말씀이 이를 건드리려 할 때 그 마음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 및 말씀 사역자들을 대항하여 분개하는 경우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애지중지 간직하고 잇던 타락된 것들을 말씀이 도려내려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의 습관적인 악행과 떳떳하지 못한 마음의 자세들을 말씀이 질책하며 또 이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말씀을 대항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 두려운 일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서 속에서 악한 군주 여호야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추운 겨울에 불 곁에 앉아 두루마리의 말씀이 읽혀지는 족족 작은 칼로 그것을 잘라 화를 내며 불 속에 던져 넣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큰 죄를 슬퍼하면서 매년 금식을 하여 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여호야김이 누군가 하면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이 녹았던 요시야 왕의 아들이 아닙니까? 요시야는 율법의 말씀을 듣고서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야호야김은 그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와는 너무나 다른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람이 말씀을 대항하여 그 감정이 제 마음대로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모욕하는 일이 됩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나 혹은 듣고 난 후에나 여러분은 그 들은 말씀에 만족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모일 때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그 마음을 건드리려 할 때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을 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말씀이 여러분의 위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면전에서 격노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여러분의 수준보다 낮은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더 낮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지구상의 그 어떤 군주나 임금들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우리가 그 앞에서 겸비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적합한 태도인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또 다른 길은 우리가 그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사야 66장 초반의 유명한 성경구절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너무나 놀라운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그의 영광 가운데 얼마나 높이우고 계시는지를 보십시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너무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가련한 영혼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가 이토록 영화로우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라.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그 가련한 영혼을 내가 권고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성전을 지어드리는 자보다 그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귀하야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 할 처소가 어디랴?” 저들이 나를 위하여 멋진 성전을 지었지만 내가 그것을 귀하게 볼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들 나에게 저 큰 집을 지어준 자들보다 더 귀히 여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앞에 떠는 자를 얼마나 높이 보시는 지를 잘 말해주는 성경구절입니다. 그에게 영광스러운 성전 지어준 사람들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런 장엄한 건물을 짓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이를 매우 큰 일오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만큼 귀한 일이 되지는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특별한 길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그 큰 권위를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다른 어떤 역사들보다 그의 말씀 속에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나타나는 영광보다 말씀 속에 나타나는 그의 영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항해를 하는 분들은 더 넓은 곳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들을 많이 접해 보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 속에서 보다 그의 말씀 속에 더 큰 경이로움이 잇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시편138:2은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말씀이 다른 어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들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일보다 그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 크게 고양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영적으로 자성된 영혼의 좋은 표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가지고 여러분의 양심에 호소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어떤 일보다 그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 크게 고양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선한 양심으로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땅 위의 경건한 영혼 치고 다른 어떤 일들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을 보며 그 마음이 여기에 사로잡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 영혼이 가장 미약한 은혜의 상태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두려워 떠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생사의 기로 간에 놓이게 하는 것이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말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 말씀을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오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자세로 나아오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기만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 곧 자기들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열어 보이는 자들보다 자기들이 더 높은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의 자세는 말씀 자체를 상고하려 하기보다 사람 스스로를 믿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미 그 자신의 생각과 이해로 배불러 있기 때문에 빈 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말씀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작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에스라10:2-3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 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가 그 ‘의논’에 가장 적합한 자이며,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점은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영혼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합니다.

