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요엘2:18-27(권호만 목사)
요엘서의 연대를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이라고 하기도 하고 반대로 포로기 이후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견해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이 예언의 말씀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메뚜기 떼의 내습이었습니다.
1장 4절에 보면,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메뚜기의 종류를 말하는데 메뚜기 떼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내습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뚜기 떼의 내습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가장 큰 재난이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 떼의 폐해를 영화나 방송에서 간접적으로만 경험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전의 어릴 때의 경험에 의하면 메뚜기는 좋은 간식거리요 반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역이나 아프리카 지역의 메뚜기는 엄청난 자연재해입니다.
메뚜기 떼가 지나가면 그곳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장 7절에 보면,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1:7)
메뚜기 떼가 먹고 긁어서 모든 나무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었고 심지어는 성전에서 드리는 소제와
전제까지도 드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1:9)
이스라엘은 파멸 직전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엘 선지자는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2장 12절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금식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은 이 재앙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으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받아들입니다.
크고 작은 일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나라의 비극이었던 6.25사변도 정치군사적으로 보면,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은밀하게 준비하여 기습적으로 남침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으로 봅니다.
한국교회는 1938년 9월 10일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그 여파로 해방 후에는 참여한 자와 아닌 자가 나누어지고,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나누어지면서 끊임없이 분열을 계속합니다.
6.25 두 달 전에 개최된 장로교 총회는 경찰이 투입될 정도로 난장판이었고
그 여파는 전쟁 중에도 계속되어 1951년에는 고려파가 1953년에는 기독교장로회가 분열됩니다.
6.25민족사변의 아픔에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잘못이 있었고 이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요엘 선지자도 엄청난 메뚜기 재앙을 그냥 자연재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으로 알고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외치게 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13절)
그 회개는 옷을 찢는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철저한 회개가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신앙 안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고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문제 앞에서든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서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없는 지 생각하고 회개할 부분을 회개할 때
문제도 해결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의 재앙 앞에서 희망을 선포합니다.
본문을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21절)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23절)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엄청난 참상에 빠져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절대 기뻐하고 즐거워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도 짐승도 굶어죽을 지경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곡식이 없어서 소제나 번제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그 상황을 몰라서 그렇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이며 성도들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고 말씀합니다.
다른 것이 없을지라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그 전부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시험에 들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밥 먹여 주냐? 하나님이 취직시켜 주냐?
하나님이 병 고쳐 주냐? 이렇게 생각하고 반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고 방패이시고 산성이 되십니다.
우리교회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만,
추수감사의 유래는 영국의 청교도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영국의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인 미국을 향해 죽음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가는 동안 반수가 죽게 되고 천신만고 끝에 신대륙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11월 20일 늦가을입니다.
가지고 간 음식이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어서 또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성전을 먼저 짓고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고 하나님이 우선이었고 하나님이 중심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가난과 기아를 바라보면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없어져버린 곡식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 때문에 감사하면 그 감사는 오래갈 수 없고, 계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면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희생을 알고 그 이름을 힘입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요엘 선지자가 바라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먼저, 자기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8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9)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번 메뚜기 떼의 재앙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이 이 땅을 진정 사랑하시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이 땅을 극진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너희를, 이 땅을 극진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이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때리면서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징계를 하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 심판을 하시면서도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나 확신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은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21절에 보면,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일을 행하셨도다.’ 하나님은 당신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를 위해서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큰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은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다시 회복시키시는 큰일을 행하십니다.
메뚜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과일을 맛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 도다.”했습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난 간 자리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다시 무슨 풀이 나며 다시 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황폐한 땅을 회복시키므로 이스라엘에게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면 안 될 일이 없는 줄 믿습니다.
아무리 연약한 몸을 가진 자라도 건강하게 회복될 줄 믿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풍성한 것으로 회복될 줄 믿습니다.
약한 자를 강한 자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탕자를 아들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살 길도 오직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셔야 경제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다시 회복시키시는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회복하려고 하면 더 큰 절망을 느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상황을 회복시키실 수 있음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7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있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온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 걱정되며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지금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사랑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면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지 않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밀레가 그린 명화가운데 만종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부부가 해가 질 저녁에 일을 하다가 기도를 하는 그림인데요,
노동의 신성함, 가정의 신성함, 신앙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이 그림에 대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부부 사이에 있는 바구니는 원래 감자를 담은 바구니가 아니고 죽은 아들의 관으로 사용됐던 바구니였다고 합니다.
부부가 드리는 기도는 너무 가난해서 먹지 못하여 죽은 아들을 묻기 위해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그림을 보고 아이의 시신은 너무 끔찍하니 ‘아이 대신 감자를 담아라’고 해서 그림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아들이 죽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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