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7:8~24
그릿 시냇가에서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잇던 엘리야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시냇물이 마른 것입니다. 물이 마른 이유는 자신이 한 말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17:1)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이 자기 삶을 제한합니다. 자기 말이 자기 삶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희대의 사기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복음의 영향력이 미미해지고, 교회가 주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말로 자기 삶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신학 지식을 습득한 교수들의 직업을 보장하는 학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아탑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강의와 발표하는 연구 자료는 직장을 보장하고 이름을 내는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예언서를 전공하여 교수 자리를 꿰찬 분들로부터 오늘 이 시대의 현실과 예언서의 상황을 연결하여 불의한 사회와 부패한 교회를 향하여 날카로운 예언자의 메시지를 듣고 싶습니다.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엘리야의 본문을 멋지게 풀어내고 호소력있게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맥이 빠지는 이유는 연구와 메시지와 삶이 따로따로이기 때문입니다. 신학만 그런 게 아닙니다. 경제학은 경제학 지식을 가진 교수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시대정신을 지배 이데올로기화하여 인간답게 살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합니다.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열심히 살아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리 사회에 불의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자기 학문과 자신의 메시지가 자기 삶을 제한할 때 세상에는 비로소 희망의 틈이 생깁니다. 목사와 신학자가 이에 이르지 못하면 사기꾼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과부의 공궤를 받을 것을 귀띔하셨습니다. 마침 엘리야가 사르밧에 이르렀을 때에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물을 한 그릇 얻어 마시며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17:11) 청했습니다. 여인은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마지막 음식을 해서 자신과 아들이 먹고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여인에게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17:13). 모질다는 생각도 들고 무정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저는 엘리야의 본심이 ‘과부와 그의 아들은 죽어도 좋고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성경의 교훈은, 기근이 아무리 심하여도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때 가능한 세상입니다.
세상은 혼자만 잘사는 길이 있고 모두가 공평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인생관은 ‘승자독식’입니다. 승자가 모든 권리를 독차지하고 누리는 구조여서 2등과 3등의 의미는 사라지고 등외자와 낙오자에게는 가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1등이 따로 없습니다. 1등은 지옥에나 존재합니다. 그러니 1등을 목표로 살 게 아니라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추구해야 합니다.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 5:42)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인생관입니다.
하나님, 저 역시 부끄럽게도 말이 삶을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자가 이런 소리를 하여 민망하고 송구합니다. 그래서 다시 옷깃을 여밉니다. 어려운 시대, 희망없는 세상이지만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2023. 10. 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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