겸손히 순복하는 자세로
다음으로 우리가 듣는 말씀 앞에 겸손히 순복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절하고 그 아래에 엎드려져야 합니다. 역대하 36;12에 보면 주목할 만한 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책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매우 신기한 내용입니다. 큰 왕 시드기야가 스스로 겸비하지 아니하였다는 큰 죄의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스스로 겸비케 한다? 누구 앞에서 말인가?”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겸비케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위의 본문이 지적하는 것은 시드기야가 선지자 예레미야 앞에서 스스로를 겸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왕이 선지자 앞에 스스로를 겸비케 할 필요가 있는가? 이는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말씀의 전달자 앞에서도 우리가 스스로를 겸비케 하기를 하나님은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여러분에게 전달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앞에 엎드려서 순종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판단, 여러분의 견해가 어떠하였든지 간에, 말씀 속에 무언가 그것들과 부딪치는 것이 올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판단을 복속시키고 여러분의 양심을 복속시키며, 여러분의 뜻을 복속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비록 아직 여러분의 영혼에 온전한 만족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라도 여러분은 그것들 까지도 다 복속시키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부인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말씀 앞에 복속되고 납작하게 엎드려지게 되어야만 합니다.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으로 은혜로운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성령의 증거와 증시 가운데서 저의 앞에 열리어지기 전까지는 저는 이런 저런 만족을 추구하였던 사람이었으며 저의 마음이 이런 저럼 만족을 추구하였던 사람이었으며 저의 마음이 이런 만족거리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임 주께서는 저에게 성령의 증거 가운데서 주의 말씀을 열어 주심으로 주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 이 땅위에서 저의 이름, 저의 위로, 저의 만족이 그 무엇이든 상관치 아니하고 저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저 자신을 주님의 말씀 아패 복속시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들음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어집니다.

나는 독일의 한 신학자가 또 다른 독일 신학자인 외콜람파디우스에게 보낸 글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말씀이여 임하소서. 우리가 600개의 목을 가졌다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할 것입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여 임하소서. 우리가 600개의 목을 가졌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 앞에 굴복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위에 승리하도록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여질 때 그 말씀 앞에 엎드릴 줄 아는 회중을 가진 다는 것은 참으로 흠모할 만한 일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거룩히 여김 받게 되어질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설교자로서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 앞에 엎드리기를 원치 낳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을 들 때 여러분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유, 여러분의 영혼, 여러분의 몸 등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이 말씀에 복속시키기를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겸손한 순복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 영혼의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또 다른 방도는 말씀을 사랑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내가 그 앞에 순복해야 하겠다”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내가 이 말씀이 순복하지 않으면 염병이나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따를 것이야”하는 생각에서 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충분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기쁨으로 말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랑과 기쁨으로 말씀을 받지 않으면 말씀이 영화롭게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이름이 여러분에게 영화롭게 되어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살후2:10에 보면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고 말하는데 이처럼 말씀을 사랑으로 받지 아니하는 것이 사람들의 미혹의 영에게 넘겨지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오게 될 때 그는 모든 속이는 것을 가지고 와서 이로써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멸망에 빠지게 될 희생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진리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나의 영혼에 선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으로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잠2:10-11에 말하기를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이해 속에 진리를 밝혀줄 때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즐겁게 하여 준다는 것, 여러분의 영혼이 그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말씀은 바로 선한 말씀이요 나의 마음에 선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들을 때 그들에게 다가오는 말씀을 인하여 “아 이 말씀은 좋은 말씀이지 이 말씀이 나의 영혼을 즐겁게 하는 구나”하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진정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행전2:41은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였던 경건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즐거이)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말씀을 즐거이 받은 사람의 수가 삼천이나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청중을 베드로는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요. 그들이 즐거이 말씀을 받았을 때 그들 가운데 선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질문)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돌짝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유익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헤롯도 세례요한의 말을 기쁘게 들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말씀을 기쁘게 드는 그 자체도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대답)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기쁨에는 위선자들이 가짐직한 기쁨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결여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 룻 없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문제를 별도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즐거움이나 기쁨은 돌짝밭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기쁨과는 다른 종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 인용한 잠언이 말하고 있는 기쁨, 삼천 명의 무리가 말씀을 받을 때 가졌던 기쁨, 이것은 돌짝밭 같은 사람이 가진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 분이 계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위선자가 가지는 기쁨은 말씀이 새롭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말씀 속에 그 사람이 지금까지 갖지 못하였던 새로운 요소, 새로운 인식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얻는 기쁨이라든지, 아니면 말씀을 통해 존경이나 높임을 받게 된다든지, 아니면 말씀에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다른 세상적 가치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말씀을 통해 존경이나 높임을 받게 된다든지 말씀아 가진 자연적이고 세상적 탁월함으로 인해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 기쁨은 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말씀 속에 잇는 영적 탁월함을 아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말씀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나의 영혼에 나타내어 주고 이 말씀이 나의 영혼에 다가옴으로써 나의 욕망들을 죽이고 나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여 주기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곧 나로 하여금 말씀 안에서 기뻐하게 하고 말씀 속에 있는 거룩함과 영적 탁월성을 발견함으로써 기뻐하게 하는 그런 기쁨인 것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순결하므로 주의 종이 그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선자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유리와 같이 투명하게 보노라. 그 말씀이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함으로 나의 영혼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친교케 할 수 있음을 아노니 바로 이것이 나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도다.” 어떻게 위선자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에, 우리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의 길 입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아홉 번째의 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그 말씀 가운데서 거룩히 여기려면 우리는 그 말씀을 정직한 마음으로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가복음8:15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받을 때 여러 가지 밭이 있다는 것인데, 이 여러 가지 밭은 마음의 종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는 길가 밭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을 들을 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그 순간에 말씀의 씨는 사라져 버리고 마치 아무 것도 듣지 않은 사람과 같은 꼴이 되고 맙니다.

