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예수 그리스도 (마 5:17~20)
율법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율법을 히브리어로 “토라(תּוֹרָה)” 라고 합니다. 어근 야라(ירה)의 파생명사로, 기본적으로 '가르침'과 '교훈'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토라의 뜻은 '인도'(guidance), '교훈' (instruction), '명령' 혹은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오경(모세五經, תּוֹרַת־מֹשֶׁה) 창, 출, 레, 민, 신명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의 헬라어로는 '노모스'(νομος)인데, 일반적으로 구약의 모세 5경을 가리킨다.
그러나 율법과 율법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의미하고,
'율법주의'는 인간이 자기들의 원하는 방향에서만 율법을 해석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성향을 말한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애게 주어졌고,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간에 이루어진 《언약 관계》와 순종해야 할 삶이 기록되어 있다.
율법 준수
율법을 수여받은 이스라엘 백성(유대인)은 B.C 200년경 그들이 율법을 어겨서 이렇게 나라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다고 믿고 율법준수를 매우 중요한 삶의 근간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주객이 전도(轉倒)됨
율법준수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율법준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자랑거리나 존경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준수가 점차 자랑이고, 존경받을 일이 되어 '율법주의'가 되었다.
당연한 일을 하고도 칭찬과 존경을 받는 일이 생기면서 그들 스스로 '우월감, 존재감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초창기 시작할 때에는 그 정신이 올바른 것이었다.
하시딤과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그렇지 않은 자들 곧 일반 백성들로부터 랍비(선생)라는 칭호로 존경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흘러 변질되고, 왜곡되고, 겉치레만 하는 "종교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졌고,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이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 의식하며 향동하는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이에 예수님은《몇 가지 이유》로 율법주의를 통렬히 비난했다.
① 서기관들의 율법 남용
- 시행세칙들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이 됨
② 율법준수를 하나님께 인정받는 수단으로 삼음
- 은근히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즐김
③ 율법의 바리새적 형식화
- 외적 행위에 치중함
주님은 그들의 율법 오용에 대해 비난만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바른 사용법을 가르쳐 주셨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들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던 전통적인 율법을 정면으로 반박하셨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적개심과 분노를 표출하며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율법을 바로 세움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오용하고 왜곡시킨 것으로 《율법파기》가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바로 세움》(온전케 함 : 계명대로 가르치며 행해야 함을 강조)이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7, 개역한글)
“Μὴ νομίσητε ὅτι ἦλθον καταλῦσαι 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 οὐκ ἦλθον καταλῦσαι ἀλλὰ πληρῶσαι·” (마 5:17)
“Don’t think that I ca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didn’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l.” (마 5:17)
첫째: 예수님께서 세상에 온 목적(17~18절)
1)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17절)
17절, 원문은 '엘돈'(ἦλθον, I came 내가 왔다)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강조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가 오신 목적이《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완전케'는 '완전하게 함'을 의미한다.
구약의 율법은 '미완성' 상태로 주어졌다.
예) '안식일'을 주심으로 유대인들은 육체의 안식을 누렸지만, 하나니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기다림
그 참된 안식을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심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의 행위들이 유대인들의 눈에는 《율법 파기》하려는 행동로 보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일,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다가 손을 비벼서 먹는 행위 등이다.
'완전케 하려'라는 말은 "충만하게 하다"는 뜻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안식일'은 "쉼의 날"이다.
그러나 병자에게는 안식에도 여전히 고통받는 날이다. 병자에게는 진정한 안식일 없다. 오직 병을 고침 받아야만 '진정한 안식'인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안식을 이루셨다.
예수는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라고하셨던 말씀의 의미이다. 이는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2) 율법을 이루게 하기 위해(18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두 번째 목적은 율법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이다.
종말이 오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일점'은 히브리어 글자 중 가장 작은 한 점을 가리키며, '일획'은'署'이라는 뜻인데, 글자 끝의 뿔이나 획이 굽음으로 전혀 다른 단어가 된다.
성경에 약속한 안식은 인간이《안식일》을 지킨다고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도 주님이 그들의 마음에 평강과 위로와 쉼과 안식을 주셔야만 진정한 안식을 얻는다.
특히 죄 용서가 그렇다. 죄용서 없는 안식일과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죄용서의 기쁨》이 진정한 안식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안식인데, 그 안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뿐이다.
안식은 오직 예수 안에 있다.
예수님이 오셔야 안식이 성취되고 예수 안에 거하여야 안식을 누린다.
이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이다.
예수님은 안식(율법이 가르쳤던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을 완성하러 오셨다.
둘째: 천국에 들어갈 자(19~20절)
1)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함(19절)
서기관( '소페림')은 '성경 필사자, 율법에 능통한 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중에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바리새인과 관련이 깊었다. 서기관이 되려면 5세부터 "율법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13세가 되면 마치게 된다.
이어서 랍비에게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요청하고 스승은 테스트 후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고 '배움 학교'라 불리는 고등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랍비 수련을 거쳐 합격하면 30세가 되면서부터는 율법을 가르칠 자격이 주어진다. 일명 율법사(마 22:35), 랍비(선생, 요 3:10) 등으로 불렸고 공회 회원도 되었다(마 14:43). 신약시대에 바리새인은 대략 6,000여 명이나 되었다.
바리사이파의 기원은 주전 2세기 마카비 독립운동 때 헬라화 정책에 반대하여 율법에 충성하려는 '하시딤('경건한 자'라는 뜻, hasidim)에서 유래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를 뜻한다.
신약성경에서 외형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은 그들의 눈에는 율법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으로 비춰졌다.
당시 율법과 율법 해석서인 미드라쉬, 그리고 소위 "장로들의 유전(율법을 해석한 미드라쉬 외에 유전들 - 율법과는 별도의 시행세칙과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예수께서 따르지 않은 것은 장로들의 유전(각자 랍비들이 해석해 놓은 시행세칙들)이었다.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은 철저히 지키셨다.
2) 그리스도인의 의(20절)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애를 썼다.
바울은 《의로워지는 길》에 대해 롬 3 : 21~31 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1절,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24절,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됨.
27절,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28절,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31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
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마태복음 23:33)
라고 크게 꾸짖으셨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도 《율법주의》를 굉장히 싫어하셨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외식》이다.
하나님보다 칭찬에 목마른 사람들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저주하신 이유는
그들의 외식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23장).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1-39절에서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7번이나 부르셨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들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3:3a)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3:3 b)
왜냐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는 외식하는 자였기 때문이었다(마태복음 23:3b).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높임을 받는 것을 너무 좋아하였다(마태복음 23:5-7).
그들은 모든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23:5)
《경문(Phylacteries) : 성경구절이 기록된 문구》이라 하여 기도하는 시간에 유대인들이 머리나 팔에 차는 것으로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명기 6:4)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바리새인들은 이 것을 일부로 《크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게 하여 자신이 경건한 자로 보이고, 또 인정받고자 하였다.
또한 기도할 때 쓰는 옷술(늘어뜨리는 장신구)을 일부러 크게 늘어뜨렸고, 잔치에 가면 높은 자리를 찾아 앉기를 좋아하였고, 또 사람들이 자신들을 "랍비(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날 신자들이 외식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주의를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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