다음으로는 돌짝밭과 가시밭이 있습니다. 이들은 들을 때는 기쁨으로 듣지만 (우리가 앞서 본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염려가 말씀의 씨앗을 정직하고 좋은 마음속에 잘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좋은 마음과 정직한 마음이 함께 합한 사람입니다.

좋은 마음이란 그 속에 악의가 없는 마음, 말씀을 대항하는 것이나 말씀의 영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 한 마디로 말씀에 반대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선한 마음이란(약1:21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린 ”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것’이라고 번역된 말은 배설물을 뜻합니다. 몸으로부터 나온 깨끗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의 죄악됨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오지만 그 마음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과 같이 더러운 것으로 뒤섞여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넘치는 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성령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는 듯합니다. “드러나게 더러운 것, 곧 냄새나는 악과 혐오스러운 죄들을 제하여 버리고, 이런 더럽고 악한 마음으로 나아오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마음속에 은혜의 역사를 저항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넘치는 악에 해당된다. 모든 종류의 악한 생각들과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그릇된 애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의 마음과 애정 속에 있어야 할 것 이상의 과도한 것이 있어서 향해서는 안 될 방향으로 있는 것이 있다면 이를 제하여 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러분이 세상의 드러나게 더러운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다고 하여도 여전히 이런 허망한 것들을 남겨두고 있다면 그래서 은혜가 아닌 그 어떤 것에 여러분의 마음이 푹 빠져 있다면, 이런 것에 대해서도 여러분의 마음은 깨끗하게 되어져야 합니다. 그 마음속에 악한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선한 마음은 이런 것을 제하고자 힘쓰며, 더럽고 못되고 혐오스러운 것들뿐만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밝혀주시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선한 마음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인고 하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래라 저래라 일러줄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지 들으려고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선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속에 악한 목적이 없고 또 악한 계교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은 선한 것은 무엇이든 들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직한 마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정직하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정직한 사람이라 칭함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속에 정직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잘 감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의 씨앗을 받는 것이 길가밭이나 돌짝밭, 가시밭과 같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세 종류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자들이 정직한 사람이라 칭함을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어쩌면 세상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켜서 정직한 사람이라 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길가밭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고려치 않으면서도 정직한 사람이라 불리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들은 단지 설교를 들으러 나오는 것일 뿐이고 그것도 듣고 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맙니다.

세상에서는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지만 자기들이 들은 설교의 말씀을 그 삶속에서는 전혀 적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 역시 정직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듣는 즉시 취하여져 버리고 마는데도 세상에서는 여전히 정직한 사람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 역시 정직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잎사귀를 내기는 하면서도 이 정직한 마음을 자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정직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잎사귀를 내기는 하면서도 이 정직한 마음을 가지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정직한 마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고 참되게 대하는 마음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잇는 권위와 탁월성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첫 번째로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정직한 사람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타인을 향한 모든 행위에 있어서 반듯하고 진실 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타인을 대하여 한 가지 일에서만 반듯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서나 한결같고 한 행위와 다른 행위 사이에 기울어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직한 마음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즐거워할 수 있는 어떤 한 가지 행위에 있어서만 바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항상 바르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든지 항상 한결같은 자세로 임 하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쉬운 일을 맡기시든지 어려운 일을 맡기시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기울어짐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 일을 맡게 할지라도 이런 사람은 자신의 원칙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은 은혜로운 원칙을 얻어서 이에 따라 행동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온 세상이 다 덤벼들어도 이런 사람이 가진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원칙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이 정직한 사람인가 하면 정직한 일을 사람들 앞에 제시하는 사람, 타인과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와 같이 자신의 모든 일 또한 바르게 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정직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을 향한 사람의 행위가 그가 다루는 말씀과 일치하게 될 때,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탁월함과 그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이 말씀을 향하여 그에 부합하는 행위를 나타낼 때 이것이 바로 정직한 마음입니다.

정리하자면 이 두 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한 가지 일에서와 다른 일 사이에 기울어짐이 없이 동일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또한 영혼의 행위가 말씀 속에 있는 탁월함에 부합하게 될 때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이 말씀을 결코 오용하지 아니라고 말씀 속에 있는 흡인력과 거룩함 그리고 그 무게에 따라 정직하게 행하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정직한 마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선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값지게 간직하라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열 번째의 길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값지게 간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그를 향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의 탁월함을 입증한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말씀을 들음에 있어서 우리 영혼의 행위가 그 말씀의 탁월성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어야 하겠고 또한 내가 그 말씀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두는지를 보여주는 행동적 선언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매우 값진 어떤 것을 받았는데 그것을 소홀히 하고 아무나 와서 그것을 가져가도록 내버려둔다면 나는 내가 받은 그것의 탁월성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내가 그것을 잘 간수 하고 자물쇠를 채워서 단단히 보관한다면 이는 내가 그만큼 그 탁월성을 높이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말씀을 듣고 진리를 접하게 될 때 나의 마음속에서 듣는 순간 ‘아 내가 이 진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서 잘 간직해야 하겠구나. 이것이 나에게 소중한 것이니 만큼 이를 귀하게 여기고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린다 해도 이것만은 잊지 않고 잘 간직해서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지“하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42:23에서 성령께서는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현재만을 위해 들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마음이 현재사와 관련하여 감동되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항상 이와 같은 마음의 감동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설교를 듣는 중에 “아,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 속에라도 물속에라도 들어가리라”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현재를 위해서만 아니라 장래를 위해서도 들어야 합니다. 시119:11에서 선지자 다윗은 말씀을 그의 마음속에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이 그에게 그토록 달았던 것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주의 날에 진리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오는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여러 분의 마음속에 두고 한 주 내내 그것을 잘 지키면 여러분이 만나게 되는 많은 유혹들을 이길 수 있도록 그 말씀이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주중에 여러분이 회사에 나가게 될 때 거기에서 여러분을 지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나는 어쩔 수 없는 악한 존재야. 유혹을 만나니, 그 유혹이 나를 삼켜버리고 말았어’하고 불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의 날에 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있다면 사정이 다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이 당하는 유혹의 힘을 막아줄 것이고 유혹이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말씀을 그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고자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나로 하여금 내 기질 상 빠지기 쉬운 이런 저런 죄를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내가 그와 같은 죄의 유혹을 받게 될 때 오늘 듣는 이 말씀을 잘 활용하도록 해야겠구나”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정욕을 대항케 하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말씀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가 정욕의 유혹이 일어나는 때에 그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 여러분이 감각적인 것과 피조물의 오용을 경계하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실제로 그런 유혹이 일어날 때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말씀으로 이를 대항하여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 다스리는 자에 대하여 직무를 성실히 행하라는 말씀 등을 여러분의 마음에 담아두어서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여야 합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할 구절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가 너무 약해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기에 그 방도가 있습니다. 말씀을 여러분 속에 간직함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잠2:1도 동일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계명을 잘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요일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청년들에게 쓴다고 하였습니다. 청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강함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속에 거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매우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기억력이 맑습니다. 여러분이 기억력을 잘 활용하고자 한다면 어떤 다른 곳에서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그들의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멋진 것은 없습니다. 젊은이들을 보시면 그들은 말씀을 듣고서 한 주간이 아니라 한 달이 흐른 뒤에도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이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만일 나이 드신 분들이 그들에게 들어본다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속에 말씀이 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청년들의 가슴 속에 말씀이 거함으로 이로써 악한 자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크나큰 영예입니다. 반면에 또 다른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 친구들에 이끌리어 말씀을 들으러 왔다가 아침 한 나절 그 속에 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지 못함으로 주중의 삶 가운데서 악한 자가 유혹들을 가지고 나아올 때 여기에 넘어가고 마는 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오직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자들만이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요8:31은 우리가 들은 말씀을 잘 간직하는 일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 만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지속적으로)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라고 하였습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너희가 내 말에 (지속적으로)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직 그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믿었단느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일반적 인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참 메시야 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온전치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속적으로)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들으러 나오는 것으로 또 그 말이 너희 속에 나의 말에 지속적으로 거하여야 하며 그러할 때 너희는 나의 제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에 지속적으로 거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잘 고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약간의 마음의 감동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런 것이 조금 있다고 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딛1:9에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혹은 가르침 받은 대로의 미쁜 말씀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힘써 노력해야 할 일은 실실된 말씀을 굳게 붙드는 일입니다. 빼앗기지 않도록 말씀을 굳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은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라
마지막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사항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자 한다면 그 말씀을 실행에 옮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으 이름이 모욕을 받게 되든지 아니면 실행치 아니하는 그 사람을 인하여 말씀이 헛되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약1:25이 잘 말해줍니다.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1:22에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에 ‘자신을 속인다’라고 번역된 말은 논리학자들로부터 취하여 온 말로서 그릇된 추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이런 방식으로 추론을 합니다. “교회에 오는 자는 분명 종교적인 사람이다. 나는 설교를 들으러 나오니까 그러므로 나는 종교적이다.” 이런 식의 추론은 그릇된 것이며 단지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면 말씀을 듣는 자로 머물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롬2:3에서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네가 듣는 바를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네가 듣는 바를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의 삶은 여전히 악한 상태에 있다. 이는 너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령님께서 빌2:16에서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를(즉 드러내기를)’ 요구하고 계심을 봅니다.

어느 한 교회가 말씀을 듣는 일에 부지런하여서 아침 일찍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며 한 주간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일에 힘쓰는 교회가 있다면 이는 참으로 흠모할만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인으로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 주인이 악하고 그 집안사람들이 악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들이 여러분이 들은 설교를 되풀이할 기회를 주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행실과 실천 가운데서 그 설교를 드러나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씀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이 비추이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상의 열 한 가지의 각론들을 종합해 주는 좋은 표현을 우리는 행13:48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칭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사한 표현을 살후3:1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해 주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화롭게 하는 일,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형제들이여 이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명예나 수치를 끼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부터 어떠한 유익이라고 여러분이 받기를 원하신다면 또는 큰 위로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이 권고를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씀과 또 그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부끄러움이 더하는 자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상의 것들을 잘 정리하고 마음을 새겨서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를 듣고도 이 모양이냐?’는 비난을 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이런 비난의 말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 의해 그 명에가 훼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죽어서 땅에 묻히어 썩게 될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로 하여금 말씀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라. 말씀은 나의 영혼에 큰 유익을 주었다. 이 말씀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내가 듣기를 원하는 것인데 내가 어찌 이 말씀을 욕되게 할 수 있을까! 이 말씀이 나 때문에 비방 당하는 일이 있어서 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명예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말씀의 명에를 반드시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주는 그 어떤 유익이라도 여러분이 누리고 있다면 이제 이와 같은 결심을 마음에 세기고 이곳을 떠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나는 사는 모든 날 동안에 내가 그토록 큰 유익을 얻게 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며 살리라” 이것이 이 아침에 여러분 각자가 가지는 결심이라면 이 아침의 사역도 참 복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이제 나의 사는 모든 날 동안에 내가 그토록 큰 유익을 얻게 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